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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임금 친인척의 정치 개입
종친의 政事 참여 왕권 약화 불렀다 《조선 국왕이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종친들을 정사에 참여시켰을 때마다 어김없이 역모나 쿠데타가 발생했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낸 것 역시 종친 정사참여 금지 원칙이 무너진 결과였다. 종친들이 정치에 개입하면 할수록 왕권은 강화되기는 커녕 쇠약해졌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종친(宗親) 은 넓은 의미에서는 부계(父系)의 친족을 말하지만 왕조국가에서는 임금의 형제나 조카 같은 국왕의 친척을 일컫는다. 자연히 종친은 왕조국가에서 지극히 높고 특수한 신분일 수밖에 없고, 그들이 이권에 관여할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대한민국이 들어선 이후, 조선의 종친과 비슷한 지위에 있는 대통령의 친인척들은 끊임없이 물의를 빚어왔다. 1950년대 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양아들(이강석)을 사칭한 「귀하신 몸」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방 관리들로부터 향응을 대접받다가 쇠고랑을 찬 사건에서부터, 최근의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가 일으킨 비리 사건까지 대통령의 친인척들은 나라를 어지럽혔다. 대통령의 친인척 또는 친인척을 빙자한 권력형 비리 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은 아직 우리나라가 현대국가는커녕 성숙한 근대국가 수준에도 제대로 들어서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만약 자신이 대통령의 아들이나 형제, 조카라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물론 자신의 인격 성숙도에 따라 그 처신은 달리 나타나겠지만, 중요한 것은 대통령 친인척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과 제도의 완비 여부, 그리고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친인척의 처신에 더 크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권력형 비리가 그토록 많았던 것은 비단 비리 당사자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제도나 운영하는 사람의 의지에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왕조국가에서 임금의 친인척들은 어떻게 처신했을까. 일반적으로 왕조국가에서는 임금의 친인척들, 즉 종친들이 그 특수한 신분을 이용해 지금보다 더 광범위하게 비리를 저질렀을 것으로 지레 짐작하기 쉽다. 과연 왕조국가에서는 어떠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고려의 종친 통제 원칙 고대로 거슬러올라갈수록 종친들의 정사(政事) 참여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신라의 골품제도는 태어날 때 뼈(骨)의 등급(品)에 따라 인간의 신분을 정한 제도(制)인데, 여기서 진골(眞骨)은 바로 종친을 가리켰다. 진골은 최고위직인 제1관등 이벌찬부터 제5관등 대아찬까지를 모두 차지했다. 반면 진골의 다음 등급인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제6관등인 아찬 벼슬까지밖에 오를 수 없었다. 당나라의 예부에서 실시하는 빈공과에 급제했으며 「황소의 난」 때는 중원 전체에 문명(文名)을 떨치기도 했던 세계적 지식인 최치원이 정작 신라에 귀국해서는 6두품이라는 이유로 불우한 생활 끝에 자취도 없이 사라졌던 예는 종친 위주의 골품제가 지닌 모순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개인의 능력보다는 뼈의 등급이 우선하는 폐쇄적인 사회는 퇴화하게 마련이다. 결국 신라는 지방 호족과 6두품의 연합세력이었던 고려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 중세사회인 고려는 개국 초 태조와 혜종에게 각각 딸을 바친 외척 왕규(王規)의 난을 겪으면서 종친과 외척을 강력하게 통제하려 했다. 종친 숙청의 대표적 국왕이었던 광종의 종친 통제이론은 「종친은 지위는 높고 녹(祿)은 후하나 정사 간여는 금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정치에는 손을 떼고 유유자적하게 인생을 즐기라는 말이었다. 실제로 고려는 이 원칙에 따라 종친을 군(君)으로 봉하고 후한 녹(祿)을 주었으나 정사 간여는 금지했다. 