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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익산이 좋은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한마루
익산의 산하
익산향토문화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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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龍山)
소재지 : 익산시 황등면 용산리
함열에서 남쪽 방향으로 약 10리 정도의 거리에 얕으막한 안산(案山)인 용산이 있다. 여기에는 용산성(龍山城)이라 불리우는 둘레가 약 12정(町)에 달하는 석성이 있는데, 지금까지도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가 완연하게 남아 있다. 이 성은 '여지승람'의 함열현조에 “용산성(龍山城)은 ……조선 세종 경신년에 함열현의 관아를 옮기기 위하여 쌓았으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관아를 옮기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440년에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 이 산의 남서쪽에는 고려이후의 교통 역이었던 재곡역(才谷驛)의 옛 터가 있다.
성내 1구(城內一區성안) : 세종 22년(1440)에 쌓은 주위 3603척의 용산성 안에 있는 마을.
성내 2구(城內二區성안) : 성내 1구 참조.
*금마산(金馬山, 일명 乾子山)
금마산은 익산시 금마면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산으로, 해발 100m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두 개의 연이은 산봉우리가 마치 말이 누워있는 모습 같다하여 금마산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항간에서는 이 산을 건지산 혹은 마이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건지’는 ‘건자’에서 와전된 듯하며, 건자는 본래의 명칭이었던 건모산의 ‘건모’에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여지승람'에서는 이 산을 ‘건자산’이라 하여 금마의 진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이 산의 양봉이 말의 귀를 닮았다 하여 마이산이라고도 한다.
조선 철종때 익산군수 황종석이 쓴 고도리석불입상의 중건비문에 의하면 “마이산의 마부로서 인석(石佛立像)을 세웠다” “말이 물을 마시도록 음수전을 놓았다”고 하는 풍수설에 따른 석불입상 건립의 유래를 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마이산’이 바로 금마산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에서 돌칼, 돌도끼, 청동거울 등이 습득된 바 있으며, 산 정상에는 기우제를 지냈다는 운제터가 있다.
▒ 미륵산(彌勒山)
미륵산은 금마에서 북쪽으로 8리 정도의 거리에 금마면, 삼기면, 낭산면에 결쳐 있는 높이 430m의 산으로, 옛날에는 이 산의 동쪽에 이어져 있는 높이 350m정도의 낮은 산봉까지를 포함하여 용화산(龍華山)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구분하여 미륵사지가 있는 북쪽은 미륵산이라 하고 나머지 지역은 용화산이라 하고 있다. 미륵이나 용화는 모두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는 명칭으로써, 원래는 용화산이라 하던 것이 미륵사가 지어지면서 그 주변산만을 미륵산이라 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산은 천호산의 줄기가 동서로 가로질러 이룬 산으로, 북으로는 황산벌이 보이고 남으로는 멀리 호남평야를 바라보는 평지에 우뚝 솟아 있으며, 이 산에서 발원하는 도천(道川), 부상천(扶桑川), 궁평천(宮坪川) 등은 만경강의 상류를 이루며, 서해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산의 최고봉을 운제봉이라 하고 조금 낮은 앞 산봉을 장군봉이라 하는데, 장군봉에는 마치 장군이 투구를 쓴 것과 같은 모양으로 생긴 까닭에 투구바위라고 부르고 있는 바위가 있다. ?여지승람? 익산군 산천조에서는 “장군봉은 용화산에 있는데, 남쪽에 있는 바위에는 두어말의 기름을 녹일 수 있는 구멍이 파져 있어 이 바위를 등잔암이라 한다”고 하는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등잔암은 지금의 장군봉 산정에 있는 투구바위(兜巖)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의 남록에 있는 거북바위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거북바위에는 가로 70cm 세로50cm 정도의 구멍이 파여져 있다. 또 이 산안에는 미륵사지를 비롯하여 사자암, 죽사(지금은 없다. 사자암 서쪽으로 백보 거리에 있었음), 수백암(지금은 없음, 사자암 서쪽으로 이백보 거리에 있었음), 만방암(지금은 없음, 사자암 남쪽으로 이백보 거리에 있었음), 영혈사(일명 串寺라고도 함. 지금은 없음, 수백암 북쪽으로 1리의 거리에 있었음), 명적암(지금은 없음, 사자암 동쪽으로 이백보거리에 있었음), 천장암(지금은 없음, 명적암 동쪽으로 2리 거리에 있었음), 심곡사(현존), 석불사(석불 남아 있음, 절 이름은 확실치 않음), 태봉사(삼존불 남아 있음, 절 이름은 확실치 않음), 장안사지 등 절터가 많이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서 볼 때 이 산은 백제, 신라, 고려대를 이어 이 지역의 불교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으로 보인다.
