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문인협회 문집 ‘혜향(慧香)’ 창간호가 나왔다.
‘권두 법문’으로 도법 스님의 ‘21세기 한국 불교가 나아갈 방향’,
특집 1은 오영호의 ‘제주불교 중흥조 해월당 봉려관 스님’,
특집 2는 김정택의 ‘추사 김정희의 선시세계’를 올렸다.
‘나의 삶과 불교’로 오홍식과 김규진의 글
그 외 회원들의 시와 시조, 수필을 비롯해
작품비평과 감상, 회원 명단 등이 실렸다.
그 중 불심이 깃든 시와 시조 몇 편 골라
지난 일요일 관음사에서 찍은 불상과 함께 올린다.
♧ 화엄의 그늘 - 김성주
대웅전 계단을 내려온 두 여인이 화엄의 벚꽃 길을
걸어간다 마주보는 눈길마다 미소가 번진다 첫사랑에 달뜬 연인 같다
어린 핏덩이도 울부짖던 어미도 참 많이 부딪히며 흘러
온 이십여 년 두 줄기 세월이 나란히 화엄 속을 거닐고 있다
이레 전에 처음 만나 오늘 저녁 이별을 앞둔 모녀가 그
이레 동안 한잠 없이 꽃잎을 흩뿌리는 왕벚나무의 가쁜 숨
소리를 꾹 꾹 밟으며 사뭇 가벼운 숨결만을 내쉬고 있다
눈보라 매섭던 두 달 전 상처투성이의 벚나무들이 안간
힘으로 버티고 서 있던 저 길을 모녀가 손잡고 걸어간다
밑둥치에 눌러 붙은
피고름 뭉치를 애써 외면하며 어미가 딸에게 딸이 어미
에게 꽃잎 흩뿌려주며, 웃어주며
♧ 산사시첩 - 김용길
3. 산사(山寺)에서 새벽을 맞으며
산사(山寺)에서는 새벽이 소리로 열린다
쇠북 소리에 건너 숲 돌아눕고
바람 소리 모여들어
절집 마당 쓸어낸다
보고 듣는 것 모두 관음(觀音)이러니
절집 마당에 서서
새벽 열리는 소리 들으며
마음 안에 찌든 먼지 털어낸다
세상 밖 생애의 빈 껍질들
여기 절집에 와서도 버리지 못해
밤새 뒤척이던 방황의 꿈
이제 새벽빛에 씻어낸다.
♧ 광명사에서 - 김재범
바람코지 절벽 위에 놓인
사찰 마루에 앉아
눈을 감는다
미어지게 몸부림치는
파도의 울음이
잦아들 즈음
암자 뒤 대나무 숲속에선
가이없는
바람의 뒤척임에
삶을 빗질하는 소리
가라앉히고
또 가라앉히여
빛 바랜 대웅전
지붕처마 끝
풍경소리에
머물다
여시아문 일시불재(如是我聞 一時佛在)
♧ 관음사운(觀音寺韻) - 오영호
산 빛
하늘 빛
물빛으로 단청하고
삼천(三千) 대천(大天)세계
풍경 소리로 열어놓아
천만 폭
치마를 펼쳐
산문 열고 앉았다.
물소리
바람소리에
마음 씻고 눈 뜬 숲속
세월 감은 밤나무는
법화경을 설하는데
대웅전
정좌한 선승들은
바라밀을 쌓고 있다.
백팔 시름
한 접시를
헹궈 낸 목탁소리
향으로 피어올라
벌어지는 만다라꽃
봉려관(蓬慮觀)
큰 스님 미소
해탈문이 열린 곳.
♧ 청용사에서 - 이창선
청용사 노스님의 독경을 듣다 보면
새벽에 물허벅 진 아낙네들 요란하다
대웅전 지붕처마에 풍경소리 성이 난 듯
납을 마을 1796번지 사장물통과
병아리 알 깨우는 닭텅 같은 터에
불사는 중생의 샘물 영원한 도량이다.
♧ 혜초의 마음 - 현택훈
극동 설비 옆에 혜초 여행사가 있다
날이 저물면 푸른 간판도 불을 밝힌다
가야 할 길은 언제나 펼쳐져 있다
푸른 입김의 걸음이 결빙을 푼다
배낭 속의 지도 한 장과
시집 한 권과 낡은 사진 한 장
아직 익지 않은 푸른 불빛은
서쪽을 향해 빛나고
도시의 시선들이 모여
멀리서 보면 별이 되겠다
둔황 석굴 속에서 천 년간 잠들어 있던
왕오천축국전 이 도시도
한 천 년 잠들 듯 흐를 수 있을까
가파르고 높은 희망이라는 파밀 고원
가난한 순례자에겐
이 도시가 타클라마칸 사막이어서
도처에 사구가 드리워져
슬픔도 모래 속에 파묻히곤 한다
설령(雪嶺),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겠지만
뱀이 서린 듯 얼어붙은 얼음길*
캘커타 공항에 도착할 때부터
푸른 사원이 펼쳐질 것인가
혜초 여행사 길 건너
버스 정류장이 푸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구도의 길이
오늘밤 거처 없이 어루만지는 경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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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이 서린 듯 얼어붙은 얼음길 :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중에서
○ 천수경 - 삼보사(三寶寺) 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