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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지역 | 충남 천안시 |
문화재 유형 | 유형 ( ○ ) 무형(전승설화) ( ) |
효문화 유형 | 충효(忠孝), 효자(孝子), 청렴결백(淸廉潔白) |
시 대 | 조선중기 |
소 재 지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봉양리 352-2 |
조 사 자 | 김 창 호(충청창의인성교육원) |
2019년 7월 23일 한국효문화자료보감(충청남도천안시편) 편찬에 제출한 자료임 斗巖公 14代 孫 金 昶 鎬 書 |
김응남(1546년-1598년)의 자(字)는 중숙(重叔), 호는 두암(斗巖), 관향 원주(原州)이다.
공이 태어나면서부터 용모와 재능이 아주 빼어났다. 3세에 글을 읽었다. 8세에 시서(詩書=시경과 서경)를 외우면서 대의(大義=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통달하였다.
14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집은 아주 가난했다. 그래서 공은 출세하여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려 아버지를 봉양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후부터 고난과 역경, 고통을 참아가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그 결과 문장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다. 공이 22세에 사마생원시(司馬生員試)에 합격했다. 다음 해 23세에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리고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선보(選補)되었다.
공이 26세 되던 해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다. 공은 아버지 묘소에서 삼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한 번도 공의 집 대문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아버지가 평안남북도 관서(關西)에서 심한 병이 들었다. 꼼짝 못하고 누워서 병을 앓았을 때는 공이 집안일과 약시중을 들었다. 공은 허리띠를 풀지 않아 서캐와 이가 땅바닥에 떨어질 정도였다. 이에 다리를 묶은 채로 탕약을 드리면서 하늘에 기도하고 통곡했다. 이것을 목격한 정주(定州) 사람들이 칭송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공의 나이 28세에 아버지의 상복(喪服)을 벗자 한림(翰林)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삼년상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여 시재(試才=재주를 시험해봄)에 나가지 않았다.
29세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임명되고, 박사(博士), 수찬(修撰)으로 승진되었다. 34세에 이조좌랑(吏曹佐郞) 지제교(知製敎)를 지내고 휴가를 하사(下賜) 받아 호당(湖堂)에서 독서를 하였다. 35세에는 이조좌랑(吏曹佐郎)으로서 황해도 구황어사(救荒御史)를 역임하고 장령(掌令)이 되었다.
37세에 부인상(夫人喪)을 만났으며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 사옹원정(司饔院正)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다.
동서분당(東西分黨)의 화(禍)가 일어났다. 공(公)도 그들이 지목한 가운데 들었다. 그러나 공은 관여하지 않았다. 임금께서 특별히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임명하였다. 공이 명을 듣고 즉시 인사를 드리니 임금께서 인대(引對)하시고 호피(虎皮)와 호초(胡椒). 초피(貂皮). 이엄(耳掩)을 하사(下賜)하였다. 그리고 제주도 섬 전체의 아주 많은 생명을 부탁한다 하시었다. 공이 감격해 하면서 나와 곧바로 바다를 건너 관아(官衙)에 부임했다. 그때 마침 흉년이 들었다. 굶어 죽은 자가 길가에 즐비하게 보였다. 공이 곡식을 요청해 나누어 주어 제주도의 백성을 재활(再活)토록 하였다.
그리고 학교(學校)를 세워서 효제(孝悌)와 예의(禮儀)를 가르쳤다. 거친 풍속을 바로잡아 예의(禮儀)를 알게 하였다, 그 때 제주도 백성들이 돌에 새겨 칭송하였다고 한다.
2년 후 임금께서 특명으로 소환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오르고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전보(轉補)하였다가 특별히 대사헌(大司憲)을 가(加)하다.
