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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춘문예공모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copyzi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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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야-정민아-"
은자가 김씨각시의 아들이름을 부른다.
"느그는 엄니 같이 살아 좋제"
은자가 김씨각시를 힐끗 쳐다본다. 은자가 쩍쩍거린다.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은자가 고개 들어 나를 본다. 아. 뭔가를 기억해 낸 듯 나를 향해 걸어오는 은자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은자가 내 빈 그릇에 자리젓 하나를 얼른 얹는다. '묵으라' 은자의 목소리는 시원시원하다. 자리젓은 그릇의 굴곡을 따라 늘어져 있다. 자리젓에선 투명한 선홍빛이 난다. 잘 삭혀진 자리젓이라야만 낼 수 있는 빛깔이다. 배에는 좁쌀보다도 작은 빨간 알들이 얇은 막에 싸여진 채 매달려 있다. 최고의 자리젓 맛은 알 밴 자리로 담았을 때 난다 하시던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입 안에서 군침이 돋는다. 그러나 이미 내 밥그릇은 비어있다. 그때 은자가 밥이 가득 든 그릇을 내 앞에 갖다 놓는다.
"되수다." 괜한 고집 소리를 낸다.
"되기는 머가 됬노 잔말 말고 묵으라!"
꾸물거리던 하늘은 결국 비를 쏟아 붓는다. 굵은 빗줄기가 거리를 활보한다. 사람들이 하나 둘, 부산식당으로 깃든다. 오늘처럼 날이 궂어 지면, 선약을 지켜내 듯, 모여드는 사람들. 약속의 의미를 일깨우듯 지각의 연유를 조목조목 묻기까지 한다.
먼저 들어온 이씨는 행동이 굼뜨고 마지막에 들어 온 강씨는 체구에 비해 목소리가 컸다. 머리숱이 유달리 짙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정씨는 이년 전, 아들을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내고부터 혼자 살았다. 정씨가 은자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정씨는 매일 같이 부산식당에서 저녁을 해결 했다. 태풍 소식이라도 들리면 식당 안팎을 돌아보며 주인 행세를 했다. 정씨는 은자의 일이라면 뭐든 나섰다. 이런 정씨의 속셈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이를 함부로 내색하지 못한 것은 워낙 까다로운 정씨의 성격 때문이었다.
보름 전쯤의 일이다. 은자는 영업 준비를 하느라 한창 바쁜 아침시간이었다. 나는 은자의 심부름으로 은행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그때 내가 막 식당 문을 열려는 찰나.
"됐다 촤라!"
들려오는 은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 때문에 나는 문도 열지 못하고 문밖에 서 있었다. 그리고 곧 정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수 호적에 올려 주커라"
그 목소리는 내가 알던 정씨가 아니었다. 정씨는 숫제 애걸복걸 사정하고 있었다.
"됐다 동수가 정씨 아들이요 뭐요?"
은자의 말투에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대학꺼정은 시켜주커라…… 살림합쳤댄 이녘 손해 날 건 어실거라"
"그런 소리 할거믄 오지 마이소"
그 후 다시 나타난 정씨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별 것도 아닌 것에 꼬투리를 잡는가 하면 생전 하지 않던 음식 타박도 했다.
손님들이 빠져나간 식당엔 동네사람들만 남아 있다. 언제 나갔는지 김씨가 다시 들어온다. 김씨는 식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출입문 옆에 있는 냉장고로 가 막걸리를 꺼낸다. 김씨각시는 주방에서 미리 챙겨 온 밑반찬들을 부리고 있다. 이씨는 한 움큼의 그릇을 들고 자리를 잡는다. 플라스틱으로 된 넓적한 그릇은 막걸리 잔의 대용물이다. 사람들의 행동은 신속하고 익숙하다. 김씨가 막걸리 병 주둥이의 빳빳한 비닐을 벗겨낸다. 정씨가 그릇을 내민다. 탁한 액체가 두껍게 쏟아진다.
이때, 황씨가 쫓기 듯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온다. 열린 문틈으로 빗줄기가 사방으로 들이친다. 황씨가 다급히 문을 닫는다. 그러나 서두르는 만큼 문은 말을 듣지 않는다. 네 칸으로 나뉜 유리문의 문틀을 잡고, 황씨가 끙끙댄다. 유리에는 하얀 시트지가 일말의 공간도 없이 발라져 있다. 보다 못한 은자가 나선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은자가 문을 당긴다. 드르륵 움직이는 문소리와 함께 요란한 바깥세상이 닫힌다. 출입문 앞 쪽 바닥은 그새 빗물이 흥건하다. 손등으로 툭툭 물기를 털어내는 황씨의 바짓단이 흠뻑 젖어 있다. 우산이 바람까지 막아주진 못했을 터였다. 황씨는 출입문 옆, 양동이에 우산을 꽂는다. 은자가 얼른 수건을 내다 준다.
은자가 뚝배기를 들고 나온다. 순대와 국물을 가득 채운 뚝배기이다. 은자의 참석을 끝으로 술판이 벌어진다. 이로써 오늘 부산식당 장사는 마감 한 셈이었다. 술판에 먼저 올려 진 것은 역시 철물점 송씨였다. 얼마 전, 사거리에서 삼 대째 철물점을 하는 송씨에게, 중학생 남자아이가 아들이라며 찾아왔다. 이 일로 송씨각시는 집을 나갔고, 이미 아들 넷을 둔 송씨는 각시 눈치를 보아서인지, 아들로 인정 할 수 없다고 했다. 식탁에 모인 여자들은 송씨각시 편을 들고 남자들은 중학생 아들 편을 들었다. 황씨가 중학생 아들이 되어 그 입장을 대변한다. 침이 튀고, 모가지에 굵은 핏발이 선다. 김씨각시가 첨예하게 맞선다. 이혼도 불사해야 한다는 극론을 펼친다. 그들은 한 치의 타협도 양보도 없다.
찌든 식탁 위에서 누구 얘기, 누구 집 얘기가 밀려가고 밀려난다. 동네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일들은 뚜렷한 증거 없이 거듭 거듭 튀겨져서 술판의 안주로 둔갑한다. 자신들의 인생 또한 그 못지않은 특별메뉴가 된다. 어떤 서막이 올려 졌든 그들의 '왕년'은 네온 보다 화려했고 종말은 비참했다.
"저 동수아방은 어디 이서?"
말을 꺼낸 건, 연거푸 술만 마셔대던 정씨였다.
순간, 은자의 손이 멈칫거린다. 은자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중이었다. 술기운인지 은자의 얼굴이 붉게 얼룩져 있다.
▶ 3일자에 계속
[소설 심사평]치밀한 구성과 일상성의 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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