고려 현종의 왕자인 흠(欽)이 내사령(內史令), 문종의 아들인 수(琇)가 상서령(尙書令)에 임용된 전례가 있으나 이는 명예직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 정사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오직 국왕만이 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종친도 탄핵대상에 올라 종친의 정사 간여를 금하는 원칙은 조선이 개국하면서 일시적으로 깨지게 된다. 태조 이성계의 서제(庶弟)였던 이화(李和)가 의흥친군위도절제사를 맡은 것을 비롯해 태조의 차남 방과(芳果), 3남 방의(芳毅), 4남 방간(芳幹)이 삼군부중국절제사를 맡고 5남 방원(芳遠)이 삼도절제사를, 태조의 조카 이천우(李天祐)와 이조(李朝)가 지삼군부사와 상장군을 맡는 등 종친들이 대거 요직에 진출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이들이 진출한 관직이 대부분 무관(武官)직이라는 점이다. 고려 500년 왕업을 목동들의 피리 소리에 날려보내면서 조선을 개창한 주역들은 불안했다. 국가 기반이 미약했으므로 어떤 계기가 마련되면 고려에 충성을 바치려는 유민들이 들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정종실록」에 『혁명 초기에는 인심(人心)이 아직 정해지지 못해 항상 생각하지 못한 변란에 대비해야 하니 마땅히 훈신(勳臣)에게 사병을 관장하게 하여 창졸(倉卒)간의 사단에 응해야 한다』라고 기록된 것은 개국세력들의 불안감이 잘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이성계는 고려 구세력의 준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안전장치의 하나로 종친들에게 사병을 보유하게 했다. 개국 초의 혼란기에 이성계의 친족들이 정사에 관여한 것은 불가피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종친들의 사병 보유는 그 혁파를 둘러싸고 두 차례에 걸쳐 「왕자의 난」이란 뼈아픈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왕자의 난을 승리로 이끈 태종이 즉위하고 나라가 기틀을 갖추어가자 비로소 종친들은 사헌부·사간원 같은 대간들의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이건창이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대간의 힘이 지나치게 강한 나라』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의 대간들은 종친에게도 거침없이 탄핵권을 행사했다. 태종 3년 11월 태조의 서제인 의안대군 이화의 첩이 옹주 칭호를 받자 사간원은 『적첩(嫡妾)의 분수가 엄한 것이 가도(家道)인데 의안대군의 첩 매화(梅花)는 본래 관기(官妓)이면서도 외람되게 옹주의 칭호를 받았으니 이를 처벌하소서』라고 탄핵하고 나섰다. 이에 분노한 태종이 사간원 헌납(獻納) 정안지(鄭安止)에게 『이 일은 네가 알 수 없는 것인데, 너에게 말한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캐묻자 정안지는 『신들이 전하의 이목(耳目)을 맡는 관리가 되었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말의 옳고 그름만을 살피실 것이지,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물으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강직하게 대응했다. 태종은 『내가 만일 끝까지 캐면 네가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마는 내가 아직은 용서한다』라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종친들의 행위조차 대간의 탄핵대상이었다. 태종은 대간이 종친들마저 탄핵하는 현상에 불만을 느꼈다. 그는 왕실 가족은 일반 백성들은 물론 사대부인 백관들과도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왕권을 강화하는 한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서 태종은 종친들에 대한 탄핵권을 종친 관리부서인 재내제군소(在內諸君所)에서 맡도록 하여 대간들의 탄핵 대상에서 제외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신하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 결국 재내제군소는 종부시(宗簿寺)와 종친부(宗親府)로 나뉘는데, 종부시는 종친 규찰과 조선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璿源譜) 편찬 작업을 맡고 종친부는 종친의 지원 업무를 맡는 것으로 정리됐다. 종친부는 직제상 의정부의 앞에 있는 제1서열의 부서였지만 실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종친들에 대한 대간의 탄핵 기능도 계속 유지됐다. 종친의 정사간여와 쿠데타 역모나 강상(綱常:삼강과 오상 등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관한 범죄는 여전히 양사에서 탄핵했고 일반 범죄라도 사회적 물의가 이는 것은 탄핵했다. 즉 조선의 종친들은 여전히 대간들의 엄한 감시망 아래 놓여 있었다. 국가체제가 완비돼 간 세종 때는 종친의 정사 간여가 더욱 금지되었으나, 부마의 자손은 일부 등용되기도 했다. 