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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813호 [159.8]
해월신사 순도 120주년 특집
“먹던 밥 새 밥에 섞지 마라”
- 해월신사의 생애(8)
편집실
해월신사 순도 120주년 특집으로
해월신사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올해는 삼암 표영삼 종법사 환원 10주기 되는 해로
삼암 종법사가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해월신사의 발자취재구성하였다. /편집실
* 상주 화서면 앞재 마을의 뒷산인 원통봉.
해월신사는 앞재마을에 은신하며
위생준칙을 마련하고 청결을 강조하여,
“동학하면 괴질도 피해간다”는 일화를 남겼고,
‘최보따리’라는 별명도 이곳에서 생겼다.
신사는 포덕 25년(1884) 6월에
전라도 익산 사자암으로 피신하여
4개월간 머물며 호남 포덕의 기반을 다지고
10월에는
상주 화서면 봉촌리 앞재에 초가 3칸을 매입하여
그 곳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손병희, 박인호, 송보여를 대동하고
공주 가섭사로 가서 21일간 기도했다.
가섭사에서 손병희는 일화 하나를 남겼다.
신사는 암자에 도착하자
의암에게 솥을 걸게 하였다.
의암은 스승이 시키는 대로
진흙을 파다 찬물에 이겨 솥을 걸었다.
제대로 걸었으나
신사는 다시 뜯어내고 고쳐 걸라고 하였다.
그러기를 수차례 되풀이하였다.
의암은 이것이 바로 시험이요 수련이라 생각하고
시키는 대로 뜯었다 걸었다하였다.
신사는 드디어 손병희에게
사람됨이 그쯤 되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신사는 10월 24일 기도를 마치는 날
육임제를 구상하고 강서를 받았다.
이때 받은 강서는
동경대전 팔절의 핵심용어인
‘성경외심명덕명도誠敬畏心明德命道’
8자를 해설한 팔절해의,
십이 간지를 원용하여
다가오는 십년의 일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강서 등이었다.
* 明者 暗之變也 日之明兮人見 道之明兮獨知
德者 盡誠盡敬 行吾之道 人之所歸 德之所在
命者 運之配也 天之命兮 莫致 人之命兮 難違
道者 保若赤子 大慈大悲 修煉成道 一以貫之
誠者 心之主 事之體 修心行事 非誠無成
敬者 道之主 身之用 修道行身 唯敬從事
畏者 人之所戒 天威神目 無處不臨
心者 虛靈之器 禍福之源 公私之間 得失之道
(此亦降釋八節 勿爲泛過 益勉踐履修煉 若何若何)
[천도교경전400쪽]
* 哀此世人之無知兮 顧將鳥獸而論之
鷄鳴而夜分兮 犬吠而人歸
山猪之爭葛兮 倉鼠而得所
齊牛之奔燕兮 楚虎而臨吳
中山兎之管城兮 沛澤龍之漢水
五蛇之無代兮 九馬而當路
[천도교경전 402쪽]
이때 신사는
‘봉사상제일심편조화정만사지
奉事上帝一片心造化定萬事知’라는
주문을 새롭게 지었다.
시천주의 ‘천주天主’라는 문구로 해서
동학을 서학으로 오해하거나
이로 인하여 관의 지목이 심하여
지목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새 주문은 널리 통용되지는 않았다.
‘최 보따리’라는 별명을 얻다
가섭사에서 하산한 신사는
상주 화서면 봉촌리 앞재 본댁으로 가지 않고
전에 살던 단양 장정리에서
10월 28일의 스승님 탄신기념제를 올렸다.
이때 각 지역의 두령 급 82인 외에
많은 도인들이 참례하여
갑신정변 후
흉흉한 민심과 정세를 토로하였다.
갑신정변**의 여파는
이듬해가 되어도 여전히 가라앉지 않아
포덕 26년(1885) 5월에 이르러
신사는 지목을 피해 보은군 장내리로 은신했다.
