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鏡虛 惺牛의 牧龍 家風과 尋劍 禪旨
- ‘법의 교화’[法化]와 ‘행의 교화’[行履]의 긴장과 탄력 -
I. 문제와 구상
II. 경허 성우의 行의 교화
1. 긍정과 부정의 世評
2. 법화와 행리의 倂進
III. 경허 성우의 法의 교화
1. 반조 자심과 화두 참구
2. 조료 전정과 이류 중행
IV. 정리와 맺음
1. 문제와 구상
한 인간의 생평은 그가 역사의 안팎에서 어떻게 살았고 철학의 앞뒤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가를 통해 온전히 조망할 수 있다. 그의 삶은 역사의 안팎을 넘나들며 이루어지고 그의 생각은 철학의 앞뒤를 오고가며 형성되기 때문이다. 해서 역사적 인간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역사의 안팎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만 탐구할 것이 아니라 그가 철학의 앞뒤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가를 함께 탐색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원심으로 나아가는 그의 살림살이와 구심으로 모여오는 사고방식을 삶이라는 하나의 원 속에서 온전히 일체화되기 때문이다. 선말 한초의 혼란기와 격변기를 살았던 대선사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6~1912)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원심으로 뻗어나간 살림살이와 구심으로 다가오는 사고방식을 함께 살펴야만 하는 것이다.
경허는 고려 중기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이 드날렸던 목우(牧牛)가풍과 달리 선말 한초에 목룡(牧龍)가풍을 드날렸다. 경허는 ‘사람 중의 사람’[人中之龍]을 길러내기 위해 자신의 목룡가풍을 활짝 드러내 보였다. 즉 하늘에 해가 하나 뿐이고 나라에 임금이 하나 뿐이듯 사람 중의 사람인 용상(龍象)대덕을 길러내고자 하였다. 동시에 그는 또 ‘지혜 중의 지혜’를 찾기 위해 심검(尋劍) 선지를 통해 활짝 드러내 보였다. 즉 사람을 죽이는 살인의 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활인의 칼을 벼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목룡장’(牧龍莊)에서 ‘삼승의 그물에 걸리는 크고 작은 고기가 아니라 구름 끝에 올라가서 단비를 내려 뭇생명을 이익되게 하는 신룡’이 되고자 했고, ‘심검당’에서 ‘망상이 만들어낸 부처와 조사를 죽이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세존의 염화와 가섭의 미소’를 얻으려 하였다.
경허는 「오도가」(悟道歌)에서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구나/ 의발을 누구에게 전해 받으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해 받으랴/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네”라고 하였다. “이 사고무인(四顧無人)은 사우(師友) 연원(淵源)이 이미 끊어져서 서로 인증(認證))하여 전해줄 곳이 없음을 탄식한 것이다.” 그리하여 경허는 의발 전수자의 부재를 탄식하며 그 고독을 사자후로 토해 내었다. 이후 그가 보여준 자유로운 살림살이와 사고방식에 대해 학자들은 깨친이의 분상(分上)에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세간인의 분상에서 보아야 할지에 대해 서로 의견이 분분하다. 한암은 「선사경허화상행장」에서 “뒤에 배우는 이들이 경허화상의 ‘법의 교화’[法化]를 배움은 옳으나 화상의 ‘행의 교화’[行履]를 배우면 안된다. 사람들이 믿어서 알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경허의 면모는 “좋을 때는 부처님보다 좋았으며[善過佛], 나쁠 때는 호랑이보다 나빴다[惡過虎]”는 극단적인 세평을 받았다.
전주 자동리(현 교동향교 인근)에서 태어난 경허는 9살에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성남의 청계사로 출가하였다. 그 뒤 그는 친형 태허(太虛)가 머무르는 서산 천장암에서 깨침을 얻고 자신을 ‘시험’하면서 보림에 매진하였다. 때문에 경허는 호서지역을 무대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살림살이와 사고방식을 만들어갔다. 그가 직접 쓴 서산 부석사의 편액 ‘목룡장’(牧龍場)과 ‘심검당’(尋劒堂) 편액은 그의 삶과 생각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저작이나 글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저작들은 편집과 번역 과정에서 가필되거나 삭제되어 연구자들 사이에도 적지 않은 혼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때문에 경허의 저작은 연방의 『법해보벌』(法海寶筏) 9편을 8편으로 재구성하고 해동의 선서 7편을 추가해 엮은 『선문촬요』(禪門撮要, 상하 2권)와 입적 이후 한암의 육필본 『경허집』(1931) 및 한암의 「선사경허화상행장」(1932)과 만해 편집의 선학원 활자본 『경허집』(1943) 그리고 진성(원담)이 엮은 『경허법어: 진흙소의 울음』 등을 비교하면서 살필 수밖에 없다. 선행연구들을 검토하고 경허의 삶과 생각을 살펴보기로 한다.
II. 경허 성우의 行의 교화
1. 긍정과 부정의 世評
경허의 살림살이와 사고방식을 아우르는 개념적 명명은 크게 제시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세평이 긍정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인간의 온전한 평가를 위해서는 공(功)과 과(過)를 균형적으로 기술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에는 시대적 상황과 역사성이 투영되어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우선 경허에 대한 포폄(褒貶)에 대해 검토해 보자.
일찍이 상현거사 이능화(1869~1943)가 그의 역작 『조선불교통사』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세인(世人)의 선류들(世之禪流)이 다투어 이를 본받아 심지어는 술을 마시고(飮酒) 고기를 먹음(食肉)이 깨달음에 구애받지 아니하고(不碍菩提) 도둑질을 하고(行盜) 음행을 함(行淫)이 반야에 방해받지 아니한다[無妨般若]고 외치고 이를 대승선(大乘禪)이라 하여 수행이 없는 잘못을 가리고 장식하여 모두가 진흙탕 속에 들어갔으니 대개 이러한 폐풍은 실로 경허로부터 시작되었다(實自鏡虛, 始作俑也). 총림에서는 이를 지목하여 ‘마설’(魔說)이라 한다”
상현의 ‘마설’ 규정 이후 용성 진종(龍城震鍾, 1864~1940) 역시 ‘음주식육(飮酒食肉)과 요노치(媱怒癡) 등을 거침없이 행하면서 무방반야(無妨般若)라고 말하는 부류를 ‘야호정령지배’(野狐精靈之輩)라고 하면서 경허류의 무애가풍을 두고 ‘승마’(僧魔) 또는 ‘외도마’(外道魔)라고 일갈했다.
… 또 마구니 말은 흔히 음욕(淫慾)도 상관없다, 술과 오신채도 상관없다, 음주식육(飮酒食肉)이 무방반야(無妨般若)이다 이런 소리를 함에 신도들은 참 가려 잡을 수 없다. 근일에는 각 법이 더욱 쇠퇴하여 마구니가 대단히 왕성하였소, 신도들은 참 알 수 없었소. 중의 마구니가 많습니다. 선지식이라 명칭을 얻은 가운데에는 외도 마구니가 많습니다. 또는 도인이라야 서로 알지라. 근일 신도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무단히 된 중이나 아니 된 중이나 자기의 친소를 따라 도인이니 선지식이니 하니 참 애석할 일이올시다. 여간 도에 눈이 밝어가지고도 도인을 알기 어렵거늘 어찌 눈이 밝지 못하고 남의 도를 알 것이요. 부디 신도들은 음주 식육 무방반야라는 중들이 비록 선지식일지라도 좇아 배우지는 마세요.
‘음욕도 상관없다’, ‘음주 식육이 반야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용성은 ‘중의 마구니’ 또는 ‘외도 마구니’라며 신도들은 좇아 배우지 말라고 역설하고 있다. 춘원 이광수도 경허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보여주었다.
옛날에 경허(鏡虛) 같은 중도 육체의 욕망을 떠날 수가 없어서 퍽 괴로워했다니까요. 어느 때는 길가에서 예쁜 색시를 보고 달려가서 입을 맞추었다나요. 그래서 그 제자가 여기에 질문하여 스님같이 도(道)가 높으신 이가 그것이 어쩐 일입니까 하고 말한즉 경허(鏡虛)의 말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생각한 것을 시행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냐고 했다는 말도 있고 또 어느 때는 어느 대사(大師)를 찾아가서 술을 가져오라 해서 술을 먹고 술을 먿은 후에 또 갈보를 데려오라고 했다드라고요. 그러니깐 그 술을 사다 대접한 대사가 술까지는 사다 대접했지만 갈보만은 하는 수 없었든 까닭에 역시 스님같이 도(道)가 높으신 이가 이래서 쓰겠습니까 질문한즉 경허(鏡虛)가 얼굴이 붉어지며 ‘돈정난동불(頓情難同佛) 다생습기심(多生習氣深)’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럴 것입니다. 사람의 육체를 쓰고 나서 마음으로 부처님 되기를 원하고 바라지만 오래가졌든 습생(習生)은 참 끊어 버리기가 어려운 것인 줄 알아요.
