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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씨의 역사
- 우리나라 성씨의 시초는 삼국시대 전후부터다.
한반도는 삼국시대 전후부터 성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고(高)씨의 성을 사용했고,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부터 여(餘)씨, 무왕 때부터는 부여씨(扶餘氏)를 사용 했으며, 신라는 진흥왕 때부터 김씨 성을 사용했던 기록이 있으며, 또한 박(朴), 석(昔), 김(金) 세 성씨의 전설이 전해져 오고, 신라 3대 유리왕 때는 육부촌장에게 이(李), 정(鄭), 손(孫), 최(崔), 배(裵). 설(薛)씨의 성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성씨가 체계화 되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 세력을 관장하기 위해 전국의 군, 현을 개편하고 성을 하사하여 우리나라의 성씨 처계가 확립되었다.
태조 왕건은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김선평, 권행, 장정필에게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 성을 하사하였으며, 고려 문종 9년(1055년)에는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법령을 만들었고,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 되어 일반 민중이 성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때문에 문종 이후에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은 편이다.
- 조선시대에도 성씨를 가진 자는 많지 않았다.
조선초기엔 국가의 지배계층으로 양반계급인 전체 인구 10~15%의 사람만 성씨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 중기부터는 전체 인구의 40%를 차지하는 평민들도 각 씨족 별로 구전 해오던 자료에 의해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집성촌을 이루지 못하고 생활한 유랑민이나 천민은 성씨 없이 돌쇠, 떡쇠, 개똥이, 삼돌이 등의 이름만 불렸다. 그리고 이때부터 조상들의 벼슬을 과장하거나, 명문 가문의 족보를 사고팔거나 훔치는 등의 족보 조작이 시작되었다. 또한 사대주의 사상으로 중국에서 유래된 족보로 조작하기도 했다.
조선후기엔 양반 계층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가 조선 말기인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에 의해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국가제도가 근대적으로 바뀌면서 양반 상민의 신분격차를 없애자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양반임을 주장하고 매관매직은 물론 족보를 사고파는 행위가 성행하였다.
- 일제시대의 강제 호적으로 많은 성씨와 양반이 생겼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7년~20세기 초) 때 전 국민의 성씨 가지기 정책을 시행하여 모든 사람이 성씨를 갖게 했는데, 이 때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가 살던 집의 위치나 동네의 특징으로 성씨를 만들어 田中, 中村, 松下... 등의 다양한 성씨가 순식간에 8만 개나 창씨 되었다. 따라서 특정 성씨로 편중되지 않고 성씨로서 가문의 역사를 이야기할 것도 없는 편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성씨의 자부심이나 애착이 없어 중국이나 한국과 큰 차이가 있다.
1895년 갑오경장(양반제도 폐지, 노비 매매금지 등의 근대적 개혁 혁명) 이후 일본은 1909년 조선인에게 민적법(호적법)을 시행하였는데, 당시 일제는 조선인의 계급을 타파하여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 했지만 실상은 지도층인 양반 사회를 통제하기 하기 위해서였다.
즉, 천민이든 양반이든 자신의 성씨로 관청에 호적을 등록케 해서 특별한 신분층이 부각되지 않게 하여, 양반이 주도하는 일본에 대한 저항의 근거를 없애려고 한 것이다. 따라서 이 때부터 우리나라는 모든 사람이 성을 가져서 평등사회로의 진입에는 일조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것으로 일본이 우리의 근대화를 앞당겼다며 좋은 일을 한 것인 양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일본의 의도는 빼고 결과만 본 것이다. 만약 일본의 의도대로 우리를 계속 통치했다면 우리는 일본 안에서 평생 2등 국민의 굴레를 쓰고 비참하게 살았을 것이다.
아무튼 일제는 성이 없던 우리나라의 일부 평민과 천민(노비)에게 이들이 신청하는 유명성씨의 호적을 만들어서 조선의 양반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막았고, 또한 노비를 양민화시켜 수탈의 대상을 늘리는 식민정책으로도 활용했다. 그리고 이때 호적 담당 관리나 경찰이 임의로 성씨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지만, 성씨가 없던 전 국민의 40% 이상인 평민이나 천민 층이 새로 성씨를 만들기 보다는 권문세도가나 거대씨족의 성씨를 빌려 신고함으로써,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 전 국민의 성씨 가지기 정책에서 많은 성씨가 창씨된 것과는 다른 결과를 낳았다.
