사순절 5주_하느님 나라의 씨앗
마태복음 13:3-9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6. 해가 뜨자 타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랐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9.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우주의 나이는 137억년, 지구의 나이는 46억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초기의 지구는 시뻘건 불덩이였습니다. 그러던 지구가 점차 식어가며 핵, 맨틀, 지각으로 나뉘고 그 과정에서 해양이나 대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지구상에 생명이 최초로 출현한 것은 약 30억 년 전쯤이라고 합니다. 생명이 출현한 뒤부터의 지구의 역사는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로 나뉘고, 각 지질 시대는 더욱 세분화된 연대로 구분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를 신생대 제4기 홀로세라고 부릅니다. 홀로세(Holocene)는 마지막 빙하기기 끝나는 약 1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지질 시대를 말합니다. 충적세(沖積世) 또는 현세(現世)라고도 부르는 지질 시대의 마지막 시대인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가 살고있는 근대를 따로 구분하여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고 부르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일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인류에 의해 엄청난 변화가 일고 있기 때문이죠. 인류세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에 의한 지구 환경의 변화입니다. 인간에 의해 지구 온난화와 생물의 멸종위기가 도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세라는 개념은 2001년 네덜란드 화학자 파울 크루첸에 의해 제안되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화석연료를 대규모로 사용하면서 지구 환경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지질시대에서는 생명체 화석이나 도구 등이 출토되지만 인류세를 대표하는 물질들은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류세’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이런 것들입니다. 대기권 핵실험으로 나온 플루토늄239 원소는 1951년부터 전 세계 지층과 얼음층에서 쌓이고 있습니다, 콘크리트, 플라스틱, 알루미늄, 유리 등도 현세의 지층에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는 한 해 600억 마리가 소비되는 닭고기의 뼈도 출토될 것으로 봅니다.
지구상에 지금까지 다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 멸종 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지구상의 생물 75%~96%가 멸종했습니다. 그동안 대멸종은 빙하기 도래, 대규모 지각 변동과 화산 폭발, 운석 충돌 등 지역 환경의 급격한 변화나 자연재해 등에 의한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가오고 있는 여섯 번째 대멸종은 이전 다섯 번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 생길 거라 전망합니다. 바로 인간의 탐욕에 의해서라는 것이죠.
인간은 안정적 식량 확보를 위해 꾸준히 밀, 쌀, 옥수수를 중심으로 종자개량을 진행했습니다. 동시에 화학비료와 농약, 농기계 사용 등 새로운 농법도 개발하였습니다. 소위 녹색혁명이라고 불리는 변화입니다. 녹색혁명은 광대한 농장에서의 단작농사를 가능하게 만들어 인류를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인류는 폭발적인 속도로 증가하였고 기후 온난화 등 지구 환경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작물 재배에도 큰 변화가 왔습니다. 인간에 의한 선택적 재배가 그것입니다. 현재 전 세계 음식의 60%가 몇 종류의 밀, 쌀, 옥수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식량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생물 다양성을 포기합니다. 대규모 단작을 통한 소품종 다량생산 방식으로의 전환이 그것입니다.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이 많은 종자만 집중적으로 재배하면서 인간에 의한 선택적 멸종이 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는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1천여 종의 벼 품종이 재배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재배하는 품종은 추청(아끼바레), 신동진, 삼광, 오대, 동진, 남평벼 등 20여 종 이내로 줄어들었습니다.
벼뿐 아니라 다른 작물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토종작물은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거의 80% 가까이 소멸되었다고 합니다. 상업이 농사의 주목적이 되면서 벌어진 현상입니다. 이는 인간의 선택에 의한 멸종입니다. 작물의 지속가능성은 잡초와 달리 철저히 인간에게 달려있습니다. 인간이 작물을 재배하지 않으면 그 작물은 멸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지 않아서 작물이 멸종할 수도 있지만 다른 이유로 멸종이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작물은 대부분 현대 농업 혁명과 종자 개량의 산물입니다. 수확량이 좋고 병충해에 강해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작물만 심다 보니 전 세계의 작물이 유전적으로 균일해지는 현상이 빚어집니다. 이런 특성은 특정 작물이 병충해로 한꺼번에 몰살당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바나나가 대표적인 사례이죠. 바나나는 달콤한 과육을 늘리고 씨를 없앤 개량종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번식할 수 없어 인간이 곁순을 떼어 심어서 번식을 시킵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바나나는 질병에 대단히 취약한 작물이 되었습니다. 이미 농약도 듣지 않는 곰팡이병에 걸린 바나나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 병이 크게 돌면 자칫 더이상 바나나를 볼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작물의 멸종 문제는 이미 심각한 지경에 달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매년 2,700여종이 멸종되고 있어 2030년이면 현재의 생물종 중 25%가 소멸할 것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대부분 나라에서는 종자은행을 만들어 재배되지 않는 작물의 씨앗을 보호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도적 같이 닥쳐올지 모를 지구 종말의 날을 대비한 '현대판 노아의 방주'도 있습니다. 비상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최후의 날 저장고(doomsday vault)'라고 불리는 국제종자은행입니다. 북극에서 800km 떨어진 노르웨이 제도에 있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Svalbard Global Seed Vault)'가 바로 그것입니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세계곡물다양성보존조직(The Crop Trust)이 2008년에 만든 것으로 ‘자연재해나 인간에 의해 발생한 재앙에 대비하기 위한 곳’입니다. 