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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을도 대설치성 5분도훈 : 급살병의 병목에 사랑과 용서가 왜 필요한가?
양력 2013.12.07 (음력 2013.11.05)
< 종장님 >
몇 분은 카페에 올려 놓으셨더군요. 그러니까 천륜을 잇는다는 것이 사랑과 용서거든요. 하여간 무조건 사랑하라는 거예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다 용서해 주라는 거예요.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제가 잘못을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에 “내 아들이 되어줘서 고맙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거꾸로 제가 어머니한테 “제 어머니가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할 판인데, 우리 어머니가 저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으면서도 내 아들이 되어줘서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 이런 얘길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사랑과 용서로 하나로 연결된 거죠. 양주동 박사가 얘기했듯이,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라는 노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랑과 용서가 참 중요한 거 같아요. 우리 충담도인, 왜 급살병의 병목에 사랑과 용서가 필요한지 말씀해 보세요.
< 충담 도인 >
생각을 해 봤는데요. 사랑과 용서라는 거는 꼭 급살병이나 태을도나 증산종단이나 이런 것과는 상관 없이도, 이전에 살다가 가신 많은 성자들이나 또는 각 종교나 도덕 군자나 그런 분들이 공통적으로 말씀하신 진리, 세상 사는 가장 바탕이 되는 진리, 또는 어디 우주를 나가서 어떤 우주인, 뭐 외계인을 만나더라도 서로 통할 수 있는 그런 법칙이라고 생각이 되고요. 사랑과 용서를 급살병의 병목과 연관을 지어서 생각을 한다면, 급살병이 올지 안 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급살병이 온다면 사랑과 용서라는 가장 기본이 되는 그 진리가 고갈되어 없어지게 되는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사랑과 용서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고요. 사랑과 용서라는 것이 제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이런 것도 중요하겠지만, 저부터 먼저 급살병을 넘어 간다든지, 살아가는데 있어서 잘 살기 위해서는, 제 자신도 지은 죄가 있고 잘못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되고 또 저도 뭔가 삶을 잘 살았다는 평을 듣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잘 행동을 해야 되고,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 종장님 >
사랑과 용서라는 말을 우리가 잘 쓰잖아요. 근데 북한의 탈북자들 수기를 읽어보니까 사랑과 용서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았대요. 항상 투쟁, 복수 뭐 이런 것만 (알았지). 사랑과 용서라는 말을 어디서 알았냐 하면 탈북해서 중국에 와서 한류 드라마를 보면서 사랑과 용서라는 걸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한류 드라마는 사랑과 용서가 많이 나오잖아요. 탈북수기 글을 쓰신 그 분이, 드라마를 통해서 사랑과 용서라는 말을 알고 나니까 그제사 그 말이 입에 돌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굴이 달라지더래요. 새까맣던 얼굴이 편해지더라는 거예요. 골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사랑하고 용서하는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사랑과 용서를 배워가니까 얼굴이 활짝 피어나더라는 거예요. 상생의 얼굴이라는 건 피어나는 얼굴이거든요. 우리 저 충담 도인이 사랑과 용서를 많이 실천하는 거 같아요, 처음에 왔을 때보다 얼굴이 활짝 피었어요. 사실 도인들이 공통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렇잖아요. 정작 본인은 잘 모르겠다고 하지만.
< 충경 도인 >
어제 넬슨 만델라가 서거한 날인데, 만델라가 감옥에 가기 전에는 흑백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기를 들고서 싸워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테러리스트’ 였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들어가있던 27년동안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져서 나왔습니다. 만델라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냐 하면, 이 세상은 총으로써 빨리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에 대화를 통해서 화해도 하고 용서도 해주는 것이 세상을 더 빨리 바뀌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치성 주제가 급살병의 병목에 사랑과 용서가 왜 필요한가 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넬슨 만델라가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흑인과 백인간에 서로 죽이고 했던 그런 급살목의 세상이었습니다. 수시로 테러가 있고, 살해하고, 시위를 하면 총으로 쏘아 죽였던 그런 급살목의 세상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과거를 돌이켜 보면 급살목의 시기가 끊임없이 몰려왔습니다. 전봉준 장군이 동학혁명을 할 때에도 20만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6.25때 죽은 사람은 남한 군인만 한 50만정도이고, 남북한과 모든 외국 군인들을 다 합치면 300만 명정도는 죽은 그런 급살목의 시대였습니다. 앞으로의 급살병목은 지금의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힘든 시기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그런 급살목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겠는가? 이러한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학혁명 당시 동학 지도자 중 한 명인 김개남은 상놈출신이라서, 양반만 보면 원한에 사무쳐서 많이 죽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민이나 없는 사람들은 김개남을 많이 따랐다고 하는데, 전봉준 장군은 양반을 보더라도 아무 이유없이 때려 죽이지 않고 필요한 재물이나 군자금을 내놓도록 이야기를 해서 설득했기 때문에, 양반들은 전봉준 장군을 보면 그래도 이유없이 죽이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는 반면에 김개남만 보면 무조건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전봉준 장군이 혁명을 했어도 개인적인 원한에 사무쳐 양반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없는 사람들을 잘되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전봉준 장군이 존경을 받는 것이고, 이 점을 증산께서도 인정해 주시고 계십니다.