즉, 특정 성씨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는데, 이는 명문세도가의 노비들이 새 성씨를 신고하면서 자기가 섬기던 양반의 성을 그대로 따라서 짓거나, 반대로 양반이 해방된 노비를 회유하여 노역을 계속 시키기 위해 자기의 성씨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김좌진(안동 김씨) 장군 같이 부리던 노비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자신의 성씨를 부여한 뒤 신분을 해방시켜준 양반도 있었다.
그리고 일제가 시행한 민적법으로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던 ‘돌쇠, 밤쇠, 삼월이, 오월이....’들이 일본처럼 새로이 성씨를 만들지 않고 그 동네의 지주나 양반들에게서 성씨를 얻어 관청에 신고한 근본적인 이유는, 오랫동안 양반사회를 겪으면서 양반이 되고 싶은 우리나라 민초들의 소망에 의한 기현상이었다.
이로써 전 국민의 양반화가 이루어져 옛날이야기에 나오던 방자, 향단이, 마당쇠, 구월이의 자손은 자취를 감추었고,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나 무슨 정승, 판서의 몇 대 손이 되어 양반의 후손만이 남아서 세계에서 귀족이 가장 많은 나라, 제사가 가장 많은 희한한 나라가 되었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제사나 차례를 지내지 않았고 지낼 수도 없었던 상놈이나 평민이 절반 이상이었는데, 요즘은 누구나 제사와 차례를 지낸다. 또한 일제 민적법의 실행 당시 가장 인기였던 성씨인 김, 이, 박 등이 압도적으로 많게 되었다. 다시 말해 본관에 따라 성씨의 우열과 가문의 품격에 차등이 있었기 때문에 본관을 유력 가문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리고 깊은 사대주의 사상으로 본관의 시조를 중국의 같은 성씨로 바꾸기도 하여 위조 족보가 대량 작성되었다.
하지만 조선의 양반 법도는 엄격한 유교 윤리로 양반의 행동거지는 참으로 어렵고 엄했다. 따라서 천민은 흉내 낼 수도, 낼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였다. 이걸 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본인이 자신의 인격과 상관없이 내가 대단한 양반의 후손이네 해도 믿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실제는 양반집의 돌쇠였거나, 아니면 평민의 개똥이 일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양반은 항상 권속에 대한 책임감과 가문의 명예를 위한 중압감을 갖고 생활하였는데, 즉, 아무리 화가 나도 막된 행위나 막말을 하면 구설에 올라서 그가 한 행동이 양반 사회의 평가로 소문이 퍼지면 쌍놈의 가문으로 낙인찍혀, 자녀의 출가 문제 등 많은 부분에서 제약을 받기 때문이었다.
즉, 양반 성씨가 그 사람의 품행을 구속하여 법도와 예를 생명같이 여기고 살게 되었다. 따라서 양반사회는 이러한 순기능도 있었다.
- 우리나라의 족보
족보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외국에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것으로 정평이 났으며 계보학의 종주국으로도 꼽힌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종에 13,000여권의 족보가 소장되어 있다. 특히 미국 하버드 대학에는 족보제도를 연구하려고 우리나라의 족보를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관하며, 미국의 일부 다른 대학에도 우리나라의 족보를 모델로 한 계보 작성법을 학과에 편성하고 우리나라의 계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 우리나라의 성씨관
우리나라의 성씨 역사를 보면 학자에 따른 이견이 있지만 민족의 자부심과 나 자신이 단군의 후손으로 여긴다면, 고조선(古朝鮮)시대부터 왕실(王室)과 일부 대신(大臣)들이 성(姓)을 사용하기도 하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 이는 씨족별 및 부족통솔자의 정치적 신분을 표시하는 중요한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원래 우리나라의 토착민은 성씨가 없었다.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일부 고위 관리에게서 성씨를 가진 자들이 간간이 나타났고, 삼국시대 말기 신라에는 왕족을 중심으로 성씨를 가지면서, 수백 년 전에 죽은 조상(혁거세, 알지 등등)까지 소급해서 성씨를 만들어 붙였다.
