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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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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42년 음력 10월 1일 / 양력 11월 7일 조선 경상북도 의성군 사촌 |
사망 | 1607년 음력 5월 6일 / 양력 5월 31일 조선 한성부 서미동 |
국적 | 조선 |
별칭 | 호는 서애, 자는 이현 |
학력 | 1566년 별시 문과 급제 |
직업 | 문인, 관료, 학자, 저술가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전주 이씨 부: 이경 모: 양주 조씨 조사수의 따님 |
자녀 | 3남2녀.유녀,유단,유진,유씨(큰딸-이문영),유씨(둘째딸-조직) |
부모 | 부: 유중영 모: 안동 김씨 김광수의 따님 |
친척 | 조부: 유공작 조모: 연안 이씨 이형례의 따님 |
웹사이트 | http://hahoe2.andong.com/ |
류성룡(柳成龍, 1542년 11월 7일(음력 10월 1일) ~ 1607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은 조선 중기의 관료, 인문학자, 의학자, 저술가이다. 본관은 풍산(豊山)[1],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상도 의성[1]에서 태어났으며, 간성군수 유작(柳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차남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조목(趙穆)·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이산해, 정인홍 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과 원균을 천거하여 선조로 하여금 이들을 각각 전라도와 경상도의 방어책임자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이 중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어머니 안동 김씨의 친정인 경상도 의성현(義城縣) 사촌리(沙村里)서림에서 출생하였다.
사복시정 류소(柳沼)의 4대손, 류자온(柳子溫)의 증손자이다.
조부는 군수 류공작(柳公綽)이며, 부친은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이다.
친형은 류운룡(柳雲龍)이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평가 받으며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그런데 유성룡은 17살 때 <양명집>(陽明集)을 구해 읽었다.[2] 그러나 스승인 이황이 양명학을 사학(邪學)이자 사문의 화라고 비판하며 이를 이단으로 규정하자 그도 양명학에 대한 관심을 끊고 이를 비판한다.
1564년 명종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566년 별시 문과를 거쳐 한원(翰苑)에 들어갔다가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명나라의 지식인들로부터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 불리며 존경을 받게 된다.
이조 정랑이 되어 이준경(李浚慶)의 관직을 삭탈함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였으며, 인성(仁聖) 대비가 죽었을 때 예조에서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였으나 류성룡은 적손(嫡孫)의 예를 따라 3년설이 타당함을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심의겸이 김효원의 전랑 천거를 반대하자 같은 이황의 제자였던 그는 김효원을 변호하였다. 1575년 을해당론으로 동서가 분당되자 그는 동인에 가담하였다.
이후 응교(應敎) 등을 거쳐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도승지, 대사헌(1582년~1583년), 대제학 등의 요직을 맡으며 별탈 없이 승진해 나갔다. 상주(尙州) 목사로 나가 예절로 다스렸으며 고향에서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던 중 함경 감사·대사성 등에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예조 판서 재직 중 위주 목사 서익(徐益)이 소를 올려 그를 간신이라 탄핵하니 물러나기를 청하고 3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형조 판서로 부름을 받고 대제학을 겸했다. 1590년 다시 예조 판서에 이르러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많은 사대부와 함께 그 이름이 죄인의 글에 나타났으므로 사퇴를 청하였으나 왕은 이조 판서에 옮겼다가 이어 우의정에 승진시키고 광국 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였다.
1589년 정여립의 옥사가 발생했다. 1590년 다시 예조 판서에 이르러 정여립의 사건으로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많은 사대부와 함께 그 이름이 죄인의 글에 나타났으므로 사퇴를 청하였으나 왕은 그를 위로하였다.
이때 서인 정철이 전라도 유생 정암수(丁巖壽)를 사주해 이산해 등을 얽어 넣으려고 했으나 유성룡과 이산해에 대한 선조의 신임이 두터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3]
호남 유생 정암수를 비롯한 50여 명이 '이산해, 유성룡, 나사침, 나덕준, 정인홍, 정개청이 정여립과 한몸과 같은 사이였다고 하면서, 그들을 진퇴시킬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4] 이 상소를 받은 선조는 크게 노하여 오히려 이산해, 유성룡을 면접해 위로하고, 정암수 이하 10여 명에게 죄를 줄 것을 명했다. 이에 양사가 계사를 올려 죄주지 말 것을 청했으나 선조는 응하지 않았다.[4]
1590년 이조 판서에 옮겼다가 이어 우의정에 승진하였다. 그러나 정철의 처리를 놓고 동인 내에서도 의견이 갈라지게 된다. 파직, 유배된 정철의 처벌을 놓고, 정승을 역임한 고관이라 차마 죽일수는 없다며 류성룡과 우성전은 선처를 호소했다. 이산해는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잊었느냐며 분개했고, 정인홍 등은 류성룡과 우성전을 공박했다.
