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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협화를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Chapter 2. 파천황(破天荒)
02.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
1932년 1월 8일, '관동군 및 만주군 점령 하 봉천'에서 제1차 협화회 확장회의가 개초되었습니다. 만주 지역을 경략하는 데 성공했으니 이 곳에 어떤 정체를 수립할 것이며 향후 활동방향은 어떠해야 하는 지에 대한 논의가 불붙었습니다. 일행들을 비롯해 만주, 조선, 일본 본토의 인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모인 목적은 같았으나, 얻고자 하는 바는 제각각이었죠. 우선 조선총독부 측 인사들은 만주 역시 조선총독부의 간접적, 가능하다면 직접적 통할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내지에서 온 본국 인사들은 만주에 별도의 총독부를 설치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명목상 독립적인 괴뢰국 설치를 원했습니다. 만주군 및 협화회 내 중국인들은 신생 만주국이 최소한의 독립성을 유지하길 바랬죠.
맨 처음 제기된 의견은 협화회 임시의장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쪽에서 주장한 '청조 복벽론'이었습니다. 만주는 만주족의 뿌리이고, 만주족의 제국은 청조이니 이를 복원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직선적인 주장이었죠. 그러나 반응은 상당히 부정적이었습니다. 실패한 제국의 실패한 황제를 불러다가 국가원수직에 앉혀놓은들 그가 국가통합의 상징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죠. "도쿠가와 막부를 도쿄에 다시 불러다놓으면 내지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냐"는 김상덕의 말에는 아무도 제대로 반박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조선총독부의 직할로 두자는 의견, 그게 안된다면 내지의 황족을 불러오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유럽의 정치환경에 익숙했던 아나스타샤 입장에서는 외국 왕족을 왕이나 황제로 앉혀서 실권을 자연스럽게 내각에 이양하는 방안이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죠. 이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는 듯 했습니다. 만주는 기본적으로 관동군의 '진출'로 말미암아 일본제국이 획득한 영토이고, 조선총독부가 관리하는 것이 힘들다면 만주에 별도의 총독부를 세우는 것 정도는 일견 나쁘지 않은 방안 같았죠. 일행들이 반박할 말을 찾고 있을 때, 일본제국 외무상 시데하라 기주로가 일갈을 날렸습니다. 길게 말했지만, 요지는 결국 "그따위로 나오면 영국이고 미국이고 아무도 인정 안해줄텐데, 니들 소련이 밀고 내려오면 막을 힘 있음?"이었습니다. 결국 이 의견 역시 처참하게 침몰했죠.
조선귀족 박영효가 이왕(영친왕)을 옹립하자는 구상을 중간에 꺼내는 소동이 일긴 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독립국가의 수립이었습니다. 구 봉천군벌의 지휘관으로서 이미 만주국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있는 장징후이(張景惠)를 국가원수로 하는 공화정체를 부숙경이 제시하자, 장징후이는 헛기침을 하며 '자신은 그럴 역량이 없다'며 고사하는 척을 해댔습니다. 철저한 반미반영주의자인 이시와라 간지 역시 지금은 국제사회의 눈치를 조금은 봐야 하는 상태라는 점을 인정했기에 - 그리고 그는 애초에 만주국이 독립국으로 출범하는 것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 장징후이의 집정 추대안을 찬성했습니다. 다만 이미 군령권을 쥔 그에게 통수권까지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고, 대신 군정권을 가진 국방상에 관동군 출신 인물을 '한시직으로' 임명하는 안이 채택되었습니다. 공석이 된 만주군 사령관 자리에는 마잔산(馬占山), 국방상에 전 관동군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 征四郎), 국무원 총리에는 짱스이(臧式毅)가 지명되었죠. 이는 자연스럽게 본회의로 이관되어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의결되었습니다.
이후 만주국의 국호는 '만주협동공화국'으로, 헌법은 노사정 삼각협동을 강조하는 협동사회주의적 요소가 강조되는 형태로 채택되었습니다. 여담으로 마사다케는 본래 더욱 급진적인 사회주의적 초안을 제안했지만 '아쉽게도' 이는 채택되지 못했죠. 그는 조용히 입맛을 다셨습니다.
