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있는 조선 중기에 건립된 서원.
돈암서원은 김장생의 문인들이 스승을 추모하여 사우를 건립한 뒤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 오다 사당 앞에 강당을 건립하면서 서원의 단초를 이루었다. 또한 돈암서원은 1659년(효종 10)에 이어 1660년 (현종 1), 두 번 사액을 받은 특이한 사례이다. 돈암서원은 영향력의 범위가 넓어서 호서 지역 전체 뿐만 아니라 호남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 때에도 보존된 충청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연산면소재지인 청도리의 연산역 남쪽 국도 1호선을 따라 서쪽으로 2.3㎞를 가면 도로 남쪽에 돈암서원 입구가 있다. 이 길로 300m 정도 들어가면 돈암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서원 훼철령에서도 철폐되지 않고 보존되었던 유서 깊은 돈암서원은 원래 임리에 있었으나 1881년(고종 18)에 이르러 서원의 지대가 낮아 홍수 때 뜰 바로 앞까지 물이 차서 조금 높은 지대인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돈암서원은 배산임수 형국으로, 평지에 전학후묘식으로 배치하였으나 앞면에 위치한 강당이 중심축에 놓이지 않고 약간 서쪽으로 비켜 직각 배치되어 있다. 돈암서원의 구조는 크게 네 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외삼문인 입덕문을 들어서면 강학 공간의 넓은 마당을 두고 강당인 양성당이 배치되어 있고, 양성재 서쪽에 장판각과 정의당이 배치되어 있다. 강당인 돈암서원 응도당은 입덕문을 들어서서 직각으로 동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양성당 뒤로 내삼문을 두었고 사당을 배치한 묘당 공간이 있다. 돈암서원의 사당인 유경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앞면 열은 퇴칸이고 뒷면 2열은 내부 공간을 꾸며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돈암서원 응도당은 별도의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각 칸 하나씩을 방으로 꾸몄고, 가운데 3칸 앞면에는 퇴칸을 만들어 마루를 깔았고, 뒷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양 측면의 1칸통은 각각 큰 온돌방이다.
정의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뒷면 열 가운데 2칸은 마루방을 두었다. 1고주 5량가 구조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장대석 외벌대로 기단을 만들었고, 바닥에는 전을 깔았다. 장판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내부에는 모두 마루를 놓았다. 무고주 5량가 구조이고,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사마재는 양성당 동쪽 측면에 ‘ㄱ’자 형태로 있고, 사마재를 에워싸는 담이 둘러져 있다. 1고주 5량가 구조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수직사는 동쪽 담을 둘러친 별도의 공간에 배치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남쪽 1칸은 부엌, 가운데 2칸은 온돌방을 두었고, 북쪽 측면에는 퇴칸을 두었다. 온돌방 앞면에는 퇴칸을 두고 마루를 깔았으며, 마루는 우물마루로 짰다.
광산김씨는 연산 지역에서 세거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호서 명문 사족가문이다. 이런 이유로 돈암서원은 서인-노론계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1871년 서원 훼철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존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특히 김장생이 타계한 후 제자와 문인들이 만든 돈암서원책판(遯巖書院冊版)이 등 여러 자료가 남아 있다.
이렇듯 돈암서원은 호서 지역은 물론 기호 지역 전체에서 존숭받는 서원으로, 김장생을 제향한 서원 중에서 가장 비중 있고 영향력 있는 서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까지 잘 보호, 관리되고 있으며 지역사를 연구하는 향토 자료로서도 보존적 가치가 높다. 나아가 호서 지역 사림의 동향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며, 당시 실질적인 세력권자인 김장생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홍살문
원정비
돈암서원 원정비는 돈암서원을 세우게 된 배경과 서원의 구조를 남기기 위해 건립한 비석이다.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의 학문과 성품을 칭송하는 글도 새겨 놓았다.
연산면소재지인 청동리의 연산역 남쪽 국도 1호선을 따라 서쪽으로 2.3㎞를 가면 도로 남쪽에 돈암서원 입구가 있다. 돈암서원 원정비는 서원 내의 강당 건물인 양성당(養性堂) 앞에 자리잡고 있다.
