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수중문화재
1976년 봄부터 9년간 이어진 신안해저유물 발굴은 우리나라 수중고고학(水中考古學)을 동양의 선두주자로 나서게 한 문화사적 대사건이었다. 500t급 선박의 3분의 1 선체를 인양하고, 도자기 3만점, 금속공예품 700여 점, 고급목재인 자단목(紫檀木) 1000여 자루, 그리고 중국 옛 동전을 800만 닢(28t)이나 발굴하여 세계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유물들을 보관하던 목포 해양유물보존처리소는 1994년에 국립해양유물전시관으로 확대 개편되어 목포 갓바위 바닷가 풍광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전시관이 지난달 27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다시 개편되었다고 한다.
비밀일 것도 없으면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 수중문화재의 현황은 놀라운 것이다. 지난 20년간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수중문화재가 발견되어 신고 접수된 곳이 현재 234곳이고 수습된 유물은 5000점이 넘는다.
이에 반하여 그동안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발굴팀이 주어진 장비, 주어진 인력, 주어진 예산으로 발굴 작업을 마친 곳은 불과 15곳이다. 그중에서 완도·달리도·십이동파도·안좌도·대부도·태안 등에서 한선(韓船·고려시대 배) 5척, 진도에서 외국 배(중국 또는 일본 배) 1척을 인양했다. 배 한 척을 인양하는 데 보통 3년씩 걸렸으니 신고된 234곳을 지금처럼 발굴하면 600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절박감에서 문화재청은 재작년에 비로소 18t급 자체 탐사선을 출범시켰고, 그 첫 번째 작업으로 발굴한 것이 주꾸미가 물어 올린 태안의 고려청자였다. 인양작업도 해군과 해경의 잠수부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잠수 훈련을 마친 학예연구원이 직접 발굴 수습했다. 이 발굴 팀을 수중문화재 상주조사단으로 운용하겠다는 것이 국립해양유물연구소의 구상이다. 늦었지만 고맙고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원활한 수중문화재 발굴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체 인양선이 있어야 한다. 차제에 연구소에서 추진하는 200t급 인양선 건조에 필요한 예산(52억원)과 인력(5명)을 관계 부처가 합의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은 정부도 좋지만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태안(泰安) 앞바다에서 또 다량의 도자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재작년 낚시에 걸린 주꾸미가 청자대접 하나를 붙잡고 올라오는 바람에 2만3000점의 고려청자를 인양했는데 이번에는 고려·조선은 물론 송나라·청나라 도자기까지 발견되어 더욱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7] 태안 해저유물
태안반도 만리포와 연포해수욕장 사이의 안흥항(安興港)은 삼남조운(三南漕運)의 중요 경유지인데 그 앞바다인 안흥량(梁·조류가 험한 바다에 붙이는 이름)은 예로부터 선박 침몰이 잦았다. 난행량(難行梁)이라고도 불린 이 안흥량은 진도 명량(鳴梁·울돌목), 강화도 손돌목, 황해도 인당수와 함께 4대 조난처로 손꼽히던 곳이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충청 이남의 세곡(稅穀)을 서울로 운반하려면 안흥량을 경유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해난사고가 빈번히 일어난다"고 특기할 정도였고, 〈조선왕조실록〉에 기초한 통계에 의하면 태조부터 세조까지 60년간 침몰한 배가 200척, 인명피해가 1200명, 손실 미곡이 1만6000석이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고려 인종12년(1134)에는 태안반도 길목을 가로지르는 7㎞의 대운하를 시도하였으나 암반에 막혀 중도에 포기했다. 이 굴포(堀浦)운하는 이후 고려 의종, 조선 태조 때 재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고, 태종13년(1413)에 민력(民力) 5000명을 동원하여 마침내 성공했다. 그러나 어렵사리 완성한 굴포운하로는 작은 배만 다닐 수 있을 뿐이어서 태종은 "공연히 인력만 낭비했다"고 후회했고 이내 폐허가 되어 지금도 1㎞의 자취가 남아 있다.
이렇게 안흥량에서 침몰한 세곡선·조운선(漕運船)·무역선(貿易船)의 물품 중 잘 변질되지 않는 도자기들이 오늘날 귀중한 문화재로 인양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태안에서 근래에 갑자기 해저유물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는 것은 안흥항 앞에 있는 신진도(新津島)에 새 항구를 건설하는 등 숱한 간척사업으로 조류가 뒤바뀌어 천리포 해수욕장의 고운 모래가 쓸려나가고 반대로 갯벌 양식장에 모래가 밀려오는 현상이 해저에서도 똑같이 일어나 벌흙들이 서서히 벗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자연발굴인 셈이니 이것이 전화위복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세월의 아이러니인가.
[6] 입하(立夏)의 개화(改火)
엊그제(5일)가 입하(立夏)였다. 현대사회에서 이날의 의미란 그저 달력상 여름으로 들어섰구나 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 긴밀히 호흡을 맞추며 살았던 조선왕조 시대에는 절기가 바뀌는 입춘·입하·입추·입동마다 개화(改火)라는 의식이 있었다.
옛 가정에서 부엌의 불씨는 절대로 꺼뜨려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이것을 그냥 오래 두고 바꾸지 않으면 불꽃에 양기(陽氣)가 지나쳐 거세게 이글거려 돌림병의 원인이 될 수 있으므로 절기마다 바꾸어 주었다. 이를 개화라 하며 새 불씨는 나라에서 직접 지핀 국화(國火)를 각 가정으로 내려 보냈다.
태종 6년(1406)에 시행된 이 개화령(改火令)은 성종 2년(1471)에 더욱 강화되어 궁궐의 병조(兵曹)에서 새 불씨를 만들어 한성부로 내려 보내고, 고을마다 똑같은 방식으로 집집마다 나누어주되 이를 어기는 자는 벌을 주게 했다. 새 불씨를 만드는 방법은 찬수(鑽燧)라 하여 나무를 비벼 불씨를 일으켰다. 이때 어떤 나무를 쓰는가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에 맞추어 계절마다 달리했다.
봄의 빛깔은 청(靑)색이므로 푸른빛을 띠는 버드나무[柳]판에 구멍을 내고 느릅나무[楡] 막대기로 비벼 불씨를 일으켰다. 여름은 적(赤)색이므로 붉은 살구나무[杏]와 대추나무[棗]를, 가을은 백(白)색이므로 하얀 참나무[�k]와 산유자나무[楢]를, 겨울은 흑(黑)색이므로 검은 박달나무[檀]와 느티나무[槐]를 사용했다. 그리고 땅의 기운이 왕성한 늦여름 토왕일(土旺日·입추 전 18일간)에는 중앙을 상징하는 황(黃)색에 맞추어 노란빛을 띠는 구지뽕나무와 뽕나무[桑]를 이용했다.
어찌 보면 형식에 치우친 번거로운 일로 비칠지 모르나 자연의 섭리를 국가가 앞장서서 받들어 백성으로 하여금 대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살아야 하는 삶의 조건을 그때마다 확인시켜 주면서 이제 절기가 바뀌고 있음을 생활 속에서 실감케 하는 치국(治國)과 위민(爲民)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창덕궁 돈화문으로 들어서면서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바로 찬수개화를 했던 내병조(內兵曹)이다. 궁궐 답사 때는 모름지기 건물 자체보다도 거기에서 행해졌던 의미 있는 일들을 떠올릴 때 더욱 느낌이 커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