동학혁명 시기든 6.25전쟁 시기든 간에 이런 급살목의 시기에는 죄가 있던 없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시기이고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는 시기입니다. 때문에 이런 급살목의 시기에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잘못 먹게 되면, 다른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고 결국은 본인도 그런 급살목의 희생자가 되어 버립니다. 6.25 전쟁때 남한과 북한간에 전쟁을 했는데, 서로를 미워해서 ‘죽일 놈’이라고 했지요. 남한 사람들은 북한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다 죽이려고 했고,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을 친일파 미제국주의 앞잡이라고 다 죽이려고 했지요. 서로 죽일 놈이라고 하니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 있었습니까? 죽을만한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지금도 사람이 살다 보면 남을 미워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집안에서는 부부끼리 싸울 때면 ‘저 웬수 죽지도 않나’라고 말을 내뱉기도 하고, 직장이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승진이나 사업상의 이해관계를 앞두고서는 경쟁상대를 ‘저 놈은 죽지도 않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요. 자기 밥줄이 달린 것이니 치열하게 서로 싸울 수밖에 없지요. 또 이웃간에도 서로 주차문제로 죽이고 까지 하는 세상이니까 동네사람끼리 서로 싸우게 되면 마음속으로는 ‘저 놈은 죽지도 않나’하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생길 겁니다. 국가간에도 서로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일간에 감정이 안 좋을 때에 인터넷에 들어가면, ‘일본 놈들은 죽지도 않나?’ ‘일본은 가라앉지도 않나?’하는 글들이 달린 경우도 많이 보입니다.
상제님이 후천개벽에 누가 죽어야 하겠느냐고 물어보시고 생각해 보도록 하신 적도 있지만, 급살목의 시기에는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그 사람에게 큰 위해가 될 것이고, 또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죄나 척을 지으면 다른 사람들도 나보고 ‘저 놈 죽일 놈’하고 생각을 하겠지요. 도인들이 수도를 해서 신명과 소통할 줄 알아도 스스로의 마음을 제대로 닦지 못한다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남에게 죄와 척을 짓지 않고 살아야 하겠구나 그리고 서로서로가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종장님 >
대학교 때 신학과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저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을 사는 사람하고, 저 세상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을 사는 사람하고, 나중에 인생을 결산해보면 저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고 인생을 산 사람이 훨씬 더 여지 있고 편안하고 알차고 옹골차게 살게 된다고요.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저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악의 업보를 생각하거든요. 저 세상이 없다고 생각하면 막 살게 되죠, 되는 대로. 사랑과 용서라는 것은 저 세상과 이 세상을 이어주는 끈이에요. 신계와 인간계를 이어주는 것이 사랑과 용서거든요. 상제님도 인간을 사랑하사 인간으로 오셨지 인간을 미워했으면 오실 리가 없잖아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조상들이 우리를 태워낼 때 육십 년 동안 기도해서 우리가 태어난다는 거 아녜요. 우리를 사랑했으니까 태워냈지 우리를 미워했으면 태워냈겠어요. 결국 삶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에서 시작해서 사랑과 용서로 품위 있게 살아야지 결실이 좋지. 사랑과 용서의 마음으로 받아 나왔는데 그 은혜도 모르고 미움과 질투로 갚는다면 얼마나 진리 앞에 내가 위배되는 삶을 사는 것이 되겠어요. 그래서 급살병의 병목에 사랑과 용서는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신입생 모아 놓고 하는 것처럼 쏙쏙 들어오게 가르쳐야 되요.