사각의 연화문을 새긴 농대석 위에 백대리석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팔작지붕 모양의 가첨석(지붕돌)을 올렸다. 비문(碑文)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썼으며, 앞면에 새겨져 있는 전서체 제목은 김만기(金萬基)가 쓴 것이다.
돈암서원 원정비 에는 ‘연산돈암서원지비(連山遯岩書院之碑)’라 새겨져 있다.비석 사면에 큰 글씨로 새겨져 있다. 대리석이어서 풍우로 마모된 것보다 동리 아이들의 손길에 훼손된 부분이 많다. 2000년 1월 11일 충청남도에서 문화재자료 제366호로 지정하였다.
돈암서원 원정비에는 당시 서원의 구조를 기록해 놓았는데, 이는 현재의 서원 구조와 이전의 서원 구조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전에는 지금의 건물 배치와는 다르게 사우(祠宇) 앞에 강당인 돈암서원 응도당이 있었고, 그 좌우에 거경재(居敬齋)와 정의재(精義齋)를 각각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사계 김장생의 문하생들이 세운 돈암서원 원정비는 장중하고 온화한 김장생과 자상하고 치밀한 김집의 성품을 기리고, 그들의 높은 학문적 성취를 적고 있다. 이에 돈암서원 원정비를 통해 기호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김장생, 김집의 위상과 영향력을 알 수 있다. 돈암서원 원정비는 동춘당 송준길이 쓴 금석문 글씨 중에서 백미에 속하여 최고의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
응도당
돈암서원의 강당 건물로 1634년 서원 창건시 건축하였고 강학 공간으로 사용 및 호서 사림의 활동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강당이 사당 방향과 직각으로 배치되는 예는 그리 흔하지 않으나, 돈암서원 응도당은 강학 공간에서 앞면에 직각 방향으로 틀어져 배치되어 있다.
연산면소재지인 청동리의 연산역 남쪽 국도 1호선을 따라 서쪽으로 2.3㎞를 가면 도로 남쪽에 논산 돈암서원 입구가 있다. 돈암서원 응도당은 논산 돈암서원 내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돈암서원 응도당은 본래 인조 대에 건축되었으며 몇 차례 중수·보수가 있었을 것이나, 기록이 불명확하고 원래는 숨말이라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가 1880년 수해로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다.
건물의 조성은 낮은 평지를 정지하여 기단을 꾸미고 있다. 기단은 비교적 정교하게 다듬은 화강석인데, 정면의 경우 1단의 초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뒷면은 2단으로 되어 있다. 기둥머리의 구조는 사당과 같은 형식이다. 즉 창방을 끼우고 주두를 올린 다음 첨차를 짜고 장여와 굴도리를 얹었다.
서원 성격 중 강당으로는 보기 드물게 큰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중국의 옛 제도를 따르고 있는 건물로, 현존하는 건물 역시 그러한 특징이 잘 남아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내부에는 마루를 깔았다. 뒷면 양 측면에는 문을 달아 마루방을 꾸몄고, 남측에 2칸, 북측에 1칸을 두었다. 2고주 5량가 구조에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고, 풍판 아래에는 눈썹지붕을 퇴칸처럼 달았다.
돈암서원은 17세기 호서의 수원(首院)으로 지목된 대표적인 서원으로 제향 인물의 면면이나 사회·정치적 위세가 매우 컸던 곳이다. 이중 강학과 활동 공간이었던 응도당의 가치는 더욱 크며, 건축물로서도 규모나 구조, 세부 기법 등이 특이하여 보물로 지정되었다.
암막새를 보면 특이한 그림과 제작연대가 기록되어 있다.
책판
『돈암서원지』 「장판각기」에 따르면 “사계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292년 후 임술년(1922)에 전서(全書)가 완성되어 판각에 올리니 모두 1,793판이요, 또 유고(遺稿)와 『변의집람(辨疑輯覽)』과 『비요(備要)』에 구판(舊版)이 모두 1,137판이요, 「황강실기」와 『신독재전서』 및 유고가 모두 1,238판이니 모두 합하면 4,168판인데 4년 후인 병인년(1926) 봄에 돈암서원에 집을 짓고 합쳐 보관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처음에는 4,168개의 책판이 보관되었는데 그동안 많은 양이 유실되어 현재는 1,841판이 남아 보관되고 있다.
