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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사자의 사랑 이야기’이다. 소와 사자가 있었다. 둘은 몹시 사랑했다.
소는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매일 사자에게 대접했다. 사자는 괴로웠지만 참았다.
사자도 정성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매일 소에게 대접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다투기 시작했고, 끝내는 갈라서게 된다.
그들은 헤어지면서 서로를 향해, 원망 썪인 말을 내 뱉었다고 한다. “난 최선을 다했어! 난 잘못한 게 없어!”
우화지만,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정말 잘해 주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노력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 게, 탈이라면 탈이다.
상대방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했다.
결국 열심히 한 모든 게, 허사가 되고 말았다.
서로에게 실망하고, 관계도 깨어져 버렸다.
신앙 안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자기는 나름대로 애쓰고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묵묵부답 이시다.
돌아보면 간증도, 축복도, 별로 없다.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이, 한 가득이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이렇게 애썼는데, 결과가 고작 이거야?”
심지어는 하나님을 멀리 하고, 신앙을 접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결과에 이르렀다면, 대개 둘 중 하나이다.
잘 하고 있는데도, 어렵고 힘들 수 있다.
이 경우는 하나님이, 연단하시는 기간이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좋은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조금만 더 참고, 인내하면 된다.
다른 하나는, 신앙생활을 잘못 하고 있는 경우이다.
잘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렇지 못한 경우이다.
이런 케이스라면, 속히 깨닫고 돌이켜야 한다.
수많은 고비를 넘긴 끝에,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다.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하고, 하나님의 법궤부터 옮겨오려고 했다.
언약궤는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에게 빼앗겨,
70년 넘게 기랏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되어 있었다(삼상6:21).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까이 두고 싶어 했다(시16:2, 시73:28).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중심의 삶에, 우선순위를 둔 다윗이었다.
하나님이 다윗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신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윗은 특별히 선발된 3만 명의 군사들로, 이 일을 호위케 한다.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고에 대해,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더불어 다윗 자신은 이스라엘의 무리와 함께 법궤 앞부분에 서서,
여러 악기의 아름다운 연주에 뛰 놀며, 마치 잔치를 벌인 듯 즐거워했다.
여러 면에서 다윗은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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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나답의 집을 출발한 법궤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다.
그런데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던 소들이(돌 뿌리에 걸려서인지 모르나), 갑자기 비틀거리며 뛰어 올랐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웃사는, 법궤가 땅에 곤두박질하는 것을 막기 위해, 궤를 잡았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법궤운반을 책임 맡았던 웃사는, 현장에서 죽임을 당하고 만다.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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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의도로, 하나님의 궤를 모시려했다.
돌발 상황에서 웃사의 대처는, 어떤 면에서 칭찬할 만한 행위인지도 모른다. 예)별문제x
그런데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웃사는 죽음을 맞게 된다.
우리 모두는,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너무 심하지 않으신가?
이 거룩한 행사를 위해, 새 수레를 마련하고, 호위 군사도 준비했다.
나름대로 다윗은,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온 백성들도 기쁨으로 나아와, 이 일을 돕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요일4:8).
자기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인생을 사랑하시고 희생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하나님은 왜, 이처럼 진노하셨을까?
먼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웃사의 죽음이 아니다.
그를 죽이시면서까지 드러내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의도이다.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무지가 부른 비극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꼭 이 경우에 해당된다.
예)유전을 발견하여 벼락부자가 된 청년이 있었다.
어머니날이 다가오자 그는 뭔가 특별한 선물을,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님께 드리고 싶었다.
특별한 선물을 찾아 시장을 돌아다니던 중 애완동물을 파는 가게까지 왔다. ‘이 집엔 뭔가 좀 특별한 게 없습니까?’
‘아주 특별한 새가 한 마리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물론, 시편도 줄줄 외웁니다.’(참고로 로마서로 안 됨 ㅋㅋ)
효심이 가득한 그 청년은 많은 돈을 주고, 그 새를 사서 우편으로 어머님께 보내 드렸다. 며칠 후,
어머니는 감사의 전화를 걸어왔다. ‘얘야, 참 고맙다. 내가 보내준 새는 정말 맜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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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다.
법궤 위의 속죄소를 통하여, 죄인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법궤는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곳이다(2).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앞에 서고자 할 때, 반드시 율법(말씀)에 기초해야 한다.
하나님 율법에 기초하여, 정한 절차를 따라 옮겨져야 함은, 지극히 당연하다(대상15:15).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명령하시는, 율법에 따라서 운반되어야 한다.
성경은 “오직 레위인들 중 고핫 자손만이 어깨에 매고” 운반해야 함을, 분명히 했다.
(민4:15)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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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규정을 무시한 채,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운반하다 변을 당했다.
이 일을 주도하던 다윗 역시도,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왕이었으나, 이것을 알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무지가, 이처럼 깊었던 것이다.
예)‘무지’라고 ‘무죄’가 되는 것 아니다. ‘몰라서 그랬다.’ 항변해도 죄는 죄다.
주경 학자들은 말한다.
다윗시대의 말씀에 대한 무지는, 상당히 오래된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사무엘 사후(삼상25:1)부터, 다윗의 통일왕국 성립 시까지 혼란기였다.
그 시대 하나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빚어진 결과였다.
예)다윗 역시 도망자로 쫓겨 다니기에 급급해, 하나님 율법으로부터 멀어졌을 것이다.