한편 이시와라와 일행들은 중국에서 새로 들어온 정보에 관해 의논했습니다. 국민당 좌파의 왕징웨이가 장제스와의 불편한 동거를 끝내고 실권을 잡고싶어하며, 독일에 몇 차례 다녀온 뒤로는 보수혁명(Konservative Revolution)의 방법론을 일부분 수용하는 것 역시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일행들은 논의를 통해 장제스에 비판적인 군벌들을 모아 마침 코민테른과 사이가 벌어져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마오쩌둥과도 합작하게끔 유도하는, 이른바 '왕-모 공작'안을 도출했습니다. 이 공작이 실행되면서 국민당 좌파는 한간이면서도 좌파로 남는 기묘한 모습이 연출되었고, 장제스-왕징웨이-마오쩌둥의 '삼걸'이 서로를 이용해먹는 20세기 삼국지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03. 조선 출병
조민양행 사장 김필중은 조선의 상황에 몹시 불만이 많았고, 때마침 열심히 노력하며 살다 보니 조선의 불안불안한 현상을 뒤집을 수도 있는 위치에까지 올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독자적으로 조선 내 노동운동 지도자들 및 농촌계몽가들을 만나 여러가지 '가능성'을 설파했고, 지난 만주사변 때부터 좀체 진정세를 보이지 않던 조선 내 상황은 총파업과 소작쟁의의 전면화 및 과격화로 인해 더욱 나빠졌습니다. 임명된 지 불과 몇 개월째인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은 본국에 증원 파견을 요청했고, 본국에서는 어전회의가 열렸죠. 어전회의에서 사이토를 비롯한 온건파와 (황도파의 수장 격인)아라키 사다오 육군대신 등 강경파의 극한 대립이 목격되었습니다. 통제파, 황도파를 막론하고 육군의 급진적 청년장교들은 사이토 마코토 전 총독을 용공좌익 빨갱이라며 공공연하게 삐라를 살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민간 관료들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최종 채택된 것은 사이토의 온건론이었습니다. 조선인 정무총감 임명 및 자치의회 개설을 통해 급진 독립세력과 온건세력을 갈라치기하자는 전통적 'divide and rule'의 술책이었죠. 더불어 관동군을 파견해 남은 소요세력을 진압하자는 세부계획 역시 세워두었습니다. 정말 완벽하고도 정석적인 계획이었으나... 그들은 관동군 수뇌부가 일본의 조선 지배 수호를 도울 생각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가장 큰 패착이 되었죠.
1932년 3월 16일 조선에 도착한 관동군과 만주군 소속 약 5개 사단은 오자마자 깽판을 터뜨렸습니다. 우선 김상덕이 이끄는 만주군 제1사단과 관동군 예하 제130여단 병력이 독립운동세력의 행각으로 위장해 경성 주위의 전신소를 모조리 폭파하고 철도를 망가뜨린 뒤 모든 주요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경성을 고립시켰고, 그 뒤 부숙경이 위조된 명령서를 조선주둔군 수뇌부들에게 들이밀며 '관동군-만주군-조선군 간 임시통합막료부'가 설치되었다고 약을 치며 이들을 창경원에 불러모았습니다. 아나스타샤가 이들을 적당히 붙잡아두며 시간을 끄는 동안 관동군 헌병대사령부 예하의 헌병들이 들이닥치며 조선군 수뇌부들을 몽땅 일망타진했죠.
그 뒤는 일사천리였습니다. 종로경찰서, 서대문형무소, 용산 무기고, 동양척식주식회사 본사, 그리고 조선총독부를 접수한 관동군-만주군 혼성병력은 자결하려던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을 제지하고 그를 강압해 "조선의 상태를 제2차 한일협약 체결 이전으로 환원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했습니다. 즉, '총독부를 해산하는' 명령이 조선총독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김필중이 끌어모아 무장시킨 의용군은 총독부 앞마당에 도열해 독립만세를 외쳤죠. 조선의 독립은 기정사실처럼 보였습니다.
