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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국사(國史)>에 이렇게 말했다. "진흥왕(眞興王) 때인 태청(太淸) 3년 기사(己巳; 549)에 양(梁)나라에서 심호(沈湖)를 시켜 사리(舍利) 몇 알을 보내왔다.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 643)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唐)나라에서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와 부처의 사리 100알과 부처가 입던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袈裟) 한 벌을 가지고 왔는데,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皇龍寺) 탑에 두고, 하나는 대화사(大和寺) 탑에 두고,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에 두었으나,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통도사 계단에는 두 층이 있는데 위층 가운데에는 돌 뚜껑을 덮어서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았다.
속설(俗說)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본조(本朝)에서 전후로 염사(廉使) 두 사람이 와서 계단에 절을 하고 공손히 돌솥을 들어 보았는데,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돌 함(函)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다음 번에는 큰 두꺼비가 돌 밑에 쪼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이로부터는 감히 이 돌을 들어 보지 못했다 한다. 요새 상장군(上將軍) 김공(金公) 이생(利生)과 유시랑(庾侍郞) 석(碩)이 고종(高宗)의 명령을 받아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부절(符節)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을 들고 절하려고 하니 절의 중은 지난 일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난처하게 여겼다. 두 사람이 군사를 시켜 돌을 들게 하니 그 속에 작은 돌 함이 있고, 함 속에는 유리통(瑠璃筒)이 들어 있고, 통 속에는 사리(舍利)가 단지 네 알뿐이었다. 이것을 서로 돌려보면서 경례했는데 통에 조금 상한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庾公)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함 하나를 시주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이때는 강화도(江華島)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이 되던 을미년(乙未年; 1235)이었다."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사리(舍利) 100개를 세 곳에 나누어 두었더니, 이제는 오직 네 개뿐이다. 그것은 숨겨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여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니 수효가 많고 적은 것이 괴이할 것이 없다." 또 속설(俗說)에는 이렇게 말한다. "황룡사(皇龍寺) 탑이 불타던 날에 돌솥 동쪽에 처음 큰 얼룩이 생겼는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때는 바로 요(遼)의 응력(應曆) 3년 계축(癸丑; 953)이요, 본조(本朝) 광종(光宗) 5(4)년으로, 탑이 세 번째로 불타던 때였다. 조계(曹溪)의 무의자(無衣子)가 시를 남겨 말하기를, "들으니 황룡사탑이 불타던 날, 번져서 탄 한 쪽에도 틈이 없었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원(至元) 갑자년(甲子年; 1264) 이후로 원(元)나라 사신과 본국 황화(皇華)들이 다투어 와서 이 돌함에 절했으며 사방의 운수(雲水)들도 몰려들어 참례했는데, 돌함을 들어보기도 하고 혹은 들지 않기도 했다. 진신(眞身)의 사리 네 알 외에 변신(變身) 사리가 모래알처럼 부셔져서 돌함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이상한 향기를 강하게 풍겨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는 일이 이따금 있었으니, 이것은 말세에 있는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인 것이다.
당(唐)나라 대중(大中) 5년 신미(辛未; 851)에 당나라로 갔던 사신 원홍(元弘)이 당에서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의 일이다)와 후당(後唐) 동광(同光) 원년 계미(癸未; 923) 곧 본조(本朝) 태조(太祖) 즉위 6년에 당(唐)나라로 보냈던 사신 윤질(尹質)이 가지고 온 오백나한(五百羅漢)의 상(像)은 지금 북숭산(北崇山) 신광사(神光寺)에있다. 송(宋)나라의 선화(宣和) 원년 기묘(己卯(亥); 예종睿宗 15(4), 1119)에 입공사(入貢使) 정극영(鄭克永)·이지미(李之美) 등이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는 지금 내전(內殿)에 모셔 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서로 전해 내려오는 말은 이러하다. 옛날 의상법사(義湘法師)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終南山)의 지상사(至相寺) 지엄존자(智儼尊者)에게 가 있었는데, 이웃에 선율사(宣律師)가 있어서, 항상 하늘의 공양을 받고 재를 올릴 때마다 하늘 주방(廚房)에서 먹을 것을 보내 왔다. 어느날 선율사는 의상법사를 청하여 재를 올리는데 의상이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오랜데도 하늘에서 보내는 음식은 때가 지나도 오지 않는다. 의상이 빈 바리때만 가지고 돌아가자 비로소 천사(天使)가 내려왔다. 선율사가 "오늘은 어찌해서 늦으셨소"하고 묻자 천사는 대답한다. "온 동네에 가득히 신병(神兵)이 막고 있어서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율사는 의상법사에게 신의 호위가 있는 것을 알고는 그의 도(道)의 힘이 자기보다 나은 것에 탄복하고는 하늘에서 보내 온 음식을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또 지엄(智儼)과 의상(義湘) 두 대사를 재 올리는데 청해다가 그 사유를 자세히 말했다. 의상이 조용히 율사에게 말한다. "율사는 이미 천제(天帝)의 존경을 받고 계신데, 일찍이 듣건대 제석궁(帝釋宮)에는 부처님의 이빨 40개 중에 어금니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천제께 청하여 그것을 인간에게 내려보내어 복이 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율사는 이 후에 천사와 함께 그 뜻을 천제에게 전하니 천제는 7일을 기한하여 이를 보내 주니 의상은 경례를 다한 뒤에 맞이하여 대궐에 안치했다.
그 후 송(宋)나라 휘종조(徽宗朝)에 이르러 좌도(左道)를 믿으니, 이때 나라 사람들은 도참(圖讖)을 전하여 퍼뜨리기를, "금인(金人)이 이 나라를 망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건(黃巾)의 무리들이 일관(日官)을 충동하여 위에 아뢰기를, "금인이란 불교를 말하는 것이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장차 불교를 없애고 중들을 무찔러 죽이고, 경전(經典)을 불사르고, 따로 조그만 배를 만들어 부처의 어금니를 실어 큰 바다에 띄워 인연이 있는 곳으로 흘려 보내려 했다. 이때 마침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 갔다가 그 사실을 듣고는 천화용(天花茸) 50령(領)과 저포(紵布) 300필을 배를 호송(護送)하는 관원에게 뇌물로 주고 남몰래 부처의 어금니를 받고 빈 배만 흘려 보내게 했다. 사신들이 부처의 어금니를 얻어 가지고 와서 왕에게 아뢰자 예종(睿宗)은 크게 기뻐하여 십원전(十員殿) 왼쪽에 있는 소전(小殿)에 모시고 항상 소전 문을 잠그고 밖에는 향과 등불을 설치하여 왕이 친히 거둥하는 날에만 대궐 문을 열고 경례를 했다.
