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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서 본 상윳따, 꼬살라(Kosala) 4-2
제 1 장 첫 번째 품
좋아하는 경(Piya sutta) 2
세존께서 꼬살라 왕이 하신 말 그대로 인용해서 답변을 하신 뒤에 마지막으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알면 자신을 악행에 얽매이게 하지마라. 악행을 하는 사람은 행복을 쉽게 얻지 못하네. 죽음의 신에게 붙들려 목숨을 버려야하는 사람에게 무엇이 그에게 자신의 것이며 그는 무엇을 가지고 가겠는가. 공덕과 죄악의 두 가지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만든 것이라네. 그는 그 두 가지 것을 가지고 가네. 그림자가 몸에 붙어 다니듯이 그것은 그를 따라다닌다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해야 하네. 이것이 존재들이 미래의 자신이라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는 공덕이 저 세상에서의 기반이라네.”
세존께서는 이렇게 게송을 말씀하시고 좋아하는 경을 마무리하셨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알면 자신을 악행에 얽매이게 하지마라.’라는 것은 자신을 악행에 물들어서 선행을 하지 못하도록 하지 마라는 뜻이다. 이때 악행을 경전에서는 둑카따 까리나(dukkhata kārina)라고 했다. 둑카따(dukkhata)괴로운 상태를 의미하고 까리나kārina)는 행위, 행위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괴로운 행위를 하는 자라는 뜻에서 악행이라고 했다. 악에 얽매이게, 라는 것은 악행에 자신을 묶어두어 스스로를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지 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는 결코 나를 사랑하는 행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선행을 하는 것도 나 자신의 선택이고 악행을 하는 것도 나 자신의 선택이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살면 감각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악행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때는 자기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습관적인 악행을 제어해야 한다.
다음 게송에서 ‘악행을 하는 사람은 행복을 쉽게 얻지 못하네.’라고 했을 때 이런 말씀은 세존의 일상적인 표현방식이다. 세존께서는 ‘악행을 하는 사람은 행복을 얻지 못한다.’라고 직설적이고 단정적으로 표현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악행을 하는 사람은 행복을 얻기가 쉽지 않다.’라고 간접적이고 긍정적인 말로 부드럽게 표현하신다. 그래서 세존의 말씀은 긍정적인 말 속에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직설적인 표현을 하실 때도 있지만 세존께서는 무엇이나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신다. 세간의 불가피한 것을 무조건 질타해서 바로 잡으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렇게 강압적으로 해서는 지혜를 얻을 수 없어 근본적인 치유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에는 세존의 자비로움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오계를 말씀하실 때 ‘살생을 멀리해라’라고 하시거나 ‘살생을 피하라’라고 하시지 ‘살생을 하지마라’ 이렇게 잘라서 말씀하시지 않는다.
인도에서는 당시에 무슨 일이나 좋다거나 싫다는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획일적으로 구분했다. 하지만 세존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익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반드시 옳고 그름을 구별해야 하는 것은 흑백논리로 어떤 형태로든 대상에 반응해야 한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무슨 일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반응하지 않으신다. 무슨 일이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만 있다면 진정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다. 이미 일어난 문제에서 답을 얻으려하기 보다 그 문제로 인해서 지혜를 얻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최적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만 있으면 중도가 없어 대상이 가진 성품을 알 수 없다. 그러면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중요한 사실은 무엇을 얻는가가 아니고 무엇이라고 아는가이다. 무엇을 얻으려고 할 때는 좋아하고 싫어아는 것 중의 하나다. 이것은 결코 해답이 될 수 없다. 이런 삶을 살면 평생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며 살다가 죽는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알면 대상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특성을 아는 지혜가 생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하지 말고 대상의 성품을 알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 모르면 번뇌에 당해서 괴롭게 산다. 알면 번뇌에 당하지 않아서 즐겁게 산다.
이처럼 세존의 말씀은 어떤 나쁜 일을 한 사람도 마음을 열고 끌리게 한다. 이는 자신을 나쁘다고 대놓고 질책하지 않아서 마음을 풀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잘못된 것에 대해 원만하게 마음을 풀어줄 때 비로소 상대가 현상을 보는 지혜가 생긴다. 이런 배경은 세존께서 자비희사의 무량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경전의 이런 내용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팔정도의 중도며 위빠사나 수행이다.
