己巳年 동안거 결제 법문(원담스님 圓潭眞性)
견해[見解]를 만들지 말라 - 김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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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知識人의 어리석음 ──────────────────────────────
흔히 사대부<지식인>들은 단순히 부처라는 것을 알기를, 천겁千劫 동안 위의威儀를 배우고
만겁萬劫 동안 상호相好를 닦는다 하고, 나아가 삼대아승기겁三大阿僧祇劫<무수한 세월>
동안 수행한 뒤에야 성취한다고 알고 있으니, 어떻게 범부凡夫에게 드러나 있는 무명無明
을 바꾸겠으며, 부귀영화에 굴복하여 괴로워하면서 언제 도道와 만나겠는가?
이러한 생각을 하자마자 곧 심.의.식 心.意.識 속에 한 개 수미산須彌山이 솟아나게 하니,
이 한개 장애물이 도道를 보는 눈을 가로막아서 본지풍광本地風光과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밝게 볼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는 것이 장애가 아니라, 이렇게 만든 장애물障碍物이
아는 것을 가로막는다고 하는 것이다.
근세의 사대부들은 왕왕 이러한 견해見解를 지으니, 한자창韓子蒼같은 사람은 나와 함께
임천臨川에 있으면서 이 일을 논論한지 반년이 되었지만 역시 스스로 믿지 않았다. 매번
이 일을 말할 때마다, ‘우리들은 다만 돌아갈 곳만 알면 되니 어떻게 곧장 손을 써야 할까?’
하니 역시 스스로 가로막는 장애障碍를 만들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또 앞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은 10겁을 도량道場에
앉아 있었으나 불법佛法이 나타나지 않아서 불도를 이룰 수가 없었다.’는 말을 오해하여,
불도佛道를 이루기 어려움이 이와 같다고 한다.
이들은 ‘한 순간에 헤아릴 수 없는 겁劫을 두루 보니,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고 머무
는 일도 없으며, 이와 같이 과거․현재․미래의 일을 밝게 알고, 모든 곳을 벗어나 곧장 십력
十力을 이룬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석가모니께선 본래면목을 보자마자 말씀하셨다.
‘기이奇異하구나! 모든 중생에게 여래의 지혜와 공덕功德의 모습이 모두 갖추어져 있지만,
다만 망상妄相에 집착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할 뿐이로구나.’ 망상에 집착한다는 말이 바로
오늘날 사대부<지식인>의 병통을 말한 것이다. -대혜大慧어록 <손통판이 청한 보설> 중-

◇ 두 개의 선병禪病 ─────────────────────────────────
오늘날 도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모두 두 가지 큰 병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과 문자文字를 많이 배워서 말과 문자 속에서 기특한 생각을 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달을 보았으면 손가락 잊는 일을 하지 못하고, 말과 문자에서 깨달아 들어가려
하다가, 불법佛法과 선도禪道가 말과 문자 위에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는 곧 말과 문자를
모조리 쓸어 내버리고, 한 결 같이 눈을 감고는 죽은 사람처럼 앉아서
‘고요히 앉는다’<靜坐>느니 ‘마음을 본다’<觀心>느니 ‘묵묵히 비춘다’<黙照>느니 하고
말하면서, 다시 이러한 삿된 견해로써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꼬드겨 말하기를
“하루 고요하게 지내면 곧 하루 공부를 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이들 모두가 귀신 집안의 살림살이인 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큰 병病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배움에 참여할 몫이 있습니다.
경經에서 말했습니다.
“중생이 하는 말에 집착하지 말지니 모두가 유위有爲의 허망한 일이로다.
비록 문자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또한 말 없음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또 말했습니다.
“말을 보면 뜻과 다르다고 하지도 말고, 다르지 않다고 하지도 말라.
뜻을 보아도 말과 다르다고 하지도 말고, 다르지 않다고 하지도 말라.”
만약 말이 뜻과 다르다면, 말로 말미암아 뜻을 분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을 통하여 뜻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등불이 색깔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으며, 요의경了義經<궁극적 진리를 분명하게
말한 경전>에 의지하고 불료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말과 침묵이라는 두 가지 병을 없애지 못하면
반드시 도道에 장애물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비로소 수행하여 나아갈 몫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조심操心할 것은,
아는 것을 붙잡고 일삼아서 다시는 묘妙한 깨달음을 찾지 않으면서, 그가 모르는 것을
나는 안다거나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이해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견我見의 그물 속에 떨어져서 아상我相에게 부림을 당하여 아직
미진한데도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낸다면, 이 병은 더욱 무겁습니다.
