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우리詩 신인상 상반기 당선작
결투決鬪 외 4편
오명현
그의 스텝은 현란하다
언뜻 보기엔 대수롭잖지만
펀치를 교묘히 피해 다닌다
스텝만이 아니다, 스텝만이라면
내 발놀림도 빠르기로는 만만찮거든
핵심은 허릿심에도 있었을 거야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게으름을 좀 피웠더니
그는 허리 근육 강화 훈련에 매진했었나 보다
민방공 훈련 때 터득한
화학전에 쓰이는 연막을 피워
그를 일거에 눕힐 수도 있고
숱하게 교통법규를 어기는 일로 이골이 나 있기는 하지만
상대가 특정된 경기에 나서면
왠지 반칙이 싫다
잽jab으로 여러 번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했어도
결국 몇 방의 정타는 허용하고 말았다
그의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인데
스텝은 흐트러짐 없고
웬걸, 음성은 더욱 또랑또랑하다
밤샘 추격으로 내 체력은 바닥나고
특히 쌍꺼풀의 골은 더욱 깊다
오늘 밤 다시 도전이 받아들여지면
충분히 휴식하고 마음 가다듬은 뒤
힘써 싸워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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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을 털다
1
방범장치가 작동하는 은행을
야음을 틈타 털 수는 없다
설령 방범장치를 통과하더라도
금고에 붙은 잠금장치의 비밀번호를 알 방도가 없거니와
두꺼운 철판으로 제작된 금고를 부술 수도 없다
금고가 열린 대낮에
장난감 총으로라도 무장을 하고
은행원의 목숨을 위협하여
돈을 강탈할 수밖에 없다
하기야 요새는 털 일도 없다
은행의 임원이나 감독기관의 관리들이
음험한 채무자와 짬짜미로 다 해 먹어
수많은 노년의 노후가 예치된
금고는 이미 거덜 나 있으므로
2
정강이를 툭 찬다
아무 낌새가 없다
도움닫기로 온 힘을 모으고 모아서
발뒤꿈치로 명치를 가격하면
가슴 부여잡고 진저리 친다
후드득 은행들을 마구 떨군다
갖은 우격다짐으로
산책 갔다 돌아오는 노인의 심심풀이를 앞서 훔치고
밥 안칠 때 은행 몇 알 곁들이려는
이웃집 아주머니의 쏠쏠한 재미를 앗는다
꼭대기에서 숨죽이며 초조해 하는
마지막 남은 은행 몇 알
별빛 내리는 깊은 밤에
근처 풀숲에 남몰래 떨어져서
땅속에 묻히려는 꿈을 꾸지만
간짓대는 사정없이 꿈마저 후려친다
손에 들린 검은 봉지는 묵직하다
돌아선 등 뒤에 쏟아지는 은행나무의 노오란 눈빛
또한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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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눈길에 미끄러져 가로수를 들이받았다
범퍼가 나달나달해진 차를 끌고
근처의 자동차공업사를 찾았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는 문구가
작업장 높은 처마 끝에서
악을 쓰며 겨울바람을 견디고 있다
고 놈의 문구는 목숨도 모질어서
웬걸 디지털시대 스마트시대에도
수십 년째 안색 하나 안 바꾸고 있다
집에 와서 웬수 같은 눈을 치웠다
밀대로 밀고 멫 번을 또 밀어도
말로만 듣던 중공군처럼 눈은 다시 쌓였다
두 손 들고 나서 더운 물로 샤워를 했다
전신에 듬뿍 보습제도 발랐다
막 갈아입은 속옷에서 뽀송뽀송 새물내가 났다
보일러 배관이 시작되는 골방은 지글지글 끓었다
등짝을 지지는데 문득 아까 본 문구가 떠올랐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나도 닦고 기름쳤고나 다만, 조일 것이 없고나
참 희떠운 생각을 하면서 혼자 웃었다
근데 갑자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괄약근에 힘을 천천히 넣고 있는 것이었다
아하! 나도 조일 물건이 있긴 있고나
나는 짐짓 괄약근을 더욱 조이기 시작했다
사타구니가 뻐근하니 불뚝 부풀어 올랐다
조일수록 들창의 눈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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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耳鳴
질주하는 차 엔진소리 요란하다
길 복판에선 까마귀 몇 마리
횡사한 살쾡이의 살점을 쪼고 있다
돌진하는 차는 안중에도 없는 듯
등에 진땀 배 브레이크 밟으려는 순간에야
날개 퍼덕이는 소리
까옥까옥 우는 소리
목백일홍 나뭇가지에 부리를 닦으면서
길 복판으로 향한 시선 거둘 수 없다
목백일홍 줄지어 활짝 핀 산길로
상여 한 채 지나고 있었지
지게에 나를 태워 춤사위로 놀다가
내처 그 산길 어지럽도록 달려서는
숨이 멎었나 싶어서야 멈추곤 하던
건넛마을 덕림 아재 저승 가는 날
하얀 소복 눈에 부시고
상엿소리 아스라이 고개 넘는데
까마귀 우는 소리도 따라 넘고 있었지
까마귀는 그 살점 다시 쪼고 있을 터인데
차는 여전히 확 트인 길을 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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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선
포천 모현호스피스 쟈스민 방에
1950년산 목선 한 척 정박해 있다
볼라벤의 억센 완력에 무너진
전라도 장성 편백나무 숲에서 쫓기듯 노 저어 온 곳
밧줄에 묶여 하찮은 바람에도 중심을 잡을 수 없다
비바람 거센 날은 닻을 내리고
햇볕 쨍한 날은 돛을 올리기를 수십 해
퇴역할 때도 되었겠지 묻기도 하지만
가끔씩 선저에 부딪히는 암초가 치명적이었던 것
이제는 하나 둘 실었던 짐 모두 내려놓았지만
잔물결에도 결리지 않은 구석 하나 없는 목선
투명한 밧줄에서 뚝뚝 떨어지는 노란 빛깔의 수액은
폐선 날짜를 하루하루 늦추고 있다
수선할 수조차 없이 닳고 망가진 목선이라도 좋아라
삐걱거리는 소리라도 없으면 얼마나 적막하랴
수심 깊은 곳에서 목젖까지 차오르는 울음 내색 한 번 없이
목선을 지키는 형수는 여전히 고운 얼굴