< 충성 도인 >
우주의 하추 교차기에는 여러 가지 개벽현상이 나타나고, 이때는 신명시대라고 상제님이 말씀하셨듯이 신명들이 불칼을 휘둘러서 사람들의 마음을 심판하는데,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통해 바라시는 후천 선경세상은 모든 사람이 상생의 마음을 가진 세상이거든요. 불교에서 말하듯이 일즉일체 일체즉일, 모든 것이 하나가 전체와 같다는 얘기죠. 태을도에서도 상제님 진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모든 만물이 태을에서 비롯되지 않습니까? 생명과 영, 모든 근원이 태을이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하나인데, 하나라는 진리를 알게 되면 서로 미워하고 서로 다툴 일이 없는데, 여태까지는 그것을 모르다 보니까, 다투고 미워하고 내 것 네 것 따졌는데. 상제님이 바라시는 후천 선경세상은 모두가 서로 상생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보시면서 사랑과 용서의 행동을 그대로 보여 주셨잖아요. 상제님께서 개벽시 일반 자연적인 현상 외에, 병겁으로써 씨종자를 추리는데, 마음에 먹줄을 잡혀서 심판한다고 하는데, 그때 삼십육만 철기 신장이 내려오거나, 아니면 척신들이 발동한다고 해요. 제가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원과 척이 있으면 척신이 배를 갈라서 처참하게 죽인다고 그러는데, 누구나 선천은 아무리 잘 살고자 하고 종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남에게 원과 척을 짓고 살았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면 내가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하면, 내가 용서하지 않고 신명들이 나를 용서하기를 바란다면 그때는 신명들로부터 “너는 왜 남을 용서하지 않았느냐.” 이런 심판을 받아서 살아남기 어렵겠다, 그래서 급살병목에 후천 상생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실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종장님 >
음식도 맛있는 것을 차려 놓으면 일단 보기도 좋고 맛있게 먹잖아요. 사람도 어떤 사람이 모이느냐에 따라서 음식같이 맛깔스럽고 향내가 나고, 음식의 성찬도 있지만 사람의 성찬도 있거든요. 꽃 중에 가장 아름답고 밝고 환한 꽃이 ‘인간꽃’이거든요. 인간 꽃이 제일 아름다운데, 태을도인이 인간꽃을 활짝 피워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원래의 생명자리가 ‘태을’이라는 거예요 상제님 말씀은. 누구나 마음속에 태을이 있다고요. 부처는 불성이라고 했지만 불성을 상제님은 태을이라고 했다고요. 마음속에 태을이 있고, 육신은 밥을 먹어서 유지되지만 영혼은 태을을 통해서 유지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훔치 훔치’ 하는 것이 영의 생명을 유지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도를 잘 닦으면 죽어도 정혼이 뭉쳐서 영원히 흩어지지 않지만, 도를 닦지 않으면, 태을주를 읽지 않으면, 태을과 합체가 되지 않으면 정혼이 흩어진다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육신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영혼의 죽음이 가장 큰 죽음이라는 거예요. 완전한 죽음, 그런 시대가 온다는 거예요. 그런 정리를 할 때가 왔다는 거예요. 그것을 뭐로 심판하느냐 하면 마음을 가지고 심판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상제님 고수부님이 항상 말씀하시는 것이 마음 닦고 태을주를 읽으라는 거예요. 마음 닦고 태을주를 읽으라는 것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가져야지 생명의 실체인 태을이 들어온다는 거예요. 용서와 사랑을 하지 않으면 독기와 살기가 풀어지지 않아서 태을궁에서 내려오는 태을이 나에게 안 온다는 거예요. 왜 고기를 너무 많이 먹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콜레스테롤이 쌓여서 핏줄이 막혀서 병도 나고 하잖아요.
사랑과 용서라는 것이 영원한 관계로 가는 길이고 영원한 생명의 길이고. 그래서 마음 닦고 태을주를 읽는다는 것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키워나가는 것이고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펼쳐 나가는 것입니다. 아산서 올라 오셨고 좀 있다 부산서도 올라오시는데, 그 분들이 왜 여기 오시겠어요. 상제님 고수부님을 보고서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보름 만에 절기마다 한 번씩 그리고 한 번 추가해서 한 달에 세 번씩 모이는 것은 그 속에서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서로간에 확인하고 그 마음을 충전하려고 하는 것이죠. 자 우리 충선도인님.