45세 5월에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출보(出補)하였으나 조금 있다가 탄핵을 만나 7월에 두미(斗尾)로 돌아오니 공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온 경내 백성들이 덕(德)에 감화되어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그해 겨울에 사면을 받아 복권되었다
임진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왜적이 서울을 함락하자 어가(御駕)가 피난길에 올랐다. 공이 병조판서겸(兵曹判書兼) 부체찰사(副體察使)로 병력을 통솔하였다. 공은 피란하는 임금을 충성(忠誠)과 근면(勤勉)을 다해 호종(扈從)하였다. 다음 해 겨울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어 어가(御駕)를 수행하여 한성(漢城)으로 돌아왔다. 전란을 겪은 뒤라 조정이 어수선하였다. 간사한 무리의 기세가 여전히 당당하였다. 공론(公論)이 실행되지 않았다. 공은 마음을 감추고 동요됨 없이 뜻을 확고히 가졌다. 공은 덕망이 있고 학덕이 높은 선비들을 수습 세도(世道)를 전환시켰다. 도성(都城:서울)을 회복한 뒤로 전란 후의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였다. 공은 나라를 복구하는 급선무는 군사를 훈련하고 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인심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태평한 세상의 희망이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힘이었다.
공은 의정(議政)을 간택할 때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겸(議政府右議政兼) 영경연 감춘추관사(領經筵監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50세에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되어 세자부(世子傅)를 겸임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평민들이 더 많이 연루되었다. 공이 추관(推官=죄인을 심문하는 관원)이 되어 자세하고 명백하게 조사하여 호서 사람 2백여 명, 호남 사람 30여 명을 풀어 주었다. 호서, 호남의 인심이 이에 힘입어 안정되었다.
공의 나이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의 부음(訃音)을 아뢰자 주상이 매우 슬퍼하였다. 그리고 3일간 조회를 열지 않았다. 관례보다 부의(賻儀)를 더 하도록 하였다. 삼공(三公: 삼정승)과 구경(九卿=9명의 고관), 사서(士庶=백성)들이 너나없이 애석해 했다. 집에 한 섬의 곡식도 없어 의복으로 염습(殮襲)하였다. 초상(初喪)은 모두 친구들의 힘을 입어 치렀다. 또 묘소를 쓸 사람이 없었으므로 조정에서 측은히 여겼다. 임금에게 아뢰어 묘소를 쓸 역군(役軍)과 장례의 물품을 지급하였다. 이는 전란이 난 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공은 덕(德)이 두텁고 도량이 컸다. 외모는 부드러우면서도 내심은 강하였다. 의리(義理)에는 용감하고 재리(財利)에는 담담하였다. 집에 있을 적에는 부모에게 효도(孝道)하고 형제간에는 우애(友愛)가 깊었다.
재산을 나눌 적에 노약한 노복(老僕)은 자신이 가지고 건장한 노복(奴僕)은 아우 김기남(金起南)에게 주었다. 아우에게 말하기를,“너의 생활이 매우 어려우니, 노복들의 힘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정에 있을 적에는 몸을 엄숙하게 가다듬고 의논(議論)을 바르게 견지하였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다. 공의 장점은 임금을 잘 보필하는 일 빈틈없는 충성(忠誠)이다. 사람들이 미처 몰랐다. 관청에서 일을 처리할 때 한결같이 공평(公平)하게 하였다.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바가 천성(天性)으로 타고났다. 그러나 매번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선은 배로 더 좋아하되 악은 배를 더 낮추어 미워하라.”고 하였다. 이 말은 현재 까지도 원주김씨 가문에 지표(指標)가 되어 오고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하찮은 시비는 묵과하였다. 대사(大事)에 임하거나 대의(大義)를 결정할 때에는 확고하게 동요하지 않았다. 곧바로 자신의 뜻대로 실행하였다. 조정에 나간 지 30여 년이 되었었다. 전답과 주택을 하나도 장만하지 않았다. 항상 공이 말하기를,“나처럼 녹(祿)을 받아 밥을 먹고 집을 임대하여 살면서 심신(心身)의 노고가 없이 본분을 편안히 누린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비단옷을 입지 않고 고기반찬을 거듭 먹지 않았다. 주량은 비록 크게 마시어도 도(度)에 지나치지 않았다. 음악과 연회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치스러운 물건은 일체 가까이하지 않았다.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점은 고인(古人)에게서 구(求)하므로 필적할 사람이 드물었다. 권세를 피(避)하기를 물과 불을 피하듯이 하였다. 자신이 요직(要職)에 있을 때에는 주변 사람들을 경계하였다.