임진년(壬辰年; 1232)에 서울을 강화(江華)로 옮길 때 내관(內官)들은 총망한 중에 잊어버리고 이를 거두어 챙기지 못했다. 병신년(丙申年) 4월에 왕의 원당(願堂)인 신효사(神孝寺) 중 온광(蘊光)이 불아(佛牙)에 경례하기를 청하므로 왕에게 아뢰니 왕은 내신(內臣)을 시켜서 두루 궁중(宮中)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때 백대(栢臺) 시어사(侍御史) 최충(崔沖)이 설신(薛伸)에게 명하여 급히 여러 알자(謁者)의 방을 다니면서 물었으나 모두 어쩔 줄을 모를 뿐이었다. 내신(內臣) 김승로(金承老)가 아뢰기를, "임진년(壬辰年)에 서울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紫門日記)>를 조사해 보십시오"하므로 그 말을 쫓아 조사해보니 일기(日記)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입내시대부경(入內侍大府卿) 이백전(李白全)이 불아함(佛牙函)을 받다." 이백전(李白全)을 불러 물으니 대답한다. "청컨대 집에 돌아가서 다시 저의 사사 일기(日記)를 찾아보게 해 주십시오." 집에 가서 찾아보고 좌번알자(左番謁者) 김서룡(金瑞龍)이 불아함(佛牙函)을 받았다는 기록을 갖다가 바쳤다. 김서룡(金瑞龍)을 불러 물었으나 대답을 못한다. 또 김승로(金承老)가 아뢰는 대로 임진년(壬辰年)에서 지금 병신년(丙申年)까지 5년간의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에 수직한 자들을 잡아 가두고 심문했으나, 아무런 결말도 나지 않았다. 그런지 3일이 지난 날 밤중에 김서룡의 집 담 안으로 무엇을 던지는 소리가 나므로 불을 켜 조사해 보니 바로 불아함(佛牙函)이었다. 함은 본래 속 한 겹은 심향합(沈香合)이고 다음 겹은 순금합(純金合)이고 그 다음 바깥 겁은 백은함(白銀函)이고, 다음 바깥 겁은 유리함이고, 그 다음 겹은 나전함(螺鈿函)으로 각 함(各函)의 폭은 서로 꼭 맞게 되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만 유리함뿐이었다. 김서룡은 찾은 것이 기뻐서 대궐로 들어가 아뢰었다. 그러나 유사(有司)는 죄를 의논하여 김서룡과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의 수직하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하니 진양부(晉陽府)에서 아뢰었다. "불사(佛事)로 인하여 사람을 많이 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모두 죽음을 면했다. 다시 십원전(十員殿) 안뜰에 특별히 불아전(佛牙殿)을 지어서 불아함(佛牙函)을 모시게 하고 장사(將士)들을 시켜 지키게 했다. 길일(吉日)을 가려서 신효사(神孝寺)의 상방(上房) 온광(蘊光)을 청해다가 승도(僧徒) 30명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재를 올려 정성을 드리도록 했다. 그날 입직(入直)했던 승선(承宣) 최홍(崔弘)과 상장군(上將軍) 최공연(崔公衍)·이영장(李令長)과 내시(內侍)·다방(茶房) 관원들은 대궐 뜰에서 왕을 모시고 서서 차례로 불아함(佛牙函)을 머리에 이고 정성을 드렸는데 불아함 구멍 사이에 있는 사리는 그 수를 알지 못할 만큼 많았다. 진양부(晉陽府)에서는 백은(白銀) 상자에 그것을 담아 모셨다. 이때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불아(佛牙)를 잃은 후로 스스로 네 가지 의심이 생겼었소. 첫째 의심은, 천궁(天宮)의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갔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 의심은 국난(國亂)이 이러하니, 불아는 신물(神物)이므로 인연이 있는 무사(無事)한 나라로 옮겨 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오. 셋째 의심은, 재물을 탐낸 소인(小人)이 그 상자를 도둑질하고 불아는 구렁에 버렸으리라는 것이오. 넷째 의심은, 도둑이 보물을 훔쳐가기는 했으나 이것을 드러낼 수가 없어서 집 속에 감추어 두었으리라는 것이었는데 이제 네 번째 의심이 맞았소"하고 이내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헌수(獻壽)하는데, 심지어 이마와 팔을 불에 태우는 사람도 있어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 실록(實錄)은 당시 내전(內殿)에서 향(香)을 피우며 기도하던, 전지림사(前祗林寺) 대선사(大禪師) 각유(覺猷)에게서 얻은 것이니, 그는 자기가 친히 본 것이라면서 날더러 기록하라고 했다.
또 경오년(庚午年; 1270)에 강화(江華)에서 환도(還都)할 때의 난리는 몹시 심하여 임진년(壬辰年)보다도 더했다. 십원전(十員殿)의 감주(監主)인 선사(禪師) 심감(心鑑)은 자기의 위태로움을 잊고 불아함을 가지고 나와 도둑의 난리에서 화를 면하게 하였다. 이 사실을 대궐에 알리니 왕은 그 공을 크게 칭찬하고 이름 있는 절로 옮겨 살게 하여 지금 빙산사(빙山寺)에 살고 있다. 이것도 역시 각유(覺猷)에게서 친히 들은 것이다.
진흥왕(眞興王) 때인 천가(天嘉) 6년 을유(乙酉; 565)에 진(陳)나라에서는 유사(劉思)와 중 명관(明觀)을 시켜 불경(佛經)·논(論) 1,700여 권을 보내왔으며, 정관(貞觀) 17년(643)에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삼장(三藏) 400여 상자를 싣고 돌아와서 통도사(通度寺)에 안치했다. 흥덕왕(興德王) 때인 태화(太和) 원년 정미(丁未; 827)에는 당(唐)에 간 학승(學僧)인 고구려 중 구덕(丘德)이 불경(佛經) 몇 상자를 가지고 오니 왕은 여러 절의 승도(僧徒)들과 함께 나가서 흥륜사(興輪寺) 앞길에 가서 맞이했다. 대중(大中) 5년(851)에는 당나라에 보낸 사신 원홍(元弘)이 불경(佛經) 몇 축(軸)을 가지고 왔고, 나말(羅末)에 보요선사(普耀禪師)가 두 번이나 오월국(吳越國)에 가서 대장경(大藏經)을 싣고 왔으니, 그는 곧 해룡왕사(海龍王寺)의 개산조(開山祖)이다.
