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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성洛陽城 십리허에.......
박약회 역사문화탐방 동행기
나는이번 여행의 컨셉을 퇴계학의 원류를 찿아서라고 설정했다. 일정에 낙양과 숭양서원이 들어 있어서다. 그래서 이번 박약회博約會 <역사문화탐방>을 따라 나선 내 눈엔 왠지 전생길을 더듬어 보는듯한 낯 익음이 거기 있었다.
그것은 아마 유학과 불교라는 이천여년 이끼낀 내 조선祖先들의 삶이 오버랩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때문에 이번에 들렀던 유방과 항우가 놀던 초한지의 무대라던가 장자방이 숨어 살던 초작焦作의 운대산 이야기 같은것은 생략 해버리고 유불선儒彿仙의 길고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낙양과 숭산嵩山의 높은 자락을 나는 어떤 자尺를 갖고 보았는가를 내게 많은 후의를 베풀어 주셨던 이명순李明順이사와 서수용徐守鏞감사를 비롯 5호차 박약회회원 여러분들과 나누려고 이글을 적는다.
낙양땅 신유학자들
박약회는 퇴계학파의 후예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모임이다. 퇴계는 주자학을 집대성한 학자이고 퇴계이전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많은 인물들이 낙양에서 활동 한것을 발견 할수있다.
낙양은 황하문명의 본거지다. 유교 도교가 여기서 발생 했고 인도에서 불교가 흘러 들어와 거대하고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다.
그 넓은 중원땅의 역사가 낙양에서 시작 되었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것 같다. 전설의 하夏 상商이나 낙양인근 안양으로 옮겨 시작한 은殷과 주周 동한東漢 조위曺魏 서진西晉 북위北魏 수隋 당唐등 여러 나라가 낙양에서 시작했거나 아니면 중간에 옮겨와 낙양을 수도를 삼았던 나라들이다.
유교 도교는 한漢족의 것이다.
공자에서 시작된 원시유교(혹은 선진先秦유학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약 4백여년 지속 하다가 맥이 끊어지고 외래종교인 불교와 중국땅에서 태어난 도교의 위세에 눌려 자취를 감춘다. 자그만치 1천여년 잠을 잔다.
이 잠을 깨운 사람이 낙양 북쪽 맹현孟縣출신 한유韓愈(字 退之 768-825)다. 그는 당말唐末 신유학Neo confucianism의 사상적 선구자 이다. 낙양에는 유학사상과 관련된 인물들이 헤아릴수 없을 만큼 많다. 부필富弼 사마광史馬光 문언박文彦博 여공저呂公著등이 낙양서 활약한 뛰어난 학자들 이다.
공자에 의해 완성된 유학을 원시유학이라 한다면 송나라때 이루어진 학문, 즉 주자학朱子學에 영향을 주었거나 주자와 관련된 학문은 새로운 유학이라 할수있다. 그것은 노자나 불교의 사상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왔던 풍토에서 썩어빠진 관료체제를 비판하고 중국의 자존심을 회복하기위해 유학사상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므로 신유학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신유학에 공헌한 사상가들을 꼽아 본다면 정명도 정이천 형제인 정자程子와 주자가 대표적 인물들이고 그 배후에는 한퇴지韓退之 주렴계周濂溪 소강절邵康節 등이 있다. 그 중에서 한퇴지 소강절 정명도 정이천 형제가 박약회 역사문화탐방 4일째 들린 낙양에서 활약하던 인물들 1
이다.
신유학의 선구자 한퇴지는 그의 저서 원도론原道論에서 유가의 도통설道統說을 주장했다. 이 설은 원래 맹자가 이미 개괄적으로 언급 했지만 한퇴지가 제창한 이후 송명 도학자들이 모두 견지했다. 도道의 정통이 요 순 우왕 탕왕 문왕 무왕 주공으로 내려 갔으며 주공을 거쳐 공자 맹자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외침은 그 당시 유학사상이 무엇인지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민중들에게 커다란 깨우침이 되었다. 또 유학의 도가 참다운 도 라는것을 자각하는 계기를 만들었음은 물론 하나의 사상적 전환을 마련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그의 도통설은 요지부동의 정설이 되어 마침내 송대 신유학을 여는 결정적 단서가 되어 그를 가리켜 ‘근대유학의 비조鼻祖’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 있는것이다.
이 도통설을 우리는 주자의 중용장구中庸章句 서문에서도 볼수 있고 퇴계退溪도 내 조상인 학봉鶴峯에게 병명屛銘이란 형식으로 써 주었다.
신당서에 쓰여진 그의 전기를 보면 진晉부터 수隨나라 까지 도교와 불교가 성행하여 유교는 겨우 명맥만 유지했는데 한퇴지가 온갖 모함과 비웃음에 맞서 싸워 혼란을 바로 잡고 정상으로 돌려놓는 발난반정撥亂反正의 공을 세웠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는 또 그당시 유행하던 위진 이래의 병려문체騈儷文體를 배척하고 한대漢代이전의 고문古文을 회복 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노력에 다행히 구양수歐陽脩등이 호응하여 마침내 고문운동古文運動의 선구자도 될수 있었다.