춘원은 경허가 ‘몰록 마음으로는 부처님과 같이 되기를 바라지만 다생의 습기가 깊어서’ 그렇게 되기가 어렵다고 했다고 전하면서 이 글에서 자신도 그의 얘기에 심정적으로 동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효봉 학눌(曉峰學訥, 1888~1968)은 경허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비구-대처의 대립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통영 용화사 동안거 해제법어에서 교단의 폐단이 음주 식육과 같은 막식과 행도 음행과 같은 막행의 가풍에서 비롯되었음을 환기하고 준엄하게 경계하고 있다.
슬프다. 말세에 범박하게 배우는 공부하는 일종의 무리가 다만 구두선(口頭禪)만 배우고 진실한 이해[實理解]는 전혀 없어서 몸을 움직여 유를 행하면서도[運身行有] 입을 열어선 공을 말한다[開口談空]. 스스로 업력(業力)에 이끌림[所牽]을 알지 못하고 다시 남에게는 인과(因果)과 없다[撥無]고 가르치면서, 도둑질[行盜]과 음행[行淫]이 보리(菩提)에 장애되지 않고, 술 마시고[飮酒] 고기 먹음[食肉]이 반야(般若)에 방해되지 않는다 하니 이와같은 무리들은 살아서는 부처님의 계율을 어기고[生乖佛戒] 죽어서는 아비지옥에 떨어질 것[死陷阿鼻]이다. 거기서 지옥이 업이 소멸된 뒤에는 다시 축생이나 아귀 세계에 떨어져 백천 만 겁[百千萬劫]에 나올 기약이 없을 것[無出頭期]이다. 그러므로 우리 대중은 한 찰나에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이치에 있어서는 일을 생각하고 일에 있어서는 이치를 밝혀, 다같이 큰 일을 마친 사람[了事人]이 되어 불조(佛祖)의 남기신 자취를 이어 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란다”
효봉은 대한시대(1897~ ) 이래 수행자들에게 어느 정도 정당화되어 있는 ‘음주 식육과 같은 막식’(莫食)과 ‘행도 음행과 같은 막행’(莫行)의 가풍을 환기시킴으로써 경허로부터 비롯된 가풍을 ‘살아서는 부처님의 계율을 어기고 죽어서는 아비지옥에 떨어질 것’[生乖佛戒, 死陷阿鼻]이며 ‘백천만겁이 되더라도 나올 기약이 없다’[百千萬劫, 無出頭期]고 통렬하게 경책하고 있다. 그리하여 효봉은 ‘범박하게 배우는 무리의 구두선’이 아니라 ‘진실한 이해에 기초한 화두선’이 필요하며 ‘업력의 이끌림’과 ‘인과의 지엄함’, 그리고 ‘지계의 엄정함’에 대해서 반어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김태흡(大隱, 1899~1989)은 경허의 실상에 대한 평전을 쓰기 위해 수년 동안 행적을 조사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 <<비판>>이란 잡지에 「인간 경허」라는 글을 여러 차례 분재하였다. 그중에서도 진진응(陳震應/慧燦, 1873~1941)과 천은사 대화에 나온 경허의 고백발언을 인용하면서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 “선법을 가르치면서도 주육(酒肉)을 기호(嗜好)하고, 색(色)에 대해서도 거침이 없어 아무데서든지 가리지 않고 행음(行淫)을 하여 악마(惡魔), 마종(魔種)이라고 불렸으며”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서[從心所欲]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無所不至)고 기술하고 있다. 이 때문에 당시 해인사와 범어사의 대중들이 경허를 제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면서도 “끝내 경허에게는 아무 탈이 없었고 승가로부터 벌을 받은 일이 없는 것에 대해 당시 승단 구성원들도 이상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불교 정화의 선봉장이었던 청담 순호(靑潭淳浩, 1972~1971) 역시 ‘행도 행음이 불애보리’요 ‘음주 식육이 무방반야’라는 구절은 상현 이능화 이래 경허의 가풍을 지적한 관형구이며, 이들 관형구들로 경허류의 무애행을 이은 이들을 총체적으로 지적하면서 이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막행막식은 바라밀이 아니다. 이런 걸 모르는 무식한 선지식은 음주식육(飮酒食肉) 무방반야(無妨般若)라고 막 놀아납니다. 그래 가지고 중생까지 버려 놓고 나중에 공부하는 중들 다 버리고, 그렇게 떠들던 분들이 해방이 돼서 이제 불교정화(佛敎淨化)가 됐지만 그렇게 우리 비구들 가운데에도 그런 분들이 수십 명이 있습니다. 무식하기는 해도 발언이 세고 주먹질 잘하고 그렇게 불량하게 사는데, 소견이 비뚤어져서 불법이 어디로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무식하니까 마구잡이로 그런 사람들을 그런 패대로 젊은 수좌들이 해제(解制)하여 다니다가 만나면 마구잡이로 가르칩니다. (……) 대처승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사오십 년 동안에 몇 번 씩 공적으로 사적으로 웃으면서 싸우고, 찡그리면서도 싸우고 한정없이 싸웠습니다. 이래 가지고 수좌들이 그만 마구잡이로 행동했음[行盜行淫]이 불애보리(不碍菩提)요, 도둑질하고 음행하는 게 보리에 무슨 거리낄 게 있으며, 음주식육(飮酒食肉) 무방반야(無妨般若), 술 먹고 고기 먹는 것이 반야세계에 무슨 장애가 될 게 있느냐, 반야바라밀이 그게 먼데 그게 어디가 걸리고 막히는 거냐, 이래 가지고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했는데 듣고 보면 그 말이 어려운 법담(法談)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정법에 턱도 안 닿는 말입니다.
상현의 ‘마설’과 용성의 ‘승마’, ‘외도마’라는 평가와 효봉의 ‘생괴불계 사함아비’라는 경계와 ‘백천만겁 무출두기’라는 경책 그리고 대은의 ‘악마’와 ‘마종’ 및 청담의 ‘막행막식’은 당시 불교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행도 행음과 음주 식육의 시원자 혹은 단초자가 경허이거나 경허류의 무애가풍임을 암시하고 있다. 반면 경허의 애제자 한암 중원(1876~1951)은 「선사경허화상행장」(先師鏡虛和尙行狀)을 쓰면서 경허의 가풍에 대한 해명과 객관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누가 능히 여기에서 대장부의 뜻을 갖추어 철저히 자성을 깨달아, 그 제일 가는 공덕을 성취하여, 큰 지혜 광명의 뜻으로 저 후 오백세 후까지 광대하게 유통하리오. 이것을 이은 이가 바로 나의 선사(先師) 경허화상이 그런 분이시다.
한암은 ‘『금강경』을 듣고 신심이 청정해져서 곧 실상(참된 지혜)을 내게 될 사람이 얻을 가장 희유한 공덕’과 대혜화상이 ‘만일 굳센 사람이 있어 깨달음을 얻어서 불법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며 ‘대개 용맹스런 뜻을 발하여 법의 근원에 사무친 이가 말법(末法)에도 없지 않을 것이므로 불조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고, ‘또한 그러한 사람이 드물어서 혜명이 보존되기 어렵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라며 경허를 ‘그 사람’으로 보고 그의 살림살이인 ‘행화’[行履]와 사고방식인 ‘법화’(法化)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오호라! 슬프도다. 대선지식이 세상에 출현하심은 실로 만겁에 만나기 어려운 일이거늘, 우리가 비록 잠시 친견을 하였으나 오래 모셔 배우지 못했고, 귀적(歸寂)하시던 날도 후사(後事)를 참결(參決)하지 못하였으니, 옛 도인[古道人]의 입멸 시(時)와 같이 한(恨)을 남겼도다.
만공(滿空) 사형의 부탁으로 행장을 쓰면서 한암은 “나는 본래 문사(文辭)에 익숙하지 못하나, 선사(先師)의 행장을 임의로 할 수 없는 고로, 그 사실만을 적어서 뒷사람에서 보이고자 하니, 하나는 말법 가운데 참된 선지식께서 출세하시어 법을 널리 펴신 크나큰 공덕을 찬탄함이요, 하나는 우리 중생이 망령되이 집착하여 밖으로 치달아 헛되이 시일을 보내서 부처님 교화를 손상하는 허물을 경책함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한암은 당시의 여러 평가들을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안목의 바름’[眼正]을 귀하게 여기고 ‘행해간 자취’[行履]를 귀하게 여기지 말라‘는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개 행장이란 그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고 허위(虛僞)로 기록하지 않는 것이다. 화상의 오도(悟道)와 교화인연은 실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만약 그 행리(行履)를 논할 것 같으면 장신 거구에 지기(志氣)는 과강(果强)하고, 음성은 종소리와 같아 무애변을 갖추었고, 팔풍(八風: 利, 衰, 毁, 譽, 稱, 譏, 苦, 樂과 같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여덟 가지 바람)을 대함에 산과 같이 부동(不動)해서 행할 만 할 때엔 행하고 그쳐야 할 때는 그쳐서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음식을 자유로이 하고 성색(聲色)에 구애받지 않아서 호호탕탕 유희하여 사람들의 의심과 비방을 초래하였으니, 이는 광대한 마음으로 불이문(不二門)을 증득했기 때문이다”면서 “후대의 학인들이 화상의 법화(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으나 화상의 행리(行履)를 배우는 것은 옳지 않으니 사람들이 믿어서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人信而不解也]”
한암은 후대의 학인들은 경허의 ‘법의 교화’[法化]는 배우되 ‘행의 교화’[行履]는 배우지 말 것을 역설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믿어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한암의 답변인 바로 이 구절에 대해 놓치고 있다. 한암은 ‘보통 사람들은 (경허의 법화와 행리의 엇갈림)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기술은 역사에 대한 준엄한 인식을 보여주었지만 그에게 행장을 부탁했던 사형 만공(滿空月面, 1871~1946)은 이 구절을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오랫동안 경허를 시봉했던 만공은 한암이 「행장」의 앞부분에서 경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쳤기 때문이다. 한암은 ‘의’(依)와 ‘불의’(不依) 및 ‘의법’(依法)과 ‘불의인’(不依人)의 축을 구분하여 활로를 제시함으로써 선사(先師) 경허에 대한 신뢰와 존경 및 의리와 신념을 지켜내고 있다.