다만 이는 결국 관동군에 의해 조력된 독립이었습니다. 조선 건국동맹(훗날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은 조선을 손잡이로 하여 만주의 막대한 자원과 가능성을 통해 번창하는 만선의 모습을 꿈꾸었지만, 이는 현재 상황(산업화된 조선, 황무지 만주)을 놓고 보았을 때 사실상 조선이 만주를 지배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양측 사이 고성과 험담까지 오가면서 이 제안은 없던 일이 되었죠. 가네다의 '감사할 줄 모르는 조센징' 폭언, 후네스키의 '순양함 한척 박히면 꼼짝못해' 발언 등이 이어지면서 건국동맹 측은 코너에 몰렸습니다. 이 틈을 타, 귀신같은 생존본능이 발현된 친일파(이자 원래 정무총감 내정자) 윤치호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의 의견은 놀라웠습니다. 마치 바퀴벌레같은 생존-적응본능을 보여준 윤치호는 "설령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어 내 재산을 다 내어주어야 한다고 해도 조선 근대화 완성의 길에 '중앙에서' 기여할 수 있다면 만족한다"는 놀라운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김상덕, 부숙경 등은 욕설을 뱉으며 혀를 내둘렀죠. 그러나 관동군은 이런 기회주의자들과 굳이 같이 일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에, 오히려 이를 이용해 건국동맹 측을 압박하는 카드로 쓰기로 했습니다. 결국 여운형 위원장은 만-선 양국의 관계를 한일의정서에 준하는 수준으로 규정하고, 양국 간 이중국적 허용, 무비자 여행 허용, 단일통화, 관세혜택 등을 골자로 한 국가 간 연합 창설안을 받아낸 채 만족하고 서명했습니다. 연합의 이름은 '범아시아연방(Pan-Asian Union)'이 되었다고 합니다.
'경성 협정' 체결 후 서로 악수를 나누는 자리에서, 본래 건국동맹의 극좌 친소파를 담당하던 박헌영이 돌발행동을 저질렀습니다. 방금 윤치호의 그 바퀴벌레같은 생존력을 목격한 박헌영은 저 자를 반드시 죽여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 했습니다. 결국 총성과 함께 윤지호의 머리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고, 이시와라 간지와 마사다케는 조용히 건국동맹 일원들을 불러 "코민테른이 조선 장악하게 두면 결국 우리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며 엄포를 놓았습니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 새로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 거국정부는 반민특위법을 제정하면서 친소 반민족행위자와 친일 반민족행위자 모두를 처벌한다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04. Fading Sun
"충동적으로 세워진 제국은 결국 충동적으로 붕괴했다." - 샤오즈푸
조선이 아예 독립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일본은 또 한번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어느새 돌아온 오카와 슈메이는 통제파 청년장교들을 규합해 황도파를 향한 일격에 나섰고... 1932년 4월 14일... 하시모토 긴고로 등 통제파 내 강경 모험주의자들이 아라키 사다오 육군대신을 백주대낮에 권총과 군도로 암살하고 마사키 진자부로 참모차장, 오바타 토시로 참모본부 제3부장 등을 집무실에서 그대로 참살하는 등 대대적인 '참수작전'을 실행했습니다. 또한 황도파 장교 및 관련자들을 향한 무차별 테러가 이어졌습니다. 이에 질세라 살아남은 황도파 장교들은 즉시 황거로 돌입해 쇼와 덴노의 신변을 '보호'하는 한편, 현재 일본제국 의회 및 내각이 '매국 용공 대역집단'이라 규정하고 이미 체포한 도조 히데키와 나가타 데쓰잔을 살해했습니다. 그도 모자라 천황의 무한한 대권을 '대리'하며 와카쓰키 레이지로 대장대신, 이누카이 츠요시 내각총리대신, 사이토 마코토 전 총독 등을 대역 혐의로 체포했으며, 그 과정에서 사이토는 '현장의 재량'에 따라 조선 상실의 전범 혐의로 즉각 처단당했습니다.
