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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인모임 주일예배순
2025년 12월 14일
인도・ 말씀증언 김구 목사
예배 부름
송영 21장 (다 찬양하여라)
신앙고백: 예수교회 신전
찬송 104장 (곧 오소서 임마누엘)
대표기도 (맡은이)
말씀봉독(교독): 이사야경 45.1-25
말씀증언: 창조의 사역
봉헌: 찬송 95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봉헌기도
찬송 112장 (그 맑고 환한 밤중에)
축도
<말씀증언>
이사야경 45.1-25
창조의 사역
1. 이사야경 후반부를 읽어가다 보면 자주 눈에 띄는 단어들이 있는데,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 같은 창조용어들과 ‘속량’, ‘종’을 들 수 있다. 이 단어들은 ‘주님의 오심’과 함께 이루어질 ‘새롭게 하시는 역사’라는 후반부의 주제와 관련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가운데 이번 주에는 ‘창조’에 관해서, 다음 주에는 종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창조’라는 말은 우리에게 대단히 익숙하다. 사회생활 속에서도 많이 쓰이지만, 기독교 신앙에서는 특히 하느님을 창조주로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 가운데서 사용하는 창조라는 용어는 좀 더 구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성경에서 이 용어는 이중적인 뜻을 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창조라는 말은 무언가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을 가리킨다. 특히 신앙과 관련해서,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느냐 또 사람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느냐 같은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창조를 ‘우주창조’라는 말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짙다. 이것은 시작을 묻는 것인데, 대개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느냐에 관심을 둔다. 이에 대해 기독교는 하느님이 세상과 사람을 ‘만드셨다’고 설명하는데, 이것이 기독교 창조론의 핵심을 이룬다.
3. 연구자들은 성경에서 창조의 신학적 주제가 창세경, 욥기, 다윗시경, 잠언, 이사야경에 집중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그 본문들에 대해 학문적인 주의를 기울이면서 각 본문 전통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면모들을 헤아려 보려고 한다. 그들의 관점은 대개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사람은 어떻게 생겨났느냐는 주제에 집중되며, 성경의 내용과 양강세계 문헌들을 비교하는 것이 큰 비중을 이룬다. 아무튼 시작을 묻는 것은 기원(起源)을 문제삼는 것인데, 앞에 제시한 본문군 중에서 잠언(8장)과 욥기(38-40장)에서 기원의 주제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기원에 관한 지혜문학적 주제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곳에 ‘창조’라는 단어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창조’는 창세경과 다윗시경, 이사야경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4. 좀 더 들어가서, 이 본문들을 읽으면 ‘창조’는 기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경에는 주로 혼돈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고, 이사야경에는 속량과 ‘새로운 일’, 거기에 주의 오심을 함께 지시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시경도 그와 유사하게 여겨진다. 이는 ‘창조’라는 말이 우주나 인간의 기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창조란 하느님한테서 이 세상이 실재하게 된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데, 창조는 그분한테서 오는 생명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순정진리는 그것을 이렇게 분명하게 밝힌다: “여기서 ‘창조한다’는 것은 자연적 실재와 생명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 실재와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 곳곳에서 ‘창조한다’는 말로 의미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의 실재는 창조의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창조의 목적은 인류가 존재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천사들의 천계가 있도록 하는 것이다. 목적이 이러하기 때문에, ‘창조한다’는 말을 통해서 개조하는 것(reformare)이 의미되는데, 말하자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천계가 제공되는 것이다”(AE 294).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창조’는 기원의 의미뿐만 아니라 중생 또는 거듭남의 의미도 가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의 목적은 천계를 이루는 것인데, 그것을 위한 수단이 되는 인간의 거듭남이 거기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란 바꾸어 말하면 새로 태어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이는 특히 이사야경에서 ‘창조’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곳에서 ‘속량’이나 ‘새롭게 함’을 뜻하는 말들이 함께 보이는 이유가 될 것이다.