**김옥균 등 개화파가
1884년 10월 17일(양12.4) 일으킨 정변.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천하로 끝났다.
정변실패 후 조선 정부는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
거류민이 희생된 데에 대하여
일본에 배상금 10여만 원 지불,
일본 공사관 수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조약 체결. 또 청일 양국은
조선에서의 양국 군대의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 이 일어나
청ㆍ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때에는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조약을 체결.
텐진조약은
1894년 동학혁명 때 청나라가 조선에 파병하자
일본도 군대를 파병하여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6월에 체포령이 내려
강시원, 이경교, 김성집 등이 체포(8월 석방)되자,
신사는 보은 장내리를 떠나
공주 마곡사로 피신했다가 장한주와 함께
경상도 영천군 화계동으로 피신하였다.
산막에서 약 1개월을 숨어 지내다가
서인주, 황하일과 상의하여
9월 15일 경에
상주 화서면 봉촌리 앞재로 돌아왔다.
보은 장내리에 있던 가산은
관에 몰수되어 옷 한 벌도 챙기지 못한 채
피신했기 때문에 11월이 되도록
여름옷으로 추위에 떨어야 했다.
이때 이치흥이 무명 7필을 가져와
겨울옷을 지어입고 추위를 면할 수 있었다.
이사 올 때도 이사 갈 때도
보따리만 갖고 오고가기를 거듭하자
동리 사람들은 신사를
‘최보따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신사께서는 길을 떠날 때면
반드시 보따리를 재차 살펴보시고 난 후 쌌으며
또 봇짐 위에는 짚신 한 켤레가 있었다.
그리고 어디를 가나 그 봇짐은
딴 사람에게는 지우는 일이 없이
신사 자신이 지고 다녔고 심지어는 잘 때에도
한쪽 어깨는 봇짐 끈을 묶은 채로
베고 자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고 한다.
한울님은 쉬지 않는다
신사께서는 언제 어디를 가든지
주문을 외우는 것은 물론이요
평시에도 낮잠을 자거나
또는 하는 일없이
무료하게 그저 있는 법이 없고
반드시 짚신을 삼든가 또는 노끈을 꼬았는데
만약 노끈을 꼬다가 일감이 다하면
꼬았던 노끈을 다시 풀어서 꼬았다.
제자들이 좀 편히 쉬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면,
신사는 한울님도 쉬지 않은데
사람이 한울님이 주는 녹을 먹으면서
부지런하지 않는 것은
한울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니라 할 뿐이었다.
그리고 관의 지목을 피하여
한 달 혹은 석 달이 멀다하고 이사를 하는데
새로 든 집에 가서는
반드시 나무를 심고 멍석을 내었다.
집안사람과 제자들이
내일이라도 어느 곳으로 피난할지 알 수 없은데
그것은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신사께서 대답하기를
“이 집에 오는 사람이 과실을 먹고
이 물건을 쓴들 무슨 안 될 일이 있겠느냐.
만약 세상사람이 다 나와 같으면
이사 다닐 때에 가구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을 것이니라.” 하였다.
또 신사는 옷에 대해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몸을 위한 것이라며
평상시에는 주로 무명옷을 입었으며
혹 어떤 사람이 명주옷을 갖다 드리면
거죽과 속을 바꾸어 입었다.
도인 중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나만 어찌 편안하게 자겠느냐” 하면서
밤마다 이불을 덮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었는데 다시 말하면
신사는 그 성벽이 근검하고 주밀하여
내 것이 없으며 인자하고 관후하여
결함이 없었으므로
여러 제자들이 누구나 한번 신사를 만나본 뒤에는
스스로 그 성정에 감화를 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동학하면 괴질도 비껴간다!
포덕 27년(1886) 신사는
이른 봄부터 농사일에 몰두하다가
4월부터 사방에서 찾아오는 이들로 분주하였다.