바로 정철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는 이산해, 정인홍의 주장과 사형은 지나치다는 류성룡, 우성전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류성룡과 우성전을 공격하면서 우성전이 축첩을 한 것과 부모의 상중에도 기생 첩이 수시로 우성전의 집에 출입한 점 역시 지적했다. 이산해는 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난으로 연좌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원한을 어떻게 풀수 있느냐며 온건론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정철의 처벌수위 문제를 놓고 동인은 심한 내분에 휩싸인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정철의 치죄 문제와 전랑 천거 문제 등을 놓고 동인 세력간 대립하여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는 정철을 죽이자는 강경파와 죽이지는 말자, 유배를 보내자는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 된 것이다.
이듬해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 문제로 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동인에 속하여 정철을 처벌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서인 전체를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며 강경파인 북인의 일원인 이산해와 대립하였다. 또한 좌의정에 재직 중 일본이 그들의 군사를 명나라로 들여보내겠다는 국서를 보냈는데 영의정 이산해는 이를 묵살하자고 했으나 성룡은 이 사실을 중국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대로 실시하였으므로 뒷날에 명나라에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
그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성사시킨 공으로 광국 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였다.
1591년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 문제로 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동인에 속하여 정철을 처벌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서인 전체를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며 강경파인 북인의 일원인 이산해와 대립하였다. 또한 좌의정에 재직 중 일본이 그들의 군사를 명나라로 들여보내겠다는 국서를 보냈는데 영의정 이산해는 이를 묵살하자고 했으나 성룡은 이 사실을 중국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대로 실시하였으므로 뒷날에 명나라에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
1591년 선조가 명장을 천거하라고 했을 때 성룡은 권율·이순신·원균 등을 천거하여 뒷날에 나라의 간성이 되게 했다. 이 중 이순신은 전라도에, 원균은 경상도에 각각 배치되었으며 그 결과 이순신이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구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4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가 되어 당쟁과 전란 속에서 조선의 조정을 총지휘하게 된다. 이때 왕을 모시고 송도(松都)에 이르러 영의정이 되었으나 신잡의 말에 따라 그 날로 사퇴하고, 평양에서 소동을 일으킨 난민들을 진정시키고 조정에서 북행(정확하게는 북행하여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로 들어가자는 의견)을 말하는 자가 많았으나 홀로 의주로 향할 것을 주장하여 뒷날에 명나라 구원의 길을 열게 하였다.
또한 일본의 군사적 도발을 근본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서는 국방 안보 체제를 제대로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병사 조련 등 군비 확충에 총력을 기울였다. 더불어 여러 신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과 권율 등의 명장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듬해 관서 도체찰사(關西都體察使)가 되어 안주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직문하고 군량을 준비하다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만나 평양의 지도를 주어 전투상의 편의를 제공하고 파주까지 진격하여 일본군을 궁지로 몰아붙이는 한편 일본의 간첩 수십 명을 잡아 적의 연락을 끊었다.
이순신이 역모를 당하자 류성룡은 부화뇌동하여 다른 신하들과 함께 이순신을 모함했다. 이원익, 정탁 두 사람만이 이순신을 옹호하여 이순신은 간신히 참수형을 면하고 백의종군을 하게 조치되었다. 이때 살아남은 이순신은 복직 후 명량해전에서 대활약을 하여 조선을 또다시 구하게 된다.
다시 영의정에 보직되었다가 1598년 명나라 장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정인홍 등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이후 학문 연구에 몰두하며 그 역시 정경세 등의 문인들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영남 남인을 형성한다.
이에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한 그는 조용히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그 후 2년 만인 1600년에 복권되어 정부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1604년(선조 37) 호성(扈聖) 공신에 책록되었다. 1607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에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당을 병산서원 뒤에 세우고 여산(廬山)의 퇴계묘(退溪廟)에 함께 모셨다.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호계서원(虎溪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 남계서원 삼강서원 도남서원 빙계서원 등에 위패가 모셔져 제향하게 되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문충공(文忠公)이 되었다.