조선시대 말까지도 우리나라는 양반보다 쌍놈이 더 많았고 성씨를 가진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제시대에 강제로 모든 사람이 성씨를 등록케 해서 성씨가 없던 사람까지 성씨를 다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성씨가 없던 이들이 양반의 성씨가 된 사실은 가문의 비밀로 숨겨지고 있는데, 이유는 양반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성씨의 유무와 관련한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던 우리의 관습에서 어렵게 얻은 양반의 성씨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이 1940년 2월부터 조선과 일본이 하나임을 강조하면서 일본식으로 창씨 하는 것을 허용한다고 발표하고, 앞으로 성씨로 인한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은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많은 군인이 필요하여 조선인을 전투에 보내기 위함이었다. 즉, 조선인이 군인으로 징집되면 "남의 나라 전쟁에 우리가 왜 나서냐?"고 생각해서 사기가 떨어지거나, 아니면 적군 편을 들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나온 계책이 일본식의 창씨개명이었다.
일본식으로 개명하면 일본인이나 조선인이나 구분이 어려우니 출신성분으로 차별대우하려해도 표가 나지 않으니까 이젠 조선인도 진정한 황국신민(일본인)으로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하나)가 되었으니, 나라를 위해 조선인도 군대에 가야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선인은 어떻게 그 동안 써 오던 성(姓)을 버리고 씨(氏)를 바꿀 수 있느냐며 저항하였는데, 이에 대해 일제는 30년 전에 이미 양반, 상놈이 없어져 문벌이란 의미가 없을 텐데 왜 허울만 남은 성(姓)을 가지고 집착하는지 이해를 못했고, 전쟁국면 때문에도 강제로 창씨개명정책을 밀고 나갔다.(이 때 林, 柳, 南씨 일부는 일본에도 있는 성씨라서 새로 창씨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인들을 군인으로 징집하여 전쟁을 수행케 하였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양반임을 자부하는 사람이 볼 때, 일본은 근본도 모르는 쌍놈일 뿐으로 성씨 자체를 가문의 역사로 생각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완강히 반대하였고, 성씨의 역사(호적법 시행)가 불과 50년 밖에 안 되니까 성씨에 대한 자부심이 없을 거라 여겼던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의 반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성씨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일본을 모르고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성씨를 만든 사람도 있었는데,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창씨개명 신청 첫날 아침에 맨 먼저 신고하면서, 그가 만든 성씨는 일본 천황 고향의 뒷산인 향구산(香久山)의 이름을 따 왔다며 향산(香山)으로 등록했다. 하지만 이광수의 이런 충성심은 성씨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일본 당국에 거의 어필되지 못했다.
어쨌든 지금의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자가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성씨를 그대로 유지하는 나라가 되었고, 또한 부인이 남편의 통장을 관리하는 것으로 인해, 사정을 모르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최고의 여권천국 국가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실제의 한국사회는 모슬렘 다음으로 가부장적이며 남자의 권위가 쎈 대책 없는 나라인 편이다.
- 현재 대한민국의 성씨
우리나라 인구 중에 상위 10대 성씨가 차지하는 비율은 64.1%다.
김씨 992만 명(21.6%), 이씨 680만 명(15%), 박씨 390만 명(8.5%)의 순이다. 즉, 가장 많은 성씨인 김, 이, 박 씨의 비율이 전체 대비 45%에 이른다.
이 뿐 아니라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 귀화한 사람, 부족국가 시대의 한사군 설치와 위만의 고조선 수립,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 청나라와 일본의 침략 등, 무수한 외침으로 인한 부녀자에 대한 강간과 이민족의 유입으로 엄밀히 보면 단일 민족이 무색하다. 물론 이런 현상은 세계 어느 국가든 마찬가지로서 모든 국가가 역사를 왜곡하여 자기들이 최고의 민족이라는 집단최면에 걸려있다.
현재 한국의 성씨는 288개며, 이 중에 130개는 귀화성씨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족보와 가문을 중시해서 성을 바꾸는 것을 가장 큰 치욕으로 여긴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씨를 중요한 근본으로 여기지만, 알고 보면 현대에서 전통 있는 양반집 가문의 후손을 자처하는 대부분이 양반집의 개똥이나 돌쇠, 마당쇠 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우리 집안은 진짜 양반으로 믿고 있다.
