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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고향을 찾아서16
-김현승 편.... 고독과 순수의 시인
취재팀이 시인(김현승 1913-1975)의 발자취(시의 고향)를 찾아 광주를 찾은 6월 중순 날씨는 장마가 끝난 한여름 날씨를 방불케 할 만큼 햇볕이 강렬하다. 광주 시내를 들어서자 오랜만에 고향을 찾게 된 정동희 기자는 감회에 젖는 듯 광주에서의 추억을 책갈피에서 하나하나 끄집어내듯 이곳저곳 광주 역사를 설명한다.
< 김현승 시인 >
일행은 광주시 금동에 위치한 ‘한림문화재단’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다형(김현승)의 제자 손광은(전남대국문과교수역임) 시인과 박형철(계간 문학춘추발행인), 김귀례 시인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한림문화재단 사무실에 세 분이 먼저 도착해 있다가 일행을 맞아주었다. 손광은 시인은 일행을 보자 스승(김현승)과의 추억을 실올을 풀듯 이야기를 풀어낸다.
다형 김현승, 그는 1913년 4월 4일 아버지 김영국의 신학 유학지인 평양에서, 어머니 양응도 사이 6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난다. 이후 그는 6세까지 부친의 목회 첫 부임지(성내교회)인 제주도에서 성장한다. 그리곤 7세 되던 1919년, 역시 부친의 전근으로 인해 전북 전주시로 이사하여 미션계의 숭일학교 초등과에 입학한다. 그는 초등과 졸업 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형이 먼저 가서 유학하고 있던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2학년 진급을 앞둔 그는 위장병의 악화로 휴학하고 광주로 내려와 휴양한다. 그렇게 1년을 허송한 그는 복학한 후 그 공백의 시간을 메우기라도 하듯 문학(시작)에 열중한다. 겨울 방학 중인데도 귀향하지 않고 기숙사에 남아 시작에 전념한 결과 그는 2편의 장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과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합니다>를 생산한다. 이 2편의 시가 당시 문과교수였던 양주동 시인의 눈길을 끌어 동아일보에 발표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1934년에 그가 일군 문학적 소산이다. 하지만 졸업을 1년 앞둔 1936년3월, 그는 숙환인 위장병이 또다시 악화되어 휴양을 목적으로 귀향한다. 그리곤 모교인 숭일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눌러앉게 된다.
< 대담 - 우로부터 박형철, 송광은, 김귀례 시인>
지금까지 다형의 행적을 되짚어 따라가 보면 어려서부터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다형 자신은 광주를 고향처럼 여기고 살았으나 그의 고향을 꼭 집어 어디라고 얘기하기는 애매하다. 목사인 아버지의 사역지를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 한곳을 고향으로 정붙이기보다 이곳저곳이 가슴에 잊지 못할 고향 같은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고향이 더 간절하며 그의 시 속에서도 고향을 찾는 갈증과 고독, 다다름을 향한 회귀본능이 응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신앙적 회귀라 할지라도.
취재팀 일행은 시인의 대표 시들이 씌어진 모태, 시의 고향이 가장 궁금하다. 손광은 시인과 박형철 님은 다형에 대한, 광주지역 문인들에 대한 자랑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일행은 시의 배경지를 찾아가고픈 마음이 더 바쁘다. 이동하면서 얘기를 계속하기로 하고 시의 모태가 되었던 곳을 더듬어 간다. 바로 광주의 양림동이다. 이곳은 기독교 선교의 산실로 광주지역 기독교선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목사인 시인의 부친은 이곳 양림동 가장 높은 언덕에 (양림)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했다. 하지만 오래된 사진에서 보았던 작지만 고풍스런 교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교회 규모가 대형화되어 새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시인이 자주 찾아가 껴안아 보았다는 아름드리 삼나무도 없다. 교회를 새로 지으며 나무도 베어냈단다. 시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자주 교회를 찾아가 아버지의 체취를 더듬듯 부친이 교회를 세우며 심었던 삼나무를 안아보았다고 한다. 시인은 이렇듯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교회가 있는 이곳 양림동 언덕에서 삼나무와 함께 자라면 견고한 신앙과 시심을 키웠던 것이다. 그가 고향이라 여겼으며 한편 시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 주변은 개발로 인해 지형마저 확 변해있다. 예전 교회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위협적일만큼 덩치가 큰 신설교회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으나 눈을 씻고 보아도 옛 자취라고 느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물며 베어낸 삼나무의 그루터기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 손광은 시인은 고개를 갸웃갸웃하면서 주변을 한참 더듬더니 현재 교회의 건립기록 비가 세워져있는 위치가 바로 삼나무가 있던 자리였던 것 같다고 한다.
