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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뮤지컬과 재즈
1) 뮤지컬
2) 래그타임과 블루스
3) 재즈(Jazz)
8. 뮤지컬과 재즈
서양의 고전음악들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음악이다. 그러나 1,2차세계대전을 계기로 많은 유대계 음악가들이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 미국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음악의 중심도 미국으로 옮겨졌다.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벌어졌을 때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작곡생활의 절정에 있었고, 낭만주의 음악이 꽃필 무렵 미국 최초의 음악 활동은 청교도들의 찬송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음악문화는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고, 19세기 후반 독일의 음악적인 영향이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순수하게 미국적인 음악은 포스터(1826~1854)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렇게 음악적으로 척박했던 미국이 20세기 들어 음악 역사의 주역이 된 데는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의 결합인 재즈와 유럽 극음악의 전통을 미국적 스타일로 개조한 뮤지컬의 힘이 컸다.
오늘날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대중음악은 모두 이런 재즈와 뮤지컬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재즈와 뮤지컬의 기원도 거슬러 올라가면 클래식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므로 서양 고전음악의 끝자락에 위치하면서 새로운 대중음악 시대로의 과도기에 존재했던 독특한 음악 장르인 재즈와 뮤지컬의 미학과 함께 주요 작가들과 작품을 살펴보겠다.
1) 뮤지컬(musical)
뮤지컬은 19세기 후반 유럽을 풍미한 오페레타 및 그와 유사한 음악극의 형식을 답습하며, 20세기 초반 이래 미국인의 기호에 맞춰 발달한 대중 음악극이다.
1800년대의 오페레타는 대화체의 대사와 음악과 춤으로 표현되는 낭만적인 이야기로 관객을 즐겁게 해주었다. 정통 오페라에 비해 가볍고 오락성이 짙은 소재와 대중적 인기몰이를 위한 쉬운 음악에 의존한 오페레타와 프랑스의 오페라 부프, 영국의 코믹 오페라는 미국에 건너가 노래가 중심이 되어 춤과 극적인 요소가 조화를 이룬 종합 공연물이 되었다. 즉, 노래와 춤과 연기, 잡다한 연예물을 뒤섞은 레뷔(revue)를 비롯해서, 버라이어티 쇼의 일종인 보드빌(vaudeville), 판토마임 등이 혼합된 뮤지컬 코미디(musical comedy), 뮤지컬 플레이(musical play)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또한 뉴욕 중심부인 브로드웨이 일대의 극장에서 상연되었기 때문에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뮤지컬의 첫 자품으로 1728년 영국의 존 게이(1685~1732)가 대본을 쓴 발라드 오페라 ‘거지 오페라’를 꼽는다. 당시 런던에는 오페라를 이탈리아어로 공연했고 관객들은 극장에서 객석의 불을 켠 채 번역된 대본을 보며 오페라를 감상했으나, ‘거지 오페라’는 잘난 체하는 관객들을 조롱이라도 하듯이 영어로 공연했으며, ‘도둑놈이나 권력층이나 모두 비슷하다’는 풍자적 내용으로 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더구나 음악을 작곡한 것이 아니라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대중 노래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공연함으로 오늘날 뮤지컬의 원형을 보여준다.
그 후 작사가 길버트(1836~1911)와 작곡가 설리번(1842~1900) 콤비가 1877년 런던 스트랜드의 사보이 극장에서 공연하기 시작한 ‘마법사’, ‘미카도’ 등 영국식 뮤지컬 코미디가 발전하며 이것이 바로 식민국이던 미국에 전파됐다.
미국에는 1750년 ‘거지 오페라’ 공연을 계기로 대중 음악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처음으로 미국인에 의한 뮤지컬이 탄생하였다. 원래 미국에는 1800년대 후반부터 이미 노래와 춤, 그리고 코러스 걸의 군무가 있는 연예가 널리 정착되어 있었다. 이런 토양에 빈 오페레타를 연결시키려는 추세가 당시 뉴욕과 시카고에 정착했던 유럽출신 예능인들에게서 나왔다.
1866년 가을, 뉴욕 최고의 시설을 갖춘 브로드웨이 극장 니블로스 가든에서 공연된 ‘검은 악당’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못된 악당이 악마의 사주를 받아 마법을 부린다는 이 뮤지컬은 처음부터 끝까지 으리으리한 장면들과 100명의 늘씬한 미녀들이 살색 타이츠를 입고 달빛 아래서 춤을 추는 장면으로 당시 미국 최대의 흥행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규모만 엄청났지 줄거리의 일관성과 구성이 어설픈 쇼였지만, ‘검은 악당’은 미국 최초의 뮤지컬로 기록되었다.
1880년대를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진정한 출발기로 보는 것도 건전함과 오락성으로 대변되는 브로드웨이의 쇼 비즈니스가 이때를 계기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미국에는 유럽의 영향을 흡수하면서도 자국 내 작곡가들의 창작 열기가 고조되며 가장 미국적 작품들이 생겨났다. 특히 1920년대는 브로드웨이가 가장 분주했으며 변화가 많은 시기였다.
한 시즌에 새 뮤지컬이 50편이나 오른 적도 있으며, 폼만 잡는 스타 쇼는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또한 미국 작곡가협회가 오랜 소송에서 승리하여 작품 권리를 작곡가가 갖게 되면서 뮤지컬에서도 남의 작품을 적당히 베끼는 일은 용납되지 않았으며, 창의적 작품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선구적 인물이 제롬 컨(1885~1945)이다. 뉴욕 음악원 출신인 그는 대본작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와 손잡고 1927년 ‘쇼 보트’(Show Boat)를 세상에 내놓았다.
‘쇼 보트’는 1880~1920년 사이에 미시시피의 쇼 보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꾸몄다. 당시 다른 뮤지컬에서 다루지 않던 인종 편견과 결혼 파탄 등 미국의 현실 문제를 뮤지컬에서 처음으로 다룸으로, 20세기 초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대표한 이 작품에서 ‘올 맨 리버'나, ’속임수'등의 노래는 관객들을 감동시켰다. 뮤지컬이 나아갈 길을 보여준 이 작품은 무성영화와 유성영화로도 제작되었고, 브로드웨이에서 무려 네 번이나 리바이벌되었다.
쇼 보트를 계기로 미국의 뮤지컬은 오페라적 요소에서 벗어나 대중적이고 따라 부르기 쉬운 음악적 경향으로 바뀌었다. 즉 관객들이 공연을 보기도 전에 이미 선율을 흥얼거릴 정도로 따라 부르기 쉬운 노래들이 뮤지컬의 기본 골격을 형성하였다.
