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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檀紀를 살려내야 한다.
Ⅰ
檀紀는 檀君紀元의 줄인 말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年號이다. 더 정확하게 정의하면 韓民族의 첫 번째 나라인 檀君朝鮮의 시조인 檀君王儉의 즉위년을 기원으로 한 연호를 말한다. 한 때는 법률로 정한 공용연호 였지만 지금은 西紀에 밀려 죽어버린 檀紀는 올해로 4345년을 맞이한다.
이렇게 우리 고유의 연호인 檀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는 법률에 정한대로(?) 예수 탄생을 기원으로 한 서기를 공용연호로 사용하고 있다. 그뿐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신문과 달력에서도 檀紀 대신 서기를 쓰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불교계에서는 석가 탄신일을 기원으로 한 佛紀를 사용하고 있으며 유교에서는 공자 탄생을 원년으로 한 孔紀를 쓰고 있다. 檀紀는 현실 사회에서는 서기와 불기, 그리고 공기에 치이다가 아예 사망선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럼 연호란 무엇인가? 군주국가에서 君主의 治世年次에 붙이는 칭호를 연호라 부른다. 동양 사회에 있어서 연호는 宗主國인 중국의 천자나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고 事大를 하는 속국이나 제후국에서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고 천자가 쓰는 연호를 그대로 따라 써야만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월남(베트남) 같은 나라에서는 과거에도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왔으며 현재도 쓰고 있다. 군주국이 사라진 현재에도 세계 각국에서는 나름대로 독자적인 연호를 쓰고 있기도 하다.
Ⅱ
우리나라 헌법 前文을 보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민국은 ∼ 이라고 시작하고 있다. 단군 할아버지가 세운 단군조선으로부터 따져 반만년의 우리나라 역사와 어울리는 표현이다. 현재 우리나라 공식연호인 서기 2012년은 우리 고유의 연호도 아닌데다 유구한 역사라 하기에는 어딘가 낯간지럽다 하겠다.
유구한 역사를 반영하고 우리의 역사를 실증하는 檀紀를 버리고 그 반토막 밖에 안되는 서기를 쓰게 된 사연은 이렇다.
우리나라는 수 천 년 동안 중국의 속국 내지는 사대국으로 지내오면서 자주독립국의 상징이라 할 稱帝建元 - 중국과 대등한 천자의 나라임을 나타내기 위해 왕을 황제로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것 - 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선조 말인 고종 임금 때 국호를 大韓帝國으로 고치고 황제 칭호와 光武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임을 만천하에 공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일제 식민지가 되는 바람에 모처럼의 칭제건원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물론 일제 36년 동안은 일본의 연호인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 쇼와(昭和)를 쓸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역사에서 檀紀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고려 공민왕 때 白文寶가 올린 상소에서 였다. 그러다가 한일병합이 이루어 지기 한 해 전인 단기 4242년 羅喆의 大倧敎에서 檀紀를 공식적인 연호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해방이 되자 美軍政에서는 당연히 3년 동안 서기를 사용하게 된다. 그러던 것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야 우리나라 공용연호로 檀紀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정부를 수립한 해인 檀紀 4281년(서기 1948년)에 법률 제 4호인 「연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는 규정에 따라 檀紀가 우리나라 연호로 공식적으로 채택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민족의 첫 나라인 단군조선의 시조 단군왕검에서 「檀君」을 따와 「檀君紀元」이란 연호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5.16 혁명이 일어나자 공인된 우리의 연호인 檀紀는 다시 한번 수난을 겪게 된다. 그 해 법률 제 775호를 새로 제정,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서력기원으로 한다고 못 박음으로써 檀紀는 사망선고를 당하고 1962년 1월 1일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기가 대한민국 공용연호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서기를 공용연호로 채택한 법률 제 775호는 단기로 표시된 연대는 당해 연대에서 2333년을 감하여 이를 서력연대로 간주한다고 그 부칙에서 檀紀에서 서기로의 환산법을 친절하게 안내까지 하고 있다.