말과 침묵이라는 이 두 가지 병은 좋은 의사라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이 병을 없애지 못하면 증상만增上慢이나 사견인邪見人이라 부릅니다.
오래도록 공부해 온 영리한 자라야 비로소 여기에 이르러 자신自身을 모두 바꿀 수 있고,
자신을 바꿀 수 있으면 사물도 바꿀 수 있습니다. 사물을 바꿀 수 있으면, 바야흐로 뜻을
밝힌 사람이라 합니다.
이미 그 뜻을 밝혔다면 이 마음도 밝힌 것이고, 이 마음을 밝혔다면 밝힌 곳에서 시험삼아
미세하게 헤아려 보면 원래 밝힐 것이 없으니, 밝힐 것이 없는 곳에서 발딱 일어나 곧장
가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한 줄기 풀을 집어 장육금신丈六金身<불신佛身>을 만들고, 어떤 때에는 장육
금신을 다시 한 줄기 풀로 만들면서, 여러 가지로 변화하여 모든 법을 이루기도 하고 모든
법을 부수기도 하며, 뒤죽박죽 자유롭게 하여도 모두 이 밝힐 것 없는 마음을 벗어나지 않
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는 여래선如來禪도 아니고, 조사선祖師禪도 아니고, 심성선心性禪도 아니
고, 묵조선黙照禪도 아니고, 방할선棒喝禪도 아니고, 적멸선寂滅禪도 아니고, 과두선過頭禪
도 아니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禪도 아니고, 오가종파五家宗派의 선도 아니고, 내가 제멋
대로 말하는 선도 아닙니다. 이미 이러한 선이 아니라면, 결국 무엇일까요?
여기에 이르러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 역시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님이 스스로 살펴보길 바랍니다.
- 대혜大慧어록 <眞如道人에게 보임> 중 -

◇ 견해見解를 만들지 말라. ──────────────────────────────
01). 법은 본래 분별되지도 않고, 이름도 없고, 견해見解도 없다.
다만, 사람이 스스로 분별하고, 이름 짓고, 견해를 만든다.
02). 나누어지지 않는 법을 분별分別하여 나누기 때문에 허망하고, 이름 없는 법法에
이름을 붙이기 때문에 허망하고, 견해 없는 법에 견해를 세우기 때문에 허망하다.
03). “법은 마음이다.”라는 견해見解를 짓지 말라.
“법은 마음이 아니다.”라는 견해가 뒤에 숨어 있다.
04). “법은 움직임이다.”라는 견해見解를 세우지 말라.
“법은 움직임이 아니다.”라는 견해가 뒤에 붙어 있다.
05). “이다.”는 “아니다.”가 만들어 주고, “아니다.”는 “이다.”가 만들어 주니,
“이다.” 하면 곧 “아니다.”이고, “아니다.” 하면 곧 “이다.”이다.
06). 법法에는 긍정肯定도 없고 부정否定도 없다.
긍정과 부정은 사람이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07). 긍정肯定은 부정否定의 앞면이고, 부정否定은 긍정肯定의 뒷면이니,
긍정 하면 부정이 함께 붙어 있고, 부정 하면 긍정이 함께 붙어 있다.
부정否定 없이 긍정할 수 없고, 긍정肯定 없이 부정할 수 없다.
08). 그러므로 긍정肯定이 곧 부정이고, 부정이 곧 긍정이다.
그러므로 긍정은 긍정이 아니고, 부정은 부정이 아니다.
09). 법에는 긍정도 없고 부정도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 허망한
분별을 일으켜 긍정이니 부정이니 하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10). 그러므로 “법은 무엇이다.”라는 견해는 망상이며,
“법은 무엇이 아니다.”라는 견해도 망상妄相이다.
11). 법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일체법이니,<無二相>
진실로 법에는 일체의 견해가 용납되지 않는다.
12). 그러므로 “견해가 곧 망상이다.”라는 견해도 짓지 말라. 이 역시 망상妄相이다.
“긍정이 곧 부정이고, 부정이 곧 긍정이다.”는 견해도 짓지 말라. 이 역시 망상이다.
13). 옳다는 것도 버리고, 그르다는 것도 버리고,<兩邊을 여의고>
일체 견해를 짓지 않는 때에 당신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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