이때 위생준칙을 마련하여
금년에는 악질이 유행할 것이니
위생에 각별히 힘쓰라고 당부했다.
“묵은 밥을 새 밥에 섞지 마라.
묵은 음식은 다시 끓여 먹어라.
침을 아무데나 뱉지 말라.
만약 길이거든 땅에 묻고 가라.
대변을 본 뒤에 노변이거든 땅에 묻고 가라.
흐린 물을 아무데나 버리지 말라.
집안을 하루 두 번씩 청결히 닦아라.”
6월 하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괴질(콜레라)는
많은 인명을 상하게 하고
추석이 지나서야 가라앉았다.
도인들은 위생준칙을 지킨 보람이 있어
신사께서 사시는 마을 40여 호에는
병에 걸린 자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충경 경기 전라 경상 등 원근 각지에서 소문을 듣고
신사를 찾아 도에 드는 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해(포덕27년, 1886) 유행한 괴질(콜레라)은
한국 근대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의 하나로
서양인들이 목격해 생생히 기록했다.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알렌(1858~1932)은
이해 봄, 조선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에게
콜레라 전염에 대비해
돼지고기와 수박을 먹지 말고 물을 끓여 마시며
야채나 과일을 항상 소금물로 씻어 먹고
집 주변의 마당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다량의 소독제와 항생제를 준비할 것을 주문했다.
정동에 거주하고 있던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알렌의 충고를 심각히 받아들였고
최악의 상태에 대비했다.
그러나 당시 서양인들이 고용한 조선인들은
알렌의 경고를 무시해 음식을 날 것으로 먹고
야채나 과일들도 씻지 않고 그대로 먹곤 하여
콜레라에 감염되어 목숨을 잃었다.
알렌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서울 사대문 안에 거주하는 사람의 수는
대략 15만 명으로
콜레라가 유행한 6주 동안
6천 152명에서 7천명이 목숨을 잃었고,
2명의 일본인과 중국인을 제외한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당시 한 명도 콜레라로 목숨을 잃지 않았다.
미국공사 윌리암 파커는
전염병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서울에서만
거의 1만 2천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시골에서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보고했다.
* 고양이 부적/ 사진출처:
『조선기행』(샤를 바라, 눈빛출판) :
괴질(콜레라)은 아프기가 독하기로 악명 높았다.
그 아픔이 마치 쥐가
몸속 곳곳을 물고 다닌다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쥐통’, ‘쥐병’이라 불렀다.
쥐의 천적인 고양이를 활용한 치료법으로,
대문과 방에 고양이 부적 붙이기,
집안에 고양이 기르기, 고양이수염 태워 먹이기,
경련이 생긴 곳에 고양이 가죽 문지르기 등도
치료법으로 등장했다.
신사의 위생준칙은
대신사의 제인질병의 가르침을 따른 것으로,
동학의 이러한 전통은 의암성사에게도 이어져
‘위생보호장(1901년)’과
‘준비시대(1906년)’에 반영된다.
‘위생보호장’에는
병을 예방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양법으로
수심, 정기, 음식조절, 거처청결 네 가지를 강조했고,
‘준비시대’에는
전염병을 막기 위한 청결법, 변소의 청결관리,
하수의 청결관리, 전염병 유행 때의 교통차단과 검역,
전염환자 및 환가의 소독과 청결 등
근대적 위생법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무렵 보은의 임규호 포 내의
차접주 권병덕의 포덕으로 진주 등
경상도 서남부지역에 까지 동학이 퍼져나갔다.
육임소와 보은 장내리
포덕 28년(1887) 1월 1일 신사께서는
춘추로 2회씩 정기적으로
49일 기도를 하라는 공문을 발하고
다음과 같은 강시를 얻었다.