이처럼 무엇이나 흑백논리로 따지면 양극단을 추구하는 것이라서 중도의 관점에서 볼 수 없다. 무엇을 하지 않으면 나쁘다거나,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했을 때는 상호적이지 않고 일방적이다. 무엇이나 일방적일 때는 독선의 위험이 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이런 경우에 옳다거나 그르다고 하지 않고 자기 몸과 마음의 감각기관으로 와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도록 하셨다. 그러면 이때 무엇이 옳고 그름이 없어지고 단지 알아차릴 하나의 대상만 있다. 오직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을 때 집중으로 인해서 생긴 고요함이 있다. 이때 대상을 알아차리는 고요한 마음에서 무상, 고, 무아의 통찰지혜가 나 비로소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악행을 하는 사람은 행복을 쉽게 얻지 못하네’라고 했을 때 무엇을 얻는다고 했을 때는 라바띠(labhati)라고 한다. 라바띠는 수령, 획득, 이득, 소유, 얻는 것을 말한다. 이때 무엇을 쉽게 얻는다고 했을 때나 또는 많이 얻는 다고 했을 때는 수라방(sulabhaṃ)이라고 한다. 반대로 어렵게 얻는다고 했을 때는 두라방(dulabhaṃ)이라고 한다. 인간으로 태어나기 어렵다고 할 때도 두라방(dulabhaṃ)이라고 한다. 인도에서는 괴롭게 사는 것은 악행으로 인한 악업의 과보로 본다. 대신 즐겁게 사는 것은 선행으로 인한 선업의 과보로 본다. 사실 악행을 해도 순간적인 흥분과 짜릿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때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설령 행복을 얻었다고 해도 오래 가지 않고 쉽게 사라져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다.
누구나 예외 없이 행복을 원한다. 이때의 행복을 숙카(sukha)라고 한다. 숙카(sukha)는 즐거운, 행복, 편안한, 안락, 지복 등의 뜻이 있다. 이러한 행복의 반대가 되는 것이 괴로움이다. 괴로움을 둑카(dukkha)라고 하는데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둑카(dukkha)는 괴로움, 고통, 아픔, 고뇌, 불안, 불만, 불편, 불행 등의 뜻이 있다. 이러한 둑카(dukkha)는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 선행하는 내용이다. 바로 행복하지 않아서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둑카(dukkha)는 행복하지 않은 것이 먼저고 다음에 괴로움은 이차적인 것이다.
인생이 괴로움이라고 했을 때는 잘못하면 인생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볼 수 있다. 그래서 세존의 가르침을 염세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인생이 괴로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즐거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즐거움이 괴로움이라는 견해는 오직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에게 길을 열어주는 지혜이다.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는 인생이 괴로움이라는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둑카(dukkha)가 행복하지 못하다거나 행복하지 못해서 괴롭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원래 불교에서는 괴롭다는 의미에서의 둑카(dukkha)는 사성제를 말할 때 사용한다. 그래서 둑카(dukkha)는 연기가 회전하는 윤회와 함께 연기의 회전이 끝나는 열반과 연계해서 사용하는 언어다. 불교의 이런 깨달음이 아닌 인도의 전통사상에서는 괴로움을 둑카(dukkha)라고 하지 않고 빠빠(pāpa)라고 한다. 빠빠(pāpa)는 악하다, 사악하다, 죄가 많다, 악행이란 뜻이 있다. 빠빠(pāpa)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악행을 의미하므로 반드시 악업의 과보가 따른다. 이와 반대가 되는 것은 뿐냐(puñña)라고 한다. 뿐냐(puñña)는 복, 공덕, 선행이라는 뜻이 있다. 뿐냐(puñña) 역시도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짓는 선한 공덕을 의미한다. 공덕은 모든 일의 기초가 되는 기반이다. 결국 공덕이 없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수행을 해서 노력을 하면 어느 단계까지는 갈 수 있지만 도과를 얻으려면 반드시 공덕이 힘이 받쳐주어야 한다.
인도에서는 무슨 일이냐 선행을 의미하는 뿐냐(puñña) 인가, 아니면 악행을 의미하는 빠빠(pāpa) 인가로 양분해서 생각한다. 그래서 인도가 신을 믿는 종교의 사회인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다른 선택권이 없다. 오직 선과 악만 있고 신과 인간만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사를 지낼 때 수많은 동물을 잔인하게 죽여서 피를 흘리게 한다. 이런 것들이 맹목적 신앙이 갖는 죄악에 속한다. 세존께서는 이런 선악의 양비론적 사고가 만연한 사회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중도의 새로운 정신세계를 제시한 것이다. 이때의 대상이 자기 몸과 마음이라서 내가 있다는 전제가 없이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 결과로 생명의 성품인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어 모든 집착을 끊을 수 있다.
