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의 길에 들어서기 전 어느 날 친구(오창범.이명홍)와 함께 모인 자리에서
필자가 “나 목사가 되려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물었다.
그 때 친구들은 “너 목사가 되면 잘 할 꺼야” 하고 말해주었다.
그 후 신학교를 다니면서 필자의 마음에 작은 꿈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목사가 되면 서울 영락교회에서 설교를 한 번 하는 목사가 되어야겠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졌다(1981).
담임목사는 아니어도 부목사가 되어 영락교회에서 설교를 했으니 말이다.
영락교회 부임 당시 등록 교인수가 약
5만 명이 넘었다. 장로교 중에서 가장 큰 교회였다.

당회장과 부목사들

당회원 세미나
필자는 영락교회 시무 시
1-5부 설교를 1회 4-5부 설교를 2
회 했다.
설교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회고록(17-1)에 기록할 것이다.

예배 사회 1-5부 설교
1.심방
당시 교회는 15개 교구로 나뉘어 각 교구마다 목사 한 명 전도사 한 명씩 배정되어 그 교구의 모든 것(제직
추천, 결혼 주례, 장례식 집례 ,생일, 돌, 회갑 등 온갖 행사)을 담당했다.
필자는 5년(1981-1985)을 시무하는 동안 은평구. 중구,
강남구(2회). 마지막으로 강동구를 담당했었다.
당시 강동구 미성 APT
3-502에 살고 있던 백광일 동문 가정(김춘자,지원.지훈)과
강남구 방배동 경남 APT
7-1001에 살고 있던 김정남 동문 가정(강정희.현정.문정.나정)을 심방했었다.
김정남 동문의 아내 강권사는 구역 심방 때 동행했으며 여전도회 성경 공부 반에도 출석했으며 여전도회의 책임을
맡고 열심히 봉사했다.
당시 영락 여자 중고등학교(봉천동) 교장으로 재직 중이셨던 송성찬 장로님 가정과 이창로 장로님 가정, 그리고 한경직 목사님을 심방했던 기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송 장로님은 은평구에 살고 계셨는데 집으로 가니 봉천동에 있는 학교에서 심방을 받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다.
이창로 장로님의 가정을 심방했을 때 사모님이 금 목걸이를 선물로 주었던 일이 기억난다.
한 경직 목사님은 은퇴 후 남한 산성에 계셨는데 심방 받으러 교회로 내려오셔서 심방을 받으셨다. 그때 얼마나 진땀을 흘렸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목사님 심방 시 성경은 어디를 보고,
찬송가는 몇 장을 부르고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심방 후 식사 우측은 한 목사님의 사위 이영헌목사
설교는 매주 못하지만 일반 교회의 당회장 목사가 하는 일을 모두 담당했다.
결혼 주례는 평균 한 달에
1-2 회. 장례식 집례는 한 달에 평균 1회
아이들 어른들의 생일,
돌, 회갑, 은혼식,금 혼식 등등은 회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2015년에 모국 방문 중에 김덕현 동문이 식사 자리에서 필자에게 “자기 동생 결혼 주례를 필자가
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한 교구의 세대 수는 작게는
850 세대 많게는 1200 세대였다.
이 모든 가정을 일년에 한 번씩은 심방을 했다.
영락교회에서 5년을 시무하면서 적어도 5천 세대 이상을 심방한 셈이다.
그리고 그 때 만난 사람은 한 세대 당
2명으로 계산한다면 만 여명이 넘은 셈이다.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면 해가 지어 깜깜해야 집에 돌아왔다.
심방 대상엔 구제 대상자.
막 노동자. 회사원, 사장, 교수 .대학교 학장(김치선 장로 서울대 법대).
총장(안세희 장로 연대 총장) 등 다양한 연령과
성격의 교인들과 다양한 직업 종사자들
가정을 심방하여 만남을 가졌다.
이 후 이민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들이 오늘날 동문들을 스스럼 없이 대할 수 있게 한 것 같다.
2.교육부



교육부 전도사와 직원 교육부 수련회
교육부를 담당했다.
교육부에는 영아부,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어머니교실 등이 있었는데 각 부서에
전도사(신학생) 한 명씩 배정 되었다. 그때 전도사 임명을 필자가 담당했다.
그리고 매년 연말에 교회학교 지도자 수련회를 가졌으며 다음 해의 교육 계획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전국 교회에서 이 교육계획서를 보내 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당시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의 요청으로 교사 수련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3.성경반
목사마다 성경 반을 맡아 성경공부를 가르쳤다.
필자가 맡은 반은 안드레 반이었다.