무극대로작심성無極大道作心誠
원통봉하우통통圓通峰下又通通
작심으로 무극대도에 정성드리니 /
원통봉 아래서 또다시 통하고 통하는도다
[천도교경전406쪽]
1월 15일에는
둘째 부인 안동 김씨 사모님의 소생인
아들 덕기(솔봉)가 13세의 나이로
음성 율봉에 있는
음선장**의 둘째 딸과 혼례를 치렀다.
음선장의 첫째 딸은
서인주**와 결혼했으며
덕기와 동서지간이 됐다.
**음선장(陰善長). 서인주(장옥)의 장인으로
1884년 입도했다. 청주에서 동학혁명에 참여,
7월 피신하였다 관군에 피체되어
태100대에 종신징역형을 받았다.
**서인주徐仁周, 1852~1900).
일명 장옥(璋玉), 일해(一海). 수원출신으로
30여 년간 불도를 닦다
1883년경 인제에서 김연국 등과 동학에 들어
의식 제정에 기여했다.
1889년 서울에서 피체되어
금갑도에 유배되었으나
해월신사는 김연국에게 750냥을 마련하게 하여
1890년 서인주를 석방시켰다.
교조신원운동과 동학혁명 시기
전봉준 등과 강경파를 형성하였고,
갑오년 이후
월악산 등지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1900년 2월 20일 손사문(천민)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2월 부인 김씨 사모님이 환원하여
전성촌 뒷산인 원통봉 아래에 장례를 지냈다.**
**김씨 사모 묘소의 위치는
전성 마을 안쪽(동남방) 골짜기에 있는
저수지 건너편 물가에 접해 있었다.
지금은 논으로 변했으나
이전에는 밤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고
뒤쪽은 밋밋한 능선이었으나 논으로 개간하면서
평평하게 만들었으며 밤나무도 베어버렸다.
1979년에 손자 검암 최익환이 화장하여
지금은 묘소도 없으며 표지도 남기지 않았다.
회갑을 맞은 신사는
조촐하게 제자들이 마련해준 잔치를 마치고,
서인주를 정선으로 보내 기도를 준비하게 했다.
4월 초에 정선 갈래사에 가서 49일 기도를 마친 후,
6월 중순경 가섭사에서 구상했던 육임소를
보은 장내리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건물을 새로 짓고 대도소를 설치하니
이로써 보은 장내리에 명실상부한
동학교단의 본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각지 도인들이 줄을 이어 찾아왔다.
특히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도세가 늘어나자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육임소는
동학 최초의 자문기구 겸 사무기구이기도 했다.
육임제는 교敎와 집執과 정正 즉
교장과 교수, 도집과 집강, 대정과 중정
세 직급으로 구분하였다.
교는 교화를, 집은 업무와 규율을,
정은 직언과 건의를 책임지게 했다.
육임소가 설치되자 도인들은 육임소를 거쳐
신사를 면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각지 두목들은 월 1회씩
체계적인 교육을 받도록 했으며
장석丈席**의 일체 살림은 도집이 맡았다고 한다.
신사는 이해 가을
익산군 남이면 남참의리 남계천, 김정운,
김집중의 집에 가서 많은 포덕을 했다.
**장석은 학문과 덕망이 높은 사람, 스승을 뜻하며
법사法師, 법헌法軒 등으로도 표현하였다.
장석, 법헌 등은
처음에는 해월신사가 거주하는 곳을 뜻하다가,
신사를 호칭하는 말이 되었다.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골에 가면
해월신사의 별명을 최버퍼리라 했는데,
법헌을 버퍼리로 잘못 듣고
최버퍼리라 하였다.(표영삼)
무자戊子년의 흉년과 유무상자
포덕 29년(1888) 1월 전주를 순회하다가
삼례 이몽로의 집에 들러 포덕하였다.
신사께서 순회한 후
호남지역의 동학은 자리를 잡아갔다.
신사는 다시 보은으로 돌아가 천식으로 고생하는
손씨 부인의 간호에 성심을 다하였다.
