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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입처와 육근
만약 육입처六入處가 육근六根을 의미한다고 하면 근본불교의 교리는 매우 큰 딜레마에 빠진다. 먼저 십이연기설의 이해에 문제가 생긴다. 십이연기설에 의하면 육입처六入處는 무명無明에서 연기하여 무명이 사라지면 행行, 식識, 명색名色과 함께 차례로 사라진다고 한다. 만약 육입처가 육근六根을 의미한다면 육근六根이 무명에서 생긴다고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무명이 사라진 세존은 육근六根이 없어야 할 것이다.
육입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단순히 한 개념의 오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육입처는 오온 성립의 근거가 된다. 불교의 여러 교리는 이와 같이 상호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근본불교의 교리는 십이입처설十二入處說은 십팔계설十八界說로 발전하고, 십팔계설은 오온설五蘊說로 발전하며, 오온설은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로 발전한다. 이와 같이 불교의 사상적 특징으로 이야기되는 연기설은 십이입처설에서 시작되어 십이연기설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 그런데 연기설의 토대가 되는 육입처가 육근과 동일시 됨으로써 근본불교의 교리에 대한 체계적이고 바른 이해가 어렵게 되었다.
육근의 안근과 육입처의 안입처가 다르듯이 육입처의 안입처와 십팔계의 안계도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입처入處에서 계界가 형성되고, 계가 형성되었을 때 촉觸이 생하여 오온五蘊이 집기한다는 것이 불교의 연기설이다. 입처入處, 계界, 촉觸, 집集, 온蘊 등의 술어는 이러한 연기설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며, 입처는 그 기초가 된다. 따라서 입처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계, 촉, 집, 온 등의 의미도 알 수 없으며, 연기설을 바르게 이해할 수도 없다.
육근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기존의 이해로는 육근은 감각기관을 의미한다. 그러나 경전의 내용을 통해 육근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것은 신체의 기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활동 내지는 인지활동을 의미한다. 육입처는 이러한 인지활동에서 발생하는 의식이다. 육근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육입처에 대한 바른 이해로 이어지고, 나아가 모든 근본불교의 바른 이해로 이어질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입처(ayatana)'는 중생들이 '자아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육입처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세존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것을 발견했을까? <잡아함 57경>은 육입처가 오온의 근거를 찾은 결과 드러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 어떤 비구가 이 좌중에서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빨리 누漏를 다하게 될까?' 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이미 그것에 대하여 설한 바가 있다. 마땅히 여러 가지 음陰(五蘊)을 잘 관찰하여야 한다. 사념처四念處, 사정단四正斷,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분七覺分, 팔성도분八聖道分이 오음五陰을 잘 관찰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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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범부는 몸(색온)을 자기라고 보나니 만약 자기라고 본다면 이것을 행行이라고 부른다. 저 행行은 무엇이 인因이고, 무엇이 집기集起한 것이고, 무엇이 낳은 것이고, 무엇이 발전한 것인가? 무명촉無明觸이 애愛를 낳고, 애愛를 연緣으로 하여 저 행行이 일어나는 것이다.
저 애愛는 무엇이 인因이고, 무엇이 집기集起한 것이고, 무엇이 낳은 것이고, 무엇이 발전한 것인가? 저 애愛는 수受가 인因이고, 수受가 집기集起한 것이고, 수受가 낳은 것이고, 수受가 발전한 것이다.
저 수受는 무엇이 인因이고, 무엇이 집기集起한 것이고, 무엇이 낳은 것이고, 무엇이 발전한 것인가? 저 수受는 촉觸이 인因이고, 촉觸이 집기集起한 것이고, 촉觸이 낳은 것이고, 촉觸이 발전한 것이다.
저 촉觸은 무엇이 인因이고, 무엇이 집기集起한 것이고, 무엇이 낳은 것이고, 무엇이 발전한 것인가? 저 촉觸은 육입처六入處가 인因이고, 육입처가 집기集起한 것이고, 육입처가 낳은 것이고, 육입처가 발전한 것이다.
저 육입처는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며 마음에서 연기한 법이다.
저 촉觸이나 수受나 애愛나 행行도 무상하고 유위이며 마음에서 연기한 법이다.