또한 산 위에는 기준성이라 불리우는 미륵산성 터가 있으며, 중턱에는 백제의 도요지가 여러 곳에 있어 삼족토기 등 백제토기를 이곳에서 구워냈음을 알 수 있다.
▒ 용화산(龍華山)
문수산(일명 천호산)의 한 지맥이 서쪽으로 뻗어 용화산과 미륵산을 형성하였는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적어도 조선 초기까지는 미륵산과 용화산을 합하여 모두 용화산이라 불러 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산을 구분하여 동쪽의 왕궁면 여산면에 걸쳐있는 옥녀봉( 玉女峰), 선인봉(仙人峰), 노승봉(老僧峰), 성태봉(城胎峰)을 이룬 이 준령만을 용화산이라 칭하고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인 옥녀봉은 해발 320m 정도되는데, 이 곳에는 성인 30여명 정도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자연석굴이 있다. 한편 북쪽 후미에 있는 성태봉에는 둘레가 약 500보(步)정도의 석성이 남아 있다. 또 선인봉의 동쪽 기슭에는 도신사지(道新寺址)가 남아 있다.
이외에도 이 산에는 동산사지(東山寺址)와 상원사지(上院寺址) 등 몇개의 옛 절터가 남아 있다. 산의 서쪽 기슭에는 익산의 명승 중의 하나인 황각동 계곡(黃閣洞 溪谷)이 있다.
"여지승람" 여산군 산천조에는 “군의 남쪽 12리 정도에는 군입산(軍入山)이 있는데,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할 때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킨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산 관아에서 남쪽으로 12리쯤에 있는 산은 문수산(천호산)에서 용화산으로 이어지는 산령인 탄현(炭峴, 숯고개)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탄현은 '고려사'의 ?후백제군 정벌기?에 “우리 군대는 황산군에 이르러 탄령(炭嶺)을 넘어 마성(馬城)에 주둔하였는데, 신검과 그 동생, 그리고 문무관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는 기사에서 보이는 ‘황산군의 탄령’을 가리키는 것이며, 태조 왕건의 군대가 주둔했다고 하는 마성(馬城)은 용화산의 석성(石城)으로 보인다. 지금도 용화산의 석성 아래에는 견훤의 ‘진터’라고 전해 오는 ‘마산(馬山) 진터’가 있다.
▒ 도순산(都順山, 일명 始茶山)
도순산은 왕궁면 도순리와 동봉리, 동촌리 등에 위치한 표고 200m 정도 되는 산으로 일명 시다산(혹은 시대산)이라 한다. 문수산(천호산)의 지맥 하나가 남쪽으로 뻗어 도순산을 이루고 여기에서 다시 산세는 얕으막하게 남으로 뻗어 매(鷹)봉을 이루고 있다. 이 산봉의 끝자락에 제석사지가 자리하고 있다. 산의 최고봉은 운제봉(雩祭峰)으로 기우제를 지냈던 자리가 있으며, 그 밑에 도순사지(都順寺址)가 남아 있다.
▒ 오금산(五金山)
오금산은 금마면 고도리 서쪽에 높이 120m정도의 낮은 5개의 봉우리가 연이어서 동서로 가로질러 있는 산이다. 산 아래에서 바라보면 낮은 산같이 보이나 산 정상에 올라가보면 멀리 전주의 모악산과 김제만경 평야까지 훤히 내다보이는 전망 좋은 산이다.