세종이 태조의 제일 서녀인 의령옹주(宜寧翁主)와 계천위(啓川尉) 이등 사이에서 난 이선(李宣)을 병조판서로 임명한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왕조실록』의 사관은 어김없이 부정적인 평을 남긴다. 이선에 대한 평은 『무능하고 성격이 강퍅하여 일을 그르치며 욕심이 많아서 사방에 남의 집 담장을 파서 못살게 하고는 그 집을 싸게 사서 정원을 만들며』, 『동네 우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시체를 가져다 놓아 사람들이 먹지 못하게 한 다음 담을 쳐서 자기 땅으로 만들며 잘생긴 종을 별실에서 데리고 살면서도 거리낌없이 내방을 출입했다』는 식이다. 이는 왕실의 종친이나 부마의 출사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감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이들 특수신분의 정사 참여는 정상적인 국정수행을 방해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유 있는 논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종친의 정사 간여 금지의 원칙이 깨지면 반드시 비극적 사건이 잇달았다.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은 동생 수양대군을 관습도감(慣習都鑑)의 도제조에 임명한 적이 있었다. 관습도감은 음악에 관한 일을 맡는 한직에 지나지 않았으나 사간원에서 종친은 정사에 관여할 수 없다며 논박했다. 문종은 관습도감이 핵심적인 부서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양대군의 임용을 강행했다. 그러나 대간의 논박이 계속되자 결국 수양대군은 도제조를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음악담당부서에 종친이 임용되는 것이 무슨 큰 문제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사간원은 수양대군이 맡은 직책이 요직이냐 한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종친 정사 관여 금지의 원칙이 지켜지느냐 무너지느냐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에 거듭 논박했던 것이다. 원칙이 깨지는 곳에 불법은 싹트게 마련이었다. 이런 논란이 있은 몇 달 후 병약한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부탁한다』는 선왕 문종의 유명을 받은 김종서, 황보인 같은 대신들을 살해하고 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귀양보낸 후 사약을 내려 죽이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쿠데타 명분은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이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지만 이는 승리한 쪽의 일방적인 조작에 불과하다. 실상 역모를 꾸민 쪽은 수양대군과 한명회, 신숙주 같은 계유정난 주도세력이었다. 삼촌의 쿠데타에 놀란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영의정부사영경연서운관사겸판이병부사」라는 어마어마한 관직을 내려주면서 목숨을 보전하려 했다. 결국 수양대군은 자신이 충성을 바쳐야 할 국왕 단종을 내쫓고 즉위하는 불충과 임금을 살해하는 패륜의 지경까지 나아가게 된다. 쿠데타를 성공시켜 영의정이 된 후 수양대군은 자신을 곧잘 중국 고대 주나라의 주공(周公)에 비유했는데, 주공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라는 주변의 유혹을 물리치고 어린 성왕(成王)을 끝까지 보필해 공자로부터 성인(聖人)의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 사육신 사건이 발각된 후 성삼문이 세조에게 『나으리가 평소에 주공을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주공도 어린 성왕을 쫓아내고 즉위한 적이 있었소?』라고 반박한 것은 세조의 이중적 태도에 대한 항변이었다. 결국 사간원의 논박을 무릅쓰고 수양대군을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했던 문종은 지하에서 성삼문 등 사육신을 만나 종친 정사 간여 금지의 원칙을 깬 것을 틀림없이 후회하며 통곡했을 것이다. 세조가 원칙을 깨뜨린 대가 종친으로서 집권한 수양대군, 즉 세조는 원칙을 깨뜨린 장본인답게 인재 등용이란 미명 아래 종친들을 적극 정치에 끌어들인다. 이는 종친 시절 자신의 정사간여가 정당했음을 강변하는 동시에 자신의 즉위에 대한 종친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의도였다. 세조는 이런 정책에 따라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종친에게도 과거를 볼 수 있는 길을 열어 조카인 영순군을 문과에 급제시켰다. 