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석읍이란
양주시 11개 읍면동 가운데 하나로 동쪽으로 양주동, 서쪽으로 파주시 광탄면, 남쪽으 로 장흥면, 북쪽으로 광적면과 접해 있다. 면적은 군내에서 장흥면 다음으로 크다. 백석읍은 남쪽의 앵무봉(鸚鵡峰, 621.8m)으로부터 시작하여 북쪽의 노아봉(老兒峰, 336m)에 이르기까지 한강봉(漢江峰,436m)과 은봉산(隱鳳山,379m) 등의 연봉을 이루어서 동서의 지형구분이 뚜렷해진다. 따라서 북쪽의 오산리(梧山里)에서부터 광적면 가납리와 광석리에 걸친 드넓은 분지가 발달되어 있고, 기타의 지역은 거의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소재지는 오산리에 있으며, 방성리(防城里), 홍죽리(弘竹里), 연곡리(蓮谷里), 기산리(基山里), 가업리(加業里), 복지리(福池里) 등 7개의 법정리와 26개의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면소재지인 오산리에는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경찰지서, 농협, 양주소방서,초, 중,고 학교 등이 있다. 최근 복지리와 가업리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증하였으며, 그 결과 2001년 10월 1일 읍으로 승격되는 경사를 맞이하였다.
2. 조선시대의 백석
백석(白石)이란 땅이름은 18세기 중반의 문헌인 여지도서(1757)에서 처음 등장한다. 18세기 후반의 문헌에서는 구체적인 마을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호구총수(1789)는 백석면이 일패리(一牌里)·이패리(二牌里)·삼패리(三牌里)·사패리(四牌里)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어서 동국여도(1801∼1822), 청구도(1834), 양주목읍지(1842), 대동여지도(1861), 대동지지(1864). 양주목읍지(1871), 조선지리략(朝鮮地誌略, 1888), 양주군읍지(1899), 양주읍지(1899)에서도 백석이란땅이름이 확인된다. 백석은 양주동에서 서쪽에 있으며, 읍치로부터 초경이 10리, 종경이 40리 되는 거리에 있다고 하였다. 한편 정조실록 18년(1794) 1월 17일 조항에서는 양주읍치 뒤로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북쪽에는 울대현(蔚垈峴)이 있고 서쪽에는 백석면이 있어 곧장 관서로 통하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대한제국기에는 오늘날 백석읍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마을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측 기록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서는 방축리(防築里)·산성리(山城里)·대오산리(大梧山里)·상가업리(上加業里)·내동리(內洞里)·난곡리(蘭谷里)·내고령리(內高靈里)·마장리(馬場里)·고릉리(古陵里)·홍복리(弘福
里)·소오산리(小梧山里)·기곡리(基谷里)·홍동리(弘洞里)·연평리(蓮坪里)·중산리(中山里)·대고령리(大高靈里)·능내리(陵內里)·신지리(莘池里)·하가업리(下加業里)·단촌리(短村里)·천죽리(川竹里)·해유리(蟹踰里)·옹장리(甕場里) 등 23개리로 구성되었다고 하였다.
3. 일제시대의 행정구역 개편과 백석
일제는 식민지조선의 지배를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서 1914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착수하였다. 이 결과는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정리되었다. 즉 기존의 23개리를 재구성하여 방성리(防城里)·오산리(梧山里)·홍죽리(弘竹里)·연곡리(蓮谷里)·영장리(靈場里)·기산리(基山里)·가업리(加業里)·복지리(福池里) 등 8개리로 바꾸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광석면(廣石面) 일패리·이패리와 파주군 광탄면 마장리(馬場里) 그리고 고양군 신혈면 벽제리 등 4개리에서 일부를 떼내어 백석면에 편입하였고, 각리의 구성도 대폭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읍사무소는 오산리에 설치하였다.이밖에도 일제시대의 기록 가운데 조선국세조사보고(朝鮮國勢調査報告,1930)에는 1925∼1930년 당시 백석면 인구가 6천 여 명에 달한다고 하였다.
4. 오늘날의 백석
광복 후에도 일제초기에 개편된 백석읍 행정구성은 계속 유지되었다. 1940년대 말 정부의 공식기록인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49)에서 나타나는 백석면 역시 오산리·방성리·홍죽리·연곡리·영장리·기산리·가업리·복지리 등 총 8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지방행정구역명감(1959)과 한국의 발견(1983)을 보면 백석면의 면적과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그 후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따라 기산리와 영장리 등 2개리가 파주시로 이속되었다가 이 중 기산리의 일부는 1987년 1월 1일에 다시 환원되어 7개리를 이루게 되었으며, 2001년 10월 1일 백석면이 백석읍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5. 땅이름유래
백석이란 땅이름은 방성리와 양주1동의 유양동·어둔동에 걸쳐 있는 양주산성(옛 대모산성·大母山城)에 흰돌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현재 양주산성에는 흰 돌이 없고, 다만 방성리에 소재한 양주소놀이굿 전수회관 부근의 배나무과수원에 흰돌이 있어 이것을 백석의 기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원래 백석은 조선시대부터 사용되는 용어로써 전국 어디에나 존재하며, 백석이라는 땅이름이 존재하는 대부분의 지역을 보면 흰돌이라는 자연물을 그대로 한자로 옮겨 백석(白石)이라고 했다기보다는 큰 들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이 변하여 흔돌〉흰돌〉백석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홍복산을 넘어서 오든 아니면 유양동에서 양주산성을 넘어서 오든 현재의 백석지역에서 제일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넓은 들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지역을 오갔던 옛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산을 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이 크게 인상에 남았을 것이므로 땅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백석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1) 방성리(防城里)
백석읍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으로 회천2동의 덕계동 및 양주1동의 산북동·유양동·어둔동, 서쪽으로 오산리, 남쪽으로 복지리, 북쪽으로 은현면 용암리 및 광적면 가납리와 접해있다. 방성리라는 땅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14년일제에 의한 행정구역개편 이후이다. 대한제국기까지만 해도 이곳은 대부분 방축리(防築里)와 산성리(山城里)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백석읍의 방축리 및 산성리 전체와 고릉리(古陵里) 및 광석면(廣石面)의 일패리(一牌里) 일부를 병합하고, 방축리와 산성리에서 각각 한 자씩 따서 방성리라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 1912)과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나와 있다. 방축리란 땅이름은 마을 앞에 북서계절풍을 막기 위해 흙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심은 방축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산성리는 근방에 양주의 외성인 산성(옛 대모산성)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고릉말[古陵-]
방성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능이 있던 마을 혹은 능의 자리로 적합한 지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 마을이 위치한 곳은 동쪽의 불곡산으로부터 뻗어내린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어 부근의 다른 마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높은 능선 상에 위치하고 있어 고릉말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현재 고능말에는 중간말과 가운데우물 등이 있다. 일본군사지도(1895)에서 처음 등장하며, 고릉리(古陵里)로 소개하고 있다. 일제초기의 문헌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서도 백석면 소재의 고능리(古陵里)로 나온다. 433-1번지 일대이다.
■ 고만이안
대모산성 밑에 있는 마을이다. 고씨(高氏)가 만석의 벼를 수확하던 곳이라 하여 ‘고’자와 ‘만’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지역이 한창 번성했을 때에는 수백 호가 살았다고 하나 현재는 집이 그리 많지 않다. 698번지 일대이다.
■ 골말
고릉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그만 골짜기 사이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골말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회암동, 백석읍 오산리·가업리·홍죽리·연곡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246번지 일대이다.
■ 골안바닥
고릉말 서쪽에 있는 골말 안쪽 마을이다. 골짜기 안에 있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42번지 부근이다.
■ 능안·능내(陵內)
고릉말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능이 있는 안쪽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실제 능은 없다. 따라서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불곡산의 능선이 펼쳐진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어서 붙여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능안이라는 땅이름이 무수히 존재하는데, 그 중 능선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극히 일부분만이 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능안은 예로부터 밤가시라고도 불렸는데, 그만큼 산의 능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일제초기의 문헌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서는 백석면 소재의 능내리(陵內里)로 소개되었다. 능안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덕정동, 장흥면 부곡리·일영리·삼상리에서, 밤가시라는 땅이름은 백석읍 가업리, 광적면 석우리에서도 확인된다. 4번지 일대이다.
■ 다랫말
고릉말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어떤 이유로 이러한 이름이 붙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산자락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어 산에서 자라는 다래나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116-1번지 일대이다.
■ 모래말·사촌(沙村)
고릉말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불곡산의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 위치하며, 흙의 성분에 많은 모래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세아2차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모래말·사촌이란 땅이름은 남면 구암리에서도 확인된다. 160-2번지 일대이다.
■ 뭇태안·방축(防築)
고릉말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 북서계절풍을 막기 위해 흙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심은 방축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강릉 김씨였는데, 다른 성씨는 하나도 없어 무타인(無他人)으로 부르던 것이 무태안으로 변하였다가 뭇태안으로 정착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설에는 부근에 연못 혹은 저수지가 있었고, 그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뭇뒷골안으로 불렸는데 이것이 뭇태안으로 바뀌었다고 전하는데, 실제로는 이 마을이 위치한 곳이 주위의 조그만 산자락에 의해 둘러 싸여 있는 형상이므로 ‘뭍의 안쪽‘이라고 불리다가 뭇태안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뭇태안은 일본군사지도(1895)에서 처음 확인되며 방축리(防築里)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일제초기의 문헌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서도 이곳을 백석면에 소재한 방축리(防築里)로 소개하였다. 현재 동쪽 끝부분에는 대교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그 옆에 백석주유소(현재는 폐업)가 위치하고 있다. 360번지 일대이다.
■ 밤가시 → 능안
■ 사단말
한국전쟁 이후 외국군대가 주둔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미군7사단, 영국군, 터키군, 미군8사단이 각각 차례대로 주둔했었고 현재는 26사단이 자리잡고 있다.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라 하여 신촌(新村)으로도 불린다. 신촌이란 땅이름은 회천4동의 옥정동, 은현면 선암리, 광적면 우고리·덕도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새롭게 만들어진 마을이라는 뜻이다. 81-2번지 일대이다.
■ 산성말·양주산성
뭇태안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양주산성은 방성리와 양주1동의 유양동·어둔동에 걸쳐 있는 산성으로 조선시대에는 대모산성(大母山城)으로 불리다가 현재는 양주산성으로 불린다. 이 산의 높이는 212.9m인데, 현재 성터의 일부가 남아있으며 최근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산성말은 양주산성 주변에 조성된 마을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일본군사지도(1895)에서 처음으로 산성리(山城里)로 소개하였다. 일제초기의 문헌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도 백석면에 소재한 산성리(山城里)로 소개하였다. 716번지 일대이다(양주산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양주1동의 어둔동의 산성·산성마을을 참고).
■ 신촌(新村) → 사단말
■ 웃고장말
고능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능말의 위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54번지 일대이다.
■ 중간말
고능말의 중간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릉말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도 사용된다. 중간말이란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4동의 옥정동, 백석읍 복지리, 남면 상수리·황방리, 장흥면 일영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중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한자로는 간촌(間村)으로 불리기도 한다. 440번지 일대이다.
○ 가운데우물
고능말 가운데에 있는 우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없어졌다. 가운데 우물이라는 명칭은 백석읍 오산리에서도 확인된다. 산146-5번지에 있었다.
○ 개논
고능말 남쪽 개울 앞에 있는 좋은 논이다. 원래는 물가에 있는 논이라는 뜻의 가논으로 불렸는데, 이것이 변하여 가논〉개논이 되었다. 431-1번지이다.
○ 거북바위
고릉말 동쪽 불곡산 자락에 있는 바위이다.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거북바위라는 명칭은 남면 구암리, 장흥면 교현리에서도 확인된다. 산104-1번지에 있다.
○ 고깔바위
고릉말 동쪽 불곡산 자락에 있는 바위이다. 마치 고깔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88-1번지에 있다.
○ 고래논
고능말 남쪽에 있는 논이다. 항상 물이 많고 비옥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물골을 따라 펼쳐진 논이므로 골논으로 불리다가 고래논으로 변하였다. 405번지 일대이다.
○ 곰잡은골
불곡산의 청려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서 곰을 잡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43번지 일대이다.
○ 국골
산성말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산성말 사람들은 1950년까지 만해도 어둔리를 거쳐 의정부에서 장을 보아야 했다. 장에 갔던 사람들이 날이 저물어 돌아오게 되면 도둑이나 강도, 산짐승을 만날까 두려워하여 이곳을 지날 때면 군호(軍號)로 ‘국국’하는 신호를 보냈다고 하여 이와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산220번지 부근이다.
○ 군갈무늬·궁갈무늬·군장곡(軍藏谷)
조선시대 양주산성 외곽에 있는 군인들의 양식을 숨겨놓았던 곳이다. 즉 군인들이 양식을 갈무리해 놓았던 곳이라는 뜻으로 군갈무리라고 부르던 것이 군갈무늬〉궁갈무늬로 변하였다. 이곳에 군인들도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말이 목말라 죽은 곳이라고도 한다. 한자로는 군장곡이라고 한다. 현재 대교아파트가 서있는 부근이다. 510-1번지 일대이다.
○ 군갈무늬고개·궁갈무늬고개
백석주유소 뒤쪽 옛길에 있는 고개이다. 오산삼거리에서 가납리 방향으로 지방도를따라 1km 가량 지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일설에는 일제시대 총독부에서 금광을 발굴하고자 산허리를 뚫었는데, 이때 금가루가 나왔다 하여 금가루문이 고개 또는 금갈문고개라고 불렀다가 이것이 변하여 군갈무늬고개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것은 와전된 것이고, 실제로는 부근에 군인들의 양식을 갈무리, 즉 저장하던 곳이 있어 군갈무리고개(현재 길을 사용하지 않아 낙엽만 무성하게 쌓여있다.)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군갈무늬고개 〉궁갈무늬고개가 되었던 것이다. 현재 옛 고개길이 존재하며 근처에는 성황당나무도 서있다. 산124-1번지에 있다.
○ 김새이골·김승골
고릉말 동쪽 불곡산자락에 있는 골짜기이다. 멧돼지를 비롯한 산짐승들이 많아 짐승골로 불리던 것이 변하여 김생골〉김새이골이 되었다. 산104-1번지 일대이다.
○ 꽃봉골
방성리와 복지리, 그리고 양주1동의 어둔동 경계에 위치한 호명산 중턱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의 북향 그늘진 산자락에 봄이 되면 벚꽃과 진달래꽃이 많이 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여러 그루의 꽃나무가 자란다. 산220번지 일대이다.
○ 농바위
고릉말 동쪽 불곡산 자락에 있는 바위이다. 둘레는 19.6m, 너비는 동서로 4.4m 남북으로 6.1m이며, 높이는 앞면이 5.7m 뒷면이 3.7m이다. 어느 스님이 이 바위에 옷을 걸어두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어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은 바위둘레에 움푹 패인 흔적이 여러 곳 있는데, 이것은 후대사람들이 치성을 드리기 위해 돌로 갈아놓은 것이다. 현재 농바위에는 바위 위를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놓여 있으며, 바위에 올라가면 백석읍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농바위라는 명칭은 회천1동의 봉양동, 장흥면 울대리에서도 확인되는데, 모두 장롱처럼 네모반듯한 모습을 하고있어 붙여졌다. 산88-3번지에 있다.
○ 능모퉁이
산성말 남쪽 호명산 자락 능선 끝 지점에 있는 길이다. 복지리에서 산성말로 가는 지점에 있으며, 이 모퉁이를 돌아가게 되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에 어떤 지관(地官)이 능터를 잡으려다 못 잡은 곳이라 하여 ‘능 못잡은 곳’ 또는 ‘능 못한 곳’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능못텡이, 능모퉁이가 되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와전인 듯싶다. 능모퉁이란 땅이름은 장흥면 교현리에서도 확인된다. 산198-2번지 부근이다.