그런데 2333년이란 이 수수께끼 같은 숫자는 어떻게 해서 나온 숫자일까? 단군조선의 건국연대가 해답을 알려준다. 우리 민족의 건국 시조인 단군왕검이 단군조선을 건국한 해가 중국의 堯 임금 즉위 50년, 즉 丁巳年에 해당된다. 이 해를 서기로 환산하면 서력기원전 2333년이 되므로 이를 단기로 계산하려면 서기에다가 2333년을 더하면 되는 것이다. 단군 할아버지가 건국할 때는 우리나라에는 檀紀도, 서기도 없었으며 그 해의 干支인 太歲도 없었기 때문에 중국의 간지를 이용해 檀紀를 환산하다 보니까 수학공식같은 2333년이라는 숫자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는 우리가 평소에 檀紀를 사용하지 않고 서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런 환산법이 필요하지만 신문이고 달력이고, 또 일상생활에서 늘 檀紀를 사용한다면 이런 불편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동양에서의 국제질서는 중국이 천하를 지배하는 宗主國이고 사방의 주변국은 속국이나 제후국에 불과했다. 나라 이름, 즉 국호는 독자적으로 쓸 수 있었지만 - 그것도 중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 천자나 황제를 칭하지 못하고 왕이라고만 칭해야만 했다. 독자적인 연호도 쓸 수 없었으며 오직 중국 연호만 사용해야만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칭제, 즉 황제라 칭하지는 못했지만 왕에 따라 독자적인 연호는 사용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연호를 사용한 임금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다. 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해 광개토대왕을 영락대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음으로 신라는 법흥왕 때 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며 다음 왕인 진흥왕은 開國을 비롯해 연호를 세 개나 사용하기도 했다. 진흥왕은 신라 최고의 정복군주 답게 스스로를 朕이라 칭해 황제를 자처했으며 지금의 함경남북도 경계에 까지 치고 올라가 「마운령순수비」등 拓境碑요 영토확장 기념비라 할 巡狩碑를 네 개나 남겨 놓고 있다.
「巡狩」란 용어는 천자가 제후국을 순시할 때 그만이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임을 생각할 때 진흥왕은 가야와 백제, 고구려 땅을 정복, 그 곳에 척경비를 세우면서 순수라는 단어를 붙이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신라가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독립국가임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신라는 법흥, 진흥왕에 이어 진평왕, 선덕여왕 , 진덕여왕 때까지 연호를 계속 사용해 왔다. 신라의 삼국통일 의지와 자주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백제도 물론 「七支刀」에 泰和라는 연호를 銘文으로 남기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은 중국 변방의 東夷國이나 속국이 아니라 한 때나마 당당히 중국과 맞서는 대등한 국가였으며 그들의 尙武精神이나 진취적인 기상을 여기서 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우리나라의 연호사용은 계속 이어져 발해 시조 대조영은 天統을, 후고구려의 궁예는 武泰를, 고려 태조 왕건은 天授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위에서 보듯 우리나라가 개국을 하거나 광개토대왕이나 진흥왕 같은 정복군주 시대, 또는 국운이 융성했을 때는 예외 없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는 독자적인 연호사용에 그쳤지만 고려 인종 때는 중국과 대등한 천자 나라임을 과시하기 위해 왕을 황제로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자는 칭제건원 운동을 펴기도 했다. 이 운동은 결과적으로 실패하기는 했지만 「묘청의 난」으로 이어졌고 한 때나마 국호를 大爲, 연호를 天開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사대주의를 표방, 우리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아예 중국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오히려 고려에서 일찍이 건원칭제하여 분수에 넘치는 일이 많았다고 자주의지를 보인 전 왕조 고려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던 것이 개화바람이 불고 청일전쟁으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자 고종 대에 와서 국호를 大韓帝國으로, 왕을 황제로, 연호를 光武로 정한 大韓國制 - 오늘의 헌법에 해당함 - 를 반포하게 된다. 이로써 반만년 역사상 최초로 완전 자주국가임을 대내외에 천명하게 된 것이다.
대한제국으로서 독립국가의 지위를 누린지 10여년 만에 우리는 다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의 국호도, 황제도, 연호도 다 날아가 버리고 우리는 다시 중국의 연호 대신 일본의 연호를 사용해야만 했다.
해방이 된 뒤에도 미군정 시대 3년간은 서기를 연호로 사용해야 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인 단기 4281년(서기 1948년)에 이르러서야 단군할아버지가 나라를 세운지 거의 반만 년 만에 우리의 연호를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檀紀 사용의 감격도 잠시 5.16 혁명으로 우리는 檀紀를 버리고 서기를 우리 연호로 사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외국의 사례는 어떠할까?
세계 각국은 연호든 연도표시든 서기를 사용하는 게 대세이다. 하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자국의 연호를 쓰면서 서기를 병용하거나 아예 자국의 연호만 사용하는 국가도 있다.
