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Jumma Voice
the Newsletter of Jumma People"s Network-Korea
<줌마의 소리>
2002년 12월 일(Dec. . 2002)
창간호(Volume 1)
발행(Publication) : Jumma People"s Network-Korea
편집(Editor) : Gurung Chakma
JPNK 소개
「줌마민족네트워크 한국지부(Jumma People"s Network Korea)」는 방글라데시 치타공 산악지대(CHT)의 소수민족인 줌마인들 중 몇몇이 한국에서 결성한 단체이다. 전 세계에는 각각의 다른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여러 줌마인들의 사회․정치․문화 단체들이 있다. 이들은 종교, 역사, 문화, 전통, 정치, 인권과 줌마민족의 발전을 위한 인도주의적인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각각의 줌마인 단체들의 공통된 주요 목표는 CHT지역의 자결권의 확립을 통해 줌마인들의 정체성을 보호하는데 기초하고 있다.
JPNK는 「연합민중민주전선(the United People"s Demo-
cratic Front)」의 산하 조직이다. UPDF는 줌마인들의 예전 지하정치조직인 <자나사마티 사미티(Janasamhati SAMITI, JSS)>의 투항 이후 CHT의 완전자치를 위한 줌마운동의 최선두에 서 온 CHT 소수민족들의 지역정치조직이다.
CHT운동의 주된 쟁점들이 1997년 방글라데시 정부와 JSS 사이에 체결된 ‘CHT 평화협정’으로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줌마인들에 대한 정부의 잔학행위도 계속 되고 있기에 줌마인들은 CHT의 현 상황이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평화협정 이전에 고향을 떠나 온 대부분의 줌마인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망명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게다가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피해 고향을 등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에 사는 줌마인들은 2002년 4월 14일 샨티 지본 차크마(Shanti Jibon Chakma)의 주도하에 연락사무소를 결성하고, 이후 JPNK라는 조직을 탄생시켰다.
JPNK 의장인 샨티 지본 차크마는 과거 불교 승려이자 평화운동가였다. 사무국장인 로넬 차크마 나니(Ronel Chakma Nani)는 CHT에서 줄곧 활동을 해 온 활동가로, 투쟁과정에서 구금과 폭행을 겪기도 했다. JPNK의 현 회원들은 아직 소수이고, 한국에서 JPNK를 아는 사람도 아주 적다. 그러나, JPNK의 모든 회원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CHT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으며,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사 설>
CHT에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인권침해를 중단해야
민주적 발전과 세계화 시대에 치타공 산악지대(Chittagong Hill Tracts, CHT)의 소수민족인 줌마인들은 여전히 외부와 차단된 방글라데시의 오지에서 권리와 자유를 외치고 있다. 국제사회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시인 타고르가 자신의 서사시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마음에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이상은 높은’ 풍요로운 민주사회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개탄스러운 점은 파키스탄의 방글라데시 지배 시절부터 지금까지 방글라데시 CHT의 소수민족인 “줌마(Jumma)"인들이 오랫동안 인종차별과 종교적 박해에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CHT는 방글라데시에서도 아주 군사적인 긴장이 높은 지역이다. 방글라데시의 군사독재정권이 전복되고 민주정부가 권력을 잡았지만, CHT에서 민주주의는 회복되지 않았고, 여전히 군대의 지배 하에 있다. 500여 개가 넘는 군사 기지(마을 당 하나 꼴인)는 그 자체로 줌마인들에 대한 억압과 인권침해를 증언하고 있다. 군대의 존재는 CHT에서의 인권침해의 근본원인이자 민주주의의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줌마의 제한된 자치를 받아들인 정당인 PCJSS와 완전자치를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또다른 민주정당인 ‘연합민중민주전선(UPDF)" 사이의 정치적인 반목은 자기 파괴적인 무력분쟁으로 비화되었다. 분쟁은 각 조직의 회원들과 지지자들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 대한 책임은 CHT에서의 군대의 주둔과 정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들에 있다. 또 한편으로, 외부 이주민들에 의한 인권침해는 직간접적으로 군대의 존재에 의해 더 빈번해지고 있다. 최근 9월 11일에 발생한 차크마 마을에 대한 공격과 여성들에 대한 이주민들의 강간사건은 결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 사건은 벵갈리 족과 방글라데시 정부가 줌마인들을 쫓아내기 위한 시도의 일부분이다.