두려워하거나 허틀어짐이 없었다. 항상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였다. 문전에 거마(車馬)가 전혀 없었다. 재상이 되자 연소한 후진(後進)들도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왕래하지 않았다. 전형(銓衡)을 관장하였을 때는 정당하게 채용하였다. 사람들이 감히 사적으로 청탁하지 못하였다. 인재를 발탁하되 놓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정말 어질 경우에는 비록 빈한(貧寒)한 가문의 사람이라도 반드시 선발하였다. 또한 귀한 가문을 혐의로 여겨 채용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특히 지방 수령(守令)의 선발에 신중을 기울여 공도(公道)를 준수하고 사정(私情)을 개입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큰 충효(忠孝)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 사람은 공의 아버지 또래였으므로 공이 부형(父兄)처럼 깍듯이 섬겼다. 그런데 그 사람이 관리의 재능이 없었다. 매일 찾아와 지방 수령의 자리를 요청했으나 추천의 명단에 한 번도 올리지 못했다. 그 뒤에 경연(經筵)에서 그 사람의 절행(節行)을 아뢰었다. 주상이 가상히 여겨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시키라고 명하였다.
공은 돌아가신 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봉되고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정(忠靖)을 하사 받았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효심이 깊은 공은 아버지가 수백리 타향 관서(關西) 정주(定州)에서 침질(寢疾)로 와석(臥席)해 계실때 몸소 약시중을 들면서 옷속의 서캐와 이가 땅바닥에 떨어질까봐 다리를 묶은 채로 시탕(侍湯)을 하였다. 또한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는 장례(葬禮) 후(後) 묘소에서 삼년 간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한 번도 집 대문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공은 일찍이 사마시.등제(司馬試.登第)를 계기로 입조(立朝)하여 30여년 재직(在職)하는 동안 오직 임금을 보필(輔弼)하는 일에 충심(忠心)을 다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공이 병조판서겸.부체찰사(兵曹判書겨,副體察使)로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고 서행(西行)하였으며 다음 해 겨울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역시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한성으로 돌아온 후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에 록훈(錄勳)되었다
공은 정일품.좌의정(正一品.左議政)을 지냈으나 서원(書院) 및 사우(祠宇) 등 유적(遺蹟)이 없다 오늘 날 후손들은 공이 얼마나 청렴결백(淸廉潔白) 하였으면 이란 말을 떠오르게 해주는 말이다.
공은 후손에게 충성(忠誠). 효도(孝道). 교육(敎育). 덕망(德望). 도량(度量). 외유내강(外柔內剛). 신의(信義). 우애(友愛). 용감(勇敢). 재이(財利). 도리(道理). 헌신(獻身). 청염결백(淸廉潔白)의 단어를 알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동강집(東岡集), 귀록집(歸鹿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두암 묘지문(斗巖 墓誌文)
김응남(金應南)의 충(忠)과 효(孝)
김응남(1546년~1598년)의 자(字)는 중숙(重叔) 호는 두암(斗巖) 관향은 원주(原州)이다
공이 태어나자 모습이 준수하였다. 3세에 글을 읽었고 8세에 시서(詩書)를 외우면서 대의(大義)에 통달하였다.
14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집이 빈한(貧寒)하므로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 각고의 공부를 하여 학문(學文)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다 공이 22세에 사마생원시(司馬生員試)에 합격하고 다음 해 23세에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선보(選補)되었다.
공이 26세 되던 해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다. 공은 아버지의 묘소에서 삼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한 번도 공의 집 대문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아버지가 평안남북도 관서(關西)에서 침질(寢疾)을 앓았을 때는 공이 약(藥)시중을 들었다. 허리띠를 풀지 않아 서캐와 이가 땅바닥에 떨어질 정도였다. 이에 다리를 묶은 채로 탕약을 드리면서 하늘에 기도하고 흐느끼는 것을 목격한 정주(定州) 사람들이 칭송하며 눈물을 흘렸다
28세에 아버지의 상복(喪服)을 벗자 한림(翰林)에 천거되었다. 그러나 삼년상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여 시재(試才)에 나가지 않았다. 29세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임명되고 30세에 박사(博士) 수찬(修撰)으로 승진되었다.
34세에 이조좌랑(吏曹佐郎) 지제교(知製敎)를 지내고 휴가를 하사(下賜) 받아 호당(湖堂)에서 독서를 하였다. 35세에는 이조좌랑(吏曹佐郎)으로서 황해도 구황어사(救荒御史)를 역임하고 장령(掌令)이 되었다.
37세에 부인상(夫人喪)을 만났으며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 사옹원정(司饔院正)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다.