미국식 뮤지컬의 선구자인 제롬 컨을 비롯해서 어빙 벌린(1888~1989)과 콜 포터(1891~1964), 조지 거쉰은 1930~1960년대에 걸쳐 많은 명작을 남긴 리처드 로저스(1902~1979)와 더불어 뮤지컬계의 ‘big 5'로 불린다. 이들의 작품은 미국 풍토와 사회, 인종 문제 등 현실 문제를 뮤지컬의 소재로 선택함으로 가장 미국적 뮤지컬의 전통을 확립했으며, 1940~1960년대에 이르는 뮤지컬의 황금기를 수놓았다. 이 중에 제롬 컨의 사망과 함께 콤비가 된 해머스타인 2세와 리처드 로저스는 만난 지 1년 만인 1943년 ‘오클라호마’라는 최고의 히트 상품을 내놓았다.
낭만적인 노래와 코믹한 노래가 조화를 이룬 ‘오클라호마’는 미국 뮤지컬을 하나의 예술형식으로 정착시키는 전기를 마련하며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오클라호마 이전 작품에는 유명 배우의 비중이 매우 컸다. 극의 흐름과 상관없이 스타가 등장하여 뽐내기 식의 연기를 함으로 종종 극의 흐름이 끊기곤 했다. 그러나 ‘오클라호마’는 현실적 스토리와 배역에 맞는 연기, 음악과 가사와의 유기적 관계가 중요해졌다. 즉 드라마의 원칙에 충실하며 대중적 음악에 접근한 세련된 뮤지컬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떠돌이 카우보이들이 정착해가는 과정과 마을의 공동체가 성립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주옥같은 노래들은 대중들을 사로잡았으며, 이 작품으로부터 비로소 뮤지컬 제작과 시스템 과정에서 작사가, 작곡가, 연출가, 무대미술가, 안무가 등 다양한 예술가들이 수평적 협력관계를 이루기 시작했으며, 이는 이후의 제작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클라호마’를 계기로 뮤지컬의 황금기를 연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은 ‘회전목마’, ‘남태평양’, ‘왕과 나’, ‘사운드 오브 뮤직’ 등 걸작 뮤지컬을 탄생시키며 최고의 콤비로 군림했으며, 이들의 작품은 대부분 영화화되어 뮤지컬 영화라는 또 다른 장르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영향력 있는 제작자로 어빙 벌린의 ‘애니여, 총을 들어라’ 등의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발라드의 왕’, ‘20세기의 포스터’라 불릴 정도로 미국 대중 음악계의 대부로 군림한 어빙 벌린과 1930년대 브로드웨이에서 히트작을 가장 많이 낸 콜 포터, 서양음악의 전통양식 속에 재즈를 용해시켜 미국 뮤지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조지 거쉰 형제의 작품들은 오늘날 뮤지컬 레퍼토리의 근간이 되었다. 이와 함께 프랑크 로서(1910~1969)의 ‘아가씨와 건달들’과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등이 미국식 뮤지컬의 대표작이다.
* 뮤지컬 ‘라이온 킹’의 브로드웨이 포스터
1994년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엘튼 존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작곡가 레보 엠이 음악을 담당했던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은 1997년 무대를 위한 2막의 가족 뮤지컬로 개작되었다.
* 거쉰 ‘포기와 베스’ 중 ‘서머 타임’
‘서머타임’은 거쉰(1898~1937)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서 나오는 노래다.
‘포기와 베스’는 초연 당시부터 오페라 극장이 아닌 일반 극장에서 상연되었으며, 대중성과 예술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 했던 작품인 만큼 이것이 오페레타냐 뮤지컬이냐 하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색 인종을 다룬 가장 훌륭한 작품’이란 점에는 누구나 공감했으며, 미국인이 작곡한 최초의 걸작 오페라라는 점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거쉰 자신은 이후 명실상부한 최고의 미국 작곡가로 인정받게 된다.
이 오페라의 배경은 193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 빈민가로, 부두의 하역부 크라운은 사소한 시비 끝에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치며, 그 후 그의 아내 베스는 앉은뱅이 거지인 포기와 살게 된다. 이후 크라운은 베스와 재회하지만 아내의 마음이 포기에게 가 있는 것을 알고 포기를 죽이려고 숨어들지만, 격투 끝에 크라운은 포기에서 살해되고 포기는 경찰에 조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 사이 교활한 마약장수 스포팅 라이프는 베스를 꼬여 뉴욕으로 함께 떠난다. 뒤늦게 경찰에서 풀려난 포기는 마을에 돌아와 베스가 떠났다는 걸 알게 되지만, 베스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며 그를 말리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삐걱대는 수레를 타고 천마일이나 떨어진 뉴욕을 향해 떠난다.
‘서머타임’은 1막에서 어부 제이크의 아내 클라라가 아기를 재우면서 부르는 노래다. 그리고 이 노래는 2막 끝과 3막에도 다시 등장하여 동일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같이 특정한 상황에 따라 주인공의 동기가 반복해서 나오는 것은 ‘포기와 베스’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로, 마치 바그너 음악의 ‘라이트모티프’와 유사하다.
Summertime an' the living is easy,
Fish are jumpin' an' the cotton is high,
Oh, yo' daddy's rich, An yo' ma is good lookin'
So hush, little baby, don't you cry.
One of these mornin' you goin' to rise up singin',
Then you'll spread yo' wings an' you'll take the sky.
But till that mornin' there's a nothin' can harm you
With Daddy an' Mammy stand in' by. Summertime...
미국에서 정치적으로 전환기이기도 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뮤지컬에도 전기를 마련한 시대다. 당시까지 뮤지컬은 낙천적이고 떠들썩한 오락적 분위기와 볼거리가 주를 이루었으나 히피 문화와 반전 운동 등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사실적으로 반영하며 보다 진지한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대중음악의 요소들도 뮤지컬에 반영되기 시작하여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와 대표되는 강렬한 전자 사운드에 무용이 더욱 강조되고, 흑인들의 호소력 짙은 창법들이 가미되는 새로운 뮤지컬들이 선보였다.
이 시대의 대표작으로 ‘헬로, 돌리!’, ‘지붕 위의 바이올린’, ‘헤어’, ‘코러스 라인’등이다.
브로드웨이라는 상징적 장소가 미국의 뮤지컬을 대변한다면, 뮤지컬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영국은 오랫동안 미국에 내주었던 뮤지컬의 제왕 자리를 되찾기까지 한 사람의 천재적 뮤지컬 작가를 기다려야 했는데, 그가 바로 앤드류 로이드 웨버(1948~ )로, 그는 작사가 팀 라이스(1944~ )를 만나 록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와 ‘에비타’를 연달아 히트시켰다.