우리나라의 성씨를 문헌에 나타난 것으로 보면 조선 성종 때 277개, 영조 때는 298개, 고종 때 발간한 ‘증보문헌비고’에는 496개 성씨 인데, 고종 때는 우리 역사서의 모든 문헌에 나오는 성씨를 전부 다 기재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성씨 순위를 기준으로 중국 성씨 순위를 보면 다음과 같다.
김(金) : 21.59%, 한국 1위(중국 64위)이며, 현재 한국 발음으로는 ‘김’이지만 옛날에는 ‘금’으로 읽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중국 배우 중엔 ‘금성무’ 있는데 현대식 중국 표준음으로는 ‘찐’이다.
이(李) : 14.78%, 한국 2위(중국 1위 7.4%)이며, 중국과 북한에선 ‘리’이며 남한만 ‘이’로 읽는다. 그런데 남한 사람도 영어로는 ‘Lee(리)’로 한다.
박(朴) : 8.47%, 한국 3위(중국에서는 소수)이며, 한자로 ‘朴’을 쓰기도 하지만, 원래 ‘바가지’란 뜻의 순우리말 성씨다. ‘박혁거세’의 ‘박’은 박 만큼이나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다 해서 붙여졌다.
영어로는 대부분이 ‘Park’이나 ‘Pak’을 사용한다.
최(崔) : 4.72%, 한국 4위(중국 58위), 정(鄭) : 4.37%, 한국 5위(중국 21위)
강(姜) : 2.27%, 한국 6위(중국 50위), 조(趙) : 2.14%, 한국 7위(중국 8위)
윤(尹) : 2.06%, 한국 8위(중국 95위), 장(張) : 2.00%, 한국 9위(중국 3위)
임(林) : 1.66%, 한국 10위(중국 17위/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오(吳) : 1.54%, 한국 11위(중국 10위), 한(韓) : 1.53%, 한국 12위(중국 26위)
신(申) : 1.52%, 한국 13위(고려태조가 하사한 성씨, /일본으로 넘어가 정착한 일족이 있음)
서(徐) : 1.51%, 한국 14위(중국 11위), 권(權) : 1.42%, 한국 15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황(黃) : 1.40%, 한국 16위(중국 7위), 안(安) : 1.39%, 한국 17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송(宋) : 1.38%, 한국 18위(중국 23위)
유(柳) : 1.31%, 한국 19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
홍(洪) : 1.13%, 한국 20위(중국 99위)
전(全) : 1.07%, 한국 21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고려 왕씨 유래설이 있음)
고(高) : 0.95%, 한국 22위(중국 19위), 문(文) : 0.93%, 한국 23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손(孫) : 0.90%, 한국 24위(중국 12위), 양(梁) : 0.85%, 한국 25위(중국 20위)
배(裵) : 0.81%, 한국 26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조(曺) : 0.79%, 한국 27위(중국 27위), 백(白) : 0.76%, 한국 28위(중국 79위)
허(許) : 0.65%, 한국 29위(중국 28위)
남(南) : 0.56%, 한국 30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최근에 새로 생긴 성씨 중에는 국제결혼으로 우리나라 국적을 취득한 동남아 또는 중국 사람들의 성씨도 포함되어 있으며, 동사무소 직원이 잘못 기재하여 이상하게 기록된 것도 있다.
그리고 한 글자의 성(姓)을 사용하는 사람은 중국 또는 조선인이고 두 글자의 씨(氏)를 쓰는 사람은 일본인 등의 외국인인 경우가 많다.
첫댓글 성씨는 순위에도 못 들었네. 헐!
성씨 머시마들 씨뿌리기를 게을리 했구만. . .
아니면 구실을 제대로 못했구만.
무슨 소리! 위에 글 읽어 보시면 김, 이, 박은 거의 가짜를 의심해야 되고, 숫자가 적어도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라면 역시 의심이 짙고, 우리나라의 유래 성씨면서 숫자가 적다면 순수성이 있어 자부할 수 있어 좋지 않은가?
이러는 나도 이가인데 우리 친척들이 날 보고 배신자라고 하지 않을랑가?
배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