이 경에서 보여 주듯이 육입처는 사념처 등을 수행하여 오온의 근원을 찾아간 결과 오온의 근거로 드러난 것이다. 오온은 중생들이 자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념처는 이들 오온이 과연 참된 자아인가를 성찰하는 관법觀法인데 사념처관四念處觀을 통해 보면 오온을 자아로 생각하는 것은 무명촉에서 비롯된 갈애(愛)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애의 근원이 육입처이며 육입처는 마음에서 연기한 법이라는 것이 이 경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경에는 무명촉 - 애 - 행 이라는 연기구조와 육입처 - 촉 - 수 - 애 라는 연기구조가 함께 나타나고 있다.즉 愛의 원인으로 무명촉과 육입처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촉의 의미를 밝히면 육입처의 의미도 드러날 것이다.
무명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전에 인용한 <잡아함 294경>에 나타난다.
범부는 무명에 가리우고 애욕에 묶여서 식識이 생기면, 자신의 내부에 식이 있고, 외부에 명색名色이 있다고 분별한다. 이 두 인연으로 촉觸이 생긴다.
이 경에 의하면 무명촉은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처 - 촉 의 전 과정을 의미한다. 무아의 진리에 대한 무지(無明)에서 애욕에 묶이어 자기와 타자를 구별하는 작용이 일어난다(行). 그 결과 이전의 삶을 통해 형성된 마음(識)을 자기의 내적 자아로 삼고, 그 마음에 인색되는 명색名色을 외적 객관세계로 파악한다. 육입처는 이렇게 객관세계로 파악된 명색을 보고, 듣고 생각할 때 인식의 주체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생의 신념이다.
이때 명색은 인식의 대상, 즉 육외입처六外入處(色聲香味觸法)가 된다. 무명촉은 이와 같이 무명에서 분별된 내적 자아(주관)와 외적 세계(객관)의 관계 맺음이다. 중생들은 그 관계 맺음을 통하여 자기 존재(오온)을 구성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육입처 - 촉 - 수 - 애 이고, 자기 존재를 구성하는 작용이 行이다. 자기 존재를 구성하는 삶은 무명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되므로 무명을 연으로 하여 行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십이연기설에서는 무명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삶에서의 연기의 출발점은 육입처이다. 십이연기에서 육입처 앞의 무명, 행, 식, 명색은 과거의 삶을 통해 형성된 중생의 의식세계이며 이 세계에서 중생들은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전술한 바와 같이 세존은 이러한 삶에 삶의 주체로서 불변의 자아는 없다(有業報而無作者)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인지의 주체, 즉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지활동의 결과(業報)일 뿐 자아라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명의 상태에 있는 중생들은 애욕에 묶여서 업보를 자아로 집착한다. 육입처는 이렇게 중생들에 의해서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에 인지활동의 주체인 자아가 들어있다는 그릇된 신념인 것이다.
근根의 원어 'indriya'는 원래 '인드라에 속하는'의 의미를 지닌 형용사로서 중성명사로 사용되면 '인드라가 지닌 힘이나 속성'을 의미한다. 팔리성전협회에서 간행한 사전에 의하면 'indriya'는 불교 심리철학과 윤리학의 가장 포괄적이고 중요한 카테고리의 하나로서 '지배적인 원리, 지배적인 힘'을 의미하며 감각적 지각능력과 관련해서는 '능력, 기능'을 의미하는데 왕왕 '감각기관(organ)'으로 잘못 해석되고 있다고 한다.
이 사전에서 육근을 감각기관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잘못임을 지적한 것은 적절한 것이지만 육근의 근(indriya)을 '능력, 기능'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육근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이다. <아함경>에서 육근은 지각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는 개념이 아니라 수행체계 속에서 이야기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육근의 의미는 육근이라는 개념이 불교의 수행체계 속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육근은 근본경전에서 수호守護해야 할 것으로 이야기되는데, <중아함 산수목건련경>에서 육근의 수호는 처음 수행을 시작한 비구가 거쳐야 할 수행의 단계 가운데 다음과 같이 이야기된다.