특히 최고의 흥행사인 카메론 매킨토시와 손잡고 만든 ‘캣츠’를 통해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압도하기 시작했으며, 이후에 ‘오페라의 유령’으로 영국 웨스트엔드(브로드웨이에 상응하는 영국의 극장 거리)와 브로드웨이 모두를 석권하였다.
프랑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페라의 유령’은 옛날 무성영화로 만들어졌을 때는 공포영화였으나, 현재는 ‘미녀와 야수’비슷한 스토리가 되었다.
이 작품은 오페라 극장에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알고 보니 미모의 여가수를 짝사랑하는 사내가 저지른 일임이 밝혀진다는 극적인 줄거리를 갖고 있다.
여기에는 그동안 어떤 뮤지컬에서도 시도된 바 없는 소프라노의 최고 음역이 선보인다.
* 뮤지컬 ‘캣츠’
1981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되고 이듬해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캣츠>는 T.S.엘리엇의 시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를 극화하여 고양이로 분한 배우들이 인간 구원이라는 주제로 표현한 작품이다. 극 중 외로운 고양이 그리자벨라가 부르는 ‘메모리’는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뮤지컬 아리아다.
*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 중 타이틀곡 ‘The Sound of Music'
뮤지컬과 영화에서 동시에 성공한 ‘사운드 오브 뮤직’은 나치 독일에 병합된 조국 오스트리아로부터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폰 트라프 일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오클라호마’, ‘왕과 나’, ‘회전목마’, ‘남태평양’ 등 주옥같은 뮤지컬을 발표한 명콤비 로저스와 해머스타인 2세는 1959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사운드 오브 뮤직’을 선보임으로 이후 1443회라는 롱런을 기록했다. 그리고 초연한 이듬해 8월에 해머스타인 2세가 사망함으로 이 작품은 뮤지컬계의 명콤비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어두운 시대에 밝고 명랑한 분위기로 폭발적 반응을 얻어냈던 뮤지컬을 로버트 와이즈 감독이 영화화한 것은 1965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지 2년 뒤였으며, 마릴린 먼로의 자살과 히피 풍조의 만연,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내부의 갈등 등 여전히 사회적으로 어두운 분위기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이런 시기에 나치의 마수를 피해 오스트리아로부터 자유의 나라 미국으로 도피해온다는 내용과 함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아름다운 선율은 전 세계 음악팬을 사로잡았으며, 이른 봄 햇살에 잔설이 빛나는 알프스를 배경으로 녹색의 초원과 아름다운 저택에서 펼쳐지는 영상은 원작 뮤지컬에는 맛볼 수 없는 재미를 더하여 주었다.
타이틀곡 ‘The Sound of Music'은 오프닝 장면에서 주인공 마리아가 부르는 노래다.
헬리콥터로 공중 촬영을 시도한 이 장면에서 화면 가득히 펼쳐지는 알프스의 산록에 작은 흑점이 어느 사이엔가 사람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고, 그 그림자의 주인공은 수녀원의 견습 수녀 마리아다. 그리고 광대한 초원에서 마리아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노래한다.
My day in the hills has come to an end
I know
A star has come out
To tell me it's time to go
But deep in the dark green shadows are voices
That urge me to stay
So I pause and I wait and listen
For one more sound, for one more lovely thing
That the hills might say
(중략)
I go to the hills
When my heart is lonely
I know I will hear
What I've heard before
My heart will be blessed
With the sound of music
And I'll sing once more
로이드 웨버가 영국 뮤지컬로 20세기 후반의 세계 뮤지컬을 주도했다면 그와 함께 현대 뮤지컬계를 양분하는 인물은 브로드웨이를 대표하는 스티븐 손드하임(1930~ )이다.
그는 옆집에 살던 해머스타인 2세를 아버지처럼 따르며 자랐으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작사가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한 이후 새로운 실험으로 작품 세계를 열어갔다.
역사상 가장 어둡고 음침한 뮤지컬로 기록되는 ‘스위니 토드’는 브레히트적 관점을 보여주며, 그림과 실제를 넘나드는 연출로 주목받은 ‘조지와 공원에서의 일요일’로 ‘콘셉트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뮤지컬을 창조하였다. 즉 기존의 뮤지컬이 드라마의 전개와 내용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손드하임의 뮤지컬은 표현 방식에 집중한다. 따라서 연출과 무대 세트에 있어서 혁신성과 바그너를 연상하게 하는 음악의 새로운 표현 양식으로, 그는 뮤지컬을 돈을 벌기 위한 무대 장르로 인식하기보다 연극 못지않은 진지한 무대 예술로 인식한 소수의 작가들 중 한 사람이다.
* 번스타인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중 ‘아메리카’
번스타인(1918~1990)을 제대로 평가하기엔 ‘만능 예술가’라는 칭호로 부족하다. 러시아계 이민의 후예인 그는 지휘자, 피아니스트, 작곡가, 교육자, 방송프로그램 기획자 겸 해설가로 엄숙함으로 무장한 콘서트홀을 나와 때로는 TV에서 청중들을 상대로 강의했고, 때로는 브로드웨이를 위해 뮤지컬을 만들었다.
작곡가로서 번스타인은 특히 엄숙한 음악과 가벼운 음악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점과, 극장음악을 통해 가장 미국적인 정신과 강한 에너지, 자유의 의미를 추구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 뮤지컬 ‘온 더 타운’과 ‘캔디드’, 발레음악 ‘팬시프리’, ‘예레미야 교향곡’, ‘불안의 시대’ 등이 있다.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57)는 아서 로런츠가 대본을 쓰고 스티븐 손드하임이 작사했으며, 제롬 로빈스의 박진감 있는 안무에 힘입어 극 중에 나오는 명 선율과 함께 20세기 음악극의 정점이 되었다.
1961년 뮤지컬 영화로도 만들어져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1개 부문을 석권하기도 한 이 작품은 재즈와 팝 등 미국의 대중음악에 대해 우호적 자세를 취했던 번스타인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으로, 1950년대의 뉴욕을 배경으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가문간의 적대관계를 뉴욕 빈민가에 사는 불량소년들 간의 대립으로 설정하여 현대 미국의 도시가 지니고 있는 문제를 다루었다.
뉴욕 센트럴 파크의 웨스트사이드 지역에 기반을 둔 제트 파는 새로 이민을 온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샤크 파와 관할 지역을 놓고 늘 대립한다. 그런데 제트 파의 대장인 리프의 친구 토니와 샤크파의 대장인 베르나르도의 여동생 마리아는 댄스파티에서 만나 운명적 사랑을 나눈다.