예악교화(禮樂敎化)·치병이재(治兵理財)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선조실록》에서는 편찬자의 평으로, 재상으로서의 그릇이 작고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치지 못해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면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에게 바른 말을 고하지 못하여 대신다운 풍절이 없었다고 하는 등, 그의 성품에 대한 단점도 기록되어 있다.[5][6]
1589년 당시 남이공과 북인계열로부터 계속 비난을 받고 공격대상이 되었다. 당시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이 이조에 천거되자 당시 영남 사람 정경세가 전랑으로 있었는데, 이경전이 추천되는 것을 막고자 이렇게 말했다.[7]
“ | 이경전은 유생 때부터 남에게 비방을 많이 들었으므로 이조에 끌어들여서는 안된다.[7] | ” |
이 말을 듣고 이산해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모두 크게 노했다.[7] 이 발언의 진원지로 이산해는 유성룡을 의심하였다. 이후 남인 중 유성룡계파에 대한 그의 분노와 불만은 한층 더해갔다. 그때 이덕형이 재상으로 있었는데,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창석 이준에게 이렇게 청했다.[7] 당시 이덕형은 남인이었다.
“ | 자네가 경암(정경세의 자)에게 말하게. 만약 이경전이 전랑에 천거되는 것을 막으면 반드시 큰 풍파가 일어날 터이니, 이는 조정을 편안하게 하는 도리가 아닐세. 이는 내가 사사로이(이덕형의 처남이기도 하다.) 하는 말이 아닐세.[7] | ” |
이준은 정경세와 고향이 같고, 이경전은 이덕형의 처남인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정경세는 듣지 않았다.[8] 이산해는 그를 의심했고 그를 탄핵하도록 사주한다.
얼마 뒤 대간 남이공이 류성룡을 참혹하게 탄핵했다.[8] 이중환에 의하면 당시 이 탄핵을 두고 '정경세는 본래 류성룡의 제자였으므로, 이산해는 류성룡이 정경세를 사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그러므로 남이공을 시켜 류성룡을 탄핵하도록 한 것이지, 류성룡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8]'고 보았다.
서애 유성룡이 17살 때 <양명집>(陽明集)을 구해 읽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에서 양명학이 처음부터 금기였던 것은 아니다.[2] 그러나 유성룡의 스승 이황은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황은 <전습록변>(傳習錄辨)에서 양명학을 '사문(斯文·주자학)의 화'라고 비판했다. 그가 양명학을 '사문의 화'라고 비판한 다음부터 금기시되기 시작했다.[2]그러나 이황의 비판에는 양명학의 핵심인 '치양지설'(致良知說)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으니 <전습록> 전체를 보지 못하고 비판한 셈이 된다.[2] 스승인 이황이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하자 그는 양명학에 대한 관심을 끊고 이를 이단으로 생각하게 된다.
명종 말기와 선조 초기에 이이와 이준경이 갈등할 때 그는 이준경을 지지했다. 그 뒤 선조 즉위 초 신진 사류의 한사람인 이이의 거침없는 발언과 비판에 염증을 느낀 사람 중에는 이준경도 있었다. 원로대신들 중 허엽과 이준경 등은 율곡을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분을 터뜨렸다.[9] 이준경의 친구 중에는 백인걸이 있었다. 율곡 이이의 솔직함과 냉정함에 화가 난 이준경은 백인걸을 찾아가 항의를 한 일도 있다. 한번은 이준경이 백인걸을 찾아와 "자네가 추천한 이 아무개라는 인간이 왜 그 모양인가? [9]" 하고 드러내놓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이준경이 죽음에 이르러 일부 사림을 자처하는 자가 당파를 만들어 조정을 위기로 몰고 갈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이와 함께 그는 이준경의 상소가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이가 계속 이준경을 공격하며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사악하다'고 성토하자, 사림에서 이준경의 삭탈관직을 청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다. 그는 이무렵 이조 정랑이 되어 이준경(李浚慶)의 관직을 삭탈함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였으며, 인성(仁聖) 대비가 죽었을 때 예조에서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였으나 류성룡은 선조가 명종의 후계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음을 주장하며 적손(嫡孫)의 예를 따라 3년설이 타당함을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