송(宋)나라 원우(元祐) 갑술년(甲戌年; 1094)에 어떤 사람이 선사(禪師)의 진영(眞影)을 찬(讚)해 말했다.
거룩도 해라, 개조(開祖) 스님이시여! 우뚝 빼어났구나 저 참 모습이.
두 번이나 오월(吳越)에 가, 대장경(大藏經)을 가지고 오는 데 성공했네.
보요(普耀)라는 직함을 하사하시고, 네 번이나 조서(詔書)를 내리셨으니,
만일 그의 덕을 묻거든, 밝은 달 맑은 바람과 같다 하겠네.
또 대정(大定) 연간(1161∼1189)에 한남 관기(漢南管記) 팽조적(彭祖적)이 시(詩)를 지어 남겼다.
물과 구름 조용한 절에 부처님 계신데,
더구나 신룡(神龍)이 한 지경을 보호하네.
마침내 이 좋은 절 어느 누가 이어받을까,
처음 불교는 남쪽에서 전해왔네.
발문(跋文)이 있는데 이러하다.
옛날 보요선사(普耀禪師)가 처음으로 남월(南越)에서 대장경(大藏經)을 구해 가지고 돌아오는데 바닷바람이 갑자기 일더니 조각배가 물결 사이에서 뒤집힐 것 같았다. 선사는 말하기를, "이것은 신룡(神龍)이 대장경을 여기에 머물러 두려는 것이 아닐까"하고 드디어 주문(呪文)으로 정성껏 축원하여 용(龍)까지 함께 받들고 돌아오니, 바람도 자고 물결도 가라앉았다. 본국에 돌아오자 산천(山川)을 두루 구경하면서 대장경을 안치할 곳을 구하다가 이 산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상서로운 구름이 산 위에서 일어나는 곳을 보고 이에 수제자(首弟子) 홍경(弘慶)과 함께 연사(蓮社)를 세웠으니,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 온 것은 실로 이때에 시작된 것이었다.
한남 관기(漢南管記) 팽조적(彭祖적)은 제(題)한다.
이 해룡왕사(海龍王寺)에는 용왕당(龍王堂)이 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당시 용왕은 대장경(大藏經)을 따라와서 여기에 머물러 있었는데, 용왕당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또 천성(天成) 3년 무자(戊子; 928)에 묵화상(默和尙)이 당에 들어가 역시 대장경을 가지고 왔으며, 본조(本朝) 예종(睿宗) 때에는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조서를 받들고 중국으로 유학가서 요본(遼本) 대장경 3부(部)를 사 가지고 왔는데, 그 한 본(本)은 지금 정혜사(定惠寺)에 있다(해인사海印寺에 한 본本이 있고 허참정許參政댁에 한 본本이 있다).
대안(大安) 2년(1086) 본조(本朝) 선종(宣宗) 때에는 우세승통(祐世僧統) 의천(義天)이 송(宋)나라에 들어가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많이 가지고 왔으며, 이 밖에도 서적에 실리지 않은 고승(高僧)과 신사(信士)들이 왕래하면서 가지고 온 것은 이루 자세히 기록할 수가 없다. 대체로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 오는 데는 그 앞길이 양양(洋洋)했으니 경사스러운 일이다.
찬(讚)해 말한다.
중국과 동방은 오히려 연기로 막혔고,
녹원(鹿苑)의 학수(鶴樹)는 2,000년이네.
이 땅에 전해 오니 참으로 하례할 일이라,
동진(東震)과 서건(西乾)이 한 세상 되었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의상전(義湘傳)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의상은 영휘(永徽) 초년(650)에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선사(智儼禪師)를 뵈었다"한다. 그러나 부석사(浮石寺) 본비(本碑)에 의하면, "의상은 무덕(武德) 8년(625)에 태어나 어려서 중이 되었다. 영휘(永徽) 원년 경술(庚戌; 650)에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려고 고구려에 갔다가 어려운 일이 있어서 그대로 돌아갔다.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에 당에 들어가 지엄법사에게 배웠다. 총장(總章) 원년(668)에 지엄법사가 죽자 함형(咸亨) 2년(671)에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 장안(長安) 2년 임인(壬寅; 702)에 죽으니 나이 78세였다"했다. 그렇다면 지엄과 함께 선율사(宣律師)가 있는 곳에서 재를 올리고, 천궁(天宮)의 불아(佛牙)를 청하던 일은 신유(辛酉; 661)에서 무진(戊辰; 668)까지의 7, 8년 사이가 될 것이다. 본조(本朝) 고종(高宗)이 강화(江華)로 옮기던 임진년(壬辰年; 1232)에 천궁의 7일 기한이 다 찼다고 의심한 것은 잘못된 것이니, 도리천(도利天)의 1주야는 인간(人間) 100세에 해당되는 것이다.
또 의상이 처음 당에 갔던 신유년(辛酉年; 661)에서부터 계산하여 본조(本朝) 고종(高宗) 임진(壬辰; 1232)까지는 693년이니 경자년(更子年; 1240)에 이르러야 비로서 700년이 차며, 7일 기한도 차는 것이다. 환도(還都)하던 지원(至元) 7년 경오(庚午; 1270)까지는 730년이니, 만일 천제(天帝)의 말과 같이 7일 후에 천궁(天宮)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심감선사(心鑑禪師)가 환도(還都)할 때 가져다 바친 것은 필시 진짜 불아(佛牙)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해 봄 환도(還都)하기 전에 왕은 대궐 안 제종(諸宗)의 이름난 중들을 모아서 불아와 사리를 빌어 구하여 비록 정성과 부지런함을 다했지만 하나도 얻지 못했으니, 필경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간 듯 싶다. 지원(至元) 21년 갑신(甲申; 1284)에 국청사(國淸寺)의 금탑(金塔)을 보수(補修)하고 충렬왕(忠烈王)은 장목왕후(莊穆王后)와 함께 묘각사(妙覺寺)에 거둥하여 신도(信徒)의 무리들을 모아 경하(慶賀)하고 찬미(讚美)했다. 이것이 끝나자 심감(心鑑)이 바친 불아와 낙산(落山)의 수정염주(水精念珠)와 여의주(如意珠)를 군신(君臣)과 여러 신도(信徒)들이 모두 쳐다보고 경배한 뒤에 함께 금탑(金塔) 안에 안치했다.