그리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역시 조카였던 18세의 소년 귀성군(龜城君)을 「함길강원평안황해사도(四道)병마도총사」에 임명해 진압의 총책을 맡겼다. 『문(文)에는 영순군이, 무(武)에는 귀성군이 쌍벽을 이룬다』고 매양 칭찬하던 세조는 이시애의 난이 진압된 다음해인 세조 14년(1468)에 귀성군을 일약 영의정에 발탁했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열아홉살의 홍안 소년이 만인지상의 지위에 오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종이 그랬던 것처럼 세조의 후예들도 이들 종친들에 의해 곤란을 겪게 된다. 세조의 아들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발생한 갑사 이말중(李末中)의 「난언(亂言)」 사건에 세조가 키운 종친들이 간여됐던 것이다. 이말중이 같은 직위인 갑사 이양보에게 『세조가 백성들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무리하게 정병(正兵)으로 편입해 51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예종도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난언 사건인데, 이양보가 『그러면 누가 임금이 되겠느냐?』고 묻자 이말중은 『영순군』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세조가 『문(文)에는 영순군』이라며 총애했던 그 종친이 예종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했던 것이다. 무(武)로써 총애받았던 귀성군도 마찬가지였다. 예종 즉위 직후 발생한 남이의 옥사 사건에서 『귀성군이 임금이 되려 한다』는 구설수가 있더니, 요절한 예종의 뒤를 이어 세조의 손자 성종이 즉위한 후 더 큰 논란의 대상이 됐다. 예종의 적자인 제안대군과 친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즉위한 자을산군, 즉 성종은 정통성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성종은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와 한명회 같은 공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타협의 산물로 즉위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즉위 당시 열세 살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세조 때 성장한 종친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이에 따라 세조가 키운 귀성군이 정국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성종 원년 1월에 최세호(崔世豪)가 직산의 생원 김윤생에게 『귀성군이 왕이 될 만한 인물인데 지금 어린 임금(성종)을 세운 것은 잘못』이라고 말해 옥사가 벌어진 것은 귀성군을 제거하기 위한 의도적 조작의 냄새가 짙지만, 여하간 이는 귀성군이나 성종 둘 중 한 명은 제거돼야 하는 취약한 왕실구조를 반영한 것이다. 결국 10대에 영의정을 역임한 유력한 종친이 왕위에 적합한 인물로 거론된 데 대해 조야는 충격을 받았고, 귀성군은 사형의 위기에 몰렸다가 겨우 한 등급 감해져 유배형에 처해진 후 10년 동안을 유배지에서 보내다가 분노 속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귀성군의 비참하고 쓸쓸한 종말은 세조 자신이 깨뜨린 원칙이 부메랑이 돼 귀성군의 등에 꽂힌 격이었다. 인재라면 종친도 못할 것이 없다며 등용한 것이 귀성군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 종친 정사 금지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귀성군을 위하는 길임을 세조는 지하에서나마 깨달았을까. 종친들은 엄한 규제 밑에 놓여 있었지만 워낙 특수한 존재이다 보니까 말썽을 일으키는 인물도 적지 않았다. 태조 3년 종친인 상장군(上將軍) 이조(李朝)가 한밤에 전 한양판관(漢陽判官) 박덕이(朴德彛)의 집에 가서 그의 딸을 강간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성계가 크게 성내면서 이조를 순군(巡軍)에 잡아 가두었는데 그만 달아나고 말았다. 태조는 순군을 시켜서 이조를 수색하고 숨겨주는 자는 엄벌하겠다고 명령했다. 개국공신인 우복야(右僕射) 남은(南誾)이 『이조가 나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태조는 『법대로 처벌하겠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남은은 『전하께서 죄를 준다면 친족의 은의(恩義)가 상할 것이고, 죄를 주지 않는다면 법이 폐해지는 것입니다. 이조가 나오지 않으면 은의도 법도 상하지 않는 것인데 어찌 그리 심하게 찾습니까』라고 하면서 이조를 수색하지 말라고 권했다. 종친 양녕대군의 전횡 이처럼 종친이 말썽을 일으키면 처지가 가장 어려워지는 인물은 임금이었다. 조선 역사 전기간에 걸쳐서 가장 말썽을 많이 일으킨 종친은 양녕대군일 것이다. 