38세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의 화(禍)가 일어났다 공도 그들이 지목한 가운데 들었다.그러나 선조 임금께서는 특별히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임명하였다 공이 명(命)을 듣고 즉시 인사를 드리니 임금께서 인대(引對)하시고 호피(虎皮)와 호초(胡椒). 초피(貂皮). 이엄(耳掩)을 하사(下賜)하였다 공이 감읍(感泣)하고 나와서 바다를 건너 관아(官衙)에 부임하니 마침 기근(飢饉)을 만나 굶어죽은자가 길가에 서로 보이는지라 곡식을 청구하여 나누어 주어 일도(一島)의 백성을 재활(再活)토록 하였다. 학교를 세워서 효제(孝悌)를 권장하고 거친 풍속을 바로 잡아 예의(禮義)를 알게 하니 백성들이 동비(銅碑)를 세워 그 덕을 기리었다. 김상헌(金尙憲)이 쓴 남정록(南程錄). 이원진(李元鎭)이 쓴 탐라지(耽羅誌)에는 공이 제주목사로 있을 당시 베푼 치적(治績)을 칭송하는 글이 실려 있다.
2년 뒤 40세에 특명으로 소환하여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오르고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전보(轉補)하였다가 특별히 대사헌(大司憲)을 가(加)하다.
45세 5월에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출보(出補)하였으나 조금 있다가 탄핵을 만나 7월에 두미(斗尾)로 돌아오니 공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온 경내 백성들이 덕(德)에 감화되어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그해 겨울에 사면을 받아 복권되었다
46세 가을에 성절사(聖節使)로서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금대(金帶)를 하사 받고 특별히 자헌대부.한성판윤(資憲大夫.漢城判尹)이 되었다
47세 4월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왜적이 서울을 함락하자 공이 당시 병조판서겸(兵曹判書兼) 부체찰사(副體察使)로써 충심(忠心)을 다해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서행(西行)하였다
48세에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 예조판서로 부제학.대사헌(副提學.大司憲)을 행(行)하고 겨울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배(拜)하고 어가(御駕)를 수행하여 한성(漢城)으로 돌아왔다
전란을 겪은 뒤라 조정이 어수선하였다. 간사한 무리의 기세가 여전히 당당하였다. 공론(公論)이 실행되지 않았다. 공은 마음을 감추고 동요됨 없이 뜻을 확고히 가졌다.공은 덕망이 있고 학덕이 높은 선비들을 수습(收拾) 세도(世道)를 전환시켰다.
도성(都城:서울)을 회복한 뒤로 전란 후의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였다. 공은 나라를 복구하는 급선무는 군사를 훈련하고 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인심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태평한 세상의 희망이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힘이었다.
49세 여름에 숭록대부우찬성(崇祿大夫右贊成)에 오르고 겨울에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겸(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 영경연감춘추관사(領經筵監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50세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세자부(世子傅)를 겸임하였다.
정유년 52세에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9월에 양경리(楊經理)를 영위(迎慰)하는 일로 송경(松京)을 왔다갔다 하다가 풍한(風寒)에 감염(感染)되어 음성(音聲)을 잃었으나 국사가 방은(方殷)하야 감히 고병(告病)하지 못하고 10월에 안무사(按撫使)로 영남에 갔다가 풍기(豐基)에 이르러 증세가 극심하여 돌아와 해가 지나도록 병석(病席)에 있으나 약이(藥餌)도 효험이 없었다.
무술년 12월 24일 공의 나이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의 부음(訃音)을 아뢰자 선조 임금은 매우 슬퍼하였다 마침 명나라 사신과 더불어 이야기 하다가 소반 가운데 고기 반찬을 물리라 명(命)하고 3일간 조회를 폐(廢)하였다. 관례보다 부의(賻儀)를 더하도록 하니 삼공(三公) 구경(九卿) 사서(士庶)들이 너나없이 애석해 했다. 집에 한 섬의 곡식도 없고 염습할 옷도 떨어져 경리초상(經理初喪)을 모두 친구들의 힘을 입어 치렀다. 또한 엄토(掩土)가 없어 조정에서 측은히 여겼다 마침내 임금에게 아뢰어 묘군(墓軍)과 장수(葬需)를 제급(題給)받기에 이르니 전란이후(戰亂以後)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공은 덕(德)이 두텁고 도량이 컸다. 외모는 부드러우면서도 내심은 강하였다. 의리(義理)에는 용감하고 재리(財利)에는 담담하였다. 집에 있을 적에는 부모에게 효도(孝道)하고 형제에게 우애(友愛)하였다.