헌종 14년 법문사의 부처님 진신사리를 꺼내 친견하는 법회가 있었다. 30년마다 행하는 불교의 중요한 행사였지만 헌종은 아예 사리를 궁중으로 가져와 밤낮 사흘동안 부처님 공양에 정성을 쏟았다. 사람마다 다투어 절하고 태평을 빌었다. 비는 사람마다 값진 보물과 재물을 바쳐 가산을 탕진하는 하나의 큰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이때 한퇴지는 분연히 지금까지 유학자들에게 보감처럼 읽혀오는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써서 사상적 투쟁을 감행했다. 이 글은 5백년뒤 정도전이 조선을 설계하며 태조 7년에 쓴 불씨잡변佛氏雜辨 19편의 원본격 이다.
소강절(1011-1077)은 참 특이한 학자다. 일찍이 소문산 백원사로 출가하여 불교를 익히고 불법을 터득할 때 쯤 천하 주유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이지재李之才라는 도사를 만나 선천상수학先天象數學을 배운다. 선천상수학에는 선천상수도라는게 있는데 이는 단전밀부單傳密符다. 단전밀부란 도가에서 도사들이 믿을수 있는 한사람의 제자에게 전해주는 비밀의 진리를 뜻한다. 진단陳搏-마의도사-충방种放-목수穆修-이지재를 거쳐 소강절에 전해진 상수학은 원래 역학에서 나온 학문인데 우주 현상에 있어서 능히 변하는 바와 변하지 않는바의 그이치, 우주의 변화현상에 있어서 그 변화의 원칙, 이러한 현상에 대한 수학적 설명 등을 담고 있다. 나는 서애의 장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의 졸재집 권 8, 19, 27 등에 올려있는 상수학에 대한 서울대학교 금장태교수의 글을 본적이 있는데 엄청 어려워 뭔소리 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러나 소강절의 학문을 이어 받아 연구 한것은 분명히 알수 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상수학이 그리스의 피타고라스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의 학문적 스콥scope은 엄청나다. 복서卜筮 풍수 둔갑술 등 술수학의 창시자로도 추앙 받고 있다. 그러나 소강절의 학문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의 가치를 찿는데 철학적 연구가 집중되어있고 30년 가까이 낙양에 살면서 정명도 정이천의 아버지인 정향程珦,이 2
정二程의 스승인 주렴계 등과 동문수학 한 사이임은 물론 장횡거나 정명도 정이천 형제 등과도 학문적 교류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횡거는 정향의 고종사촌이었다.
우리가 중국유학 사상의 흐름을 볼때 통일된 모습으로 등장한것은 단지 두 번이다. 유학의 창시자라고 할수있는 공자나 맹자시대의 유학은 한 제후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쓰여지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그 국가에 제한된 것이고 한 통일국가의 이념으로 발휘되지는 못했다. 그 이후 한漢나라가 통일을 이룩하고 유학을 장려하였던 것이 처음이요, 다시 천여년이 지나 송宋나라에서 유학을 숭상한 것이 두 번째다. 그러나 송宋의 유학은 불교 도교의 사상을 종합하고 새로운 체계로 재창조 한것 이어서 원시유학을 그대로 이어 받은것은 아니다. 이 재창조 과정에 기여 했던 주렴계 소강절 장횡거 정명도 정이천을 우리는 ‘북송오자北宋五子’라고 부르는데 한국에서는 귀신잡는 소강절, 삼선교 예언가들의 소강절로 전락해 있으니 좀 안타갑다.
정명도(1032-1085) 정이천(1033-1107) 형제는 이천현伊川縣에서 태어나고 아버지 정향과 함께 이천에 묻혀있다. 이천은 우리가 가본 용문석굴과 향산사 사이에 흐르는 강 이름이다. 박약회가 퇴계학파 후예가 주축이 되어 비롯된 단체라면 이번에도 몇년전 공자묘에 성대하게 제사를 지낸것 처럼 정향 삼부자 묘에 참배를 하나 기대했는데 그 소리는 없고 양귀비 연애 이야기인 장한가만 달리는 버스속에서 세차례나 들어야 했기에 속으로는 의아했다. 주렴계 이정二程 주자는 퇴계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도통상의 학자들이기에 해설을 맡아주신 서수용徐守鏞감사를 통해 간략하나마 설명을 기대했기에 하는 소리다.
송나라에서 일어났다고 송학 혹은 이학理學 성리학性理學 도학道學 등으로 부르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이 정명도 정이천 형제다. 엄밀히 말하면 정이천의 학문이 양구산 나예장 이연평등을 거쳐 주자에 전달 되므로 이학理學의 완성을 보았고 3백년뒤 퇴계가 이를 집대성 했다는게 일반적 정설이다.