안드레반
안드레 반 중에 박권 집사(명지대 교수.공인회계사)와 홍효숙 집사(후에 권사) 두 분은 필자의 성경 반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필자를 신앙의 아버지라
불렀다. 미국 산호세 영락교회 시무 시 두 내외 분이 다녀갔고 샌디에고에도 다녀갔다. 지금도 계속 연락하고 있다.
광성교회 시무 시 대학 청년부의 부회장이었던 회원이 영락교회 근처 코오롱 회사에 다녔는데 정심 시간을 이용하여
성경공부를 하고 싶은데 필자가 맡아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하여 가르치기도 하였다.
4.교인들의 사랑
영락교인들은 목사를 하나님 다음으로 사랑할 정도로 목사들을 대접했다.
남대문 시장 옷 가게 가면 여기 저기서 목사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한 가게에서 불러 갔더니 애들이 남자냐
? 여자냐 ? 몇살이냐 ?하고 물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가더니 잠시 후 애들 옷을 한 꾸러미 가져 왔다.
여기 저기 다니면서 필요한 옷들을 수거해 왔다고 했다.
이발소에 가도 요금을 받지 않고 음식점에 가도 식비를 받지 않았다.
1년 내내 대심방을 하는 동안 교인들은 목사님들을 하나님 다음으로
여기며 극진히 대접했디.
5.대광 동문들
대광 출신 장로는 김철우.
고상우. 김영기. 이현삼 안순근 등이 있었으며
대광 학교와 관련된 분들 중 장로는 차응옥.
송성찬 .이창로. 이동범. 김두완.
나학진. 김형로, 장진호 .장익성 등이 있었으며
안수집사로는 차인태 .안영선. 방용필 집사 등이 있었다.
대광 14회 동문 집사로는 김성준. 백광영(성가데 지휘),
김정남,조덕웅, 김인식,이춘식 등이 있었고 백광일. 홍형강이 출석하고 있었다.

대광 출신 부목사 한학수(9)
노영한 유희정 김승련 등이 시무했다.
영락교회는 여름 마다 영락기도원에서 각 교구 별 산상 기도회를 개최했다.
산상 기도회시 한경직 목사님의 특강 시간이 있었는데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못하게 되었다. 의논 끝에 필자가 대신하기로 하였다.
갑자기 한 시간을 메꾸야 했다.
교인들에게 ‘제가 교회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 시간 교회사에 대해 이야기
할까요 ? 아니면 간증을 할까요 ?’
하고 물었더니 이구 동성으로 “간증하세요”하고 외쳤다.
그때 “찾은 기쁨”이란 제목으로 아들을 잃어버렸다 15일만에
찾은 이야기를 하였더니 교인들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많았다.
얼마 후 금요 철야기도회 설교 순서가 되었는데 어느 교인이 지난 번 산상 기도회 때 우리 교구 교인들은
듣지 못했으니 오늘 저녁에 설교를 하지 말고 간증을 해다라는 요청을 해왔다.
그래서 영락교회에서 두 번째 이 간증을 하였다.
이 간증은 ‘찾은 기쁨’이란 제목으로 회고록(14)에 기록되어 있다.

아들 찾는 전단

이 사진은 영락교회 부목 시절 교인 중의 한 분이 설악산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필자의 아들을 잃어
버렸다 찾은 사실을 간증하는 것을 듣고 직접 그려준 그림이다.


당시 순복음교회 신앙계에 실렸던 사진

영락 경로원

여전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