재산을 나눌 적에 노약한 노복(奴僕)은 자신이 가지고 건장한 노복(奴僕)은 아우 김기남(金起南)에게 주었다. 아우에게 말하기를. “너의 생활이 매우 어려우니. 노복(奴僕)들의 힘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조정에 있을 적에는 몸을 엄숙하게 가다듬고 의논(議論)을 바르게 견지하였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다. 공의 장점은 임금을 잘 보필하는 일 빈틈없는 충성(忠誠)이다. 사람들이 미처 몰랐다. 관청에서 일을 처리할 때 한결같이 공평(公平)하게 하였다.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바가 천성(天性)으로 타고났다. 그리하여 매번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선은 배로 더 좋아하되 악은 배를 더 낮추어 미워하라.” 고 하였다. 이 말은 현재까지도 원주김씨 가문에 지표(指標)가 되어 오고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하찮은 시비는 묵과하였다. 대사(大事)에 임하거나 대의(大義)를 결정할 때에는 확고하게 동요하지 않았다. 곧바로 자신의 뜻대로 실행하였다. 조정에 나간 지 30여년 동안에 전답과 주택을 하나도 장만하지 않았다. 항상 공이 말하기를. “나처럼 녹(祿)을 받아 밥을 먹고 집을 임대하여 살면서 심신(心身)의 노고가 없이 본분을 편안히 누린 사람은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비단옷을 입지 않고 고기반찬을 거듭 먹지 않았다. 주량은 비록 크게 마시어도 도(度)에 지나치지 않았다. 음악과 연회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치스런 물건은 일체 가까이하지 않았다.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점은 고인(古人)에게서 구(求)하므로 필적할 사람이 드믈었다.
권세(權勢)를 피(避)하기를 물과 불을 피하듯이 하였다. 자신이 요직(要職)에 있을 때에는 주변 사람들을 경계하였다.
두려워하거나 허틀어짐이 없었다. 항상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였다. 문전에 거마(車馬)가 전혀 없었다. 재상이 되자 연소한 후진들도 공적(公的)인 일이 아니면 왕래하지 않았다. 전형(銓衡)을 관장하였을 때는 정당하게 채용하였다. 사람들이 감히 사적으로 청탁하지 못하였다. 인재를 발탁하되 놓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정말 어질 경우에는 비록 빈한(貧寒)한 가문의 사람이라도 반드시 선발하였다. 또한 귀한 가문을 혐의로 여겨 채용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특히 지방 수령(守令)의 선발에 신중을 기울여 공도(公道)를 준수하고 사정(私情)을 개입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큰 충효(忠孝)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 사람은 공의 아버지 연배(年輩)였으므로 부형(父兄)처럼 깍듯이 섬겼다. 그런데 그 사람이 관리의 재능이 없었다. 매일 찾아와 지방 수령의 자리를 요청했으나 추천의 명단에 한 번도 올리지 못했다. 그 뒤에 경연(經筵)에서 그 사람의 절행(節行)을 아뢰었다. 주상(主上)이 이를 가상히 여겨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시키라고 명하였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효심이 깊은 공은 아버지가 수백리 타향 관서(關西) 정주(定州)에서 침질(寢疾)로 와석(臥席)해 계실때 몸소 약시중을 들면서 옷속의 서캐와 이가 땅바닥에 떨어질까봐 다리를 묶은 채로 시탕(侍湯)을 하였다. 또한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는 장례(葬禮) 후(後) 묘소에서 삼년 간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한 번도 집 대문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공은 일찍이 사마시.등제(司馬試.登第)를 계기로 입조(立朝)하여 30여년 재직(在職)하는 동안 오직 임금을 보필(輔弼)하는 일에 충심(忠心)을 다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공이 병조판서겸.부체찰사(兵曹判書겨,副體察使)로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고 서행(西行)하였으며 다음 해 겨울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역시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한성으로 돌아온 후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에 록훈(錄勳)되었다
공은 정일품.좌의정(正一品.左議政)을 지냈으나 서원(書院) 및 사우(祠宇) 등 유적(遺蹟)이 없다 오늘 날 후손들은 공이 얼마나 청렴결백(淸廉潔白) 하였으면 이란 말을 떠오르게 해주는 말이다.
