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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2. 10. 10:42. 영흥리 선정비군 금강공원 청덕`선정비군 11점 중 ⑤ 郡守李公堥淸德善政永世不忘碑 (군수 이공 무 청덕선정 영세불망비) 는 ⑤ 郡守李公壄淸德善政永世不忘碑 (군수 이공 야 청덕선정 영세불망비) 이기에 잘못을 바로잡다.
2017.07.12.15: 18 자료 보충하여 다시 올리다.
금강공원 청덕`선정비군 11점
● 시대 : 조선시대
● 위치 : 영월읍 영흥7리 산38임
● 문의 : 영월군문화관광 1577-0545
영흥리 선정비군은 영월 KBS 방송국 입구의 화단에 총 10기의 선정비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본래 비석거리(엽연초조합과 영월초교 사이)와 창절서원 앞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에 옮겨 놓은 것이다. 비문의 글자가 많이 훼손되어 있다.
좌측부터「군수심연청덕비」,「군수윤순거청덕선정비」,「부사구택규청덕선정애민비」,「군수금선정비」,「군수이청덕선정영세부망비」,「군수한백겸청덕비」,「부사홍용주흥학교정풍화비」,「군수함기섭기념비」,「도지대신심상훈청덕선정비」,「군수이광적청덕선정애민비」순으로 모셔져있다.
①군수 심연 청덕비문
전면 : 군수심공연청덕비 郡守 沈公鍊淸德碑. 후면 : 일백팔십사년 갑신개각건각
연대 : 선조 17년(1584)
영월군읍지 선생안
심연(沈鍊) :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 2월 초 2일에 부임하였다. 영월 사람들이 청덕비(淸德碑)를 세웠다.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33권.1566년(명종 21년) 6월 16일 을해 1번째기사
양천 현감(陽川縣監) 심연(沈鍊), 연천 현감(漣川縣監) 정종우(鄭宗祐), 청주 목사(淸州牧使) 안홍(安鴻), 온양 군수(溫陽郡守) 조윤서(趙允瑞), 보은 현감(報恩縣監) 황징(黃憕), 청안 현감(淸安縣監) 정충인(鄭忠仁)에게 각각 향표리(鄕表裏)한 벌씩을 하사하라."
②군수 윤순거 청덕선정비문
전면 : 郡守尹公舜擧淸德善政碑.
공어숭정후경자십이월이십팔일도임을사칠월이배장 령이관奬 애민지성지근차 읍인립철비병자황년
부신견투일향노소다년개석구재동공개조석비이우추사부망지이 숭정후재정사오월개립
연대 : 영조 13년(1737)
영월군읍지 선생안
윤순거(尹舜擧 1596~1668) 경자년(更子年, 1660년 현종 1년)12월28일에 부임하여, 을사년(乙巳年, 1665년 현종 6년) 7월에 장령(掌令) 벼슬에 임명되어 이임했다. 영월군수로 재임 중이던 1663년에 단종과 장릉에 대한 사적을 모은 ‘장릉지(莊陵誌)’를 바탕으로 장릉의 사실(事實)·분묘(墳墓)·사묘(祠廟)·제사(祭祀)·제기(題記)·부록(附錄) 등 6편으로 분류한 ‘노릉지(魯陵誌)’를 편찬하였고, 지덕암(旨德庵. 오늘의 금몽암)을 중건한 후 〈노릉지덕암중건기 魯陵旨德庵重建記〉기문을 짓고 목판에 새긴 기문이 금몽암에 계첨되어 있다. 그 후 영월군민들이 ‘군수윤순거청덕선정비(郡守尹舜擧淸德善政碑)’를 세웠는데, 현재는 금강정으로 옮겨서 보존하고 있다. 금강정에 있는 선정비들은 영월초등학교 앞 비석거리와 창절서원 앞에 있었는데, 도로확장공사로 현재 위치로 옮겼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정의] 尹舜擧 1596(선조 29)∼1668(현종 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노직(魯直), 호는 동토(童土).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이며, 어머니는 당대의 명유인 성혼(成渾)의 딸이다. 죽산부사를 지낸 큰아버지 윤수(尹燧)에게 입양되었으며 외삼촌인 성문준(成文濬)에게서 학문을, 강항(姜沆)에게서 시를,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를 배웠다.
[생애]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직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 아버지가 척화죄로 귀양 가고, 작은아버지 윤전(尹烇)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645년 대군사부(大君師傅)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 상의원주부·형조좌랑·안음현감·의령현감 등을 지냈다. 의령현감으로 재직시 이황(李滉)과 남효온(南孝溫)의 사(祠)를 건립하였다. 1655년(효종 6) 종부시주부·공조정랑을 거쳐 금구현령으로 나갔다.