흔히 송학에는 염낙관민濂洛關閩의 네 개의 학파가 있다고 말하는데, 염학이란 주렴계의 학파를 말한것이고 낙은 이천에서 태어나 낙양을 무대로 활동한 정명도 정이천 형제를 가리킨 말이다. 관학 이란 장횡거가 관중에서 일으킨 학문이며 민학은 복건성의 다른 이름을 상징한 지명으로서 주자의 학문을 말한다. 이들 네학파는 모두 송학의 한 가지이지만 그 지향하는바가 조금씩은 다르다. 그러나 정이천의 학문을 주자가 계승했기에 이를 일러 정주학이라 부르며 송학의 대표로 꼽는다.
우리가 흔히 쓰는 정자란 말은 정명도 정이천 형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형인지 동생인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저술도 이정전서二程全書 등으로 이름 붙여져 있고 또 둘을 정자라고 부르고 있어 헷갈리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정명도는 원돈圓頓을 즐겨 표현한 반면 동생 이천은 분석적이고 실질적 이었다. 송사宋史 도학전道學傳에 보면 주렴계가 남안에서 아전 노릇을 할때 통판군사인 이정의 아버지 정향이 주렴계의 사람됨을 알아 보고 두 아들을 맡겨 공부 시켰다고 나온다.
형 명도가 54살로 죽은뒤 이천은 임금에게 경전을 강의하는 시강侍講이란 직분을 맡게 되고 이때부터 20년간 학문적 엄청난 변모를 한다. 형 명도가 깨쳤던 도체道體의 내용과는 멀어지게되고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학문의 기본으로 삼게 된다.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노선을 개척하기에 이르고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사이 사상의 전환이 이루어 졌다. 이에 따라 한 스승 밑에서 배운 형제의 후학들이 가는길은 확연하게 갈린다. 형 명도는 명대明代 3
심학心學을 여는 조사祖師가 되어 육왕학이 육상산 왕양명으로 이어 지게 된다. 보다 논리적이고 분석적 이었던 동생 이천은 이기의 원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하여 송학의 기초를 열어 주자로 계승 된다.
재미있는것은 이천이 죽고 69년뒤 형에서 내려간 육왕학과 동생에서 내려간 성리학이 쨍하고 쟁투를 벌린다. 1176년 4월 강서성 아호사鵝湖寺에서 육상산과 그의 형 육구령, 여조겸과 주자가 만나 역사적 대논쟁을 벌린다. 이는 794년 유가행 중관학파의 카마라실라Kamalasila와 선禪의 마하연摩하衍이 벌렸던 불교의 쌈예bsam yas의 논쟁과 더불어 중국의 2대 학술 논쟁으로 유명하다. 중국의 학문은 이처럼 이학도 있고 양명학도 있으며 청대에 내려오면 실학도 등장 다양성이 있는데 왜 한국엔 성리학 일변도 였는지 참 애석한 이야기다. 물론 하곡 정제두를 위시한 강화학파江華學派가 있어 근세에 오세창 까지 긴 학맥을 드리우지만 숨도 제대로 못쉰 세월 이었다.
이상이 우리가 들렸던 낙양을 중심으로 퇴계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신유학자들의 발자취다. 퇴계학을 생각하면 낙양에 살지는 않아 이번 우리 여행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주렴계와 주자를 한번 집고 넘어 가는게 순리 같다.
주렴계(1017-1073)는 도교사상을 도학에 도입한 학자다. 지금의 호남성 영도 출신으로 태극도설太極圖說이나 애련설愛蓮說 같은 저술을 남긴것 외에도 제자를 많이 길러 이름을 드날렸다. 그중에 정명도와 정이천은 심학과 이학의 개조開祖였다. 그의 대표적 저작이라고 할수있는 태극도설은 만물생성의 시원부터 인간의 도덕적 당위성 까지를 하나의 정돈된 논리로 정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 인간의 존엄성을 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불교와 노장의 가치관이 지배하던 풍토에서 새로운 유학적 이론으로 매우 높이 살만한 것이다.
송원학안宋元學案이란 책에 보면 주렴계의 태극도는 하상공河上公이 만든 도사들의 수련방법이라고 적혀 있다. 하상공은 한나라 시대 도가 학자이다. 태극이란 말은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에도 나오고 장자의 대종사편大宗師篇에도 나온다. 문제는 주렴계나 소강절이 정통 선진유학에서 벗어나 불가와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아 송학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단지 주렴계는 무극도를 근본으로해서 태극도를 만들었고 소강절은 선천도를 발전시켜 선천상수도를 만들었지만 위로 올라가 계통을 따져보면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알수 있다.