제트파와 샤크 파의 결투가 있는 날 싸움을 막으려고 나간 토니는 실수로 베르나르도를 죽이게 되고, 토니와 마리아는 사랑의 도피를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토니가 마리아를 만나러 가던 중 샤크 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결국 이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극 중엔 우리 귀에 친숙한 ‘tonight'이나 ’Maria', 'somewhere'등 주옥같은 노래가 포함되어 있다. 이 중에 ‘아메리카’는 1막 5장에서 재봉사인 아니타와 로잘리아를 비롯한 푸에르토리코계 소녀들이 부르는 경쾌한 노래다.
토니와 마리아는 비상계단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tonight'을 노래한 후(이 장편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장면을 모방한 것이다) 인기척이 들려 토니가 나가자 소녀들이 등장하여 이제는 미합중국의 일부가 된 푸에르토리코에 대한 편견을 비꼬듯이 노래한다.
그녀들의 노래는 빠른 템포로 6/8박자와 3/4박자가 한 마디씩 교대되는 헤미올라(그리스어로 2:3이라는 뜻)의 변덕스러운 리듬 속에서 수다스럽게 전개된다.
“나는 미국이 좋아. 미국에선 모든 게 자유롭고, 봉급도 작다네…….”
웨버와 손드하임이라는 현대 뮤지컬의 큰 줄기 속에서도 나름대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한 사람으로 프랑스 작곡가 미셸 쇤베르크(1945~ )가 있다.
아놀트 쇤베르크의 손자인 그가 카메론 맥킨토시와 손잡고 만든 ‘레미제라블’과 ‘미스 사이공’은 그동아 뮤지컬이 금기시했던 비극적 상황을 무대에 올려 성공했다. 특히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월남판이라 할 수 있는 ‘미스 사이공’은 1988년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이래 브로드웨이 사상 최고의 예매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세기의 뮤지컬은 이렇듯 다양한 소재와 음악적 혁신, 옛 오페라 대본의 리바이벌, 영화화 등 오늘날의 시대적 감성에 부응하기 위해 변화를 거듭했다.
뮤지컬에는 많은 노래와 춤이 있다.
심오한 사랑의 노래부터 코믹한 노래까지 수많은 노래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풍자극인 레뷔와 뮤지컬이 다른 점은 전체에 일관된 극적인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뮤지컬의 줄거리는 대부분 낭만적 관계의 두 쌍의 인물을 중심으로 이들을 둘러싼 보조 인물들이 주인공들과 비슷한 극적 문제를 안고 행동한다.
일반 연극에서와 같이 문제의 상승과 하강, 갈등과 대결의 요소들이 있지만 대개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느 경우가 많다. 물론 ‘미스 사이공’처럼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남녀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희로애락의 감정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는 매체로서 좋은 뮤지컬에는 좋은 연극과 마찬가지로 인물의 성격에 대한 통찰과 진지한 생각들이 담겨 있다. 또한 오페라에서처럼 뮤지컬에도 합창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현대 뮤지컬에서의 빠르고 역동적인 춤들은 뮤지컬의 본령을 넘어 아예 춤 자체를 주제와 형식으로 삼는 작품들까지 등장하게 만들었다.
그 대표적 예가 ‘코러스 라인’, ‘댄싱’ 등의 작품이다.
오페라에서 주역 가수는 직접 춤을 추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뮤지컬 가수들은 댄서를 겸해야 한다. 숨 돌릴 틈 없이 생동감 넘치는 무대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것이 뮤지컬의 본령이라 할 때 뮤지컬은 그 어떤 장르보다 만능 엔터네이너를 요구한다.
뮤지컬은 일반 연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제작비와 인력을 요구한다.
관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드라마 외에 음악과 춤, 코러스의 앙상블과 스펙터클한 무대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영국 뮤지컬은 각 막마다 오프닝 코러스를 포함하여 약 20개 정도의 악곡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2막 구조로 되어 있었다. 현대의 뮤지컬도 이런 형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구체적으로 뮤지컬에서 구성극은 극이 시작하기 전에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서곡으로 시작하여 제시부분과 프로덕션 넘버로 이어진다. 여기서 프로덕션 넘버란 아리아와 함께 뮤지컬의 하이라이트로 대체로 1막의 중간 부분과 끝이나 2막의 첫 부분에 나오는 곡을 말하며, 한 작품에 2회 정도 소개된다. 여기엔 뮤지컬의 각 요소들이 모두 동원되어 화려하고 유쾌하다. 또한 뮤지컬엔 중요한 극적 순간에 앞의 노래가 다시 연주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변주의 형태를 가지는 이 반복 부분은 극적인 상황이 변하였음을 암시한다. 이와 함께 뮤지컬엔 쇼 스타퍼(Show Stopper)라 해서 일종의 기분 전환용 역할이 등장한다. 극의 진행 도중 끼어드는 유머러스한 노래나 연기로 인해 극의 진행은 사실상 중단되지만 관객의 흥미를 돋우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뮤지컬의 백미는 오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리아다.
아리아는 흔히 남녀 주인공의 사랑의 환희나 비극 등 작품의 주제를 담고 있는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연주되며 이중창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모든 음악 요소를 동원하여 공연이 끝나면 배우들은 관객들의 환호에 답하는 의미에서 그동안 공연된 극 중 주요 멜로디나 아리아, 합창곡 등을 편집하여 짤막하게 배우들의 춤과 함께 보여주면서 화려한 막을 내리는데, 이것을 커튼콜이라 한다.
뮤지컬이 현대 상업주의 오락의 흐름을 타고 너무 대형화, 기업화된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지만 오페라가 시대에 뒤떨어지는 소재를 택하고 있는 반면, 시대적 감성에 맞는 대사와 대중적 음악에 의해 강한 호소력을 갖는다는 점에서 뮤지컬이 현재를 넘어 미래의 대표적인 음악극이 되리라는 예측 또한 타당성을 갖는다.
* 창작 뮤지컬 ‘대장금’
최근 우리나라에도 무대 공연의 대세로 떠오른 뮤지컬은 대형 라이선스 공연과 창작 뮤지컬 외에도 대중의 사랑을 받은 소설이나 영화를 각색하는 등 다양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2) 래그타임과 블루스
뮤지컬은 클래식 음악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것은 뮤지컬 작곡가들의 면면을 보면 쉽게 짐작된다. 그러나 재즈는 무엇이 클래식의 요소를 품고 있는지, 재즈와 클래식의 차이가 무엇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단편적 답이지만 작곡가에게 무게 중심을 두느냐, 아니면 연주자에게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차이를 구분할 수도 있다. 즉, 이미 만들어진 고정된 음악을 연주하는가, 아니면 몇 가지 중요한 선율이나 코드만을 놓고 연주가들이 즉흥적으로 연주하는가의 차이에 따라 클래식과 재즈를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즈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래그타임(ragtime)과 블루스에는 이런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요소를 갖고 있다.
