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집 아들과 로얄 페밀리
1970년 봄 이였다, 내가 대학에 가지 못한 진정한 이유는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문교부 방침 때문 이였다. 70년도는 예비고사 원년 이였다. 6.25 를 전 후해서 태여 난 우리는 학생들 숫자가 많은 편은 아니 였다. 더구나 그 때만해도 여자들은 여고만 졸업해도 괜찮다고 하던 때라 대학교 문이 좁지 않았었다. 내 머리가 엄청나게 나쁘지는 않았지만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이유로 반에서 중간을 유지한 형편 이였다. 그런 형편 이였지만 특별대학 특수 과 아니고는 등록금만 내고도 갈수 있었다. 그 운명의 예비고사만 아니 였으면 말이다. 변두리 여학교 중간성적 가지고는 예비고사장벽은 너무 높았다. 예비고사에서 보기 좋게 미역국을 먹게 되였고 나도 자존심 있는 엄마아빠 딸인 관계로 차마 재수 하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더구나 공부하기는 끔찍 하게도 싫었다는 게 늦은 고백이다. 나도 여자인데 그 당시 여대생의 대표 모습인 , 긴 생머리에 두꺼운 책 두어 권을 가슴에 안고 친구들과 재잘 거리는 모습을 어찌 그리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우리학교에서 인정해 주던 오공주 단원 이였던 나는 다른 친구들이 대학을 포기 하고 취업을 한 결과 나만 외톨이가 되였다. 매일매일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던 친구들과 떨어져 홀로 뒹굴자니 눈치도 보이고 심심하던 어느 날 ,유난히도 나를 예뻐해 주시던 ”화학 선생님이 생각 났다. 선생님은 독일 아버지와 한국 어머니에게서 태여 나셨는데 독일에서 공부한 관계로 발음이 이상했다.나는 다른 과목도 시원 찮았지 만 화학은 더 형편없었다. 여고 3년 내내 배운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고 “ 네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 예쁘다 “ 하며 웃으시던 파란 눈의 모습만 생생하다. 무료함에 몸부림 치던 어느 날 학교로 선생님을 찾아 나섰다. 졸업한지 몇 달 되지도 않은데 선생님은 일부러 찾아 준 제자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 어서 와라, 반갑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니? 재수 해야지? 마치 친정에 간 딸을 반기듯 했다. “선생님 저 취직자리 없겠어요? “취직? 공부 안하고 취직하려고? 글쎄 그렇다면 ,,가구회사는 어떻겠니? “ 가구 회사요? 거기 좋겠네요 거기 해 주세요. 그럼 난 지금 수업 들어가야 하니까 두 시간 후에 다시 만나자 . 선생님과 다시 만나 택시를 타고 도착한 가구 회사는 장안동에 있었다. 넒은 마당을 가운데로 ,공장과 사무실이 함께 있었는데 회사 규모가 꽤 컸다. 그 회사 회장님과 선생님은 각별한 사이였는지. 나는 그 자리에서 회장님의 낙하산 채용이 되였다. 나의 직책은 경리였는데 경리의 필수인 주산 부기를 전혀 할 줄 몰랐다. 무지함은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던 나는 다음날부터 경리 책상을 소유한 “미스 신이 되였다. 미스 신, 입출금 정리, “미스 신, 공과금, “미스 신 회식비, “ 과장님 저요, 주산 부기 못하는데요. “주산 부기를 못한다고? 근데 어떻게 경리로,,,? 그 광경을 보다 못한 부장님이 과장님을 호출했고 ,부장님께 불려갔던 과장님은 그 후로는 나에게 아무런 일도 시키지 않았다. 회장님의 낙하산 빽은 대단해서 전교 1등짜리 친구가 큰 회사 비서실 근무하면서 받는 월급 7천원보다 많은 1만원을 받았다. 그때 전기구이 통닭 한 마리 가격이 백 원 이였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내가 회사를 위해 일해준 것은 가구 홍보용 책에 모델료 없이 어설픈 모델이 되어 사진 몇 방 찍은 것이 전부일 것이다. 