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러시아어 습득 과정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혹자는 백석이 러시아어를 부전공
으로 선택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학적부에
그런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학적부에 따르면
백석이 대학에서 공식적으로 배운 외국어는
영어와 독일어였다. 아오야마학원 중등부에
다니며 백석을 '형'으로 호칭하며 따랐던
고정훈은 이렇게 회고했다.
큰길 건너 맞은 편 건물은 중등부 건물인데,
중등부는 조선의 고보와 같은 과정이었다. 당시
중등부에는 한국인 학생으로는 유일하게 고정훈
이 다니고 있었다. 당시 백석은 수재로 이름이
나 있었고 영어, 프랑스어는 물론 3학년 때부터는
러시아어를 파고들었다. 《시인 백석 1 _ 송준
/ 흰당나귀(2012)》
1920년 평남 남포 태생인 고정훈은 고향에서
풍정보통학교를 마치고 진남포 신흥리 감리
교회의 외국인 알렉산더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
에 건너와 아오야마(靑山)학원 중등부에 다니고
있었다.
고정훈은 종합 월간지《현대공론》에 자신의
수기 '끌려왔노라 어둠을 보았노라 記錄(기록)
하노라'를 1988년 7월호(통권 3호)부터 같은해
12월호(통권 8호)까지 모두 6회 연재하던 중
1988년 11월 25일 급작스레 타계하고 만다.
비록 연재는 중단되었지만 미완의 수기 6회
분량은 남게된다. 당시《현대공론》기자였던
백석 연구자 송준은 고정훈을 직접 만나 백석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었다.
고정훈의 회고대로 백석이 아오야마(靑山)
학원대학 3학년 때부터 러시아어를 파고들었다
는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개인적인
학습이었을 것이다. 러시아어 습득에 대한 백석
의 집념은 함흥 시절 영생고보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백석이 함흥 시내에서 서점
(문방구까지 겸함)하는 백계러시아 사람한테
러시아어를 배우러 다녔다거나, 만주로 수학여행
갔을 때 기차 안의 러시아인들과 백석이 유창하게
말을 주고받았다거나, 함흥 중심가 군영통에 있는
러시아 사람이 운영하는 '大和(대화) 양복점'에
회화를 익히기 위해 드나들었다는 증언이 그것
이다. 이는 러시아어 습득을 위한 백석의 지속적인
열정과 함께 러시아문학에 대한 그의 관심이
얼마나 각별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특히 그의 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38년 3월 발표)에
나타나는 北國(북국) 지향과 여기서 호명된 이름이
'나타샤'라는 점은 러시아문학에 대한 백석의
정신적 지향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영문학
전공자인 백석이 왜 러시아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1920~30년대의
시대 상황과 맞물린다.
당시 러시아는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지식인
에게 식민지라는 암울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이자 자유의 공간으로 표상되었다. 더구나
정서적으로, 지리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친밀감을
지닌 관북인들에게 북방 의식 혹은 북방적 상상력
으로 명명되는 문화사적 흐름을 형성하는 데 기여
했다. 그리고 그들의 정서적 편향은 조선인 작가들
의 만주행을 추동하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그건
1920~30년대에 집중적으로 유입된 러시아문학
의 열풍과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
백석의 북한 잔류는 고향에 머물겠다는 그의 자유
의지의 발현이자 러시아문학에 대한 낭만적 동경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백석은 함흥에서 외톨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올백
머리에 '료마에 양복' 입고 미소 띠며 걷는 멋쟁이로
통했다. 그는 외국인처럼 허여멀쑥하게 키도 크고 준수한 용모에 열정까지 겸비한 데다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北關(북관) _ 咸州詩秒一(함주시초일)
明太 창난젖에 고추무거리에
막 칼질한 무이를 뷔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北關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꿀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나는 가느슥히 女眞의 살 내음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깜아득히 新羅 백성의 鄕愁(향수)도
맛본다.
"끼밀다"라는 말은 '끼고 앉아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자세히 느낀다.' 는 뜻의 북관 사투리
이다.
백석의 친구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신현중이다.
1910년 경남 하동 태생인 신현중은 통영보통학교
를 졸업했고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한 수재로 경성제대 시절 일본의 만주 침략에
반대하는 격문을 돌리다가 검거되어 3년의 실형을
받고 복역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신현중)는 출소 후인 1934년 봄 조선일보에 입사해 백석과 사귀게
되었다. 신현중은 허준과도 친한 사이여서 경성
서대문 죽첨보통학교 교사인 자신의 여동생,
신순영을 부랴부랴 허준에게 결혼시켜 허준과는
처남 매점 사이가 된다. 그리고 통영에서 교사했던
신현중의 누나, 신순정도 동생의 경성제대 합격을
계기로 경성으로 올라와 경기도 포천에 있는 한
학교로 전근하게 된다. 이때 그녀의 통영 제자들도
경성에 있는 여학교로 진학하게 되는데, 박경련은
이화여고에 들어가게 되고 김천금은 경기여고에
들어가게 된다. 특히 김천금의 입학 당시 보증
서준 이가 신현준이었다. 이후 신현중은 외삼촌
서상호의 가회동 집에서 하숙 하고 있던 박경련도
알게 된다. 조선일보에 입사한 신현중이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의 언론인 김준연의 눈에 들어 그의
딸, 김자옥과 약혼하게 된다. 이에 신현중은
박경련을 백석에게 소개했던 것이다.
흰 바람벽이 있어 _ 白石(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메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즉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陶淵明(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_ 《문장 26호 _ 1941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