1890년 미주리주의 세달리야에는 흑인들에 의해 미국적 통속음악인 래그타임이 탄생하여, 미국은 물론 유럽에 까지 널리 선보인 독특한 음악이 생겼다.
래그타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지만, 19세기 말 미국에서 발생하여 유럽에 유행한 케이크워크라는 흑인 춤을 기원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드뷔시는 그의 피아노곡 ‘어린이 세계’ 의 마지막 곡 ‘골리워그의 케이그워크’에서 다소 익살스러운 이 리듬을 차용하고 있다.
19세기 중엽 흑인 노예제도가 존재하던 시절, 주인들은 노예들로 하여금 일요일이면 파티를 열도록 허락했는데, 이 파티의 절정은 남녀 한 쌍이 춤을 추면서 걷되 가장 생기 있고 멋지게 퍼레이드를 벌이는 경연이었다.
케이크워크라는 명칭은 경연에서 가장 멋진 춤을 춘 팀이 상으로 케이크를 받은 데서 붙었다.
이 걸음걸이에서 유행한 음악의 특징은 흑인 피아노 연주자들이 즐겨 연주한 래그타임의 리듬으로 흡수되어, 베이스에서는 일정한 2박자의 리듬을 연주하는 동안 위의 선율에서는 싱커페이션을 연주하는 독특한 음악을 탄생시켰다.
스코트 조플린(1868~1917)에 의해 전성기를 구가한 래그타임은 본질적으로 흑인의 음악이지만 유럽에선 백인에게 흡수된 음악이며, 즉흥 연주된 것이 아니라 보통 4마디 단위의 선율이 두 번씩 반복되는 형태로 16마디의 선율로 작곡되는 등 클래식과 연관을 갖고 있다.
조플린을 비롯한 초기의 재즈 음악가들은 유럽의 정통 클래식 음악의 장점들을 마른 스펀지에 물을 흡수하듯이 하였다.
어느 시기나 대중음악은 순수음악의 새로운 어법들을 손쉽게 차용하여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곤 했지만, 19세기 말도 예외는 아니어서 풍부한 반음계주의의 기법들이 군대와 살롱, 무도장에서 손쉽게 연주되었다.
현존하는 래그타임의 악보들을 보면 쇼팽의 폴카나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행진곡과 유사한 음형이나 화음 진행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래그타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싱커페이션 리듬은 당시의 클래식 음악 작곡가들을 자극하였다.
래그타임의 원래 이름은 ‘래그드 타임(Ragged time)’이었다. 여기서 Ragged는 리듬이 고르지 못하고 들쑥날쑥한 찢기고 남루한 느낌을 의미한다. 고전음악에서 규칙적 리듬을 세련된 방법으로 탈피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싱커페이션을 시도하던 작곡가들에게 다소 거칠지만 신선한 매력을 가진 래그타임 리듬은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주었으며,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작품에 반영한 사람은 스트라빈스키였다.
스트라빈스키는 ‘피아노 래그 뮤직’과 ‘11악기를 위한 래그타임’, ‘병사의 이야기’ 등에서 래그타임의 리듬을 적용하였다. 또한 드뷔시는 그의 전주곡 2권의 여섯 번째 곡인 ‘괴짜 라빈느 장군’에서, 에릭 사티는 발레음악 ‘퍼레이드’에서 활기차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레그타임 리듬을 사용함으로 20세기 초반 유럽 음악가들의 초기 재즈에 대한 관심을 대변했다.
래그타임과 함께 재즈의 전신으로 불리는 불루스(blues)는 흑인 노예의 노동요에서 출발한 노래로, 블루스의 사전적 정의는 ‘20세기에 나타난 미국 흑인들의 민속음악’이다.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조지아와 미시시피, 테네시 등지의 흑인 가수들은 연인이나 직업을 상실한 아픔을 스스로 위로하는 노래를 불렀다.
블루스의 어원 중에 ‘the blue devil’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는 우울증을 의미한다. 따라서 미국으로 끌려온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자신들의 우울함을 달래기 위한 음악으로, 이를 표현하지 못하면 진정한 블루스 음악가가 아니라고도 본다.
초창기의 블루스는 전적으로 흑인에 의해 연주되었다. 기록은 없고 추측뿐이지만 초기의 블루스가 대부분의 제목에 나타난 남부의 지명에다, 남부에서 약을 팔며 노래를 불렀던 흑인들이 가수로 활약하여 직업 특성상 지역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급속도로 확산된 것으로 보이며, 또한 거리의 전도사들이 부르는 가스펠 송과도 연관을 맺으며, 1920년께는 완전한 형태의 블루스 가수가 나타났다.
블루스는 음악가들 대부분이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흑인으로 악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악보 없이 연주하는 즉흥연주의 형식이다. 결국 이 즉흥성은 블루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며 동시에 재즈의 본령이다.
즉흥 연주를 지속한 결과 다양한 형태의 패턴이 만들어졌으나, 그중에도 하나의 블루스 패턴이 보편성을 띠게 되었다. 그것은 12마디의 블루스 패턴으로 음악적으로는 길이가 같은 4마디 단위의 악구를 3행시에 붙인 AAB 형태로 배치하는 것이다.
여기서 1행은 무엇인가를 호소하고, 2행은 제1행을 되풀이해서 강조하며, 3행은 호소하던 것에 대한 결론이나 결정적 사실을 진술하게 된다.
화성적으로는 Ⅰ-Ⅴ-Ⅳ-Ⅰ의 진행을 보이는 특징을 갖고 있다.
초기 블루스에서 반주를 맡던 연주자들은 3행으로 구성된 각 선율의 끝 부분의 휴지부에서 즉흥연주를 하였으며, 이는 아프리카 음악이 집단 무반주 노동요가 리더의 선창과 구성원들의 응창(합창)의 형태로 되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블루스를 가장 블루스적이게 한 것은 장음계의 3음, 5음, 7음을 반음 낮춘 ‘블루 노트(blue note)’라고 한다. 하지만 반음 낮추어진 음은 노래에만 해당되고 반주에는 원래 음 그대로 연주하기 때문에 일종의 불협화음이 생기고, 이것은 다른 문화권에선 보기 힘든 독특한 것이다. 이로써 블루스 가창은 흑인의 생활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 되고, 1920년대는 ‘블루스의 황후’로 불렸던 베시 스미스(1895~1937)를 비롯해 많은 블루스 가수들이 등장하였다.