왜 주렴계는 도가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는 태극도설을 신유학의 골간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을까? 그이유는 천여년을 내려오는동안 유학사상에 누구하나 관심을 두지 않았고 유학의 정신은 완전히 잊혀지고 오로지 노장의 도가 사상과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는 불교만이 맹위를 떨쳤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그시대에 있어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유교의 정신을 회복해야하는게 급선무였고 노장과 불교의 이론을 바탕으로해서라도 유가의 이론을 정립할려는 힘든 투쟁이었다는걸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애절한 투쟁의 속내는 120자 밖에 안되는 애련설이란 글에 잘 담겨져 있다. 연은 진흙속에서 나왔으나 진흙에 물들지 않고 속은 욕심없이 텅비어 있으면서도 곧은 모습을하고 아무도 알아주는이 없지만 홀로 향기를 열심히 품어내는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어쩌면 불교와 기독교가 판을 치는 한국풍토 속에서 도덕 재무장을 들고 나선 박약회의 처 지와 애닲게 비슷한지 숙연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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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1130-1200)는 복건성 남평 사람으로 객가客家 출신이다. 주렴계의 태극도설, 소강절의 수數, 장횡거의 기氣 이정 형제의 이理와 기氣를 융합해 공자의 정신을 근대의 유학으로 재조합 집대성한 사람이다. 그의 독서의 양은 엄청나 제자백가의 학문은 물론 불교와 도교의 사상까지 섭렵하고 빌려오기도 하고 또 완벽하게 소화하여 역으로 공격 비판하는 이론적 무기로 사용하기도 했고 새로운 유학의 논리로 쓰기도 했다. 유학경전을 자신의 성리학적 이론에 따라 시대에 맟추어서 재해석하고 자신의 이론을 강론하여 어류語類로 저술했다.
주자는 학문방면 뿐만 아니라 인격수양 면에서도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의 학문방법이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말하고 이는 삼라만상의 이치를 터득 하는것이다. 수양의 방법으로 거경궁리居敬窮理와 주일무적主一無適을 이야기 하는데 이는 당시까지 분명하게 설명할수 없었던 유학적 수양방법을 제시 한 것으로 유학사에서는 이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것이다.
주자가 17살에 진사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는데 33살 때 금나라가 송을 처들어 온다. 주자는 금나라에 적극 대처 할것을 주장 했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조정의 시기를 받아 낙향하게 된다. 고향에 돌아와 연구에 매진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때 함께 학문적 교류를 했던 사람들이 호상학파의 개조로 불리는 장남헌과 금화학파의 여조겸 등이다. 이때 이들이 편찬한 책이 오늘날 우리들이 읽는 근사록近思錄이다.
1179년 효종은 주자에게 남강군南康軍을 맡긴다. 이로서 주자와 백록동서원의 귀중한 인연이 시작 된다. 주자가 3년동안 심혈을 기울려 중창한 백록동서원은 전국 최고의 서원으로 위치를 회복 했음은 물론 이때 제정한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가 조선조 어느 서원이나 향교의 벽을 장식했던 교육의 지표였다. 오륜을 먼저 쓰고 박학지博學之 심문지審問之 신사지愼思之 명변지明辯之 독행지篤行之... 이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공부했을 우리들의 조상을 생각하면, 주자라는 인물이 끼친 영향은 자로 잴수 없을 만큼 깊고 지대하다. 이 교육지표야 말로 인간의 덕성을 바탕으로 하여 참다운 지식을 얻고 참된 지식이라고 하면 여축없이 실천하도록 하여 완전한 하나의 인격체를 길러내려고한 주자의 이상理想이었다.
금나라의 침락으로 불타버리고 초가 몇채남은 백록동서원을 맡아 중수를 마치고 전국 제일의 서원으로 키워 놓았을때 혹심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였다. 주자는 다시 분연히 일어나 무능한 조정을 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주자를 미워하는 무리들이 들고 일어나 주자의 학문은 거짓된 것이라고 공격 당하고 사이비로 몰린다. 이를 위학僞學의 난 또는 경원慶元의 난 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주자를 추종하던 제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주자의 학문을 옹호하고 변호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귀양을 떠나야 했다. 몇년간 지속된 탄압 속에 학문을 완성시킨 주자는 70에 눈을 감는데 이때 장례에 모여들었던 제자는 천여명이 넘는다고 전한다.
사이비로 몰려 쓸쓸한 삶을 마쳐야 했던 주자가 다시 동아시아의 영광으로 떠오르게 된 계기는 한족정부가 아닌 몽골족 정부에 의해서다. 주자 사후 100여년 뒤 원元은 주자의 경전 해석을 공무원선발시험 텍스트로 공포하고 주자학을 전국화한다. 실은 주자의 철학이 심화 발전 된게 아니고 껍데기만 중국땅에 살아남아 청이 망할 때 까지 지속된다. 오히려 그의 사상은 퇴계에 전해져 철학으로서 완벽한 모습으로 재창조 된다.
수당 까지 지속되던 개방체제가 징기스칸의 등장으로 폐쇄사회로 전환 하므로 중국은 아편 5 전쟁이란 치욕을 겪으며 서양에 무릎을 꿇는다. 반대로 중세 폐쇄사회였던 서양은 징기스칸의 침략으로 잠에서 깨어나 개방사회로 간다. 중국의 몰락에 주자학은 결정적 요소였다는게 역사학자들의 해석 이다.