또한 법을 의지한다[依法]는 것은 진정(眞正)의 묘법(妙法)을 의지한다는 것이요,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不依人]는 것은 율의(律儀)와 불율의(不律儀)를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또한 의지한다[依]는 것은 스승으로 모시고 받드는 것[師而效之]이요, 또한 의지하지 않는다[不依]는 것은 득실시비를 보지 않는 것[不見得失是非]이니, 도를 배우는 사람[學道之人]이 필경에는 법도 능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남의 득실시비이리요.
한암은 ‘의법’을 ‘진정의 묘법을 의지하는 것’으로 보았고, ‘불의인’을 지계(律儀, 持戒)와 범계(不律儀, 犯戒)의 극단을 의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또 ‘의지한다는 것’을 ‘스승으로 모시고 받드는 것’으로 보았고,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득실시비를 보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명하여 경허의 법의 교화와 행의 교화를 모두 살려내고 있다.
법을 간택하는 눈을 갖추지 못하고[不具擇法眼] 먼저 그 행리의 걸림없는 것만 본받는 자[先效行履無碍]를 꾸짖은 것이며, 또한 유위(有爲)의 상견(相見)에 집착하여 마음의 근원을 밝게 사무치지[洞徹心源] 못한 자를 꾸짖은 것이다. 만약 법을 간택할 수 있는 바른 눈을 갖추어서[具擇法眼] 마음의 근원을 밝게 사무치면[洞徹心源], 행리가 자연히 참되어서 (행주좌와의) 사위의(四威儀) 안에 항상 청정함을 실현하리니, 어찌 겉모습에 현혹되어 미워하고 사랑하며 남[人]이다 나[我]다 하는 견해를 일으키겠는가.
결국 한암은 ‘법안을 간택하는 눈’을 갖추어서 마음의 근원을 밝게 사무치면 행리가 자연히 참되어서 사위의 안에 항상 청정함을 실현하게 되므로 겉모습에 현혹되어 미워하고 사랑하며 남이다 나다는 견해를 일으키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
누가 능히 여기에서 대장부의 뜻을 갖추어 자성을 철저히 깨달아 그 제일가는 공덕을 성취하여 큰 지혜 광명의 의취로 저 오백 세 후까지 강대하게 유통하리오. 나의 선사(先師) 경허화상이 이런 분이시다”
한암은 자신의 선사인 경허를 ‘대장부의 뜻으로 갖추어 자성을 철저히 깨달아’ ‘제일가는 공덕을 성취하여 큰 지혜 광명의 의취로 저 오백 세 후까지 강대하게 유통시킬 인물임을 역설하고 있다.하리오’라고 반문하며 경허를 드높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행장」을 쓰는 한암의 시선은 스승에 대한 깊은 존경의 염(念)이 전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한암이 경허의 가풍과 행적에 대해 이와같이 기록한 것은 그의 투철한 역사 정신 때문이었다. 그는 행장을 기록하는 사가로서 경허의 진실을 기록함으로써[記其事] 후대인의 근기에 따라 이 선사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두기 위함[以示後人]이었다. 한암은 뚝섬의 봉은사를 떠나 오대산 상원사로 주석(1925)하면서 “천고에 말없는 학이 될지언정 삼세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의 「선사경허화상행장」은 이러한 결곡한 마음가짐을 가진 직후에 쓴 것으로 짐작된다.
만해 용운(萬海龍雲/奉玩, 1879~1944)은 만공으로부터 경허집의 교열과 서문을 부탁 받고 「약보」(略譜)에서 이렇게 적었다.
혹은 술집과 시정에서 읊조렷으되 저속하지 않으며, 비바람 눈보라 치는 텅 빈 산에서 붓을 잡아도 세간을 벗어난 것만도 아니어서 종횡으로 힘차고 생소하거나 숙달되었거나 걸림없이 문장마다 선(禪)이요 구절마다 법(法)이어서 그 법칙이 어떠한 것을 논할 것도 없이 실로 일대의 기이한 글이요 싯구이다.”
그는 ‘저속하지 않으며’ ‘세간을 벗어난 것만도 아니며’ 문장마다 선(禪)이요 구절마다 법(法)이어서 일대의 기이한 글이요 싯구‘라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경허를 오랫동안 모셨던 만공 월면(1871~1946)은 “좋을 때와 나쁠 때는 부처님과 호랑이보다 더한 이가 바로 경허선사”라고 했다. 퇴경 권상로(退耕權相老, 1879~1965)는 그의 한국선종약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현하 전국선원에서 주장자를 짚고 면벽하는 이들은 모두 그 문풍을 승습(承襲)할 뿐만 아니라 승니(僧尼)로 하여금 선(禪)의 면목을 알게 하고 일반으로 하여금 선법이 있는 줄 알게 된 것은 전혀 선사(禪師)의 힘이다. 선사에 대한 훼예(毁譽)가 양극단에 이르러서 ‘좋을 때[善時]는 부처님보다 더 착하고[善過於佛] 나쁠 때[惡時]는 호랑이보다 더 악하다[惡過於虎]’는 말을 적평(適評)이라고 하지만 현대의 우리나라 선학(禪學)을 말하는 데는 선사(禪師)를 중흥조로 존앙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경허에 대한 출가 선가의 평가에 이어 재가 학자들의 평가 역시 대체적으로 긍정적이다. 근래에 이루어진 경허 연구들에서 그를 ‘최근의 종교적 천재(天才)’ 혹은 ‘한국 불교 선지(禪旨)의 중흥조(中興祖)’), ‘한국의 달마’), ‘근대 한국 선불교의 한 희한한 고승’ 혹은 ‘한 투철한 마음, 최고의 진리(空性)의 저편 언덕(彼岸)을 찾아서 가는 한 가열(苛烈)한 정신의 절뚝거리는 편력’, ‘조선 근대의 거인(巨人)’, ‘현대 한국 참선(參禪)의 중흥조(中興祖)’이자 ‘근현대(現近代)의 우리 불교역사에 하나의 새로운 기원을 이룩한 장본인’, ‘한국 최근세선을 중흥시킨 대선장(大禪匠)’, ‘선종이 한창 흥왕하였던 당송(唐宋)시대 오종가풍(五宗家風)의 종장반열(宗匠班列)에 끼어도 오히려 웅휘(雄輝)하게 빛나실 거룩한 어른’, ‘우국(憂國)의 선승(禪僧)이며 한국선의 도화선에 불을 당기고 영원한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 ‘한국 근대선의 첫새벽’ 혹은 ‘한국 현대선의 아버지’, ‘출세간의 지평에서 입세간의 지평으로 복귀하는 한 역사적 인간의 새로운 탄생 과정’ 혹은 ‘거사 선생의 입세간적 삶의 실현’ 등 비교적 긍정적 시선을 얻어가고 있다. 일부 부정적 평가가 없지 않지만 최근에 이르러 긍정적 평가는 더욱더 강화되어 가고 있는 추세이다.
2. 법화와 행리의 倂進
한 인간의 생평에는 앎의 영역과 삶의 영역이 존재한다. 앎의 영역은 머리로 이루어지지만 삶의 영역은 온몸으로 이루어진다. 앎과 삶의 거리를 무화시킨 이가 성인이라면 이 둘 사이의 거리를 최소화시키려는 드높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보살은 범부와 부처 사이에 존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처의 위계에서 범부에게 가까이 내려온 존재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처의 위계로 나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그 길을 미룬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간인 보살은 붓다의 지혜와 덕행, 자비와 원력 등의 의인화이자 인격화이기도 하지만 고통 받는 중생에게는 실존하는 존재가 된다. 보살은 고통 받는 중생의 간절한 염원에 의해 문수와 보현, 관음과 지장 등으로 나타나지만 범부들 스스로가 보살의 화현을 확인하는 순간 고통이 사라지게 되면 보살의 역할은 끝나게 되고 보살 역시 사라지게 된다. 때문에 앎의 영역과 삶의 영역의 거리가 사라진 성인과 달리 ‘법화’와 ‘행화’의 영역의 거리가 엄존하는 범부의 경계에서는 앎의 영역과 삶의 영역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둘 사이의 간격을 최소화시키려는 노력을 통해 삶의 질적 제고를 도모할 수 있을 뿐이다.