< 충선 도인 >
앞에서 훌륭하신 성도님들이 좋은 말씀하셨으니까 저는 간단 명료하게 말씀드릴께요. 태을도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이 본성대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선천 어느 성자들도 다 말씀하셨어요 – 예수님, 부처님. 제가 철이 들고 상제님 말씀을 접하면서, 물론 상제님 말씀을 접하고도 단계단계 성숙이 되어가는 걸 제 스스로 느껴요. 이것을 주관적으로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요. 증산상제님을 모시는 신앙 단체 중에서도 태을도를 만나면서 사랑과 용서를 배웠어요.
상제님은 늘 상생과 보은에 대한 가르침을 내려주신 것으로만 알았는데, 보은에 대해서는 성구말씀에 있지만 상제님을 찾기 전에 부모님을 먼저 알아라.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 그러나 사랑과 용서를 얘기하고 독기와 살기를 뽑아내라 하는 단체들은 없었고 가르침도 없었어요. 어느 종교판이든 도판이든 가면 상생을 부르짖으며 상극을 얘기하고, 은근히 독선적이고 욕심을 부추기는, 어떻게 보면 그런 신앙을 연습시킨 것 같아요. 나 잘되게 하고 명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권력을 가져야 되고 돈을 가져야 되고, 똑같은 맥락으로 도판에서도 그러더라고요. 이건 종교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죠. 선천이나 후천이나 똑같은 개념이라면 신앙할 필요도 없고 도 닦을 필요도 없고 마음 닦을 필요도 없죠. 구체적으로 안신안심하면서 독기와 살기를 뽑아내고 사랑과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라. 우리 태을도가 그런 면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이라기 보다는 대학원 과정이다라고 늘 도인들께서 도담 시간에 말씀하셨듯이 같은 맥락이예요.
이런 말씀을 어디서든지 들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마음이 울리고 영혼이 울리게, 진짜 영혼이 성숙되게 말씀하시는 데는 없어요. 상제님, 종장님 말씀 훌륭하시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태을도에 매력을 느끼고 멀리서 오는 이유는 전 평택에서 옵니다만, 태을도인은 여느 신앙인이나 종교인하고 틀려요. 신부님이나 스님이나 어떤 명성있는 신앙인 이상이예요. OOO나 증산신앙 단체에서 경력을 쌓아오신 분들이 여기 계신 도인들인데, 태을도 밖에 계신 분들은 더러는 종장님을 모시고 공부한다면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을 놓고 볼 때 상제님 모시는 신앙인데 누굴 왜 미워하고 반대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느냐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1% 가능성만 있으면 “아 그 분 괜찮다, 들을 만 하다. 가자.”, 그렇게 어린애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오면 돼요. 그런데 나름대로 고정관념에 쌓이고 나이를 사십 오십 육십 먹다 보면, 어르신들은 더 고정관념 있겠지만, 사랑과 용서하는 마음을 갖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더욱이 긍정적으로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상제님은 사랑과 용서 그것을 가르친 것 같아요. 상제님도 급살병을 떠나서 개벽을 떠나서 진멸지경에 빠진 창생을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 살리시기 위해서 오셨는데.
상제님 말씀도 훌륭하지만 우리 민초들이 쓰던 말 가운데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줘라.” 이 말이 딱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요. 저도 독기와 살기 그득해가지고 얼마 전까지도 여러 잘못을 했는데, 직장에서 얄밉게 구는 친구가 있는데, 그래도 야근할 때 제 집사람이 간식거리를 싸주면, 그러면 그 친구가 미운데도 같이 나눠먹고 합니다. 저는 이런 환경에 살아요. 마도 삼밭에 가면 삼이 되고 삼도 마밭에 가면 마가 되듯이, 사람은 분위기예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좋은 언행을 하는 사람과 어울리다 보면 예수님 말씀대로 어린 양이 되는 거고, 사기꾼 도둑 같은 사람과 만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으쓱으쓱해져가지고 ‘한 번 가보자’ 이런 생각이 들어요, 선천의 기운 때문에. 그래서 나름대로 상제님 진리, 종장님 말씀 들으면서 자꾸 순화되고 독기 살기를 뽑아내려고 해요.