○ 대모산(大母山)
방성리와 양주1동의 유양동·어둔동의 경계지점에 있는 높이 212.9m의 산이다. 성터가남아 있으며, 최근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일제시대에는 학생들 사이에서 목판(떡을 나눠먹는 그릇)처럼 생겼다 하여 목판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현재의 양주산성은 조선시대에는 이 산의 이름을 따서 대모성(大母城)·대모산야(大母山也)·대모산성으로 불렸다. 대모산 혹은 대모산성은 15세기 중반의 사실을 전하는 세종실록에서 처음 확인된다. 30년(1448) 12월 10일 기사에서는 이곳을 홍복산 등과 함께 경기지역의 대표적인 강무장(講武場) 즉 왕의 공식 수렵 연습장으로 소개하였다. 그 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서는 읍치의 서쪽으로부터 5리 지점에 있고, 돌로 만든 산성이며, 둘레가 906척 높이가 5척이라고 하였다. 한편 대모산성이란 땅이름은 동여비고(1682)·양주목읍지(1842)·동국여지지(19C중엽)·대동지지(1864)·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 1888)·양주군읍지(1899)·양주읍지(1899)·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908)·조선환여승람(1937)에서도 계속해서 확인된다. 789번지 일
대이다.
○ 덕재고개
산성말 남쪽 호명산 중턱에 있는 고개이다. 서돌 위에 위치하고 있다. 고개가 크다하여 클 ‘덕(德)’자를 써서 덕재고개라 하였다.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땔나무를 구하러 지게를 지고 호명산을 오르내렸는데, 서돌 위에 큰 고개가 있어서 이곳에서 쉬곤 하였다고 한다. 어둔동과 경계가 되는 지점이다. 산222번지에 있다.
○ 도당터
산성말 남쪽 호명산 자락에 있는 골짜기이다. 산성말 사람들이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도당제를 지내던 곳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산219번지 부근이다.
○ 도락산(道樂山)·두락산(頭落山)·돌압산(突壓山·突押山)·돌앞산·노락산
방성리와 회천2동 덕계동, 은현면 도하리·용암리, 광적면 가납리 경계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는 441m이며, 산세가 웅장하고 수목이 울창하다. 대장암(大藏岩)·선경암(仙敬岩)·사모암(紗帽岩)·깃대봉(旗臺峰)이 있다. 땅이름 유래에 관해선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① 고려건국 후 지사(地士)를 시켜 송도부근 500리 이내의 산천을 답사하였더니, 특히 도락산만은 송도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예를 하는 것 같다 하여 충신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의 한양천도 후 지사를 불러 다시 한양부근 500리 이내의 모든 산세를 답사하게 하였더니, 오직 이 산만이 한양을 배반하고 있다하여 조정에서 산의 머리(산두, 山頭)를 치게 했다. 이에 머리가 떨어지니 두락산(頭落山)이 되었고, 이후 약 200년 전에 산명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발음이 비슷한 도락산(道樂山)으로 고쳤다 한다.
② 옛날에 모든 산들이 서울 남산을 향하여 줄줄이 이동하는데, 불곡산이 길을 막고 터주지 않자 화가 나서 동쪽방향 즉 덕계동 쪽으로 돌아앉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실제 돌악산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돌악산 정상에 있는 바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돌의 산이라는 뜻의 돌산이 한자로 표현되면서 돌악〉돌악산〉도락산으로 변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돌압산·두락산·돌압산·노락산 등의 이름으로도 불렀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도락산은 18세기 중반의 문헌에서부터 확인된다. 해동지도(1760)에서 돌압산(突壓山)으로 기록된 이 산의 이름은 팔도군현지도(1767∼1776)·동국여도(1801∼1822)까지 마찬가지였다가, 대동여지도(1861)와 대동지지(1864)에서 한자만 바꾸어 돌압산(突押山)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 후 신편조선지지(新編朝鮮地誌, 1924)에서부터 도락산(道樂山)으로 소개되고 있다. 산54번지 일대이다.
○ 도둑골
방성리 산성말과 양주1동의 어둔동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호명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 도둑이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호명산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모판산 웃모단(웃방죽)을 향해 흐르는데, 이 골짜기에는 예로부터 도둑이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인근에는 국골이라는 골짜기까지 생기게 되었다(자세한 내용은 위의 ‘국골’ 참조). 산197번지 일대이다.
○ 두레우물
산성말 안쪽에 있는 우물이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먹던 우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두레우물이란 명칭은 백석읍 오산리에서도 확인된다. 720번지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 마루뜰
고능말 앞에 있는 들판이다. 마루바닥을 깔아 놓은 것과 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408번지 일대이다.
○ 만수터
양주산성 남쪽 자락에 있는 묘소터이다. 묘소 앞에 물이 가득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즉 물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옛날 황종복이라는 사람의 조상 산소 3기가있던 곳인데, 그 앞에 저수지를 만들자 산소 앞까지 물이 가득히 찼다고 한다. 황씨 가문이 물명당 자리에 산소를 써서 후일 정승이 나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지금은 개간되어 밭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797번지이다.
○ 망향탑
불곡산 입구에 있는 비석이다. 황해도 박천사람들이 북쪽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세운 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평북 박천동산이라고도 한다. 현재 26사단 안에 있다. 산4-1번지에 있다.
○ 면화개울·메나개울
산성말 남쪽에 위치한 개울이다. 호명산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로 앞에는산성말이 자리 잡고 있다. 면화밭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말기 이 주변에 약 4,000여 평의 면화밭이 조성되어 가을이면 하얀 면화가 눈송이처럼 날릴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는 면화밭이 없다. 849-3번지 일대이다.
○ 모우물·몬우물
산성말 앞에 있었던 우물이다. 물이 모이는 대로 바가지로 퍼서 물을 길었던 우물이라 하여 몬우물·모우물이라고 불렀으며, 바가지우물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703번지에 있었다고 전한다.
○ 목판산 → 대모산
○ 바가지우물 → 모우물
○ 박석다리
산성말에서 뭇태안으로 가는 길에 있는 다리이다. 박씨가 돌로 만든 다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호명산에서 발원한 물과 동쪽 모판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이 다리를 지나는데, 옛날에는 다리가 없었으나 이 마을에서 오래 살아온 밀양 박씨가 돌다리를 놓았다 하여 이와 같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590-1번지에 있다.
○ 방아다리
오산리·방성리·복지리 경계부분에 있는 다리이다. 옛날 이곳에 물레방아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방아다리라는 명칭은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4동의 옥정동, 양주2동의 고읍동, 백석읍 오산리·복지리·연곡리, 은현면 봉암리, 광적면 가납리, 장흥면 울대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방아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29-3번지에 있다.
○ 방죽골
뭇태안 초입에 있는 골짜기이다. 북서계절풍을 막기 위해 만든 방축의 둑을 쌓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67-1번지 일대이다.
○ 범바위
산성말 남쪽 호명산 자락에 있는 바위이다. 마치 범처럼 생긴 바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범바위라는 명칭은 은현면 운암리, 광적면 효촌리, 장흥면 석현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바위가 범처럼 생겼다는 뜻인데, 한자로는 호암(虎岩)이라 부르기도 한다. 산223번지에 있다.
○ 봉내동산
고릉말 남쪽에 외떨어져있는 나지막한 산자락이다. 부엉이가 날아와 앉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지역에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 어떤 지관(地官)이 말하기를 산성말 부근(580번지 부근)의 무덤을 파면 돌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묘소를 쓰기 위해 이 무덤을 파보니 정말로 돌이 나왔다. 그런데 여기에서 부엉이 두 마리가 나와 두 곳으로 날아갔는데, 한 마리는 봉내동산에 가서 앉았고, 다른 한 마리는 봉숭아골에 앉았다고 전한다. 산421-1번지이다.
○ 봉숭아골
고릉말 남쪽 봉내동산 동쪽에 외떨어져있는 나지막한 산자락이다. 부엉이가 날아와숨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 어떤 지관(地官)이 말하기를 산성말 부근(580번지 부근)의 무덤을 파면 돌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묘소를 쓰기 위해 이 무덤을 파보니 정말로 돌이 나왔다. 그런데 여기에서 부엉이 두 마리가 나와 두 곳으로 날아갔는데, 한 마리는 봉숭아골에 가서 앉았고, 다른 한 마리는 봉내동산에 앉았다고 전한다. 현재는 논으로 변해있다. 426번지이다.
○ 빨개터
방성리와 양주1동의 유양동 경계부분에 있는 개울가이다. 여름에는 시원한 물이 나오고,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았으며 김이 났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빨래를 하던 곳이라고 하여 빨래 개울터라 하던 것이 변하여 빨개터가 되었다. 도로 확장과정에서 파묻혀 지금은 없어졌다. 544-2(도)번지 부근이다.
○ 삼동바위
고릉말 동쪽 불곡산 자락에 위치한 바위이다.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산104-1번지에 있다.
○ 상투봉
고릉말 동쪽 불곡산 정상에 있는 봉우리이다. 양주1동의 산북동·유양동와 경계가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치 모양이 상투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104-1번지에 있다.
○ 서낭당고개
방성리와 산성말을 잇는 고개이다. 서낭당이 있어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침을 뱉으며 복을 빌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낭당고개라는 땅이름은 양주2동의 고읍동, 백석읍 홍죽리, 은현면 운암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서낭당이 있는 고개라는 뜻이다. 산198-2번지 부근이다.
○서돌
호명산 북쪽에 있는 바위이다. 어둔리에서 넘어오다 보면 이 바위가 서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호명산 중턱에 커다란 검은 바위 수만 개가 쌓여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산202번지 일대이다.
○ 세귀배미
산성마을 입구에 있는 논이다. 논 모양이 세 개의 귀퉁이를 가진 삼각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724-1번지이다.
○ 쇠뿔바위
사단말 동쪽 불곡산에 있는 바위이다. 청려골에서 잘 보이며, 마치 쇠뿔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77번지에 있다.
○ 시루봉
고릉말 동쪽 불곡산 자락에 있는 봉우리이다. 봉우리 모양이 시루처럼 생겼다 하여붙여진 이름이다. 시루봉이라는 땅이름은 양주1동의 유양동에서도 확인된다. 산104-1번지에 있다.
○ 신천(莘川)
복지리 한강봉과 은봉산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이다. 방성리와 복지리의 경계, 그리고 방성리와 오산리의 경계를 이루면서 흘러 내려가 광적면과 은현면, 회천동을 거쳐 북쪽의 동두천시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으로, 감악산에서 내려오는 강줄기와도 합쳐지는 총길이 38.5km의 준용하천이다. 양주의 모든 지역을 적시면서 흐르는 하천으로 홍죽천·효촌천·입암천·청담천·덕계천·회암천·상패천·석우천·우고천·방성천·연곡천 등 각 마을마다 이름을 달리하지만 이곳 복지리와 방성리의 경계를 흐르는 하천은 신천으로 이름이 불려지고 있다. 661-1번지 일대이다.
○ 양가뫼·양가메·양가메이뿌리
소놀이굿 전수회관 뒤편에 있는 산이다. 양씨가문에서 제사를 지내던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성말에 있는 호명산의 긴 줄기가 북쪽을 향하는데, 예로부터 이 산을 가리켜 양가뫼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양씨가 묘를 쓰고있어 양가네묘·양가의묘라고 했다 하며, 혹은 양가네 가마가 이곳을 지난다고 하여양가마라고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621번지이다.
○ 양천개·양천개울
고능말의 서쪽에 있는 개울이다. 복지리로부터 시작하여 방성리와 복지리·오산리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신천과, 불곡산에서 발원하여 고릉말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흘러 나가는 개천이 합쳐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즉 두 개울이 있는 곳이라 하여 한자로 양천(兩川)이라 부르던 것에 개울이 다시 붙어 쓰인 이름인 것이다. 262-2번지 부근이다.
○ 양천개다리
고릉말의 서쪽에 있는 다리이다. 복지리로부터 시작하여 방성리와 복지리·오산리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신천과, 불곡산에서 발원하여 고릉말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나가는 개천이 합쳐지는 곳인 양천개울에 있는 다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양천개다리는 백석교(길이 30m, 폭 12m)라는 이름의 현대식 다리로 변해 있으며, 방성리 모래말·신촌과 오산리을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220-4번지에 있다.
○ 어두니
산성말 남쪽 호명산자락에 있는 골짜기이다. 방성리에서 양주1동의 어둔동으로 넘어가는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어둡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산197번지에 있다.
○ 여우골
능안 뒤쪽 도락산 자락에 있는 골짜기이다. 여우가 울던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락산에서 발원한 샘줄기가 1km 정도 흘러간 지점에 우거진 숲이 있다. 예로부터 여우가 많이 살아서 밤이면 밤마다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아 주민들이 잠을 못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혹은 산모양이 여우꼬리를 닮았다고 하는 얘기도 있다. 여우골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덕정동, 회천4동의 회암동, 은현면 운암리, 남면 구암리에서도 확인된다. 여우골이라는 땅이름은 대개 여우가 자주 나타나는 골짜기라는 뜻을 나타낸다. 산4-1번지 부근이다.
○ 오산삼거리
백석읍과 양주1동 경계부분에서 방성리로 들어오는 세 갈래 길이다. 옛날에는 감악산으로 부터 삐아리(나무단)나 좁쌀을 마차에 싣고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특히 네 갈래로 갈리는 길이어서 네거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양주1동의 어둔동으로 연결된 길이 없어져서 삼거리로 바뀌었다. 마을사람들은 방성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방성삼거리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 오산리에 면사무소가 들어서면서 오산리 면사무소로 들어가는 삼거리길이라는 뜻에서 ‘오산삼거리’로 부른 후 현재까지 그대로 부르고 있다. 544-2(도)번지이다.
○ 옥살미
산성마을에서 오산삼거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모판산 아래의 넓은 들이 위치한 이 고개 바로 밑에 있는 논에서 예로부터 구슬같은 쌀이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26-1번지 부근이다.
○ 장안터
산성말 남쪽에 있는 들판이다. 조선시대에 시장이 들어섰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옛날에는 가업리와 복지리 주민 대부분이 현재의 의정부 방면으로 왕래하기 위해 이곳을 지나쳐 다녔다고 한다. 성황당이있었다고 한다. 811번지 부근이다.
○ 절터골
고릉말 동쪽 불곡산 자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절이 있던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 이곳에 절이 있었는데, 고양이가 많아 폐사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현재 절터에는 묘소가 자리 잡고 있으며, 부근에서 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이곳의 지형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길지라고 전한다. 옛날 어느 승려가 황씨 가문에 묘소자리를 잡아 주었던 곳이라고도 한다. 절터골이란 땅이름은 양주1동의 남방동, 양주2동의 삼숭동, 은현면 선암리·운암리·도하리, 남면 신산리, 장흥면 부곡리에서도 확인된다. 절터굴이라고도 한다. 모두 절이 있던 골짜기라는 뜻이다. 산104-1번지에 있다.
○ 진골
긴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긴골이라고도 부른다. 진골이라는 땅이름은 은현면 용암리·도하리에서도 확인된다. 산137-1번지 부근이다.
○ 천냥바위
고릉말 동쪽 불곡산 자락에 있는 바위이다. 둘레는 16m, 높이는 4.2m이며, 너비는 남북이 1.8m, 동서가 0.8m이다. 어느 승려가 농바위에 옷을 얹고 이 바위를 보고는 ‘저 바위는 천 냥 쯤 되겠다.’고 말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현재 군갈무늬고개에서 시작되는 불곡산 중턱 등산로에 위치하고 있다. 산103-3번지에 있다.
○ 청려골·청려곡(靑黎谷)
불곡산과 도락산의 경계를 이루면서 이루어진 깊은 골짜기이다. 불곡산과 도락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의해 계곡이 천여 개나 될 정도로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즉 천여골이 청려골〉청려곡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산60번지 일대이다.
○ 할딱고개
고릉말 동쪽 불곡산 정산 부근에 있는 고개이다. 숨을 헐떡거릴 정도로 가파른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할딱고개라는 땅이름은 백석읍 홍죽리에서도 확인된다. 산104-1번지에 있다.
○호명산(虎鳴山)·범울산
방성리와 복지리, 그리고 양주1동의 어둔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는 330m이며 바위가 많다. 범이 울어대던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산세가 좋고 ‘상살미’라는 12골의 험한 산골짜기가 있다. 옛날에는 각종 산짐승이 살았고, 특히 호랑이가 밤마다 슬피 울어대서 사람들이 잠을 못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산223번지이다.