법화와 행화의 마찰로 인한 경허에 대한 초기의 부정적 세평과 달리 근래에는 이 둘 사이의 윤활을 모색하는 시도들이 이루어짐으로써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확산되고 있다. 근래에 경허와 관련된 논문, 저술, 평전, 소설, 연극 등이 늘어나면서 우리 사회 전반에서 그에대한 평가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경허의 생평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한암의 갈파처럼 “화상의 ‘깨친 진리’[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지만, 화상의 ‘행한 자취’[行履]를 배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경계나 ‘안목의 바름[眼正]을 귀하게 여기고 펼쳐간 자취[行履]는 귀하게 여기지 말라’는 경책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이냐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경허 당대 뿐만 아니라 오늘 한국사회 속에서 경허가 보여준 ‘깨침’과 ‘자취’는 어떠한 의미가 있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로 귀결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경허의 선은 과연 무엇이고 어떠한 가풍 속에서 펼쳐진 것인지를 규명해냄으로써 경허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해 보기로 하자.
경허 평가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출가 승려임에도 불구하고 불투도와 불사음 및 불식육과 불음주의 계율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그가 자신의 글에서 후학들에게 투도와 사음, 식육과 음주를 경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투도와 음행, 식육과 음주가 보리와 반야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과연 경허는 이러한 가풍과 계율 혹은 청규의 충돌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것을 ‘대계를 위해서는 소소한 계는 버릴 수 있다’는 대승의 계율관에 근거한 살림살이로 보아야하는 것일까? 아니면 출가자는 모름지기 소소계라도 범해서는 아니된다는 소승의 계율관에 근거한 살림살이로 보아야 할까? 경허는 「범어사 계명암 수선사 방함 청규」(10조목)의 제9조목에서 붓다를 원용하면서 음주와 음행을 깊이 경계하고 있다.
술을 마시거나 음행하는 일은 부처님께서 경계하심이니, 마땅히 엄단하여 스스로 물러나게 할 것이며, 또 6일이 아니면 의복을 세탁하지 말라.
또 경허는 「중노릇 하는 법」에서 정신을 흐리게 하는 술을 먹지 말고, 정신이 산만해지고 애착이 되는 음행은 상관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술을 마시면 정신이 흐리니 먹지 말 것이요. 음행은 정신이 갈려 애착이 되니 상관 아니할 것이요. 살생은 마음에 진심을 도우니 행하지 아니할 것이요. 고기를 먹으면 정신이 흐리니 먹지 아니할 것이요. 파와 마늘은 내 마음에 음심과 진심을 돋우니 먹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머지 일체 것이 내게 해로운 것이니 간섭치 말지니라.
경허는 정신을 흐리게 하는 술과 고기를 먹지 말고, 음심과 진심을 돋우는 파와 마늘을 먹지 말며, 정신이 산만해지고 애착이 되는 음행은 상관하지 말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지 않은 시기 동안 막행막식을 하였다. 이 논리적 모순을 어떻게 돌파해야 하며, 이론적 괴리를 어떻게 메꾸어야 할까? 이것은 뒷날 경허 자신이 지눌의 『수심결』 한 구절을 인용하여 자신의 말년 기행을 ‘다생의 습기’ 때문이라고 한 것으로만 읽어야 할까? 아니면 ‘주체할 수 없이 높은 정신적 지평에 이른 한 고독한 이의 무애행’으로 읽어야 할까?
논자는 경허의 선사상을 그가 동학사 강사 시절 장자(莊子)를 천독(千讀)을 하면서 「추수」(秋水)편의 ‘예미(어)도중’(曳尾(於)塗中)에서 따와 그의 온전한 가풍을 ‘미도선(尾塗禪)’ 혹은 ‘예미선(曳尾禪)’의 관점에서 규명해 본 적이 있다. 그의 생평에는 이 기호가 의미하는 것처럼 노장사상 특히 장자의 영향이 짙게 보이기 때문이다.
탄허 택성(呑虛宅成, 1913~1983)은 경허평전을 처음으로 쓴 이흥우 시인에게 경허와 한암의 대화를 이렇게 전했다고 한다.
여보게 중원(重遠)이, 내가 중노릇하기가 싫어서 장자 천독(千讀)을 했네. 중노릇을 안 하면 선비들을 사귀어야 할 텐데, 선비들과 사귀려면 한문을 많이 알아야 한단 말야. 그래서 장자를 천 번 읽었어. 그러나 막상 중노릇을 그만두려고 하니 부처님의 말씀을 여일 수가 없네 그려.”
이처럼 경허는 언젠가 애제자 한암 중원에게 자신은 동학사 강사 시절에 선비들과 사귀기 위해, 그리고 한문을 많이 알기 위해 장자를 천독이나 했다고 술회하였다 한다. 그의 「법제자 한암에게 주며」에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거북이는 차라리 죽어서 뼈를 남긴 채 (점치는데) 소중하게 받들어져 쓰이기보다는 오히려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란다”는 ‘예미어도중’(曳尾於塗中)이란 말을 인용하며 “나는 천성이 인간 세상에 섞여 살기를 좋아하고 아울러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절룩거리며 마흔 네 해의 세월을 보냈는데 우연히 해인정사에서 중(원(重)遠)개사(開士)를 만나게 되었다”며 자기의 평생을 한 마디로 ‘예미도중’(曳尾塗中)’이라 표현했다.
그리하여 논자는 이러한 경허의 가풍을 ‘화광동진’(和光同塵), ‘피모대각’(被毛戴角), ‘이류중행’(異類中行)의 가풍으로 파악하고 그의 가풍을 한 마디로 ‘미도선’(尾塗禪) 혹은 ‘예미선’(曳尾禪)으로 규정하였다. 다시 말해서 경허의 가풍(家風)과 생평(生平)은 ‘털’을 입고 ‘뿔’을 이고 ‘꼬리’를 끄는 ‘머리’[角]와 ‘몸체’[毛]보다 더욱 더 낮은 곳에 드리워진 꼬리[尾]를 진흙 속에다 던지며 온몸으로 산 ‘진흙소’[泥牛] 혹은 ‘깨친 소’[惺牛]의 삶과 가풍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논자는 진흙 속에서 자신의 온몸을 받치고 서 있는 ‘뒷다리’ 내지 ‘꼬리’를 형용하는 ‘미도’(尾塗)’ 혹은 ‘예미’(曳尾)란 기호로 전신이 투영된 경허의 삶을 명명하였다.
그런데 경허의 ‘예미 가풍’ 또는 ‘미도의 가풍’은 그가 쓴 ‘목룡장’의 가풍과 ‘심검당’의 가풍과도 상통한다. 그는 ‘사람 중의 사람’[人中之龍]을 길러내기 위해 자신의 살림살이를 목룡가풍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용은 상상의 동물이기도 하지만 황제나 임금을 상징한다. 하늘에 해가 하나뿐이고 나라에 황제(임금)가 하나뿐이듯 ‘사람 중의 사람’은 붓다 혹은 붓다를 닮기 위해 성태(聖胎)를 장양(長養)하며 수행하는 용상(龍象) 대덕을 가리킨다. 사람 중의 사람은 자심을 닦고 자성을 발견하여 영원한 대자유인이 된 붓다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경허는 또 ‘지혜 중의 지혜’를 찾기 위해 심검(尋劍) 선지를 보여주고 있다. 칼에는 살인검이 있고 활인검이 있다. 경허는 평생동안 사람을 죽이는 살인의 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활인의 칼을 벼리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봉 원묘(高峰圓妙, 1239~1295)가 제시한 간화선의 삼요(三要)인 대신근(大信根)에 기초해서 대분지(大憤志)를 품은 채 대의정(大疑情)을 가지고 정진해야만 한다. 경허는 환속한 스승 계허(桂虛)를 찾아 찾아가던 중 한 마을에서 콜레라(호열랄)로 죽어가는 시신들을 목도하였다.
“지금 이곳에는 전염병이 크게 돌아 걸리기만 하면, 곧바로 죽거늘 그대는 어떤 사람이기에 죽을 곳[死地]으로 돌아왔는가!” 화상이 그 말을 듣자 모골이 송연하고 심신이 아찔하여, 마치 죽음이 당장 임박할 것 같아 목숨이 호흡하는 사이에 달려 있고, 일체세간의 일이 모두 꿈 밖의 청산처럼 느껴졌다. 이에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였다. “금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에 구속되지 않겠다.” 이렇게 말하고는 조사의 도[祖道]를 찾아 삼계(三界)를 벗어날 것을 발원하였다.
동학사로 돌아온 경허는 강원을 폐쇄하고 만일선원에서 문을 닫아 걸고 ‘삼승의 그물에 걸리는 크고 작은 고기가 아니라 구름 끝에 올라가서 단비를 내려 뭇생명을 이익되게 하는 신룡’이 되기 위해 뼈를 깎는 수행을 하였다.
경허의 이러한 발심은 ‘목룡장’(牧龍莊)의 편액이 보여주는 것처럼 ‘삼승의 그물에 걸리는 크고 작은 고기가 아니라 구름 끝에 올라가서 단비를 내려 뭇생명을 이익되게 하는 신령스런 청룡’이 되고자 한 것이었다. 동시에 ‘심검당’의 편액이 보여주는 것처럼 ‘망상이 만들어낸 부처와 조사를 죽이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세존의 염화와 가섭의 미소’를 얻으려 하였다.