당시 이방인들이 자기들 우상을 운반할 때, 일반적으로 수레에 싣고 운반했다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잘못을, 바로 잡기를 원하셨다.
웃사라는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진 이스라엘의 무지를, 깨트리고자 하신 것이다.
웃사의 죽음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요, 강력한 메시지이다.
이 일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율법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하는 다윗 왕과 이스라엘의 그릇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요 징계였다.
나곤의 타작마당 사건을 통해, 교훈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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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시 깨달아야 한다.
아무리 선한 동기와 좋은 목적, 헌신적인 열심을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을 말씀대로 섬기지 않는다면,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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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이스라엘 번영의 관건은, 하나님이셨다. 예)하나님 손에 달림
그렇다면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그분의 통치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삶이 필요했다.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어떻게든지 예루살렘에 모셔오려는 이유였다.
우리라고 뭐가, 다르겠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믿는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행복, 교회의 부흥, 모두가 허사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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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모셔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분을 섬겨야 한다.
우리 안에 영적무지와 모든 편견을, 날려버려야 가능하다.
예)종교인과 신앙인이 갈라지는 자리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섬겨야 한다.
말씀의 홍수 속에 살면서, 하나님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늘어나고 있다.
예)홍수 때 온 천지가 물난리가 났는데, 물 천진데, 정작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예)부뚜막의 소금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25만 가마니를 쌓아 두었다. 어쨋단 말인가?
인간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섬겨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복을 받고, 형통한 자로 살아갈 수 있다.
주시는 교훈을 정리해 보자.
첫째, 교회만 다니는 미신적인 신앙을 청산하라.
법궤만 가지고 있으면, 다 된 것이다. 예)종교인
그렇게는 70년이 아닌, 70대가 믿어도 어렵다.
좋은 일도 없고, 간증도 없다.
아비나답과 오벧에돔을 보라.
아비나답은 법궤를 70년 집에 두었지만(삼상7:2), 복은커녕 초상만 났다.
그러나 불과 3개월 모신 오벧에돔의 집은, 실로 어마어마한 복을 받았다.
(11) "하나님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유대 사학자 요세프스는, 이렇게 전한다.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들어 갈 때에는 그가 제일 가난한 집이었는데,
법궤가 3개월 후 그 집에서 나올 때는 가장 부잣집이었다.’
오벧에돔은 바른 신앙으로 복을 받은 사람이다.
아비나답은 법궤를 방치했으나, 오벧에돔의 경우는 달랐다.
법궤를 옮기다가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죽는 불상사가 생기자, 다윗까지 두려워 주저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 가져가기를 꺼려했다(9-10).
왕이 못 모시고 가겠다고 발을 빼는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제사장이나 다른 신하나 백성들이
‘내가 모시겠소!’ 하고 나서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모두가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고 있을 때, 오벧에돔이 생명을 걸고 `제가 모시지요!' 하고 나섰을 것이다.
그리고 온 집안 식구들이 한 마음이 되어, 정성껏 기꺼이 하나님의 궤를 모셨다.
자신만이 아니라 형제들, 아들들, 후손들도 복을 받았다.
예)집안 대대로 범궤를 지키는 문지기를 맡음.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직분, 다윗 당대-62명
하나님의 약속대로 된 것이다.
(출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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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보다, ‘바로’여야 한다.
믿음과 진심이, 필요하다.
예)최광영 목사 사촌 형님 모심, 선물을 받음-고급오디오 낡은 바이올린(스트라디 바리우스)
둘째, 치열하게 말씀을 배우고 공부하라.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덮어 놓고 믿으면 안 된다!’
열어놓고 믿어야 한다.
무슨 말인가?
성경책 덮어놓고 믿으면, 곤란하다. 예)하나님 바로 섬기려면, 성경 배워야 함
부지런히 듣고, 읽고, 암송, 롬롬롬 해야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말씀에 담 쌓고 살면, 10년 다녀도 허사다.
성경은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으면, 주먹구구식 신앙이 될 수밖에 없다.
교회는 다니는데,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의 풍조와 유행을 따라 간다. 예)우상운반-수래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강조한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다.
‘성경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뜻은 더 분명해진다. 하나님과 뜻과 더불어 가장 적게 씨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아는 자들이다.’(미국의 설교가 찰스 스윈돌)
자신도 배우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라.
예)초등학교 입학 시기에, 부모나 가족들이 모여 고민하고, 투표한다면, 정신나간 사람이다.
말씀을 따라 사는, 참 신앙인으로 살아가라.
신앙의 누림은, 배움과 정비례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누린다.
예)일반적으로 정상을 삶을 꿈꾸는 사람들은, 치열하게 여가시간을 보낸다.
인문학, 도서토론, 저녁시간에 강의도 듣는다. 취미만이 아니라, 필요한 것들 배운다.
티비 보고, 빈둥빈둥
리차드포스터는 ‘영적 성장을 위한 제자훈련’이라는 책에서,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안과 근심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훈련을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즐거이 찬양하며,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자기가 아는 대로 순종하며 살고,
심지어는 거룩한 환상과 계시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들의 삶의 방향은 변화 받지 못한 상태이다. 왜 그럴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 시키려고
사용하시는 중심 도로 중 하나로, 결코 들어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공부이다.’
예)삽지를 보고 신청하라, 북 수다 지원하라, 인터뷰에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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