(2) 오산리(梧山里)
오산리(梧山里)는 백석읍에서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으로 방성리, 서쪽으로 홍죽리, 남쪽으로 복지리·가업리, 북쪽으로 광적면 가납리·광석리와 접해있다. 오산리라는 땅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대한제국기 부터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기 전에 이미 대오산리(大梧山里)와 소오산리(小梧山里)라는 땅이름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나와 있다. 한편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진 이후 오산리는 백석읍의 중심지로서 면소재지가 되었으며, 신지리(莘池里)·대오산리(大梧山里)·소오산리(小梧山里)·단촌리(短村里)·고릉리(古陵里)·능내리(陵內里)와 광석면 일패리·이패리 일부로 형성된 것으로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는 기록되어 있다. 오산리라는 땅이름은 홍복산의 큰 줄기에서 복지리를 거쳐 오산리까지 뻗은 둥근산 하나가 외롭게 떨어져 긴꼬리를 늘어뜨리고 있어 이것이 마을사람들에게 외로운 산이라는 뜻의 ‘고뫼’라고 불렸는데, 이 말이 점차 변하여 고미〉오미〉오산이 되었다. 그 중 큰 것은 대오산, 작은 것은 소오산으로 불려졌다.
큰오미에 있는 마을이다. 골이 깊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북쪽으로 산자락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있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방풍이 된다. 골말이라는 땅이름은 회천4동의 회암동, 백석읍 방성리·가업리·홍죽리·연곡리에서도 확인된다. 대개깊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83-1번지 일대이다.
■ 넘어말
작은오미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작은오미에서 산자락 너머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47번지 일대이다.
■ 샘말
골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만병통치의 샘이 마을 가운데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쪽이 확 트여서서 북풍을 받는 관계로 여름과 겨울에 부는 바람이 차다고 한다. 41-6번지일대이다.
■ 옹안이[梧安-]
현재 백석읍사무소(백석읍주민자치센터)와 백석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뒷산에 기러기떼가 자주 앉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원래 옹안(雍雁)이라고 불렸는데 발음과 한자가 모두 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와전인듯 싶고, 실제로는 큰오미와 작은오미의 사이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532번지 일대이다.
■ 작은오미·소오산(小梧山)
큰오미 서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위쪽에 있는 윗말(194-4번지일대), 중간에 있는 중간말(494번지 일대), 아래쪽에 있는 아랫말(473-2번지 일대), 넘어 말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외로운 산이라는 뜻의 ‘고뫼’가 변하여 고미〉오미〉오산이 되었는데, 그 중 북쪽에 위치한 작은 것을 소오산이라 부르고 이곳에 형성된 마을을 작은오미라고 일컫고 있다. 산13-1번지 일대이다.
■ 잘음매기·절음막이·절음매기·단촌(短村)
작은오미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웃말(649번지 일대)과 아랫말(310번지 일대)로이루어져 있다. 작은 동네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홍죽천과 신천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물줄기가 광적면 경계에서 끊어졌다고 하여 끝 ‘단(端)’자와 마을 ‘촌(村)’자를 따서 단촌(端村)이라 하다가 단촌(短村)이 되었다고 한다. 시냇물 소리가 끊어졌으므로 절음막(切音莫)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이 마을에서는 우물을 만들면사람이 죽는다 하여 얼마 전까지 만해도 개울물을 길어 먹었다고 한다. 130∼40년 전 우씨·김씨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다. 일제초기의 문헌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서는 백석면에 소재한 단촌리(短村里)로 소개하였다. 현재 아랫 말에는 한승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658-1번지 일대이다.
■ 창말
오산리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 후기 사창(社倉)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양주목 각 읍면에는 사창이 하나씩 있었다. 백석면(현재의 백석읍)의 사창이 이곳 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혹은 조선시대 군병참기지가 있었기에 창고(倉庫)의 ‘창(倉)’자를 따서 창말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군부대가 전진 후퇴할 때 작전상 소로 길에 접해 있는 마을이다. 한편 이 마을에는 물이 좋아 각처에서 방문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가려움증 환자들이 많이 왔다고 한다. 서풍이 자주 불고 여름에 시원하며 겨울에 춥기 때문에 감나무가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따라서 병충해가 적다고 한다. 103-7번지 일대이다.
■ 큰오미·대오산(大梧山)·고산(孤山)
오산리에 있는 가장 큰 마을이다. 오산리라는 땅이름과 관련된 지역이다. 약 100년 전에는 대고산(大孤山)이라고 불렸으나, 점차 대오산(大梧山)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산 하나가 외롭게 떨어져 있다 하여 고산(孤山)이라고 불리던 것이 오산으로 변하였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인 일제시대에 승냥이가 많아 아이를 잡아 갈 정도였으며, 청년들은 모여서 도박으로만 날을 새우는 등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건설적인 사촌계를 형성하여 마을의 문제를 하나 둘씩 해결해 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명의만 남아 있을 뿐이다. 큰오미는 골말·창말·샘말을 합쳐 부르는 이름으로 현재 세아 1차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다. 108번지 일대이다.
큰오미와 옹안이의 중간인 백석읍 사무소 가는 길에 있었던 우물이다. 지금은 없어졌다. 가운데 우물이라는 이름은 백석읍 방성리에서도 확인된다.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515-1번지에 있었다.
○ 고명산씨동산
큰오미에 있는 동산이다. 고명산이라는 사람의 소유였기 때문에 붙여졌다. 13-1번지와 54-3번지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 구렁행길
큰오미 서쪽에 있는 길이다. 양쪽으로 산이 이어져 있고, 굽이굽이 휘어진 모양이 마치 구렁이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19-7번지 일대이다.
○ 구(舊)면사무소터
큰오미의 골말에 있었던 옛백석면사무소터이다. 옛백석면사무소가 있던 자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백석읍사무소는 50여 년 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현재는 논이 되어 있다. 68-12번지이다.
○ 구면사무소앞 우물
큰오미의 골말에 있었던 우물이다. 옛 백석면사무소 앞에 있던 우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없다. 68-12번지에 있었다.
○ 구지서터
큰오미 골말에 있던 옛날 지서자리이다. 1945년 8월 20일에 세워진 지서가 있던 곳이다.78번지에 있었다.
○ 구시울
옹안이 남쪽 오산리와 복지리, 가업리 경계부분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논 즉 고래논이 있다. 국논이 있는 골짜기라 하여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25-33번지 일대이다.
○ 국논
옹안이 백석읍사무소 남동쪽에 있는 논이다. 나라에서 하사한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국논이란 이름은 백석읍 복지리와 장흥면 일영리에서도 확인된다. 538-4번지 일대이다.
○ 궁도장터
큰오미 골말에 있었던 터이다. 궁도장터가 있던 자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40년에 만들어졌다. 107번지 부근이다.
○ 기룽나무모퉁이
큰오미 샘말 축동과 대오산의 경계부분에 있는 모퉁이이다. 100년 수령의 기룽나무(지렁이나무. 겨우살이덩굴과에 속하는 나무로 5월에 누른 녹색꽃이 피고 9월에 씨 열매가 빨갛게 익으며, 가지는 약으로 쓴다)가 있으면서 90도 각으로 도는 모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80번지 동쪽 끝자락이다.
○ 낭두리논
잘음매기에서 조양중학교로 가는 도로 오른 편에 있는 논이다. 산자락 바로 밑 개천을 끼고 낭떠러지 옆에 있는 논이라 하여 붙여졌다. 338번지 일대이다.
○ 낭두리우물
잘음매기에서 조양중학교로 가는 도로 오른편에 위치한 낭두리 논옆에 있는 우물이다. 잘음매기 주민들이 이 우물물을 길어 마셨다고 한다. 350번지이다.
○ 노랫벌·논앞벌
백석농협 뒤편 남서쪽으로 있는 벌판이다. 진흙 밭으로 딸기나무 잡풀이 무성한 땅이다. 국논 앞에 있는 벌판이라 하여 붙여졌다. 546번지 일대이다.
○ 늑골·늦궂
잘음매기 북쪽에 있는 논이다. 땅이 거칠어서 제일 늦게 모를 내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경지정리가 되어 있다. 늑골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덕정동에서도 확인된다. 668번지 일대이다.
○ 당모퉁이
큰오미 남쪽에 있는 길이다. 정승이 당나귀를 타고 논비탈을 지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근에 있는 서낭당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3-3(도)번지에 있다.
○ 당재고개
큰오미에서 복지리 신지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서낭당이 있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좋지 못한 병에 걸려 죽은 자를 이 고개를 통해 넘겼다고 한다. 62-4(도)번지와 84-3(도)번지 일대이다.
○ 대들
작은오미 북서쪽에 있는 들이다. 들판이 매우 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들이란 땅이름은 백석읍 가업리에서도 확인되는데 이것은 대들이 그곳까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400번지 일대로 홍죽리 160번지, 가업리 248번지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 대뜰논·대들논 → 대들
○ 도살장터
큰오미 동쪽 방성리와 경계를 이루면서 흘러가는 신천개울가 주변에 있었던 터이다. 소나 돼지를 도살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없어졌다. 90번지부근이다.
○ 똥논·독논
옹안이 백석읍사무소 남동쪽에 있는 논이다. 똥거름을 한 것처럼 논이 기름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국논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똥논이란 땅이름은 백석읍 복지리에서 확인된다. 536-1번지 일대이다.
○ 동네뿌리
옹안이 백석초등학교 건너편의 북동쪽으로 있는 산이다. 동네 제일 끝에 우뚝 솟아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520-4번지 부근이다.
큰오미골말에 있었던 우물이다. 두레로 물을 길어 쓰던 우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가구에서 이 우물을 썼다고 한다. 지금은 없다. 두레우물이란 이름은 백석읍 방성리에도 있다. 83-2번지에 있었다.
○ 떡논
옹안이 앞에 있는 논이다. 배가 고파 떡한말과 이 논을 바꾸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떡논이라는 땅이름은 백석읍 가업리와 남면 경신리에서도 확인된다. 528-9번지이다.
○ 마루들
작은오미 동쪽에 있는 들이다. 높은 지대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72번지 일대이다.
○ 모래풀
큰오미 북쪽에 있는 밭이다. 모래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110번지 일대이다.
○ 무덤밭
큰오미 북쪽에 있는 밭이다. 경사진 밭에 산소를 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06-3번지이다.
○ 바가지우물
큰오미둥근동산 서쪽 밑에 있었던 우물이다. 세가구가 이우물을 썼다고 한다. 지금은 없다. 바가지우물이라는 이름은 백석읍 방성리에서도 확인된다. 513번지에 있었다.
○ 박사부논
절음매기 서쪽에 있는 논이다. 이곳에 있는 박사부다리(연곡리 박사부다리 참조)와 관련이 있는 논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지금은 모두 경지정리가 되었다. 691번지 부근이다.
○ 박석고개·백석고개
큰오미 창말 세아1차아파트 앞에 있는 고개이다. 풍산 홍씨 가문에서 이곳에 묘자리를 쓴 후 그 혈을 보존하기 위해 구들 같은 넓은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깔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도로가 확장되어 지금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박석고개라는 땅이름은 은현면 운암리·하패리와 남면 상수리에서도 확인된다. 70-9번지 부근이다.
큰오미 남쪽에 있는 다리이다. 옛날 물레방아가 있었던 다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산리와 복지리·방성리의 경계지점에 있는 다리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돌로 새로이 다리를 놓으면서 백석교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방아다리라는 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4동의 옥정동, 양주2동의 고읍동, 백석읍 방성리·복지리·연곡리, 은현면 봉암리, 광적면 가납리, 장흥면 울대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방아가 있던 다리라는 뜻이다. 11-3번지이다.
○ 방죽머리
큰오미 남쪽에 있었던 방축이다. 일제시대에 인위적으로 만든 저수지에 쌓은 축동으로 눈녹은 물과 장마물을 가두어 밭농사에 농수(農水)로 썼다. 지금은 모두 메워집이 들어서 있다. 16-4번지이다.
○ 뱀논
백석초등학교 건너편에 북동쪽으로 있는 논이다. 뱀같이 긴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99-1번지이다.
○ 병원동산
큰오미골말에 있는 동산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백석 구호병원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사시사철 주민들이 휴식하는 장소이다.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져 마을사람들이 모여 그네뛰기·바둑·장기 등을 즐기는 장소이다. 70-7번지이다.
○ 사북논
당재고개에서 동쪽으로 500m 지점에 있는 논이다. 이 논에서 나는 흙이 호미가래에 붙지 않는 마사흙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8-1번지 부근이다.
○ 사태밑
큰오미에서 복지리로 가는 길이다. 비만 오면 산사태가 많이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3-1번지이다.
○ 상나무백이우물
큰오미와옹안이 사이에 있었던 우물이다. 350년 수령의 상나무가 우물 옆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무병장수에 좋다하여 약물로 퍼가기도 했다고 한다. 우물은 지금은 없어지고 상나무만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21번지에 있었다.
○ 새천내
작은오미 동쪽에 있는 개울가이다. 오산리와 방성리 개울물이 합쳐지면서 깨끗한 모래가 쌓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피혁공장이 들어서 옛모습을 잃고 말았다. 207-1번지 부근이다.
○ 서낭뎅이
서낭당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가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신의 소원을 빌던 곳이다. 서낭뎅이란 땅이름은 광적면 광석리에서도 확인된다. 52-3번지와 복지리 십자로 경계부분이다.
○ 세뚜리봉
절음내기에 있는 봉우리이다. 세 개의 산자락이 삼각형을 그리면서 중간의 밭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붙여졌다. 산6-3번지 부근이다.
큰오미와 옹안이 사이에 있는 향나무는 수령 318년으로 이 나무 밑에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 송충뜰
작은오미 동쪽에 있는 들이다. 옛날에 소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자연재해로 인해 소나무가 묻혀버렸으며, 그것이 썩어 지금도 땅을 파면 소나무 토탄이 나온다고 한다. 500-1번지부근이다.
○ 수렁논
큰오미 남동쪽에 있는 논이다. 근처에 신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수렁이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번지일대이다.
○ 식혜배미
큰오미 북동쪽에 있는 논이다. 이곳에서 나는 쌀로 식혜를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32-1번지 일대이다.
○ 신목(神木)
절음매기에 있었던 나무이다. 마을사람들이 마을의 안녕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나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절음매기 사람들은 단결이 잘 되어 이 나무아래에서 5년마다 옹안이 만신을 모시고 이틀에 걸쳐 대동굿을 지냈으며,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이때 검은 돼지를 제물로 바치고, 무탈한 사람이 제관이 되었으며, 제사가 끝나면 사례조로 벼 한 말씩을 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앙상한 가지만 남은 고목으로 남아 있다. 산7번지에 있다.
○ 아랫뜰논
절음매기에서 조양중학교로 가는 도로 오른편에 있는 논이다. 낭두리논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268번지 일대이다.
○ 안개논
큰오미 골말 남쪽에 있는 논이다. 골이 깊어 붙여진 이름이다. 개흙으로 된 논이다. 86-1번지이다.
○ 앞개울
큰오미골말 앞에 있는 개울이다. 큰오미 전 주민이 빨래하던 곳이다. 현재는 없어졌다. 83번지이다.
○ 양가메이뿌리
소놀이굿 전수회관 뒤에 있는 산인 양가뫼의 뿌리이다. 양가뫼의 산자락이 방성리로부터 방아다리를 넘어 오산리까지 뻗어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양가뫼는 양씨가 문에서 제사를 지내던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성말에 있는 호명산의 긴 줄기가 북쪽을 향하는데, 예로부터 이 산을 가리켜 양가뫼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양씨가 묘를 쓰고 있어 양가네 묘, 양가의 묘라고 했다고 하며, 혹은 양가네 가마가 이곳을 지난다고 하여 양가마라고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 뿌리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11-1번지 일대이다.
○ 양척개다리
오산리와 방성리 사이에 있는 다리이다. 복지리로부터 시작하여 방성리와 복지리·오산리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신천과 불곡산에서 발원하여 고릉말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나가는 작은 개천이 합쳐지는 곳인 양천개울에 있는 다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천개다리라고도 한다. 현재 양척개다리는 백석교(길이 30m, 폭 12m)라는 이름의 현대식 다리로 변해 있으며, 방성리 모래말·신촌과 오산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로서 역할하고 있다. 132-3번지에 있다.
