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Chong Hoe University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聖經 / 正經學 / 말씀 스크랩 Re:성경관과 역사비평학문에 대한 질문에 답변 / 정성욱목사
總會神學大學校 추천 0 조회 75 14.07.22 14: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성경관과 역사비평학문에 대한 질문에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joyful | 조회 96 | 05.11.21 11:53 http://cafe.daum.net/profchung/1brN/302
 
질문:

그래서 정성욱목사님께 몇가지 질문 드릴려고 합니다.

 

(1) 성경관에 대하여
====================

우리 보수주의 성경관은  대체로 축자영감설위에 기초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이게 건전한 정통보수주의 성경관이 맞는지요?

성경관이 어떠하냐에 따라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신학으로 나눠지는 것 같고,

위에서 인용한 목사님도 철저하게 축자영감설을 부정하고 그 기초위에 신학을 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축자영감설을 부정하니 당연히 역사비평학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성경을 봐야 성경의 원래의도를 잘 알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현재까지 축적된 다양한 인문학적 소양들을 습득하는 것이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축자영감설을 부인하니, 그 연장선상에서  복음서의 예수님(역사적예수(Historical Jesus))과  사도들에 의한 특히, 바울에 의해 그려진 예수님(신앙의 예수(Historic Jesus))을 분리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역사적인 기독교신앙의 전통을 신앙과 도그마화된 예수상(기독교)이라고 비판하면서  진정한 예수상인 역사적인 예수(Historical Jesus)를 발견하고 그 역사적예수가 가르치고 행했던 "하나님의 나라운동"을 오늘의 시대에 재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도 제가 보기에는 결국 그들이 취하는 성경관때문에 생겨난 부산물이라고 보여집니다.

성경을 한자 한자 하나님의 성령으로 영감된 말씀으로 보지 않으니 당연히 복음서와 서신서를 분리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이들은 성경도 인간저자가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역사비평적인 잣대위에서 봐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수주의 신학계에서 1980년대인가 시카고선언으로 다시 한번 "축자영감설"을 지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는지요

근데, 사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축자영감설을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군데 군데 더러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갑자기 찾아볼려니 잘 모르겠는데, 분명 연대나 사람이름이나 사건이 같은 성경내에서도 다르게 설명되어 있는 부분이 신구약성경에 분명히 나오거든요... 뭐, 기타 성경에 나오는 이적적인 사건은 신앙의 문제이니 신앙이 없는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같은 성경내에서 다르게 기록된 사건이나 연대등은 성경이 한자 한자가 다 영감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는 게 아닐까요...성경원본은 완전한데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은 전부 사본이기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겼다

고 봐야합니까.... 아니면 제가 축자영감설자체에 대해 뭔가 잘 못 이해하고 있는 지요?

 
성경관에 대한 바른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위에 쌓은 신학은 참으로 위험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바른 성경관에 대해 가능한한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칼바르트의 성경관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칼바르트도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부인하고 성경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라고 말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2) 역사비평학적 방법에 대하여
==============================

보수적인 신학은  지금까지 자유주의신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져 온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학적인 방법을 아예 수용하지 않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만약 역사비평학적인 방법도 성서를 연구하는데 필요하다면 그런 방법들을 어디까지 수용하고 무엇을 거부해야 합니까

제가 신학교 학부에 다닐 때 성경의 하등비평(본문비평)까지는 했는데, 그 이상은 전혀 언급하지 않더군요..

위에서 인용한 목사님의 글을 읽어보니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구약성경도 주후70년경의 얌니아회의에서 정경으로 채택되었고,신약성경은 주후397년경의 카르타고회의에서 정경으로 채택되었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정경으로 채택되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형성사나 정경사를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겠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인도해주셨으니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만 말하는 것도 썩 좋은 태도는 아닌것 같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인간이성의 잣대위에서 판단하고 결정하려는 것도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목사님의 의견을 가능한 한 좀 자세히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시간이 되시면 위에 언급한 정용섭목사의 대구성서아카데미도 방문하셔서 그분의 성경관과

역사비평학  등에 대한 목사님의 생각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저는 목사나 신학생은 아니고, 그저 학부때 보수적인 신학교를 다닌 적이 있고, 제 길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현재는 자영업을 하고 있는데, 여전히 신학에 대한 관심은 놓치지 않고 있던 차에  한동안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있어 위에서 인용한 목사님을 통해 또다시 재기 되어 정성욱목사님의 생각을 듣고자 용기를 내었습니다.

가능한 한 자세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목회사역과 교수사역에 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

 
Re:성경관과 역사비평학문에 대한 질문에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성욱 | 조회 101 | 05.11.22 02:59 http://cafe.daum.net/profchung/1brN/304 
  

 

정목사님 답변:

 

이종호님의 글에 답변합니다.

지난 주간 복음주의 신학회에 다녀오느라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우선 성경관에 있어서

소개해주신 그 분의 성경관은 문제가 심각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런 성경관을 가지고 신학을 논하고 가르친다고 하니 참 안타깝네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노릇이지요...

 

성경의 축자영감과 완전 무오성은 어떤 신학자의 견해라기 보다는 성경자체가 성경자체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관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주님으로 믿는 예수님이 가지신 성경관이다라고 봐야 합니다.