조선조 500백년을 풍미했던 주자학은 지금은 이땅에서 자취가 희미하다. 도성의 출입까지 막았던 불교는 살아남아 이제는 정치까지 쥐고 흔든다. 그렇게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몰아쳤던 양명학陽明學은 버젓이 한국양명학회 까지 갖고있다. 그러나 이땅에 한국주자학회가 있지만 그 활약은 참 미미 하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유림이 현대사조와는 담 쌓고 사는 <불통不通>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때를 맞춘다는 시중時中을 읽지 못하는한 원시유학과 신유학사이 천여년이란 세월이 가로놓여 있듯 한퇴지 같은 인물이 이땅에 다시 나타나기 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할것이다. 박약회는 긴시간을 이어가 다음 불꽃이 훨훨 탈날 까지의 불씨 일것이고.
도덕적 인간가치를 갖고 인간의 내재적 덕성을 개발하고, 선善을 밝히는것, 그것 자체를 통치술로 삼았던 나라는 아마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조선조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 밑바탕에는 퇴계의 사상 같은 심오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인데 현대적으로 재조명하여 그 꺼진 불씨를 다시 살려내는것은 퇴계학 후예들의 소명이고 막중한 과제다.
자, 이제 시선을 우리가 들렸던 정명도 정이천의 무대 숭양서원으로 돌려 보자.
숭양서원嵩陽書院
숭양서원은 당나라 이전에는 숭양사라는 절터이고 당나라때는 도가 사당인 태을관太乙觀이 있던 자리다. 태을관이란 도교의 천제天帝에 제사 지내는 집이었다. 숭산 자락에는 유불선儒彿仙의 유적이 다 모여 있는데 숭양서원은 유교를 대표하는 곳이다. 멀리 산언덕에는 주공周公의 측경대測景臺가 있어 주공이 천체를 관측했다는 주례周禮의 기록을 뒷받침 한다. 비록 현재의 건축물은 원나라 지원 13년에 지은것 이라지만.
흔히 백록동서원 악록서원 수양서원과 함께 숭양서원을 송나라때 4대서원의 하나라고 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숭양서원은 퇴계의 스승의 스승인 정이천이 중흥했고 강학하던곳 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송나라 초년에 태실서원이라고 부르던것을 정자程子 당년에 숭양서원 이라고 개칭하고 송학宋學의 본산으로 삼았다.
청 광서(1875-1908)때 마지막 수리를 했다니 낭랑한 글읽는 소리가 끊힌지 채 백년이 안되는 생각보다는 잘 보존되어 있는 서원이었다. 검은바탕에 황금색으로 쓴 숭양서원이란 글씨도 힘차고.
입구에 들어서면 우람하게 큰 잣나무가 우리를 맞는데 기록은 주나라때부터 있던거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한무제가 그 우뚝한 기상에 감탄하고 장군수라고 이름 붙였다. 나이가 얼마인지 셈하기는 쉽지않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건물들이 수도 없다. 삼현사三賢祠 여택당麗澤堂 관선당觀善堂 보인거輔仁居.... 회랑과 강당 사이 많은 비석이 서있다. 이임보가 짓고 서호가 쓴 커다란 당비唐碑도 보인다. 강당 입구에는 석사자상도 서 있다. 원래 절이었음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석사자상이란 원래 불가에 있는 물건이다. 화엄종에서 우주의 현상과 그 실체를 말할 때 현상을 사事라 하고 그 본질을 이理라고 한다. 그리하여 사법계事法界는 변하는 것이고 이법계理法 6 界는 불변한다고 본다. 거짓과 참, 진여와 현상 이런 것을 상징 하기위해 절에서는 사자상을 놓는다. 강당안에는 공자상을 모셨는데 위에 선성전先聖殿 이라고 써놓았다. 공자상 뒤로는 검은돌에 음각으로 자사 증자 맹자 등 공자의 제자들의 입상이 서있다.
사마광司馬光은 손복孫復의 경학방법을 춘추학을 통하여 직접 계승한 자치통감을 여기서 썼다. 그는 특히 <중용대학광의>란 글로 예기에서 대학을 떼내 별서로 독립 시키는 작업을한 것으로 유명하다. 범중엄도 이곳에서 강학을 했는데 송대 사대부의 명절名節과 천하국가에 대한 책임의식을 고취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악양루기>에서 말한“사대부는 마땅히 천하가 걱정하기 전에 먼저 걱정하고 천하가 즐거워한 이후에 나중에 즐거워해야한다”라는 말은 송대 사대부의 고양된 현실참여의 자세와 사명감을 극명하게 지적한 말로 유명하다.
퇴계학파의 후예로 생을 받고 태어난 나는 이번여행에서 이 숭양서원 만큼 내게 깊은 감회를 준곳도 없다. 언젠가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한번 찿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다음은 불교 유적 몇군데를 돌아 보며 그 속살을 살펴 보자.