사이토 마코토가 황도파에 의해 사망하자 해군 역시 황도파를 '조적'으로 규정했습니다. 후시니노미야 히로야스 해군군령부총장(참모총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육전대 병력을 동원해 도쿄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한편, 황거 인근에 설치된 황도파의 임시사령부를 향해 함포사격을 날리기에 이르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항대와 해항대 소속 전투기들이 공중전을 벌이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해군 군령부총장과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육군 참모총장은 급하게 만나 이 사태를 어떻게든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리미터가 풀려버린 황도파와 통제파는 인간 옥새 쟁탈전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미 황거에 포격을 쏟아부은 해군 역시 더 이상의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 자신들만의 일종의 '막부'를 형성했습니다. 특히 이미 대역을 저지른 해군은 쇼와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덴노의 맏동생 야스히토를 척살하고 현 덴노 히로히토를 다음 척살대상으로 지정한 채 자신들과 연이 닿은 노부히토 친왕의 '신변을 확보'해 자신들만의 덴노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일본 내 모든 권위가 무너져가고 기간산업 역시 붕괴조짐을 보이자 생필품 가격은 당연히 폭등했습니다. 물론 조선을 상실하면서 곡물가격 역시 폭등했습니다. 구 사회대중당을 포함한 좌익 운동가들은 이때다 싶어 총파업을 일으키는 아수라장이었죠.
결국 범아연방 산하 '애국전위대'로 갈곳 잃은 구 친소파 또는 극좌파 조선인들을 포섭한 - 친위대로 삼은 - 마사다케, 그리고 공화국 안전기획부(안기부) 제3부장으로서 '내지'의 혼란을 범아혁명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동행한 부숙경은 기타 잇키의 측근 니시다 미쓰기를 통해 그의 은신처에 당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을 좌익 연합조직의 본거지인 '아사키리 회관'으로 이끈 기타 잇키는 그곳에서 "천황을 통해 사회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아예 천황의 권위를 '무'로 만들어야 한다"는 지론을 설파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는 방식은 '황도파 자신의 손으로 쇼와를 살해하게 만드는' 방법이었죠. 마사다케와 부숙경의 의논 끝에 '천황과 목소리가 비슷한 사람을 찾아 마치 그가 통제파에게 구출명령을 내리는 듯한 옥음방송을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채택되었습니다. 어차피 천황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본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당대의 녹음 음질로 이를 알아보는 것은 어차피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사실 통제파가 진위 따위에 관심을 가질 확률 자체가 희박했죠. 녹음본이 진짜여야 황거로 진입할 수 있고, 황거로 진입해 천황을 확보해야 자신들이 사는데 그 누가 이 녹음본이 가짜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통제파는 전차부대와 육군항공대까지 동원하며 황거와 긴자 거리를 급습했습니다. 긴자 미쓰코시 백화점에 임시사령부를 차린 황도파는 아예 백화점을 붕괴시킬 기세로 포격과 폭격을 퍼붓는 통제파의 화력에 맥을 추지 못했고, 황거를 지키는 병력들 또한 차츰 중과부적 상태에 처했습니다. 황도파는 통제파에게 천황을 빼앗기는 즉시 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황거 수호와 '인간옥새 유지'의 희망이 없다는 판단이 드는 즉시... 쇼와를 살해했습니다. 살해된 천황과 텅 빈 황거를 본 통제파 장교들은 망연자실에 빠졌습니다. 허무할 뿐 아니라, 히로히토와 야스히토가 모두 죽었으면 그 다음 계승자인 노부히토를 데리고 있는 해군에게 정통성이 있는 상황이 벌어졌기에 황도파와 통제파가 모두 역도로 몰릴 위기였죠. 이에 통제파를 이끌던 '기무라 헤이타로(木村 兵太郎)' 대좌는 훗날에도 두고두고 회자될 미친 짓을 저질렀습니다. 쇼와 덴노의 유훈을 빙자해 "반즉무귀(叛卽無歸)의 칙허", 즉 "반역의 마음을 먹었다면 그 즉시 무슨 방법으로도 돌이킬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 잔존한 황족과 화족, 황도파를 모두 쇼와 덴노를 죽인 반역자로 규정하고 무차별 살상하라는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던 것이었죠.
거진 1달이 넘는 기간동안 일어난 엄청난 골육상쟁 이후, 일본에 남은 황족이나 화족이란 거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미국, 중국, 영국, 심지어 조선으로 도망친 이들이 부지기수였으며, 그나마도 황위계승권이 있는 이들은 아예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일본인들은 모조리 아노미 상태에 빠져 누구라도 좋으니 이 혼란을 정리해줄 존재를 원하게 되었죠.
