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노출(D.E) 기법의 고급 산문
<조선낫> / 서태수
*조선 여인 = 조선낫으로 치환
조선낫과 여인의 동질성을 포섭하여 두 존재 사이를 융합적으로 왕복하면서 전개
병치은유 + 치환은유
*군말 : 연상 작용 확장 연습
= 하나의 제재(조선낫 - 조선 여인 / 청춘 - 노인 / 강 - 꽈추 등등)를 대상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끈질기게 공통성을 탐색!
=<피아노>에서 전봉건 시인이 “고기‘의 바다 유영을 다양하게 연상하고 여기에 리듬을 결부시켰다면? 이 시는 단편의 감각시에서 벗어나 유명 피아니스트의 멋진 무대 공연의 명품이 되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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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낫은 살림꾼 조선 여인의 단출한 매무새다. 날[刃]만큼이나 긴 슴베 끄트머리에 나무자루를 달랑 꽂은 모양이 마치 무명 홑적삼에 짤막한 도랑치마를 걸친 다부진 아낙네 모습이다. 종아리에 닿는 짧은 치맛자락도 행여나 발에 밟힐까 저어하여 낫갱기로 중동끈을 질끈 동여매고는, 풀을 베고 곡식을 거두고 나뭇가지를 치는 바지런한 여인이다. 그녀의 오지랖은 대천한바다보다 넓다. 논두렁, 밭두렁, 논길, 밭길, 따비밭, 다랑논을 재바르게 오가며 구렛들이든 천둥지기든 이 논배미 저 논배미 에돌아 감돌아, 봄여름 풀베기며 가을걷이, 겨울채비에 야산 중턱까지도 휘돈다.
조선낫은 이마에서 정수리까지 낫등 가르마를 곧게 탄다. 그녀의 쪽진 머리는 슴베가 휘어넘는 덜미의 낫공치에 목비녀 짧게 꽂은 단정한 모습이다. 치마허리의 폭 좁은 말기로는 가슴과 허리께를 다 가릴 수 없어 햇살 그을린 속살을 부끄럼 없이 드러낸 이 여인은, 안고름 없는 홑저고리를 입었다고 아무 손이나 살에 닿게 하는 헤픈 여자는 결코 아니다. 마음 준 남정네의 손길에는 주저없이 온몸을 맡긴다. 그러나 어수룩한 촌부村婦라고 가벼이 다가간다면 큰코다치게 된다. 가슴에 은장도를 품고 있는 이 여인은 제 살이 낯선 돌부리에 살짝 스치기만 하여도 쟁그랑! 시퍼런 불빛 번쩍이며 온몸으로 저항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강철같이 억세거나 그믐달같이 싸늘한 여인은 아니다. 뜨거운 불길과 차가운 물길에 수십 번 달구어진 무쇠로 벼려낸 그녀의 눈매는 따뜻하면서도 섬세하다. 두꺼운 낫등에서 점점 얇게 다듬어져 내려온 예리한 날이 있기에, 그녀의 눈빛 앞에서는 아무리 무디고 억센 나뭇가지라도 열 번도 채 찍기 전에 무너지는 물컹이 남정네에 불과하다.
이 여인의 보드라우면서도 아귀찬 눈빛은 그녀의 탄생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대장간에서 태어난 그녀의 성냥은 여우 주둥이처럼 생긴 모루[鐵砧] 위에 올려놓고 수백 번을 두드린 메질꾼의 쇠메와 숱한 담금질을 거쳐야 한다. 북어는 두드릴수록 보드라워지지만 인고忍苦의 조선 여인은 더욱더 강해진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날[刃]을 벼리기 위한 수많은 잔메질이 오히려 개운하다. 이때는 대장장이도 신명난다. 물방울을 여인의 얼굴에 떨어뜨려 구슬을 굴리듯 손목을 휘휘 돌려 보릿대춤을 추며 여인을 어른다. 간질이는 물방울에 한껏 달아오른 여인은 가쁜 숨을 내쉬며 온몸에 흩어져 있는 감각세포를 훑어낸다. 슴베의 감각을 낫등에 몰아오고, 다시 낫등의 감각을 날 끝에 다 모은다. 그래서 조선낫은 날과 등의 체감온도가 달라 날의 충격을 등이 흡수하게 된다. 그녀가 굵은 나뭇가지를 칠 때 제 몸이 휘어지거나 부러지지 않게 되는 것은 오직 이러한 인고의 결실이다. 이것이 온갖 잡일 마다않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조선 여인의 지혜다.
그러나 아무리 조강지처라도 변덕스러운 것이 인간사라, 새로운 것에 대한 남정네들의 호기심도 더러는 있기 마련. 목덜미까지 기모노를 걸친 성큼한 몸매의 간실간실한 여인이 지나가면, 처음 보는 왜낫에 뭇 남정네들이 한눈을 판다. 왜낫의 긴 자루 허리께를 거머쥐고 엉거주춤 쪼그린 자세로 이 두렁 저 밭등 풀을 베다 나뭇가지를 만난다. 물정 모르는 숫사람이 조선낫 휘두르듯 나뭇가지를 내리찍으면 애당초 쇠메질, 담금질을 겪지 않고 비롯된 왜낫은 고만한 충격에도 휘어지고 찢어진다.