백마사白馬寺
백마사는 거기 낙양 동쪽에 거룩하게 서 있었지만 불교가 중국땅에 들어온 원점이란 의미가 제일 크다. 이 절에 대한 설명은 박약회가 제공한 이번여행 해설서에 상세하게 되어 있어 내가 첨가 할말이 별로 없다. 그 해설을 읽어보면 백마사에 내력이나 역사를 잘 알수있다. 다만 나는 백마사에서 시작된 중국 불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중국에 뿌리를 내리는가? 그 백그라운드만 조금 부연 하려고 한다.
불교의 중국 전래에 대해서는 서주西周 목왕穆王 때란 설이 제기된 이래 수많은 학설이 있다. 그 중 후한後漢 명제明帝시기의 전래설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불조통기佛祖統紀>등 여러기록을 종합해 보면 영평永平 10년 (서기 67년) 후한 명제는 꿈속에서 서쪽에 불교가 있음을 알고 18인을 서역에 보냈다. 그들은 가는길에 백마에 불상과 불경을 싣고 동으로 오고있는 승려 두사람과 만난다. 여기서 백마사가 탄생한다. 명제가 기뻐 다음해에 수도 낙양에 백마사를 지어 승려들을 그곳에 거주하게 한다.
고승전高僧傳에 따르면 그후 위진시대에 와서야 불법이 크게 행해졌다니 불교가 중국인들에게 보편적 종교로 받아드려 지는데는 긴 잠복기를 거쳤음을 알수있다. 이 긴 잠복기 끝에 불교가 갑자기 저변을 확대한데는 몇가지 공식적인 설이 있다.
첫째, 전쟁 때문에 사람들이 지쳐 있었다. 분열의 시대를 살고있는 모두에게 불교는 기존의사상과 달리 고통과 죽음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며 구원의 소망을 제공했다. 거기다가 사찰은 세상사에 지친 사람들에게 은둔을 할수있는 새로운 대안 까지 주었다. 특히 여성들에게 매력적 이었다.
두번째, 당시 이민족 정권이 중원 지역에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후한말부터 이민족들은 중원지역으로 많이 이주했다. 한족들의 전통사상과는 달리 불교도 외래 종교였기에 이민족 정권은 배타적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또 불교의 보편 평등적 교리는 인종적 혼합을 통일 시킬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중앙아시아서 건너온 헌신적인 포교승들은 오호십육국의 이민족 군주들에게 신이神異한 것을 보여주므로 자기들이 갖고 있던 무속신앙 보다는 훨신 더 강력한 종교임을 확신 시켰다.
7 세번째는 도교의 영향이다. 전한 말에서 후한 초엽 황제黃帝나 노자老子 즉 황노가 신격화 혹은 신선화되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이시기에 불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던것이다. 후한서 초왕楚王 영전英傳에 보면 황노와 부처를 궁중에서 함께 제사 지냈다고 쓰여있다. 초왕 영은 중국 최초의 불교신자이다. 후한시대의 사람들은 부처를 황제나 노자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닐수 있는 신선으로 수용했고 불교를 도교 혹은 신선방술적인 가르침으로 여겼던 것이다. 다시말해 외래 종교를 자기들이 갖고 있던 사유의 틀에 맞추어 버린것 이다. 우리는 이러한 단계의 불교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부른다. 불교나 도교나 같은거라고 보는거는 소위 말하는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사마천이 쓴 사기의 노자열전에 보면 노자가 주나라가 쇠퇴하는걸 보고 함곡관 밖으로 나가다가 관문지기 윤희尹喜의 요청으로 도덕경 5천여자를 써주고 떠났다고 되어 있는데, 노자는 오랑케胡 지역으로 가 석가가 되어 불교를 개창한 것으로 믿는 것이다.
소림사少林寺
소림사는 본래 무술도장이 아니다.
지금은 중국정권에 의해 기업화하여 영화산업과 시너지 효과로 홍콩증시에 까지 상장 되어 있는 주먹산업의 대표가 되어 있지만.
소림은 중국 선禪의 출발점이다.
소림사는 효문제 19년 (서기 495년) 인도에서 온 발타 스님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다. 몇십년뒤 달마達摩가 여기 등장하므로 선종禪宗의 본향이 되었다. 달마는 석존의 28대 제자격이다. 선의 연원을 따져 올라가면 부처님의 영산법회다. 말없이 부처가 꽃한송이만 처들었는데 아무도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가섭迦葉만 빙그레 웃었다. 이 줄기가 아난阿難을 거쳐 12대 마명馬鳴에 이르고 달마까지 내려간다. 달마가 험한 파도와 싸우며 인도서 중국땅에 발을 디딘건 서기520년경. 이미 중국땅에 불교가 퍼진지 5백여년 세월이 흐른뒤였다. 북쪽엔 북위가 있고 남쪽엔 양梁이 있었다.