사회적이고 역사적 사실과 결부되어 구체적 모습을 드러낸 블루스는 시대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하면서, 그 시대에 가장 대중적 음악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다양한 명칭도 갖게 되었다. 원래의 의미에 가장 가까운 포크 블루스, 델타블루스를 비롯해서, 도시적 색채를 지닌 어번 블루스와 비트를 강조한 록 블루스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블루스는 재즈의 연주 소재가 되는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팝이라 부르는 대중음악에 이르기 까지 연주나 표현상의 정신적 중추로서 현재도 살아있는 음악적 자원이다.
블루스 음악은 근본적으로 즉흥 연주되고 구전으로 계승되는 것이 특징이며, 고된 노동과 외로움 등 흑인의 애환을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 중엔 낙천적인 것도 있으며 흑인의 생활을 소박하게 담고 있는 영혼의 노래라 할 수 있다.
* 스코트 조플린 ‘단풍잎 래그(Maple Leaf Rag)
레그타임의 제왕으로 불린 흑인 작곡가 스코트 조플린(1868~1917)은 미국 텍사스 주에서 태어나 음악에 조예가 깊은 노예 출신의 부모로부터 공부를 했다지만 유년기에 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1880년 초부터 보컬그룹을 결성하여 세인트루이스 등 도시를 다니며 연주했고, 1893년 시카고에서 자신의 벤드를 가지며 시카고의 레그타임 피아니스트인 선더스(Otis Saunders)를 만났다. 당시까지 거의 즉흥 연주에 의존하던 조플린은 이때부터 악보에 자신의 음악을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대학에서 음악을 공부하며 본격적으로 콘서트 피아니스트와 고전음악 작곡가를 꿈꾸며 가곡과 피아노곡의 출판을 시작한다.
1899년 ‘단풍잎 래그’의 히트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그는 1902년 ‘엔터네이너’를 비롯한 일련의 래그타임 곡들을 출판하며 ‘스코트 조플린 오페라 회사’를 건립하기도 했다.
1907년 뉴욕으로 옮긴 조플린은 ‘래그타임 파’라는 교본을 써서 그의 복잡한 베이스 사용 방법, 빈번한 싱커페이션, 스톱 - 타임의 휴지, 화성적 발상 등을 설명했는데, 이들은 그 후 널리 모방되었다.
조플린에게 명성을 안겨준 것은 피아노 래그타임 음악이지만 실제 심혈을 기울인 분야는 오페라다. 그러나 최초로 쓴 오페라는 악보가 남아있지 않고 자신이 대본을 쓰고 안무도 한 오페라 ‘트리모니샤’는 비공개 공연만 했을 뿐이다.
조플린은 결국 작품의 성공에 집착하여 신경쇠약에 걸리고 매독으로 때 이른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반세기만에 ‘트리모니샤’가 리바이벌 되고, 1973년 영화 ‘스팅’에 ‘엔터네이너’를 비롯한 그의 곡들이 실리면서 조플린의 래그타임 곡들은 아카데미 수상과 동시에 대중적인 피아노 음악사의 한 장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1976년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조플린에게 명성을 안겨준 곡이면서 ‘엔터네이너’의 모체가 되기도 한 ‘단풍잎 래그’는 2/4박자로 시종일관 반복되는 왼손 반주 위에 오른손이 경쾌한 싱커페이션 리듬을 연주한다.
곡은 A-B-A-C-D의 독특한 구성을 보이며 각 부분은 16마디로 반복 되며, 제시된 악보는 B부분의 처음 네 마디다.
3) 재즈(Jazz)
재즈를 두고 어떤 사람은 클래식에 못지않는 음악 예술로 평가하고, 어떤 사람은 오락음악 정도로 생각한다.
재즈에 대한 정의는 각양각색이지만 재즈가 일정한 형태를 갖추고 성장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클래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유는 재즈의 악기 자체가 대부분 클래식 악기며 19세기 말 기능 조성이 쇠퇴하면서 풍부한 반음계주의의 기법들이 군대와 살롱, 무도장 등에서 손쉽게 연주되었던 것도 대중음악이 순수음악의 요소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배경이었던 것이다.
유럽의 각 나라들로부터 뉴올리언스와 캔자스 시티 등 항구도시로 흘러 들어온 19세기 유럽의 음악어법은 이렇듯 토착적인 음악과 맞물려 새로운 음악 조류를 탄생시켰으며,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 노예들의 음악과 군대의 음악, 유럽의 민속음악 등, 실로 다양한 요소들이 재즈라는 용광로 속에 용해되어 20세기 음악사의 큰 물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재즈의 역사는 시대와 함께 변화해온 연주방식이나 발생지의 지명을 따서 여러 스타일로 분류한다.
재즈의 초기형태가 나타난 것은 뉴올리언스였지만 재즈라는 용어는 1910년대 중반 시카고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때만 해도 재즈가 아니라 ‘재스(jass)’로 불렀으며, 뜻도 다소 외설적인 것으로 홍등가를 의미했다. 그 때문에 이 말이 시카고 일대에 퍼지자 시카고 음악가 협회에서 즉시 사용을 중지하려 했지만 순식간에 대중들의 입을 타고 퍼져나갔고, 결국 재즈로 그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레코딩을 통해 일반에게 알려진 것은 1917년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밴드(ODJB)에 의해서였다. ‘ODJB’는 뉴올리언스 출신의 백인재즈 음악가들이 1916년 시카고에서 결성한 밴드로 1년 후에 이들은 뉴욕에 진출하여 뉴올리언스 스타일로 편곡한 그들의 음악을 가지고 당시로는 기록적 수치인 백만 장의 레코드를 팔았으며, 재즈라는 용어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밴드는 4/4박자를 2/4박자처럼 연주하기 때문에 ‘스피드 재즈’라고도 불렸다.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밴드가 최초의 재즈 음반을 낸 1917년이 재즈 역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해에 항구도시 뉴올리언스의 홍등가인 스토리빌이 미 해군 당국에 의해 강제로 폐쇄 당함으로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재즈 음악가들이 일자리를 잃고 시카고와 뉴욕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 뉴올리언스에는 래그타임과 블루스의 영향을 받아 재즈가 점차 골격을 갖춰가고 있었으며, 주로 크레올(프랑스인과 흑인의 혼혈)사이에서 소편성(5~7명의 연주자)에 의한 즉흥연주 형식의 재즈가 유행하였다.