<양림교회 전경>
이곳 양림동 언덕 아래에 그가 재직했던 숭일학교가 있었다. 미션스쿨이다. 한편 건너 언덕엔 역시 미션스쿨인 수피아여고가 위치해 있다. 이처럼 이곳은 초기 기독교선교의 산실이었다. 이곳이 광주지역 선교의 출발지인 만큼 주변엔 예전 외국선교사들이 살았던 오래된 선교사 사택단지가 있다. 외국선교사 사택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 목사가 세운 초대교회(양림교회)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음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교회 주변 역시 덩치 큰 고층아파트가 지어져, 시인이 땅을 밟고 오르내리며 시심을 잉태했던 옛 동네의 모습은 짐작할 수도 없다.
그래도 혹여 뭔가 한 가지라도 시인의 발자취를 더 가까이 찾아볼 수는 없을까하여 시인이 자주 들렀다는 양림동의 다방들(세븐, 나하나)이라도 하나쯤 남아 있을까 손광은 시인에게 여쭈었다. 그런데 아뿔싸! 그 마저 없단다.
애초에 기대했던 목표, 목적이 채워지지 않으니 허기가 진다. 일행은 허기를 달래며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있다는 호남신학대학 캠퍼스를 오른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던가. 하필이면 이날따라 시비 바로 앞에 엄청난 중장비차량이 앞을 가로막고 서서 공사 중이다. 차에서 나는 기계음이 귀청을 따갑게 울린다. 손광은 시인은 땀을 흘리며 목청을 돋우어 설명을 하는데 시비를 제대로 볼 수도 미적(조형미) 감각을 살려 사진을 찍을 수도 없다. 중장비차량 이쪽저쪽으로 비켜 보았으나 시비 뒤에 아름드리 도토리나무가 있었다는 것 밖에는, 그리고 시비에 <가을의 기도>가 수록되어 있다는 것 밖에는 별로 인상에 남는 것이 없다. 이 시비는 시인이 살아생전 무등산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해 무등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호남신학대학 언덕에 세웠다고 송광은 시인은 설명한다.
먼저 시비에 수록된 <가을의 기도>를 살펴본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구비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가을의 기도> 전문
이 시는 1956년<<문학예술>> 11월호에 등재되었던,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시 중 한 편이다. 그의 시 가운데에는 <가을 시첩> <가을은 눈의 계절> <가을 저녁> 등 가을을 소재로 하거나 주제로 한 시들이 유난히 많다. 그중에서도 이 시는 마치 가을에 알곡을 거둬들이듯 가을을 상징하는 가장 알맞은 언어들을 기도의 형식을 통해 알뜰하게 길어 올리고 있다. 하지만 그는 비옥한 시간을 추구하면서도 한편 그의 시의 전반에 나타나는 고독을 배제하지 않는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와 같은 고독. 시인은 그러한 고독 속에서 나름 비옥한 시간을 챙기고 있음을 역설함 아니겠는가.
손광은 시인은 언덕을 내려오며 자신의 추천(현대문학)스승 다형을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은 평소 말씀이 없으셔서 참 어려웠어요. 시를 써 가지고 가서 보여드리면 좋다, 나쁘다 도대체 말씀이 없으셔서 답답하고 몸 둘 바를 몰라 안절부절 했지요” 라며 시를 써가지고 가 그분을 대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웠다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한다.
다형의 성격은 매우 깔끔했고, 그 때문인지 괴팍하고 까탈스럽다는 평까지 받았다.
<호남신학대학교 내 시비>
그는 거짓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일제 말기(1936년 이후)부터 해방까지 약 7~8년간 절필한다. 그리고 1937년 3월, 교회내의 작은 사건이 신사참배문제로 과대되어 광주경찰서에 사상범으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른다. 그는 이듬해인 1937년 3월, 기독교장로인 장맹섭의 딸 장은정과 결혼하나 어려움은 계속된다.
이 무렵 숭실전문학교에 복교하여 학업을 마치려했으나 신사참배의 문제로 학교가 폐쇄되고 교사직에서도 해고된다. 그러다 보니 생활도 궁핍해져 자신의 고백대로 “기질에 맞지 않고 원치도 않았던 직장에서 연명을 위하여 생활이 아닌 생존을 계속”하게 된다. 이러한 생활은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곤 해방 후 1946년 6월, 그는 모교인 숭일중학교에 복직, 초대교감으로 취임한다. 곧 이어 2년 뒤인 1947년 교장으로 승진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문단에만 열중한다.