나도 역시 이 모임에 참석해서 이른바 불아라고 하는 것을 친히 보았는데 그 길이는 세 치 가량 되고 사리는 없었다. 무극(無極)은 쓴다.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진자사(眞慈師)
신라 제 24대 진흥왕(眞興王)의 성(姓)은 김씨(金氏)요 이름은 삼맥종(삼麥宗)인데, 혹 심맥종(深麥宗)이라고도 한다. 양(梁)나라 대동(大同) 6년 경신(庚申; 540)에 즉위(卽位)했다. 백부(伯父) 법흥왕(法興王)의 뜻을 사모해서 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어 널리 절을 세우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중이 되기를 허락했다. 왕은 또 천성이 풍미(風味)가 있어서 크게 신선을 숭상하여 민가(民家)의 처녀들 중에 아름다운 자를 뽑아서 원화(原花)를 삼았으니, 이것은 무리를 모아서 사람을 뽑고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을 가르치려 함이었으며, 이것은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이기도 했다. 이에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교貞娘)의 두 원화를 뽑았고, 여기에 모여든 사람이 3,4백 명이나 되었다. 교정(교貞)이 남모(南毛)를 질투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여 남모에게 취하도록 먹인 후에 남몰래 북천(北川)으로 데리고 가서 큰 돌을 들고 그 속에 묻어 죽였다. 이에 그 무리들은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서 슬피 울다가 헤어졌다. 그러나 그 음모를 아는 자가 있어서, 노래를 지어 거리의 어린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남모의 무리들은 듣고 그 시체를 북천(北川) 속에서 찾아내고 교정랑을 죽여 버리니 이에 대왕(大王)은 영을 내려 원화의 제도를 폐지했다. 그런 지 여러 해가 되자 왕은 또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영을 내려 양가(良家)의 남자 중에 덕행(德行)이 있는 자를 뽑아 이름을 고쳐 화랑(花娘(郞))이라 하고, 비로서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花郞) 국선(國仙)의 시초이다. 그런 때문에 명주(溟洲)에 비(碑)를 세우고,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것을 고쳐 착한 일을 하게 하고 웃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유산하게 하니 오상(五常)·육예(六藝)와 삼사(三師)·육정(六正)이 왕의 시애에 널리 행해졌다(<국사國史>에 보면, 진지왕眞智王 대건大建 8년 경庚(병丙)신申에 처음으로 화랑花郞을 받들었다 했으나 이것은 사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다).
진지왕(眞智王) 때에 와서 흥륜사(興輪寺) 중 진자(眞慈; 혹은 정자貞慈라고 함)가 항상 이 당(堂)의 주인인 미륵상(彌勒像) 앞에 나가 발원(發願)하여 맹세해 말했다. "우리 대성(大聖)께서는 화랑(花郞)으로 화(化)하시어 이 세상에 나타나 제가 항상 수용(수容)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을 들게 해 주십시오." 그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두터워지자, 어느날 밤 꿈에 중 하나가 말했다. "내 웅천(熊天; 지금의 공주公州) 수원사(水源寺)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자(眞慈)는 꿈에서 깨자 놀라고 기뻐하여 그 절을 찾아 열흘길을 가는데 발자국마다 절을 하며 그 절에 이르렀다. 문 밖에 탐스럽고 곱게 생긴 한 소년이 있다가, 예쁜 눈매와 입맵시로 맞이하여 작은 문으로 데리고 들어가 객실로 안내하니, 진자는 올라가 읍(揖)하고 말한다. "그대는 평소에 나를 모르는 터에 어찌하여 이렇듯 은근하게 대접하는가." 소년이 말한다. "나도 또한 서울 사람입니다. 스님이 먼 곳에서 오시는 것을 보고 위로했을 뿐입니다." 이윽고 소년은 문 밖으로 나가더니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속으로 우연한 일일 것이라 생각하고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절의 중들에게 지난 밤의 꿈과 자기가 여기에 온 뜻만 얘기하고 또 말했다. "잠시 저 아랫자리에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어떻겠소." 절에 있는 중들은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근실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옛부터 현인(賢人)과 철인(哲人)이 살고 있어서 명감(冥感)이 많다고 하오. 그곳으로 가 보는 것이 좋을 게요." 진자가 그 말을 쫓아 산 아래에 이르니, 산신령(山神靈)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으면서 말한다. "여기에 무엇 하러 왔는가." 진자가 대답한다. "미륵선화를 보고자 합니다." 노인이 또 말한다. "저번에 수원사(水源寺)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는데 다시 무엇을 보려는 것인가." 진자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이내 달려서 본사(本寺)로 돌아왔다. 그런 지 한 달이 넘어 진지왕(眞智王)이 이 말을 듣고는 진지를 불러서 그 까닭을 묻고 말했다. "그 소년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니 성인(聖人)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왜 성 안을 찾아보지 않았소." 진자는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두루 마을을 돌면서 찾으니, 단장을 갖추어 얼굴 모양이 수려한 한 소년이 영묘사(靈妙寺)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거닐며 놀고 있었다. 진자는 그를 만나보자 놀라서 말한다. "이분이 미륵선화다." 그는 나가서 물었다. "낭(郎)의 집은 어디에 있으며 성(姓)은 누구신지 듣고 싶습니다." 낭이 대답한다. "내 이름은 미시(未尸)이고,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어 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에 진자는 그를 가마에 태워 가지고 들어가 왕께 뵈었다. 왕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았다. 그는 화랑도(花郞徒) 무리들을 서로 화목하게 하고 예의(禮儀)와 풍교(風敎)가 보통사람과 달랐다. 그는 풍류(風流)를 세상에 빛내더니 7년이 되자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몹시 슬퍼하고 그리워했다. 미시랑(未尸郎)의 자비스러운 혜택을 많이 입었고 맑은 덕화(德化)를 이어 스스로 뉘우치고 정성을 다하여 도(道)를 닦으니, 만년(晩年)에 그 역시 어디 가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해설하는 자가 말한다. "미(未)는 미(彌)와 음(音)이 서로 같고 시(尸)는 역(力)과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 가까운 것을 취해서 바꾸어 부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라 하고 중매하는 사람들을 미시(未尸)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진자의 유풍(遺風)이다. 노방수(路傍樹)를 지금까지도 견량(見郎)[樹]이라 하고 또 우리말로 사여수(似如樹; 혹은 인여수印如樹)라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선화(仙花) 찾아 한 걸음 걸으며 그의 모습 생각하니,
곳곳마다 심은 것은 한결같은 공로일세.