이 오금산에 관하여는 '금마지(金馬誌)'에 관련 설화가 실려있다. 즉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薯童大王)은 일명 맛동이라고도 하는데, 그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써 섬기었으며, 마를 캐다가 팔아서 봉양하였는데, 어느날 마를 캐다가 금 다섯덩어리를 얻게되어 이 산의 이름을 오금산(五金山)이라 하였다“고 하여 이 산 이름의 유래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여지승람' 익산군 산천조에서는 이 오금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마룡지(馬龍池)를 서동대왕이 어머니와 같이 살았던 곳이라고 하였다. 한편 이곳에는 서동대왕이 그 어머니를 위하여 세웠다고 하는 오금사지(五金寺址), 무왕부부가 묻혔다는 익산 쌍릉, 서동대왕과 관련이 있는 용샘 등 백제 30대 무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이 산재해 있다.
한편 오금산의 중봉(中峰)에는 고구려 멸망후 왕족 안승(安勝)이 신라의 도움으로 세웠다고 하는 보덕국(報德國)의 성터라고 하는 보덕성지(報德城址, 사적 제92호)가 남아 있다.
또한 오금산의 남쪽 기슭에는 낮으막하게 뻗어 내린 구릉의 중간지점에 익산쌍릉(益山雙陵, 사적 제 87호)이 있는데 '여지승람'이나 '금마지'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 무왕과 그 부인인 선화공주의 능이라고 한다. 이와같이 오금산은 여러 곳에 백제시대, 특히 무왕과 관련된 설화가 아주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 당산(唐山)
당산은 팔봉동 당산마을에 있는 산으로, 산이라고 하기 보다는 얉은 구릉지로 지금은 거의 개간되어 농경지로 활용되고 있다. 옛부터 이 곳은 마을제나 이 지방 기세배(旗歲拜) 놀이 등의 마을 공동행사를 행해오고 있다. 금마지에 의하면 이 산에서는 “익산 삼기(三奇)”의 하나인, 1년에 세 번 결실을 맺는다는 삼률(三栗) 밤나무가 있는데, 이 밤나무를 다른 산으로 옮기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는 이와 같은 밤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 팔봉산(八峰山)
팔봉산은 당산(唐山)의 서쪽에 있는 원 팔봉 뒷산으로 여덟개의 봉우리가 이어져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팔봉산은 ‘지네가 꿈틀거리는 모양 같다’고 하여 지네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금마지?에 의하면 이 산에는 “익산 삼기”중의 하나인, 뜯어도 뜯어도 새순이 올라오는 순송(筍松)이 있다고 한다.
▒ 천호산(天壺山, 일명 文殊山)
? 소재지 :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천호산은 일명 문수산이라고도 부르는데, 무주의 덕유산의 한 지맥이 서쪽으로 뻗어 이룬 산이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표고 500m 정도이다. 이 산은 석탄석과 여석(礪石)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여기에서 나는 돌들은 다듬이 돌이나 숫돌, 대리석 등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이 산에는 길이 800여m에 달하는 종유동굴이 있는데, 1965년 이 지역의 황성호(黃聖浩) 목사가 지금까지 신비에 싸여 있던 동굴 내부를 답사하여 많은 종유석(鐘乳石)과 석순(石筍), 석주(石柱) 등이 있는 황홀하고 아름다운 동굴임을 밝혀내고 천호동굴(天壺洞窟)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동굴은 현재 천연기념물 제 18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 동굴에 대해서는 제2장 제12절 <천연기념물>편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천호산의 산봉에서 태성리 계곡쪽으로는 둘레가 약 4km에 달하는 석성이 남아있는데, 이곳에서 철모(鐵牟) 등의 유물이 몇 점 발견된 바 있다.
이 산의 서쪽 기슭에는 문수사(文殊寺)와 백운사(白雲寺), 백련암(白蓮庵 )이 자리하고 있고, 산의 서쪽 부분 전면은 여산송씨(礪山宋氏)의 종중산이 되어 있는데, 그 산에는 여산송씨 시조인 송유익(宋惟翊)의 묘와 비갈(碑碣)이 남아 있다.
▒ 당산(堂山)
? 소재지 :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당산(堂山)은 여산면 여산리 동북방에 있는 높이 150m 정도의 산으로 산 위에는 둘레가 약 7정(町)에 달하는 석성 터가 있으며, 그 안에는 성황사(城隍祠)가 있었던 자리가 남아 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이 산의 정상에서 기우제나 마을공동제사 등이 행해졌다고 하며, 여산에 도호부(都護府)가 설치되었을 때에는 사형수의 사형집행이 이 곳에서 있었다고 한다.