온몸에 피를 칠하고서야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태종은 세자 양녕에게 학문에 바탕을 둔 엄격한 자기 관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세자 양녕은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지 않았다. 양녕에 있어 세자 자리는 놀고 즐기는 권력의 자리이지, 작은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제약을 받는 규제의 자리가 아니었다. 조선시대 임금은 경연(經筵), 세자는 서연(書筵)을 열어 학문과 정사를 논의했는데 양녕은 이 서연을 끔찍히 싫어해 자주 병을 핑계대고 결석했다. 태종 12년에는 세자궁의 중관(中官) 김문후(金文厚)가 눈물을 흘리며 서연에 나갈 것을 간언했을 정도로 양녕은 서연을 싫어했다. 반면 활쏘기와 사냥 등에는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태종 17년에는 양녕이 병을 핑계로 서연을 폐한 채 활을 쏴대자 서연관이 『병을 이유로 서연은 중지했으면서도 어떻게 활을 쏠 수가 있습니까?』라고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문(文)보다 무(武)를 좋아하는 양녕의 성향은 태종의 기질을 이어받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는 태종이 원하는 세자의 자세는 아니었다. 더구나 태종은 무인이면서도 고려말 과거에 급제했을 정도로 학문적 자질도 갖추었으나 양녕은 그렇지 못했다. 양녕이 물의를 일으킨 또 하나의 요인은 여자 문제였다. 태종 12년에는 여악(女樂)을 동궁에 들여 밤새 풍악을 울리며 놀아 분노한 태종에 의해 여악과 매를 바친 내섬시(內贍寺)의 종 허원만(許元萬) 등이 곤장을 맞고 본역(本役)으로 쫓겨가기도 했다. 태종 14년 정월에 양녕은 밤에 창기(娼妓)를 끌어들이면서 세자궁의 종을 시켜 김한로(金漢老)의 집에서 말을 끌어냈다. 김한로는 다름아닌 양녕의 장인이란 점에서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녕은 그해 10월에는 부마(駙馬)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의 집에서 연회(宴會)하면서 밤이 깊도록 기생 초궁장(楚宮粧)을 끼고 공주(公主)의 대청(大廳)으로 들어가 술을 마셔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태종은 세자의 잦은 월장을 막기 위해 재위 16년에는 창덕궁에서 종묘로 통하는 세자전 서쪽에 담장을 쌓기도 했으나 소용 없었다. 여자 문제를 둘러싼 양녕의 비행은 급기야 태종 17년(1417) 2월 전 중추(中樞)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를 강간하는 큰 사회문제로 비화된다. 조선시대에 사대부의 첩은 기생과 달리 엄연히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다. 양녕은 어리의 자색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대궐 담을 넘어 곽선의 집에 들어가 곽선의 양자 이승(李昇)을 위협하여 어리를 이법화의 집으로 납치한 후 강간하고 궁중으로 끌고 왔다. 세자에서 폐위되다 이 사건은 태종을 격노시켰다. 어리가 『저는 본디 병이 있는데다가 남편이 있는 몸이니 안 됩니다』라고 저항했음에도 양녕이 강간한 사건은 조선의 국왕이란 존재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태종이 『이런 인물이 즉위해 생사여탈권을 가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한탄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태종은 세자의 비행을 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도와준 장인 김한로를 외방에 부처시키고 양녕과 어리를 격리시켜서 파문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러나 세자는 오히려 태종의 처사에 반발하면서 내관(內官) 박지생(朴枝生)을 보내 직접 지은 격렬한 내용의 수서(手書)를 상서(上書)한다. 태종 18년 5월의 일이다. 『전하(殿下)의 시녀(侍女)는 궁중(宮中)에 받아들이면서 신(臣:양녕)의 여러 첩(妾)은 내보내 곡성(哭聲)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 차게 하십니까? 한(漢)나라 고조(高祖)는 산동(山東)에 있을 때 재물을 탐내고 색(色)을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천하(天下)를 평정하였으나, 진왕(晉王) 광(廣)은 비록 어질다고 칭하였으나 즉위한 후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전하는 어찌 신이 끝내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이 첩(妾:어리)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 왜 아버지는 후궁을 들이면서 자신은 못하게 하느냐는 항변이다. 