이웃 일본은 공문서에서는 저들의 연호인 헤이세이(平成)를 쓰고 일반 사문서에서는 서기를 사용하지만 일본 내에서는 헤이세이를 주로 쓰고 신문과 달력은 헤이세이나 서기를 선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불교 국가인 태국은 연호로는 佛紀를 사용하지만 서기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 대만은 서기를 사용하면서도 고유연호인 建國을 쓰고 있기도 하다. 정작 연호의 종주국이라 할 중국은 지금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서기만을 쓰고 있다.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서기를 쓰고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자국의 고유연호인 「시주리」를 쓰고 있는데 올해가 「시주리」로는 1434년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같은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이란은 서기를 사용하지 않고 고유연호인 「솔라」만을 사용하고 있는데 금년이 1391년이라고 한다. 이집트와 이란은 같은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다른 연호를 사용하고 있는데 국가의 정체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Ⅲ
비록 21세기 오늘이 군주국가 시대는 아니지만 세계 각국이 보편화된 연호인 서기를 사용하면서도 독자적인 자국의 고유연호를 쓰고 있다. 군주시대나 사용하던 연호를 민주국가인 오늘에 사용한다고 해서 과거로의 회귀는 아니다. 연호사용이 꼴통보수, 수구, 국수주의, 쇄국주의, 쇼비니즘(chauvinism)의 발로라고는 더더욱 볼 수 없다.
지금은 사망선고를 당해 죽어버린 우리의 檀紀는 우리 국가와 민족의 유구한 반만년 역사와 전통, 우리의 민족성과 자주성, 자긍심, 외국과의 차별화 등 우리의 정기와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러한 檀紀를 버리고 서기를 체택한 데는 나름대로의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5.16 혁명 후 북한보다 못한 경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수출에 매달려야 했고, 모든 사회구조와 의식구조를 세계화 하지 않으면 않되었을 것이다. 수출을 위해, 세계를 따라잡기 위해서 우리 고유의 檀紀를 버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대세를 이루고 있는 서기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韓流가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고 K-POP이 서구 무대를 휩쓸고 있으며 드디어 싸이의 강남스타일과 말춤이 세계를 진동시키고 있다. 그뿐 아니다. 한국인으로서는 넘보지 못할 거라던 골프, 피겨, 수영 등 스포츠도 세계를 제패하고 있으며 우리의 유 무형 문화유산도 세계문화유산에 속속 등재되고 있다. 우리의 한글이 수출되고 있고 국내에는 한글 배우러 오는 외국 유학생이 늘어나고 있으며 외국에는 한국어과 개설이 늘고 있다. 가히 코리아 열풍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연호 檀紀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잘 모르고 지낸다. 더구나 남의 연호인 서기를 공용연호로 법으로 채태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모르고 있다. 솔직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역사학도인 필자도 법으로까지 서기를 공용연호로 사용하도록 제정해 놓았는지는 모른채 지내왔다.
우리 조상들은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도 우리 고유의 독자적인 연호를 쓰기도 했는데 이제 독립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우리의 고유 연호인 檀紀를 마음놓고 쓸 수 있는데도 檀紀를 죽여 놓고 서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국호는 大韓民國, 국기는 太極旗, 국가는 愛國歌, 국화는 無窮花인데 연호는 檀紀 대신 서기로 하는 건 뭔가 이가 빠진 느낌이고 아귀가 맞지 않는다.
서기를 없애자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죽은 檀紀를 살려내 우리의 공용연호로 하고 서기를 함께 사용하자는 얘기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자국의 고유연호를 쓰면서도 서기를 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없는 연호를 새로 만들어 내자는 주장이 아니다. 우리 민족사의 유구함을 실증해 주는 檀紀, 한 때는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로 법률에 의해 보장받던 檀紀를 부활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세기 전에 서기를 공용연호로 규정한 「연호에 관한 법률」제 775호의 개정운동을 벌여야 하고, 헌법정신에도 배치되는 이 법률에 대해서는 헌법소원이라도 제기해야 된다. 법률이 개정되기 전이라도 신문사와 달력 제작업체 에게는 檀紀를 주로 쓰고 서기를 병기하도록 권장해야 한다.
그리하여 죽은 우리의 檀紀를 살려내야 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문서에, 신문에, 달력에, 심지어 초등학생의 일기장에도 檀紀가 살아나야 한다.
檀紀 4345. 12. 抱民 徐 昌 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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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을미년에 어울리는 멋진 내용 같습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입니다
주체성과 정체성이 확고합니다
한국사람들 대체적으로 주인 의식이 부족합니다
국가관과 가치관의 확립이 필요합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