1660년(현종 1) 영월군수가 되어 『노릉지(魯陵志)』를 편찬하고, 단종의 사묘인 지덕암(旨德庵)을 중건하였다. 1665년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으나 오르지 않았다. 그 뒤 사직서령·세자익위사익위·군자감정·예빈시정·상의원정 등을 지냈다.
[활동사항]윤순거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난 학자로서 이이(李珥)의 『증손여씨향약(增損呂氏鄕約)』과 주희의 『가례』에 의거해 매년 한 차례씩 모든 종인(宗人)이 함께 모여 조상을 받들고 자제를 교육시키는 종약을 제정해 실천하였다.
강항을 위해 「강감회요서(綱鑑會要序)」·「수은강공행장(睡隱姜公行狀)」을 저술하고, 강항이 포로생활 중에 견문한 것을 기록한 책인 『간양록(看羊錄)』 등을 편찬해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정신을 고취하였다. 단종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수집해 『노릉지』를 편찬함으로써 조선의 유교적 사회 질서인 군신 관계를 전제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포착하고자 하였다.
저서로는 『동토집』·『노릉지』가 있다. 철원에 「심원사취운당대사비(深源寺翠雲堂大師碑)」의 글씨가 전한다.
[상훈과 추모] 찬선(贊善)에 추증되었다. 연산의 구산서원(龜山書院), 영광의 용계사(龍溪祠), 금구의 구성서원(九成書院)에 제향되었다.
③부사 구택규 청덕선정애민비문
전면 : 부사구공택규청덕선정애민비 府使 具公宅奎 淸德善政愛民碑
후면 : 신유십일월일립. 연대 : 영조 17년(1741)
영월군읍지 선생안
경신년(庚申年, 1740년 영조 16) 3월4일 부임하여, 신유년(辛酉年, 1741년 영조 17) 8월15일 사직하였다.
구택규(具宅奎)를 구명규(具命奎)로 이름을 고쳤다. 본관(本貫)은 능성(綾城)으로 1693년에 출생하였다. 자(字)는 성오(性五), 호는 존제(存齊)로 숙종(肅宗) 40년(1714)에 증광시(增廣試) 병과 8(丙科8)에 합격하였다. 정제두(鄭齊斗)의 문인으로 검열(檢閱)·진주목사·동래부사를 지내고, 1739년에 승지를 역임하였다. 1746년에는 교정당상으로 ‘속대전(續大典, 조선의 기본 법전)’ 편찬에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1748년 공조참판·형조참판을 거쳐 1753년(영조29)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이르렀다. 영월군민들이 ‘부사구공택규청덕선정애민비(府使具公宅奎淸德善政愛民碑)’를 건립하여 현재 금강정에 보존되어 있다. 부사 구택규의 선정비는 1741년에 북면 마차리에도 세웠다.
④군수 김공 륵 선정비문
전면 : 군수김공륵선정비 郡守金公玏善政碑
후면 : 공자희옥호백암귀성인이근신위자걸군애민이성노 태위정삼년화협사경화기소감유맥수지단사 문우조 사표이일습급기조만남환지일쟁추호읍여이친척언축립단 석 만거후지은운 황명만력십칠년팔월 일. 연대 : 선조 22년(1585)
영월군읍지 선생안
김륵(1540~1616)은 예안(禮安)사람으로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으로 이황의 문하생이다.
1584년(선조 17)에 영월군수로 부임하여 1585년 충신 엄흥도의 후손인 한례(漢禮)에게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고 엄충신의 묘를 수호하게 하였다. 그가 홍문관 교리로 전출되자 영월군민들은 선정비를 세워주었다.
그 후 안동부사∙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영월군민들이 皇明萬曆十七年八月에 세운 ‘군수김공늑선정비(郡守金公玏善政碑)’가 금강공원에 있다.
『선조실록』26년 11월 10일 김늑(金玏)을 대사간(大司諫)에 제수하였다.
『선조실록』26년 12월 21일 김늑(金玏)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⑤ 郡守李公壄淸德善政永世不忘碑 (군수 이공 야 청덕선정 영세불망비)
전면 : 郡守李公壄淸德善政永世不忘碑
군수 이무 공께서 청렴한 덕으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신 것을
영원토록 잊지 않기 위해 세운 빗돌
후면 : 二載爲政 仁風善決 化洽一方 沒世難忘 甲戌正月 日.
이재위정 인풍선결 화흡일방 몰세난망 갑술정월 일.