달마가 양무제梁武帝를 만난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전설이다. 수많은 절을 짓고 보시를한 양무제는 어깨가 으쓱하여 “내 공덕이 얼마인가?” 라고 자신있게 물었다. 달마의 대답은 “무공덕無功德” 절대 권력자에 맞아죽으려고 참으로 환장한 소리였다. 화가난 양무제는 또 물었다. “최상의 성스런 진리는 무었인가? 달마가 받아쳤다 ”확연무성廓然無聖“ 모든게 텅 비어 있으니 성스러운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원래 산스크리스트어 Sunya는 공空이라고 번역 하기보다는 확廓이라고 번역해야 옳다고 한다. 확이란 텅빈 충만을 말한다. 이 에피소드는 달마의 새로운 불교에 대한 선언 이었다.
소림사를 찿아든 달마는 오유봉五乳峰 석굴에서 9년간 벽만 바라보고 수행을 한다. 여기서 선禪의 맥은 혜가 승찬 도신 홍인을 거쳐 혜능에 이른다.
소림사에서 당태종 이세민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마당 한가운데 당태종사소림사주교비唐太宗賜少林寺主敎碑란 여덟자 넘는 석비가 우뚝 서있다. 초서로 쓰여진 비문은 풍상을 이기지 못해 많이 마모되었지만 세민世民 이란 이름자만은 또렷하다. 이세민은 원래 술주정꾼이요 주먹패 출신이었다. 임금이 된 뒤에도 황노의 정치를 편다며 밤낮을 술로 보낸 위인이다. 수나라말 그가 왕세충에게 잡혀 있을때 구해준게 이소림사 열세 스님이다. 그중에 한명에게 병부상서 자리를 줄만큼 살겹고 이들을 황실의 군대로 삼는 조칙을 내리기도 했다.승병 5백명을 양성케 하고 땅도 1천묘를 하사 했다. 그중에 담종曇宗이란 스님과 얽힌 야사는 8 불문에 길이남는 에피소드로 전해지고 있다.
내가 앞에 무술도장이 아니라고 하는 소리는 하나의 어깃장이다. 벌써 달마가 벽관 9년 할때부터 소림사엔 저려오는 팔다리를 펴기위해서 동물들의 자세를 응용했고 대웅보전에는 무 술의 원조라는 지나로의 상까지 세워져 있다.
뒷뜰 대나무 숲에 버려진 비하나가 서있다. 조동종구류백가일원비曺洞宗九流百家一源碑. 그렇다면 소림사와 조동종은 어떤 관계일까? 양개良价와 조산본적曹山本寂이 여기 주석했단 말인가?
佛敎見性 道敎保命 儒敎明倫 綱常是正 .......要在圓融 一以貫之 三敎一體 九流一源 百家一理 萬法一門 불교는 성을 깨닫고자 하고 도교는 명을 보전하고자 하며 유교는 윤리를 밝히고자 하니 강상을 올바로 함이요......요점은 원륭에 있으며 진리는 하나로 꿰뚫리나니 유교 도교 불교는 하나요 아홉가지 가르침은 하나의 근원인 것이니 모든 가르침은 하나의 이치요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하는 문이니라.
모든 진리를 존중하고 자기만을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는 위대한 가르침이 아닌가. 주먹질이나 하고 권력의 개가 되어 싸움질이나 하는 소림사인줄 알았더니 백가 일원비百家 一源碑가 여기 서 있을줄이야.
정문에서 300여 미터 떨어져 수당 때부터 조성된 탑림은 장관이었다. 사실 이번 문화탐방에서 수많은 짝퉁들만 봐 왔는데 이 탑림이야말로 용문석굴과 철탑 등 몇 안되는 진짜였다. 울창하게 서있는 것만 해도 282기, 여기에 아직도 더 세우고 있다니 중국땅에서 불교는 죽은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용문석굴龍門石窟
참 기가 차다.
저 수많은 조각들을 누가 왜 무엇을 위해 새겼을까?
사실 이 거대한 문화유산이 만들어진 연유를 알고 보면 부처님의 뜻하고 아무 상관없는 부패와 권력의 탐욕에 찌든 중생들의 끝없는 욕심만 보인다.
용문석굴은 문명태후의 치마폭이 두려워 야반도주 하다시피 대동大同을 떠났던 효문제가 뚫기 시작한다. 대동 운강석굴의 속편이다. 운강석굴은 폐불廢佛사태를 겪은 불교계가 살아 남기위해 설마 제조상 얼굴이야 부시랴 하고 오랑케 정권의 시조부터 다섯왕의 얼굴을 새겨놓은 치욕과 아부의 결과물이다. 즉 북위의 건국자인 태조 도무제로부터 태종 명원제 세조 태무제 공종 경목제를 거쳐 당시의 왕인 고종 문성제 까지를 당금當今의 여래如來라며 만들어 놓은 것이다. 황제즉당금여래皇帝卽當今如來, 왕은 지금 이땅에 와 있는 부처란 뜻이다.