졸지에 봄은 되돌아가고 찾을 곳 없으니,
누가 알았으리, 상림(上林)의 한 때의 봄을.
남백월이성(南白月二聖), 노힐부득(努힐夫得)과 달달박박(달달朴朴)
<백월산양성성도기(白月山兩聖成道記)>에 이렇게 말하였다. "백월산(白月山)은 신라 구사군(仇史郡; 옛날의 굴자군屈自郡. 지금의 의안군義安郡)의 북쪽에 있었다. 산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는데 그 산줄기가 수백 리에 뻗쳐 있어 참으로 큰 진산(鎭山)이다."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해서 말한다. "옛날에 당(唐)나라 황제(皇帝)가 어느 때에 못을 하나 팠는데, 달마다 보름 전이면 달빛이 밝고, 못 가운데에 산이 하나 있고 사자(獅子)처럼 생긴 바위가 꽃 사이로 은은히 비쳐서 못 가운데에 그림자를 나타냈다. 황제는 화공(畵工)을 시켜서 그 모양을 그리게 하여 사자(使者)를 보내서 온 천하를 돌면서 찾도록 했다. 사자가 해동(海東)에 이르러 보니 그 산에 큰 사자암(獅子巖)이 있고 산의 서남쪽 이보(二步)쯤 되는 곳에 삼산(三山)이 있는데 그 이름은 화산(花山; 그 산의 몸체는 하나인데 봉우리가 셋이어서 삼산三山이라고 했다)으로서 모양이 그림과 같았다. 그러나 아직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신 한 짝을 사자암 꼭대기에 걸어 놓고 돌아와 아뢰었다. 그런데 신 그림자도 역시 못에 비치므로 황제는 이상히 여겨 그 산 이름을 백월산(白月山)이라고 했다(보름 전에는 백월白月의 그림자가 못에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는 못 가운데에 산 그림자가 없어졌다."
이 산의 동남쪽 3,000보 쯤 되는 곳에 선천촌(仙川村)이 있고, 그 마을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하나는 노힐부득(努힐夫得; 혹은 등等)이니 아버지는 이름을 월장(月藏)이라 했고, 어머니는 미승(味勝)이라 했다. 또 하나는 달달박박(달달朴朴)이니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수범(修梵)이라 했고, 어머니는 범마(梵摩)라 했다(향전鄕傳에는 치산촌雉山村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두 선비의 이름은 방언方言이니 두 집에는 각각 두 선비의 마음과 행동이 등등騰騰하고 고절苦節하다는 두 가지 뜻에서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풍채와 골격(骨格)이 범상치 않았고, 속세를 떠난 마음이 있어 서로 좋은 친구였다. 20세가 되자 마을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서남쪽 치산촌(雉山村) 법종곡(法宗谷) 승도촌(僧道村)에 옛절이 있는데, 서진(栖眞)할 만하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서 대불전(大佛田)·소불전(小佛田)의 두 마을에 각각 살았다. 부득(夫得)은 회진암(懷眞巖)에 살았는데 혹은 이곳을 양사(壤寺; 지금 회진동懷眞洞에 옛 절터가 있으니 이것이다)라고도 했고, 박박(朴朴)은 유리광사(瑠璃光寺; 지금 이산梨山 위에 절터가 있는 것이 이것이다)에 살았다. 이들은 모두 처자(妻子)를 데리고 와서 살면서 산업(産業)을 경영하고 서로 왕래하면서 정신을 수양하고 편안히 마을을 길러 속세를 떠날 마음을 잠시도 폐하지 않았다. 그들은 몸과 세상의 무상(無常)함을 느껴 서로 말했다. "기름진 밭과 풍년 든 해는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의식(衣食)이 마음대로 생기고 자연히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다. 또 부녀(婦女)와 집이 참으로 좋으나, 연지화장(蓮池花藏)에서 여러 부처가 앵무새나 공작새와 함께 놀면서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더구나 불도(佛道)를 배우면 응당 부처가 되고, 참된 것을 닦으면 반드시 참된 것을 얻는 데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어 있는 것을 벗어 버리고 무상(無上)의 도(道)를 이루어야 할 것인데, 어찌 이 풍진(風塵) 속에 파묻혀 세속 무리들과 같이 지내서야 되겠는가." 이들은 드디어 인간 세상을 떠나서 장차 깊은 골짜기에 숨으려 했다. 어느날 밤 꿈에 백호(白毫)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서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에서 깨어 그 얘기를 하니 두 사람의 말이 똑같으므로 이들은 모두 한참동안 감탄하다가 드디어 백월산(白月山) 무등곡(無等谷; 지금의 남수동南藪洞)으로 들어갔다.
박박사(朴朴師)는 북쪽 고개의 사자암(獅子巖)을 차지하여 판잣집 8척 방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판방(板房)이라 하고, 부득사(夫得師)는 동쪽 고개의 무더기 돌 아래 물이 있는 곳을 차지하고 역시 방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뇌방(磊房)이라고 했다(향전鄕傳에는, 부득夫得은 산 북쪽 유리동瑠璃洞에 살았으니 곧 지금의 판방板房이요, 박박朴朴은 산 남쪽 법정동法精洞 뇌방磊房에 살았다고 했으니 이 기록과는 서로 반대된다. 지금 와서 보면 향전鄕傳이 잘못되었다). 이들은 각각 암자에 살면서 부득(夫得)은 미륵불(彌勒佛)을 성심껏 구했고, 박박(朴朴)은 미타불(彌陀佛)을 경례하고 염송(念誦)했다.
3년이 못되어 경룡(景龍) 3년 기유(己酉; 709) 4월 8일은 성덕왕(聖德王) 즉위 8년이다. 해는 저물어가는데 나이 20이 가깝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운 낭자(娘子)가 난초의 향기와 사향 냄새를 풍기면서 갑자기 북암(北庵; 향전鄕傳에는 남암南庵이라 했다)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면서 글을 지어 바친다.