2년간 군정을 행함에 있어 인자한 풍도로 판결을 잘 내려 교화가 군 전체에 미쳤으니 세상 끝 날까지 잊을 수 없다네.
갑술(1694) 정월 일. 연대 : 숙종 20년(1694) <영월의 금석문.영월문화원>
●1691년(숙종 17) 12월 25일에 부임하였으나, 1693년(숙종 19) 12월 18일 도사(都事)와 다툰 문제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
문관당상(文官堂上). <영월군읍지 선생안>
●이야(李壄)는 1648년(인조 26)~1719년(숙종 45). 본관 완산(完山), 자는 중선(仲先). 조선후기 형조참판, 동래부사,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⑥군수 한백겸 청덕비문
전면 : 군수한공백겸청덕비
후면 : 렴결위정 일편단갈, 혜화무궁 천고청풍, 황명만력삼십일년사월일
연대 : 선조 36년(1603)
영월군읍지 선생안
경자년(庚子年) 8월 초 4일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 2월에 동생 준겸(俊謙)이 4도 도예찰부사(四道都禮察副使)가 되자 상피(相避)에 의해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인사 이동되었다. 영월읍민들이 덕정비를 세웠다.
⑦부사 홍용주 흥학교정풍화비문
전면 :
공성홍휘용주 영무개 추모정직 기해동건 부사홍공용주흥학교정풍화비 임오삼월 일사일립. 연대 : 1942년
영월군읍지 선생안
경진년(庚辰年 고종 17)1880년 7월29일 제수 받자 9월17일 비인(庇仁)에서 영월군수로 영전되어 부임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883년 고종 20) 6월15일에 좌천되어 갔다.
⑧군수 함기섭 기념비문
전면 : 군수함공기섭기념비
⑨도지대신 심상훈 청덕선정비
전면 : 도지대신심공상훈청덕선정비 정유십월일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의] 度支大臣 沈相薰 1854(철종 5)∼? 조선 말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순가(舜歌).
[생애 및 활동사항] 1882년(고종 19) 수구당의 한 사람으로 임오군란 때 장호원(長湖院)에 은거하고 있던 민비에게 대원군의 납치소식을 비롯, 왕궁의 근황과 청·일 양국의 출병사실 등 서울의 형세가 호전될 것을 전달해주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고종 일행이 경우궁(景祐宮)에 임시 거처하고 있을 때, 경기도관찰사로서 경우궁에 들어와 개화당에 합세하는 척 가장하고 몰래 왕에게 정변의 기밀과 개화당의 진상 등을 알려주어 왕과 민비에게 밀통하였고, 사대당 인물들과 모의하여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우차오유(吳兆有) 등을 움직여 행동을 개시하도록 하여 독립당의 혁신정부를 무너뜨렸다.
같은해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동학교도의 탄압에 앞장섰고, 1893년 이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에 올랐다. 1895년 삼국간섭 이후, 친러적 경향을 띠던 수구당내에서 궁내부특진관의 직책을 맡았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탁지부대신으로 재직하였으나 악화(惡貨)인 백동화(白銅貨)와 같은 보조화(補助貨)를 주조하여 유통질서에 혼란을 초래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독립협회로부터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가, 1898년에 체직처분을 받았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⑩군수 이광적 청덕선정비
전면 : 군수이광적청덕선정애민비 . 후면 : 기미이월
영월군읍지 선생안
병진년(丙辰年, 1676년 숙종 2) 정월 27일에 부임하여, 무오년(戊午年, 1678년 숙종 4) 11월 22일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 문관이다. 이름을 이연(李演)으로 개명하였다.
그의 본관(本貫)은 성주(星州)로 1628년에 출생하였다. 자(字)는 휘고(輝古), 호(號)는 은암(隱岩)으로 효종(孝宗) 7년(1656)에 별시(別試) 병과 4(丙科4)에 합격하여 함평현감·강릉현감·영월군수·안변부사를 역임하면서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큰 치적을 남겼다.
영월군민들이 세운 ‘군수 이광적청덕선정애민비(郡守李光迪淸德善政愛民碑)’가 금강공원에 있다.
⑪조합장 엄병연선생 공적비/ 1944년 소화19년 甲申 4278년
젊음의 푸른 꿈을 흙에 묻고 뜨거운 執念(집념)은 不死鳥(불사조)되어 헐벗은 農民(농민)의 벗으로 風雲(풍운)이 凄絶(처절)한 逆程(역정)을 걸으며 至死不休(지사불휴)로 한 生涯(생애)를 農村運動(농촌운동)에바친 人間常綠樹(인간상록수)가 여기 있다.
