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령과 수호령의 일본어도 점차 알기 쉽게 되어
외국인 특유의 억양이나 말투는 그대로이지만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제1회 집회를 열고 명칭도 “신리의 모임(회)”으로 하였다.
< 조직의 세포가 되지 말라.
개개의 생명이 착실히 스스로의 사명을 자각하여
스스로를 깨닫고 정법 실천에 정진해야만
그 집단은 올바른 길을 걸어간다. >
는 것을 내세웠고, 마음의 잣대는
오로지 중도(中道)의 팔정도(八正道)였다.
‘나 자신 스스로,
완성에의 노력이 있어야
사람들의 마음을 인도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라고 마음을 다졌던 것이었다.
정도의 실천행동이 그대로 그 사람 마음의 조화도가 되고,
육체에서 나오는 후광에 의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실로 되어 나타난다.
심안이 열리기 때문에 수호령 지도령부터
부조화한 마음의 사람들에게 빙의하고 있는 지옥령들까지
확실히 보이는 것이다.
그 만큼 거짓이 없는 조직이 만들어져 간 것이었다.
종교적인 집단형성은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신리의 모임”은 자연스럽게 모여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규제 같은 것은 없다.
누구나 참가하여도 좋고, 또 떠나도 괜찮은 것이다.
하지만 최초의 발회식 강연에서는
나도 정말로 흥분되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조차도 잘 몰랐다.
그래서 나의 지도령인 원투스리가 약 한 시간 반,
불교의 역사적 변천이라는 주제로 대변해 준 것이었다.
대중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로 서툴러서
첫 강연에서는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었다.
하지만 이 집회를 계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또 다른 종교계 사람들이 상황을 살피러 오도록 되었다,
우리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알고 말기 때문에,
정탐하러 온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 쪽에 합류하였다.
우리는 본디 아마추어 집단이기 때문에,
설사 종교계의 프로에게서 질문을 받고 틀린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종교계의 프로들도 우리 회원이 되었다.
이런 예가 있었다.
신문기자인 H씨가 소개한 R*M은
다른 종교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참석하였을 때의 일이다.
R*M은 내 앞에 앉아서 지그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R*M에게 말했다.
<당신은 법화경을 배우고 꽤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지식 안에서의 깨달음일 뿐이며 마음이 부재(不在)다.
마음을 잃은 법화경은 그림 속의 떡에 불과하며,
실천하지 않는 법화경은 소설만도 못한 것입니다.
당신은 저를 시험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시험할 재료가 부족하다.
다시 한번 제대로 공부하고 실천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자만과 교만한 마음이 없어질 때까지.>
그는 이미 반박할 말이 궁해져 버렸다.
계속하여 그의 마음속을 지적해 갔다,
그 때문에 그는 어떻게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당신은 지금과 같은 것을 과거세에서도 경험하였으며,
바라문은 지식의 깨달음에 불과합니다.
이론만으로는 불퇴전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도를 실천하여 마음의 창을 여십시오.
그때 비로소 당신은 스스로의 과거세를 깨닫고
당신 자신의 업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R*M은 반박없이
<예, 말씀대로 입니다. 저를 제자로 삼아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기존의 종교단체를 퇴단하고 정법에 귀의하였다.
계속하여 같은 교단의 강사인 S*Y가 찾아왔다.
S*Y는 대학시절부터 선사(禪寺)에서 도를 배우며
세쵸노이에(生長의 家)라는 종교단체를 거쳐 현재의 교단에 들어간 사람이다.
강연회에서 그는 가장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불교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설명해 주십시오.>
사십 년간이나 불교를 공부하고 있는 베테랑의 질문이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이 질문의 답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연 지도령이라든가 수호령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정말로 인도시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진짜인지 등에 대하여 커다란 의문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공부한 것과 과연 어떻게 다른지,
또한 대답을 할 수 없다면 그냥 묵묵히 지켜보자
라고 생각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인간이라는 것은 장님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오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실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는 계속하여 마하지관(摩訶止觀) 이라는 불교의 전문용어를 가지고 질문하였다.
하지만 내 과거세는 대부분 불교를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알기 쉽게 해명을 할 수 있다.
때문에 오히려 그런 종류의 질의응답은 내가 좋아하는 방법이다.
좋은 질문이 나오면 두 시간 가까운 강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대단히 어려운 말로 표현되어 있는 것 같은데
학문적으로 추구해서 어떻게 되는가?
취미라면 좋지만 본래 불교는 학문적으로 취급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불교란 인생의 올바른 실천생활에 필요한 도표(道標)이다.
그것을 학문화 했다.
이 때문에 불교의 도(道)가 미로처럼 된 원인이며,
타력본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본래 대승불교, 소승불교라고 하는 구별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불교라는 명칭을 쓴다면 말이다
불교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설파한 사람의 도(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의 불교는 밀교라든가 선종에서 통합하여 불교라고 하고 있다.
그것도 종조(宗祖)라는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고,
지(知)와 의(意)에 의해 변형되어 버린 것이다.
타력본원만큼 쉬운 것은 없고,
그것은 또 불교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S*Y는 내 이야기와 현상에 수긍하며 동의를 표시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