○ 여우논
절음매기 남쪽에 있는 논이다. 옛날에 여우가 많이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이것은 와전인 듯싶고, 실제로는 여우처럼 변덕이 심하여 종잡을 수 없다는 뜻에서 유래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여우논이란 땅이름은 은현면 선암리에서도 보인다. 467번지 일대이다.
○ 옹안이 앞골
옹안이 백석면사무소 앞에 있는 논이다. 538-2번지 일대이다.
○ 용의 허리
백석초등학교 건너편에 동쪽으로 있는 산등성이이다. 작은오미까지 뻗어 있는 산줄기의 허리부분에 해당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80번지 부근이다.
○ 이씨동산
큰오미골말 뒤쪽에 있는 동산이다. 이씨의 동산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62-2번지이다.
○ 장수들
작은오미 동쪽에 신천을 따라 길게 뻗은 긴 들판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이 길게 흐르는 곳에 펼쳐진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수들이란 땅이름은 광적면 광석리에서도 확인되는데, 마찬가지로 긴 시내를 끼고 있는 들이라는 뜻이다. 155번지 일대이다.
○ 절음막뜰논
절음매기 동쪽에 있는 논이다. 절음막이 부근에 있는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75번지 일대이다.
○ 제비밭
큰오미 창말 동쪽에 있는 밭이다. 모양이 제비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 면은 길고 한 면은 짧은 삼각형 모양의 밭이다. 101-2번지이다.
○ 창말아래우물
큰오미 창말 아래쪽에 있었던 우물이다. 10가구가 이 우물을 썼다고 한다. 지금은 없다. 103번지에 있었다.
○ 창말웃우물
큰오미창말 위쪽에 있는 우물이다. 7가구가 이 우물을 썼다고 한다. 지금은 없다. 72-5번지에 있었다.
○ 황새논
큰오미밑에 있는 논이다. 이곳에 황새가 와서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10번지이다.
○ 황아뜰
큰오미 동쪽의 들판이다. 황색 흙으로 이루어진 들판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23번지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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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복지리(福池里)
복지리(福池里)는 백석읍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으로 양주1동의 어둔동, 서쪽으로 가업리·기산리, 장흥면 울대리·부곡리, 북쪽으로 오산리·방성리와 접해있다. 복지리라는 땅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이후이다. 대한제국기까지만 해도 이곳은 대부분 홍복리(弘福里)와 신지리(莘池里)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백석면의 흥복리와 신지리, 대오산리, 상가업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고, 홍복리와 신지리에서 각각 한 자씩을 따서 복지리라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나와 있다. 홍복리란 땅이름은 장흥면과 경계를 이루고 우뚝 서있으며 역사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홍복산에서 유래하였으며, 신지리란 땅이름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신지(莘池)라는 저수지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복지리에는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인구가 급격하게 유입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통단지를 비롯한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서면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더욱이 홍복지역의 자연친화적인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도농복합적인 발전의 모델을 제시해 주고 있다.
■ 건너말·월촌(越村)
신지 건너편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 월촌이라고도 한다. 크게는 양촌을 아울러서 이르기도 한다. 건너말이라는 땅이름은 백석읍 가업리·홍죽리, 은현면 도하리, 광적면 가납리, 장흥면 울대리·부곡리·삼상리·삼하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한 마을을 기준으로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65번지일대이다.
■ 대장간
신지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대장간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50년까지 대장간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131번지 일대이다.
■ 샛말
신지의 섬말과 아랫말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신지연못이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샛말 혹은 샛마을이라는 땅이름은 양주1동의 어둔동, 남면 상수리, 광적면 가납리, 장흥면 일영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266번지 일대이다.
■ 섬말
웃말과 샛말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마치 외로운 섬과 같이 따로 떨어져 자리 잡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몇 채 안 되는 집들을 논과 밭이 둘러싸고 있으며, 다른 마을들과 떨어져 있다. 섬말이라는 땅이름은 광적면 석우리에서도 확인된다. 330번지 일대이다.
■ 신지(莘池)
복지리에서 으뜸 되는 연못 혹은 그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이다. 샛말이라고도 한다. 마을에 연못이 있고 주변에 개나리나무가 아름답게 피어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못은 가로 1.5m이고, 세로6m이다. 조선 초기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수도 위치를 정하기 위해 복지리에 들어왔다가 호명산과 한강봉 사이에 있는 홍복고개가 불(火)의 형세를 띠고 있어 좋지 않다고 하므로, 동네 노인들이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이 연못을 팠다고 전해진다. 주위에 머위가 많았다고 전한다. 지금은 연못의 모양만 남아 있고, 그 앞에는 노인정이 들어서 있다. 일제초기의 문헌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서는 백석면에 소재한 신지리(莘池里)로 소개하였다. 267번지 일대이다.
■ 아랫말
샛말 남쪽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아랫말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양주1동의 산북동, 양주2동의 광사동·고읍동, 은현면 운암리·하패리·도하리, 남면 신암리, 광적면 효촌리·석우리, 장흥면 울대리·부곡리·삼하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168번지 일대이다.
■ 양촌(陽村)
신지 건너편 응달 쪽에 있는 마을이다. 약 15가구가 거주한다. 원래는 응달말이었으나 주민들이 양촌으로 하자 하여 이와 같이 정하였다고 한다. 옛부터 복지리는 동쪽에 호명산, 남쪽에 한강봉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사이를 홍복에서 발원한 시내가 흘러 들어와 마을을 동과 서로 갈라놓는다. 동쪽에 있는 마을은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빛이 하루 종일 비친다고 하여 양촌이라 하였고, 서쪽에 있는 마을은 햇빛이 일찍 사라지고 개울을 넘어 다닌다고 하여 월촌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원래의 두 명칭이 모두 사라지고 월촌은 건너말로 바뀌고, 양촌은 응달말에서 쓰고있다. 399번지 일대이다.
■ 웃말
신지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가장 위쪽에 있다 하여 붙여졌다. 웃말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4동의 옥정동, 양주1동의 산북동, 양주2동의 광사동·고읍동, 백석읍 연곡리, 은현면 용암리·운암리, 남면 신산리·구암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429번지일대이다.
■ 홍복(洪福)
홍복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큰 복을 받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자세한 내용은 뒤에 나오는 홍복산 참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대이다. 일본군사지도(1895)에서는 홍북(弘北)이란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며, 일제초기의 문헌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서는 백석면 홍복리(弘福里)로 소개하였다. 538번지 일대이다.
○ 가마골고개
홍복에서 장흥면 부곡리 가마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가마골고개라는 땅이름은 장흥면 백석읍(白石邑) 부곡리에서도 확인된다. 다른 이름으로는 반고개라고도 하는데, 온전한 고개가 아니라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밤고개라고도 하는데, 밤나무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밤고개라는 땅이름은 광적면 비암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밤나무가 많은 고개라는 뜻이다. 산59-5번지에 있다.
오산리 옹안이에 있는 백석읍사무소에서 복지리로 들어오는 도로 오른편에 있는 논이다. 나라에서 하사한 논으로 땅이 기름지고 좋다. 국논이란 땅이름은 백석읍 오산리와 장흥면 일영리에서도 확인된다. 224번지 일대이다.
○ 국화동(菊花洞) → 불당골
○ 긴골
복지리와 가업리 사이에 있는 골짜기 혹은 그 골짜기에 있는 논이다. 기다란 골짜기라는 뜻이다. 현재 동화아파트 단지 동쪽에 있는 논이다. 긴골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백석읍 가업리·연곡리, 은현면 용암리·도하리, 남면 신암리, 장흥면 부곡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골짜기의 길이가 길다는 뜻이다. 251-3번지 일대이다.
○ 긴양지
홍복에서 기산리 턱골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능선이다. 능선이 길고 하루 종일 햇볕이 들어 붙여진 이름이다. 부근에 선조의 후궁인 온빈 한씨의 묘소가 있다. 499번지 일대이다.
○ 노라바위
섬말과 건너말 사이 개울에 있었던 바위이다. 마을 사람들이 이 바위 위에 모여 놀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호명산의 혈이 신지개울을 지나 노라바위로 이어져 있다고 한다. 따라서 신지사람들은 이 바위를 매우 귀중히 여겼으며, 여름이면 마을사람들이 이곳에서 미역을 감았다고도 한다. 1999년 하천공사 및 도로공사로 인해 파손되었다. 노루바위라고도 한다. 349-1번지에 있었다.
○ 노루바위 → 노라바위
○ 노적봉
챌봉 동쪽에 있는 봉우리이다. 노적을 쌓아 놓은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노적봉이란 땅이름은 광적면 비암리와 장흥면 삼상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봉우리 모양이 노적을 쌓아둔 것과 같다는 뜻이다. 풍수에서는 이러한 봉우리를 재물의 운이 있다 하여 매우 중히 여긴다. 산82-1번지일대이다.
○ 노지(蘆池)
복지리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연못이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16세기 전반의 문헌인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서부터 확인된다. 양주목읍지(1842)에 의하면 읍내면에 있는 연못으로, 읍치로부터 서쪽으로 5리 거리에 있으며, 크기는 둘레가 814척이고, 길이가 420척이며, 너비가 210척이라고 하였다. 이후 동국여지지(19C중엽),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 1888), 양주목읍지(1899), 조선환여승람(1937)에서도 땅이름이 확인된다. 후대에는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10리라고 표시하였다. 노지의 위치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복지리 가 아파트 사거리 남쪽에 있는 느티나무인근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지부근의 모습과 이곳의 모습(노지터로 추정되는 곳에 서있는 느티나무. 둘레가 5m에 이르는 수령 600년 된 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이 흡사하기 때문이다. 즉 두 곳 모두 오래된 느티나무가 서있다는 점과 서쪽으로 산자락을 끼고 동쪽으로 벌판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후에 보다 면밀한 검토가 요구되는 부분이다. 150-5번지 부근으로 추정된다.
○ 느티나무
수령 600년생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다. 하나는 둘레가 5m, 높이가 25m이며, 다른 하나는 둘레가 4.6m, 높이가 23m이다. 나무에 그네를 달아 그네타기를 즐겼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신지개울이 이 앞을 지나갔다고 하나 지금은 물길이 바뀌어방성리 쪽으로 향해 흐르고 있다고 전한다. 옛날 노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150-5번지에 있다.
○ 당모랭이
큰오미에서 신지로 들어오는 길옆에 있는 들이다. 서낭당 근처에 있던 모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3-2번지 부근이다.
○ 똥논
오산리의 옹안이 백석읍사무소에서 복지리로 들어오는 도로 오른편에 있는 논이다. 똥거름을 준 것처럼 땅이 기름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똥논이란 땅이름은 백석읍 오산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기름진 논이라는 뜻이다. 국논과 갚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215번지 일대이다.
○ 머위물
신지 남쪽 호명산자락에 있는 샘이다. 머위가 많이 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머위는 하얀꽃이 피며 습지에서 잘 자란다. 고구마순 처럼 데쳐서 먹기도 한다. 지금은 없어졌다. 산39번지에 있었다.
○ 바사리고개
홍복마을에서 의정부시 입석동으로 넘어가는 경계부분에 있는 고개이다. 오른쪽은 홍복이고 왼쪽은 안산이다. 성황당이 있었다고 한다. 산56-7번지에 있다.
○ 반고개[半-] →가마골고개
○ 밤고개 →가마골고개
○ 밤중논
아랫말에서 양주1동의 어둔동 산성말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논고래이다. 척박한 논으로 캄캄한 밤까지 일을 해야만 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남의 논일을 하다가 밤에 와서야 일을 할 수 있는 논이라는 얘기, 논일을 해보았자 소출이 적어 앞날이 깜깜하다는 얘기, 부자가 계속 일을시켜 밤이 되도록 집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밤중논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 오고 있다. 실제로는 해가 저물도록 일해야 하는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물이 빨리 빠지고 자주 물을 퍼야 하므로 논일과 물 빼는 일이 겹쳐 바쁘다 보니 해가 지는 줄 모르고 저물도록 일을 해야만 했다. 27-1번지 일대이다.
○ 버팀바위
신지에서 홍복으로 올라가는 길의 오른쪽에 있는 바위이다. 행인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여기에 재수점을 쳐보았다고 한다. 즉 바위틈새에 막대기를 끼워서 맞으면 아들이고 안 맞으면 딸이라고 한다. 치성바위라고도 한다. 길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많이 파손되어 옛모습이 많이 없어졌다. 산50-2번지 도로변에 있다.
○ 불당골
건너말에서 한흥목장으로 올라가는 길의 왼편에 있는 골짜기이다. 불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들국화가 만발했던 곳이라 하여 국화동이라고도 한다. 불당골이란 땅이름은 회천1동의 덕정동, 양주1동의 유양동, 양주2동의 광사동, 백석읍 방성리, 남면 입암리, 광적면 덕도리, 장흥면 부곡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불당 즉 절이 있던 골짜기라는 뜻이다. 산20-2번지 일대이다.
○ 삼밭골·삼박골
신지에서 산성말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골짜기이다. 삼(麻)을 많이 심던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천개울을 따라 호명산을 향해 오르면 삼각형 골짜기가 있는데 여기가 신천의 본줄기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근방에 삼밭이 한 골짜기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박씨가 이곳에서 커다란 솥에 삼을 끓이던 자리라 하여 삼밭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지만 믿기 어렵다. 산5-2번지 일대이다.
○ 샛고래논
섬말과 샛말 사이에 있는 골논이다. 복지리와 가업리의 경계부분에 있으며, 현재 서쪽 야산자락에는 동화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333번지 일대이다.
○ 신지고개
신지에서 홍복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홍복고개라고도 한다. 신지고개란 땅이름은 양주1동의 어둔동와 장흥면 부곡리에서도 확인된다. 산56-23번지 부근이다.
○ 신지고개논
신지에서홍복쪽으로올라가는신지고개부근에있는논이다. 415번지일대이다.
○ 신지옆 느티나무
현재 신지 옆에 역사를 간직하고 서있는 나무이다. 둘레가 7.7m, 높이가 15m이며, 수령이 약 700∼800년이다. 현재 보호수로 지정되어있다. 267번지에 있다.
○ 안산(案山)
홍복저수지 남서쪽에 있는 산이다. 홍복마을의 앞쪽에 있는 산으로 앞산을 안산으로 부른 것이다. 안산이라는 땅이름은 백석읍 홍죽리, 남면 한산리, 광적면 우고리에서도 확인된다. 산59-4번지 일대이다.
○ 앞자리논
홍복 남쪽에 있는 논이다. 앞자리 논이라는 이름은 백석읍 기산리에서도 확인된다. 524번지 일대이다.
○ 약수터
신지에서 홍복으로 넘어가는 길의 오른쪽에 있는 약수터이다. 뼈에 금이 간 데에 효험이 있는 약수가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마도 약수에 광물함량이 높은 것으로 추측된다. 산61번지에 있다.
○ 약수터절
신지에서 홍복으로 올라가는 약수터 위쪽에 있던 절이다. 1950년 까지 안 보살(安-)이 있었다고 한다. 산61번지에 있다.
○ 어룡·어롱
홍복에서 용무골로 가는 길가에 있는 바위이다. 물에 비친 바위의 모습이 어른 어른거려서 어롱바위가 되었다는 설도 있고, 용머리처럼 생겨 이를 높여 어룡(御龍)으로 하였다는 설도 있다. 지금은 도로확장 과정에서 많이 파손되어 옛모습을 모두 잃어버렸다. 산56-6번지 남쪽 끝자락에 있다.
○ 오공곡(蜈蚣谷)
홍복고개 정상부근에 있는 약수터. 효험이 있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을 떠간다. 건너말 뒤 호명산 자락에 있는 골짜기이다. 계곡의 모습이 마치 지네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23번지 일대이다.
○ 옹장골·웅장골
홍복에서 기산리터골로 넘어가는 골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골짜기가 웅장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여기로 도망온 사람들이 옹기를 구워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하여 옹장골로 불렸다고도 한다. 509번지 일대이다.