고기가 용이 되어 뼈를 바꾸어도[如龍換骨] 그 비늘은 고치지 못하고[不改其鱗], 범부가 마음을 돌이켜 부처가 되어도[廻心作佛] 얼굴은 고칠 수 없다[不改其面]고 하였다. 밝지 못한 실제의 성품이 곧 불성(佛性)이요 허망한 텅 빈 몸이 곧 법신(法身)이다.
물고기가 용이 되어 뼈를 바꾸어도 그 비늘은 바꾸지 못하지만 한번 용으로 탈바꿈하면 다시 물고기로 돌아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범부가 마음을 돌이켜 부처가 되어도 얼굴은 고칠 수 없지만 한번 부처가 되면 범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니 무명의 실성이 곧 불성이고 환화의 공신이 법신임을 깨우쳐야 한다. 문제는 한번 용으로 탈바꿈하고, 한번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명(無明)의 실성(實性)이 곧 불성’이고 ‘환화(幻化)의 공신(空身)이 곧 법신’임을 사무치게 깨달아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즐겨 살았던 호서지역의 수행처였던 서산 부석사의 목룡장과 심검당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성성 적적하게 하는 공간이자 시간이었다.
그는 서산 천장암에서 오도를 하고 부석사에서 머무르면서 자신의 법화를 베풀고 행화를일구어 나갔다. 범부들이 볼 때에 ‘법의 교화’와 ‘행의 교화’ 사이에는 마찰과 윤활이 있었을 것이지만 경허에게는 윤활의 탄력이 더욱 더 발휘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그는 더 이상 부처의 분상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인 계에 붙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여실공의 체성’을 맛본 텅 빈 거울[鏡虛]이었고 ‘소소한 계’에 매이지 않는 ‘진흙소’[泥牛]요 ‘눈뜬 소’[惺牛]였다. 텅빈 거울에서 볼 때 눈 뜬 소는 이미 ‘뼈를 바꾼 용’이자 ‘얼굴을 고친 부처’였다.
그러므로 경허의 법화와 행화는 ‘일치’가 아니라 ‘병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행의 ‘합일’ 혹은 ‘일치’는 ‘지’(知)와 ‘행’(行) 사이의 금(線)을 무화시킨 것이지만 ‘병진’(倂進)은 둘 사이의 선(線)을 인정하면서 나란히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안목의 바름’과 ‘행해간 자취’ 또는 ‘법의 교화’와 ‘행의 교화’는 분리가 전제되어야만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분리 위에서 비로소 ‘안목의 바름’을 귀하게 여기고 ‘행해간 자취’를 귀하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경허의 ‘법의 교화’라는 진실로부터 이루어진 방편으로서 ‘행의 교화’를 볼 수 있을 것이며, ‘행의 교화’라는 방편으로부터 이루어진 진실과 마찰하지 않고 윤활할 수 있는 지평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III. 경허 성우의 法의 교화
1. 반조 자심과 화두 참구
선말 한초에 불교계를 대표하였던 선사 경허는 평생을 목룡(牧龍)가풍을 드날렸다. 그가 보여준 목룡 가풍은 ‘사람 중의 사람’[人中之龍]을 길러내는 살림살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에 두 해가 있을 수 없고, 나라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듯이 그는 선말 한초에 사람인 붓다 혹은 성태(聖胎)를 장양(長養)하여 붓다가 되고자 하는 용상(龍象) 대덕을 길러내고자 하였다. 불자라면 누구나 되고자 하는 붓다나 용상 대덕은 수행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붓다나 용상 대덕은 자신의 태를 찢어내고 뼈를 갈라내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
동시에 경허는 ‘지혜 중의 지혜’를 찾으려고 심검(尋劍) 선지를 통해 활짝 드러내 보였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의 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활인의 칼을 벼려 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경허는 그는 ‘목룡장’(牧龍莊)에서 ‘삼승의 그물에 걸리는 크고 작은 고기가 아니라 구름 끝에 올라가서 단비를 내려 뭇 생명을 이익되게 하는 신령한 청룡’이 되고자 했다. 아울러 ‘심검당’에서 ‘망상이 만들어낸 부처와 조사를 죽이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세존의 염화와 가섭의 미소’를 얻으려 하였다. 그러므로 경허는 목룡 가풍을 통해 ‘사람 중의 사람’을 길러내고자 하였다. 경허는 화두(話頭)의 참구(參究)를 통해 자심(自心)을 반조(返照)하려고 하였다.
(경허는) 평소 읽은 바 공안(公安)을 헤아려 보니, 의리(義理)로써 배우던 습성 때문에 모두 알음알이가 생겨나서 참구할 여지가 없고, 오직 영운(지근)선사께서 들어 보이신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 왔다’[驢事未去, 馬事到來]는 화두가 알 수가 없어서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친 듯하여 곧바로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고 참구하였다.
그는 위산 영우(潙山靈祐, 771~853)의 제자였던 영운 지근(靈雲志勤, ?~866)의 한 수좌가 ‘무엇이 불법입니까’ 물었을 때 선사가 대답하였던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驢事未去, 馬事到來]는 화두를 들고 참구하였다. 그가 서산 부석사에 ‘심검당’(尋劍堂)이란 편액을 쓴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 화두를 알 수가 없어서 마치 은산철벽에 부딪친 듯하여 곧바로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看是甚道理]를 참구하였다. 이 화두는 30년 동안 취모검을 찾아다녔던 영운이 활짝 핀 복숭아꽃을 보고 깨친 뒤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
삼십 년 동안 검을 찾던 나그네여
몇 번이나 잎이 지고 싹이 돋았나
복숭아꽃 한번 본 뒤부터는
지금에 이르도록 다시 의심치 않네.
영운 30년을 취모검을 찾아다닌 끝에 활짝 핀 복숭아꽃을 본 이후로는 의심이 일어나지 않았다. 영운에게서 탄생한 이 화두에는 다시 ‘여사’와 ‘마사’로 옮겨졌다. ‘여사마사’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일(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사’ 즉 ‘나귀의 일’과 ‘마사’ 즉 ‘말의 일’은 대조되기도 하고 병렬되기도 한다. 당나귀는 말과 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동물이다. 그리고 ‘여사’는 선어록에서 자주 쓰는 ‘나귀의 해’(驢年)에 비유한 것으로 12간지에는 없다. ‘나귀의 일’이란 한 물건도 없는 본분자리이자 비실재의 시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의 일’이란 12간지에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실재하는 현재로 묘한 이치가 항상 드러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산으로 돌아온 (동학사의 대중들을 모두 해산시킨 경허는) 문을 폐쇄하고 단정히 앉아 일심으로 참구하되 밤으로 졸리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혹은 칼을 갈아 턱에 괴며, 이와 같이 3개월 동안 순일무잡하게 화두를 들었다.
이 화두는 『선문염송집』에 실려있는 장산 전(將山泉), 육왕 심(育王諶), 심문 분(心聞賁) 등이 붙인 송에 근거해 해석한 것이다. 장산전은 이 화두에 대한 송을 이렇게 붙이고 있다.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의 일이 닥치니
종소리 끝나자 북소리 개촉하네
조사가 잡곡밥을 즐기어 먹으니
북쪽의 문수는 오대산에 있네.
불법의 대의란 조사가 잡곡밥을 즐겨 먹고, 오대산에 문수가 있는 것처럼 나귀와 말이 오가는 일상에 있다. ‘나귀의 일’과 ‘말의 일’은 분주히 오가는 우리의 일상에서 예사로 있는 일들을 가리킨다. 『선문염송집』 또한 ‘나귀의 일’에 대해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나귀의 일’과 ‘말의 일’이 가고 오는 것은 세간의 일상적인 일에서 답을 얻을 수 있다. 즉 마사와 여사가 분주히 우가는 곳에서 모름지기 영운의 뜻을 얻을 수 있다. 일생의 행각을 마치면 당나귀의 일과 말의 일의 뜻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채기(彩旗)가 밤에 늘 움직인다’ 운운한 것은 사실의 뜻[事實義]이니 곧 당나귀의 일과 말의 일이 달아나 죽기 때문이다. '정령은 낮에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은 글의 무늬가 남아있는 것에 떨어지지 않은 것이니, 이것은 뜻으로 보면 맞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당나귀의 일과 말의 일이 오는 가는 시절에 모름지기 정령을 얻어 살 수 있는 것이어서 깨우치기 위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허는 젊은 시절 자신의 화두를 영운선사의 ‘여사미거 마사도래’을 몸소 결택하고 본격적인 화두 참구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더 이상 화두에 대한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 상태에 이르러 화두를 참구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한 사미승의 부친에게서 “중이 된 자들은 필경에는 소가 됩니다”는 말을 듣고 “어찌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고 말하지 못합니까?”라는 말을 듣고서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 경허에게 가서 예를 갖추고 앉아서 물었다. 경허는 ‘소가 되어서도 콧구멍이 없다’는 말에 이르러서 활짝 깨달았다.