1997년의 평화협정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수천명의 샨티 바히니(전 줌마무장조직)가 총을 내려놓음으로써 25년 간의 유혈분쟁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줌마인들은 그것이 줌마 운동을 확대시킨 결과를 가져왔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평화협정은 단지 선언적으로만 평화를 말하고 있다. 줌마인들의 기본적인 요구들을 이행하는 것은 CHT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줌마인들은 여전히 권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민들을 포함한 전세계 민주시민사회가 방글라데시 CHT의 소수민족인 줌마인들과 소수종교에 대한 인권침해를 중단시키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데 있어 목소리를 높이고 중요한 역할을 해야할 때이다.
CHT의 정치적 불안
치타공 산악지대(이하 CHT)는 방글라데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가파른 산악지역이다. 이 지역은 동남쪽으로는 버마(지금의 미얀마), 북동쪽으로는 인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실제 면적은 5,093 평방마일(3,189 평방킬로미터)로 방글라데시 전체 면적의 10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CHT는 많은 인종들과 소수 종교로 구성되어 있고, 이 곳에 사는 이들을 통틀어 “줌마(Jumma)", 혹은 ”줌마인들“이라 부른다. 줌마라는 단어는 산비탈에서 이동하며 벌목과 화전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줌(Jum)"이라는 지역의 방언에서 유래되었다. 줌 농업은 줌마인들의 최초의 생계수단이었고, 그들이 줌마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차크마(Chakma), 마르마(Marma), 트리퓨라(Tripura), 쿠미(Khumi), 키앙 루사이(Kyang Lusai), 밤(Bawm), 우차이(Uchai), 차크(Chak), 탕창야(Tangchangya), 판코(Pankho), 므로(Mro) 등의 소수종족을 다 합쳐서 줌마라고 하고, 그들의 주된 종교는 불교, 힌두교, 카톨릭 등이다.
줌마인들은 언어, 문화, 전통, 종교, 인류학적으로 몽골 계통이라는 점 등 모든 면에서 방글라데시의 다수 인종인 벵갈리인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줌마의 현재 인구는 약 65만명 정도이다.
CHT의 정치적인 분쟁의 근원
줌마인들은 오랫동안 인종차별, 정치적 탄압, 종교적인 박해 속에 시달려 오고 있다. 박해가 최초로 시작된 시점은 1947년에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다시 둘로(주;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됨) 분리될 때였다.
당시 파키스탄 정부는 CHT 이외의 지역에서 수백 가구의 이슬람인들을 이 지역에 정착시킴으로써 억압정책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1900년의 ‘치타공 힐 트랙스 법’의 명백한 위반행위였다. 당시 영국 법은 CHT에서의 (줌마인들의)자치를 허용하고, 외부인들의 정착을 완전히 금지하고 있었다. 또한 파키스탄 정부는 1957년부터 62년까지 CHT 지역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했다. 그 계획으로 인해 경작 가능한 땅의 약 40%가 물에 잠겼다. 10만명 가량의 줌마인들이 발전소 건설로 유일한 생계수단인 땅을 잃고, 1964년 인도로 피신해야만 했다.
1971년 방글라데시(주;당시에는 동파키스탄)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줌마인들은 파키스탄의 점령에 맞서 벵갈리인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했다. 줌마인들은 새로운 국가, 새로운 헌법, 새로운 정부가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줌마인들이 기만당한 것이었다. 줌마인들은 마치 불이 붙은 프라이팬 위에 얹혀진 꼴이었다. 벵갈리 해방군인 묵티 바히티(Mukti bahinee)는 파키스탄 군대가 물러가자마자 1971년 12월 5일 판차리 바자르(Panchari bazzar)를 공격해 14명의 줌마인들을 살해했다. 동파키스탄은 독립을 쟁취해 1971년 12월 15일 “방글라데시”라는 새로운 국가가 되었다.
방글라데시 의회의 줌마 의원인 마나벤드라 나라얀 라르마(Manabendra narayan larma)가 이끄는 줌마 대표단은 방글라데시 초대 수상인 세이크 무지부르 라하만(Seikh Mujibur rahaman)과 만나 CHT에서의 자치를 포함한 네 가지 요구사항을 담은 각서를 제출했다. 수상은 그 각서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줌마 지도자들을 분노케 했다. “우리들 모두는 벵갈리인들이다. 당신들의 인종적인 정체성은 잊고 벵갈리인들이 돼라.” 그것은 CHT의 줌마인들의 존재에 대한 커다란 모욕이었고, 줌마운동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PCJSS : 줌마인들의 정당
‘치타공 힐 트랙스 민중연대연합(PCJSS)" 지도자인 마나벤드라 나라얀 라르마는 자치를 위한 무장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줌마의 무장조직인 샨티 바히니(평화군)를 구성했다.