○ 외배미논
홍복에서 기산리로 가는 골짜기에 있는 논이다. 외따로 떨어진 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부근에 선조의 후궁이었던 온빈 한씨의 묘소가 있다. 485-1번지이다.
○ 용못
홍복저수지에서 울대리로 내려가는 계곡에 있는 연못이다. 용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은 승천하였다고 전해지며,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이 못의 용이 승천하지 못하여 이무기가 되어 폭포수에 살았으며, 못 주변에 소를 매어 놓으면 잡아먹었다고 한다. 한편 용못은 용추(龍湫)라는 한자와도 통하는데, 용추라는 땅이름은 남면에서 확인된다. 이곳 역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가뭄이 들면 여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산58-4번지 남쪽 끝과 울대리 산40번지 동쪽 끝 그리고 의정부가 능동 산64-1 서쪽 끝에걸쳐 있다.(홍복저수지에서 약 1km 밑에 위치한 용못은 마치 용트림하듯 폭포수가 떨어지고 있으며, 깊은 못을 만들어 내고 있다.)
○ 용무골·용못골·용연동(龍淵洞)
용못이 있는 골짜기이다. 양주목읍지(1842)에는 홍복산 기슭에 용연동이 있어, 가뭄이 들면 여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였다. 같은 내용이 양주목읍지(1871), 양주읍지(1899), 양주군읍지(1899)에서도 확인된다. 산58-4번지 부근이다.
○ 절골
홍복 동쪽 홍복산 자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절이 있던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절골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양주2동의 만송동, 백석읍 기산리, 남면 신암리·구암리·입암리·한산리, 광적면 우고리·비암리, 장흥면 석현리·일영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절이 있던 골짜기라는 뜻이다. 한자로는 사곡(寺谷)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464번지 일대이다.
○ 절터
홍복 동쪽 홍복산 자락에 있는 절터이다. 이 절은 홍복사(弘福寺)일 것으로 추정된다. 홍복사는 16세기 전반의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서부터 확인된다. 그러나 19세기말의 문헌인 양주군읍지(1899)에서 당시 폐허화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19세기 말부터는 이곳이 절터로 불려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홍복사라는 땅이름은 동여비고(1682), 양주목읍지(1842), 동국여지지(19C중엽), 대동지지(1864),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1888)에서도 확인된다. 절터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2동의 덕계동, 양주1동의 어둔동, 양주2동의 삼숭동, 백석읍 복지리, 남면 신산리, 광적면 가납리·덕도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절이 있던 터라는 뜻이다. 산56-1번지에 있다.
○ 종루봉(鐘樓峯) → 홍복산
○ 지뭉굴 →밤중논
○ 챌봉·채일봉
홍복마을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제일 높은 봉우리이다. 기산리·장흥면 석현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제일 높은 봉우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높이는 516m이며, 장흥면 부곡리에 걸쳐있다. 반면 옛족보에는 차일봉(遮日峯)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봉우리 모양이 차일을 친 것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산61-8번지 일대이다.
○ 치성바위 →버팀바위
○ 큰골
신지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가 커서 붙여진 이름이다. 큰골이라는 땅이름은 양주1동의 어둔동, 양주2동의 삼숭동, 백석읍 가업리, 은현면 용암리·도하리, 남면 경신리, 광적면 가납리·우고리, 장흥면 석현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골짜기가 크다는 뜻이다. 446번지 일대이다.
○ 턱골고개
홍복에서 기산리 터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502번지 일대이다.
○ 필봉(筆峯) →홍복산
○ 한강봉(漢江峯)
복지리와 가업리 경계부분에 있는 봉우리이다. 높이는 426m이다. 이 봉우리에 올라서면 한강이 한눈에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맑은 날 이 산 정상에 서면 한강이 보인다고 한다. 한편 이 봉우리에 비가 와서 남쪽으로 흐르면 한강으로 흘러가고, 북쪽으로 흐르면 임진강이 된다. 산70번지 일대이다.
○ 호명산(虎鳴山)·범울산
복지리 남쪽과 방성리, 그리고 양주1동의 어둔동에 걸쳐있는 산이다. 높이는 330m이며 바위가 많다. 범이 울어대던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산세가 좋고‘상살미’라는 12양주골의 험한 산골짜기가 있다. 옛날에는 각종 산짐승이 살았고 특히 호랑이가 밤마다 슬피 울어대서 사람들이 잠을 못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산22번지 일대이다.
○ 홍복고개 → 신지고개
○ 홍복약수터 →약수터
○ 홍복산(洪福山·弘福山)
홍복과 양주1동의 어둔동, 그리고 의정부 경계에 있는 높이 347m의 산이다.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널리 복되게 하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남면 상수리에 사는 홍씨 선조들이 서울에서 이곳으로 낙향할 때, 이 산마루에 올라가서 보니 상수리가 제일 적지라고 판단되어 그 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자손도 번성하고 가문도 영화롭게 되어, 홍씨의 번영을 발견한 산이라 하여 홍복산(洪福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상수리 쪽에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전국을 순행하면서 감악산을 거쳐 상수리를 둘러보고 홍복산을 넘어 한양으로 돌아가다가 홍복고개에서 뒤를 돌아보면서 상수리 쪽을 향해 “이는 과인의 홍복이도다”라고 말하였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는 전설도 내려오고 있다. 한편 홍복산의 한자는 조선 성종대를 기점으로 ‘홍복산(弘福山)’으로 표기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홍복산’과 관련하여 총 48건의 기사가 확인되는데, 왕의 강무(講武) 즉 수렵행위나 국방문제와 관련된 기사가 주종을 이룬다. 홍복산(洪福山)은 15세기 중반의 사실을 전하는 세종실록에서 처음 확인된다. 30년(1448) 12월 10일조에는 이곳을 경기지역의 대표적인 강무장(講武場) 즉 왕을위한 수렵장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 소개되었다. 성종 및 연산군 대에도 강무와 관련된 기사가 보인다. 그러나 성종17년(1486) 10월 2일조부터 홍복산의 한자는 ‘홍복산(弘福山)’으로 변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홍복산과 관련하여 일정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 조선중기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조정의 외적방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남한산성과 견줄 수 있는 산성을 한양 북쪽에도 쌓아야한다는 의견이 자주 대두되었다. 이에 홍복산은 북한산과 더불어 산성축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숙종 대에는 산성축조문제를 둘러싼 시비가 빈번하였다. 숙종 29년(1703) 1월 20일 기사에서 이유(李濡)에 따르면, 홍복산은 사방에 규봉(窺峰 풍수에서 숨어서 엿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산봉우리를 가리키는 말로, 묏자리 주위에 이런 산봉우리가 보이면 화를 받는다고 한다)이 없고 물과 풀이 매우 무성하며, 앞에는 도봉산과 삼각산이 있어 백악(白岳)에 이르니, 사민(士民)이 피난하는 길이 될 만하고, 북문이 험하고 막혀 있어서 수레 두 채가 나란히 갈 수 없으며, 기름진 들에 서로 접해있고 또 수리(水利)가 있으므로, 들어가면 지킬 만하고 나가면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형세가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숙종 8년(1682) 10월 8일조에서 산성공사가 시작되기도 하였으나 같은해 11월 1일 중지되었다. 홍복산이라는 땅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해동지도(1760)·여지도서(1757∼1765)·팔도군현지도(1767∼1776)·동국여도(1801∼1822)·청구도(1834)·동국여지지(19C중엽)·대동여지도(1861)·양주목읍지(1871),조선지지략 (朝鮮地誌略,1888)·양주군읍지(1899)·양주읍지(1899)·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신편조선지지(新編朝鮮地誌,1924)·조선환여승람(1937)에서도 확인된다. 종루처럼 생겨서 온 겨레를 깨우쳐 준다 하여 종루봉(鐘樓峰)이라고도 하고, 이 산이 보이는 곳에는 명필이 많다 하여 필봉(筆鋒)이라고도 한다. 산56-8번지 일대이다.
○ 흙구뎅이
가업리 가나뭇재고개 너머에 있는 구덩이이다. 웃가래비 사람들이 마당을 만들 때 이곳에서 흙을 파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동화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흙구뎅이는 복지리에 있지만 오히려 가업리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289번지 일대이다.
(4) 가업리(加業里)
가업리(加業里)는 백석읍 중심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으로 복지리, 서쪽으로 홍죽리, 남쪽으로 기산리, 북쪽으로 오산리와 접해있다. 가업리라는 땅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대한제국기 부터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기 전에 이미 상가업리(上加業里)와 하가업리(下加業里)라는 땅이름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나와 있다. 한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하가업리(下加業里)·상가업리(上加業里)와 소오산리·단촌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가업리라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기록되어 있다.
가업리란 땅이름은 옛부터 이 지역에 가래나무가 많으므로 가래비 또는 가업·추곡이라 하였다가 가업리로 되었다고 한다. 혹은 마을모양이 소를 닮았다고 하여, 소처럼 일하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실제 가업리의 남쪽에 있는한강봉과 은봉산자락에서 여러 갈래의 계곡이 흘러나오고 있어, 땅이름은 이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여러 갈래의 물길이 흘러 나와 대지를 적셔주는 곳에 위치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갈래마을’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가래비〉가업리로 변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이곳과 광적면 가납리에 걸쳐 12가래비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가업리는 남북으로 윗가래비와 아랫가래비로 크게 대별되는데, 남쪽인 윗가래비에는 산자락을 따라 최근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으며, 북쪽인 아랫가래비에 있는 토지는 경지정리가 완료되어 많은 쌀수확량을 내고 있다.
■ 건너말
윗가래비 응달말 서쪽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다. 건너말이라는 땅이름은 백석읍 복지리·홍죽리, 은현면 도하리, 광적면 가납리, 장흥면 울대리·부곡리·삼상리·삼하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한마을을 기준으로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213번지 일대이다.
윗가래비의 남쪽은 봉산자락의 산골짜기에 있었던 마을이다.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집이 없고 모두 밭이 되었다. 골말이라는 땅이름은 회천4동의 회암동, 백석읍 방성리·오산리·홍죽리·연곡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601번지 일대이다.
■ 넘말
윗가래비 중간말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207번지 일대이다.
■ 뒷골
아랫가래비 서쪽에 있는 마을이었다. 아랫가래비 뒤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졌다. 지금은 경지정리로 모두 논이 되었다. 뒷골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3동의 고암동, 회천4동의 율정동, 양주1동의 어둔동·산북동, 백석읍 기산리, 은현면 용암리, 남면 신암리, 장흥면 울대리·부곡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뒤쪽에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11-5번지 일대이다.
■ 뒷말
윗가래비의 건너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윗가래비의 마을 뒤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64번지 일대이다.
■ 아랫가래비·하가업(下加業)
윗가래비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은봉산과 한강봉에서 시작된 물줄기의 갈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아랫가래비라고 불린다. 한자로는 하가업이라고 부른다. 477번지 일대이다.
■ 윗가래비·상가업(上加業)
아랫가래비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은봉산과 한강봉에서 시작된 물줄기의 갈래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윗가래비라고 불린다. 한자로는 상가업이라고 부른다. 건너말, 응달말, 골말, 넘말, 뒷말, 중간말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188번지 일대이다.
■ 응달말
윗가래비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앞쪽의 능선나무에 가려서 해가 늦게 떠오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밤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응달말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2동의 덕계동, 회천4동의 옥정동, 양주1동의 마전동, 은현면 하패리·도하리, 남면 신암리, 장흥면 교현리·울대리·삼상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응달 쪽에 있다는 뜻이다. 144번지 일대이다.
윗가래비 응달말과 넘말의 중간에 있는 마을이다. 164번지 일대이다.
○ 가나뭇재고개·가현(加峴)
응달말에서 복지리 신지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응달말 고개라고도 한다. 능선에 나무가 가려 해가 늦게 떠오르는 곳에 있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99번지 부근이다.
○ 갓마바위
느르미고개 중턱에 있는 바위이다. 갓모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노고할머니가 치마로 옮겼다 하여 치마바위라고도 한다. 한편 갓마바위라는 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4동의 율정동, 장흥면 교현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갓모양의 바위라는 뜻이다. 산61번지에 있다.
○ 갓마바위골
느르미고개 중턱의 갓마바위가 있는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61번지 일대이다.
○ 거물논
아랫가래비 동쪽에 있는 논이다. 거머리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경지정리가 되어있다. 359번지이다.
○ 고상절
은봉산에 있었다는 절이다. 옛날에 절이 있던 자리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산25번지 부근이다.
○ 골바위
아랫가래비 남서쪽은 봉산자락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에 바위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골바위라는 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에서도 확인된다. 봉양동의 골바위는 골이 진 바위라는 뜻이다. 산7-3번지 일대이다.
○ 굴바위
아랫가래비 남서쪽은 봉산자락에서 홍죽리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바위이다. 굴이 뚫려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 두 개가 붙어 있다. 굴바위라는 이름은 양주1동의 마전동, 은현면 하패리, 남면 상수리, 광적면 가납리·비암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굴이 뚫려있는 바위라는 뜻이다. 산22번지에 있다.
○ ?골
윗가래비 남쪽 한강봉자락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의 모양이 마치 소구유(소에게 먹이를 주는 밥그릇으로 구엉 혹은 ?이라고 한다)처럼 움푹 파여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산110번지 일대이다.
가업리와 복지리 경계부분에 있는 골짜기이다. 현재 동화아파트와 세아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는 지역이다. 긴골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백석읍 복지리·연곡리, 은현면 용암리·도하리, 남면 신암리, 장흥면 부곡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긴 골짜기라는 뜻이다. 60번지 일대이다.
○ 긴등
한강봉으로부터 시작하여 은봉산자락까지 길게 이어진 능선이다. 능선이 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사람들은 이 능선의 모양이 마치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의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옛날에는 기와집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소등에 기와가 얹어지면 무거워 부지런히 일을 할 수 없으므로 마을에 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의 혈(穴)에 해당되는 곳에서 매년 음력 10월 1일 산제사를 지냈는데, 이곳에는 지금도 산제사를 드리는 참나무가 있다. 긴등이란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남면 두곡리에서도 확인된다. 산12번지부터 산110번지까지의 산 능선을 가리키며, 산제사를 드리는 참나무는 산91번지에 있다.
○ 꽁지밭
윗가래비 북쪽에 있는 밭이다. 소꼬리 같이 길어 붙여진 이름이다. 229-2번지 부근이다.
○ 느르매기 → 느르미고개
○느르미고개·장현(獐峴)
가업리 남서쪽은 봉산자락에서 기산리 턱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노루목처럼 좁은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장현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는 상구너미, 턱굴고개라고도 한다. 턱굴고개라는 땅이름은 광적면 덕도리에서도 확인된다. 산58번지와 기산리 산6-1(도)번지의 경계지점이다.
○ 당골
윗가래비 응달말 북쪽 밑에 있는 논이다. 부근에 성황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골논이다. 224번지 일대이다.
아랫가래비 남동 쪽에 있는 들이다. 오산리·홍죽리에 걸쳐 있는 큰들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들이란 땅이름은 백석읍 오산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큰 들이라는 뜻이다. 429번지 일대이다.
윗가래비에 있는 논이다. 옛날에 아홉마지기의 논을 떡과 바꾸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떡논이란 땅이름은 백석읍 오산리와 남면 경신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떡과 바꾼 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46-3번지이다.
○ 맷돌바위
은봉산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모양이 맷돌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 호랑이가 이곳에 있는 동굴에 빠져 죽었다 하여 호랑이바위라고도 한다. 맷돌바위라는 땅이름은 양주2동의 삼숭동과 장흥면 부곡리에서, 호랑이바위라는 이름은 회천1동의 덕정동에서도 확인된다. 산48번지에 있다.
○ 물뱀저수지
아랫가래비 동쪽에 있었던 저수지이다. 물뱀이 많은 저수지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경지정리가 되어있다. 422-2번지 일대이다.
○ 바위배기
윗가래비 당골에 있는 논이다. 논 가운데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윗가래비에서 제일 좋은 논이다. 지금은 바위가 묻혀져 있다. 223-4번지이다.
○ 밤가시
윗가래비 남쪽 한강봉 자락에 있는 골짜기이다. 밤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밤가시라는 땅이름은 백석읍 방성리와 광적면 석우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밤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뜻이다. 산104-1번지 일대이다.