담쟁이 잎 붉게 타는 가을 속으로 조금씩 목선을 밀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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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난정(蘭丁)과 누차에 걸쳐 의논한 끝에 오명현과 조봉익 두 사람에게 <우리시회>의 이름으로 시인의 관을 씌우기로 했다. 이 분들은 수년에 걸쳐 <자연과 시의 이웃들>을 통해 시를 연찬해 오는 과정에서 충분한 검증을 거친 시인들이다. 은관시인의 자격을 이미 취득했고 금관시인을 향해 정진하고 있는 유능한 이들이다. 따라서 굳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이미 시단에 데뷔한 것으로 인정이 되지만 <우리詩>를 시단 활동의 발판으로 마련해 주고자 번거로운 절차를 밟게 된 것이다.
오명현은 위트와 날카로운 센스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시 속에 재미를 담을 줄 안다.「결투」「은행을 털다」「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등에서 그의 이러한 재능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얄팍한 재미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의 비애에까지도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죽음을 다루고 있는 「이명」이나, 피안을 눈앞에 두고 있는 환자를 그린 「목선」은 만만치 않은 서정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으로 크게 기대가 된다.
조봉익의 작품 세계의 특징은 토속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고향과 가족이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아버지」와「빈집에서」가 이러한 특징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 한편, 추운 겨울을 매서운 여인으로 의인화한 「입춘」, 억새를 통해 여인의 한을 풀어내는 「억새에게」, 내리는 폭설(暴雪)과 입후보자들이 쏟아내는 공약의 폭설(暴說)을 풍자적으로 대비시킨「대설」들은 소재를 다루는 시인의 능력을 충분히 확인시켜 주는 가작들이다.
이들은 동문수학한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등단의 자리를 같이 해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함께 추천키로 한 것이다. 인제는 자신의 문명을 걸고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길에 들어섰으니 더욱 정진하여 세상이 크게 감동하는 좋은 작품들을 많이 출산해 내기 바란다. 문운을 빌며 축하의 말씀도 아울러 적는다.
임 보 홍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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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오명현
『당신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라는 임 보 선생님의 책을 만났다.
정말 그럴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수 있는 것이라면 일찍이 접었던 꿈을 이루는 횡재를 하는 셈이었다. 그 책을 몇 페이지 읽은 후로 잠을 설쳤다. 나도 시를 쓸 수 있다니, 더구나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니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시작해 보기로 했다. 종교를 갖기로 마음먹은 때에 세상의 일에서 한 발씩 뺐었는데, 한 발씩 빼는 일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세상의 잣대를 들이대면 나는 점점 시시해지기 시작했다. 시를 쓰기로 작정하면서도 세상의 일에서 한 발씩 빼야만 했다. 또 한 번 시시해지기 시작했다. 잠들면서도 잠 깨어서도 詩詩하고 있었으니 시시해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눈 바로 뜨고 보면 그동안의 세상의 일이란 것이 별 게 아니었다. 세상의 일에서 발을 빼서 내딛은 곳 또한 세상이었다. 그곳 세상은 나를 늘 반가이 맞아주었다. 늘 깨어 있게 해 주었다. 시시하다는 건 오히려 내게 값진 것이 되었다. 결국 시시하지 않으면 맹탕인 세상을 만난 것이다.
시를 쓰기로 작정하면서 ‘시인’을 꿈꾸어 왔던 것이지만, 막상 시인으로서 세상과 당당히 맞서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한없이 두렵다. 하지만 임보 홍해리 두 분 선생님께로부터 배운 시 정신을 세상 복판에 구현하는 데 미력이나마 보태 볼 참이다. 부족한 저의 글을 뽑아주신 두 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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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명현 시인 님. 우리詩 신인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방인자 시인님, 저를 기억해 주시고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水遊 님, 축하합니다.
이제 회원으로서 우리시회의 발전에 큰 힘을 보태 주시기 바랍니다.
더욱 정진하여 훌륭한 시인으로 우뚝 서시기 바랍니다.
회원들과 함께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쑥스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축하합니다~^^♥
남정화 시인님, 감사합니다.
오명현시인님 신인상 당선! 축하드립니다...
산음 산골에까지 소식이 간 모양이군요.
감사합니다.
결투! 멋진 작품입니다... 더 좋은 시 많이 출산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