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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낚시의 역사
식료로서의 낚시
인간이 식료를 얻기위해 낚시를 한 것은 후기 구석기 시대까지 추적된다고 하는데 [듀카리온]의 홍수 때 [비라스]가 낚시를 발명하고 시작했다고도 하며, [아담]의 아들 [세스]가 그 아들들에게 낚시기술을 가르쳐 오늘의 발전에 이어진다고도 하는데 [세스]는 기둥에 낚시기법을 조각하여 수학이나 음악이나 그외 귀중한 지식과 함께 뒷날까지 남겼고 그것은 [노아의 대홍수] 때까지 남아서 후세에 전해졌다고 한다.
또 예언자[아모스]가 낚시바늘에 관한 것을 쓴 것이 있고 구약성경의[욥기]에서도 낚시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욥기]를 쓴 [모세]의 시대는 [아모스]보다 훨씬 앞의 일이며 두사람은 선량한 어부였다고 한다.
더 확실하게는 기원전 100년여의 그리스에서도 [호메로스]의 작품 속에 낚시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을 볼 수 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의 낚시는 낚싯대를 든 [헤라클레스]가 담겨져 있는 도자기에서 더욱 명확하게 증명된다.
뿐만 아니라 이때 이미 그리스인은 플라이낚시를 발명하여 쓰고 있었다. 로마시대에 이르러서는 [안토니우스]나 [클레오파트라]가 낚시에 열중하여 낚시꾼으로서도 명성을 얻고 있었으며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잠수부를 시켜 자기 바늘에 고기를 끼우려고 하였는데 이것을 미리 안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바늘에 소금에 절인 고기를 끼웠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부르타스]는 더욱 낚시를 이해하여 낚시나 낚시도구에 이르기까지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언젠가 친구 한 사람이 로마에서 추방되자<자네는 로마의 시끄러움과 먼지, 악취와 악덕 그리고 음모가 소용돌이치는 세계를 빠져나가 [에게해]의 조용한 섬의 자연과 함께 마음껏 낚시를 즐길 수 있지 않느냐>는 내용의 부러워하는 축사를 보냈다. 그리고 큰고기가 걸려도 견디고 휘어져도 부러지지 않는 강하면서 그림자가 수면에 떨어져 고기를 놀라지 않게 하는 성능이 좋은 낚싯대와 고기눈에 잘 보이지 않는 백마털로 만든 낚싯줄을 추천하고 섬세한 테크닉까지 권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고기를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는 최초의 문헌이기도 하다.
또한 같은 시대의 중국의 낚시는 여러 가지면에서 고대 로마나 그리스를 훨씬 능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문헌에 낚싯대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시경]으로 실연한 처녀가 사랑을 잃은 슬픔으로 긴 죽간(竹竿)으로 낚시하던 애인을 사모하는 시구절에서 찾아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낚시꾼의 아내가 그녀가 명주시로 짠 낚싯줄로 남편은 무엇을 낚았을까 하는 시구절인데 벌써 이 때 대나무 낚싯대와 견사로된 낚싯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5세기에 이르러서는 나무나 풀의 줄기로 만든 찌가 나오며 낚시꾼은 찌가 가라앉는 것을 보는순간 입질을 알았다고 한다. 또 명주실로 낚싯줄을, 예리한 바늘로 낚시바늘을, 딸기나무나 대나무로 낚싯대를 만들어 밥풀을 미끼로 많은 고기를 잡았다는 기록도 있다.
취미로서의 낚시
전한의[무제]는 황금의 낚시바늘과 백견으로된 낚싯줄에 금붕어를 미끼로 낚시를 즐겼다고 하며 [태공망]이 [위수]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나 [공자]가 군자는 낚시를 하더라도 그물은 쓰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것등은 이미 낚시가 생활수단이나 직업적인 것이 아닌 취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때나 송나라때의 시문 중에는 낚시가 상당 부분 읆어지는데 많은 부분 어부(漁父)어가(漁家) 어화(漁火)등으로 직업적인 것이지만 많은 중국화에서 보듯이 문인 묵객 혹은 퇴관한 사람들이 한지에서 낚시를 즐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두보]의 시가운데 [공소부]가 강동에서 돌아와서 조용하게 낚시를 즐긴다고 읊은 것이 있는데 고향에 돌아와서 낚시를 하면서 여생을 보낸다는 것은 취미 낚시임은 말 할 것도 없다.