1)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청정한 생활을 할 것(身口意護命凊淨)
2) 자신의 신수심법身受心法을 여실하게 관할 것(觀內身如身至觀覺心法如法)
3) 자신의 신수심법身受心法을 여실하게 관하고 욕망(欲相應念)을 일으키지 말 것(觀內身如身莫念欲相應念)
4)육근六根을 수호守護하여 항상 막을 것(守護諸根常念閉塞)
5) 출입出入할 때 자신의 몸가짐을 잘 살피고, 일상생활을 잘 살필 것(正知出入善觀分別)
6) 홀로 외딴 곳에 머물면서 선정을 닦아 사선四禪을 성취할 것(獨住遠離無事處)
<중아함 상적유경>에서도 육근의 수호가 수행의 단계 속에서 이야기되는데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십선계十善戒를 잘 지켜 계취戒聚를 성취한다(成就此聖戒聚).
2) 육근六根을 수호守護하여 항상 막는다(守護諸根常念閉塞).
3) 출입할 때 자신의 몸가짐을 잘 살피고, 일상생활을 잘 살핀다(正知出入善觀分別).
4) 홀로 외딴 곳에 머물면서 선정을 닦아 사선을 성취한다(獨住遠離無事處).
십선계十善戒는 살생, 투도, 사음, 거짓말, 이간질, 욕설, 아첨, 탐심, 진심, 치심을 행하지 않는 것이므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청정한 삶을 의미한다. 그런데 <산수목건련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을 관하는 사념처의 수행이 <상적유경>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육근의 수호는 사념처와 관련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육근의 수호란 지각활동을 할 때 대상에 의해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육근의 수호는 사념처 수행이라는 것을 <잡아함 255경>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대를 위하여 문門을 수호守護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리라. 다문성제자多聞聖弟子는 눈(眼)으로 색色을 보고서 마음에 드는 색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색에 싫어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 항상 그 마음을 모아서 신념처身念處에 머물면서 무량한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여실하게 알아 그에게 일어난 악불선법惡不善法을 남김이 없이 적멸한다.
이 경에서 문門이라고 한 것은 육근을 의미한다. 육근의 수호는 사념처에 마음을 집중하여 정념正念의 상태를 떠나지 않고 지각활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산수목건련경>에서는 사념처의 수행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고, <상적유경>에서는 이러한 사념처의 수행을 육근의 수호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육근의 수호가 사념처 수행을 의미한다면 육근을 감각기관이나 감각기능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산수목건련경>에 상응하는 <중부 니까야>에서는 육근의 수호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근根들에서(indriyesu) 문門(dvara)을 지키라. 눈으로 색色을 보고 나서 겉모습(相:nimitta) 에 사로잡히지 말고 부수적인 모습(別相: anubyanjna)에 사로잡히지 말라. 왜냐하면 이 안근眼根(cakkhundriya)을 억제하지 않고 살아가면 탐애나 근심과 같은 사악하고 불선한 법法들이 흘러들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하여 마땅히 안근을 지켜야 하고, 안근의 억제를 실천해야 한다.
<중부 니까야>에서 '근根들에서(indriyesu:indriya의 복수처격) 문門을 지키라'는 것이 <중아함경>에서는 '제근諸根을 수호하라'로 번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함경>에 의하면 육근은 수호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니까야>에 의하면 육근은 처격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육근은 장소나 시기 또는 어떤 행위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리고 수호의 대상은 문門이다. 따라서 <니까야>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육근은 '인지활동' 또는 '지각활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다. 이런 의미로 해석하면 '근들에서 문을 지키라'는 말은 '지각활동을 할 때 마음에 나쁜 생각이 흘러 들어오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미가 된다.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의 오근五根, 즉 신근信根(saddhindriya), 정진근精進根(viriyindriya), 염근念根(satindriya), 정근定根(samadhindriya), 혜근慧根(pannindriya)의 'indriya' 도 '활동'의 의미로 해석하면 잘 어울린다. 신근信根은 여래에 대한 굳은 믿음의 실천을 의미하고, 정진근精進根은 사정단四正斷을 부지런히 닦는 것을 의미하며, 염근念根은 사념처四念處를 관하는 것을 의미하고, 정근定根은 사선四禪을 구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혜근慧根은 사성제四聖諦를 여실하게 아는 것을 의미한다. 오근은 다섯 가지 수행의 실천인 것이다.
첫댓글 경의 해석에 무리가 있는것 같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