갈 길 더딘데 해는 떨어져 모든 산이 어둡고,
길은 막히고 성은 멀어 인가도 아득하네.
오늘은 이 암자에서 자려 하오니,
자비스러운 스님은 노하지 마오.
박박(朴朴)은 말했다. "절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어서 다른 데로 가고 여기에서 지체하지 마시오."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다(기記에는 말하기를, "나는 모든 잡념雜念이 없으니 혈낭血囊을 가지고 시험하지 말라"고 했다). 낭자(娘子)는 남암(南庵; 향전鄕傳에는 북암北庵)으로 돌아가서 또 전과 같이 청하니 부득(夫得)은 말했다. "그대는 이 밤중에 어디서 왔는가." 낭자가 대답한다. "맑기가 태허(太虛)와 같은데 어찌 오고 가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선배의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德行)이 높고 굳다는 말을 듣고 장차 도와서 보리(菩提)를 이루고자 해서일 뿐입니다." 그리고는 게(偈) 하나를 주었다.
해 저문 깊은 산길에,
가도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대나무와 소나무 그늘은 그윽하기만 하고,
시내와 골짜기에 물소리 더욱 새로워라.
길 잃어 잘 곳 찾는 게 아니요,
존사(尊師)를 인도하려 함일세.
원컨대 내 청 들어만 주시고,
길손이 누구인지 묻지 마오.
부득사(夫得師)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면서 말했다.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衆生)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일 것이오. 더구나 깊은 산골짜기에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 이에 그를 맞아 읍(揖)하고 암자 안에 있게 했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닦아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벽 밑에서 고요히 염불했다. 밤이 새려 할 때 낭자는 부득을 불러 말했다. "내가 불행히 마침 산고(産故)가 있으니 원컨대 스님께서는 짚자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부득이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은은히 촛불을 비치니 낭자는 이미 해산을 끝내고 또 다시 목욕하기를 청한다. 부득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얽혔으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보다 더해서 마지못하여 또 목욕통을 준비해서 낭자를 통 안에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니 이미 통 속 물에서 향기가 강하게 풍기면서 금액(金液)으로 변한다. 부득이 크게 놀라자 낭자가 말했다. "우리 스승께서도 이 물에 목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득이 마지못하여 그 말에 좇았더니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는 것을 깨닫고 살결이 금빛으로 되고, 그 옆을 보니 졸지에 연대(蓮帶) 하나가 생겼다. 낭자가 부득에게 앉기를 권하고 말한다. "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인데 여기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大菩提)를 이루도록 한 것이오."
말을 마치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한편 박박(朴朴)이 생각하기를, "부득이 오늘 밤에 반드시 계(戒)를 더럽혔을 것이니 비웃어 주리라"하고 가서 보니 부득은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미륵존상(彌勒尊像)이 되어 광명(光明)을 내뿜는데 그 몸은 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말한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부득이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 주니 박박은 탄식해 말한다.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다행히 부처님을 만났으나 도리어 대우하지 못했으니, 큰 덕(德)이 있고 지극히 어진 그대가 나보다 먼저 이루었소. 부디 옛날의 교분(交分)을 잊지 마시고 일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부득이 말한다. "통 속에 금액이 남았으니 목욕함이 좋겠습니다." 박박이 목욕을 하여 부득과 같이 무량수(無量壽)를 이루니 두 부처가 서로 엄연히 대해 있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기를, "참으로 드문 일이로다."했다.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佛法)의 요지(要旨)를 설명하고 나서, 온몸으로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천보(天寶) 14년 을미(乙未; 755)에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즉위(<고기古記>엔 천감天監 24년 을미乙未에 법흥왕法興王이 즉위했다고 했으나 그 선후가 뒤바뀐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할까)하여 이 말을 듣고 정유(丁酉; 757)년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큰 절을 세우고 이름을 백월산 남사(白月山 南寺)라 했다. 광덕(光德) 2년(<고기古記>에는 대력大曆 원년이라고 했으나 역시 잘못된 것이다) 갑진(甲辰; 764) 7월 15일에 절이 완성되자, 다시 미륵존상(彌勒尊像)을 만들어 금당(金堂)에 모시고 액자(額字)를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 했다. 또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만들어 강당(講堂)에 모셨는데, 남은 금액(金液)이 모자라 몸에 전부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미타불상에는 역시 얼룩진 흔적이 있다. 그 액자는 '현신성도무량수전(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 했다.
논평해 말한다. "낭(娘)은 참으로 부녀의 몸으로서 섭화(攝化)했다 할 만하다. <화엄경(華嚴經)>에 마야부인(摩耶夫人) 선지식(善知識)이 십일지(十一地)에 살면서 부처를 낳아 해탈문(解脫門)을 여환(如幻)한 것과 같다. 이제 낭자의 순산한 뜻이 여기에 있으며, 그가 준 글은 슬프고도 간곡하고 사랑스러워서 천선(天仙)의 지취(志趣)가 있다. 아, 낭자가 만일 중생을 따라서 다라니(陀羅尼)를 해득할 줄 몰랐더라면 과연 이같이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 글 끝귀에는 마땅히, '맑은 바람이 한자리함을 꾸짖지 마오'했어야 할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대개 세속의 말과 같이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푸른빛 떨어지는 바위 앞에 문 두드리는 소리,
어떤 사람이 해 저문데 구름 속 길을 찾는가.
남암(南庵)이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위는 북암(北庵)을 찬(讚)한 글이다.
골짜기에 해 저문데 어디로 가리,
남창(南窓)에 자리 있으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念珠) 세고 있으니,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위는 남암(南庵)을 찬(讚)한 글이다.
10리(里) 솔 그림자에 한 길을 헤매다가,
밤 초제(招提)로 중을 찾아 시험했네.
세 통에 목욕 끝나니 날도 장차 새는데,
두 아이 낳아 던져두고 서쪽으로 갔네.
위는 성랑(聖娘)을 찬(讚)한 것이다.
분황사 천수대비(芬皇寺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희명(希明)이라는 여자의 아이가, 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느날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芬皇寺)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나가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멀었던 눈이 드디어 떠졌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무릎을 세우고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비옵나이다.