2월 하순에 김씨 사모님의 3년 상을 치루고 나자
여러 제자들이 재취를 권하여
의암 성사의 누이동생 밀양 손씨와 성혼하였다.
첫째 부인 손씨가 병을 앓아
신사를 모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신사와 성사는
처남 매부라는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3월 초, 강원도 인제접은 도인들이 늘어나자
김병내** 등이 발의하여 경진판 동경대전과
신사판 용담유사를 100여부 간행했다.
** 김병내(金秉鼐=字는 光文)는
인제 남면 무의매리 사람으로
대신사의 둘째 아들 세청의 처당숙이다.
인제 도인들이 힘을 모아 발행한 이 경전은
‘무자戊子판’으로,
목각활자가 아닌 수작업을 한 것으로
<논학문> 중
‘금불문고불문지사今不聞古不聞之事’
한 구절이 탈행되었고,
인쇄본이 천도교중앙총부에 보관되어 있다.
이해(1888년, 무자년) 삼남 일대에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할 방도가 없게 되자
전국 각지에서 소요가 일어나고,
이듬해(1889년) 5월과 9월에는 방곡령을 내려
일본으로 수출되던 곡물 유출을 금지하였다.
가뭄이 극심했던 전남 장흥의 경우
농민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려는 고육지책으로
자식을 팔거나 조세를 낼 형편이 못되자
선비 이방언은
장흥부사를 찾아가 감세를 진정하였고 거부되자
전라감영을 찾아가 담판하여
세금을 감면받기도 하였다.
이방언은 호방한 성격과 덕망으로
주변에는 항시 많은 사람이 따랐고
2년 후 장흥에 동학이 전파될 때
양심적 선비의 입장에서 동학에 합류하게 된다.
9월부터 기근에 시달리는 이들이
노상을 배회하기 시작하였다.
신사는 흉년을 면하는 것은
“사람사람이 단결하고 협력하면 가능하다”**는
교훈과 함께 도인들 간에
유무상자有無相資하도록 통문을 띄웠다.
**남계천의 질문에 대한
해월신사의 답변
(천도교경전 386쪽.「해월신사법설」‘삼재’)
“우리 도인들은 다 같은 연원에 몸담고 있는
마치 형제처럼 친한 사이입니다.
형이 굶주리는데 동생만 배부르면 되겠습니까.
아우는 따뜻한데
형은 추위에 떨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무릇 사람이 한가해지기를 기다려 책을 읽는다면
평생토록 책 읽을 날이 없을 것이며,
여유가 생긴 후에 사람을 구제한다면
평생토록 사람을 구제할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해당 접중에 조금이라도 여유 있는 사람은
각각 약간의 성의를 내어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능력이 있는데도
가난한 도인을 구제하지 않거나,
가난한 도인이 감히
도중의 구제에 의지하여 날뛰고 남용한다면,
한울님의 위엄과
천신의 눈이 임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다행히 남에게 먹을 것을 주는 자는
삼가지 않을 수 없고
남에게 얻어먹는 자 또한
한울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을 두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경계하고 경계하십시오.”
흉년과 인심이 흉흉해질수록
동학에 들어오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전라북도 지역과 충청도 지역에서는
매일 같이 입도자가 늘어 갔다.
대체로 익산, 전주, 금구, 만경, 고부, 임실,
순창, 진산, 고산 등지에서 입도자가 많았다.
보은 장내리 육임소에는
동학도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신정절목
1889년 기축(己丑)년은
동학 창도 30년이 되는 해(포덕 30년)로
동학의 세력이
충청 호남으로 비약적으로 세력을 확대하였고,
그만큼 동학에 대한 탄압도 가중되었다.
동학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조직화와 체계화의 필요성이 생기면서,
3월 신사는 행동지침으로
신정절목新定節目을 만들었다.
1, 법사法師 어른과 자리할 때는
감히 위아래 없이 섞어 앉아서는 안 된다.
