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두레박>을 다시 꺼내다.
수녀님의 첫번째 산문집 두레박을 다시 꺼내 읽게 된 것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계되었습니다. 노벨문학상 기념으로 한강작가의 부친 한승원작가의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TV에 나왔고, 이 영화 속 주인공이 손에 들고 있던 책이 '두레박'이었지요. (제가 남긴 게시글 '놀라운 발견, 명작 속 명작' 참고) 다시 읽어도 너무 귀한 책, 두레박. 물을 길어올리는 두레박처럼 수녀님의 삶에서 길어올린 진솔한 고백이 제게도 울림이 됩니다. 그중에서 세 대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 몸살 (초판212쪽, 신정판248쪽)
더 맑고, 투명하고, 순수한 기도를 바치고 싶어 아무도 모르게 몸살을 앓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수녀님의 글은 몸살로 잉태한 기도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맑고, 투명하고, 순수한 기도와 삶을 살아내려고 애쓴 수녀님께서 남모르게 앓아낸 몸살, 그 몸살 후에 낳은 글이- 지금 내가 손에 들고 읽는 책 속의 시와 산문이구나 생각하니, 수녀님의 글과 책이, 아니 수녀님 존재 자체가 더 귀하게 여겨집니다. 물론 수녀님께서는, 귀한 존재는 예수님과 당신의 작은 이웃들이라고 말씀하시겠지만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 글이 위로도 되었습니다. 그리 잘 살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인교사(기독교사)로서 잘 살아내야 한다고 제 자신을 채찍질해왔던 날의 이런저런 힘듦과 아픔이, 꼭 필요한 몸살앓이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수녀님의 몸살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요.) 지식을 가르치는 교사면 된다고 말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나누고 싶은 기독교사로 살고싶었는데, 그렇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는 나의 약함과 악함에 또 괴로워도 했더랬죠. 그런데 그 괴로움이 사실은 더 맑고 투명하고 순수하게 살고자 했던 몸살과 같은 기도였다 생각하니, 감사가 크게 더해집니다. 나를 다독여주고 싶기도 합니다.
이해인수녀님께서 앓아낸 몸살 덕분에 제가 큰 유익을 맛봅니다.
2. 박두진 (초판225쪽, 신정판264쪽)
네?! 박두진시인님이요?! 학창시절 문학 수업에서 배운 청록파 시인 중 한 분이신 박두진교수님이요?! 수녀님 곁에 있는 분들의 면모를 보면, 수녀님께서 얼마나 좋은 삶을 살아오셨는지를 알 수 있지만, 박두진 교수님과의 여러 일화는 늘 새롭고 신기합니다. 뭐랄까, 역사의 한 장면을 지켜보는 시간여행하는 기분이랄까요.
이번에 두레박을 읽으면서는 박두진교수님께서 이해인수녀님을 소개하는 한 대목에 눈이 갔습니다.
그는 특이한 개성의 서정 시인이기도 하다
두 음절의 네 단어. 특이, 개성, 서정, 시인. 이해인수녀님이 '시인'임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 그런데 '서정'시인이라 정의하면, 저는 살작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제가 수녀님의 시를 평할만한 자격이 전혀 없지만) 이해인수녀님의 초기 시집에는 수도자로서의 결연함이 느껴지는 시가 많은데, '서정'이란 단어가 그 시를 담아낼 수 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박두진교수님께서 진짜 대단하신 것이 그 앞에 '특이한 개성'이란 말을 더하셔서, 이해인수녀님의 작품과 삶을 완벽하게 담아내신 것 같았습니다. 이해인수녀님만의 개성, 그런데 그것이 여간 범상치 않은 특이한 개성이라 평하시니, '특이한 개성의 서정'이란 표현이 '서정'이라는 말로 다 담지 못한 수녀님의 시세계를 온전히 끌어안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느 시인과도 구별이 되는 특이한 시세계, 어느 수녀님과도 구별된 방식의 특이한 사랑'이 시인 이해인수녀님에게 딱 맞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감히 제가 박두진교수님의 표현에 한 음절만 달리 바꿔보자면, 이해인수녀님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특별한 개성의 서정 시인이기도 하다."
3. 순수와 진실 (초판235쪽, 신정판276쪽)
시를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하듯 나 역시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한 가지 내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마디의 단어도 거짓말은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상상과 체험의 한계를 벗어난 어떤 어휘도 나는 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나의 내면에 와 직접 부딪치지 않은 것은 언어화시키지 못합니다.
소제목이 '이 아프고도 아름다운 멍에를'의 한 부분입니다. 시인이 숙명과 같아 아름답고도 또 아파야했던 수녀님을 생각하면 감사뿐입니다. 이 문장이 제게는, 수녀님이 받아야 했던 오해와 아픔에 대한, 진실한 항변으로 들렸습니다. 항변마저 진솔한 언어로 부드럽게 담아내시다니요. 그리고 이 글의 부제는 '나의 시를 읽는 독자들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이 수녀님의 소망으로 읽혔습니다. 수녀님의 거짓없고 꾸밈없는 순수하고 진실한 글을 받아든 독자들도 순수하고 진실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소망이요. 그래서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요. 어쩌면 이것은 수녀님께서 주님께 드린 내밀한 자신의 기도로써의 시를 책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으신 진짜 뜻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4. <두레박>을 덮으며
이 글을 쓰는 동안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이 글은 수녀님께 먼저 편지로 드렸어야 했나'하는 마음이요. 그런데, 당신과 우리를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고 기억해주는 수녀님이심을 떠올리며, 이 독후감을 모두와 같이 나눠도 괜찮겠다는 안도감이 듭니다. 그래도 이 글을 예쁘게 인쇄해서 수녀님께 편지로 보내드려야 겠어요.
짧기만한 가을이라 괜스레 조바심나는 시절입니다.
이 좋은 계절이 지나기 전에 두레박 일독을 권합니다.
수녀님의 깊은 사랑의 우물을 길어올려 마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이건 저도 인쇄해서
보관하고 싶군요.
램프샘의 감성 지식이
확~~전달되어옵니다
보물의 발견이,,
기쁘고 기쁩니다
두레박은
수녀님의 명작이에요
길.이 길.이
수녀님의 첫 산문집이라 더욱 진실하고 진솔한 고백에 울림이 있는 것 같아요!!!
아/이토록 심도깊은 독후감이라니~~
덕분에 민들레영토가 풍성해집니다.
"당신과 우리를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고 기억해 주는 수녀님"~~^^
아이쿠~ 심도 있는 독후감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수녀님의 글을 읽고 그 감흥을 글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은 한가득입니다.
초심으로 !!!
책이 누더기가 되어질때까지 읽었네요 ㅎㅎ
아~ 누더기가 될 만큼 읽는 마음에는 얼마나 맑은 물이 가득하실까요? ^^
긴글이지만 쉽게 잘 읽었습니다. 막힘없는 유려한 글이라 단숨에 읽히네요.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는 램프님의 밝은 빛을 자주자주 비춰주세요.
아이쿠~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녀님의 글을 읽고나면 자연스레 글로 남기고픈 마음이 듭니다.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녀님의 깊은 사랑의 우물을 길어올려 마시기를 바랍니다.
<리틀램프의 독후감>
꼭지 하나 만들어야겠죠?
늘 기대하게 되고 기다려지네요^^
앗~ 제가 또 그렇게 멍석을 깔아주면 또 잘 못하는 스타일입니다 ^^
나중에 글을 모아서 [이해인 수녀님을 사랑한 리틀램프] 책을 내주세요 ^^ 완판될껍니다~
옛날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우물 물
참 시원하고 맛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