▒ 낭산(朗山)
낭산은 미륵산의 뒤편 10리 정도의 거리에 낭산면 낭산리와 석천리에 걸쳐 있는 높이 200m정도의 산이다. 낭산리마을의 동쪽 산 위에는 둘레가 약 8정(町)에 달하는 석성이 있는데, 낭산성(朗山城)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성에 대한 호칭은 산 아래의 마을마다 각기 달라서 마한성(馬韓城), 북성(北城), 망성(望城), 혹은 마한(馬韓)이라 호칭하기도 한다.
이 산 아래에 있는 석천대(石泉臺)는 계곡과 암반 등이 있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어 '금마지'에서는 “석천대기준유상처(石泉臺箕準遊賞處)”라 하여 옛 마한국을 세웠다고 하는 기준왕이 와서 놀던 곳이라 하였다.
▒ 와룡산(臥龍山)
와룡산은 용화산의 북쪽인 낭산면 낭산리에 있는 표고 150m 정도의 산으로 일명 무학산(舞鶴山)이라고도 하는데, 산의 형국이 마치 용이 누워 있는 산 같다하여 와룡산(臥龍山)이라 칭한다.
이 산의 남쪽 기슭에는 구한말의 친일파의 거두인 이완용과 그 아들의 묘가 있다. 이완용은 자신이 죽어서 들어갈 무덤자리를 잡아놓고 그 산 아래에 작은 못(池)을 파고 암반을 만들어 후손들의 휴식처까지 호사스럽게 만들어 놓았으나 8.15 광복이 되자, 그의 비석을 헐려 팔려 나갔고 또 근년에는 그의 후손들이 나라에 속죄하는 뜻에서 이완용 부자의 묘를 파헤쳐 태워 날려버렸다고 한다.
이 산은 경관도 아름다우며 옛부터 풍수학상 명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하기에 이완용이 이곳까지 와서 자신의 무덤자리를 정해 놓은 것이라 본다.
'용안구지'에는 승려 도선과 원나라 사신의 것이라고 전하는, 와룡산을 주제로 하는 시 두편이 실려있다..
※ 여기에 첨언하면, 이완용의 비석은 오석(鳥石)으로 된 크고 좋은 것이였었는데 상인의 손에 넘어간 뒤에 이를 다시 다듬어서 뒷날 삼기면 현동에 있는, 한말의 애국지사이요, 대 유학자인 간재 전우(田愚) 선생의 사당을 건립할 때 세운 묘비로 팔려 갔다고 한다.
▒ 황등산(黃登山)
황등산은 황등면 황등리의 평야에 표고 100m 정도의 우뚝 솟은 돌산으로 근래에 들어와 산을 이루고 있는 화강암의 개발로 인하여 그 형태 조차 무너져 가고 있다.
산 위에는 석반 위에 흙으로 쌓은 작은 토성 터가 남아 있으며, 그 안에 1923년에 세운 황룡암(黃龍庵)이 얼마전까지 있었으나 화강암 채굴과정에서 없어졌다. 이 이외에도 이곳에는 건덕정(健德亭)이 있다.
백제시대에는 이 산의 남쪽 기슭과 북일면에 있는 도치산(道致山)을 연결하여 요교호(腰橋湖)를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 함라산(咸羅山)
함라산은 함라면 금성리와 함열리에 걸쳐 있는 표고 240m의 산으로 함라의 주산(主山)이다. 이 산줄기는 금강의 연안에 맞닿아 있어서 이 함라산의 대령로(大嶺路, 곰개재)를 넘으면 바로 웅포에 닿는다.
산의 서편에 있는 산봉을 소방봉(所方峰)이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옛날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어, 서쪽으로 군산의 오성산(五聖山) 봉수와 동쪽으로 용안의 광두원(廣頭院) 봉수와 서로 응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또 산의 서쪽에는 용추(龍湫)라고도 부르는 묵정(墨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우물의 둘레가 5천 척이고, 깊숙하고 검푸르며 모래와 돌이 모두 검기 때문에 묵정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또 전하는 바에 의하면 가뭄이 들 때에 이 곳에서 비를 빌면 응험이 있었다고도 하였다.
