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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가미신궁에서 엄중하게 봉인된 나무상자에 특이한 형태를 한 칼 한 자루가 발견된다.
74.9 센티미터 길이의 양날 칼이다. 몸체 좌우로 세 개씩의 '가지(支) 칼'이 뻗어 모두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칠지도(七支刀)'이다. 이‘칠지도’(七支刀)는 한성백제시기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백제금동대항로와 익산 미륵사 서산 마애삼존불과 함께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창조적인 유물로 꼽히고 있다.
일본에서 처음 발견되었을 때 칠지도는 창이라고 했다.칼로 보지 않았다.나무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나무가지가 중앙의 줄기를 두고 좌우로 뻗어 나간 형상을 하고 있다.
중앙의 원가지를 중심으로 좌우 각 세 개의 가지가 있어 칠지도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러한 칼의 모양은 원시와 고대사회에 우리나라를 위시한 여러지역에서 유행하였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민간에서 신앙되고 있는 샤머니즘의 굿에 사용되고 있는 세계수라는 신목의 모양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보고 있다. 단군 신화에 나오는 신단수도 세계수라 할 수 있다. 신단수는 신성한 나무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기록에 따르면 환웅이 3000 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정에 있는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곳에 있었던 보리수(菩提樹)도 세계수 전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삼국유사 고조선’에 신단수가 있는 마을을 신시라 했다.
신단은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장소다. 신단에 신을 상징하는 나무를 심었으니 이를 신수라 한다.
신화에서 신성한 나무는 생명의 나무, 세계 중심축으로서의 나무, 죽음과 재생의 나무, 생산성을 갖춘 나무,
지혜의 나무, 희생의 나무,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나무 등의 뜻을 가진다.
신단수는 산 위에 높이 솟아 있어서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고 믿는 거룩한 제단이다.
하늘과 땅이 만나고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거룩한 곳이다.
신단수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주는 솟대다.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 천명을 받았다고 한다.
하늘의 기운이 나무로 통해서 온다고 믿었다.하늘과 땅의 소통은 왕만이 할 수 있다.
백제는 그래서 나무모양의 칠지도를 만들었다.바로 왕권의 상징으로 칠지도를 만든 것이다.
길이 74.9cm인 칠지도는 중심 칼날까지 합쳐 모두 일곱 갈래로 날이 좌우 3개씩 대칭으로 엇갈려 펼쳐져 있다.
칠지도는 백제 제13대 근초고왕(346∼375 )이 서기 369년 왜나라에 살고 있던 백제인 후왕(侯王)에게 하사한 보도이다.
후왕이란 식민지 왕을 가리키는 왕호. 백제왕이 후왕에게 보내주었다는 사실은 이 칼 앞뒤 양면의 명문에서 잘 드러난다.
칼에는 60여자가 금상감(金象嵌)으로 음각돼 있다. 칼 이름인 ‘칠지도’도 음각된 한자 글씨(七支刀)로 나타나 있다.
(앞면)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以僻百兵宜供供侯王□□□□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滋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이 명문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태화 4년(369년) 음력 5월16일 병오 대낮에 무수히 거듭 담금질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노라.
이칼은 백가지 병해를 물리치니 후왕에게 주기에 알맞다.□□□□가 만들었다.
(뒷면) 선대 이래로 이런 칼은 없었다.백제왕세자가 성음을 새겨 왜왕을 위해 만들어 주는 것이므로
후세에 전하도록 하라."
"5월 병오에 칼을 만들면 효험이 있다." 5월 병오에 칼을 만들면 명도(名刀)가 탄생한다는 중국 한나라 왕충이
지은 '논형'에 나와있는 기록이다. 왕충은 "지기노력에 의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왕충은 마치 산에 흩어져 있는 잡철을 모아 백번 단련시켜 5월 햇볕의 기운이 가장 강한 날,
해가 정중앙에 떠 있을 병오에 세상에 둘도 없는 칼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칠지도는 나무 모양이라고 하기에는 특이하게 만들었다.