이처럼 인도에서는 괴로움을 악행이라거나 죄가 많다는 의미에서 빠빠(pāpa)로 사용했다. 그래서 빠빠(pāpa)와 둑카(dukkha)를 유사하게 보았지만 괴롭게 사는 사람을 악업으로 보고 죄를 지은 과보를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둑카(dukkha)는 오온을 가진 것이 괴로움이고 생로병사가 괴로움이라는 다양한 의미에서 괴로움이다. 이때 괴로움을 뜻하는 둑카(dukkha)는 불교적 관점에서 본 견해다. 그리고 죄악이라는 뜻의 빠빠(pāpa)는 인도의 사회적 관점으로 본 견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둑카(dukkha)는 삶의 본질적인 괴로움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의 괴로움은 12연기를 알고 사성제를 알아 열반에 이르기 위한 차원 높은 괴로움이다. 이런 차원에서 괴로움을 보면 괴로움은 하찮은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빠빠(pāpa)는 신구의 삼업으로 인해서 생기는 일상적인 괴로움이다. 이때의 괴로움은 악행을 해서 악업의 과보로 오는 괴로움이라서 더욱 견디기 힘들다. 이런 이유로 이때의 괴로움을 죄악으로 본다. 그래서 무슨 일이나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해서 생기는 괴로움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는 괴로움은 하찮은 것이 아닌 매우 큰 무게를 가진 고통 그 자체다. 이때는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괴로움을 없애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 이처럼 똑같은 괴로움도 정신적 차원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 두 가지의 괴로움 중에 둑카(dukkha)는 지혜라는 출구가 있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빠빠(pāpa)는 어리석음이라 출구가 없어 윤회를 하며 괴로움과 함께 살아야 한다. 깨달음의 세계에서 본 괴로움은 불가피한 것이라서 있으나마나한 것에 불과하다. 범부의 세계에서 본 괴로움은 감각적 욕망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이라서 바위에 눌린 무게처럼 무겁다.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의 경우는 공덕과 공덕 없음에서 모두 벗어나신 분이다. 그래서 선악에서 벗어나고 즐거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행복과 불행에서 벗어난 분이시다. 이런 결과를 얻은 것은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선과 악이 모두 사라지고 단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누구나 수행을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아라한은 누구에게 도움을 줄 때도 의도를 가지고 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단지 필요해서 할 뿐이다. 그래서 형상을 볼 때는 단지 볼 뿐이고, 소리를 들을 때는 단지 들을 뿐이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 무엇이나 접촉할 ‘뿐’으로 접촉하고 끝낸다. 이것이 바로 ‘접촉할 뿐이고’, 또 ‘알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은 의도적 공덕과 의도적 악행을 하지 않는다. 선한 일을 할 때도 내가 한다는 의도 없이 할뿐이라서 업이 되지 않는다. 길을 가다가 실수로 벌레를 밟은 것도 의도가 없기 때문에 악업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새로운 원인을 만들지 않아서 새로 받을 것이 없다. 이때 공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아무런 의도가 없기 때문에 받는 결과가 없는 것일 뿐이다. 결국 아무것도 바라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업을 짓지 않는다. 이 결과로 다시 태어나는 원인이 사라져 다시 태어나는 결과가 없는 것이 깨달음이다.
다음으로 ‘죽음의 신에게 붙들려’라고 했을 때 죽음을 마라(mara)라고 했다. 마라(mara)는 다섯 가지의 의미로 사용하는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 오온, 업을 형성하는 행, 욕계의 타화자재천의 천신, 죽음이다. 이 외에도 죽음의 신, 악마, 마구니 등등의 의미로도 쓰인다. 여기서는 마라를 죽음의 신으로 표현했다. 세존께서 법문을 하실 때 수행자들에게는 마라를 죽음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신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에게 법문을 하실 때는 죽음의 신으로 의인화해서 사용하신다. 세존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기 전에 마라가 출현해서 유혹을 할 때는 사실 자신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지만 일반인들에게 말할 때는 타화자재천의 천신이라고 하거나 천신의 딸로 표현해서 사람들을 이해시켰다. 신이 있다고 믿어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죽음의 신이라는 이런 형상으로 표현해야 듣는 사람을 이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법문을 듣는 대상에 따라 죽음을 다르게 표현하신다.