반대로, 방글라데시의 정부는 외부인들을 CHT지역으로 이주시키고 대규모로 군대를 파견했다. 그 결과, 줌마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났으며, 불법재산 점령, 폭동, 이주민들과의 협력 하에 방글라데시 군에 의한 학살과 인종청소가 다시 벌어졌다.
대량 학살 사례들을 간단히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다;
1. 1980년 3월 25일 벵갈리 정착민들과 방글라데시 군대에 의해 카우칼리(Kaukahli) 학살이 벌어졌는데, 한 불교사원 구내에서 300명의 줌마인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2. 1986년 5월 29일 판차리(Panchari) 학살이 일어나, 몇 명의 줌마인들이 사망하고 수 천명이 인도로 피신했다.
3. 1988년 8월 8일 군대와 정착민들에 의해 바가이 차리(Baghai chari) 학살이 일어났다.
4. 1989년 5월 14일 랑가두(Langadu) 학살이 일어나 50여명이 사망했다.
5. 방글라데시 군대의 지원을 받은 정착민들이 1992년 2월 2일 말리야(Malya) 학살을 일으켜 5~6명의 줌마인들을 살해했다.
6. 1990년 4월 10일 정착민들과 방글라데시 국경수비대(BDR)에 의해 로강(Logang) 학살이 일어났다.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1,300명의 줌마인들이 사망했다.
7. 1993년 11월 17일 나니아차르(Naniachar) 학살이 일어났다. 약 100명이 학살되고 500명이 부상당했다.
8. 1995년 3월 15일 반다르반(Bandarban) 학살이 일어나 수 명이 죽고, 약탈, 방화로 승려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다.
9. 1999년 10월 16일 바부차라(Babuchara) 학살에서 몇 명이 숨지고 약탈, 방화, 성폭력이 자행되었다.
10. 방글라데시 민병대와 정착민들이 6월 25일 람가르(Ramgarh) 학살을 일으켜 6명이 숨지고, 수백채의 가옥이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
11. 2001년 5월 18일 군의 지원을 받은 정착민들이 디기날라(Dighinala) 학살을 일으켜 수 명이 사망했다.
12. 고문, 불법 체포, 구금, 강제 재산몰수, 성폭행 등과 같은 셀 수 없는 인권침해가 방글라데시 독립 이래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는 외부에 알려졌지만 대다수는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다.
1997년의 CHT 평화협정과 그에 대한 반발
1997년 12월 2일, 25년 이상 동안 이어진 피의 내전을 끝내는 PCJSS와 방글라데시 정부간의 평화협정이 맺어졌다. PCJSS의 무장조직인 샨티 바히니는 총을 놓고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PCJSS와 줌마인들의 주된 요구는 해결되지 않았고, 정부는 제한된 지역 자치를 제안했다.
결국, (PCJSS에서) 분리된 줌마의 민주정당은 PCJSS가 줌마인들의 유일한 대변자가 아니고, 헌법으로 보장된 완전자치와 벵갈리 이주민들의 CHT 외부로의 귀환, 국경경비대를 제외한 군대의 철수와 같은 근본적인 요구들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문제제기 속에 평화협정을 반대했다. 게다가 평화협정의 조항들 조차 조금도 이행되지 않았다. 학생그룹을 포함한 분리정당은 1998년 12월 26일, 끝까지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새로운 정당을 구성했다. ‘연합민중민주전선(UPDF)"는 ’완전자치‘라는 줌마인들의 근본적인 요구를 이행하기 위한 싸움의 키를 잡게 되었다.
PCJSS와 UPDF 사이의 정치적 반목
지금 CHT의 상황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고, 이는 비단 벵갈리 족과 방글라데시 군의 박해 때문만은 아니다. 정부와 더불어 PCJSS와 그의 동맹 그룹들이 UPDF에 가하는 억압은 CHT를 무법천지와 끊임없는 폭력에 시달리게 하고 있다. PCJSS는 지역위원회를 구성해 정부의 일부가 된 반면, UPDF는 완전자치를 요구하며 민주적으로 반정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심한 경우, 각 그룹은 서로를 타겟으로 삼게 되었다.