이 수서를 본 태종은 정승들을 불러 한탄했다. 『세자가 여러 날 동안 불효하였으나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낼 수 없어서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면서 다만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기를 바랐는데, 이제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짐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 이 한탄의 속뜻이 세자의 폐위에 있음을 알아차린 대신들은 다음날 의정부·육조·삼사의 모든 백관들을 모아 세자의 폐위를 청하게 되고 양녕은 세자 자리를 잃게 됐다.
양녕이 수양대군 지지한 이유 그러나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양녕의 비행은 계속돼 세종 즉위 초에는 쫓겨가 있던 경기도 광주(廣州) 사저의 담을 넘어 도망가기도 했다. 세종과 상왕 태종이 찾는 자에게 후한 상을 내리겠다고 전교해 소재가 드러났으나 양녕은 전혀 뉘우치지 않았다. 그는 밤중에 두 사환을 거느리고 남의 집에 들어가 그의 첩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천령(川寧) 사람 박득증(朴得中)의 집에 좋은 개가 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몰래 가져오게 하는 등 비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나라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상왕 태종이 세상을 떠난 후인 세종 10년 1월에는 좌군비(左軍婢)의 윤이(閏伊)와 몰래 정(情)을 통하다가 발각돼 윤이와 그의 어미 기매(其每)가 국문을 당했으나 세종에 의해 석방되기도 했다. 이런 비행은 당연히 대간의 탄핵대상이었다. 이때 사헌부 집의로 있던 김종서도 양녕대군의 작록을 회수하고 도성 출입을 금지하라고 여러 차례 탄핵했다. 훗날 양녕대군이 수양대군, 즉 세조의 편을 들어 김종서를 살해한 계유정난을 칭하하고 단종을 죽이라고 요청한 것은 자신을 탄핵한 김종서에 대한 반감과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세종에 대한 보복인지도 모른다. 양녕대군은 정인지와 함께 종친·백관을 거느리고 세 번씩이나 세조에게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을 처단할 것을 주청했던 것이다. 이처럼 양녕은 세조 때에 들어 비로소 제 세상을 만났으나 그의 비행은 계속됐다. 세조 5년 10월에는 사헌부 지평(持平) 이숭원(李崇元)이 『양녕대군이 추종(騶從)을 많이 거느리고서 경상도와 전라도를 지나가면서, 작폐(作弊)가 매우 많습니다』라고 탄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 자신도 종친 시절 전횡에는 양녕대군에 뒤지지 않던 인물이었다. 그는 단종 즉위 초에 병조정랑을 지낸 이현로를 심하게 구타해 조야에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수양대군은 이현로가 조사(朝士)가 아니라 안평대군의 가노(家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때린 것은 조사가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당시 가노(家奴)는 아무런 벼슬도 없이 수양대군의 집에 드나들던 한명회(韓明澮)였지 문과에 급제한 이현로는 아니었다. 물론 조야의 공론이 심하게 들끓었으나 국왕의 숙부라는 이유로 수양의 구타 사건은 무마됐다. 종친에게 아부하는 불나비들 종친의 종들도 상전의 위세를 믿고 심심치 않게 물의를 일으켰다. 연산군 6년(1500)에는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종 김은중(金銀重)이 아버지 김양(金梁)과 함께 50여 명을 이끌고 어머니 은비(銀非)의 주인 이씨의 집을 둘러싸고, 침방(寢房)으로 돌입해 이씨를 겁주고, 이씨의 사위 주제륜(周第倫)을 때리고, 은비 및 자식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온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노예제도를 부정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봉건적 신분제에 대한 천민들의 투쟁이겠지만 당시로서는 대군의 위세를 빌려 강상(綱常)의 기틀을 허문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양녕의 비극은 단지 그 혼자만의 사건이 아니라 권력을 노리는 주위의 많은 출세주의자들이 꼬드긴 결과이기도 했다. 태종은 양녕에게 「어리 사건」을 부추긴 인물들을 사형시키는 등 강력하게 대했으나 권력을 좇는 불나비들은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런 백두(白頭)들만이 아니라 벼슬아치들도 종친에게 아부했다.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麟坪大君)이 휴가차 강원도와 함경도에 들렀을 때 함경감사 홍명하(洪命夏)가 도의 경계까지 나가서 기다려 대간들의 논박을 받기도 했다. 반면에 종친이나 부마의 행차를 비판하는 지방관도 있었다. 중종 7년 황해도 관찰사 유숭조(柳崇祖)는 성종의 딸 경순옹주의 부마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이 휴가가면서 족친(族親)과 추종을 많이 거느리고 다녀 고을에 폐를 끼쳤고, 해주(海州) 등 고을의 아전들이 이들의 사사로운 행차를 접대하느라 국고를 허비했으니 사헌부에 내려 추고하라는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다.