세존께서 법문을 하실 때는 듣는 사람의 근기와 성향을 보고 적절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죽음의 신이 있다는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을 하나의 존재로 의인화해서 죽음의 신으로 표현하신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의미의 마라(mara)가 모두 다섯 가지의 뜻으로 인용된 것이다. 죽음을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 하거나, 오온이라고 하거나, 의도가 있는 행위라는 업이라고 했을 때는 수행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배려다. 그러므로 상이한 설정은 모두 수행자를 돕기 위한 방편이다. 이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해서 믿음을 주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래서 세존의 말씀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려면 반드시 스승의 가르침이나 주석서에 의해서 이해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존의 가르침은 지혜가 나야 알 수 있는 법이라서 순차적으로 차례대로 하며 점진적인 단계로 나아간다.
사실 태어남과 죽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누구나 태어났으면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어둠 속에 빛이 있고, 빛 속에 어둠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을 관념으로 보면 죽음을 관장하는 죽음의 신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을 궁극의 실재로 보면 매순간 태어나고 죽는 것의 연속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어떤 현상을 모양, 관념의 빤냐띠(paññatti)로 보는 것과 궁극의 실재인 빠라마타(paramattha)로 보는 것으로 두 가지로 나누어서 구별하신다.
빤냐띠(paññatti)는 관념으로 세속을 사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견해다. 빠라마타(paramattha)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로 출세간을 사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견해다. 죽음도 이처럼 상황에 따라 두 가지 견해로 볼 수 있다. 이때의 빤냐띠(paññatti)는 세간의 진리라서 계정혜(戒定慧)에서 정(定)의 세계에 속한다. 그리고 빠라마타(paramattha)는 출세간의 진리라서 계정혜에서 혜(慧)의 세계에 속한다. 그러므로 관념과 실재의 문제는 항상 함께 있을 수 있으며 상호 공존하는 관계다. 세간이 없는 출세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존의 가르침은 반드시 차례대로 법문을 하신다.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의 단계도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의 과정이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려면 항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외에 달리 할 것이 없다. 그러면 조건에 따라 단계적 과정의 지혜가 성숙된다.
죽음도 관념인 빤냐띠(paññatti)로 보면 내가 죽은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죽음도 실재인 빠라마타(paramattha)로 보면 나라고 할 것이 없어 내가 죽는 것이 아니고 매순간 죽고 다시 태어나는 무상만 있다. 이때 세간에서는 출세간의 지혜가 없기 때문에 빠라마타(paramattha)를 이해할 수 없다. 세존께서는 이런 차이를 이해하시기 때문에 빤냐띠(paññatti)의 입장일 때는 빤냐띠(paññatti)로 말씀하시고 빠라마타(paramattha)의 입장일 때는 빠라마타(paramattha)로 말씀하신다. 하지만 빠라마타(paramattha)를 말씀하실 때도 빤냐띠(paññatti)가 없는 빠라마타(paramattha)를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그래서 빤냐띠(paññatti)의 기초위에서 빠라마타(paramattha)로 옮겨가서 가르침을 펴신다.
빠라마타(paramattha)는 지혜로 본 사물의 궁극의 이치이기 때문에 아무나 알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아니다. 세존께서 존재들에게 설법하지 않으신 것은 전부 빠라마타(paramattha)에 해당된다. 세존께서 설법하신 내용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재하는 진리인 빠라마타(paramattha)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더 높은 차원의 빠라마타(paramattha)는 설하지 않으셨다. 아직 우리는 세존의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세존이 아시는 빠라마타(paramattha)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내가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적절하게 가르침을 펴신다. 이를 두고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저 숲에 있는 수많은 풀을 모두 알고 있지만 지금은 나의 손위에 있는 풀에 대해서만 말씀하신다고 했다. 이 말씀은 세존의 가르침은 오직 한 인간의 괴로움을 해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유다. 