공은 후손에게 충성(忠誠). 효도(孝道). 교육(敎育). 덕망(德望). 도량(度量). 외유내강(外柔內剛). 신의(信義). 우애(友愛). 용감(勇敢). 재이(財利). 도리(道理). 헌신(獻身). 청염결백(淸廉潔白)의 단어를 알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동강집(東岡集). 귀록집(歸鹿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두암공묘지문(斗巖公墓誌文) 연보(年譜)
2019년 7월 23일 한국효문화자료보감(충청남도천안시편) 편찬에 제출한 자료임
斗巖公 14代 孫 金 昶 鎬 書
한국효문화 자료보감
천안시 동남구, 부모공경 · 나라사랑의 모범을 보인 김응남
지역 | 충청남도 | 구분 | 유형문화재 |
상세지역 | 천안시 | 조회수 | 252 |
파일 | KDT-00268 동남구, 부모공경 · 나라사랑의 모범을 보인 김응남.pdf (1.1M) | ||
자료번호 | KDT-00268 | ||
시대 | 조선 | ||
효행유형 | 부모공경(봉양형, 시묘형), 가족사랑, 나라사랑, 이웃사랑 | ||
효행내용 | 첨부자료 참고 | ||
◉ 부모공경 · 나라사랑의 모범을 보인 김응남(金應南)
김응남(1546년~1598년)의 자(字)는 중숙(重叔) 호는 두암(斗巖)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공이 태어나면서부터 용모와 재능이 아주 빼어났다. 3세에 글을 읽었고, 8세에 시서(詩書)를 외우면서 사람으로서 마땅히지켜야 할 도리에 통달하였다.
14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집안이 너무 가난했다. 그래서 공은 출세하여 아버지를 봉양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후로 고난과 역경, 고통을 참아가면서 공부를 열심히하였다. 그 결과 문장이 일취월장하여, 22세에 사마생원시에 합격했다. 다음 해 23세에 증광시 을과에 급제하였다.
아버지가 평안도에서 심한 병에 걸렸을 때 일이다. 병으로 꼼짝 못하고 누워 계시자 공은 몸소 탕약을 지어 드리고 정성으로 간호를 했다. 허리띠를 풀지 않고 쉼 없이 간호하다가 몸에서 서캐와 이가 땅바닥에 떨어질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치병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며 통곡했다. 이를 목격한 정주(定州) 사람들이 칭송하며 같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공이 26세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공은 아버지 묘소에서 삼년간 시묘살이를 하며서 한 번도 공의 집 대문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28세에 아버지의 상복을 벗자 한림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삼년상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여 나가지 않았다.
29세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고, 35세에는 이조좌랑으로서 황해도 구황어사(救荒御史)가 되어 백성들을 현장에서 구제하는데 힘썼다.
그러던 중 동서분당(東西分黨)의 화가 일어났지만, 공은 관여하지 않았다. 임금께서는 특별히 제주목사에 임명하였다. 임금은 멀리 떠나는 공에게 여러 하사품을 주었다. 그리고는 제주도 섬 전체의 아주 많은 생명을 부탁한다.고 분부했다. 감격한 공은 곧바로 바다를 건너 제주로 갔다. 마침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은 자가 길가에 줄비하였다. 공은 조정에 곡식을 요청해 나누어 주면서 제주도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그리고 학교를 세워서 효제(孝悌)와 예의(禮義)를 가르쳤다. 거친 풍속을 바로잡아 예의를 알게하였다. 이후로 제주도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고, 이를 돌에 새겨 기념하였다.
45세 5월에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아갔으나 조금 있다가 탄핵되어 돌아왔다. 이를 본 백서들이 그의 덕(德)에 감화되어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적이 서울을 점령하자 임금님 일행이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공은 병조판서겸 부체찰사로 병력을 통솔하며 임그을 충성과 근면을 다해 호종하였다. 다음 해 겨울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어가(御駕)를 수행, 한성으로 돌아왔다. 전란을 겪은 뒤라 조정이 어수선하였다. 간사 한 무리의 기세가 여전히 당당하였다. 공론(公論)이 실행되지 않았다. 그래도 공은 동요함 없이 뜻을 확고히 갖고 덕망 있고 학덕 높은 선비들을 수습, 세도(世道)를 전환시켰다. 서울을 회복한 뒤로 전란 후의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였다. 공은 나라를 보구하는 급선무는 군사를 훈련하고 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인심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태평한 세상의 희망이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힘이어다.