저와 개인적인 인연으로 충성도인님하고 이런저런 일로 세상의 일을 함께하는 경우가 많은데, 짜증나는 일에도 저 형님은 짜증을 안 내요. 너무 덕이 넘치시고 바보같이 사세요. 간단하게 말씀드리려 했는데 길어졌네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유치원 때 어릴 때 우리가 엄마 말씀대로 했잖아요. 그렇게 살려고 하면은 나이가 오십이 됐건 육십이 됐건,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면 개벽이 언제 오든 급살병이 언제 오든. 그것을 거치지 않고 지상낙원이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까 종장님 말씀, 내가 좋은 마음을 가지면 좋은 세상이 되고 내가 악한 마음을 가지면 악한 세상이 된다고 상제님 말씀을 빌려서 말씀하셨지만. (처음 오신 두 분) 하여튼 태을도에 자주 오세요. 처음 뵙지만 얼굴에서 느낌이 오네요. 이렇게 결론을 맺겠습니다.
< 종장님 >
낙원상가에 가면 떡집이 많다고요. 아직 떡이 부족해가지고 시장한데 좀 드시고.
< 이OO 도인 >
소감이라면 너무 거창한 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은 생기는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것이 아니고 정식 도인으로써 책임감을 가지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해서 신앙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지금 귀국해서 첫 치성인 것 같은 데, 제가 걸은 곳이 900km 코스였거든요. 스페인 순례길이었는데, 제대로 걸은 건 800km정도였는데, 혼자 걸으면서 여러 가지를 많이 생각했어요. 아무 일행 없이 간 건데 거기서 한 번 만난 사람들은 계속 만나요. 서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장 크게 느낀 게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구나. 혼자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혼자 갔는데 정작 혼자일 때는 엄청난 공포감이 와요. 도착해야 할 마을에 아직 도착 못했는데 숲길인데 해는 저 가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그런 경우나, 너무 아팠을 때 걸어가기 힘든데 아직 마을은 한참 남았고 체력은 한계에 다달았을 때 이런 경우가 많은데, 그때마다 앞에서 누가 기다려준다거나, 아니면 뒤에서 누가 괜찮냐, 라고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그냥 물어봐요, 처음 보는 사람들이. 그런데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괜찮냐, 라는 말 한 마디에 힘을 얻고. 길을 가다 보면 갈림길처럼 헷갈리기 쉬운데면 어김없이 길에다 돌로 화살표를 만들어 놨어요. 옛날부터 예전 순례자들이 만들어 놓은 거예요, 돌로. 길을 가라고. 왼쪽으로 가라, 오른쪽으로 가라. 이 사람들도 이렇게 힘들었겠지, 라는 생각이 드니까 또 힘이 나는 거예요. 보이지는 않지만 돌멩이 하나로.
그런데 이제 사랑과 용서를 말씀하셨잖아요. 결국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면은 가장 중요한 게 같이 살려면은 결국 상생이잖아요. 사랑과 용서가 가장 중요한 것일 텐데, 급살병을, 다른 종교들도 그렇고 개벽이 온다, 아니면 뭐 외계인이 침공을 해서 지구가 망하니 어쩌니 할 때 살겠다고 다 접잖아요. 그런데 그게 나 혼자 살겠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이게 나 혼자 산다고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 그게 행복할 거 같지도 않고, 그게 주변사람들만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다같이 행복하게 같이 그 고비를 넘어서 살아갔으면 진짜 행복할 텐데. 그러려면 고집을 버려야겠구나.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지 않으면은 아무도 실천하지 않으면은 이건 안되겠구나. 왜냐하면 저도 ‘괜찮냐’라는 그런 친절도 받아봤고, 그게 크게 보면 사랑이니까. 오자마자 이런 주제가 있어서 다행인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종장님 >
충갑도인님 도호가 ‘충갑(忠甲)’이거든요. 중심을 충(忠)이라 하잖아요. 중심을 가장 잘 잡은 갑(甲). 얼굴을 자주 안보니까 자꾸 잊혀지려고 해요. 자주 얼굴을 봐야 정이 드는데. 사람이나 음식이나, 음식도 자꾸 먹어 봐야 입맛을 알잖아요. 사람도 얼굴 보고 얘기를 들어 봐야 교류가 되고. 앞으로 좀 자주 나오시고, 다들 보니까 좋지 않아요.