백제인들은 칠지도를 만들었을 때 어떤 나무를 기준으로 삼았을까?
바로 산동성 가상현의 무씨사당화상석에 보이는 명협(蓂莢 - 曆草)이라는 풀이다.
돌계단의 틈바구니에서 자란다.상상 속에 피어나는 풀이다.태평성대를 상징한다. 달력을 의미하는 풀이다.
"꽃이 하루에 한 잎씩 피어 열두 잎 다 피고 보면 보름인 것과 달이 이지러는 것을 알게 되며,
꽃이 하루 한 잎 씩 말아 들어가 꽃 꼬투리가 떨어지면 그믐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연암 박지원이 설명한 명협이다.매월 초하루부터 한 잎씩 돋아나 보름이 되면 총 15장의 잎이 생기고
16일째부터는 반대로 한 잎씩 떨어져 그믐이 되면 모두 떨어지고 만다.작은 달(29일의 달)에는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가 말라 버렸다. 이것을 보고 순(旬-열흘), 삭(朔-초하루)을 알았다.
15협은 한달을, 6협은 1년을 의미한다. 날을 세는 역초는 십오협이고 달을 세는 역초는 육협이라고 한다.
산성동 가상현 무씨사당 화상석에는 15협의 명협과 6협의 명협이 그려져 있다.
15협은 한 달을 상징하고 6협은 1년을 상징한다. 명협은 성군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생기는 상서로운 풀이다.
명협은 달력을 상징하는 풀로 백성이 농사를 짓는데 절기를 일러주어 풍년이 들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달력은 왕자만이 가지는 권력의 상징물로 볼 수 있다. 칼의 모양을 덕치와 달력을 상징하는 명협의 모양으로 만들어
왕자의 권위를 마음껏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칼이 일본에 건네졌다면 칼의 성격은 하사설에 가까울 것이다.
과연 백제인들은 명협의 존재를 알았을까. 유감스럽게도 자료가 없다. 다만 상서로운 곡식인 가화에 대해서는 삼국이
모두 이해를 하고 있었으므로 가화와 짝을 이루어 등징하는 명협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았으리라 추측은 할 수 있다.
칠지도 명문에 '供供侯王'이라고 하는 문구가 있다. 이 문구를 놓고 해석이 다양하다.
"供供侯王이라고 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공자는 제공하다 할 때 供자인데 그게 두 개 중복이 돼 있고요,
그 다음에 諸侯 할 때 侯자를 쓰고요, 그 다음에 임금 왕 자를 써서 공공후왕 이러는데 이건 무슨 이야기냐면
태화4년 5월 16일 병오일 한낮에 백제에서 이 백번 담금질한 철로 칠지도를 만드는데 이러한 검은 칼은 온갖
兵禍 전쟁으로 인한 화를 가름할 수가 있다, 그래서 마땅히 후왕에게 공공하는 곳이 옳겠다."
-강종훈<대구카톨릭대 교수 역사학>-
"이 명문내용에 보면 두 나라의 관계를 시사적으로 보여주는 이런 구절이 있어서 그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학계,
한국과 일본학계에서 큰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宜供供侯王'이다 해서 그 諸侯할 때 그 侯王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후왕이라는 존재는 중국사에서 봤을 때 중국의 황제가 있으면 그 제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연 그 후왕이라는 명문을 백제와 왜와의 관계로 놓고 봤을 때 누가 상위자냐."-양기석<충북대 교수 역사학>-
강종훈 교수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주었다는 표현으로 바칠 헌(獻)자를 쓰지 않고
제공하다는 의미의 이바지할 공(供)자를 썼다는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6년전에 있었던 일본의 오부치 수상 장례식을 예로 들어서 '헌'과 '공'의 차이를 설명한다.
"당시에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조문객으로 와가지고 장례식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꽃을 갖다 바치는 그런 차례가 있었는데 클린턴을 비롯해서 많은 외국 사절들이 오부치의 관 앞에
꽃을 놓는 것을 헌화(獻花)라고 일본측에서 표현했습니다. 이 헌화 순서가 끝나고 난 다음에 供花순서가 있었습니다.