 

이번에 복음주의 신학회에 갔더니 소위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아이덴티파이 하면서도 성경의 축자영감과 완전무오에 대해서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여러 차례 하나님의 말씀은 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셨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완전 무오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께 단순히 lip service만 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우리가 포기할 수없는 것처럼,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완전무오도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최근에 등장한 탈보수적 복음주의 운동은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완전 무오를 벗어나 바르트적인 성경관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과 문화와 경험을 대등한 신학적 권위로 여기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요.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완전무오를 주장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역사비평학을 조심스럽게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역사비평학을 한계내에서만 수용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것을 인정하는 한계 내에서 역사비평학이 조심스럽게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자체라는 것을 부인하는 맥락에서 역사비평학이 수용될 경우 반드시 복음이 왜곡되고, 진리가 파괴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왜냐하면 역사비평학의 철학적 전제가 바로 자연주의 즉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실재와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이적을 부인하는 세계관이기 때문이지요. 자연주의는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와 정반대되는 세계관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책 '티 타임에 나누는 기독교 변증'을 좀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고 더 질문이 있으면 또 올려 주세요.

 

 

Re:Re:성경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드립니다
joyful | 조회 41 | 05.11.22 21:02 http://cafe.daum.net/profchung/1brN/307 

 

 

 

Re:Re:Re:성경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드립니다
정성욱 | 조회 84 | 05.11.23 08:44 http://cafe.daum.net/profchung/1brN/308 
 

이종호님의 질문에 답합니다.

이와 비슷한 질문들을 수십차례 들어왔기 때문에 저로서는 식상한 감이 없지 않지만

이종호님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답을 드립니다.

 

우선 성경기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성경의 사실성 여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는 주장은 이미 제가 '티타임에 나누는 기독교 변증'에서 자세히 반박한 부분이므로 제 책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수정주의적 주장입니다. 예수님과 신약사도들은 구약이 기록하는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실재로 시공간의 역사속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믿었고 또 그런 믿음에 기초해서 가르치고 일했습니다. 구약의 역사적 내용이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면 결국 예수님마저도 의도적이진 않다하더라도 소설과같은 픽션을 믿었고, 그 픽션에 의지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해갔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지요.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구약의 모든 역사와 예언과 약속을 통해 주어진 구원역사에 대한 예고를 온전히 성취하셨다는 예수님 본인의 믿음과 사도들의 믿음은 그야말로 허무맹랑한 것이 되어 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그 뿌리에서 부터 역사적, 사실적 근거를 잃게 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누구든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고 마는 게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드신 몇 가지에 대해 답합니다.

1. 전도서의 7:28이 왜 성경의 오류에 대한 증거가 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저는 그 본문이 여성비하를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믿지 않지만, 설령 그렇게 믿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왜 성경의 오류와 연결되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구약성경은 가부장적인 문화권 속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내용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오류의 증거가 된다는 것은 논리적 비약일 뿐입니다.

 

2. 창세기 1장과 2장 4절이하의 창조기사 내용에 상호 모순이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은 고전적인 주장입니다. 하지만 복음주의권의 합의에 따르면 1장은 창조역사에 대한 대략적 기술 즉 큰 얼개를 잡는 것이고 2장 4절 이하는 좀더 상세한 기술 즉 사람의 창조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담고 있기 때문에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 창 6장 19절에 한 쌍씩이라고 한 것은 방주에 들어가는 방식 즉 짝을 지어 들어가라는 뜻이고 7장 2절에 일곱쌍씩이라고 한 것은 한 쌍씩 짝을 지어 들어가되 숫자적으로 7쌍이 들어가라 즉 14마리가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이 정도의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 성경의 오류를 내세운다는 것은 좀 안타까운 일이네요.

 

4.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가 다른 문제 역시도 매우 고전적인 문제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마태의 족보는 예수님의 법적 계통 즉 부계의 족보라면, 누가의 족보는 예수님의 인성적 계통 즉 모계의 족보입니다. 그래서 족보가 다른 것이지 두 족보가 근거없이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내용도 매우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내용인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의 오류가 있네 없네 한다는 것이 참 안타깝네요.

 

5. 삼하 24:1에서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과 역대상 21:1에 사단이 했다는 것은 결코 모순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사단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지요.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어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하 24:1은 하나님의 궁극적 주권의 관점에서 말한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이 악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실 때에는 당신이 직접적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사단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시는 것이죠. 그러므로 역대상 21:1의 내용 역시 옳은 기술이 됩니다. 악한 일도 하나님의 허용하시는 뜻을 따라 일어납니다. 그러나 악한 일을 실재로 행한느 자는 사단과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으로 악을 허용하시나, 사단은 악한 목적과 의도로 악을 행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두 구절은 아무런 모순이 없는 구절입니다. 이 두구절을 모순으로 보는 사람 자체가 신학적으로 무지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죠.

 

6. 마태복음 27장 9절은 10절과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10절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예레미야 32장 6-9절 내용과 일치합니다. 물론 마 27:9절의 은 삼십에 대한 내용은 스가랴에 나옵니다. 따라서 이런 결론은 내릴 수 있습니다. 기자 마태는 10절의 내용이 예레미야와 관계된 것을 알았다. 그리고 9절이 스가랴와 관계된 것을 알았다면 마태는 스가랴를 언급하지 않고 예레미야만 언급한 것이 된다. 그렇더라도 이것은 오류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태가 9절이 스가랴에 관계된 것을 몰랐기 때문에 스가랴를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그것 역시 오류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태의 무지와 한계라고 볼 수는 있더라도 ...

 

 

기회가 되면 한 번 만나서 이야길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년 6월에 우리 카페 오프라인 정모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 때 한 번 만나서 대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얼핏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잘 따져서 상고해 보면 오류와 모순이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성경관을 우리의 성경관으로 지탱하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