< 충갑 도인 >
사랑이란 것은 제 필생의 화두입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이 안 되는데, 말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 인데, 말씀을 들으니까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 제목이 생각나는데, 용서라는 것은 용서하는 사람이 오히려 편해지는 것 같아요, 용서를 하므로 해서. 제가 집사람과의 관계에서 말씀 드리면, 제가 이런 책을 보고 싶어 집에 가져다 놓으면 집사람이 숨겨요. 심하면 버리기도 하고 숨기거든요. 어떤 책을 좋아하면 집사람이 안보는 데다 가져다 놓고 보는데, 어떤 때는 집사람이 되게 미워요. 낚시 같은 취미 생활도 봐주기도 하는데, 낚시보다 나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못하게 하니까. 어떤 땐 정말 밉단 말이에요. 제가 좋아하는걸 순간순간 방해하고 못하게 하니까 어떤 땐 굉장히 미워요.
그래도 집사람 때문에 제가 사니까 항상 미워할 순 없는데, 요즘 들어서 집사람도 그래도 들은 것이 있으니까 잘해야지 잘해야지, 집사람도 고생하니까 잘해야지 하다가, 최근 얼마 전부터는 집사람을 제가 스승으로 모시기로 하고, 이 세상에 친구도 있고 많은 사람이 있지만 나를 이렇게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냐 해서, ‘당신이 이제 나의 진정한 스승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냥 제 생각이 아니고 진짜로 우러나서 스승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저 분이 진짜 나의 스승이다. 어째든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까 집사람이 예뻐보이는 거예요.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지만 예뻐보이고 잘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고. 그걸 지금 생각해보니까 일종의 용서 같기도 해요. 물론 집사람 입장에서는 저를 가르치려는 것이겠지만, 제 안에서는 응어리진 어떤 부분이 풀리면서 용서를 하면서 그게 한 바퀴 돈 거 같거든요.
결국은 용서라는 것은 사랑으로 들어가는 과정 같아요. 사랑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수도라는 것도 있고 책을 읽는 것도 있고, 그걸 함으로 해서 용서가 진정으로 됐을 때 자기의 꺼풀들이 하나씩 벗겨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자기가 사랑에 더 가까워지고 사랑을 체험하는 것 같아요. 결국은 사랑이라는 것은 ‘태을’이거든요. 사랑도 천차만별이지요. 남녀간의 사랑도 있고 애들에 대한 사랑도 있고. 제가 인도를 여행하면서도 가장 마지막에 제 머리에 남은 것은 사랑이라는 글자였거든요. 제가 삶을 살아가면서 몇 가지 화두가 있는데 그 중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화두 같고. 문제는 실천하는 것인데 실천하는 것도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걸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것을 파야 되는 것 같아요. 아는 것은 말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는 것인데, 진심으로 알았을 때 행동으로 저절로 표현된다고 보거든요.
‘원시반본’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결국 우리가 급살병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주의 순환 흐름에서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것 같아요. 그래서 태을로 돌아가라는 것 역시 사랑으로 돌아가라는 애기와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사랑과 용서라는 것은 결국은 내 자신의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거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5분 안됐죠?
< 종장님 >
이 세상에서 남을 이기려고 하려는 사람이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요. 위대한 사람이 되려면 자기를 이겨라. 내 스스로를 이겨야 위대한 사람이 된다. 다른 사람을 이기는 사람은 하찮은 사람이 되는 거고 자기를 이기는 것은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기를 이기기가 제일 어렵다는 거예요. 사실 누구에게 분노하는 것도 자기에 대한 분노예요. 누구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도 내 마음에 사랑이 넘쳐서 되는 거지 분노가 넘치면 분노가 되잖아요. 나를 미워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퍼주는 거지요. 내가 나를 미워한 연후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내가 나를 사랑한 연후에 다른 사랑을 사랑하게 되고. 어제께 고등학교 동창회를 오랜만에 했는데 보니까 다양하더라고요. 의사도 있고 사업하는 친구도 있고 주역하는 친구도 있고, 이 친구들이 하나같이 얘기하는 게 뭐냐 하면 50대 중반이 되니까 친구들이 편하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바빠서 친구들을 찾을 시간이 없었는데 만나보니까 편하다는 거예요. 왜 편하냐 하니까, 모든 것을 다 받아주고 모든 것을 칭찬해주니까.