결국 경허는 “‘소에 콧구멍이 없다’[牛無鼻孔]는 말에 이르러 안목이 열리면서 ‘옛 부처에게서 태어나기 전’(古佛未生前)의 소식이 활연히 앞에 나타났다. 대지가 평침(平沈)하고 사물과 나를 함께 잊어서 곧바로 옛 사람의 크게 쉬어진 경지(깨달음)에 도달하니, 백 천 가지 법문과 헤아릴 수 없는 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 하고 기와 깨어지듯 하였다.” 그것은 곧 고기가 ‘용이 되어 뼈를 바꾸고’ ‘범부가 얼굴을 고쳐’ 부처가 된 것이었다.
2. 조료 전정과 이류 중행
자심의 반조와 화두의 참구를 강조한 경허는 다시 반조자심(返照自心) 혹은 반조심원(返照心源)과 이류중행(異類中行)을 돌이켜 보게 하는 ‘조료’(照了)전정(心源)의 논리를 입론하였다. 여기서 반조자심은 체가 되고 이류중행은 용이 되며 조료전정은 매개항이 된다. 때문에 ‘조료전정’ 즉 ‘화두참구’를 통해서 조사선의 지향인 반조자심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둘 사이는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조료’는 마음의 근원을 ‘반조’(返照)하고 ‘요달’(了達)하는 것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서 ‘조료’는 ‘돌이켜 비추어 깨달아 사무침’을 뜻한다. 경허는 ‘조료’를 ‘조고’(照顧)로 쓰기도 한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빛을 돌이키어 비추어 보고[廻光返照] 이 화두를 들어 오고 들고 가며 의심해 오고 의심해 가며 살펴서 다시 관하고 갈고 다시 닦아서 세간의 온갖 번뇌와 사량 분별의 마음을 다만 무(無)자 위에 돌이켜 놓는다. 이와같이 공부하기를 날이 오래고 달이 깊으면 자연히 깨닫게 된다.
이렇게 모든 시처(時處)에서 빛을 돌이켜 비추어보고 이 화두를 들어 ‘오고 들고 가며’, ‘의심해 오고 의심해 가면서 살펴서’ 다시 ‘관하고 갈고’, ‘다시 닦아서’ 세간의 온갖 번뇌와 사량 분별의 마음을 다만 무(無)자 위에 돌이켜 놓게 되면 자심 혹은 심원을 반조하게 된다. 이것은 조사돈오선의 가풍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허는 지눌의 영향을 받아 반조자심과 간화(화두)참구를 병행하였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권하였다.
(대저 참선하는 이에게) 가장 요긴한 것은 모든 일에 무심하고 마음에 일이 없게 하면 마음 지혜가 자연히 깨끗하고 맑아진다. (……) 무릇 이 현묘한 법문[玄門]을 참구하는 이는 항상 반조(返照)하기를 힘쓰고 참구하는 용심을 성성(惺惺)하고 밀밀(密密)하여 끊어지는 사이가 없이 하며, 참구하는 것이 지극히 간절하여 참구한다는 마음조차 없는 경지에 이르면 홀연히 마음길이 끊어져서 근본 생명자리에 이르게 되면 저 본지풍광(本地風光)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두렷한 경지라서 모자람도 남음도 없느니라.
경허는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비추어 (마음의) 공용을 오롯이 정밀히 하면, 비록 일대장교를 훑어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대장경이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두 기호는 ‘반조’(返照)와 ‘조료’(照了)이다. 경허는 일대장교의 ‘간과’(看過)와 변별되는 선법 수행의 길을 ‘반조’(返照)와 ‘전정’(專精) 즉 간화라는 기호로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반조는 조사선의 수행법이고, 전정 즉 간화는 간화선의 수행법이다.
경허는 자신의 글 「시법계당」(示法界堂)에서 “빛을 돌이켜 되비추고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깨달아라”[廻光返照, 照了心源]고 하면서 ‘일일조고’(日日照顧), ‘조료자성’(照了自性), ‘조료망상’(照了妄想)에서처럼 ‘조료’(照了) 혹은 ‘조고’(照顧)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여등암화상」(「與藤菴和尙)에서는 ‘반조불매위정’(返照不昧爲正)처럼 ‘반조’(返照)라는 표현을 통해 반조의 조사선과 간화의 화두선의 가풍을 모두 잇고 있다.
쌍림의 부대사(傅大師)가 이르기를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함께 일어난다. 앉으나 서나 같이 따라다니고 말할 때나 잠자고 있을 때나 거지(居止)를 함께 한다. 털끝 만큼도 서로 여의지 않음이 그림자와 같으니 부처가 가는 곳을 알고자 할진대 다만 이 말소리로다”라고 하였다. (……) 혹은 참선을 하던지 염불을 하던지 혹은 주문을 외우며 내지 육바라밀 법문에 이르기까지 노력하여 실행하되 간절히 조심할 것은 여러 갈래로 나누지 말고 도리를 밝히는데 힘쓰기를 빛을 돌이키어 비추어서[廻光返照]하여 마음의 근원을 요달할지어다[照了心源].
부쳐 한번 되어 놓면 무슨 걱정 있을 손가
보고 듣고 앉고 눕고 밥도 먹고 옷도 입고
말도 하고 잠도 자고 항사묘용총지하니
얼굴 앞에 分明하고 이마 뒤에 神기롭다
찾는 길이 여럿이나 아주 옅게 말할진대
반조공부 최묘하다 선심 악심 무량심을
지수화풍 제쳐놓고 찾아보면 도무하니
비록 찾아 無形하나 靈智分明 不昧하니
그 아니 可笑론가
뿐만 아니라 경허는 여느 선사들처럼 위로 향하지 않고 아래로, 밖으로 향하지 않고 안으로, 남에게서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에게서 구하기 위해 ‘조료’(照了)하고 ‘반조’(返照)하는 논리 방식을 통해 정진했다. 교학자들은 언어를 통해 매개 논리를 원용하지만 선사들은 ‘관조’(觀照) 혹은 ‘조료’(照了) 내지 ‘반조’(返照)의 논리 방식을 통해 붇다의 핵심교설인 중도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경허 역시 ‘반조’(返照)와 ‘요달’(了達)을 ‘조료’(照了)의 기호로 보여주고 있다. 선종사에서 ‘돌이켜 비춘다’[返照]는 것은 모든 사물을 비추는 거울처럼, 모든 물길을 아우르는 바다처럼 무차별의 시선으로 마음의 근원을 관조하는 것이다. 즉 진심(眞心)의 몸체인 자기 본성과 진심의 몸짓인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이다. 이것은 조사선의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돌이켜 비춘다’에 상응하는 ‘또렷이 이른다’[了達]는 것은 마음의 근원을 또렷또렷[惺惺]하고 고요고요[寂寂]하게 돌이켜 비추어[返照] 사무치는 것이다. 이것은 간화참구 즉 화두를 들고 하는 수행법이다. 반면 조료[照了]는 화두를 들고 자신의 ‘마음의 근원’[心源]을 비추어 보고 또렷하게 알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심원(心源)의 몸체를 비추어 깨닫게 하는 ‘반조’(返照)와 심원(返照心源)의 몸짓을 보다 구체화하는 ‘전정’(專精)의 방식은 자연스럽게 설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초기 경전인 아함경에서 ‘홀로 한 고요한 곳에서 오롯이 정밀히 사유하는’[獨一靜處 專精思惟] 것을 주요 수행법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 경허가 ‘조료’ 혹은 ‘전정’을 통해 얻고자 했던 궁극적 지향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성불 즉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사선의 반조자심과 간화선의 화두참구 즉 조료전정의 수행법을 병행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멀리는 지눌의 맥과 닿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경허가 최종적인 지향을 정혜를 나란히 닦는 수행에 두면서도 미타의 극락왕생과 미륵의 도솔상생을 함께 열어두고 있는 지점이다. 그는 정혜를 닦아 참다운 나를 발견하는 것을 최우선시하면서도 ‘영원히 사는 나라’이자 ‘불생불멸의 나라’인 ‘축복받은 곳’[壽域]에 태어나는 길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경허는 보다 많은 이들이 성불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미타정토 뿐만 아니라 도솔천 내원궁에 상생하여 미륵존불을 받들도록 안내하고 있다.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이러한 역동적인 활로를 요청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나라와 미륵도솔천은 여기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는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속에 자리한 조선말 대한 초기의 ‘바로 이곳’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되는 지점이다. 그가 주도했던 1899년 해인사 수선결사로부터 1904년 종적을 감추기까지 온몸을 던져 보여준 가풍과 선지 역시 바로 이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경허는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으며, 반조자심(返照自心)하는 조사선과 화두참구(話頭參究, 照了轉精)하는 간화선의 수행법을 아우르고, 미타정토와 미륵정토를 아울러 인정하여 함께 성불의 과보를 얻고자 하는 주체적인 가풍이 ‘사람 중의 사람’을 키우는 목룡(牧龍) 가풍이자 ‘지혜 중의 지혜’를 찾기 위한 심검(尋劍) 선지였다고 할 수 있다.
