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한강 아리랑/ 한석산
32.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이준관
33. 황옥의 사랑가/ 정일근
34. 홍시/ 김시천
35. 휘어진 길 저쪽/ 권대웅
국보문학 시낭송대회 지정시 4(31~35)
31. 한강 아리랑 / 한석산
천년을 흘러도 한 빛깔, 물 파랑 쳐 오는
갈기 세운 물소리 조국의 아침을 깨운다.
한강 1300리 물길 하늘과 땅 이어주는
구름 머문 백두대간 두문동재 깊은 골
뜨거운 심장 울컥울컥 꺼내놓는 용틀임 춤사위
우리 겨레의 정신과 육신을 가누는
민족의 젖줄 한강 발원지 여기 검룡소.
큰 물줄기 맑고 밝게 뻗어 내리는
골지 천과 아우라지 조양 강 휘돌아 친 두물머리 이끈
한강 한복판에 떠 있는 선유도 갈대숲
물새 둥지 튼 그 속에서도 꽃 피웠네.
대한민국 서울 기적 이룬 한강
굴절된 역사의 아픈 눈물 삼키며 제 몸 뒤집는다.
이런 날에 우리 다 같이 부르는 가슴 벅찬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우리 가는 곳 어딘지 몰라도
가버린 것들은 허망하게 아름다운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청동기 문화를 세운, 오늘날 우리 민족의 선조
이 땅 순한 백성들이 원시생활 하던 시절부터
강에 안기던 사람 품을 내주던 강
세월이라는 깊은 강가에 서면
고요한 강물이 내 영혼을 끌고 가네.
먼 옛날 삼각산 소나무 아래 어매 아배 뼈를 묻고,
삽을 씻으며 민초의 한을 씻던 아리수
넓고 깊은 어머니 가슴 강물도 차운 날에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젖가슴 여미는 어머니 가슴 헤집는 젖둥이
온갖 풀꽃 향기에 젖은 물가에 앉아 있어도 목이 마르다.
*한강 아리랑/ 한석산/ 동학사/ 2013
32.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 이준관
나는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 직장에 가고
다리를 건너 시장에 간다
그러고 보면 나는 많은 다리를 건너왔다
물살이 세찬 여울목 징검다리를
두 다리 후들거리며 건너왔고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삐걱거리는 나무다리를 건너왔고
큰물이 지면 언제 둥둥 떠내려갈지
모르는 다리를
몸 휘청거리며 건너왔다
더러는 다리 아래로 어머니가 사다 준
새 신발을 떨어뜨려 강물에 떠내려
보내기도 했다
내가 건너온 다리는
출렁다리처럼 늘 출렁출렁거렸다
그 다리를 건너 도회지 학교를 다녔고
그 다리를 건너 더 넓은 세상을 만났다
학창 시절 선생님이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험한 세상 다리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지만
나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주지도 못했고
가족들이 건널 다리가 되어주지도 못했다
그러나 나는 다리를 건널 때면
성자의 발에 입을 맞추듯
무릎을 꿇고 다리에 입을 맞춘다
아직도 험한 세상 다리가 되고 싶은
꿈이 남아 있기에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이준관/ 밥북/ 2023
33. 홍시 / 김시천
그리 모질게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바람의 말에 귀 기울이며 물처럼 몸을 낮추어
조용히 흐르며 살아도 되는 것을
악다구니 쓰고 소리 지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 한 마디 참고 물 한 모금 먼저 건네고
잘난 것만 보지 말고 못난 것들도 보듬으면서
거울 속 저 보듯이 서로 불쌍히 여기고
원망하고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며 살걸 그랬어
잠깐인 것을, 세월은 정말 유수 같은 것을
흐르는 물은 늘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나만 모르고 살았을까
낙락장송은 말고 그저 잡목림 근처에
찔레나 되어 살아도 좋을 것을
근처에 도랑물이나 졸졸거리고 산감 나무 한 그루
철마다 흐드러지면 그쯤으로 그만인 것을
무어 얼마나 더 부귀영화 누리자고 그랬나 몰라
사랑도 익어야 한다는 것을,
덜 익은 사랑은 쓰고 아프다는 것을
사랑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젊은 날에는 왜 몰랐나 몰라
나도 이제쯤에는 홍시가 되면 좋겠어 홍시처럼
내가 내 안에서 무르도록 익을 수 있으면 좋겠어
아프더라도 겨울 감나무 가지 끝에 남아 있다가
마지막 지나는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어
*풍등/ 김시천/ 고두미/ 2018
34. 황옥黃玉의 사랑가 / 정일근
운명의 맥을 짚어 누런 바다를 건너기로 했습니다.
바다 건너 동쪽나라에 하늘에서 알이 되어 내려왔다는
수로, 그대가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더 먼 나라 나사렛에서 태어난 야소라는 남자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하늘에 있고
죽어서 다시 사는 일이 하늘에 있다면
제가 그대에게로 가는 것도 하늘이 정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사랑이 하늘의 신탁이라면
그대는 그 나라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어머니가 주신 붉은 속곳을 준비하며 저는 자꾸만 붉어집니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는 두려움은 잊기로 했습니다.
이만 오천 리 뱃길 내내 초야의 뜨거움을 꿈꿀 것입니다.
첫날밤 그대가 열여섯 내 나이를 묻는다면
붉은 저 속곳보다, 바다를 건너며 붉어진 내 몸보다
더 붉은 처녀의 피로 답할 것입니다.
내 배 안에서 하늘의 흰 피와 땅의 붉은 피가 섞여
새로운 나라 새로운 왕조의 피를 만들고
그 피 세세년년 붉게 이어지길 바라겠습니다.
건강한 남자로 곧추서서 저를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지금 아유타국에서 허許씨 성을 가진 황옥이
물고기 두 마리 문양을 증표로 수로, 그대에게로 갑니다.
*사과야 미안하다/ 정일근/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35. 휘어진 길 저쪽 / 권대웅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시간과 공간을 챙겨
기쁨과 슬픔, 떠나기 싫은 사랑마저도 챙겨
거대한 바퀴를 끌고
어디론가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
기억 속에는 아직도 솜틀집이며 그 옆 이발소며
이를 뽑아 던지던 지붕과
아장아장 마당을 걸어오던 햇빛까지 눈에 선한데
몇 번씩 부서졌다 새로 지은 신흥 주택 창문으로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초승달처럼 걸려 있다
어디로 갔을까 그 세월의 바퀴는
장독대와 툇마루와 굴뚝을 싣고
아버지의 문패와 배호가 살던 흑백텔레비전을 싣고
초저녁별 지나 달의 뒤편 저 너머
어디쯤 살림을 풀어놓은 것일까
낯설어 그리운 골목길을 나오는데
문득 어디선가 등불 하나가 켜지고 있었다
희미한 호박 등처럼 어른거리는
내 마음속 깊은 골목 맨 끝 집
등불 속에 살고 있는 것들
오, 어느새 그 속으로 이사와
아프고 아름답게 반짝이며 자라고 있는
세월들
*나는 누가 살다간 여름일까/ 권대웅/ 문학동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