종친의 교육기관 조선왕조는 종친들을 체계적으로 학습시키기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종학(宗學)을 두었다. 세종 9년(1427) 당송(唐宋)의 제도를 본받아 설치한 종학은 8세가 된 종친 자제를 모두 입학시켜 학습하게 했는데 경복궁 건춘문 밖에 학사(學舍)를 두었다. 종학관을 종학박사(博士)라 하고 사성·직강·주부 등의 관직을 두었으나 따로 채용한 것이 아니라 성균관원으로 겸임하게 했다. 그런데 일본의 왕실교육기관인 학습원(學習院)을 오늘날까지도 일반인들이 선망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의 종학은 처음부터 침체를 면치 못했다. 종학이 설치된 세종 때 종친들의 출사 금지 조치가 내려졌으므로 뜻을 잃은 종친들이 종학에 흥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명으로 설립된 만큼 그 규율은 엄해 학문이 짧은 종친들을 괴롭게 했다. 나이 40이 지나도록 글자를 몰랐던 세종 때의 종친 순평군(順平君)은 죽음에 임해 자녀들에게 『죽고 사는 것은 지대한 일이라 어찌 관심이 없겠는가마는, 종학을 영원히 떠난다고 생각하니 유쾌한 일이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세조 때에 종친들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일시 부흥의 기운이 일었으나 세조가 세상을 뜨고 예종이 즉위한 후 다시 출사가 금지되자 시들해지다가 영조 때 폐지되고 말았다. 종친들의 세가 결정적으로 약화된 계기는 뭐니뭐니해도 중종반정이다. 박원종 등 신하들이 임금인 연산군을 내쫓고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추대해 즉위시킨 것은 경우에 따라 신하들이 임금도 갈아치울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었다. 중종 때에 유독 종친들에 대한 비판 기사가 많은 것은 약화된 왕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중종 20년(1525) 사헌부에서는 여러 군(君)과 부마(駙馬)들의 집이 지나치게 호화롭다고 경계했는데, 그 예로 중종의 서자인 금원군(錦原君)과 혜정옹주(惠靜翁主) 집의 서청(書廳)과 별실(別室)을 거론하면서 지나치게 호화로우니 철거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중종은 감역관(監役官)에게 금원군과 혜정옹주의 집이 법제를 넘는지 조사시킨 후 집 칸 수가 많지 않으니 다만 사치하지 말라고 전교하는 것으로 무마하려 했다. 하지만 대간에서 계속 논박하자 금원군의 서청은 철거시키고 혜정옹주는 서청은 짓지 않고 별채만 지었다 하여 그대로 두는 것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비극적 운명의 종친들 종친에게 권력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너무 멀어지면 얼어죽지만 너무 가까이 가면 화상을 입는 그런 존재가 권력이었다. 궁중의 권력투쟁에 종친들이 희생양이 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가장 흔한 것이 어느 종친이 왕이 되려 한다는 모함이었다. 중종반정 이후 이런 모함은 흔히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는데 송강 정철(鄭澈)의 작은매형이었던 계림군(桂林君)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계림군은 중종비 장경왕후의 아버지 윤여필의 외손이자 성종의 셋째아들인 계성군의 양자였는데, 인종 시절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소윤 영수였던 윤원형이 장경왕후의 오빠이자 대윤 영수였던 윤임(尹任)을 제거할 목적으로 계림군을 끌어들인 것이었다. 윤원형은 『인종이 와병중일 때 윤임이 계림군을 임금으로 세우려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궁중에 떨어뜨려 윤임과 계림군을 모함했다. 계림군은 서책만을 가까이 하면서 권력에 무심한 종친으로 이름났으므로 듣는 사람마다 말 같지 않은 소리라고 비웃었으나 후처의 오라비인 예조정랑 정자(鄭滋)가 『몸을 피하여 보존하라』고 권고하자 도망감으로써 모함을 사실로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그는 양화도에서 배를 타고 도망쳐 황룡산 기슭의 이웅(李雄)의 집에 중으로 변장해 숨었으나 토산현감 이감남(李坎男)에게 체포돼 윤원형 세력에게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해 죽었다가 선조 때에야 신원(伸?:억울함을 품)되었다. 