1,000손과 1,000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둘 다 없는 이몸이오니 하나만이라도 주시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시오면, 그 자비(慈悲) 얼마나 클 것인가.
찬(讚)해 말한다.
죽마(竹馬)·총생(총笙)의 벗 거리에서 놀더니,
하루아침에 두 눈 먼 사람 되었네.
대사(大士)가 자비로운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몇 사춘(社春)이나 버들꽃 못 보고 지냈을까.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정취(正趣), 조신(調信)
옛날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처음 당(唐)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이 해변 어느 굴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이곳을 낙산(洛山)이라고 이름했으니, 대개 서역(西域)에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 때문이다. 이것을 소백화(小白華)라고도 했는데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眞身)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것을 빌어다가 이름지은 것이다.
여기에서 의상이 재계(齋戒)한 후 7일 만에 좌구(座具)를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龍天八部)의 시종(侍從)들이 굴 속으로 안내해 들어가므로 공중을 향해 참례(參禮)하니 수정(水精)으로 만든 염주 한 꾸러미를 내준다. 의상이 받아 가지고 물러나오니,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바치므로 의상이 받들고 나와서 다시 7일 동안 재계(齋戒)하고 나서 비로소 관음(觀音)의 참 모습을 보았다. 관음이 말한다. "좌상(座上)의 산마루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 법사(法師)가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나왔다. 여기에 금당(金堂)을 짓고 관음상(觀音像)을 만들어 모시니,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바탕이 마치 천연적으로 생긴 것 같았다. 대나무가 도로 없어지므로 그제야 비로소 관음의 진신(眞身)이 살고 있는 곳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그 절 이름을 낙산사(洛山寺)라 하고, 법사는 자기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聖殿)에 봉안(奉安)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 후에 원효법사(元曉法師)가 뒤를 이어 와서 여기에 예(禮)를 올리려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郊外)에 이르자 논 가운데에서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法師)가 희롱삼아 그 벼를 달라고 청하니, 여인은 벼가 잘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을 빨고 있다. 법사(法師)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친다. 법사(法師)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그를 불러 말한다. "제호(醍호)스님은 쉬십시오." 그리고는 갑자기 숨고 보이지 않는데 그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법사(法師)가 절에 이르자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의 자리 밑에 또 전에 보던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으므로 그제야 전에 만난 성녀(聖女)가 관음의 진신(眞身)임을 알았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했다. 법사는 성굴(聖窟)로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진용(眞容)을 보려고 했으나 풍랑(風浪)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
그 뒤에 굴산조사(굴山祖師) 범일(梵日)이 태화(太和) 연간(827∼835)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니 한 중이 왼쪽 귀가 없어진 채 여러 중들의 끝자리에 앉아 있다가 조사에게 말한다. "나도 또한 한 고향 사람으로, 내 집은 명주(溟州)의 경계인 익령현(翼嶺縣) 덕기방(德耆坊)에 있습니다. 조사께서 다음날 본국(本國)에 돌아가시거든 모름지기 내 집을 지어주셔야 합니다." 이윽고 조사(祖師)는 총석(叢席)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염관(鹽官)에게서 법을 얻고(이 일은 모두 본전本傳에 자세히 있다) 회창(會昌) 7년 정묘(丁卯; 847)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먼저 굴산사(굴山寺)를 세우고 불교를 전했다.
대중(大中) 12년 무인(戊寅; 858) 2월 보름 밤 꿈에, 전에 보았던 중이 창문 밑에 와서 말한다. "옛날에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서 조사와 함께 약속을 하여 이미 승낙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늦는 것입니까." 조사는 놀라 꿈에서 깨자 사람 수십 명을 데리고 익령(翼嶺) 경계에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한 여인이 낙산(洛山) 아래 마을에 살고 있으므로 그 이름을 물으니 덕기(德耆)라고 한다. 그 여인에게 아들 하나가 있는데 나이 겨우 8세로 항상 마을 남쪽 돌다리 가에 나가 놀았다. 그는 어머니께 말한다. "나와 같이 노는 아이들 중에 금빛이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조사에게 말했다. 조사는 놀라고 기뻐하여 그 아이와 함께 놀았다는 다리 밑에 가서 찾아보니 물 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는데 꺼내 보니 한쪽 귀가 없어진 것이 전에 보았던 중과 같았다. 이것은 곧 정취보살(正趣菩薩)의 불상(佛像)이었다. 이에 간자(簡子)를 만들어 절을 지을 곳을 점쳤더니 낙산(洛山) 위가 제일 좋다고 하므로 여기에 불전(佛殿) 3간을 지어 그 불상을 모셨다(고본古本에는 범일梵日의 일이 앞에 있고, 의상義湘과 원효元曉의 일은 뒤에 있다. 그러나 상고해 보건대, 의상義湘과 원효元曉 두 법사法師의 일은 당唐나라 고종高宗 때에 있었고, 범일梵日의 일은 회창會昌 후에 있었다. 그러니 연대年代가 서로 120여 년이나 차이가 난다. 그런 때문에 지금은 앞뒤를 바꾸어서 책을 꾸몄다. 혹은 범일梵日이 의상義湘의 문인門人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그 뒤 100여 년이 지나 들에 불이 나서 이 산까지 번져 왔으나 오직 관음(觀音)·정취(正趣) 두 성인(聖人)을 모신 불전만은 그 화재를 면했고, 그 나머지는 모두 타 버렸다. 몽고(蒙古)의 병란이 있은 이후인 계축(癸丑)·갑인(甲寅) 연간(1253∼54)에 두 성인의 참 얼굴과 두 보주(寶珠)를 양주성(襄州城)으로 옮겼다. 몽고 군사가 몹시 급하게 공격하여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므로 주지선사(住持禪師) 아행(阿行; 옛 이름은 희현希玄)이 은으로 만든 합(盒)에 두 구슬을 넣어 가지고 도망하려 하자 이것을 절에 있는 종 걸승(乞升)이 빼앗아 땅속에 깊이 묻고 맹세했다. "내가 만일 병란(兵亂)에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두 구슬은 끝내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못해서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요, 내가 만일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두 보물을 받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 갑인(甲寅; 1254)년 10월 22일에 이 성이 함락되어 아행은 죽음을 면치 못했으나 걸승은 죽음을 면했다. 그는 적의 군사가 물러가자 이것을 파내어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에게 바쳤다. 이때 낭중(郎中) 이녹수(李祿綏)가 감창사(監倉使)였는데, 이것을 받아 감창고(監倉庫) 안에 간직해두고 교대할 때마다 서로 전해서 이어받았다.