정부는 줌마의 자기파괴적인 내란을 방관자로서 즐기고 있다. 믿을만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CHT 평화협정 후 2002년 9월까지 JSS와 UPDF 간의 다툼 때문에 231명이 숨지고 4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줌마인들은 정부의 잔학행위와 라이벌 정당 간의 인권침해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최근 UPDF 활동가들과 동조자들이 임의폭행과 살해를 당한 것은 그들에 대한 JSS의 보복과 억압이 사실로 드러났음을 보여주었다. 평화협정은 CHT에 평화를 가져올 수 없고, CHT의 새로운 문제의 근원이 되고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CHT에서의 군대의 잔학행위들
평화와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CHT에서는 방글라데시 군대가 줌마인들의 정상적인 삶을 깨뜨리고 있다. “우타란 작전(기동연습 작전)”이 최근 방글라데시의 시골지역에서 방글라데시 군에 의해 전개되었다.
테러를 구실로 군대는 가택수색을 하고,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과 청년들에 대한 폭행을 마음대로 자행하고 있다. 경찰과 다른 법 집행기관들을 포함한 방글라데시 군은 UPDF 활동가들과 지지자들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UPDF는 민주적인 정당이고, 줌마 민족을 정치적으로 대표하기 때문에 UPDF에 대한 억압은 인권의 측면에서 불법이고 유엔인권헌장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다
권고안 :
1. 방글라데시 정부는 헌법이 보장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평화를 통해 CHT 문제를 풀어야만 한다.
2. CHT에서의 비무장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시급한 문제이다. 민주주의는 CHT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있어 적절한 방안이다. 이러한 점에서 정부는 UPDF에 대한 탄압을 중단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PCJSS와 UPDF는 평화와 인권이라는 더 큰 이익을 위해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3. 1997년의 평화협정이 있긴 하지만, 협정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CHT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가능하다. CHT 문제의 가능성 있는 해결방안은 PCJSS와 UPDF 상호간에 제안될 수 있을 것이다.
4. 각국의 정부와 비정부기구, 평화운동 단체와 개인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줌마인들과 함께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망명 중에 있는 줌마인의 호소
저희들은 방글라데시 치타공 산악지대(Chittagong Hill Tracts)의 차크마 토착민들입니다. 저희 차크마(줌마인들)는 방글라데시 정부의 잔혹한 정책에 의해 체계적으로 말살되어가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주류인 벵갈리인들과는 언어, 문화, 종교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저희는 언제나 벵갈리 정착민들, 군인들, 벵갈리 갱단들에 의해 아무런 이유없이 폭행, 고문, 살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수십년 동안의 이러한 잔학행위와 비인도적인 처우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젊은 차크마인들이 오로지 생존을 위해 모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프라순 차크마(Prasun Chakma)를 포함한 줌마인들이 한국에서 추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부디 다음의 이유들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
실례로, 1986년 방글라데시 군은 카그라차리(Khagrachari) 대학 학생이었던 저의 사촌 아로모이 차크마(Alomoy Chakma)를 총검으로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그가 한 잘못이라고는 몇 명의 군인들이 우리가 살던 가르가쟈차리(Gargajyachari) 마을 근처에서 수풀에 숨어있는 것을 본 것 밖에 없습니다. 그를 잔인하게 살해한 후 카그라차리 병영에서 온 방글라데시 군인들은 그의 절단된 시체를 가방에 담아 알려지지 않은 장소로 가지고 갔습니다.
방글라데시 군은 지금까지 제 사촌의 시체를 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희생자의 아버지인 제 삼촌은 방글라데시 정부에게 재판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글라데시 군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재판 대신에 그는 군에 끌려가 두들겨 맞고 잔인하게 고문당했습니다. 잔인한 고문으로 그는 심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방글라데시 군은 그가 이 문제에 관한 재판요구를 중단하지 않으면 살해될 거라고 위협했습니다.
과거, 저는 국제사회에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침해에 대한 문제제기를 수도 없이 했습니다. 제가 첨부한 성명서, 신문기사들을 읽어 주십시오. 프라순 차크마는 저의 동생이기 때문에 제가 1979년 이래 23년 동안 방글라데시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처럼 그는 지금 방글라데시나 인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상황에서 저는 서울에 있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과 남한 정부,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를 비롯한 모든 관련자들에게 프라순 차크마를 도와달라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부디 그에게 즉각 난민지위를 부여해 주십시오.