이처럼 아무런 혐의가 없을지라도 종친이란 이유만으로 당쟁에 휘말려 죽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숙종 때 발생한 복창군(福昌君) 형제 사건도 종친들이 당쟁 와중에 어떤 지경에 처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의 아들인 복창군과 복평군(福平君)이 관련된 사건은 복창군 형제가 궁궐을 드나들면서 궁녀와 간통했다는 스캔들이었다. 이 사실을 숙종에게 고한 사람은 다름아닌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었다. 외조부의 밀계를 사실로 믿은 숙종은 즉각 조사를 지시했으나 조사 결과 무고임이 드러났다. 조선시대 타인을 사형에 처할 일로 고발한 사람은 무고임이 밝혀지면 당사자가 사형당하는 것이 국법이었다. 무고 사건으로 김우명은 사형 위기에 몰렸으나 명성왕후가 정청(庭請)에 나타나 통곡하는 바람에 겨우 무사했고, 복창군 형제가 귀양가는 것으로 무마됐다. 이 사건은 사실상 남인들과 가까운 복창군 형제를 제거하기 위한 서인들의 정치공작의 성격이 강했는데, 남인들은 복창군이 무고를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서인들은 간통이 사실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어쨌든 복창군 형제는 서인과 남인 사이 정쟁의 희생물이었다. 대원군의 서자이자 고종의 이복형인 이재선은 아버지 대원군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가 목숨을 잃은 경우였다. 명성왕후 민씨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 대원군은 청(淸)의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이 반포된 것을 계기로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이 거세게 일자 이를 기회로 고종을 폐립시키고 이재선을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 승지 안기영, 강달선, 이두영 등은 사형에 처해지고 이재선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국문 도중 고문에 못 이긴 이재선은 『차라리 빨리 죽여달라』고 부르짖었다 하니 혼탁한 시대에 종친으로 태어난 것은 때로 영광이 아니라 저주이기도 했다. 유유자적한 종친들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세상을 달관한 듯한 풍모가 느껴지는 이 시조의 작자는 월산대군이다. 월산대군은 바로 성종의 친형이란 점에서 이는 무심한 시조가 아니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의 친형이 처신하기 어려웠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에는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와 권신 한명회가 동생 자을산군(성종)을 국왕으로 지명함으로써 국왕의 친형이 된 월산대군의 처세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자세가 아니었다면 월산대군은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고 이러저러한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비참하게 세상을 마쳤을 것이다. 성종 시절 월산대군과 비슷한 처지의 또 한 명의 종친이 있었으니 바로 제안대군이다. 제안대군은 예종의 적자였으므로 사실상 예종의 후사는 그가 돼야 했으나 예종 사망 당시 3세로 어렸기 때문에 자을산군에게 왕위를 빼앗겼던 것이다. 세상에 눈을 뜨게 되면서 제안대군은 성종이 앉아 있는 옥좌가 원래는 자신의 것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월산대군처럼 일체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평생 여색을 멀리한 채 노래와 거문고를 벗삼아 인생을 보냈다. 왕이 될 수도 있었던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에게 어찌 회한이 없었으랴만 이들은 권력에 대한 한을 노래와 악기, 그리고 추강의 푸른 물에 실어보내며 천수를 누렸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런 처세가 살아남기 위한 의도적인 몸낮추기가 아니라 진정 자연과 인생에 대한 나름대로의 화해였다면 권력을 누리며 한세상 호령하는 인생보다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 사돈의 팔촌만 되어도 한몫을 꿈꾸는 현대의 친인척들은 종친들이 보여준 처세관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이 훗날의 불행을 방지하는 길이 될 것이다. 덧글 쓰기 엮인글 쓰기 공감 |
[출처] 역사산책 - 조선 임금 친인척의 정치 개입|작성자 맘착한 토끼아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