흔히들 북조불교를 국가불교라 하고 남조불교를 귀족불교라 한다. 북조 북위때 불교는 왕권의 개가 되어 법과法果대사 시절 불교수장에게 도인통道人統이란 정부관직까지 주었다. 서기 460년 도인통으로 있던 사현師賢이 입멸하자 직제명칭 까지 불교식인 사문통沙門統이라고 바꾸고 담요曇曜가 석굴 개착을 주도한다. 담요는 황제의 허락을 얻어 승기호僧祇戶와 불도호佛圖戶란 기구까지 설치한다. 승기호는 정복민征服民을 관리하는 기구로 1인당 년에 60석의 곡식을 거둬들여 석굴 만드는 경비로 썼고 불도호란 죄수출신 노예를 관리하는 기구로 석굴을 뚫는 노동력의 원천이었다.
북위北魏는 선비족鮮卑族 정권이기에 한족漢族의 제도나 문화를 무조건 숭상한다. 그 가운데 이미 한족은 버린 자귀모사子貴母死란 제도가 있다. 아들이 임금이 되면 그를 낳은 어미 9 를 무조건 죽여버리는 제도다. 조선조 태종이 세종의 외가 민씨네를 가차없이 죽여버린게 다 여기서 유래한 방식이랄까. 이것 때문에 북위정권은 여러 곡절을 겪는다. 왕이 자기가 낳은 핏줄이 아니기에 왕후는 환관들과 결탁하여 권력을 휘두르고 왕의 자리를 이어받은 어린임금은 왕후에게 안당할려고 몸부림 친다. 이것 때문에 한화漢化개혁의 주도자 효문제가 조모 문명태후를 피해 낙양으로 도망갔다. 석굴이 대동에만 있을텐데 낙양에도 생긴 이유이다. 효문제는 능도 대동과 낙양 두군데나 있다.
이런 사연을 갖고 시작된 용문석굴은 북위 동위 서위 북제 수 당을 거치며 400여년간 만들어 졌다. 석굴만 2,345개 비석은 2,800여개 불탑이 40여채 불상만 100,000여개 북위때것이 30% 수당시대 것이 과반이 넘는 60% 나머지가 10%라고 한다. 위대한 문화유산 이라지만 생로병사란 인간 고뇌의 실상을 보고 왕자의 지위도 버리고 출가한 싣달타의 정신과는 멀어도 한참 먼 인간 탐욕의 결과물 이다. 타락한 불교가 만들어낸 작품을 본답시고 나도 24시간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여기와 섰으니 쓴웃음만 난다.
석굴이란 원래 인도에서 맹수를 피해 수도 하기위해 혹은 몬슨이나 찌는듯한 더위를 피해 승려들이 안거하기위해 생겨난 것인데 형태에는 탑묘굴塔廟窟caitya과 승방굴僧房窟vihara 두가지 형태가 있다. 탑묘굴은 대게 말발굽 형태로 탑이 있고 예배당으로 쓰인다. 승방굴은 중앙에 홀이 있고 작은방이 곁드려 있는 수도원 형식이다.
중국에서 석굴 개착은 위진남북조에 시작해서 당나라 중엽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날 때 까지 지속 된다. 불교도들이 기를 쓰고 석굴을 만든것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구절이 근거라고 한다. 만당晩唐에서 송나라 말까지 근 400년간 석굴을 뚫지 않은 이유는 북방에서 전쟁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강건너 향산사香山寺 앞에서 처다본 용문석굴에서는 봉선사 노사나불이 단연 압권이다. 권력에 미쳐 아들 까지 죽인 중국 역사상 단하나 뿐인 여황제 측천무후가 모델 이라고 전해진다. 측천은 화장료宮脂粉錢로 2만관을 기진寄進했다고 한다. 기진이란 복을 빌기위해 돈을 내는것을 뜻하고 석공들은 감격하여 그녀의 얼굴과 더 비슷하게 더예쁘게 조각할려고 심혈을 기우렸단다. 측천은 노사나불로 자칭하고 그녀의 이름 조照자도 명明과 월月과 공空을 합친 새로운 측천문자를 창안해서 썼다. 시인 묵객을 거느리고 건너편 향산사에 올라 자주 주연을 베풀고 떠오르는 찬란한 아침 햋빛을 받은 노사나불을 처다보며 기뻐 했다니 아 권력의 달콤 함이여 탐욕의 화신이여 저 세상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지 묻고 싶다.
이 용문석굴에는 전부 권력자의 탐욕만이 깔려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의 난맥상에 신음하던 서민의 염원도 작은 불상으로 새겨져 있다. 더구나 1,360여개가 남겨진 조상명彫像銘은 몇자에서부터 수천자 까지 서민의 구구절절한 바람도 기록으로 전한다. 그당시 낙양에 절만 500여개가 넘었다니 불교가 얼마나 저변확대가 되어 있는가를 웅변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향산사 앞길에 서서 강건너 중국인들이 남긴 1.5Km나 되는 1,500여년 전의 유적을 처다보며 산다는게 무엇인지 종교란 어떤것인지 되뇌이고 있었다.
Mar 29 2008
金 昌鉉
genekim39@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