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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회복 : 정체성 13.
제3부 하늘의 상이 정체성이다.
4. 주님과의 동행 상
● 담대함이 만들어주는 상
성도가 받을 수 있는 세 번째 큰 상은 고난과 비방과 환난 중에도 담대함으로 이겨낸 데 대한 상이다. 담대함 자체로 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때문에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끝까지 담대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담대함은 끝까지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어떤 고난과 박해와 역경 중에도 담대하게 승리할 수 있어야 하며,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자녀다운 담대함으로 세상의 모든 편견으로부터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담대함을통해 어떤 종류의 큰 상도 기대할 수 있으며 하늘의 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10:32-35)
그러면 담대함이 있을 때 성도는 어떤 일을 감당할 수 있는가?
가장 먼저 주님께서 주시는 담대함이 있어야 복음을 자신 있게 전할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복음의 최일선에서 직접 악의 세력들과 싸우는 일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나의 기질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으로 부어 주시는 담대함이어야 한다. 복음전파는 성령님께서 부어주시는 담대함이 넘칠 때에만 가능하게 되는 일이고, 그렇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하늘에서 자신이 감당한 것만큼의 큰 상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담대함은 주님을 힘입고 주님을 신뢰할 때 주시는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14:3)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빌 1:14)
그리고 성도들을 향한 권면에도 담대함은 필요하다. 권면을 할 때에는 자신의 감정이나 자기 입장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시는 감동으로 해야 하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담대하게 권면해야 할 때에는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담대하게 권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긴 마음으로 진실한 마음을 다하여 권면해야 한다. 이럴 때 담대함이 필요하다.
혹시라도 권면을 듣는 성도가 마음의 상처가 될 수 있다고 권면을 하지 않거나 책망하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그 성도의 신앙은 정말 자라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해보지 않으면 결코 깨닫지 못하는 진리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므로 성도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라도 권면은 반드시 필요하며 리더자로서 이들의 신앙을 책임지지 못한다면 하늘에서는 어떤 상도 주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롬15:15)
또한 담대함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적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 신앙이 성장한 사람 즉, 믿음 좋은 사람은 기도에서 응답을 받거나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감동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작은 죄도 민감하게 느끼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게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우리가 주 앞에 나아갈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과 은혜로 주신 담대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도 떳떳하게 나아갈 수 있다. 이런 담대함은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하늘의 상으로 이끌려 갈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2:28)
● 담대함의 뿌리 : 예수님과의 동행
그러면 이 담대함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
담대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시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은 싸워서 이겨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환난을 당해도 담대하게 행동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담대할 수 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이 있는 한 담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담대함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삶 자체가 사명이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사명자라는 생각을 품을 때 세상에 어떤 위협이 와도 담대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23:11)
또한 담대함이란 곧 예수님과 함께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예수님이 계신 그곳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주와 함께한다고 해서 몸으로 직접 함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몸으로 있든지 몸을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6-9)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어주는 또 하나는 하늘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소망이다. 또한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성령 충만할 때 담대함을 주신다. 우리의 심령 가운데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고 싶다면 자신을 다 버리면 된다. 내 생각과 고집, 경험이나 지식도 버려야 하며, 욕심이나 인간적인 목표도 다 내려놓아야 한다. 곧 성령 충만한 상태는 자기를 비운 상태이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의 동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담대함을 불러 일으키는 요인들을 한마디로 하면 예수님과의 동행이다. 동행이라고 하면 흔히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성령님으로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와 늘 동행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잡은 손을 놓는 것은 우리들이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눅 7:11)
예수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시각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손길로 사람들을 섬기며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으로 함께 가는 것이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자기중심적인 신앙은 예수님이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것처럼 생각되고 자기가 다 결정해서 계획을 세워놓고 하나님께 따라오라고 한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신앙이다.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담대함을 주실 수가 없다. 또한 담대함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하늘의 큰 상을 받을 수가 없다. 성숙한 신앙은 자신을 버리고 주님과 동행할 때 주시는 담대함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주님과 동행해도 오는 고난
주인과의 동행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주님과 동행을 해도 우리에게는 문제나 고난이 닥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세상이 받지 않아도 될 고난까지 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과 동행하던 제자들도 갈릴리 바다를 건너던 중에 큰 풍랑을 만났다. 평생을 어부로 살았던 그들조차도 그 강한 풍랑에 겁에 질려 오죽하면 '이제는 죽었구나' 하면서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웠겠는가.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눅8:24)
사도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중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다. 배에 타고 있던 군인들과 선원들과 죄수들은 풍랑이 너무 강해서 살아날 소망마저 사라져 버릴 정도가 되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행27:20)
그 배에 예수님께서 동행하시는 바울이 타고 있었음에도 큰풍랑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고난이다. 그러나 이런 고난에 빠진 바울에게 주님은 나타나셔서 힘을 더하여 주셨기에 바울은 평강을 누릴 수 있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행27:24)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주님과 동행하면 오히려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사람들로부터 박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거나 어쩌면 사업이 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의 동행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문제 앞에 담대하려면 주님과의 동행은 반드시 필요하다.