제가 이렇게 태을도를 하게 된 것 자체가 가깝게는 우리 집사람을 만나서 저를 잘 포용해 주고. 저 분도 그러하지만 나도 연상의 여인을 모시고 있고.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보다 한 살이 많으시거든요. 저는 부인은 당연히 한 살이 많은 건줄 알았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그래서. 환경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더라고요. 제가 태을도를 했을 때 저를 많이 보듬어준 사람이에요. 상제님 고수부님에 비하면 제가 많이 부끄러운데. 많이 참고 많이 인도해주고 태을도를 있게 한 가장 큰 장본인이에요. 사랑과 용서에 대해서 매듭집시다.
< 종부님 >
결혼하기 전에는 제가 진짜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주변에서 진짜 괜찮다고 해주고. 결혼하고 나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하더라고요. 나중에 ‘언니가 너 변했다. 너 많이 망가졌다.’ 그랬어요. 사랑과 용서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사랑도 그러하고 용서도 그러하고 대상이 필요해요. 우리가 대상 없이 나 혼자서 사랑이라든가 용서라는 단어를 쓸 수가 없거든요. 그러고 보니까 제가 결혼하기 전에는 혼자였기 때문에 ‘혼자’ 괜찮을 수 있었던 거예요. 결혼해서 구체적인 책임져야 할 관계 속에 들어가니까 그걸 못해가지고 헤매면서 파열음이 나기 시작했던 거죠. 불가에서는 세속의 인연을 다 끊고 도의 길을 가라고 하지만 그건 그만큼 (선천에서) 도를 얻기 힘들어서 그랬던 거지만, 상제님께서는 산속에서 오히려 도시로 나오라고 하거든요. 그것이 왜 그러냐, 내가 얼마만큼 바뀌었나 하는 것은 관계 속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고요.
혼자서는 누구나 다 도인이 될 수 있어요. 누구나 다 진리를 얻을 수 있다고요. 근데 산속에서 ‘내가 이 정도면 되었겠지’ 생각되어서 내려와 보면 그게 며칠이 못 간다고요, 세속의 때가 묻기 시작하면. 즉 생활 속에서 부대끼면서 그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어야, 그 속에서 내가 계속 사랑과 용서를 계속 해낼 수 있어야, 그 속에서 내가 계속 진리 속에 살 수 있어야, 진리와 현실을 조화시킬 수 있어야, 진정한 도의 길을 간다고 할 수가 있는 거죠. 저는 결혼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바닥에서부터 아주 조금씩 올라와서 이만큼 올라온 경우인데, 상제님을 만난 것 자체가 너무나 축복이고, 사실 한계가 지어진 인간이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거든요. 저도 교회에서 신앙을 하다 나왔지만 거기서는 하느님을 느낄 수 없었어요. 어릴 때부터 계속 다녔지만 진지하게 하느님에 대해서 느껴지는 것이 없더라고요. 나와서 오다 보니까 상제님을 만난 거예요.
나는 하느님이 싫어서 나왔는데, OOO에 와서 보니까 또 하느님이 계신 거예요. 저는 증산이라는 하느님을 붙들고서 고뇌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건데, 중간에 태을도를 하게 되고 그 속에서 상제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뭐냐 하면 선천의 상극 속에서 돌아가는 죄와 허물, 그 상극의 고리를 너희들이 끊어라. 천지가 그냥 바뀌는 것이 아니고 천지가 바뀜에 있어서 인간이 먼저 바뀌어야 된다는 거죠. 근데 인간이 그냥 바뀔 수는 없는 거고.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바뀔 수 있는 근거를 붙들어야지만 우리가 바뀔 거 아녜요. 왜냐하면 아직은 선천세상 속이니까. 모두가 다 상극적인 관계 속에서 저도 무수한 죄를 지으면서 살아왔는데, 아직도 선천인 이 속에서 내가 후천 상생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상극적인 연결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 근거가 무어냐 하면 바로 ‘태을’이라는 거죠. 모든 생명이 시작된 그 자리,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 할 그 자리, 내 속을 들여다 보면 내 마음 속에도 간직된 그 자리. 껍질을 벗겨 놓고 보면 불가에서 얘기하는 ‘불성’일 거고.