일이 이렇게까지 번지자, 영국을 위시한 협상국들은 일본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고 만주-조선의 범아시아연방이 극동에서 소련의 남하를 막아주기를 바라기에 이르렀습니다. 국제연맹 가맹이야 이들이 명목상 반소반공을 표방하는 이상 소련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단장기적인 투자를 통해 이들을 키워줄 수도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외교가에서 퍼지기 시작했죠. 물론 혹자는 "니들이 그럴 여유나 있고?"라는 회의론을 제기했지만 말입니다.
바야흐로, 광기의 시대였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뭐 어느시점부터 쌓았냐가 중요한거 아닙니까.
@렌지파일 전 다들 동의하면 찬성하겠습니다.
@렌지파일 후네스키는 펜을 들고 오면서 빨리 사인하자고 재촉합니다.
@하일레 셀라시예 남방작전과 말레이해전(?) 계획 짜셔야겠네요 ㅋㅋ
@E.E.샤츠슈나이더 16시 정각까지 이의신청을 받겠습니다.
@렌지파일 이미 7년간 한 행적을 읽어보시면 영미에 대한 복수심과 동남아에 대한 대규모 상륙작전 준비 밖에 없습니다.
"류조짱...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하일레 셀라시예 물론 영국 조지기전에 중국부터 해결을 봐야겠지만...
@E.E.샤츠슈나이더 쉽게 정리:
- 마르셀 데아는 프랑스 내 반독파의 수장으로, 친독파를 곧 정치적으로 축출할 예정. 그 과정에서 범아와의 친선과 협력을 다진 것이 자산으로 활용됨.
- 프이vs영독 간 전쟁이 발발한다면 프랑스는 영국의 상륙에 대항할 병력을 해안방어로 돌린 뒤 남은 병력으로만 독일을 막아야 하므로 방어전이 불가피함. 알프스 쪽은 아무리 이탈리아군이라도 사람새끼면 막겠지.
- 그런데 만약 범아시아연합이 영국과 충돌한다면 영국은 동양함대에서 함선을 못 차출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유럽이나 대서양에 있는 함대까지 불러와야 할 판임. 그렇게 되면 프랑스 상륙도 어려워진다.
- 그러면 그만큼 우리가 대독전선에 투입 가능한 병력수도 늘어나고, 그러면 우리가 유리해진다.
- 고로, 범아시아연합과 공투하는 것은 영국과 독일의 쉰내나는 틀딱들을 방어해내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E.E.샤츠슈나이더 그럼 이 세계에서는 20차 이존초강 전투까지 볼 수 있는 건가...
@E.E.샤츠슈나이더 사람 새끼에서 터졌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
@하일레 셀라시예 일단 다들 반대는 없으니 통과군요.
다 끝난후
"마침 부산까지 왔으니 여기서 국밥좀 먹고가자...조선인이라는 피는 못속이나 보다...먹고 가서 북만주에다 유대인 자치구 세우자..."
@E.E.샤츠슈나이더 이탈리아라면 히말라야에 갖다놔 방어하라 해도 밀릴 것 같은데.
@카라멜 마끼아또 통일 직후라면 진짜로 그랬을지도...
@mothership 혹시 김필중은 1938-9년 시점에서 직책이 어떻게 될까요? 일단 재벌 회장인건 확정인데... ㅋ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만주 대사 그때까지 할 것 같지는 않고 의원 당선시 백지신탁 조항이 없으면 국회의원도 하고있을 것 같네요. 백지신탁 조항이 있으면 조민그룹 회장+전경련 회장을 하고 있겠네요.
@E.E.샤츠슈나이더 참고로 김필중은 자동차 산업에 욕심이 있습니다!
그렇게 부산에서 프랑스와 범아시아연합 간의 "상호경제협력 및 지역안보협력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1) 프랑스군이 광저우만에서 철수하며 2) 독일이 후원하는 난징 정부와 적대하고 있는 광저우 정부를 공인하며 3) 범아시아연합과의 무역장벽을 낮추고 상호교류를 증진하는 등의 내용이나, 실제로는 위에서 논의한 대로입니다.