5. ‘창조’로 번역되는 원어 ‘바라’(ברא)가 특수한 신학용어라는 것은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진 지 오래다. ‘바라’가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에 적용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히브리 성경에서 50번 정도 사용되었는데, 이사야경 40-48장 사이에서 그 삼분의 일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특히 45장에는 여섯 차례나 보인다. 이것은 ‘창조’가 이 부분에서 주요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본문들을 읽어보자.
6. 이사야경 40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 하느님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예루살렘 심장에 대고 말하고, 너희는 그녀에게 외쳐라. ‘그녀의 군 복무 [기간]이 가득 찼다고. 그녀의 잘못이 용서를 받았다고. 그녀의 모든 범죄 때문에 주님의 손에서 벌을 곱절이나 받았다고’”(사 40.1-2, 개인역). 사람들은 이 말씀의 배경을 잡혀간 바벨에서 돌아오는 귀환으로 여기고 있다. 이런 관계에서 헤아리면, 잡혀갈 것이라는 예언이 있자마자 바로 돌아오는 귀환의 모습이 묘사된 것이다. 그래서 포로의 예언이 끝나는 39장 8절과 귀환의 예고가 언급되기 시작하는 40장 1-2절을 역사연대로 판단하면 그 사이에는 200년 가까운 시간적 간격이 있다. 그렇지만 본문은 그 시간적인 간격을 바로 뛰어넘은 것이다. 아무튼 이 본문에는 주님의 속량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7. 첫머리를 조금 살펴보자. 2절의 원문 ‘처바아ㅎ’(צבאהּ)를 공인번역들은 ‘복역기간’이나 ‘노역의 때’ 또는 ‘강제 노동 기간’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그 본래적인 의미는 ‘군 복무 기간’를 가리키는 것으로 헤아려야 할 것이다. ‘노역’이나 ‘강제 노동’은 전쟁시의 군역을 암시하기는 하지만 군 복무 자체를 명시한 것은 아니다. ‘복역기간’이란 교도소에서 죄 값을 치르는 것을 가리킨 것인데, 오히려 본문에 좀 더 어울리기는 한다. 그런데 여기서 ‘군 복무’란 말하자면 전쟁에 나가서 치르는 ‘싸움’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싸우러 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차바’(צבא)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시험’을 가리키는 것이다. 죄악과 맞서 싸우는 투쟁을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본문에서 ‘잘못’과 ‘범죄’라는 말이 ‘군 복무’라는 말의 대구로 표현되는 것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고, 그의 교훈에 거르러 살았던 인생이 이제 그것을 극복하는 피나는 노력을 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곱절’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40장 처음에 나오는 말씀은, 인생의 확실한 위로는 죄악을 향한 싸움이 끝나서야 오는 것이라는 인생살이에 대한 선언이기도 하다.
8. 본문을 좀 더 읽어 내려가면 12절에 기원을 가리키는 듯한 지혜문학적 주제들이 보인다. 그리고 26절에 가서 창조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누가 이것들을 창조하였느냐.” 이는 기원을 문제삼는 듯하다. 그렇지만 28절에서 “땅끝까지 창조하시는 영원하신 하느님”은 주님으로 밝혀진다. 그는 그렇게 애쓰시지만 결코 피곤하지 않으시다고 한다. 오히려 피곤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또 능력을 더하신다고 천명한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는 자들은 ‘새 힘’을 얻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창조의 역사는 ‘독수리처럼 날개를 치고 하늘로 올라가는 일’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는 또 여기서 창조의 사역이 하느님의 노동(opus Dei)임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하느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다고 하지 않는가(창 2.3). 창조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인 것이다. 이사야경에서 읽을 수 있는 대로, 그분은 여전히 창조 사역을 계속하고 계신다. (개역전통에는 21절에 ‘창조’라는 말이 보이지만, 이는 건축(‘바나’ בנה)을 의미하는 다른 창조적 용어 가운데 하나이고, 일반적으로 ‘창조’로 번역되는 ‘바라’는 아니다.)