먼저 나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없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의 괴로움은 해결해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괴롭지 않을 때 진정으로 남도 도울 수 있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게송의 다음은 ‘공덕과 죄악의 두 가지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만든 것이라네. 그는 그 두 가지 것을 가지고 가네. 그림자가 몸에 붙어 다니듯이 그것은 그를 따라다닌다네.’라고 했을 때 이 게송은 법구경에서 제일 처음에 나오는 게송이다. 법구경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악행을 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르리라. 수레바퀴가 황소의 발굽을 따르듯이. 선행을 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르리라. 그림자가 자신을 떠나지 않듯이.’ 이것이 바로 업 사상으로 원인과 결과를 말한다. 악행을 하면 악업의 과보를 받고 선행을 하면 선업의 과보를 받는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악행은 소의 발굽에 끌려가는 수레바퀴처럼 마지못해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상태로 사는 것이다. 반면에 선행은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처럼 선한 과보가 내가 원하지 않아도 그림자처럼 함께 사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해야 하네.’라고 할 때 선한 일은 깔야나(kalyāṇa)라고 한다. 깔야나(kalyāṇa)는 착한, 좋은, 선(善), 선한, 선량한, 친절한, 매력 있는, 아름다운 등의 다양한 뜻으로 쓰인다. 또는 선한 일이기 때문에 공덕이라고 할 때도 있다. 이 단어는 일상적으로 쓰기보다 불교적 관점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다. 좋은 친구, 선우(善友), 좋은 도반이라고 말할 때는 깔야나 밋따(kalyāṇa mitta)라고 한다.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붓다의 가르침을 얻는 것이 절반은 좋은 도반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아니다, 좋은 도반이 절반이 아니고 전부라고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네 가지 단어가 나왔다. 네 개의 단어는 두 묶음으로 모여 있다. 먼저 빠빠(pāpa)와 둑카따(dukkhata)가 있다. 다음으로 뿐냐(puñña)와 깔야나(kalyāṇa)가 있다. 빠빠(pāpa)는 악하다, 사악하다, 죄가 많다는 뜻이다. 둑카따(dukkhata)는 괴로운 상태를 뜻한다. 여기서 둑카따(dukkhata)는 둑카(dukkha)와 까따(kata)의 합성어다. 까따(kata)는 행해진, 만들어진, 이루어진 이라는 뜻이다. 둑카따(dukkhata)는 괴로움이 만들어진 상태를 말한다. 다음으로 뿐냐(puñña)와 깔야나(kalyāṇa)가 있다. 뿐냐(puñña)는 복, 공덕, 선행이란 뜻이다. 깔야나(kalyāṇa)는 착한, 좋은 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빠빠(pāpa)와 뿐냐(puñña) 두 가지는 인도의 사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언어다. 그리고 둑카따(dukkhata)와 깔야나(kalyāṇa) 두 가지는 불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다. 이 두 가지 언어는 인도의 일상적인 언어와 불교의 깨달음에 관한 언어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지 않는 일반 사람에게는 괴롭다는 뜻의 둑카(dukkha)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 있다. 세간에서는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즐거움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세간에서는 즐거움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하기 때문에 세간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세속의 괴로움과 출세간의 괴로움은 차이가 있다.
다음으로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는 공덕이 저 세상에서의 기반이라네.’라고 했을 때 공덕의 기반을 빠띳타(patiṭṭhā)라고 한다. 빠띳타(patiṭṭhā)는 확립, 도움, 지지, 지켜준다, 축원해준다 등 다양하게 쓰인다. 빠띳타(patiṭṭhā)는 나를 지켜주는 기반이고 바탕이다. 사람들은 빠띳타(patiṭṭhā)를 매우 좋아한다. 사람들은 빠띳타(patiṭṭhā)를 붓다나 보살이 사람에게 주는 힘인 가피(加被)로 알 수 있다. 아니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믿고 있다. 빠띳타(patiṭṭhā)는 신이나 하느님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나를 지켜주기를 바랄 때와 같은 유사한 말이기는 하지만 깊은 내용은 다르다. 예를 들어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바랄 때나 신도가 스님에게 절을 올릴 때 가피를 받으십시오, 라는 뜻도 빠띳타(patiṭṭhā)와 유사한 말이다.
원래 빠띳타(patiṭṭhā)는 이런 가피와는 다른 뜻이지만 사람들은 모두 가피를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가피를 공덕으로 바꾸어서 조심스럽게 말하고 계신다. 꼬살라 왕 앞에서 가피를 공개적으로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가피를 공덕을 쌓는 일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기복신앙을 버리게 하고 선한 공덕을 쌓도록 하셨다. 왕이 국가의 정사를 볼 때나 전쟁을 할 때 여러 가지의 사전형식을 취하면서 기복적인 것에 의존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일을 공덕을 쌓는 일로 바꾼 것은 악업이 아닌 선업을 쌓도록 하신 것이다.