제공할 供자에 꽃 花자를 쓰는 공화순서가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경우였냐면 일본 황족의 대표가 나와서
꽃을 오부치 관 앞에 놓는 것을 공화라고 했습니다. 이건 무슨 얘기냐면 供하고 獻의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죠.
황족이 총리대신의 장례식에 꽃을 주는 것은 헌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라고 일본 측에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강종훈<대구카톨릭대 교수 역사학>-
칠지도의 경우도 백제에서 일본왕에게 '헌상(獻上)'했던 게 아니라 황제가 수상에게 주듯이 제공(提供),
하사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해석대로라면 일본측이 주장하는 백제 헌상설은 설 자리가 없다.
백제에서 왜왕에게 칼을 하사했음은 확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선대 이래로 이런 칼은 없었다.백제왕세자가 성음을 새겨 왜왕을 위해 만들어 주는 것이므로
후세에 전하도록 하라."칼의 뒤면에 있는 명문도 헌상보다는 하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풀이다.
칼의 뒷면에 나오는 기이할 기(奇), 날 생(生), 성스러울 성(聖), 소리 음(音) 즉 기생성음(奇生聖音)이라는 네 글자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논란이 있어왔다. 지금까지의 해석으로는 '기생'은 근초고왕 때 백제의 왕세자였던 구수(仇首)를 뜻하고 '성음'은 왕자(王子)를 말한다. 기생성음이란 왕세자 구수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왜왕에게 칼을 하사한 사람은
백제의 왕이 아니라 왕세자였다는 얘기다.
"왕세자였던 기생성음, 즉 근구수에 의해서 만들어져서 왜왕실에 보내진 걸로 돼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얘기냐 하면 왜왕에게 상대할 수 있는 백제 측의 카운트파트가 백제왕이 아니라
다음 왕이 될 차기 그러니까 제 2인자에 해당하는 왕세자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백제 왕세자인 근구수왕이 왜왕에게 하사하는 쪽으로 문맥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은
백제와 일본사이의 그 당시 외교관계가 일본우위는 물론 아니고 백제-일본사이의 대등한 관계라고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강종훈<대구카톨릭대 교수 역사학>-
칠지도 말미에 새겨져 있는 '전시후세(傳示後世)' 즉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라는 표현만 보더라도
제왕이 신하에게 훈시하는 투의 명령조 문장으로 돼 있어서 칠지도의 백제하사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만약에 하위국의 우두머리가 상위국의 우두머리에게 칼을 보내주면서 후에 전해 보여라 이런 식의 이야기를
쓸 수는 없는 것이다.칠지도 명문 내용은 철저하게 백제가 우위에 서 있는 당시의 한일관계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 백제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왜왕을 제후국의 왕쯤으로 취급하고 칠지도를 하사할 만큼 국력이 막강했다.
근초고왕 시기라면 백제가 그만한 자신감을 갖기에 충분했다고 한다.
"근초고왕 때의 그 자신감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중국하고 교류도 했고, 또 하나는 군사적으로 고구려를 압도한다고 하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고,
남쪽으로 많은 영토들을 흡수를 했고 가야지역까지 진출, 뭐 사신을 보내고 할 정도고 진출도 했고.
그랬을 정도니까 자신감이 팽배한 시점이죠.
그걸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일본서기에 있는 기록인데 거기 보면 초고왕, 근초고왕입니다.
근초고왕이 창고를 열어 보이면서 우리나라에는 이런 진보가 많다."-김기섭<한성백제박물관 전시팀장>-
칠지도는 겉모습으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성한 나무 모양을 하고 있다. 그 나무는 달력을 상징하는 명협을 그렸다.
병오 정양의 정양은 황룡을 뜻한다.황룡이 하늘높이 떠서 만백성을 다스린다는 의미로 칠지도를 만들어 일본과
주변 국가에 백제의 위세를 떨치기 위해 하사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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