9. 다음 장인 41장 20절에는 “주의 손이 이것을 만들었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그것을 창조하셨다”(개인역)고 한다. 여기에 ‘만든다’(‘아싸’ עשׂה)는 다른 창조용어가 보인다. 이 문장은 문학형식으로 파악하면 정확한 대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는, 연구자들이 흔히 헤아리는 것처럼, 의미없는 단순반복이 아니다. 창조와 제작은 영의에 따르면 분명히 구별된다. ‘창조’의 영의를 앞서 살펴본 대로 ‘거듭남’ 또는 ‘새로 태어남’이라고 받아들이면, ‘제작’은 그것의 완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창조를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일로 이해하면, 제작은 그것이 끝난 상태 또는 완료를 지칭하는 것이다(AC 472). 이를 순정진리의 신학용어로 옮겨놓으면 창조는 영진적 상태이고 제작은 천선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과정적으로 본다면, 창세경 1장의 천지창조 이후에 2장의 아담조성의 구조와 같은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다만 20절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어 서술되었다. 천선적 주제에서 순서가 달라진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27절에서 시온 다음에 예루살렘이 언급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41장 본문의 이 부분은 천선적 상태를 다루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10. “내 이름으로 일컬어지고 또 내 영광을 위한 모든 이들, 내가 그들을 창조하였고, 내가 그들을 빚었고, 나아가 내가 그들을 만들었느니라”(사 43.7, 개인역). 43장에는 ‘빚는다’(‘야차르’ יצר)는 또 다른 창조용어가 등장한다. 이 말은 주님이 ‘흙으로 아담을 빚으셨다’는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주님이 토기장이로 빗대어지는 것인데, 여기에 같은 단어가 적용된 것이다. 그런데 창조용어 셋이 나란히 나올 때 그 뜻은 구별해서 헤아려야 할 것이다. 이 세 용어의 구별은 다시 나타나는 45장 18절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분이 하늘을 창조하시고 땅을 빚으시고 그것을 만드신다”(개인역). 이 절에서 창조는 하늘에, 조성은 땅에 적용되었다. 여기서 하늘은 내적 상태를, 땅은 외적 상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하늘과 땅은 짝이 되어 한 쌍을 이루면서 영진적 상태를 가리키고, 제작은 천선적 상태를 지시하는 것으로 헤아려지는 것이다(참조. AC 88).
11. 한편 45장 7절은 번역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사 45.7). 개역개정판은 이렇게 옮겼다. 만일 창조를 제작의 뜻으로 읽어서 주께서 빛이나 평화에 상대되는 어둠과 환란을 세상에 있게 하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이 어찌 그러실 수 있을까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공인역들을 보자.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가톨릭 <성경>), “나는 빛을 빚고 어둠을 창조하는 하나님이다. 평화를 이루고 재난을 내리는 하나님이다. 나는 여호와다. 이 모든 것을 해내는 하나님이다”(새한글성경). 두 공인역 모두 앞의 ‘바라’는 그대로 ‘창조’라는 말로 받아들였지만 다음의 것은 바꾸었다. 제작을 의미할 수 있는 창조라는 단어를 적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바라’의 의미를 다르게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바라’를 제작의 개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의미가 온전히 파악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라’는 제작 개념이 아니라 영어 repair의 뜻 곧 ‘수리, 수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예로 든 이 성구는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빛을 빚고 어둠을 고치고, 평화를 만들고 악을 고치나니, 나 주는 이 모든 것을 수행하느니라”(사 45.7, 개인역). 이는 말하자면 성경에 보이는 ‘창조’(ברא)를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바로잡으시는,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로 파악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내적인 뜻만이 아니라 문자적 독해에서조차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을 바르게 읽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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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말씀증언>이 초고가 올라갔기 때문에 수정된 내용을 다시 올립니다.
'창조'의 주제에 관해서는 좀 더 충실하고 자세하게 글을 써서 발표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