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적
◈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해주에서 동학운동을 지휘하였습니다.
◈ 1894년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체포되었는데 사형되기 직전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었습니다.
◈ 3 .1 운동 이 후에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지휘하였습니다.
◈ 1944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임이 되셨고 이 후 1945년 8 .15 광복 때 귀국하셔서 한국
독립당 위원장으로 모스코바삼상회의 성명에 대한 반박과 신탁통치반대를 주도하며
극우파로 활약했습니다
◈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실시한다는 유엔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김구 [金九, 1876.7.11~1949.6.26]
정치가·독립운동가.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황해도 해주 출생.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에게서 한학을 배웠슴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 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감형으로 1915년 출옥하여 김홍량의 동산평 농장 농감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일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그 사령관에 지청천을 임명하였다.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했다.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다시 선임되었다.
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김규식과 함께 이끌면서 우파로 활약하였다.
1948 년 남한만의 단독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포병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구선생의 출생과 업적
- 김구(김창수)
독립운동가
- 출생-사망
-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 - 1949년 6월 26일
- 수상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경력
-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
1948년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 제창
1948년 유엔한국위원단 면담에서 단독선거 반대
1948년 신탁통치 반대운동
1. 생애
1876·1세 |
황해도 해주읍(현 황해도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에서 출생. 아명(兒名)은 창암(昌巖) (8.29) |
1887·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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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어른이 갓을 쓰지 못하게 된 사연을 듣고 양반이 되기 위해 공부하기로 결심. 한학을 배우다. |
1892·1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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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임진경과(壬辰慶科)에 응시하여 낙방,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서당공부를 그만둠. 풍수와 관상공부에 몰두하다. |
1893·1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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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포동 오응선(吳應善)을 찾아가 동학 입도, 포교에 힘을 기울이다. 이름을 창수(昌洙)로 고치다. |
1894·1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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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만나 접주(接主)라는 첩지를 받다. 동학교도들과 해주성(海州城)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다. |
1895·2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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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그의 훈도를 받다. 김형진(金亨鎭)과 함께 만주를 시찰하고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강계성을 습격했으나 실패하다. |
1896·2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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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를 살해하다. (2월) 해주옥에 투옥되었다가 인천 감리영(監理營)으로 이감되다. |
1897·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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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황제의 특사(特赦) 명령이 내려지다. |
1898·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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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옥하다. (3.9) 전국을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公州麻谷寺)에서 승려가 되다. 법명은 원종(圓宗). |
1899·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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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보산 영천암(靈泉庵)의 방주(房主)가 되어 지내다가 환속하여 귀향하다. |
1900·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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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江華)에서 김두래(金斗來)라는 가명으로 지내며 아이들을 가르치다. |
1901·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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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상을 당하다. (1.28) |
1902·2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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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長淵)의 여옥(如玉)과 맞선보고 약혼하다. |
1903·2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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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녀 여옥이 병사하다. 기독교에 입교하고 장연읍 사직동에 봉양(鳳陽)학교를 설립하고 신문화 선전과 애국애족사상을 고취하다. 도산 안창호의 누이 안신호를 만나 약혼하였으나 곧 파혼하다. |
1904·2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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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 사평동 최준례(崔遵禮)와 결혼하다. |
1905·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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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진남포 의법 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가하고 이준(李儁), 이동녕(李東寧) 등과 을사보호조약의 철회를 상소하다. |
1906·3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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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교육총회 학무위원이 되어 학교설립을 적극 추진하다. |
1908·3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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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등 애국지사 104명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참여하다.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우다. |
1909·3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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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사살사건 관련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불기소로 석방되다. |
1910·3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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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하다. 이 회의에서 만주 무관학교 설립을 결의하다. (11월) |
1911·3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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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근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7년을 언도받은 후 서대문감옥에 수감되다. |
1913·3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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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국적(國籍)에서 이탈하려는 의도로 옥중에서 이름의 구(龜)자를 구(九)로 바꾸다. |
1914·3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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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감옥으로 이감되어 매일 중노동에 동원되다. 7월에 가출옥으로 석방되다. |
1915·4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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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평 농감을 맡다. 소학교 개설하여 교원생활을 하다. |
1918·4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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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들 인(仁) 태어나다. (11월) |
1919·4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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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警務局長)에 취임하다. |
1920·4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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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최준례 여사가 맏아들 인을 데리고 상해로 건너오다. |
1922·4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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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상해로 오다. 상해에서 둘째 아들 신(信)이 태어나다. |
1923·4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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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내무총장(內務總長)에 취임하다. 김구 명의로 국민대표대회 해산. (6.25) |
1924·4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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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최준례 사망하다. |
1926·5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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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다. |
1927·5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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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위원 겸 재무장(財務長)에 취임하다. |
1929·5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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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탈고, 상해 교민단장이 되다. |
1930·5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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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선되다. |
1931·5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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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독립투사를 양성하다. |
1932·5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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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당 등 5개 단체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하다. 조소앙 등과 일경 피해 가흥으로 이주하다. |
1933·5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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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에서 장개석 주석을 만나 낙양군관학교 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기로 합의하다. |
1935·6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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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하다. |
1938·6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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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의 3당 통합회의석상에서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李雲漢)의 총격을 받아 중상을 입다. |
1939·6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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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 임시정부 중경으로 옮기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 사망하다. |
1940·6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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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당을 발족시키고 집행위원장에 추대되다. 또한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되다.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다. |
1942·6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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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와 중국 미국 영국 소련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다. |
1943·6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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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과 회견 갖다. (7.26) 카이로회의 발표에 대한 성명 발표하다. (12.9) |
1944·6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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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다. |
1945·7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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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들 인이 사망하다. (28세) 개인자격으로 환국(11.23)하여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건국의 포부와 방책'을 밝히다. (11.26) 반탁운동을 전개하며 '3천만에게 고함' 방송하다. (12.27 엄항섭 대독) |
1946·7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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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다. (2.1)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총리에 취임하다. (2.14) 브라운 군정장관과 회동, 임정에 정권 이양 요청하다. (3.5)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해 일본에서 찾아 효창원에 봉안하다. (6.30) 대한독립청년단 발족하여 부총재에 선출되다.(9.12) 하지 중장과 요담하고 좌우합작에 찬성, 좌우합작 7원칙 발표. (10.13) |
1947·7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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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원'을 발표하다. 우익반탁위원회를 구성, 위원장을 맡다. (1.26) 2.8 성명 '3천만 동포에게 고함' 발표하다. (2.8) 건국실천원 양성소를 개소하다. (3.20) 비상국민회의 43차 임시회의서 부주석 유임되다. (9.21) 26청년단체 통합 대동청년단 결성, 부총재 취임하다. (9.21) |
1948·7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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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한위, 김구 등 조선인 지도자와 협의 개시하다. (1.26) 김구 등 3영수 19일 하지와 북조선 정권수립설에 대해 요담하다. (2.19) 김규식과 함께 김일성, 김두봉에 남북회담 제의하다. (2.25)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항구, 홍명희 등과 총선거 불참성명 발표하다. (3.12) 김일성 등 15대표와 구체적 협상원칙 토의하다. (4.30) 기자회견 통해 북조선서 2차 남북회담 제의하다. (7.10) |
1949·7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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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독중집서 연설에서 '서울서 통일 위한 남북협상 희망한다'고 밝히다. (1.16) 백범학원을 세우다. (1.29) 창암공민교 개교하다. (5.17) 경교장서 안두희에게 피습받아 절명하다. (6.26) 영결식 효창공원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지다. (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