IV. 정리와 맺음
선말 한초에 살았던 경허는 평생을 주체적인 삶을 구축하여 자유인으로 살았다. 그는 연방의 『법해보벌』(法海寶筏) 9편을 8편으로 재구성하고 해동의 선서 7편을 추가해 『선문촬요』(禪門撮要, 상하 2권)를 엮어 간행하였으며, 수선결사와 인경불사, 점안법회와 대중제접 등 다양한 살림살이를 펼쳐보였다.
경허는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으며, 반조자심(返照自心)하는 조사선과 화두참구(話頭參究, 照了轉精)하는 간화선의 수행법을 아우르고, 미타정토와 미륵정토를 아울러 인정하여 함께 성불의 과보를 얻고자 하는 주체적인 가풍이 ‘사람 중의 사람’을 키우는 목룡(牧龍) 가풍이자 ‘지혜 중의 지혜’를 찾기 위한 심검(尋劍) 선지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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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문 :「鏡虛 惺牛의 牧龍 家風과 尋劍 禪旨」를 읽고
문 광 (탄허기념박물관 연구실장)
지난해 한국불교의 중흥조이신 경허대선사 열반백주년을 맞이하면서 다채로운 추모와 선양사업이 일시적인 이벤트로 끝나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올해 경허야인(鏡虛野人)께서 무사태평가(無事太平歌)를 불렀던 이곳 연암산하(燕巖山下) 천장사(天藏寺)에서 경허기념관이 개관하고 작년에 이어 경허선사 바로알기 학술세미나가 다시금 개최된 것은 참으로 기쁘고 행복한 일이라 하겠다. 덕숭총림 방장이신 설정큰스님과 천장사 주지 허정스님의 크나큰 원력에 먼저 깊은 감사를 드리며 많은 사부대중과 함께 이 자리에 함께 동참하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1. ‘목룡가풍(牧龍家風)’에 대하여
고영섭 교수는 한국불교사에 대한 원대한 열정과 깊은 학문적 애정으로 그간 한국불교 전반에 대한 방대한 저작과 학술논문을 학계에 쏟아내었다. 경허선사(아래 존칭 생략)에 대한 논문도 이번이 네 번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한국불교사에서 경허가 차지하는 위상과 영향이 압도적임을 반증하는 대목인데 선사에 대한 연구가 이토록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은 고교수 논문의 소제목처럼 ‘법화(法化)와 행리(行履)의 긴장과 탄력’이 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세간의 논쟁과 논란의 여지를 함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논문은 서산 부석사 현판인 ‘목룡장(牧龍莊)’과 ‘심검당(尋劒堂)’이라는 경허 친필을 통해 선사의 법화와 행리 양면에서의 교화(敎化)에 대한 세간의 포폄에 대해 풀어나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목룡가풍’이라는 말은 경허를 이해하기 위한 매우 신선하고 새로운 코드로 보여서 논문이 손에 들어오기 전부터 무척 기대되었다. 논문을 접하기 전에 ‘용[龍]’을 ‘길러낸다[牧]’는 표현을 보고 선사의 오도가에 나오는 ‘사고무인 의발수전(四顧無人 衣鉢誰傳)’이라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으니 누구에게 의발을 전할 것인가’ 하는 탄식에서 의발을 전할 용상(龍象) 대덕을 기르겠다는 선사의 의지표현에 관한 논문이라면 혜월·수월·만공·한암과 같은 기라성 같은 대도인을 길러냈으니 과연 목룡이라는 말이 참으로 합당하겠다고 생각하였는데 아쉽게도 논문에서는 이와 관련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향후 법제자[龍]의 양성[牧]과 선풍(禪風)의 확대, 선맥(禪脈)의 부촉을 통한 정법안장·열반묘심의 전승이라는 측면으로 연계해서 논지를 계속 전개한다면 경허를 보는 한 코드로서 ‘목룡’이라는 의미가 더욱 명확하고 풍성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또 하나 목룡가풍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 것은 1쪽에서 ‘경허는 고려 중기 보조 지눌이 드날렸던 목우(牧牛)가풍과 달리 선말 한초에 목룡(牧龍)가풍을 드날렸다’고 했는데 과연 보조는 목우, 경허는 목룡, 이렇게 이분(二分)하여 볼 수 있을까 의문이다.
경허 역시 심우도(尋牛圖)에 대한 자신만의 선시인 「심우송(尋牛頌)」과 「심우가(尋牛歌)」를 각각 지어서 법어집에는 물론이며, 경허·만공 두 선사의 친필 병풍이 수덕사 근역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또한 ‘성우(惺牛)’라는 법명과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라는 견성인연만 보아도 ‘소(牛)’의 상징은 모든 선사에 공통되는 깨달음과 진여의 상징인 바 ‘보조-목우, 경허-목룡’ 구도보다는 목우가풍이라는 공통분모 위에 ‘목룡’이라는 경허만의 독창적인 술어를 더욱 부각시키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2. 경허에 대한 만공과 한암의 평가의 동이(同異) 문제
고교수의 이 논문의 최대 장점은 지금까지 논의되었던 경허의 무애행에 대한 세평(世評)들을 빠짐없이 정리해 두었다는 점이다. 이능화에서부터, 용성, 효봉, 춘원, 대은, 청담, 한암, 만공, 만해, 퇴경으로 이어지는 근대종장들의 평가와 현대의 경허관련 저술들과 논문들의 여러 견해들이 모두 소개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한암선사의 “경허선사의 법화를 배우는 것은 옳으나 행리를 배우는 것은 옳지 않으니 사람들이 믿어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人信而不解也] ”고 한 것과 만공선사의 “좋고 나쁜 것이 호랑이와 부처를 뛰어넘는 이가 경허선사이시다[善惡過虎佛, 是鏡虛禪師]”는 평가가 동일하게 배울 것과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극명하게 갈라놓았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보았다.(2쪽)
하지만 의문이 드는 것은 만공선사가 한암선사에게 경허화상행장을 부탁하여 위의 내용이 포함된 글을 지어 보내니 읽어보고 휙 집어 던지며 못마땅하게 여겨서 한암선사 행장본인 경허집이 당시에는 간행되지 못했다는 점이다.(7쪽 각주 24)
만공과 한암의 위의 두 문장이 스승 경허에 대한 동질의 평가였다면 왜 만공선사는 한암선사의 법화는 배우되 행리는 배우지 말라는 말이 못마땅했을까? 만공선사의 시구해석을 놓고 “좋을 때는 부처님보다 착하고[善過於佛] 나쁠 때는 호랑이보다 더 악하다[惡過於虎]”라는 식으로 두 구절로 나누어 평했던 퇴경 권상로의 해석(9쪽)이 혹시 만공선사의 본뜻과는 다른 오류를 낳은 것은 아닐까 의문이다.
3. ‘심검 선지(尋劍 禪旨)’에 대하여
위 문제와 결부하여 본 논문에서 중점적으로 논하는 또 하나의 축인 ‘심검 선지(尋劍 禪旨)’에 대해 고교수는 “경허는 ‘지혜중의 지혜’를 찾는 심검 선지를 통해 평생 동안 사람을 죽이는 살인의 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활인의 칼을 벼리고자 하였다”라고 1쪽과 12쪽에서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논평자가 보기엔 서슬시퍼런 납승(衲僧)의 취모검(吹毛劍)은 살인검(殺人劍)과 활인검(活人劍)을 동시에 종횡무진하며 자유자재로 구사하는데 그 묘처(妙處)가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살활자재(殺活自在), 입파무애(立破無碍), 권서자재(卷舒自在), 수방자재(收放自在)의 선지(禪旨)라야 진정한 활구를 증득한 대종장의 활발발한 대기대용처(大機大用處)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주(趙州)선사가 투자(投子)선사를 찾아가서 거량한 “크게 죽은 사람이 도리어 살아날 때는 어떠합니까?(大死底人却活時節如何)”라는 질문에서 보듯 ‘대사각활(大死却活)’과 ‘사중득활(死中得活)’의 경지라야 진정 사는 것이요, 크게 죽는 것 없이는 제대로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이 천불만조사(千佛萬祖師)와 천하노화상(天下老和尙)의 시중(示衆)임을 상기할 때, 경허의 심검 선지는 살리는 칼의 일면만이 아닌 때로는 죽이기도 하고 때로는 살리기도 하는 살인검과 활인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기용제시(機用齊施)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울러 위의 만공선사의 게송에서 ‘좋고 나쁨이 호랑이와 부처보다 더하다’는 구절은 살활(殺活)이 구족된 심검 선지가 아닐런지? 중생살림살이에서는 호랑이는 사람을 죽이니 나쁘고 부처는 사람을 살리니 좋은 것이다. 그러나 부처는 선(善)이요, 호랑이는 악(惡)이라는 관점이 과연 선(禪)의 종지와 부합하겠으며 대선사인 경허의 가풍에 부합하겠느냐는 것이다. 선악시비가 끊어지고 부처축생의 분별이 끊어진 그 자리가 바로 경허의 법화와 행리가 동시에 함께 하는 자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경허선사의 좋은 법화는 배우고, 나쁜 행리는 배우지 말라는 한암선사의 일갈은 어찌보면 수행노정기에 있는 일반인을 위한 노파심의 수준에서는 납득이 되나 스승 경허의 깨침과 무애자재한 무이도인(無二道人)의 분상(分上)에서는 어쩌면 걸맞지 않는 평가라고 사형인 만공선사가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스승 경허를 시봉하고 가장 많은 무애법문(無碍法門)을 접하며 수많은 일화를 양상하며 대용(大用)의 기틀을 장양(長養)했던 이가 바로 만공이었기 때문이다. 경허의 최상의 법문은 생활속에서 석화전광으로 터져나왔던 무애행의 일화들 속에 살아있는 활구법문들이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한 가지 제안하고픈 것은 “한국불교의 3대 무애대사(無碍大師)”로 원효, 진묵, 경허를 선정하여 앞으로 이들의 깨친 구경의 경계에 대해서만은 욕계(欲界)의 중생들이 출삼계(出三界)의 해탈도인을 시비분별하는 막대한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이 어떨까 한다.
