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개는 없어도
김철수
사람을 핀잔주는 말 가운데 ‘쓸개 빠진 사람’이란 말이 있다. 줏대없이 흔들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나 역시 어릴 적부터 귀에 익도록 듣고,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리곤 했다. 그 말 속에는 주관이 없는 사람을 향한 냉소가 숨어 있었다.
도대체 쓸개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사람의 나약함을 평생 대신 짊어지게 되었을까? 비겁함은 마음에서 태어나는데 쓸개는 언제부턴가 사람의 기개를 재는 잣대가 되었다.
무심히 흘려보냈던 그 생각이 병원에서 되살아났다. 의사는 검사 결과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담낭을 떼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 몸의 일부를 떼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수술 날짜를 잡아야 할 순간에, 엉뚱하게도 지난 일들이 먼저 찾아왔다. 미처 건네지 못한 사과, 자존심 때문에 돌아섰던 날, 강한 사람인 척 버티느라 사랑하는 이들에게 남긴 상처가 오래된 사진처럼 한 장씩 펼쳐졌다. 수술을 기다리는 동안 그 기억들은 몇 번이고 되돌아왔다. 그리고 알았다. 후회는 과거에 머무는 감정이 아니라, 오늘의 나를 찾아오는 시간이라는 것을.
수술 동의서에 이름을 적는 순간, 문득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잠시 허락받은 시간이라는 사실을.
수술복으로 갈아입자, 마음은 오히려 고요해졌다. 직함도 체면도 자존심도 잠시 벗어 둔 채 침대에 몸을 맡겼다. 천장을 따라 흘러가는 형광등 불빛을 바라보며 수술실로 들어갔다. 앞으로 가는 것은 침대였지만, 뒤로 흘러가는 것은 과거를 더듬는 내 마음이었다.
무영등 아래 누웠다. 세상에 나 홀로 던져진 듯 했다. 마취과 의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편안하게 주무시면 됩니다.”
믿고 몸을 맡기라는 말로 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 손을 감싸는 따뜻한 온기에 눈을 떴다. 아내였다.
“여보, 미안해. 그동안 나 때문에 마음고생 많았지?”
미안하다는 말이 고백처럼 흘러나왔다. 전에는 입 밖에 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아내는 말없이 내 손을 더 꼭 쥐었다. 나 역시 그 손을 오래 놓지 않았다. 창가로 스며든 햇살이 유난히 환했고, 물 한 모금이 달았다. 창문을 스치는 바람마저 처음 듣는 안부처럼 따뜻했다.
몸을 떠난 작은 장기가 내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예전에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강한 사람인 줄 알았다.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용기라고 믿었다. 그러나 진실로 강하고 용기있는 것은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 고맙다고 먼저 손을 내미는 마음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쓸개는 처음부터 아무 잘못이 없었다. 제 것도 아닌 용기를 평생 대신 짊어지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 수술로 그 짐은 내 마음의 몫이 되었다.
이제 어릴 적부터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리던 그 말을, 나는 이제 함부로 쓰지 못할 것 같다. 그 말 속에 숨어 있던 냉소가 실은 나 자신을 향해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용기를 대신 짊어질 장기가 몸 어디에도 없는 지금, 나는 비로소 내 마음으로 삶을 마주한다. 쓸개는 없어도, 마음은 있으니.(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