세계 중요 작물 종자 3분의 1이 이곳에 보관돼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 1,750여개 종 86만여 씨앗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토종종자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도시농업과 여성농민들을 중심으로 토종종자 발굴과 재배를 통한 보전과 확산 노력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토종이란 우리나라 자연생태계에서 대대로 살아왔거나 외부에서 들어왔더라도 꾸준히 재배되어 우리 기후나 풍토에 적응된 동, 식물을 의미합니다. 작물의 경우는 적어도 7대 정도는 지나야 토종으로 분류합니다. 토종작물은 종자회사에서 파는 대물림되지 않는 씨앗에 비해 우수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 우리나라 기후, 풍토, 주변 환경에 잘 적응하기 때문에 병충해에 강합니다. 유전자 변형이나 조작이 없어 안전합니다. 자가 채종하기 때문에 씨앗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됩니다. 작물 고유의 맛을 가진 제철 음식의 재료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소중한 먹거리를 거대 종자회사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이유가 큽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의 비유 중에서 너무나도 잘 알려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본문으로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호수 가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어떤 씨는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습니다. 어떤 씨는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져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곧 말라버렸습니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혀버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 비유는 흔히 마음 밭의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씨를 받아드리는 사람의 입장에서의 해석입니다. 4가지 형태의 마음 밭에 떨어진 씨앗들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비유라는 것이죠. 마음 밭이 길가나 돌밭, 가시덤불이면 안 되고 옥토여야 많은 결실은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를 그렇게만 읽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사를 지어 본 사람이라는 이런 해석에 당연히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멍청한 사람이 씨를 함부로 아무데나 뿌리나?’ 이해가 안 되는 상황입니다.
예로부터 농부는 씨를 목숨처럼 귀하게 여겨왔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농부는 다음에 뿌릴 씨앗을 먹어 치우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를 두고 다산 정약용선생은 자신이 엮은 속담집 <이담속찬>에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고 썼습니다.
이렇게도 중요한 씨인데 그 한 알 한 알을 정성들여 좋은 땅을 골라 심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길가나 돌밭 가시덤불에 씨를 제 손으로 던져 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이 뭘 잘 못 알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마태는 13-23절에서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곧 받아드리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고 마는 사람입니다 ▲가시덤불은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해석을 잘 살펴보면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함부로 아무데나 뿌릴 것이 아니라 옥토를 골라 뿌려야 한다는 요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길이나 돌밭,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은 씨앗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의 씨앗인 복음도 아무데나 뿌려져서는 안 됩니다. 하늘나라의 비밀이 길이나 돌밭, 가시덤불 같은 사람에게 뿌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도 없고, 들을 귀도 없는 사람, 일방적으로 주어진 교리나 선입견으로 꽉 막힌 사람, 일상사에 정신이 나가 영적인 것에는 전혀 관심을 쏟을 수 없는 사람에게 주어져 봐야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뿌려진 씨앗이 생명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독초가 되어 멸망으로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한국의 기독교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대형교회 교인들이 지금 태극기나 성조기, 때로는 이스라엘기, 일장기를 들고 악마의 행진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뒤집어 보면 이 비유에서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처럼 실수하지 말고, 좋은 밭을 찾거나 만들어 귀중한 하늘나라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까요.
좋은 밭을 만들거나 찾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씨 뿌리는 자는 많은 수고를 각오해야 합니다. 생명의 세계를 전파하고 키우는 데는 그만한 수고가 필요한 것이죠. 그 옛날 민주화운동, 빈민운동, 노동운동 초기 때의 모습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의와 평등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씨를 뿌리던 모습 말입니다. 권력과 자본의 억압과 감시 가운데서도 역사의 새 주인으로 우뚝 서기 위해 함께 공부하고 동지들을 모아 나가던 때 말입니다.
씨가 자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한 알의 씨앗이 죽음, 즉 그 희생의 대가로 더 나은 세상이 전파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옥토에 씨앗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 씨앗이 잘 죽어야 많은 열매가 맺히는 법입니다. 씨앗은 이미 그 속에 자신을 희생해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할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을 이웃에게 나눠주는 것이죠. 그러니 세상을 이롭게 할 좋은 씨앗들은 그 안에 이미 하느님의 형상이 깃들어 있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실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먼저 천국의 씨앗으로 심으셨습니다. 천국을 전파할 더 많은 씨앗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려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의 씨앗으로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썩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되길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주님의 인도와 돌보심이 늘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2019. 4.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