겸연쩍은 남정네는 다시 슬그머니 조선낫을 찾는다. 시앗에는 돌부처도 돌아앉는 법. 앵돌아진 조선 여인은 나뭇가지를 겨냥한 남정네의 힘겨운 낫질에는 행여나 농부 일손 다칠세라 눈길 내리깔고 입술 앙다문 채 다소곳이 참아준다. 그러나 잠시 후 잔풀에 일손이 닿으면, 자분자분한 이 여인도 서슬 퍼런 질투로, 변심한 남정네의 새끼손가락 끄트머리쯤을 살짝 스쳐버리는 앙살스러운 마음은 지녔다.
수더분한 그녀도 여인인지라 어찌 치장을 마다하랴. 무디어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그녀는 샘물처럼 정갈하다. 그녀는 언제나 숫돌에서 몸을 씻는다. 물만 찍어 바르는 것이 아니라, 제 몸을 갈아 목욕하는 그녀의 눈빛은 그래서 봄, 가을, 여름, 겨울 없이 형형炯炯하다.
따비, 쟁기, 써레 등을 웃어른으로 모신 층층시하에서도 포도송이 같은 남매들 온갖 뒤치다꺼리로 한 몸 닳아온 이 여인은, 오랜 세월 갈고 벤 날이 뭉개지고 모지라져 슴베만 남게 될 때 말없이 대장간으로 간다. 지조 높은 이 조선 여인은 이날에야 난생 처음 무거운 치마를 벗는다. 그리하여 숯불 벌겋게 피어나는 화덕 위에 누워 푸-푸 들려오는 풀무소리 노래삼아 후생에 태어날 새로운 꿈을 꾸며 전신을 녹여 보낸다.
아득한 옛날, 그녀가 농촌에 처음 시집올 때는 돌이나 조개껍데기 얼굴이었다고 한다. 무쇠로 단련된 그녀의 조상 유적은 서양에서는 삼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녀가 조선 규수로 처음 연지곤지 찍고 족두리 쓴 곳은 이천 년 전 황해도 어느 고을 양갓집이라 한다.
평생을 그녀와 함께 살면서도 낫 놓고 ㄱ자도 몰랐던 까막눈 남정네들은, 이 여인이 ㄴ도 ㅅ도 이미 몸으로 알고 있는 유식한 여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그래도 이 조선 여인은 내색 않고 평생을 함께 살았다. 숫된 남정네들도 제 여인의 품격品格을 알고는 있었나 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격조格調 높은 여인을 가슴에 품어 풍년가를 부르고 싶은 남정네는, 예나 제나 반드시 한쪽 무릎을 땅바닥에 꿇고 정중히 두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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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필에 대한 이관희 평론가의 논평(2017, 『창작에세이』 26호)
본지 창간 이래 마감 후 원고를 편집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금호 편집은 지난주에 마감하였다. 그 후 일주일은 교정 작업 일정으로 잡혀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서태수 시조시인의 창작수필집 『조선낫에 벼린 수필』이 배달되었다.
내용을 살펴본 필자는 잠시 일손을 놓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왠지 슬프고…, 가슴이 아프다. 작품집 중에서 「조선낫」을 읽은 필자는 무엇이라 비평할 언어를 찾지 못할 정도였다.
지금도 나는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면 온당한 학문적 평가가 될 수 있을지 비평언어를 찾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조선낫’을 ‘조선 여인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조선 여인’을 ‘조선낫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분리해 내기 어려울 정도로 혼연일체로 융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정을 되찾아 문학의 본질적 목적이 ‘사람 사는 이야기’에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조선낫으로 조선 여인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작품구성은 온전한 산문작품임에도 전통적인 서사구성법이 아닌 시적 비유법의 연속으로 짜여져 있다.(중략)
이 작품은 서사를 말하고 있지만 서사 그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운문의 시문학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중략)
서태수 시조시인의 수필집 『조선낫에 벼린 수필』은 이상과 같은 충격을 나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창간 이래 한 번도 ‘마감 후 원고’를 게재한 일이 없던 전통을 깨트리고 급히 마감 후 원고를 초과 편집하게 되었던 것이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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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수 생각 : 아마도 기성 수필 문단에 <제재의 이중노출(D.E) 기법> 운용에 대한 기존 이론이 없었기 때문인 듯.
*내 대학시절 이러한 기법을 시 작법에서는 ‘연상법’으로 공부
- 대표적으로 1950년대 시 김춘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근거로 했음
- 연상 작용 : 헝가리 폭압(소련 침공), 부다페스트 다뉴브강, 소녀(실제 인물)
⇒대한민국 폭압(일제), 서울 한강, 소녀(가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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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실 이 글을 쓰기 위해 세계의 낫 공부를 좀 했음. 특히 조선낫 연구(?)를 위해 대장간 견학으로 단조 과정과 낫의 각 부위의 명칭도 소상히 익힌 후 여인과 결부시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