이렇게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바라는 가피에서 스스로 선한 일을 하는 공덕으로 바꿀 때 여기서 나온 말씀이 빠니낭(pāṇinaṃ)이다. 빠니낭(pāṇinaṃ)은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뜻이다. 빠니낭(pāṇinaṃ)과 같은 뜻으로 삿땅(sattaṃ)이 있는데 존재, 유정(有情)이라는 뜻이다. 유정은 마음이 있는 생명을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가에게 바라는 가피보다는 살아있는 생명에게 공덕을 쌓는 일이 저 세상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 세존의 말씀이시다. 이때 살아있는 생명을 위해 공덕을 쌓는 일을 원인으로 해서 다음 생의 복락을 누리는 결과를 얻는 것을 말하고 계신다. 세존께서는 가르침을 펴실 때 간접적으로 설명할 때도 있고 직접적으로 설명할 때도 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꼬살라 왕을 점점 공덕을 쌓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도록 말씀하고 계신다.
이처럼 가피라고 했을 때는 빠띳타(patiṭṭhā)를 복을 비는 기복으로 다르게 해석한 것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빠띳타(patiṭṭhā)는 기반이고 바탕을 의미하지만 이때의 바탕은 나를 지켜주는 바탕이다. 나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어서 튼튼하게 하는 바탕은 어떤 초월적 존재나 타인의 힘이 아니고 오직 나의 공덕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런 모든 형태의 기본이 되는 바탕을 세존의 가르침에서는 공덕이라고 정의하셨다. 아이들이 스님에게 삼배를 올릴 때 머리를 만져주며 축원을 하는 것도 절을 한 공덕으로 아이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뜻이 있다. 만약 세존이나 관세음보살에게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이 있을 때 내가 무엇인가를 얻었다면 사실 이것의 기반은 나의 공덕이지 세존이나 보살의 힘으로 얻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진실은 오직 업과 업의 과보만 있다는 지혜로 본 견해다.
그러므로 누가 어떤 기도를 하더라도 실제로 만들어지는 것은 나의 공덕의 힘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래서 공덕이 없으면 무엇도 만들어 질 수 없다. 기도를 한다고 할 때도 이 기도가 공덕이 되는 것이라면 기반이 되는 빠띳타(patiṭṭhā)가 만들어진다. 만약 기도가 공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빠띳타(patiṭṭhā)라는 바탕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도할 때 자기가 바라는 것만 말하는 것을 공덕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남을 위해서 하는 기도는 공덕이 된다. 붓다께서 설하신 사념처 수행을 하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도 빠띳타(patiṭṭhā)를 얻는 것이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도 최종적으로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이지만 이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 필요한 빠띳타(patiṭṭhā)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세상을 살면서 물이 흐르는 강을 만날 때가 있다. 이때 강을 건너가려면 반드시 배가 필요하다. 여기서 필요한 배가 바로 빠띳타(patiṭṭhā)다. 그래서 내가 기반이 되는 빠띳타(patiṭṭhā)를 많이 만들어 놓으면 언제든지 필요할 때 배처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빠띳타(patiṭṭhā)는 나의 삶의 보험과 같은 것이다. 상좌불교에서 큰 스님께 절을 올릴 때 큰스님의 빠띳타(patiṭṭhā)를 받겠습니다, 라는 말을 하며 예를 올리는 경우가 있다. 이때의 빠띳타(patiṭṭhā)가 위신력, 힘, 공덕이라는 의미가 있다.
내가 공덕이 있으면 다음 다섯 가지를 얻고 공덕이 없으면 다음 다섯 가지를 얻지 못한다.
첫째, 수명(壽命)을 얻는다. 이것이 아유 삼빠디(āyu sampādi)다.
둘째, 아름다움을 얻다. 이것이 완나 삼빠디(vaṇṇa sampādi)다.
셋째, 행복을 얻는다. 이것이 숙카 삼빠디(sukha sampādi)다,
넷째, 힘을 얻는다. 이것이 바라 삼빠디(bala sampādi)다.
다섯째, 지혜를 얻는다. 이것이 빤냐 삼빠디(paññā sampādi)다.
이상 다섯 가지를 얻으려면 공덕이 필요한데 이때 공덕이 바로 빠띳타(patiṭṭhā)다. 여기서 삼빠디(sampādi)는 성공하다. 번영하다. 일어나다, 재산 등의 뜻이 있다. 다섯 가지를 얻으려면 신구의 삼업으로 선한 공덕을 많이 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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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범천과의 대화는 현재 진행중인 강의자료입니다. 꼬살라 왕에 대한 자료는 이미 지나간 강의자료를 정리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진행되는 강의자료와 이미 지나간 강의자료가 함께 게시됩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윳따 니까야 강좌는 매우 유익한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참여해서 함께 배우지 못해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익한 가르침을 함께 나누고 싶어 강의내용을 정리하여 공개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