스페인에서는 공산당이 공화국연합을 먹으려고 했고, 그 결과는 (12 이상) 3/4/1 = 8. 실패입니다. 모스크바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공산당을 팽해버렸습니다. 이에 공산당은 분열하여 각각 팔랑헤파에 합류하거나, 사민주의자로 전향해 공화국연합에 다시 붙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은 1938년까지 어떻게 진행되었냐면, (기준 10.5)
6/4/4 = 14.
팔랑헤파가 (한끗 차이로 내전을 끝내지는 못했어도) 시종일관 우세를 점하고 있습니다. 곧 내전은 그들의 승리로 종결될 것으로 보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사유재산과 종교, (열린) 민족주의를 인정하는 사회주의가 등장하니 그야말로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는 수출용 무기가 되어버렸네요 ㄷ
1938년 9월 30일,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프랑스 5개국 간에 개최된 뮌헨 회의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호르티 총리 측이 극적으로 한발 물러서며 전쟁의 위기는 '일단'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데텐란트에 거주하는 독일계 주민들이 소동을 벌이며 체코슬로바키아의 정국은 요동쳤습니다.
다만 독일이 끝까지 오스트리아를 돕지 않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지금 즉시 전쟁을 벌일 경우 폴란드에게서 단치히 회랑과 서프로이센 지역을 탈환해내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한 독일 군부가 지원을 주저했기 때문이었죠. 전쟁은 그저 조금 미뤄진 것 뿐이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번 광저우만 반환을 가지고 "눈 앞에 있는 중국 주권 침탈의 상징인 열강들의 조차지를 반환받지 못하고 오히려 내버려둔 무능한 장제스와는 달리 왕정위 각하께서는 총 한발 쏘시지 않고 대화를 통해 우리의 주권을 되찾아왔다!"라고 중국 대륙을 상대로 선전할 수 있어요?
@렌지파일 그렇죠. "타락한 노동자 국가"의 대체재가 갑툭튀한 격이니까요. 물론 이쪽도 완벽한 대체재는 아니지만 존재 자체로...
@E.E.샤츠슈나이더 사실 언론의 자유도 허가하고 싶은데 전운이 감도는지라 느슨하더라도 검열이 불가피한...
@카라멜 마끼아또 즉 연합의 성과를 왕징웨이한테 돌린다는 거죠? 물론 가능합니다.
정당성이 좀 더 강화되겠군요.
@E.E.샤츠슈나이더 근데 지금 유럽은 다른데가 쏠수도...
@E.E.샤츠슈나이더 네네. 그렇게 선전해 중국인들의 민심을 광저우 정부로 가져오려고요.
반제국주의 및 중국 주권 회복의 상징 왕정위 VS 주권회복은 커녕 나라를 분열시키기 바쁜 장제스의 구도를 만들려고요.
사실 제가 광저우만 얘기 꺼낸 이유가 이것 때문에 그런거.
@E.E.샤츠슈나이더 본래 나치좌파나 보수혁명같은 극단주의자로 가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구사민당 정치인처럼 되어버린..
(https://en.wikipedia.org/wiki/Old_Social_Democratic_Party_of_Germany)
@렌지파일 결국 혁명문학 트릴로지로..!
여담으로 일본, 대만 국기, 범아연합 깃발이 어떨지가 좀 궁금하기도 하네요. 조선이야 그냥 태극기 쓰면 될테고…
@E.E.샤츠슈나이더 레플 혁일깃발을 읍읍
@E.E.샤츠슈나이더 만주도 걍 만주국 국기써도 무방한데...
대만은 타이완 민주국 시절껄 쓰려나요?
@E.E.샤츠슈나이더 대만은 대만 땅 그려진 그 국기 쓰겠고... 범아 연합 연합기는 궁금하네요. 설마 lgbt처럼 7색 무지개 깃발은 아니겠지?
+ 갑자기 생각난건데... 마르텔과의 대담중 사소한 일화 정도 덧붙여도 될까요?
@E.E.샤츠슈나이더 사실 드립이었고 일본기는 이 깃발에 색깔을 변용한게 아닐까 싶습니다.(적색 대신 검은색일 수도 있고..) 대만기는 아마도 대만민주국일테고, 범아연합은 고민되네요. 흠..
@렌지파일 범아 연합이 고민되긴 하죠. 유엔기 변용해서 아시아만 있는 깃발을 만들어야 하나?