○ 방굴
아랫가래비에서 남쪽에 있는 논이다. 산자락에 막혀 있어 마치 방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골논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곳이 윗가래비와 아랫가래비의 경계지점이다. 방굴이란 땅이름은 남면 황방리에서도 확인된다. 황방리의 방굴(方窟)은 이 굴을 건드리면 방씨 문중에 불상사가 생긴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556번지 일대이다.
○ 뱀밭
아랫가래비 서쪽에 있는 밭이다. 밭이 길어 붙여진 이름이다. 448번지이다.
○ 벌판밭
가나뭇재고개 너머에 있는 밭이다. 넓은 벌판을 이루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근처에 세아3차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01-2번지일대이다.
○ 병양갈논
아랫가래비 동쪽에 있는 논이다. 두 사람이 함께 갈아야 할 논이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301-3번지일대이다.
○ 봉화등 → 한강봉
○ 부엉이묘
윗가래비 남쪽 은봉산 정상에 있는 묘이다. 옛날에 어느 집에서 장사를 치르는데 지관이 말하기를 이곳을 파서 바위돌이 나오면 시신을 그 위에 올려놓고 묻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손들은 시신을 돌 위에 올려놓고 묻을 수 없어 바위돌을 들어내었는데 마침 부엉이 3마리가 이곳에서 날아갔다고 한다. 그 후 이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군용헬기장이 들어서 반쪽만 남았다. 산78번지에 있다.
○ 산앞 삿갓벌
윗가래비 남쪽에 있는 들판이다. 은봉산 자락의 삿갓산 밑에 있는 들판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7-1번지 일대이다.
○ 삼형제바위
은봉산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 세 개가 형제처럼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삼형제바위라는 이름은 회천4동의 율정동와 백석읍 홍죽리에서도 확인된다. 홍죽리의 삼형제바위는 가업리의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모두 바위 세 개가 형제처럼 사이좋게 서있다는 뜻이다. 산48번지와 홍죽리의 경계부분에 있다.
○ 상구너미 → 느르미고개
○ 성황덩이
가나뭇재고개 너머에 있다. 성황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참나무가 있다. 산100번지 부근이다.
○ 쇠묵재고개
윗가래비에서 기산리 턱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장현 남동쪽에 있으며 마치 쇠목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82번지에 있다.
○ 쉴바위
느르미고개 중턱에 있는 바위이다. 고개를 오르던 사람들이 잠깐 쉬어가는 바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61번지에 있다.
○앵두논
아랫가래비 북동쪽에 있는 논이다. 앵두나무가 있는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경지정리가 되어있다. 445번지 부근이다.
○ 언터가리
윗가래비와 아랫가래비 사이에 있는 논이다. 억덕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569-1번지 일대이다.
○ 언터갤논
아랫가래비에 있는 논이다. 언덕에 있는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69-2번지이다.
○ 언터갤밭
아랫가래비에 있는 밭이다. 언덕에 있는 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62번지이다.
○ 역두리
아랫가래비 동쪽에 있는 밭이다. 큰 들판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336번지 일대이다.
○ 옹안리등
아랫가래비에서 오산리의 옹안이 백석읍사무소를 거쳐 가래비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산127-4번지부근이다.
○ 은봉산(隱鳳山)
가업리와 홍죽리 그리고 기산리에 걸쳐있는 산이다. 높이는 397.8m이다. 은(銀)이 나는 산 혹은 부엉이가 숨어있던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은을 채굴했다고 하며, 지금도 은봉산 중턱에는 당시에 채굴했던 은굴이 있다고 한다. 은봉산은 19세기 중반의 문헌인 양주목읍지(1842)에서부터 확인되는데 한자로는 은봉산(隱鳳山)이라고 하였다. 양주목읍지(1871), 양주군읍지(1899), 양주읍지(1899)도 마찬가지이다. 땅이름 유래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얘기도 전해진다. 남씨 일가에서 장사를 치르는데, 지관이 말하기를 이곳을 파고 바위돌이 나오면 시신을 그 위에 올려놓고 묻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손들은 시신을 돌 위에 올려놓고 묻을 수 없어 바위돌을 들어내었더니 마침 부엉이 3마리가 이곳에서 날아갔다고 한다. 그 후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혹은 봉황이 숨었다가 날아갔다고 하여 은봉산이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정상 부근에 부엉이묘가 남아 있다. 산48번지와 홍죽리 산95-4번지, 기산리 산79번지이다.
○ 응달말고개 → 가나뭇재고개
○ 진틀
아랫가래비 북동쪽 병양갈논 옆에 있다. 항상 물길이 흘러 흙이 질어 붙여졌다. 29번지 일대이다.
○ 진틀다리
아랫가래비에서 오산리의 옹안이로 가기 위해 넘어야 만하는 다리이다. 진틀에 있는 다리라 하여 붙여졌다. 21-1(구)번지에 있다.
○ 치마바위 → 갓마바위
윗가래비 응달말 동쪽 가나뭇재고개 너머에 있는 골짜기이다. 복지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현재 세아아파트와 동화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다. 큰골이란 땅이름은 양주1동의 어둔동, 양주2동의 삼숭동, 백석읍 복지리, 은현면 용암리·도하리, 남면 경신리, 광적면 가납리·우고리, 장흥면 석현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큰 골짜기라는 뜻이다. 산120-6번지 일대이다.
○ 턱굴고개 → 느르미고개
가업리, 기산리, 복지리에 걸쳐있는 봉우리이다. 높이는 436m이다. 산정상에 오르면 한강이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이곳에서 봉화를 올렸다 하여 봉화등이라고도 한다. 산110번지일대이다.
○ 호랑이바위 → 맷돌바위
○ 혼두리
아랫가래비 동쪽에 있는 논이다. 큰 들이라는 뜻의 한들이 변하여 한들〉혼들〉혼두리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모두 경지정리가 되었다. 334번지 일대이다.
○ 황새배미
아랫가래비 남쪽에 있는 논이다. 옛날 이곳에 황새가 날아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40번지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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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홍죽리(弘竹里)
홍죽리(弘竹里)는 백석읍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으로 가업리, 서쪽으로 광적면 비암리, 남쪽으로 기산리, 북쪽으로 연곡리·오산리와 접해있다.
홍죽리라는 땅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이후이다. 대한제국기까지 만해도 이곳은 대부분 내동리(內洞里)·홍동리(弘洞里)·천죽리(川竹里)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백석면의 내동리·홍동리·천죽리와 난곡리·단촌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홍동과 천죽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홍죽리라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나와 있다.
홍동리란 땅이름은 큰 마을이란 뜻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유래하였고, 천죽리란 땅이름은 이 마을을 흐르는 시냇가에 있었던 대나무와 관련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현재 홍죽리는 아늑하면서 조용한 농촌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홍골에 있는 마을이다. 홍골 중심에서 건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건너말이라는 땅이름은 백석읍 복지리·가업리, 은현면 도하리, 광적면 가납리, 장흥면 울대리·부곡리·삼상리·삼하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한 지점의 건너 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02번지 일대이다.
■ 고말재
안골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안골 마을의 끝자락 나지막한 언덕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238-4번지 일대이다.
홍골에 있는 마을이다. 골짜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골말이라는 땅이름은 회천4동의 회암동, 백석읍 방성리·오산리·가업리·연곡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583번지 일대이다.
■ 냅대·천죽(川竹)
홍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동쪽에 있는 시내에 희귀한 대나무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일제초기의 문헌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서는 백석면에 소재한 천죽리(川竹里)로 소개하였다. 즉 시내(내)를 의미하는 ‘천(川)’과 대나무(대)를 가리키는 ‘죽(竹)’을 합쳐 천죽이라 한 것이다. 혹은 임진왜란 당시 왜병들이 이곳에서 싸우다가 냅다 도망쳤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나 불확실하다. 그러나 실제 내죽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60)이다. 이후 동국여지지(19세기 중엽)에도 나오며, 일찍이 15세기 인물로 이 지역에 묻혀있는 윤자운의 신도비에도 적혀 있다. 그런데 실제 내죽의 한자를 이들 문헌과 금석자료에서는 ‘내죽(乃竹)’으로 명시하고 있어, 과연 냅대의 유래가 무엇인지 궁금증을 더하게 만든다. 과거 모든 한자로 된 땅이름은 순우리말로 발음되는 것을 한자로 그대로 옮긴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를 근거로 유추해 보면 ‘안들(안쪽에 있는 들판)’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즉 안〉안다(ㄹ 탈락)〉안대〉내대〉냅대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429번지 일대이다.
■ 북촌(北村)
홍골에 있는 마을이다. 홍골 중심에서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33번지 일대이다.
■ 안골·내동(內洞)
홍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초기의 문헌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서는 내동리(內洞里)로 소개하였다. 안골이란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은현면 도하리, 장흥면 부곡리에서, 내동이란 땅이름은 장흥면 부곡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376-1번지 일대이다.
홍골에 있는 마을이다. 홍골의 마을 중심에서 위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웃말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 봉양동, 회천4동의 옥정동, 양주1동의 산북동, 양주2동의 광사동·고읍동, 백석읍 연곡리, 은현면 용암리·운암리, 남면 신산리·구암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547번지 일대이다.
■ 축동
홍골에 있는 마을이다. 겨울에 불어오는 북서계절풍의 차가운 공기로부터 홍골 동쪽에 발달되어 있는 넓은 들판을 막기 위해 쌓은 방축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방축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439번지 일대.
■ 홍골·홍동(弘洞)
홍죽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서 건너말·골말·북촌·웃말로 구성되어 있다. 인근 마을
가운데 가장 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즉 골 〉혼골〉홍골로 변화한 뒤 한자로
크다는 뜻을 지닌 ‘홍(弘)’자를 쓴 것으로 보인다. 일제초기의 문헌인 구한국지방행
정구역명칭일람(1912)에서는 홍동리(弘洞里)로 소개하였다. 홍골이란 땅이름은 양
주읍 남방리에서도 확인된다. 555번지 일대이다.(홍골 입구에 서있는 장승과 같이 양주시에는 자연마을입구에 아직도 이런 해학적인 모습의 장승이 서있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
○ 가운데골짜기
홍골 서쪽에 있는 여러 골짜기 중에서 가운데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골짜기 안에 각명사라는 이름의 절이 자리 잡고 있다. 540번지 일대이다.
○ 거지고개
안골에서 고말재를 넘나들던 나지막한 고개길이다. 옛날에 어떤 거지가 쌀을 얻으러 왔다가 이곳에서 얼어 죽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거지고개라는 땅이름은 은현면 운암리·하패리, 남면 상수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거지가 지나다니던 고개라는 뜻이다. 산115-1번지 부근이다.
○ 과녁배기
냅대 동쪽에 있는 논이다. 활터의 과녁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남쪽의 활터고개에서 이곳에 있는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고 전한다. 지금은 모두 경지정리가 되었다. 40-31번지 일대이다.
○ 교사리
냅대 동쪽 연곡초등학교 앞에 있는 논이다. 어떤 이유로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40번지 일대이다.
○ 금전판 구덩이
안골 남동쪽은 봉산자락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구덩이이다. 조선시대 혹은 일제시대 에 금을 파던 구덩이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 들어갔던 분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구덩이 안에 물이 차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산사태로 모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산100-1번지 부근이다.
○ 노아산(老兒山) →월암산
○ 도장재
홍골에서 냅대를 넘나들던 산잔등 부근을 가리키는 말이다. 옛날 이곳에서 만신(무녀)들이 도당굿을 많이 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당굿을 하던 언덕이라 하여 도당재라고 불리던 것이 도장재로 변하였던 것이다. 언덕고개라고도 한다. 근처에 고인돌 모양의 큰 돌이 있다. 425번지 부근이다.
○ 마태우물
홍골 가운데골짜기에 있었던 우물이다. 각명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없다. 545-1번지 부근에 있었다.
○ 말무덤
냅대에 있었다고 전하는 무덤이다. 옛날 어느 효자가 이곳 땅주인 모르게 자기 부모의 묘를 모시려다, 날이 밝자 급히 묻고 말무덤이라 하였다는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혹은 임진왜란 당시 왜병들의 말을 묻었던 곳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말무덤이란 땅이름은 회천4동의 옥정동, 양주1동의 유양동, 양주2동의 만송동, 백석읍 연곡리, 남면 신산리, 광적면 광석리에서도 확인된다. 대개 말을 묻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26-2번지 부근에 있었다.
○ 바우배기
안골 남쪽에 있는 논이다. 논 가운데 바위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없다. 바우배기라는 땅이름은 양주 2동의 삼숭동에서도 확인된다. 이 또한 바위가 있는 논이라는 뜻이다. 743-2번지이다.
○ 박사부다리
홍죽리와 연곡리, 그리고 오산리의 경계지점에 있는 다리이다. 연곡리 연곡초등학교옆 산에 박사부라는 관직을 지낸 사람의 비석을 세우려고 제작하여 운반하던 중, 난리가 나서 이 다리 밑에 빠뜨렸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혹은 박씨 성을 가진 과부가 놓은 다리라고도 한다. 50번지 및 연곡리 10-6번지, 오산리 690번지의 경계부분에 있다.
○ 방울다리·영교(鈴橋)
냅대 동쪽 연곡초등학교 앞에 있었던 다리이다. 옛날 꿩사냥을 하던 매의 발목에 달린 방울이 떨어진 다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방울처럼 생긴 돌이 놓여 있던 다리라 한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경지정리가 되어 모두 없어졌다. 40-3번지 부근에 있었다고 전한다.
○ 뱀자고개
안골에서 광적면 비암리 괴미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뱀장어처럼 미끄러운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70번지 부근이다.
○ 부엉데미
안골 남쪽 은봉산 자락에 있는 조그만 봉우리이다. 은봉산의 부엉이 전설(가업리 은봉산 참조)에 나오는 첫 번째 부엉이가 이곳에 날아와 앉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산86번지이다.
○ 분투골
냅대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연곡초등학교로 들어가는 길에서 왼편에 있으며, 박사부다리 못미쳐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병사들이 왜병에 대항해 사력을 다해 싸운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근 연곡리에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육지전투 승전지인 해유령이 있어 이곳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38-3번지 일대이다.
○ 산잔등
홍골에서 냅대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언덕이다. 홍골 서쪽에서 내려온 산자락이 이 부근에서 마치 말잔등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25번지에 있다.
은봉산 정상에 있는 세 개의 큰 바위이다. 나란히 서있는 세 바위가 삼형제처럼 보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삼형제바위란 이름은 회천4동의 율정동과 백석읍 가업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형제들처럼 세 개의 바위가 나란히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95-4번지에 있다.
안골에서 광적면 비암리 괴미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서낭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낭당고개란 이름은 양주2동의 고읍동, 백석읍 방성리, 은현면 운암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근처에 성황당이 있는 고개란 뜻이다. 산60번지 부근이다.
○ 소샛고개·소새고개·소사고개
안골에서 기산리 턱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즉 안골을 지나 높은 고갯길을 오르면 기산저수지가 펼쳐지는데, 저수지 옆의 집 뒤로 가느다란 산줄기가 마치 뱀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 근방에 묘지를 쓰면 ‘소새’라는 새가 뱀을 찍는 모양이 되므로 가세가 기운다고 하였다. 실제로 허씨 집안이 묘소를 쓰고 망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고개의 이름이 소새고개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인근마을 사람들은 소새고개가 있는 산자락의 형상을 항상 ‘소‘와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소사고개 혹은 소새고개라는 이름이 유래한 이유는 ‘소 사이의 고개’가 그대로 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고개에 대한 자료는 18세기 중반의 문헌에서 부터 확인된다. 여지도서(1757∼1765)에서는 이곳을 소사현(所沙峴)으로 소개하면서, 읍치에서 서쪽으로 30리 거리에 있으며,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묻혀 있는 소령원(昭寧園)으로 가는 통로라고 하였다. 이밖에도 대동여지도(1861), 대동지지(1864), 증보문헌비고(1908)에서도 확인된다. 소사현을 한자로 ‘소사현(素砂峴)’이라 한 것은, 옛문헌에 따르면 잘못된 표현이다. 산91-2번지에서 기산리 산85-1번지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쇠망토산
홍골 남서쪽에 있는 야산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소가 입에 망을 쓴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소가 망토를 벗고 풀을 뜯어 먹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산 60번지 일대이다.