결국은 태을을 붙들고서 상제님께서 모범을 보여주셨다는 거죠. “얼마만큼 용서하면 됩니까.” 하니까 “무조건 용서해라. 용서하고 또 용서해라.” “돌로 치는 자에게 너희들은 돌로써 하지 말고 떡으로써 해라. 악을 악으로써 되풀이 되풀이 하지 마라.” 물론 어느 순간엔가 천지 기운이 상극에서 상생으로 바뀌겠지만 그 속에서 인간들이 미리 준비가 되어야 되고 그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사랑과 용서로서 나 자신을 바꾸어야 되고.
옛날에 속상했던 기억을 잊어버리고 있다가도 딱 떠올려 보면 다시 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풀어내지 않으면 내 속에 항상 갈무리 되어 있는 거죠. 용서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실은 자기를 풀어주는 것 같아요. 아까 이OO도인 얘기처럼 혼자만 살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고수부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남 죽을 때 나 살자는 일이요 남 살 때 나 잘살자는 일’이지만, 혼자만 잘 살아서 무슨 재미가 있겠냐고요. 우리가 세상이라고 할 때는 옆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줘야, 식물도 있고 동물도 있고 바다도 있어줘야 세상인 거지, 내가 꿈꾸었던 좋은 세상을 만들려 하면 결국은 나를 선천 상극세상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야 되고, 나를 해방시키려면 사랑과 용서로 상제님이 보여주신 그 길을 우리가 닦아 나가야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이 ‘아 저렇게 하면 정말 행복해 지겠구나, 좋은 세상이 만들어 지겠구나, 나도 그 길을 같이 걸어가고 싶구나’ 해서 그 분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참여해 나갈 때 후천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과 용서는 궁극적으로는 나를 위한 길이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종장님 >
편지를 다 쓴 다음에 생각나면 추신이라고 쓰잖아요 PS라고. 오늘 추신되는 인물이 오셨는데, 여기 두 분 오셨는데, 본인 소개하시고 사랑과 용서에 대해 한 마디 하시죠.
(중략)
< 충헌 도인 >
급살병의 병목에 사랑과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는데 그것보다는 제가 필이 꽂히면 그 쪽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이런 스타일이다 보니까 이것 저것 많이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요즘 화두처럼 늘 가지고 있는 생각은 제 마음속에서 잡스럽게 생각했던 것들을 스트레스 푸는 것처럼 밖으로 푸는 것이 아니고 안으로 녹여서 잘 갈무리해서, 그것들이 다시 원 자리로 돌아가면서 없어질 수 있도록, 갈무리를 잘해서 인간다운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을 실천하는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 종장님 >
주례 중에 제일 감동적인 주례가, 주례가 딸을 불러내고 아버지를 불러낸 거예요. 그러니까 둘이 얼싸안고 울더라는 거예요. 엉엉 울더라는 거예요. 한참 우니까 주례선생이 “이상으로 제 주례를 마칩니다.” 그렇게 주례를 마쳤대요. 그러니까 기뻐서 울고 즐거워도 울잖아요, 우리가 상제님을 만나서 얼마나 기뻤겠어요. 기뻐서 울잖아요 상제님 만났을 때. 다들 상제님을 만났을 때 안 우셨어요. 기뻐서 울고 나를 변화시켜줘서 울고. 딸이 아버지를 만나서 울듯이 상제님을 만나서 울면서 감동을 받아서 변화되는 거거든요. 울음이 냇물을 이루고 울음 속에서 내가 편해지니까. 그게 이제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다 물이 되어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상제님 고수부님을 모시고 울면 만경창파 바다가 되겠지. 그렇잖아요. 그런 울음의 바다, 진심의 바다, 감동의 바다. 그런 태을도를 만들어 갑시다.
첫댓글 분량이 꽤 많은데 바쁘신 시간속에서 틈을 내 녹취하시느라 애쓰셨습니다. 태을도인들의 말씀들을 통해 서로의 생각들을 더욱 가깝게 느끼고 공감하게 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다들 성심성의껏 귀한 말씀들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 생각들을 주고받으며 마음들이 모아져 태을도라는 큰 흐름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늘 태을도 도무를 도맡아 챙기시는 가운데 또 이렇듯 쉽지 않은 작업을 해주신 충덕님, 정말 감사합니다.
다들 참으로 휼륭하십니다. 제가 얼마나 부족한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충덕도인님 수고 많으셨습니다.감사합니다.
녹취해 올려 주셔 감사합니다. 그 자리에서 들었어도 글로 읽으면 항상 새로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