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요경(安堯卿)
1派11世-첨추공파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 부호군(副護軍)
1440년(세종22,경신년)에 출생
자(字)는 석보(碩輔)이며, 초휘는 순경(舜卿)이다.
1473년(성종 4) 통진현감을 거쳐 1479년 용인현령에 재직중
국왕의 강무지대(講武支待: 왕의 친림하에 행하는 무예연습에 필요한 물품준비)를 소홀히 한 죄로 파직되었다가
2년 뒤에 다시 서용되었다.
1488년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으로 마정(馬政)과 연안(輦鞍)의 일에 뛰어난 재주를 발휘하여 왕세자의 가례(嘉禮)를 무사히 치르고,
이듬해 사복시첨정, 1506년(연산군 12) 공조참의로 있을 때 영치사(領置使: 연산군 때 설치한 것으로 주로 사림을 상대하였다.)의 일을 겸한 것이 화근이 되어
1518년(중종 13)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통정대부 공조참의(通政大夫 工曹參議) 11세 (1파,첨추공파)
1440년(세종22,경신년)에 출생한 휘 요경(堯卿)의 자(字)는 석보(碩輔)이며, 초휘는 순경(舜卿)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첨추공파조 휘 종의(從義)의 손자이고, 음성현감(陰성縣監)을 지낸 휘 영(永)의 두 아들중 장남이다.
정헌대부 공조전서를 지낸 경질공 휘 원(瑗)의 증손이다.
1463년(세조9,계미년)에 문겸선전관(文兼宣傳官)에 제수되었다.
1465년(세조11)에 통례문 통찬(通禮文 通贊)을 역임 했으며, 여러번 감찰(監察)과 제용 판관(濟用判官) ·통진현감(通津縣監)과
용인현령(龍仁縣令) · 회덕(懷德)과 연천(連川)의 현감(縣監) · 사복시(司僕寺)의 판관(判官)과 첨정(僉正) ·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과 괴산군수(槐山郡守)를 역임하였다.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으로 전임하였다가 얼마후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과 내섬시 정(內贍寺正)으로 승진하였으며,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다가 들어와 사복시 정(司僕寺正)·예빈시 정(禮貧寺正)·우통례(右通禮)를 역임하였다.
1505(연산군11,을축년) 봄에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여 곧바로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는데,
늙었다 하여 체직(遞職)을 당하고 호군(護軍)으로 강등되었다.
1년 뒤에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1518년(중종13,무인년) 5월16일, 병으로 집에서 별세하니 수 79세였다.
배위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황치신(黃致身)의 딸이다.
슬하에 3남2녀를 두었으며, 장자인 번(璠)은 두 딸이 있으며, 둘째인 구(球)는 현감 이건에게 출가한 딸이 있으며,
셋째는 첨추(僉樞)를 지내고 공조참판에 추증된 휘 순(珣)이다.
墓 선고인 음성공 휘 영(永)의 묘소아래 병좌(丙坐)이다.[양주(楊州)의 서산 독정리(篤亭里)]
(世祖朝)安堯卿
順興人僉知中樞府事從義孫蔭掌令多諷諫上曰悉力盡忠若舜之事堯賜名堯卿文成公裕八世孫也
國朝人物志v1
자 석보(碩輔), 남대(南臺), 관 공조참의(工曹參議),
세조가 “충성을 다함이 마치 순(舜)임금이 요(堯)임금을 섬기듯 한다.”고 칭찬하고 요경(堯卿)으로 개명토록 했다.
영(永)의 아들, 종의(從義)의 손자.
가선 대부(嘉善大夫) 행 여주목사(行驪州牧使)를 지내고 좌의정에 추증된 원창부원군(原昌府院君) 원호(元豪)의 시장
공의 휘는 호(豪)이고, 자는 중영(仲英)이며, 원주(原州) 사람이다.
고려조에 시중(侍中)을 지낸 원홍필(元弘弼)의 9대손이고, 본조에서 도관 정랑(都官正郞)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원산군(原山君)에 봉해진 원황(元滉)의 5대손이다.
시중공으로부터 공에 이르기까지 벼슬아치가 대를 이어 나와 대대로 망족(望族)이 되었다.
할아버지인 원팽조(元彭祖)가 처음으로 무관(武官)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세 진(鎭)에서 부월(斧鉞)을 잡았으며 품계가 2품에 이르렀다.
아버지인 원송수(元松壽)는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어머니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성균관 생원 안순(安珣)의 딸로, 공조 참의를 지낸 안요경(安堯卿)의 손녀이다.
嘉善大夫行驪州牧使,贈左議政,原昌府院君元公諡狀。
公諱豪。字仲英。原州人。高麗侍中弘弼之九代孫。本朝都官正郞。贈吏曹判書,原山君滉之五代孫也。自侍中至公。軒冕相承。
世爲望族。祖彭祖。始以武進。秉鉞三鎭。階至二品。考松壽。登武科。官終僉知中樞。
妣順興安氏。成均生員珣之。女工曹參議堯卿之孫。
잠곡유고 제11권潛谷先生遺稿卷之十一 시장(諡狀) 잠곡(潛谷) 김육(金堉)
이달선(李達善)에 대하여
1457년(세조 3)∼1505년(연산군 1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겸지(兼之).
증조부는 이일영(李日英)이고, 필문(畢門) 이선제(李先齊)의 손자이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인 예조참판(禮曹參判) 이형원(李亨元)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권(李惓)의 딸이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안요경(安堯卿)의 딸과 혼인하여 이공인(李公仁)을 낳았는데, 그는 1519년(중종 14) 기묘식년문과(己卯式年文科)에 을과 6등으로 급제하여 한림(翰林)·수찬(修撰)을 역임하였다. 1552년(명종 7) 임자식년문과(壬子式年文科)에 병과 17등으로 급제한 대사간(大司諫) 이중호(李仲虎)가 그의 손자이다.
1483년(성종 14) 계묘식년사마시(癸卯式年司馬試)에 생원 1등·진사 2등으로 합격하였다. 1486년(성종 17) 병오식년문과(丙午式年文科)에 갑과 3등으로 급제하여 한림옥당(翰林玉堂: 홍문관)을 거쳐 1492년(성종 23) 호당(湖堂: 독서당)에 들어가고 벼슬이 상의원정(尙衣院正) 지제교(知製敎)에 이르렀다. 그러나 1498년(연산 4) 7월 무오사화(戊午士禍) 때에 장형(杖刑)을 당하고 유배지에서 일찍 죽었다.
오언절구로 이루어진 그의 시 〈신륵사(神勒寺)〉가 《東文選》에 전해지고 그의 묘갈비(墓碣碑) 광산이씨승지공비(光山李氏承旨公碑)가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화순읍(和順邑) 앵남리(鸚南里)에 남아있다.
【누정】 존빈루(尊賓樓)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군수 안요경(安堯卿)이 중수하고,
관찰사 이숙함(李叔瑊)이 누(樓)의 편액(扁額)을 고쳐 읍취(挹翠)라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장정(長亭)과 단정(短亭)을 지나 다하니, 푸른 산 깊은 곳에 외로운 성이 있다.
높은 다락이 뾰족 솟았으니 하늘 바람이 내리고, 비가 자욱히 내리니 시내 물이 난다. 버들은 허리를 흔들어 묘한 춤을 보이고,
산은 그린 눈썹을 비끼어 한가한 정(情)을 자아낸다.
사신의 질탕히 노는 것 사람들이 웃는 대로 놔두고, 사롱(紗籠)으로 내 이름을 보호하게 말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괴산군(槐山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