이때의 밴드 악기 편성을 보면, 코넷과 클라리넷, 트롬본이 선율을 담당하고 벤조와 튜바, 드럼이 리듬을 맡았다. 요즘의 보편적 재즈 악기로 접하는 피아노와 베이스, 색소폰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밴드로 ‘킹’올리버가 만든 ‘크레올 재즈 밴드’를 들 수 있다.
이 악단에는 내로라하는 뉴올리언스의 연주가들이 모여 최고의 밴드임을 자랑했는데, 그 중에는 훗날 재즈사에 족적을 남긴 루이 암스트롱도 있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을 기점으로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 스코트 피츠제랄드는 그 이후의 시대를 ‘재즈 시대'로 명명하였는데, 그의 표현처럼 1920년대 이후 약 20년간 재즈는 미국과 유럽대륙을 폭풍과 같이 휩쓸었다.
당시 미국 전체엔 금주령이 내려졌지만 나이트클럽이나 카바레에는 여전히 밀주가 넘쳤고, 재즈의 주 무대였던 시카고의 밤업소는 갱단의 텃밭이었다.
이들 갱단은 재즈 음악가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으며, 음악가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에 따라야 했다.
당시 시카고와 함께 많은 재즈 음악가들이 모여든 뉴욕에는 주목할 만한 경향이 나타났는데, 할렘가를 중심으로 아트 테이텀(1910~1956) 같은 솔로 피아니스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를 초연한 폴 화이트맨 악단처럼 감미로운 음악을 통해 재즈의 콘서트 화를 추진한 음악인들이 증가했다.
유명한 트럼펫 연주자 윈튼 마살리스(1961~ )는 재즈를 일컬어 “블루스를 연주하면서 거기에 스윙 감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재즈에서 ‘스윙(swing)'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하나는 재즈 연주 상 악보에 기재하기 어려운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는 약동적인 리듬감을 나타내는 형용사로서, 주로 싱커페이션의 느낌을 강조하는 용어다. 즉, 재즈를 감상할 때 저절로 몸이 움직여지는 어떤 느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1930년대 초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재즈의 주류를 이룬 스윙 음악을 가리키는데, 4/4박자의 규칙적이며 달콤한 리듬이 특징인 댄스 음악 용어로 1930년대는 재즈라는 말 대신 스윙이 더 자주 사용되었다.
스윙 시대는 흔히 재즈의 전성기로 불리며, 특히 당시엔 10명에서 20명까지의 사이드맨(일반 밴드 구성원)으로 구성되는 빅 밴드의 전성 시대였다.
빅 밴드는 트럼펫과 트롬본의 브라스 섹션, 클라리넷과 색소폰의 리드 섹션, 드럼, 기타, 피아노, 베이스의 리듬섹션으로 구성되었다.
빅 밴드로 상징되는 스윙 재즈의 큰 특징은 일반인들도 듣고 즐기는 음악이었다.
1929년의 대공황을 극복한 미국은 금주령의 해제와 함께 스윙 바람에 휘말렸다.
댄스홀이나 나이트클럽은 이들이 연주하는 스윙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이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으며, 그 중에 듀크 엘링턴 악단과 베니 굿맨 악단은 클래식 작곡가들로 하여금 그들을 위해 곡을 쓰게 할 만큼 폭발적 인기를 누렸으며, 베니 굿맨 악단은 카네기홀에서 클래식 연주가가 아닌 재즈 악단으로 역사적인 연주회도 가졌다.
듀크 엘링턴은 1932년부터 약 10년간 지속된 스윙 시대에 카운트 베시, 플레처 핸더슨, 아티 쇼, 해리 제임스, 글렌 밀러 등 수많은 빅 밴드 리더들이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듀크 엘링턴(1899~1974)만큼 후세에 영향을 미친 음악가도 드물었다.
그는 피아니스트일 뿐 아니라, 재즈 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며 편곡자다.
엘링턴은 50년 이상의 활동기간 중 자신의 빅 밴드를 위해 수많은 걸작들을 남겼으며, 150장 이상의 앨범을 통해 1천여 곡을 레코딩 했다.
알토 색소폰의 자니 호지스 등 수많은 연주자들은 그의 빅 밴드를 통해 유명해졌으며, 마일즈 데이비스 등 유명한 후대의 재즈 연주가들은 그를 위한 헌정 앨범을 발표했다.
듀크 엘링턴과 더불어 재즈 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인 루이 암스트롱(1900~1970)은 빈민굴에서 자라나 소년원에서 배운 코넷으로 미국의 국보급 존재로 성장한 인물이다.
1925년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악기를 바꾸면서 최고의 연주가로 자리매김한 암스트롱은 재즈의 대명사가 되어, 1944년엔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오르는 신화를 창조했다.
그의 트럼펫 소리는 어느 음역에서나 고르게 따뜻했으며, 고음에서도 부드럽고 달콤한 소리를 냈다. 특히, 밴드를 배경으로 그의 솔로가 시작되면 누구든 제시 -전개 -반론 -긴장 -결론으로 이어지는 논리적이면서도 자유분방한 그의 소리를 알 수 있었다. 특히 더블타임주법(정해진 속도보다 배가 빠른 속도로 펼쳐지는 연주법)이나, 훗날 일반화된 부가화음 수법과 스캣 창법 등 다양한 암스트롱의 스타일은 많은 재즈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쳐, 자신만의 색깔을 추구하는 수많은 개성 있는 스타일리스트들을 탄생시켰다.
클래식 음악에도 후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작곡가들이 많지만, 재즈 역사에도 불멸의 이름을 남긴 연주가들이 있다.
재즈는 연주 중심의 음악으로 연주 가운데 펼쳐지는 생생한 작곡과정을 즐기는 음악이므로, 연주자의 음악성과 개성, 독특한 표현력과 독창적인 스타일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재즈 용어 중에 스타일리스트란 말은 바로 독자적 연주와 해석의 스타일을 갖춘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작곡가로서의 개성을 자신의 악단을 통해 최초로 표현한 듀크 엘링턴, 재즈에 있어 처음으로 솔로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루이 암스트롱과 1930년대까지의 재즈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재즈(모던 재즈)의 길을 열어간 알토 색소폰 주자 찰리 파커(1920~1955) 등이 위대한 스타일리스트로 추앙받는다.