법화만 배우되 행리는 배우지 말라는 말이 만일 진공(眞空)은 배우되 묘유(妙有)는 배우지 말며, 진여(眞如)만 챙기되 생멸(生滅)은 버리고, 체(體)만 전수하고 용(用)은 버리라는 뜻으로 미끄러져 버린다면 이것이 과연 불법의 요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경허는 한 사람일 뿐인데 우리의 마음이 둘로 분별하고, 경허는 이미 술과 여자와 이별한지 오래됐는데 우리만이 아직도 주색(酒色)의 환영(幻影)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자문해 본다. 낮은 지상에서 고봉정상(高峰頂上)의 광경을 의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 그저 부지런한 수행으로 정상에 올라가서 ‘너도 장부요 나도 장부다(彼丈夫 我丈夫)’하는 기상을 발원할 뿐이다.
4. ‘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화두에 대하여
경허의 진면목을 알고자 할진대 경허의 깨침을 위한 구도(求道)의 역정을 기억해야 한다. 경허가 은산철벽과도 같던 자신의 화두인 ‘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를 붙잡을 땐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칼을 목에 대었으며 오로지 화두참구에 몇 달을 순일무잡했었다. 경허 또한 참학사(參學事)를 필(畢)하지 못한 수행과정에서는 무애행이 티끌만큼이라도 존재치 않았다. 경허의 행리를 배우게 되면 음주식육 주색음행을 하게 되리니 경허의 법화만 배우라니... 출가본분사가 엄연히 있는데 어찌 자기 마음 하나 해결하지 못했는데 경허 때문에 막행막식을 배울 수 있으며, 어찌 자신의 난행(亂行)의 변명처가 경허가 될 수 있겠는가.
과연 오늘날 ‘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와 같은 최상승 법문을 오매여일 참구하여 타파한 도인이 나온다면 만공선사의 말씀처럼 논평자 역시 다리살점을 잘라서라도 육고기 공양을 올릴 것이다. 일대사 인연을 해결한 도인의 경계에 대해서는 철상철하 철두철미의 가풍을 선택하든, 무애자재의 교화방편을 선택하든 임운등등(任運騰騰)하게 본인에게 처분을 맡겨둘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장부 일대사인연 해결되기 전에는 계율지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화두를 놓치고 수마에 굴복하는 것을 잠시라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공부인의 자세이니 어찌 보면 경허에 대한 세간의 포폄은 논란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본 논문에서는 ‘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화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을 했다.
불법의 대의란 조사가 잡곡밥을 즐겨 먹고, 오대산에 문수가 있는 것처럼 나귀와 말이 오가는 일상에 있다. ‘나귀의 일’과 ‘말의 일’은 분주히 오가는 우리의 일상에서 예사로 있는 일들을 가리킨다. (15쪽)
하지만 논평자의 견해로는 “려사(驢事)와 마사(馬事)는 분주히 오가는 일상에서 예사로 있는 일”이라고 본 것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위에서 인용된 ‘잡곡밥’이라는 말은『선문염송집』에 실려있는 장산 전(將山 泉)의 다음의 송(頌)에 나온다.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의 일이 닥치니 (驢事未去馬事到來)
종소리 끝나자 북소리 개촉하네 (鐘聲才斷鼓聲摧)
조사가 잡곡밥을 즐기어 먹으니 (祖師愛喫和羅飯)
북쪽의 문수는 오대산에 있네. (北有文殊在五臺)
여기의 ‘화라반(和羅飯)’을 ‘잡곡밥’이라고 풀고 일상에 그냥 먹는 것으로 다반사 정도의 의미로 보아 이 화두의 핵심인 나귀의 일과 말의 일을 보통 일상적인 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화두가 불법의 대의에 대해서 물은 것에 대해서 영운선사가 답한 낙처(落處)가 “일상에 진리가 있다” 정도의 의미라면 천칠백 공안을 모두 알음알이로 다 해결했는데 이 화두만이 은산철벽이었다는 경허의 말과 모순된다. 왜냐하면 그 정도를 몰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현대의 혜국스님은 태백산에서 삼매에 든 뒤 견처가 있어 깨쳤다는 식광(識狂)이 나서 당시의 세 도인인 성철, 경봉, 구산 선사를 참방했다. 그런데 깨쳤다고 온 혜국스님에게 해인사의 성철스님과 통도사의 경봉스님은 하나같이 ‘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도리를 이르라고 거량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환하게 깨친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답을 못하고 “환한데 모르겠습니다”하니 아직 공부 덜 되었으니 3년만 회상에서 더 정진하라는 것이 두 스님의 공통된 가르침이었다고 한다. 그것을 무시하고 만행했던 것을 혜국스님은 일평생 후회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화두는 향상(向上)의 일구요, 왕삼매(王三昧) 법문이며 선불장(選佛場)의 최고의 관문임을 알 수 있으니 일상의 진리정도의 간단한 공안이 아닌 것이다.
발표자인 고교수께서 “불법의 대의란 조사가 잡곡밥을 즐겨 먹고, 오대산에 문수가 있는 것처럼 나귀와 말이 오가는 일상에 있다. ‘나귀의 일’과 ‘말의 일’은 분주히 오가는 우리의 일상에서 예사로 있는 일들”이라고 보게 된 것은 진각국사 혜심의『禪門拈頌·拈頌說話』의 다음 구절을 잘못된 번역본을 인용했거나 아니면 잘못 번역한 것에 기인한다.
고교수는 진각혜심 국사의 염송설화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나귀의 일’과 ‘말의 일’이 가고 오는 것은 세간의 일상적인 일에서 답을 얻을 수 있다. 즉 마사와 여사가 분주히 우가는 곳에서 모름지기 영운의 뜻을 얻을 수 있다. 일생의 행각을 마치면 당나귀의 일과 말의 일의 뜻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15쪽)
하지만『禪門拈頌·拈頌說話』에는 원문은 다음과 같고 이 번역은 다음과 같이 되어야 바른 번역이다.
“나귀의 일과 말의 일이 가고 오다”라고 함은 세간의 예삿일로 대답한 것인가? 나귀의 일과 말의 일이 가고 오는 분분한 곳에서 모름지기 영운의 뜻을 알아내야 일생 행각하는 일이 끝난다. 나귀의 일과 말의 일에 뜻이 없지 않은 까닭이다.
( 驢事馬事去來者, 世間常事答得耶. 驢事馬事去來紛然處, 須是會得靈雲意, 一生行脚事畢,
所以驢事馬事意不無也. )
원문을 바로 보게 되면 려사(驢事)와 마사(馬事)는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는 말이며 이 도리를 알아야 영운선사의 깨친 면목을 바로 볼 수 있고 일대사 인연을 마칠 수 있다는 말이다. 성철스님은 이에 대해서 『본지풍광』에서 ‘화라반(和羅飯)’을 ‘잡곡밥’이 아니라 ‘비빔밥’이라 하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조사는 비빔밥 먹기를 좋아한다”는 이 말에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조사스님들이 실제 음식 중에 비빔밥을 좋아한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비빔밥(和羅飯)이라고 한 여기에 아주 깊은 뜻이 있는데, 이 뜻을 바로 알면 이 법문 전체를 다 알 뿐만 아니라 일체 불법에 대개 조금의 거리낌도 없게 됩니다.
즉 ‘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공안은 종문의 최고의 갈등(葛藤)이자 최상의 일구(一句)이니 이 화두를 투과(透過)하여 칠통을 타파하면 다시금 의심이 없는[更不疑] 안심입명처를 누린다는 말이다. 이 화두를 송한 장산선사의 “조사가 잡곡밥(비빔밥) 먹기를 좋아한다(祖師愛喫和羅飯)”는 말에서 바로 알아차리면 또한 역대조사 천하선지식과 함께 박수를 치며 가가대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허를 알고자 할진대 포폄시비를 다 내려놓고 이 공안을 투과한 뒤라야 경허의 살림살이를 비로소 가타부타할 수 있는 자격이 부과되는 것이니 ‘경허’라는 명호를 들어본 적 있는 자 모두 경허선사를 본받아 목룡(牧龍)의 가풍으로 칼날이 살아 있는 심검객(尋劍客)이 되어 이 ‘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화두를 투탈(透脫)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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