안골과 홍골 경계를 이루는 산자락을 가리키는 말이다. 안골마을 남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안산이란 땅이름은 백석읍 복지리, 남면 한산리, 광적면 우고리에서도확인된다. 산11-3번지 부근이다.
○ 애비당골
냅대의 월암산 자락 밑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어느 양반이 사랑하는 애첩의 집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산36번지에 있다.
○ 언덕고개 →도장재
○ 와우고개·와우개·와우현(臥牛峴)
안골에서 광적면 비암리 괴미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소가 누운 모양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53번지 부근이다.
○ 월암산
냅대뒤 서쪽에 있는 산이다. 홍죽리와 연곡리, 광적면 비암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336.6m이다. 산에 바위가 많아 밤에 뜨는 달빛이 바위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사람들이 매년 10월 1일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이 산등성이에 묘자리가 있는데 이곳에 묘를 쓰면 그 후손들만 번창하고 다른 사람들은 질병과 가난에 시달린다고 하여, 사람들이 그곳의 묘를 모두 없애버렸다고 한다. 노아산(老兒山)이라고도 한다. 산36번지와 연곡리 산47-2번지, 비암리 산19번지 일대에 걸쳐 있다.
○ 육골고개
냅대에서 광적면 비암리 괴미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월암산 자락에 있으며 여섯 개의 계곡이 이곳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고개가 길어서 옛날 나무꾼이 여섯 번 이상 쉬지 않으면 골병이 든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산36번지에 있다.
○ 윤자운(尹子雲)의묘
안골에 있는 묘이다. 윤자운(尹子雲, 1416∼1478)은 조선중기의 명신으로 자는 망지(望之), 호는 낙한재(樂閑齋),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이다. 1444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집현전 부수찬·이조좌랑·사간원좌헌납·승정원 도승지·영의정을 지냈다. 집현전부수찬으로 있을 때 고려사 편찬작업에 참여했고, 1453년(단종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자 이후 그의 측근으로 참여하였으며, 수양대군이 왕좌에 즉위한 후에는 추충좌익공신(推忠左翼功臣)에 책봉되었고 이후 세조의 투터운 신임으로 1470년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성종이 즉위한 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어 무송군(茂松君)이 되었다가 후일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겸 예조 판서에 올랐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작전에 참여하였다. 사람됨이 단아하고 세밀하여 일생동안 관부의 탄핵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고, 예종이 죽은 뒤에는 한명회·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왕조실록의 사신(史臣)은 그가 성품이 편협하고 아무런 재능이 없으면서도 의
정부의 고관이 되어 별다른 정책을 건의한 것도 없고, 이시애의 난 때에는 협박을 받고 적이 조정을 속이려는 문서에 서명하고 적을 대할 때마다 대인(大人)이라 칭하였다고 혹평하였다. 한편 윤자운은 16세기 전반의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서 처음 등장하며, 장지는 서촌(西村) 내죽리(乃竹里) 선영에 있다고 하였다. 산19번지에 있다.
○ 장자우물
홍골에서 냅대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었던 우물이다. 다리 밑에 있는 우물이다. 헌집터의 부자가 망할 때 구리암반(떡치는판)을 묻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없어졌다. 홍골과 냅대의 경계부분으로 450번지에 있었다.
○ 진배동산
홍골에서 냅대로 들어가는 마을 앞에 있는 동산이다. 긴 배 모양의 동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긴배가 진배로 변한 것이다. 곧 방축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439-1번지부근이다.
○ 질묵다리
안골에 있었다고 전하는 작은 다리이다. 소질묵(길마의 사투리)에 짐을 싣고 이 다리를 지나다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이 곳에 있는 흙이 너무 질어서 신발에 흙이 묻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662번지에 있었다.
○ 집너머
뱀자고개에서 안골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논고래이다. 집 너머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758번지일대이다.
○ 철망안
진배동산 앞에 있는 과수원이다. 철망으로 둘러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438번지이다.
○ 토성너머
홍골에서 냅대로 들어가는 진배동산 남쪽에 있는 밭이다. 이곳에 있었던 방축과 관련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457-6번지 일대이다.
○ 한우물
홍골 앞들 가운데에 있던 우물이다. 물이 차서 (한[寒])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길에 묻혀 없어졌다. 한우물이란 이름은 양주2동의 만송동에서도 확인된다. 416-3번지 부근에 있었다고 전한다.
냅대와 연곡리 피난말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고개의 경사가 너무 심하여 사람들이 할딱거리며 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할딱고개란 땅이름은 백석읍 방성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이 고개를 오를 때 숨이 할딱거릴 정도로 가파르다는 뜻이다. 산 36번지에 있다.
○ 함박다리
홍골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다리이다. 옛날에 한씨와 박씨 두 사람이 놓은 다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곧 한박다리가 변하여 함박다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385(구)번지에 있다.
○ 헌집터
냅대에 있는 집터이다. 옛날에 커다란 집이 있던 자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임진왜란 전에 높은 벼슬을 하던 사람이 낙향하여 3층짜리 기와집을 짓고 살았는데, 의병들을 숨겨주어 왜병들이 불을 질렀다고 한다. 지금도 주춧돌이 확인되고 사기조각도 발견된다. 514-2번지부근이다.
○ 활터고개
냅대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고개이다. 옛날에 마을사람들이 이곳에서 활을 쏘던 자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임진왜란 당시 활을 쏘던 자리라 하여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부근에 분투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활터고개라는 땅이름은 은현면 선암리·도하리, 광적면 효촌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활터가 있던 고개라는 뜻이다. 산1-5번지 부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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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연곡리(蓮谷里)
연곡리(蓮谷里)는 백석읍의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으로 오산리 및 광적면 광석리, 서쪽으로 광적면 비암리, 남쪽으로 홍죽리, 북쪽으로 광적면 우고리와 접해있다. 연곡리라는 땅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이후이다. 대한제국기까지 만해도 이곳은 대부분 해유리(蟹踰里)·연평리(蓮坪里)·난곡리(蘭谷里)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백석면의 해유리·연평리·난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연평과 난곡의 이름에서 한자씩을 따서 연곡리라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나와 있다. 연평리란 땅이름은 연못이 있는 들판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유래하였고, 난곡리란 땅이름은 임진왜란 당시에 있었던 피난말에서 변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현재 연곡리에는 임진왜란 당시 육지전투 최초의 승전지인 해유령을 비롯하여 조선왕조 창건의 일등공신인 조영무의 별묘 등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조용하고 정감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 게너미·해유(蟹踰)
피난말 북쪽에 있는 게너미고개 근방에 있는 마을이다. 게가 넘어간 고개 부근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골말·매장거리·웃말·잼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제초기 문헌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서는 이 마을을 백석면에 소재한 해유리(蟹踰里)로 처음 소개하였다. 240번지 일대이다(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게너미고개’를 참조).
게너미고개의 지평산(혹은 지령산) 골짜기 밑에 있는 마을이다. 게너미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이곳에 해유령전첩비와 충현사가 자리잡고 있다. 골말이라는 땅이름은 회천4동의 회암동, 백석읍 방성리·오산리·가업리·홍죽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238번지 일대이다.
■ 난곡·피난말
난이 많이 서식하는 아름다운 골짜기 혹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군사지도(1895)에서 난곡리로 처음 소개된 후, 일제초기의 문헌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서도 이곳을 난곡리(蘭谷里)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 마을이름은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대부분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게너미고개에서 싸우다가 이곳에 와서 많은 피를 흘렸다 하여, 혹은 마을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87-7번지 일대이다.
■ 능무랭이
피난말 동북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마을에 있던 느티나무에서 뱀(능구렁이)이 많이 나왔는데, 능구렁이가 능무랭이로 변하여 붙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곳의 지형이 산자락 능선의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어, 능선모퉁이〉능모퉁이〉능모랭이〉능무랭이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예전에는 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밭이 되었다. 89-1번지 일대이다.
■ 도축골·도치곡(道治谷)
게너미에서 잼말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길을 잘 닦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혹은 이곳과 광적면 우고리 경계부분에 함정모퉁이가 있는데, 조선중기 이곳에 도둑이 많아 마을사람들이 도둑을 쫓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302번지 일대이다.
■ 두레마을
피난말 동쪽 광적면 우고리와 경계되는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지체장애인들이 들어와서 마을을 꾸몄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40-9번지 일대이다.
■ 매장거리
해유령 전첩비 남쪽에 있는 거리에 있었던 마을이다. 이곳에 물건을 파는 점포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 의정부·동두천에서 문산 방면으로 소금과 새우젓 등을 사고팔러 다니던 사람들이 이곳을 자주 드나들며 쉬어 갔으므로 ‘매일 장날’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는 도로확장이 되면서 매장거리에 있던 가게들은 모두 없어졌다. 353번지 일대이다.
■ 벌말
피난말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벌판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벌말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2동의 회정동, 양주2동의 삼숭동, 은현면 운암리, 광적면 석우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벌판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한자로는 평촌(坪村) 혹은 야촌(野村)으로 불린다. 153번지 일대이다.
■ 상장미
도축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상장군(上將)의 묘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즉 상장묘가 변하여 상장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혹은 뒤에 상장산(上場山)이 있는 데에서 유래하였는데, 상장뫼가 상장미로 변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319-2번지 일대이다.
■ 연평들 [蓮坪-]
피난말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연못이 있던 들판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제초기의 문헌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서는 이곳을 백석면에 소재한 연평리(蓮坪里)로 소개하였다. 한편 일본군사지도(1895)에는 인접마을인 난곡리(蘭谷里)의 발음을 ‘インピョング(한국어 발음: 인퓽구)’로 적고 있으며, 별도로 연평리를 표기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연평리와 난곡리를 하나의 마을로 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130-1번지 일대이다.
게너미에서 잼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산 밑에 바짝 붙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웃말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4동의 옥정동, 양주1동의 산북동·광사동, 양주2동의 고읍동, 백석읍 복지리, 은현면 용암리·운암리, 남면 신산리·구암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한자로는 상촌(上村), 상동(上洞)으로 불리기도 한다. 275번지 일대이다.
■ 잼말
게너미에서 웃말과 도축골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성이 있었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성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성촌(城村)이라고도 한다. 286번지 일대이다.
■ 정터
피난말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싸움터라는 뜻에서 전터[戰-]라 하였는데 정터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마을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신각장군이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진터라고도 한다. 한씨·안씨·조씨가 맨 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하여 한안조마을이라고도 한다. 205-2번지 일대이다.
○ 갓굴
웃골 오른편에 있는 골짜기이다. 게너미 옆(가)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갓굴이란 땅이름은 광적면 덕도리에서도 확인된다. 279번지 일대이다.
○ 강철이개울
월암산에서 피난말 옆을 지나 동쪽으로 흐르는 개울이다. 강철이가 떨어져 죽은 개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75번지 일대이다.
○ 게너미고개·해유령(蟹踰嶺)
피난말 북쪽에 있는 고개이다. 게가 넘어간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옛날 인근 노고산에 노고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노고할머니가 오줌(소변)이 마려워 다리 한쪽은 노고산에 걸치고, 다른 한쪽은 반대편 도락산에 걸친 후 광적면 우고리와 광석리 경계지점 부근 황새등고개에 있는 요강바위에 오줌을 쌌다고 한다. 그런데 요강바위의 오줌이 넘치면서 인근 개울에 뜨거운 오줌이 흐르게 되었다. 개울에 살던 민물게들은 뜨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바로 이 고개를 넘기 시작하여 이웃한 광적면 비암리와 파주시 발랑리 쪽으로 갔다고 한다. 실제로 연곡리에는 민물게가 보이지 않지만비암리와 발랑리에는 민물게가 있다한다. 혹은 400여 년 전 소나기빗줄기를 따라 양주게가 파주로 넘어갔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서는 적성현의 토산물 가운데 하나가 게[해·蟹]라고 하였다. 고개의 이름은 대개 게너미고개라고 부른다. 한자로는 해유령(蟹踰嶺)·해현(蟹峴)·해유현(蟹
踰峴)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땅이름의 대부분이 우리말을 그대로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와전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게너미고개 또한 고개가 높고 험하여 ‘기어 넘어가는 고개’라는 순우리말이 이렇게 변한 것이 아닌가 한다. 342-1(도)번지에 있다. 게너미고개는 16세기 중반의 사실을 전하는 선조실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선조수정실록25년(1592) 5월 1일조에는 해령(蟹嶺)이란 지역이 등장하는데, 이는 게너미고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임진왜란 종료 후 논공행상의 자리에서 해유령대첩(蟹踰嶺大捷) 관련기사가 나오고 있다. 한편 여지도서(1757∼1765)는 해유령(蟹踰嶺)이 치소에서 서쪽으로 30리 되는 거리에 있고, 파주로 통하는 길이라고 소개하였다. 대동지지(1864)에서는 해유현(蟹踰峴)은 선조 25년 4월 부원수 신각(申恪)이 처음에 김명원(金命元)을 따라 한강을 방어하였는데, 김명원의 군사가 궤멸되자 신각은 한강으로부터 따라 달려온 이양원(李陽元)과 함께 양주에서 흩어진 군대를 수습하였다. 때마침 함경남도 병사 이혼(李渾)의 장병들이 와서 원조하니 드디어 군대를 합하여 진을 치게되었다. 드디어 해유현에서 왜병을 만나 요격하여 격퇴하니 70여 명을 목베었다고 하였다. 한편 해현(蟹峴)이란 이름으로 팔도군현지도(1767∼1776)·동국여도(1801∼1822)·청구도(1834)·대동여지도(1861)에, 해유령이라는 이름으로 해동지도(1760)·증보문헌비고(1908)에서도 확인된다. 이와 같이 해유령, 즉 게너미고개는 우리역사에서 치욕을 남겼던 임진왜란 당시 육지전투 최초의 승전지로서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다.
○ 기둥터
웃말에서 도로 건너편 남쪽에 있는 논이다. 옛날에 집이 있던 자리이며, 기둥이 있던 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60번지부근이다.
연곡초등학교 왼편에 있는 골짜기이다. 긴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긴골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백석읍 복지리·가업리·연곡리, 은현면 용암리·도하리, 남면 신암리, 장흥면 부곡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긴 골짜기라는 뜻이다. 180-1번지 부근이다.
○ 까마귀뜰논
연곡리 저수지를 막기 전에 있던 논이다. 논에 물이 없어서 한여름 복날이 지나도록 모를 못내서 까마귀처럼 새까맣게 타들어 갔던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이유로 저수지를 조성하였다. 401번지 부근이다.
○ 뒤눈턱
게너미 웃말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뒷산 밑에 있는 언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23-1번지 부근이다.
○ 뒤눈턱밭
뒤눈턱에 있는 밭이다. 앞부분 보다 뒤턱이 올라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335번지 일대이다.
○ 마을앞논
게너미마을 앞에 있는 논이다. 마을 앞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12번지 일대이다.
진터에 있는 무덤이다. 임진왜란 때 해유령 전투에서 죽은 말들을 묻어 만든 무덤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형태가 없고 그 부근에 마을이 들어서 있다. 말무덤이란 땅이름은 회천4동의 옥정동, 양주1동의 유양동, 양주2동의 만송동, 백석읍 홍죽리, 남면 신산리, 광적면 광석리에서도 확인된다. 대개 말을 묻은 무덤이라는 뜻이다. 147-1번지 일대이다.
○ 매장산(梅莊山)
해유령전첩비 맞은 편에 있는 산이다. 예전에 이 산에 매화나무가 우거져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하나 이는 와전인 듯싶고, 실제로는 매장거리와 관련된 산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잣나무숲으로 우거져 있다. 산35번지 북쪽 끝자락 일대이다.
○ 매쟁이
매장거리의 남쪽 매장산자락에 있는 밭이다. 매장거리에 살던 사람들이 경작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31-1번지 부근이다.
○ 모래논
소물논 남쪽에 있는 논이다. 일제시대인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큰 비로 떠내려온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45-1번지 일대이다.