주님과의 동행은 많은 어려움이 따라올 수 있지만, 반드시 이겨낼 힘과 승리를 주시는 주님과 동행하면서 믿음으로 담대하게 이겨낸 사람에게는 하늘의 큰 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8:26)
● 주님과의 동행 자체가 큰 상
담대함으로 세상과 싸워 이길 때 하늘에서 큰 상이 주어지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상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모든 고난을 이겨내는 것 자체가 큰 상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은 성경에는 그의 행한 일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산 채로 천국에 들려올라가는 최고의 상을 받았다. 에녹의 삶을 볼 때 성경은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에녹은 자신의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진짜 삶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또 한 사람인 엘리야가 있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했다라는 말은 없지만 지친 엘리야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직접 음식을 주고 먹게한 사람은 엘리야밖에는 없다. 또한 다른 제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야에게서만은 풍부하게 나타났다는 것은 엘리야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령의 사람이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왕하 2:15)
이들에게는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간 것이 가장 큰 상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생활하는 과정 중에 수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 일상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동행에 최선을 다한다면 이들처럼 하늘로 들려 올려가지는 않겠지만 하늘에서 큰 상을 준비하실 것만은 틀림이 없다.
담대함이란 하나님과 동행할 때 겉으로 가장 잘 드러나는 증거인데 그 담대함이 이 세상과 자신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이고 그 승리가 하늘의 큰 상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리야의 성령이라는 말은 엘리야가 늘 자신을 비우고 버리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에녹이든 엘리야든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자기 자신을 버리고 부정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 또한 자기를 부인하고 부정해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심지어 예수님과의 동행은 목숨조차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음을 말씀하신다. 자기부인이란 목숨까지도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생길 수 없는 마음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다 들어 있다. 자기를 비우지 못하고 심지어 목숨까지라도 버릴 결단이 없다면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4)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이 땅에서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예수님과는 더 이상 동행할 수 없다.
담대함이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면 세상에 무서울 것도 없고 두려움도 없어진다. 주님과의 동행을 믿음으로 확신해 보자. 담대함이 생긴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저 하늘에서 주님과 영원한 동행을 누릴 수 있게 하는 훈련의 장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주님이 계신 곳, 주님이 바라보시는 곳, 주님이 원하시는 곳이라면 여건이나 조건이 어렵더라도, 박해가 있더라도 그곳에 있어야 하며 어떤 문제나 고난이나 역경이 닥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주님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때 어려워도 힘들어도 담대함으로 승리할 수 있는 이유이며 그 길은 주님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거듭난 백성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하나님의 임재라는 말인데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밑으로 다시 돌아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여 담대함으로 하늘의 상을 소망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진정한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우리를 버리고 내 안에 성령님으로 충만할 때 회복할 수 있다. 이럴 때 하나님은 담대함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