이렇게 식료를 얻기 위한 낚시에서 취미나 스포츠로 낚시가 분류되는 과정이 언제부터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집트의 현존하는 두 그림으로 보아 퍽 오래전부터라는 것 밖엔 알 길이 없다.
하나는 기원전 200년대의 작품으로 가난한 차림의 한 남자가 낚시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노예가 아니면 어부로 추정된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기원전 1400년경의 그림으로 신분이 높은 남자가 낚시로 여가를 즐기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모습과 복장,태도로 미루어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취미로 하는 낚시임이 분명하다고 한다. <원로낚시인 예춘호>
2. 역사 속의 낚시
명상과 행동의 복합체로서의 낚시
고대 한때 인간의 행복은 명상에 있는가 또는 행동에 있는가를 놓고 격론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고 한다.
[명상설]을지지하는 측은 우리들 유한의 존재는 신에게 근접하면 할수록 행복을 발견한다 하여 신의 무한성이나 영원성 그리고 힘과 선량 같은 것을 명상함으로써 만족한다는 것이고 수도원의 고위 성직자도 이에 찬동하여 행동보다 명상을 존중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은 [행동]에 중점을 두며 사람의 생명을 수호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며 남을 위해서나 자기를 위해서 땀흘리고 일하는 것만이 행복하다는 것인데 그들은 행동은 예술과 덕을 교시하는 것이고 인간사회를 이어가는데 필요불가결의 것이므로 [행동]은 [명상]에 앞선다는 것이다.
[월튼]은 이 두 설이 서로 모순된 것은 아니고 특히 낚시에서는 명상적이면서 행동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조용한 강변은 명상하기 좋은 곳이고 낚시인들 또한 즐겨 찾는데 신이 예언자에게 미래의 일이나 높은 사상을 계시할 때는 반드시 그들을 해안으로 불러서 번잡한 것을 멀리하게 하여 명상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게 했다고 한다.
낚시 또한 평화를 좋아하고 신을 공경하는 사려 깊은 인간의 명상에 가장 적합한 놀이라고 했으며 그것은 고대의 예언자와 [그리스도]의 [사도]들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12인의 사도 중 상위의 [베드로][안드레아][야곱][요한]이 어부였다. [그리스도]는 명상적이고 평온하며 어질고 유화한 이들을 선택하여 사도로서 [그리스도]의 축복을 이방인에게까지 전하기 위하여 이국에 보내었으며 [그리스도]가 승천할 때 선택하여 동행한 세 사람 또한 어부였다. [그리스도]를 따르던 다른 사도들도 모두 어부가 되었다는 것이 요한복음서에 기술되어 있다.
이렇듯 성서의 세계는 낚시를 가장 좋은 것으로 손꼽아으며 수렵은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낚시는 조용히 명상하는데 유익하다 하여 허용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여왕시대에 이르러 세인트 폴 교회의 사제장을 한 [노웰]박사는 대단한 낚시 애호가로서 기도 시간 외는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그는 수입의 10분의1을 낚시터 주변의 가난한 사람에게 보시를 했고 낚시터에서 귀가하면 그 누구에게도 귀찮게 하지 않고 세상의 번거러움에서 벗어나서 성직자에게 걸맞는 즐거운 하루를 지낸 것을 신에게 감사드리고는 자기가 낚시꾼이라는 것을 자랑삼았다고 한다. 95세로 세상을 떠날 때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기억려고 정확하였고 정신력도 쇠약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비결이 바로 낚시였다고 한다.
또 [이튼 칼리지]의 학자이던 [헨리와튼]은 한 때 외교관을 지낸 기지가 있고 교양을 갖춘 쾌활하며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낚시에 매우 열중했고 낚시는 여가속의 직업으로서 결코 무료를 달래기 위한 것이 아닌 마음을 쉬게 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슬픔을 잊게하여 흐트러진 생각을 가라 앉히고 과격한 정력의 잔열을 식히며 평화와 인내의 습관을 부여해준다고 했다.