출근 해 봤자 할 일도 없고 퇴근시간인 5시까지 경리 책상을 지키긴 해야 했으니 그 지루함을 연예 사업으로 돌렸다. 썩은 생선에 파리 꼬이듯 120 여명이나 되는 남자들의 시선이 뜨겁게 달려 들었다. “ 미스 신, 차 한잔만, “ 미스 신 강촌에 놀러 가요. “미스 신 밥 먹자, 놀자 시간 좀,,,나는 불 나비들의 데이트 신청을 모두 받아 드렸다. 월요일은 김군, 화요일은 이군,수요일은 최군,노력한 결과 주일 동안 하루도 쉬는 날이 없게 되였다. 내가 무슨 여왕벌도 아닐 진데 유치하고 한심스런 짓거리가 절정을 이를 즈음에 새까만 얼굴에 키 크고 건장한 남자가 새로 입사했다. 그는 k군 이였는데 회장님의 작은 아들 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그는 로얄 페밀리 였던 것이다 한 사무실에서 근무한지 사흘 만에 나에게 수작을 걸어왔다. 아니 사실을 고백하자면 그가 나에게 수작 걸도록 꼬리를 쳤을 것이다. 난 그때 그렇게 유치하고 수준 이하였던 것만 같다. 그의 조건을 무시 할 수 없는 일이라 빡빡한 나의 일정을 모두 접고 그에게 올인 했다. 춘천에서 군 복무를 하였다는 그는 나와의 첫 데이트 장소를 춘천으로 잡았다. 성동 역에서 떠나는 춘천행 기차를 타고 가서 생전처음 총떡 이라는 것을 먹고 막국수를 먹고 나니 소탈한 그의 모습에 가까워 지는 듯 했다. 20살의 핑크 빛 사랑을 적고 있을 때 오히려 대학에 떨어 진 것이 행운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문제는 문어발 처럼 늘여놓은 김군, 이군 최군,,,들의 아우성 이였다. 혹시라도 회장님이나 k군의 귀에 들어갈 까봐 서둘러 정리작업에 들어 갔었는데 ,퇴근 길에 숨어서 기다렸던 “염군 때문에 “일장춘몽이 되어 버렸다. 염군은 근처 꽃 농장 집 아들 이였는데 예쁘장한 얼굴에 왕 소심한 남자였다. 울며 불며 나에게 매달렸는데 회장님 아들이 나타나기 전 까지는 나도 그가 싫지는 않았다. 그의 집에 가서 밥까지 얻어 먹었으니 철이 없는 것 인지 정신 줄을 놓은 행동 이였는지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 울며 불며 스토커 증상까지 보이니 참으로 난감했다. 이러구 저러구 사정하고 구술러 서 마지막 데이트를 해 주던 날 일이 터지고 말았다. 다시는 만나는 일 없기로 악수를 하고 돌아섰는데 그가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탁 트인 골목 사거리 였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냥 안겨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방종한 나를 버리셨는지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눈이 있었다. 그런 사실도 모른 체 염군 과도 정리됐다며 콧노래를 부르며 출근했는데, “ 미스 신, 회사 모델 하더니 이젠 영화 찍는 거야? 남자 주인공도 우리회사 직원 이더군.
그랬다, 그래도 k군이 꽤 괜찮아 보였는데 어제 밤 염군과의 일을 비꼬며 꼬집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봐 주었다면 설명이 가능한 일인데 나 또한 오 만 정이 떨어 졌다. 나는 그 날로 경리 답지 않은 경리 사직서를 쓰고 입사 3개월 만에 낙하산에서 내렸다. 그날 이후 k군도 ,염군도 만나지 않았다. 지금 수 십 년 전을 추억해보니 회장님 아들 이름이나 모습은 까마 득 한데 꽃을 닮았던 “염군의 눈물이 그리워진다. 길을 가다 남에 집 담에 활짝 핀 넝쿨 장미에게서도 염군을 보았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는 정확 치 않지만 순진한 사람에게 못 할 짓을 했다는 미얀 스러움 인 것도 같다 . 아마도 염군의 추억 속에는 내가 없을 것이지만 그냥 나 혼자서 생각에 빠져있다.
첫댓글 춘몽님 인기 짱이셨군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