나무판에 판각하고 양측 마구리에 손잡이를 끼운 전형적인 책판의 형태로 우리가 흔히 사진 자료나 텔레비전 화면에서 자주 보는 팔만대장경판과 같은 모양이다. 각 책판마다 크기가 다르지만 대부분의 책판의 외형 크기는 가로 길이가 50~60㎝ 정도이고 두께는 2~3㎝ 또 마구리의 길이는 25~30㎝ 정도이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글이 새겨진 전곽의 크기는 가로가 33㎝, 세로가 20㎝ 정도이고 무게는 1~2kg 정도이다. 돈암서원 책판은 현재 논산 돈암서원 경내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물마루 기와지붕인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다.
2007년 2월 충청남도역사문화원의 『비지정동산문화재 실태조사 학술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가례집람』 책판 169판, 『경서변의』 책판 86판, 사계선생 연보 책판 3판, 사계선생 유고 책판 160판, 『사계전서(沙溪全書)』 책판 953판, 『사계전서』 속 책판 79판, 『상례비요』 책판 32판, 신독재연보 책판 13판, 신독재선생 유고 책판 202판, 『신독재전서』 책판 140판, 기타 4판으로 총 1,841판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이중 1922년에 간행된 『사계전서』 책판의 상태가 가장 좋지 않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판각되어 사용된 목재의 질도 좋지 않고 두께도 얇으며 제작 상태도 좋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논산 돈암서원 장판각에 보관돼 있는 책판 중 양측 마구리가 가장 많이 빠진 것도 『사계전서』이다. 오히려 300년도 넘은 1648년에 간행된 『상례비요』와 1694년에 간행된 『의례문해속』 그리고 1710년에 간행된 『신독재유고』의 상태가 더 좋은 편이다.
원래의 모든 책판이 보존되지 못하여 아쉽지만, 현재 보관되어 있는 책판만으로도 우리나라 인쇄 문화의 변화 과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유경사
돈암서원 유경사는 호서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장생을 주향으로 하며, 1658년(효종 9)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추배하였고, 이어 1688년(숙종 14)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95년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각각 추배하고 있는 곳이다.
연산면 소재지인 청동리의 연산역 남쪽 국도 1호선을 따라 서쪽으로 2.3㎞를 가면 도로 남쪽에 논산 돈암서원 입구가 있다. 돈암서원 유경사는 양성재 바로 뒤에 내삼문을 두고 자리하고 있다. 이 묘당 공간은 조금 높은 단 위에 담을 쌓고 건물을 배치하였다.
1고주 5량집 구조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렸고,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퇴칸 바닥은 기단 바닥과 같게 하였고, 내부에는 마루를 깔았다. 기단은 장대석을 잘 다듬어 네벌대로 쌓았고, 정면 4곳에 계단을 설치해 두었다. 초석은 방형 좌대(座臺)에 원형 주좌를 돋우어 만든 ‘凸’자 모양의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외부로 뻗은 제공은 쇠서 모양으로 2제공을 만들고, 2제공 위의 보머리 부분은 운공 모양과 봉두를 조각해 두었다. 1출목 2익공 형식이다. 뒷면의 공포(栱包)도 앞면과 같다. 정면 3칸에는 띠살문 4분합 들어열개를 달았고, 측면과 뒷면은 삼벽으로 마감하였다. 내부의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정이다. 건물에는 모루단청이 되어 있다.
사당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공포의 짜임새가 큰 건물 못지않다. 특히 출목을 내서 대소 첨차를 2중으로 올린 공포 구조는 소규모 사당에서는 잘 만들지 않고 규모가 어느 정도 큰 건물에 만드는데, 이는 처마의 높이를 기둥으로 해결하지 않고 구조적인 아름다움으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암서원 유경사에서처럼 작은 규모에서 첨차를 2중으로 올린 공포는 그리 흔하지 않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앞면 열은 퇴칸이고 뒷면 2열은 내부 공간을 꾸며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예부터 충청 지역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제향 인물이 많았다. 특히 차령 이남은 충절인 외에 예학의 대가들이 많이 제향되었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가 논산 돈암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호서사림의 지역적인 특성을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또한 제향 인물들은 당시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충청 지역 내 사족들의 집결 장소인 논산 돈암서원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사당의 세부적인 조각에도 장식성이 강한 것은 사당의 위계를 높이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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