무오(戊午; 1258)년 11월에 이르러 본업(本業)의 늙은 중, 기림사(祇林寺) 주지 대선사(大禪師) 각유(覺猷)가 임금께 아뢰었다. "낙산사의 두 보주(寶珠)는 국가의 신보(神寶)이온데 양주성(襄州城)이 함락될 때 절의 종 걸승이 성 안에 묻었다가 적병이 물러간 뒤에 파내서 감창사에게 바쳐서 명주영(溟州營)의 창고 안에 간직하여 왔습니다. 지금 명주성(溟州城)도 지킬 수가 없사온즉 마땅히 어부(御府)로 옮겨 모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금은 이를 허락하고 야별초(夜別抄) 10명을 내어 걸승을 데리고 명주성에서 두 보주를 갖다가 내부(內府)에 안치해 두었다. 그때 사자로 간 10명에게는 각각 은 1근과 쌀 5석(石)씩을 주었다.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규사(世逵寺; 지금의 興敎寺)의 장원(莊園)이 명주 날리군(捺李郡; <지리지地理志>를 상고해 보면, 명주溟州에는 날리군捺李郡이 없고 오직 날성군捺城郡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본래 날생군捺生郡이니 지금의 영월寧越이다. 또 우수주牛首州 영현領縣에 날령군捺靈郡이 있는데 본래는 날이군捺已郡이요 지금의 강주剛州이다. 우수주牛首州는 지금의 춘주春州이니 여기에 말한 날리군捺李郡은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다)에 있었는데, 본사(本寺)에서 중 조신(調信)을 보내서 장원(莊園)을 맡아 관리하게 했다. 조신이 장원에 와서 [태]수([太]守)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좋아해서 아주 반하게 되었다.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觀音菩薩) 앞에 가서 남몰래 그 여인과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로부터 몇 해 동안에 그 여인에게는 이미 배필이 생겼다. 그는 또 불당 앞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생각하는 마음에 지쳐서 잠깐 잠이 들었다. 꿈 속에 갑자기 김씨(金氏) 낭자(娘子)가 기쁜 낯빛을 하고 문으로 들어와 활짝 웃으면서 말한다. "저는 일찍부터 스님을 잠깐 뵙고 알게 되어 마음 속으로 사랑해서 잠시도 잊지 못했으나 부모의 명령에 못 이겨 억지로 딴 사람에게로 시집갔다가 이제 부부가 되기를 원해서 왔습니다."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여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40여 년간 같이 살면서 자녀 다섯을 두었다. 집은 다만 네 벽뿐이고, 좋지 못한 음식마저도 계속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꼴이 말이 아니어서 식구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얻어먹고 지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草野)로 두루 다니니 옷은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몸도 가릴 수가 없었다. 마침 명주 해현령(蟹縣嶺)을 지나는데 15세 되는 큰아이가 갑자기 굶어죽자 통곡하면서 길가에 묻었다.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그들 내외는 우곡현(羽曲縣; 지금의 羽縣)에 이르러 길가에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다. 이제 내외는 늙고 병들었다. 게다가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니, 10세 된 계집아이가 밥을 빌어다 먹는데, 다니다가 마을 개에게 물렸다. 아픈 것을 부르짖으면서 앞에 와서 누웠으니 부모도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부인이 눈물을 씻더니 갑자기 말한다.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끗했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도 그대와 나누어 먹었고, 옷 한 가지도 그대와 나누어 입어, 집을 나온 지 50년 동안에 정이 맺어져 친밀해졌고 사랑도 굳어졌으니 가위 두터운 인연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쇠약한 병이 날로 더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도 날로 더해오는데 남의 집 곁방살이에 하찮은 음식조차도 빌어서 얻을 수가 없게 되어, 수많은 문전(門前)에 걸식하는 부끄러움이 산과도 같이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워하고 배고파해도 미처 돌봐 주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부부간의 애정을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예쁜 웃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초(芝草)와 난초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입니다. 이제 그대는 내가 있어서 더 누(累)가 되고 나는 그대 때문에 더 근심이 됩니다. 가만히 옛날 기쁘던 일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대와 내가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뭇 새가 다 함께 굶어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짝잃은 난새[난조鸞鳥]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친하는 것은 인정(人情)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아가고 그치는 것은 인력(人力)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이 말을 따라 헤어지기로 합시다." 조신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 데리고 장차 떠나려 하는데 여인이 말한다. "나는 고향으로 갈 테니 그대는 남쪽으로 가십시오."
이리하여 서로 작별하고 길을 떠나려 하다가 꿈에서 깨었다. 타다 남은 등잔불이 깜박거리고 밤도 이제 새려고 한다. 아침이 되었다.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희어졌고 망연(망然)히 세상 일에 뜻이 없다. 괴롭게 살아가는 것도 이미 싫어졌고 마치 한평생의 고생을 다 겪고 난 것과 같아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이 깨끗이 없어졌다. 아예 관음보살의 상(像)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지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참을 길이 없다. 그는 돌아와서 꿈에 해현(蟹峴)에 묻은 아이를 파 보니 그것은 바로 석미륵(石彌勒)이다. 물로 씻어서 근처에 있는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 장원(莊園)을 맡은 책임을 내놓고 사재(私財)를 내서 정토사(淨土寺)를 세워 부지런히 착한 일을 했다. 그 후에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알 수가 없다.
논평해 말한다. "이 전기(傳記)를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해 보니, 어찌 조신사(調信師)의 꿈만이 그렇겠느냐. 지금 모두가 속세의 즐거운 것만 알아 기뻐하기도 하고 서두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다만 깨닫지 못한 때문이다."
이에 사(詞)를 지어 경계한다.
잠시 쾌활한 일 마음에 맞아 한가롭더니, 근심 속에 남모르게 젊은 얼굴 늙어졌네.
모름지기 황량(黃粱)이 다 익기를 기다리지 말고, 인생이 한 꿈과 같음을 깨달을 것을.
몸 닦는 것 잘못됨은 먼저 성의에 달린 것, 홀아비는 미인 꿈꾸고 도둑은 재물 꿈꾸네.
어찌 가을날 하룻밤 꿈만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淸凉)의 세상에 이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