이렇게 중세까지의 낚시의 자취만 더듬어 보아도 낚시가 우리들 삶에 특히 정신적인 삶에 얼마나 큰 보탬이 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원로낚시인 예춘호>
3. 낚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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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많은 문인묵객(文人墨客)들이 자연과 더불어 낚시예찬의 시화(詩畵)를 남긴 기록이 남아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때 것으로 “압록강에 싱그러운 봄이 다시 찾아들매 고기잡이 배가 한가로이 강 위에 떠 있구나”하는 시구는 그 옛날의 멋진 낚시 풍류를 잘 나타낸다. 공자(孔子)도 조이불망(釣而不網)이라 하였는데, 그 뜻은 군자는 낚시를 하되 그물질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낚시꾼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강태공(姜太公)은 고대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 때 산둥성[山東省] 사람으로, 본명은 여상(呂尙)이었다. 웨이수이[渭水] 강가를 찾아 난세를 걱정하고 천하의 경륜을 탐구하며 자연 속에 파묻혀 유유자적 호연지기를 길렀는데, 그는 곧은 낚시로 물고기에는 마음이 없었고 오로지 명상에 잠겨 있었다. 강태공은 국가에 등용되어 정치에 크게 공헌하였는데, 그의 행적은 3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
그가 낚시를 잘해서가 아니라 곧은 낚시로 세월을 낚았다는 이야기이다. 큰 인물이 될 만한 사람을 위빈지기(渭濱之器)라고 하는데, 이 뜻은 강태공이 웨이수이 강가에서 낚시를 하다가 문왕에게 등용되어 한 나라의 재상이 된 데서 나온 말이다. 물론 강태공이 낚시의 원조는 아니며 이미 과학적인 낚시 방법으로 낚시가 성행하였고, 낚시가 삶의 수단이 아니라 취미 또는 즐거움으로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중국에는 조차(釣車)라는 낚시도구가 있었는데, 그 구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오늘날 릴의 시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고대 중국에서는 낚시가 발달하고 성행했음에 틀림없다. 유럽에서의 낚시 역사도 듀카리온 홍수와 비슷할 만큼 오래되었다. 베라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용사)가 처음 낚시를 시작하였다는 설도 있는가 하면, 일설에는 아담의 셋째아들인 셋(Seth)이 그의 아들들에게 낚시를 가르쳐 후세에 전한 것이라고도 한다.
또한 《구약성서》의 예언서에도 낚싯바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의 낚시는 생존수단으로서 고기잡이를 목적으로 한 것이 분명하지만 《플루타크 영웅전》에 보면 낚시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와 클레오파트라(Cleopatra) 시대에 존재하였고, 그들이 낚시를 즐긴 것을 알 수 있다. 고기를 낚는 일 자체의 즐거움과 재미에 바탕을 둔 이 사상은 고금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는데 300년 전에 쓰여진 ‘낚시인의 바이블’라 할 수 있는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의 저서 《조어대전(釣魚大典):The Compleat Angler》에도 ‘명상하는 사람의 레크리에이션’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수긍이 간다. 그것은 낚시인의 기분이며 철학이다.
바다낚시의 장비가 좋아지고 항해술의 발달하면서 바다낚시가 가능하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에도 민물낚시뿐만 아니라 바다낚시도 성행하는 추세이다.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제독과 헬무트 몰트케(Helmuth Moltke) 장군이 낚시인으로 알려졌으며, 정치가로는 비스마르크(Otto Bismark), 스티븐 클리블랜드(Stephen Cleveland),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Hebert Spencer), 음악가 루트비히 베토벤(Ludwig Beethoven), 로시니(Gioacchino Rossini) 등이 있다.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도 낚시의 명수였으며,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는 바다낚시 전문가였다. 오늘날 낚시는 스포츠·레저로서 인기를 얻어 한국의 낚시인구는 약 300만 명이 넘는다. 낚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낚싯바늘이 만들어진 것은 구석기시대의 일이다.
낚싯바늘에서 낚싯줄, 낚싯대에서 릴에 이르기까지 모든 낚시도구가 점차 개량되고 미끼를 좀더 멀리 정확하게 던질 수도 있게 되었다. 미끼도 다양하여 루어 플라이 등을 살아 있는 벌레처럼 보이도록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스포츠로서의 낚시 역사는 한마디로 낚시도구의 발달사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