오늘 저녁이랑 주말에는 일이 꽤 바쁠 것 같으니, 금요일에 조금 일찍 시작하면 어떨까 합니다. 한 3-4시 사이..?
전 좋습니다
좋습니다
상관없습니다.저녁식사나 갑자기 일시키지만 않음
쓰읍... 학원에서 컴알 시험 준비해야 하는 시간대인데...
저는 빠지길 잘했네요. 이 시간에 하면 낄 수가 없었을듯 ㄷ
@카라멜 마끼아또 그런데 이참에 새글 파고 거기서 진행하는건 어떨까요?
@카라멜 마끼아또 안그래도 3화 올리려고요. ㅋㅋ
3~4시면 금요일에는 잠깐잠깐 참여해야겠네요...
번외: “배신의 밤(Verratsnacht)”
1934년 7월 2일, 총통 관저.
아돌프 히틀러:
“…지금 뭐라고 했소, 베크 총참모장?”
루트비히 베크:
“루돌프 헤스를 해임하고 쿠르트 폰 함머슈타인에크포르트 장군을 부총통에 임명할 것. 슈츠슈타펠 얼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것. 카나리스를 유임할 것. 프리치를 내무장관에 임명할 것. 이해가 잘 안 되십니까?”
아돌프 히틀러:
“이….이이… 난 당신의 총통이야, 베크! 그따위 요구가 가당키나 한 줄 아는가! 난 패배주의에 빠진 이 독일 민족을 구원한 사람이란 말이다!”
루트비히 베크:
“패배주의라, 말 한 번 잘 하셨습니다. 독일이 왜 대전쟁에서 패배했을까요? 그 잘난 유대-볼셰비키 세계정부가 등 뒤에서 칼침을 놓았기 때문이라고 하실 겁니까? 애초에 저능아들이나 믿을 그따위 뜬소문, 각하의 집권 정도에는 무척 도움이 되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돌프 히틀러:
“난 대전쟁에서 희생당한 독일의 아들딸들을 책임지는 몸이야. 그 따위로 말하지 마!”
배후중상설을 힌덴부르크등도 믿었으니...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책임이라… 그래서 우리 잘나신 총통 각하께서는 대전쟁 내내 어디 계셨습니까? 야전병원 침대에서 베개싸움을 하셨다고요?”
아돌프 히틀러:
“마켄젠 원수..!”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상의를 들어올리며) “각하, 이 총알자국이 언제 생긴 건지 아십니까?”
아돌프 히틀러:
“그만 하시오. 나 역시 대전쟁에 참전…”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1870년, 스당 요새를 탈취하다가 맞았소. 의무병이 총알을 빼내려고 보니 없더라고. 알고 보니 반대쪽으로 뚫고 나갔던 거지. 그리고 여기 이 총상은 이듬해 파리 코뮌을 진압하다가, 여기는 의화단 놈들의 죽창에 맞은 상처… 그리고 여기 이 흉터가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생긴 상처요.”
아돌프 히틀러:
“이보시오..”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이제 ‘책임’이라는 게 뭔지 좀 알겠지. 알겠으면 그 좆같이 비리비리한 검은 예복 입은 친위대 애송이들에게 제 어미 젖이나 더 먹고 오라고 좀 전해주게. 알아들었나, ‘히틀러 상병’?”
(국방군 장교들이 일제히 총기의 노리쇠를 후퇴시키며 위압감을 준다.)
베르너 폰 프리츠:
“대신, 각하께서는 장차 새로 태어날 대독일의 상징이 되실 겁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일은 안 하고, 얻는 것은 많으니… 이거 본의 아니게 공산주의자가 된 기분이군요. 각하께서 협조해 주신다면 호엔촐레른 황위 복위는 영구히 포기하지요.”
아돌프 히틀러:
“폐허가 된 국토 위에서 후회해 봐야, 그 때는 너무 늦을 걸세.”
루트비히 베크:
“후회는 룀이나 괴벨스같은 빨갱이를 애국자라며 물고 핥은 각하가 지금 하셔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두말 말고 서명이나 하십시오.”
1934년 6월 30일 돌격대와 국방군 일부가 호응한 쿠데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모든 권력을 잃고 말았다. 이것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