1, 어른과 자리할 때는
장로와 법사 어른을 한결같이 존경해야 한다.
1, 법헌에서 육임 강도가 있을 때
교敎․집執․정正 3인은 15일마다 교대한다.
1, 육임이 만약 사리가 밝지 못하면 즉시 바꾸도록 한다.
1, 도 닦음에 만일 부정이 있으면
해당 접주와 범한 사람을 같이 벌한다.
1, 충효에 남보다 뛰어나면 특별히 상을 준다.
벌은 법헌이 불러 육임을 면책하고
상은 법헌이 불러 경중에 따라 돈을 준다.
1, 가족 간의 사이가 좋고 가난한 것을 구제하면
규칙에 따라 충효한 사람에게 상을 준다.
1, 대소 예절의 명불명은 인의론에 소상히 싣도록 하며
종당에는 성인이 될 날을 어른에게 보이도록 한다.
그 동안 몇 달은
정심과 정신으로 한울님에게 죄 짓지 말 것이며
이는 곧 도인으로서 명을 어겨서는 안된다.
1, 법사 어른에서 육임과 접주에 이르기까지
각기 표준을 두어야 한다.
1, 춘추로 향례를 봉행할 때 비록 육임이라도
시임이 아니면 도인들과 동렬로 표준하며
이하 6개조항은 도집이 주관한다.
1, 도중의 공용은 일일이 총찰한다.
1, 법사 어른 댁의 모든 사무도 역시 총찰한다.
1, 혹시 빈궁한 벗이 있으면 형편에 따라 구급한다.
1, 각처에서 오는 물품은
다과를 막론하고 명백히 기록하고 쓰도록 한다.
1, 장석에서 장로에게 주는 세찬은
매년 8월 초10일과 12월 20일에
엽전 5냥씩을 어김 없이 봉속한다.
1, 포덕을 엄금하여 지목이 없도록 한다.
신정절목 마지막의
‘포덕을 엄금하여 지목을 없게 하라’는 것은
연초부터 동학 활동이 활발했던 강원도
정선, 인제, 통천에서 민란 발생이 발생하여
주동자는 효수되고 많은 가담자들은 유배되고,
자연히 관에서는 동학을 지목하게 된데 따른 조처였다.
*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 동학기념비 ‘동학의 빛’
: 강원도 고성 지역에 동학이 전파된 것은
포덕 28년(1887)으로 접주 김명숙을 중심으로
함희연, 함의용, 함영인, 김응숙 등이 활동했다.
1894년 9월 총동원령 때 동학군은
양양, 거진 지역까지 궐기했고,
강릉관아 점거 후 패하여 추격을 피해
왕곡마을까지 왔다가 가지고 있던 돈을
함일순 집에 숨겨두고
뒷날 찾으러 오겠다 하고 사라졌다.
이들 동학군은 대부분 체포되어 죽었고
함씨 일가에서는 이 돈으로 부자가 됐다고 한다.
함씨 집안에서는 동학군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1997년 ‘동학의 빛 왕곡마을’ 기념비를 건립할 때
150여 평의 부지를 제공했다.
(https://www.kci.go.kr)
신사는 7월에 보은 장내리 육임소를 파하고
괴산 신양동**으로 피신하였고
10월에는
서인주 등이 서울에서 체포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괴산에는 신양동이 없으며,
괴산군 소수면 신항(新項)마을로 추정된다.
이 마을 사람들이 신항을 새항이라고 불렀는데
새항을 새양으로 듣고 한자로 표기하면서
신양으로 기록한 듯하다.(표영삼)
신사는 다시 아들 덕기와 김연국 등을 데리고
음성, 인제로 피신했다가 안심할 수 없어
태백산맥을 넘어 간성 왕곡 김하도의 집에 은신하였다.
김하도의 집 뒤에 방 하나를 얻어
삼순구식(三旬九食, 매우 어렵게 지냈다는 뜻)으로
겨울을 보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