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마음에 꽃 한 송이 피면
남유정 (시인)
그대 마음에
꽃 한 송이 피고
그대 마음에
달 떠오르면
내 마음도
그런 줄 아세요
그대 마음에
바람 불고
그대 마음에
나뭇잎 지면
내 마음도
그런 줄 아세요
-졸시 ‘편지’ 전문
편지는 사랑하는 이에게 가는 길이다. 순한 찔레꽃 향기를 담은 꽃길이다. 때로는 달빛을 밟으며 가는 호젓한 길이다. 혼자 걷는 길이지만 따뜻하다. 길 끝에는 사랑하는 이가 불을 밝힌 집이 있으니.
편지지를 앞에 놓고 앉으면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먼저 온다. 보고 싶음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밤을 하얗게 지새워 편지를 쓴다. 아침에 읽어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부치지 않은 편지들은 버려지고, 때로는 시가 된다. 수줍은 고백은 그에게 가는 길을 만든다. 그 길에서 만난 물소리와 나뭇잎과 조팝나무 같은 꽃들, 향기로운 저녁과 어둠 속에서 듣는 풀벌레 울음들이 늘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를 대신해 준다.
내 청춘을 돌아보면 사랑은 넘치되 연애는 없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알콩달콩 다투며 키워가는 연애 대신 사랑의 대상을 정해 놓고 혼자 그리워하며 편지를 쓰는 것이 전부였다. 소극적인 성격과 사랑에 대한 지나친 관념적인 동경 때문이었던 것 같다.
스무 살 때 가정교사를 했다. 청주 대성동 꼭대기에 있는 청기와 집은 문을 나서면 산으로 이어졌다. 공작새와 금계, 은계, 토끼들이 오글거리는 뒤뜰이 넓었다. 비탈에는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 집에서 한 소년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를 떠올릴 때면 늘 가슴이 아렸다. 밤의 차양을 걷어내는 새벽의 첫 순간에도, 떼어놓는 걸음, 내쉬고 들이쉬는 숨결에 조차 오직 아팠다.
한 번은 그를 생각하며 걷다가 무심천 길에서 우연히 그를 만난 적이 있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그에게 무관심한 척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이내 돌아서서 달려가 사람들 사이로 멀어지는 그를 잡고 돌려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용기가 없었다.
그 후로도 그리움은 음지식물처럼 저 혼자 가지를 뻗고 자랐다. 뿌리는 희망이 없는 사랑을 찾아 어둠 깊이 뻗어 내렸다. 뿌리의 촉수를 통해 언어를 길어 올려 편지를 썼지만 정작 부치지는 못 했다. 언덕꼭대기 집에서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저 많은 불빛 속에 그가 켜놓은 불빛도 있겠지 생각했다.
밤안개가 차는 날이면 언덕 위의 집은 섬이 되곤 했다. 그 집에서 겨우내 노트 한 권에 빽빽하게 편지를 썼다. 발이 푹푹 빠지도록 눈이 내린 아침이면 뒷산을 돌아다니다 들어와 편지를 쓰고, 바람소리에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밤에도 편지를 쓰고, 좁은 골목을 오르내리며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편지가 노트 한 권에 꽉 채워졌을 때 나는 그 조용한 도시를 떠났다. 그에게서도 떠났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이른 봄날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사랑의 감정을 조절함에도 표현함에도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쉽게 가지 못하고 구불구불 먼 길을 돌았다. 사랑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좌절과 절망에 대한 두려움은 끝내 그에게 다가서는 것을 막았다. 그저 살아가는 동안 한 번만이라도 그를 우연히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었다. 지금도 여전히 내게 남아있는 의문점은 왜 그에게 연애라든가 결혼이라는 구체적인 바람을 갖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스쳐지나가도 좋으니 먼빛으로 한 번 얼굴을 보기만 했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으니 가슴을 뒤흔드는 갈망과 통증에 비하면 그에게 바라는 것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를 통해 나를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내 사랑은 그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당연히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내 사랑은 그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사랑이 아니라 나를 단련시키는 힘에 다름 아니었다.
외로움을 피하지 않았다. 안개의 혀처럼 부드럽게 나를 핥아주는 외로움과 늘 동행했다. 적막하나 수다스럽지 않고,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어 사람들 속에 있다가도 나는 서둘러 내 집으로 온다. 그리고 이제는 그에게 쓰는 것인지 아니면 습관처럼 세상의 아직 오지 않은 사랑을 향해 쓰는 것인지도 모를 편지를 쓰는 것이다.
위의 시는 그렇게 내 사랑의 방식으로 쓰여 졌다. 내 시의 씨앗은 스물의 봄, 기차역에 외롭게 서 있던 한 소년을 보는 순간 내 적막한 영토에 떨어졌다. 씨앗이 싹이 트기 위해서는 적산 온도가 필요하다. 일정한 온도가 몸에 축적되기 전에는 싹을 틔울 수가 없다. 입술이 타도록 부르며 그대에게 가던 길은 시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었을까? 몸은 영혼을 태우는 심지였다. 기다림이라는 이름으로 영혼을 소진시키던 시간에 의해 시는 발아했다. 소유하지 않았지만 나는 온전한 사랑을 얻었다. 한 사람을 그리면서, 세상에 함께 살면서 아무 것도 이루지 않음으로 내 사랑이 완성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사족을 붙이자면 몇 년 전, 이십 년의 세월이 훌쩍 넘어 그를 만났다. 그는 뜻밖에 가까운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소용돌이치지도 않고, 담담했다. 그는 내게 에스프레소 커피를 타 주었다. 촛불이 고요히 제 살을 녹여 내리는 찻집에서 나는 비로소 그에게 고백했다. 네가 한 사람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너는 아무렇게나 살면 안 돼. 잘 살아야 해.
중년의 그에게는 머리가 짧았던 어린 소년의 모습이 여전히 있었다. 나는 세월을 건너 만난 그에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어서 기뻤다. 그가 잘 살고 있다는 것이. 하늘 아래 그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앞으로 다시 그를 볼 수 있을까? 아마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나는 여기에서 각자의 소중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가 문득 떠오를 때면 바람 부는 지상의 길모퉁이를 걸어가며 나직이 ‘편지’를 읊조릴 것이다. 그럴 때면 가만히 내가 따뜻해지겠지.
그대 마음에
꽃 한 송이 피고
그대 마음에
달 떠오르면
내 마음도
그런 줄 아세요
▣ 남유정 시인 ▣
• 충북 충주 출생
• 1999년『시와 비평』으로 등단
▣ 시집 ▣
• 『기차는 빈 그네를 흔들고 간다』
• E-mail : tsnam2002@hanmail.net
첫댓글 어지럽고 삭막한 이 아침에 아름다운 프라토닉을 보며 마음을 정화시킵니다. 감사 드립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안녕하시지요? 우리시 행사에서 또 뵙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