개인적으로 저는 그가 매우 고운 심성을 지니고 있는 평화적인 사람이라는 걸 보장합니다. 당연히 그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부디 그를 불확실한 미래와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십시오. 그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저희 줌마인들은 방글라데시 정부로 인한 정치적 희생자들입니다.
저희들은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이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방글라데시 정권에 의해 괴롭힘을 당해 왔습니다.
제발 그가 임시로 한국에 머무를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가 아무런 장애없이 육체적, 정신적 고문을 피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발 그가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희들은 방글라데시 정권에 의해 인간 이하의 존재로 대접받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달, 위에 언급한 이유들로 인해 한국에서 7명의 다른 줌마인들이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프라순 차크마도 ‘줌마민중네트워크-한국(the Jumma People"s Network-Korea)"의 정식회원입니다.
간혹, 방글라데시 정부는 방글라데시 국민으로서 저희 줌마인들의 정체성을 부인합니다. 그렇다면 줌마인들은 어디로 가야한단 말입니까? 저희들이 처한 상황은 유엔, NGO, 국제사면위원회와 세계 많은 정부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부디 줌마인들의 사례를 심각하게 고려해 주십시오.
프라순 차크마에게 보내는 어떠한 지원이나 도움을 주시더라도 대단히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프라순 차크마와 현재 방글라데시의 치타공 산악지대에서 널리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법무부 장관께서 프라순 차크마에게 신속히 정치적 망명을 허용해 주실 것을 간절히 희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프라순 차크마는 생명의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프라순 차크마는 지금 당장 한국정부의 인도주의적인 보호를 필요로 합니다.
프라냐 부미아난드(Prajna Bhumianand, Alias P.J.
Chakma) 교수로부터
* 차크마 교수는 태국 방콕의 카셈 분딧 대학의 교수이자 지식인이다. 그는 20년 이상 동안 망명인들을 이끌어오고 있다.
<뉴스 단신>
4명의 무고한 마을 사람들이 디기날라에서 체포되다
9월 12일, 경찰과 군대가 연합하여 가그라차(Khagrachari)의 디기날라(Dighinala)에서 4명의 무고한 마을 사람을 체포하였다. 이 사건은 수비대가 한밤중에 바부차(babuchara)지역에서 소위 연합작전이라는 것을 펼치고 있던 중 발생하였다. 체포된 사람은 프리요랄 차크마(Priyolal Chakma), 타룬 죠티 차크마(Tarun Jyoti Chakma), 사비노이 차크마(Sabinoy Chakma) 그리고 비말 칸티 차크마(Bimal Kanti Chakma)로 이들은 CHT에서 완전자치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UPDF의 멤버와 지지자들이다.
<줌마민족네트워크 일본지부(JPNJ)> 시위를 벌여
2002년 10월 18일, JPNJ가 도쿄의 방글라데시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2002년 9월 11일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Coxꡑs Bazaar) 구역내 마도르부니(Madorbunia)의 차크마 마을에서 벌어진 공격에 대해 민족적 동기가 부여된 것이라고 규탄하면서 대사관을 통해 방글라데시의 수상에게 이와 관련한 각서를 제출하였다. 이 사건에서 30명의 여성들이 고문을 당하고 다쳤으며 3명의 여성이 집단 성폭행을 당하였다.
JPNJ는 소수의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한 방글라데시 정부를 강하게 비난하였고 즉시 적절한 조치를 취해 범죄자를 응징하고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질 것을 촉구하였다.
무장한 JSS 요원들이 UPDF의 멤버들을 살해하다
9월 23일, 무장한 JSS의 요원들이 란가마티(rangamati) 구역내 두리아탈리 유니온 파리샤드(dulltatali union parishad)의 하자차라(hazachara)라는 마을에서 UPDF 지지자 2명을 살해했다. 그 사건은 JSS 요원들이 한밤중에 그 마을을 습격했을 때 발생하였다. 그들은 희생자들에게 나머지 멤버들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고 뜻대로 되지 않자 직접 총을 쏴 그들을 살해했다. 희생자는 모누 차크타(monu chakma, 42세)와 그의 아들 톤총야 차크타(tonchongya chakma, 18세)이다.