그 분은 바로 嚴公 秉燕(엄공 병연)이시다.
公(공)은 1908년 8월 28일 寧越郡 北面 文谷里(영월군 북면 문곡리)에서 嚴泗源 翁(엄사원 옹)의 長男(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時節(시절)부터 남다른 意志(의지)와 氣槪(기개)가 있었다.
頑固(완고)한 家庭(가정)의 挽留(만유)를 무릅쓰고 나아가 弱冠 十八歲(약관 18세)에 寧越公立普通學校(영월공립보통학교)를 卒業(졸업)하였다. 때는 日帝의 彈壓(탄압)이 날로 더하여 겨레의 怨恨(원한)은 山河(산하)에 사무치고 農村(농촌)의 貧窮(빈궁)은 骨髓(골수)에 깊어갔다.
公(공)은 決然(결연)히 일어나 農村問題(농촌문제)는 産業開發(산업개발)로 經濟自立(경제자립)에 있음을 斷定(단정)하고 그 당시 收益性(수익성)이 높다는 잎담배 生産分野(생산분야)에 投身(투신)키로 뜻을 굳혔다.
1929년 영월경작조합(寧越耕作組合) 技士(기사)로 발탁되어 混亂(혼란) 激動期(격동기)에 面政(면정)을 잘 收拾(수습)하였고 그 後(후) 同面 農民會長(동면 농민회장)에 被選(피선)되기도 하였다.
1952년 地方自治制實施(지방자치제실시)에 따라 北面面議會副議長(북면면의회부의장)에 被選(피선)되고, 仝年 民選面長(동년 민선면장)으로 選任(선임)되어 滿三年(만3년) 동안 面民(면민)의 福趾(복지)에 獻身(헌신)하였다.
1956년 8월 江原道議會議員(강원도의회의원)으로 當選(당선) 되니 望重(망중)한 聲譽(성예)가 鄕道(향도)에 떨쳤다.
1961년 8월 組合員(조합원)의 絶對的(절대적)인 支持(지지)로 寧越 葉煙草生産組合長(영월 옆연초생산조합장)으로 選任(선임)되어 七回連任 二十年間(7회연임 20년간)을 在任(재임)하던 中(중) 1979년 2월 11일(음력 1월15일) 宿患(숙환)으로 卒(졸)하니 遠近(원근)이 모두 크게 슬퍼하였다. 이로 미루어 公(공)의 德望(덕망)과 組合員(조합원)의 信任度(신임도)를 忖度(촌도)할 수 있다.
公(공)은 젊음과 꿈과 情熱(정열)을 農民(농민)의 權益擁護(권익옹호)와 組合發展(조합발전)에 마지막 一瞬까지를 아낌없이 바쳤다.
現組合廳舍建立(현조합청사건립)은 公(공)의 血誠(혈성)의 結昌(결창)으로 組合史(조합사)에 기리 남을 業績(업적)의 하나이다.
한 때 聯合會任員(연합회임원)으로 連任(연임)된 바도 있고 專賣廳長(전매청장)으로부터 模範組合長(모범조합장)으로 認定(인정)받아 感謝牌(감사패)와 功勞賞(공로상)을 받기도 하고 聯合會長(연합회장)으로부터 組合指道育成賞(조합지도육성상)을 받기도 하였다.
뜻을 세운 곳에 結實(결실)이 있고 德(덕)을 쌓은 곳에 따르는 이가 있다.
寬厚(관후)한 襟度(금도) 軒昴(헌묘)한 儀表(의표) 壁立千仞(벽립천인)의 그 氣像(기상)을 追慕(추모)하며
公(공)의 生前(생전) 남기고 간 그 功績(공적) 잊지 못해 기리 千秋(천추)에 남기고자 우리 모두 뜻을 모아 이에 碑(비)를 세운다.
1980년 5월27일
寧越 葉煙草生産組合員一同(영월엽연초생산조합원) 竪(수)
聯合會長(연합회장) 豊山(풍산) 柳時碧(유시벽) 撰(찬)
眞城(진성) 李完栽(이완재) 書(서)
■ 참고문헌
● 영월군, 1995, 《영월 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 한림대학교박물관·강원도·영월군, 1995,《영월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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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합장 엄병연선생 공적비/ 1944년 소화19년 甲申 4278년
1941년 소화16년 辛巳 4275년
1942년 소화17년 壬午 4276년
1943년 소화18년 癸未 4277년
1944년 소화19년 甲申 4278년
광복 1945년 소화20년 乙酉 4279년
1946년 소화21년 丙戌 4280
1947년 소화22년 丁亥 4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