사회 상황과 음악이 맞물리는 예는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로 결정하면서 스윙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재즈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빅 밴드 단원들이 징집되고 1940년대 초반부터 카바레들이 속속 문을 닫으면서, 해체된 단원들은 소규모 앙상블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따라서 편곡과 작곡보다 솔로 즉흥연주가 중시되었으며, 이로써 형식의 장벽을 깨뜨린 화성 진행과 마디의 해방에 의한 새로운 연주 스타일이 등장하였다.
1939년 찰리 파커는 뉴욕의 한 재즈 클럽에서 ‘체로키(Cherokee)’를 솔로로 연주하던 중 밥(bop, 또는 be-bop)이라 부르는 재즈 스타일을 발견했다.
밥의 즉흥연주는 대개 8분음표나 16분음표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연주 템포가 무척 빠르며, 기본 화성도 한 곡당 10개~20개나 되기 때문에 이것을 변형시킨 연주를 하려면 고도의 기교와 즉흥연주 실력을 갖추어야만 했다.
탁월한 화성 변화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파커 외에도 피아노의 셀로니어스 몽크와 트럼펫의 디지 길레스피, 테너 색소폰의 스탄 게츠 등 재즈 본류의 중요한 음악가들은 태반이 밥 시대에 배출되었다.
그러나 밥은 더 이상 대중의 음악이 아니었다. 밥을 기점으로 재즈가 대중음악수준을 벗어나 예술의 단계에 진입함으로써 클래식에 버금가는 예술음악으로서의 새 지평을 열기는 했지만, 밥은 춤추고 즐기기에는 너무 빨랐으며 어려웠다.
스윙에 익숙한 재즈 애호가들은 점차 밥 이후의 재즈에 등을 돌렸으며 마치 20세기 현대음악이 대중에게 외면 받았듯 재즈도 록과 다른 팝음악의 인기에 점차 밀려났다.
재즈는 본질적으로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을 거쳐 왔다.
밥 이후 1950년대는 솔로와 즉흥연주의 잼세션을 통해 듣는 이로 하여금 흥분으로 몰아가는 이른바 ‘핫 재즈’의 대응물로 ‘쿨 재즈’가 주류를 이루었다.
재즈 역사상 가장 지성적 연주가로 손 꼽히는 마일즈 데이비스(1926~1991)는 그의 앨범 ‘The Virth of Cool’에서 색소폰이나 기타 대신 호른과 튜바, 비브라폰을 추가하며, 세련되고 지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것은 밥의 이념을 계승하면서 미리 악보를 써 놓는 등 클래식과 유사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쿨 재즈를 모던 재즈라고도 하지만 이후의 재즈 경향은 앞선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진화의 과정을 밟아갔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서양의 장, 단음계 대신 선법(mode)을 사용하여 만든 선법재즈나, 1960년대의 전위예술사조와 맞물려 등장한 프리재즈, 1970년대의 퓨전재즈, 1980년대의 프리 펑크재즈 등은 재즈의 상업화 현상과 맞물려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되어 왔다.
특히 퓨전 재즈는 로큰롤 음악이 위세를 떨치던 1960년대부터 로큰롤에서 쓰는 전자악기와 굉음 등 록 특유의 스타일을 흡수하여, 재즈가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렇듯 시대를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진화하는 다양한 재즈의 스타일에 따라 연주하는 악기도 여러 가지 조합을 보이는데, 기본적으로 재즈 악기는 클래식 악기와 큰 차이가 없다. 리드 악기로서 클라리넷과 알토 색소폰, 테너 색소폰, 바리톤 색소폰 등 색소폰 악기가 활약하며, 트럼펫과 트럼본이 관악기로 참여한다.
리듬 악기로는 피아노와 기타, 베이스, 드럼 세트가 표준 악기로 되어 있다.
위의 악기 외에도 비브라폰, 플루트, 오르간, 프렌치 혼, 아코디언이나 드물게 바이올린과 첼로가 사용되기도 하며, 퓨전 재즈 이후에는 다양한 전자악기도 포함된다.
과거에는 밴드의 구성이 일정했으나 오늘날에는 빅 밴드나 캄보(combo)는 물론 오케스트라의 경우에도 편성은 자유롭다.
엄밀히 말해 재즈에는 작곡이란 개념이 없다. 물론 곡마다 작곡가가 있지만 클래식 음악의 작곡과 달리 전체가 아니라 극히 일부만이 작곡된다.
재즈의 ‘작품’이란 단지 몇 개의 주제 선율과 기본적인 화음 구성을 가리키며 나머지 부분들은 연주할 때마다 연주자에 의해 새롭게 채워지고 즉흥적으로 다르게 해석된다.
재즈 연주자들은 누구나 즉흥연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재즈는 연주자들의 개인적 감흥과 동료 연주자들과의 호흡 속에서 피어나는 ‘순간의 음악’이라 할 수 있다.
재즈를 연주하거나 듣는 사람들 사이엔 ‘그루브(Groove)’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오직 순간순간 몸만이 느낄 수 있는 절묘한 리듬감이나 어울림을 뜻한다.
원래 그루브란 쏙 파인 ‘홈’을 의미하는데, 즉 정박에서 약간씩 늦추거나 또는 빠르게 연주함으로 리듬감의 공백이 생기는데, 순간적으로 공백이 생긴 리듬 타이밍을 앞 또는 뒤에서 낚아챔으로 말 그대로 파인 곳을 타고 내려갔다 올라갔다 당겼다 밀었다 하는 느낌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재즈 연주에서의 즉흥성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용어다.
재즈는 독주 중심의 재즈가 있는가 하면 그룹에 의한 독자적 표현에 중점을 두는 재즈 스타일과 오케스트라에 의한 작곡과 편곡에 중점을 두는 재즈 등, 가장 다채롭고 자유로운 표현을 허락하는 음악이다.
오늘날 재즈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재즈 고유의 전통에 충실하고 있는 프리 재즈보다는 팝이나 록에 익숙한 일반인에게는 퓨전 재즈가 더 인기 있고, 한국에도 재즈라 하면 대부분 퓨전의 성격이 짙다.
그러나 재즈는 원래 민중의 음악으로부터 탄생한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재즈 고유의 역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악과 결합할 수 있는 열린 구조를 갖고 있다.
발생 초기부터 유럽의 고전음악과 아프리카의 니그로 음악의 유산(블루스, 가스펠, 흑인 영가, 노동요 등), 라틴 아메리카의 민속음악과 미국의 초기 대중음악이 복잡하게 혼재되어 있는 음악적 혼혈아로서, 재즈는 리듬 앤 블루스(Rhythm & Blues)나 소울 음악, 록 음악 등, 대중음악과 혼합되며 현재도 진행 중에 있는 가변성의 음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