2002년 8월 31일에는 UPDF의 지지자 2명이 가그라차리(khagrachari)지역내의 페라차라(perachara)에서 JSS의 무장요원에 의해 납치되었다. 아직 추적중이나 그들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1997년 JSS와 방글라데시 정부가 서명한 평화협정이후 UPDF와 PCJSS의 충돌로 인해 231명을 넘어서는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400여명의 부상자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JSS, UPDF를 근절시키기로 결의하다
PCJSS에 대한 국회가 나흘에 걸쳐 열렸다. JSS는 CHT에 있는 줌마인들의 정당으로 1997년 방글라데시 정부와 평화협정에 서명하였다. 그 후 자연스럽게 JSS는 CHT지역위원회(CHT에 있는 정부의 최고 행정기구)의 일부가 됨으로써 정부의 파트너가 되었다. 국회는 11월 8일 막을 내렸다.
JSS가 작성한 브리핑에 의하면, JSS의 최고 지도자 조우티린드라 보드히프리야 라르마(joutirindra bodhipriya larma)가 35명으로 구성된 중앙 위원회의 회장에 재선출되었고 33가지의 긴 프로젝트가 계획되었다고 한다. JSS는 UPDF를 완전히 근절시키고 CHT에서 줌마인들을 위한 운동을 계속 지속해 나가야 한다고 17일 결의했다. 반면 UPDF, 줌마인, 모든 줌마 관련 기구와 다른 인권기구들은 줌마인들의 진정한 꿈이 CHT 평화협정에 전혀 관철되지 않았다고 안팎으로 주장하고 나섰다. 근래 들어 JSS 최고 지도자는 나니아차르(naniachar)에서 열린 대중회의에서 JSS는 아와밀리그(awamiligue)정부를 믿고 평화협정에 서명하는 커다란 실수를 범했다고 후회하는 발언을 했다. 이는 평화협정에 의해 전혀 실행되지 않은 줌마인들의 주된 요구사항에 대한 간접적인 지지였다. JSS지도자는 또한 JSS와 정부의 결탁이후 CHT에서 줌마운동의 선두에 나서있는 지도적 정당인 UPDF를 근절시키겠다는 다짐을 보이며 투쟁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JSS 투쟁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며 그것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를 이해하기란 도무지 어려운 노릇이다.
JPNK 국제 페스티발에 참가
JPNK의 종교, 문화관련 사무관인 아닐 차크마(anil D. chakma)가 이끄는 대표단이 필리피노(philiphino)공동체와 파스토랄(pastoral)센터가 이민 노동자들을 위해 한국에서 개최한 수촉(suchok)페스티발에 참가하였다. 그 행사는 9월 29일 서울 혜화동에서 열렸다. 남아메리카, 유럽, 서남아시아등 많은 국가에서 참여한 그 행사는 래플판매, 국가별 음악소개 및 문화공연 등을 포함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아닐 듀타(anil dutta)와 프라순(prasun)의 댄스공연이 있을 때에는 스피커를 통해 차크마 음악이 연주되었다.
무엇보다 "줌마인"들이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것이 이 행사의 큰 특징이었다. 줌마인들에 대한 소개가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 필리핀 언어로 간단히 이루어지기도 했다.
9월 12일 방글라데시군 줌마마을을 수색하다
캠프 사령관이 이끄는 방글라데시군부대가 카오갈리(kaokhali)지역에 주둔하며 가그라(ghagra)지방의회 관할구역 내의 포라 파라(pora para)와 무브하차리(mubhachari)부근에서 무자비한 수색작업을 벌였다. 12명의 수색팀은 아무런 이유없이 그 지역의 줌마인 3명을 육체적으로 고문하고 괴롭혔다. 그 피해자들은 수크라마니 차크마(sukramani chakma,30),수레시 쿠마르 차크마(suresh kumar chakma,34),비말 크리스나 차크마(bimal krisna chakma,25)이다.
이에 그 마을의 노인들이 군사령관을 만나 피해자들을 위한 재판과 보상을 요구하였지만, 그들은 줌마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군부대와 다른 관리직원들에 의한 줌마인들 지역내에서의 불법가택수색은 20여년 이상 계속되어 왔다.
JSS, 12월 2일에 평화협정 5주년 기념식을 가지다
JSS는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CHT 평화협정 5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 날 기념식은 정부측으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현 방글라데시 집권당 BNP 정부는 항상 평화협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한편, <연합민중민주전선(UPDF)>는 같은 날 보다 새롭고 의미있는 평화협정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