평소 공은 덕(德)이 두텁고 도량이 컸다.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 형이었다. 의리(義理)에는 용감하고 재리(財利)에는 담담하였다. 집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깊었다.
재산을 나눌 적에 노약한 노복은 자신이 갖고 건장한 노복은 아우 김기남(金起南)에게 주면서, “너의 생활이 매우 어려우니. 노복들의 힘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몸을 엄숙히 가다듬고 의논을 바르게 하며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임금을 잘 보필하며 일에는 빈틈없이 충성을 다했다. 관청에서 일을 처리할 때에는 공평하게 하였다.천성적으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였다. 매번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선은 배로 더 좋아하되 악은 배를 더 미워하라.” 고 하였다. 이 말은 현재까지도 원주김씨 가문에 가훈으로 내려 오고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나온 작은 시비는 묵과하였다. 대사에 임하거나 대의를 결정할 때에는 확고하게 하였고, 동요하지 않았다. 조정에 나간 지 30여 년이 되었지만, 전답과 주택을 하나도 장만하지 않았을 정도로 청백하게 살았다.
공이 항상 공이 말하기를. “나처럼 녹을 받아 밥을 먹고 집을 임대하여 살면서 심신의 노고가 없이 본분을 편안히 누린 사람은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비단옷을 입지 않고 고기반찬을 거듭해서 먹지 않았다. 주량은 비록 많아도 지나치지 않았다. 사치스런 음악과 연회를 좋아하지 않았다. 호화로운 물건은 일체 가까이하지 않았다. 군력과 권세 피하기를 불을 피하듯이 하였다. 자신이 요직에 있을 때에는 주변 사람들을 경계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두려워하거나 흐트어짐이 없었고, 문전에는 거마가 전혀 없었다. 재상이 되자 연소한 후진들도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왕래하지 않았다. 인제선발을 관장하였을 때는 정당하게 채용하자, 사람들이 감히 사적으로 청탁하지 못하였다. 인재를 발탁하되 놓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사람들이 어질 경우에는 비록 빈한(貧寒)한 가문의 사람이라도 반드시 선발하였다. 특히 지방 수령의 선발에 신중을 기울여 공도(公道)를 준수하고 사정(私情)을 개입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큰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 사람은 공의 아버지 또래였으므로 부형처럼 깍듯이 섬겼다. 그런데 그 사람이 관리의 재능이 없었다. 매일 찾아와 지방 수령의 자리를 요청했으나 추천의 명단에 한 번도 올리지 못했다. 그 뒤에 경연에서 그 사람의 절행(節行)을 아뢰었다. 주상이 가상히 여겨 당상관으로 승진시키라고 명하였다.
공은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부음을 아뢰자 주상이 매우 슬퍼하며 3일간 조회를 열지 않았다. 평소 관례보다 부의(賻儀)를 더 하도록 하였다. 고관대작들로부터 일반 백성들이 너나없이 애석해 했다. 집에 한 섬의 곡식도 없어 의복으로 염습(殮襲)하였다. 초상(初喪)은 모두 친구들의 힘을 입어 치렀다. 또 묘소를 쓸 사람이 없었으므로 조정에서 측은히 여겼다. 임금에게 아뢰어 일꾼과 장례 물품울 지급하였다. 이는 전란이 난 뒤로 처음 있는 일이다.
공은 돌아가신 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봉되고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靖)을 하사 받았다.
斗巖公(金應南:김응남)의 14代 孫 昶鎬(창호)가 김응남(金應南)의 충(忠)과 효(孝)라는 제목으로 2019년 7월 23일 한국효문화자료보감(충청남도편) 편찬에 제출한 자료를 수정하여 제목은 부모공경 · 나라사랑의 모범을 보인 김응남(金應南)으로 등재된 자료임 이글은 한국효문화자료보감 충청남도 천안시편(P990~P992)에 등재된 내용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