창을 사랑하는 것은
태양을 사랑하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한 우리에게
오늘의 뉴우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도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십이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에게….
-<창> 전문
창은 소통이다. 외부와의 소통, 자연과의 소통이다. 그러면서도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은, 과장되거나 화려하지 않은 겸허한 소통이다. 그 관계의 대상이 신이든 인간이든 자연이든 겸허함을 잃으면 더 큰 창공, 즉 높고 희망찬 세계를 잃고 만다. 또한 관계의 투명성을 위해, 즉 거리감을 주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닦아야 한다. 그래야 맑은 눈을 갖고 밝은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푸라타나스,
나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푸라타나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푸라타나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푸라타나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
수고론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푸라타나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푸라타나스> 전문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의 품(그늘)은 넓다. 홀로 되어 외로울 제 그늘을 늘여서 같이 걸어주는 플라타너스, 거기엔 작가의 청교도적 겸허와 지적 고독이 엿보인다. “나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라는 표현에는 나와 대상과의 사이에 늘 그분이 존재한다. 한편 다형은 사물과 나를 불리하지 않는다. 언제나 내가 마음을 열어주면 그림자를 길게 늘여 함께 걸어주는 플라타너스처럼 모든 사물이 친구이고, 연인이며, 반려자이다.
다형 김현승의 작품에는 ‘가을’과 ‘고독’의 시가 유난히 많다. 김현승하면 ‘고독’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만큼. 그는 거짓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차라리 붓을 꺾고 고행을 자처한다. 그러나 세상은 진실 하나로 버티고 살기엔 너무나 벅차다. 그 벅찬 세상을 청교도적 정신자세로 반듯하게 지키고 살자니 외로운 날이 좀 많았겠는가.
1934년, 20대 초반의 나이에 문단에 데뷔한 그는 44세가 되는 1957년에야 그의 첫 시집(<<김현승 시초>>(문학사상사))을 발간한다. 그가 주축이 되었던 광주지역 문인 동인지 <<신문학>>창간 4년 뒤의 일이다. 이후 그는 작고하기 전까지 3권의 시집을 더 펴내 4번째 시집까지 펴내고 <<한국 현대시해설>>(관동출판사)집과 <<김현승시 전집>>을 출간한다. 작고하던 해(1975년) 유고시집 <<마지막 지상에서>>와 2년 후인 1977년 산문집<<고독과 시>>(지성산업사)가 나온다. 그는 모교인 숭실대학 교수와 전북대학, 연세대학, 서라벌예대 등에서 강사를 역임한다.
고혈압 증세가 있었던 그는 1973년 3월 졸도하였으나 호전되었고, 2년 뒤 1975년 4월 11일 결국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져 그만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62세로, 짧은 생애다. 그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다형 김현승의 시의 정신적 본질, 시의 고향은 다분히 기독교적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그의 시는 1930. 40년대 시인들의 감각적 이미지와 회화적 이미지 그리고 모더니즘 경향의 계열을 거쳐 새롭게 변모하고 발전한 주지적 경향을 갖고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난 독특한 언어의식에서는 한국시의 의식의 흐름이 보인다. 그는 기독인으로는 모순이랄 수 있는 인간 고독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만 그는 시에서 기독교적 성찰을 암시함으로써, 본질( 시의 뿌리)은 신앙의 샘에서 그 생명력을 길어 올리고 있음이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박 팀장이 대담 중 김현승시인문학관에 대해서 물었다. 손광은 시인의 말에 의하면 광주지역 문인들이 김현승문학관 건립을 추진했으나 협조가 미진하여 포기하고, 대신 종합문학관 건립을 재추진 중이라고 한다. 앞으로 세워질 종합문학관은 각 층마다 광주지역 문인들의 자료 및 기념관으로 활용할 것이라고 한다. 한편 김현승 문학상은 이미 재정되어 매년 시상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불볕 같은 더위에도 불구하고 이번 취재에 도움을 주신 손광은 시인님, 박형철님, 김귀례 시인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취재팀
기획: 박인식
사진: 정동희
글: 유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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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ㅎㅎㅎ...사진 밑에 제목이 더위먹었나봐요. 삐딱하게 옆으로 달아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