○ 무명바위
능무랭이 뒤쪽에 있는 바위이다. 석공이 바위를 깨니 거기서 피가 흘러 깨기를 그만 두었다고 전해내려 온다. 89-1번지에 있다.
○ 묵은논
자라등뿌리 남쪽에 있는 논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짓지 못하고 묵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저수지에 편입되어 들어갔다. 64-2번지 부근이다.
연곡리와 홍죽리, 그리고 오산리의 경계지점에 있는 다리이다. 연곡초등학교 옆산에 박사부라는 관직을 지낸 사람의 무덤이 있는데, 옛날 이곳에 비석을 세우려고 제작하여 운반하던 중 난리가 나서 이 다리 밑에 빠뜨렸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혹은 박씨 성을 가진 과부가 놓은 다리라고도 한다. 10-6번지 및 홍죽리 50번지, 오산리 690번지의 경계부분에 있다.
웃말과 잼말사이에 있었던 다리이다. 연자방아가 있던 다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20년 대 말에도 있었다고 한다. 방아다리란 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4동의 옥정동, 양주2동의 고읍동, 백석읍 방성리·오산리, 은현면 봉암리, 광적면 가납리, 장흥면 울대리에서도 확인된다. 대개 방(박사부라는 사람의 비석을 빠뜨렸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박사부다리. 연곡리·홍죽리·오산리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아가 있던 다리라는 뜻이다. 288-1번지에 있었다고 한다.
○ 방죽논
게너미마을 앞에 있는 논이다. 방죽을 쌓아 막은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넉넉한 수렁논이다. 259-14번지 일대이다.
○ 사당골
게너미 뒤눈턱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부터 충무공 조영무의 불천지위(不遷之位)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23-1번지에 있다.
○ 상정리
갓굴 오른편에 있는 골짜기로 광적면 우고리를 향하고 있다. 산13번지에 있다.
○ 섬샘논
기둥터 남쪽에 있는 논이다. 장마철에 선샘이 많이 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59-8번지에 있었다.
○ 소물논
섬샘논 동쪽에 있는 논이다. 소가 빠져 죽은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59-10번지이다.
○ 쌍감당이
게너미에서 광적면 비암리 방향으로 나있는 게너미고개의 가장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 쌍감사라는 이름의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 법당이 둘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이곳에 봉불사(奉佛寺)가 자리 잡고 있다. 산25-1번지에 있다.
○ 연곡저수지
연평들 북쪽에 있는 저수지이다. 면적은 12ha이며, 저수량은 25,000t이다. 일제시대에 백석면과 광적면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전한다. 백석 8개리 사람들에게 일정량을 배당하여 등짐으로 흙을 날라 쌓게하였다고 한다. 65-1번지일대이다.
○ 웃골안
뒤눈턱 오른편에 있는 골짜기이다. 광적면 우고리를 향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334번지 일대이다.
○ 자라등밭
능무랭이에 있는 밭이다. 산등이 자라와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89-1번지에 있다.
○ 자라등뿌리
피난말 북동쪽 능무랭이에 있는 모퉁이이다. 모양이 자라꼬리와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85-1번지에 있다.
○ 잔나무들
모래논 남쪽에 있는 밭이다. 옛날에 잣나무가 무성했던 들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55번지 부근이다.
○ 재장나무자리논
모래논 남동쪽에 있는 논이다. 자라동산에 자작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87번지 부근이다.
○ 잼말우물
잼말 앞에 있었던 우물이다. 현재는 없어졌다. 287번지 부근에 있었다.
○ 정굴
골말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산25-1번지에 있다.
○ 지령산·지평산
정굴과 게너미를 감싸고 있는 산이다. 무슨 이유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이 산에 토지의 혼령이 깃들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 아나가 한다. 산25-1번지 일대이다.
○ 청룡뿌리밭
게너미에 동쪽 끝산자락에 있는 밭이다. 게너미마을이 위치한 곳에서 좌청룡의 끝자락에 있는 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14번지 부근이다.
○ 피난말강습소
피난말에 있었던 일종의 학교이다. 일제시대 한학을 가르쳤던 학교로서 광적면 우고리에 사시던 김선생님께서 만들었다. 후에 이정민 선생님이 복지리 신지에 강습소를 만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곳으로 옮겨갔다. 결국 1930년대에 없어졌다. 189번지 부근에 있었다.
○ 함섬지기
잼말 남쪽에 있는 논이다. 물이 풍족하여 논이 기름지므로 쌀 한 섬이 수확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45-4번지 부근이다.
○ 해몰이산
피난말 서쪽에 있는 산이다. 해가 지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곡리와 홍죽리, 광적면 비암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336.6m이다. 산에 바위가 많아 밤에 뜨는 달빛이 바위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하여 월암산이라고도 하고 다른 이름으로는 노아산(老兒山)이라고도 한다. 산47-2번지 일대이다(자세한 내용은 홍죽리 월암산 참조).
○ 향자등[香子-]
게너미마을을 감싸고 있는 지평산의 산자락 능선을 이르는 말이다. 쌍감댕이 위쪽에 있으며, 광적면 우고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쌍감사의 향내가 진동하는 산등성이라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산25-6번지에서 산25-1번지 일대이다.
○ 형제우물
옛날 소물논에 있었던 물이 잘 나던 우물이다. 두 개가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없어졌다. 259-10번지에 있었다.
(7) 기산리(基山里)
기산리(基山里)는 백석읍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으로 복지리, 서쪽으로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 남쪽으로 장흥면 부곡리, 북쪽으로 홍죽리와 접해있다.
기산리라는 땅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이후이다. 대한제국기까지 만해도 이곳은 대부분 기곡리(基谷里)·내고령리(內古靈里)·중산리(中山里)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백석면의 기곡리·내고령리·중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기곡과 중산의 이름을 따서 기산리라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나와있다. 그 후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따라 기산리와 영장리 등 2개리가 파주시로 이속되어 영장출장소의 관할을 받다가, 이중 기산리의 일부가 1987년 1월 1일에 다시 환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곡리란 땅이름은 사람들이 산속 골짜기에 들어와 터를 잡았다는 뜻의 터골에서 유래하였고, 중산리는 산속의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높은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자연환경이 빼어난 기산리에는 현재 기산저수지를 중심으로 대규모 위락시설과 음식점·카페촌들이 들어서 수도권 주민들의 편안한 안식처로서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 석골·석곡(石谷)
안고령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계곡의 고갯길을 넘으면 광적면 비암리로 연결된다. 옛날 석씨가 개척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돌이 많은 데에서 연유한 이름이라고도한다. 일설에는 이곳 범상골에 큰바위가 있는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327번지일대이다.
■ 안고령
석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령산 안쪽 계곡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령산(지금의 개명산)에 12계곡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안쪽에 있으며 삼태기 같이 아늑하다. 다른 이름으로는 주씨와 이씨가 처음 정착한 고장이라 하여주리골이라고도 부른다. 주리골이란 땅이름은 장흥면 석현리에서도 확인된다. 366번지 일대이다.
■ 주리골 →안고령
■ 턱골
기산저수지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턱골은 한자로 기곡(基谷)이라 하므로 터골 〉텃골 〉턱골로 변화되어 표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턱골과 중산리를 합하여 기산리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턱골이란 땅이름은 회천1동의 덕정동과 양주2동의 광사동에서도 확인된다. 157번지 일대이다.
○ 개명산(開明山)
기산리와 장흥면 석현리, 파주시 광탄면, 고양시 벽제동에 걸쳐있는 산이다. 높이는
621.8m이다. 개명산은 원래 고령산(高嶺山 혹은 高靈山)이라 불렸고, 그 후 한때 계명산(鷄鳴山)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동여비고(1682)는 고령산을 일명 계명산(鷄鳴山)으로 부른다고 하였으며, 동국여도(1801∼1822)는 고령산의 한자를 ‘고령산(高靈山)’으로 적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산기슭에는 고령사(高嶺寺)라는 절이 있으며, 파주시 방면에 앵봉(鶯峰)과 소녕원(昭寧園)이 있다.
고령산이란 이름은 15세기 중반의 문헌에서 처음 등장한다. 세종실록 30년(1448) 12월 10일조에는 삼군진무소에서 고령산(高嶺山) 등을 강무장(講武場) 즉 왕의 수렵장소로 정할 것을 건의하는 기사가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고령산 혹은 고령사와 관련하여 총 7건의 기사가 확인된다. 특히 영조·정조대에는 왕의 행차기록이 있는데, 숙빈(叔嬪) 최씨의 묘소인 소녕원(소령원)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일제초기의 문헌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은 백석면에 소재한 내고령리(內古靈里)와 대고령리(大古靈里)를 소개하고 있는데, 현재 파주시 광탄면 개명산 자락 밑에 대고령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두 지역 모두 고령산 근처의 마을일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고령산(高嶺山)이란 땅이름은 팔도군현지도(1767∼1776)·증보문헌비고(1908)·조선환여승람(1937)에, 고령산(高靈山)은 양주목읍지(1842)·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1888)·양주군읍지(1899)·양주읍지(1899)에, 계명산(鷄鳴山)은 청구도(1834)·대동여지도(1861) 등에서 확인된다.
개명산은 높이 621.8m의 꾀꼬리봉, 즉 앵무봉과 연이어 있는데, 이들 연봉 모두를 개명산 혹은 앵무봉이라고도 한다. 꾀꼬리봉이라는 이름은 산줄기가 꾀꼬리처럼 아름다운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가끔 기산리와 장흥면 석현리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또다른 꾀꼬리봉과 혼동하여 불려지기도 한다. 산103-1번지 일대이다.
○ 거룻봉 →팔일봉
○ 거성탱이
안고령에 있는 연못이다. 무슨 이유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이곳에 정착한 주씨와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용하던 우물이라 하여 붙여진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363-3번지 부근이다.
○ 경수웅뎅이
안고령에 있었던 웅덩이이다. 절골 입구에 있으며, 옛날에 이무기가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무슨 이유로 이러한 이름이 붙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이웃한 국수당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국수당에 필요한 정한수를 길어오던 웅덩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일 것으로 생각된다. 산108번지에 있다.
○ 국수당
안고령에 있는 산제사터이다. 현재 당집은 없고 다만 200여 년 된 소나무가 서있다. 매년 음력 10월 1일 이곳에서 산제사를 드린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있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따라서 서산대 혹은 사명당이라고 부르던 것이 국수당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국수당이란 이름은 양주1동 유양동에서도 확인된다. 산144-3번지에 있다.
○ 기산저수지
기산리에 있는 저수지이다. 면적은 203ha이고, 저수량은 878,000톤이다. 1971년 공사를 시작하여 1976년에 완공되었다. 여기에 가두어진 물은 터널을 통해 백석면홍죽리와 가업리의 대들에 공급되어 그 곳을 수리안전답으로 만들어 준다. 현재 파주시농업기반공사가 관리하고 있다. 한편 최근에 이 저수지 근방에 수많은 음식점과 카페촌이 들어서 수도권 주민들의 안락한 휴식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207번지일대이다.
안고령 남서쪽에서 마을을 감싸고 있는 앵무봉에서 안고령으로 내려오는 길이다. 긴등성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긴등이란 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백석읍 가업리, 남면 두곡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긴등성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103번지 일대이다.
○ 꾀꼬리봉·앵무봉(鸚鵡峰) →개명산
○ 노고봉
안고령 남서쪽 개명산과 앵무봉의 연봉 중에 있는 한 봉우리이다. 노고할머니가 돌을 치마로 날라 쌓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에 봉화터가 있다. 노고봉이란 땅이름은 광적면 우고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노고할머니 전설과 관련된 것이다. 산103-1번지에 있다.
○ 뒷골
석골 마을 뒷산에 있는 골짜기이다. 마을 뒷쪽에 있는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뒷골이란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3동의 고암동, 회천4동의 율정동, 양주1동의 어둔동·산북동, 백석읍 가업리·기산리, 은현면 용암리, 남면 신암리, 장흥면 울대리·부곡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뒤쪽에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산128번지에 있다.
○ 드무골
안고령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안고령에서 장흥면 석현리로 나있는 골짜기로 현재 수련장이 자리 잡고 있다. 산103-1번지에 있다.
○ 말구리고개
기산리에서 장흥면 석현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곳에서 말이 굴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개가 무척 험하여 지금도 차량들이 넘나드는 데 어려움을 겪을 정도이며, 그나마 최근에 도로가 확포장되어 예전보다는 쉽게 넘을 수 있다. 산33-10(도)번지이다.
○ 문앞논
석골 남쪽에 있었던 논이다. 석골 마을 문앞에 있는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밭으로 바뀌었다. 문앞논이란 이름은 은현면 용암리에서도 확인된다. 326번지부근이다.
○ 범상골
석골에서 광적면 비암리로 넘어가는 골짜기이다. 예전에 이곳에 호랑이가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산139-1번지 일대이다.
○ 봉화터
노고봉에 있었던 봉화터이다.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산103번지에 있다.
○ 새치골등
안고령의 드무골과 절골사이에 있는 골짜기등성이이다.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에 있는 등성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103번지에 있다.
○ 세밥논
안고령에서 파주시 광탄면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논이다. 논의 크기가 워낙 작아 밥 세 그릇과 바꿨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논이다. 390-3번지이다.
홍죽리 안골에서 기산리로 넘어오는 고개이다. 안골을 지나 높은 고갯길을 오르면 기산저수지가 펼쳐진다. 저수지 옆에 있는 집 뒤로 가느다란 산줄기가 마치 뱀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 근방에 묘지를 쓰면 ‘소새’라는 새가 뱀을 찍는 모양이 되므로 가세가 기운다고 하였다. 실제로 허씨 집안이 묘소를 쓰고 망했다고 한다. 소사고개라는 이름은 18세기 중반의 문헌에서부터 확인된다. 여지도서(1757∼1765)에서는 이곳을 소사현(所沙峴)으로 소개하면서, 읍치에서 서쪽으로 30리거리에 있으며, 소령원(昭寧園)으로 가는 통로라고 하였다. 이밖에도 대동여지도(1861)·대동지지(1864)·증보문헌비고(1908)에서도 확인된다. 소사현을 ‘소사현(素砂峴)’이라 한 것은, 고문헌에 따르면 잘못된 표현으로 추측된다. 산85-1번지이다.
석골 남쪽에 있는 논이다. 마을 앞자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95부터1996년까지 당시 SBS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임꺽정’의 세트장으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 앞자리 논이라는 이름은 백석읍 복지리에서도 확인된다. 324-1번지부근이다.
○ 울밑논
석골 북쪽에 있는 논이다. 석골 위의 울타리 밑에서 나오는 샘물로 농사를 짓는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06번지이다.
○ 은구뎅이논
석골 북쪽에 있는 팔일봉 남쪽산자락에 있는 굴이다. 일제시대에 은을 채굴하려던 동굴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은은 없었다고 한다. 산128번지에 있다.
안고령에 있는 골짜기이다. 절이 있는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개명산 정상 넘어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보광사가 원래 여기에 있었는데 빈대가 너무 많아 이전한 것이라고 한다. 절골이란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양주2동의 만송동, 백석읍 복지리, 남면 신암리·구암리·입암리·한산리, 광적면 우고리·비암리, 장흥면 석현리·일영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절이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한자로는 사곡(寺谷) 혹은 사동(寺洞)이라고도 한다. 산103-1번지에 있다.
○ 중뜰
석골과 안고령에서 파주시 광탄면으로 넘어가는 끝자락에 있는 벌판이다. 둘 사이에 있는 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91번지일대이다.
○ 칼바위
안고령 남쪽 절골 골짜기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의 모양새가 칼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산103-1번지에 있다.
○ 팔일봉(八日峰)
석골 북쪽에 있는 산이다. 여덟 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산을 통해 해를 맞이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기산리와 광적면 비암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높이는 440m이다. 이곳에서 봉화를 올렸다고 한다. 다른 말로는 거룻봉이라고도 하는데 산등성이의 생김새가 마치 거룻배와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139-1번지이다.
○ 화개
석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응달쪽인 이곳에 봄이면 많은 꽃이 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91번지 일대이다.
○ 화개골짜기못
석골 북쪽 화개골짜기에 있는 연못이다. 296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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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주 백석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