또 이 산의 위에는 둘레가 약 12정(町)에 달하는 석성 터가 남아 있다.
▒ 숭림산(崇林山)
함라산의 북쪽에 이어져 있는 산을 숭림산(崇林山)이라 부르고 있다.
이 산의 동쪽 성당면 갈산리 목사동(木寺洞)에는 산의 지형이 풍수지리에 의하면 마치 선인(仙人)의 춤추는 소매(舞袖)와 같은 형국이라 하여 옛날부터 지사(地師)들의 출입이 많은 곳이다. 이 곳에는 이조판서를 지낸 남궁찬(南宮璨)의 묘가 있는데, 묘 앞의 석물 가운데 장군석이 특이한 무인상(武人像)으로 조각되었다.
이 산의 북쪽 웅포면 송천리 심곡에는 숭림사(崇林寺)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절에는 보물 제825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보광전과 지방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된 청동은입인동문향로(靑銅銀入忍冬文香爐)를 비롯하여 목어(木魚), 밥구수(木製) 등의 훌륭한 불가유물들이 전하고 있다.
또 이 산에는 용흥사지(龍興寺址)와 성불암지(成佛庵址) 그리고 임해사지(臨海寺址)가 남아 있다.
▒ 동지산(冬至山)
동지산은 함열역 앞의 함열읍 동지산리에 있는 표고 80m 정도의 얕은 산이나 주변이 넓은 함라평야가 펼쳐져 있기에 우뚝 솟아 보인다. 함열읍의 마을은 이 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이 산의 남쪽에는 함열중학교와 함열종합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 용산(龍山)
? 소재지 : 익산시 황등면 용산리
함열에서 남쪽 방향으로 약 10리정도의 거리에 얕으막한 안산(案山)인 용산이 있다. 여기에는 용산성(龍山城)이라 불리우는 둘레가 약 12정(町)에 달하는 석성이 있는데, 지금까지도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가 완연하게 남아 있다. 이 성은 '여지승람'의 함열현조에 “용산성(龍山城)은 ……조선 세종 경신년에 함열현의 관아를 옮기기 위하여 쌓았으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관아를 옮기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440년에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 이 산의 남서쪽에는 고려이후의 교통역이었던 재곡역(才谷驛)의 옛 터가 있다.
▒ 석산(石山)
함열읍의 동편에 표고 100m정도의 산 봉우리가 두곳에 솟아 있는데, 하나는 석산(石山, 돌산)이라 하고 하나는 흘산(屹山)이라 칭하고 있다.
이 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이어서 근래에 들어와 다량의 석재를 캐어냄에 따라 산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다. 이 흘산에는 ‘장수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하나 있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에 한 장수가 12개월만에 태어났는데, 세상에 나와보니 세상이 하도 어지러워 자기의 뜻을 받아주지 않자 부하 장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좋은 세상이 돌아오면 다시 나온다면서 이 흘산의 바위속으로 들어갔다 한다. 뒤에서 옷자락을 잡고 만류하는 사람 때문에 돌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고 지금도 조금 틈이 열려있다”는 내용이다.
▒ 어래산(御來山)
? 소재지 : 익산시 웅포면 신목리
어래산(御來山)은 함라산의 서쪽 방면에 있는 산으로 군산시 나포리와 익산시 웅포리의 경계선상에 있는 높이 132m의 비교적 낮은 산이다. 이 산은 금강 연안에 맞닿아 있으며, 산의 정상에는 어래산성 터가 남아 있다. 이 산성은 둘레가 490m의 돌로 쌓은 성인데 읍지에서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공격할 때에 쌓은 보루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아마도 소정방의 침입 이전에 이미 금강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하여 미리 쌓아 둔 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능선에는 이밖에도 도청산성(都廳山城 : 둘레 약 300m)과 궁원산성(宮元山城 : 둘레 약 655m) 등의 산성이 줄지어 있으니 백제에게 있어서 이 지역은 요새가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성을 쌓아 두었던 것인데, 당나라 군사가 공격하여 군대를 주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 무학산(舞鶴山)
무학산은 용안면의 북방에 있는 산으로 이 지역의 주산(主山)이며, 모산(母山)이다. 산 정상에 올라 가서 아래를 바라다 보면 서쪽으로는 금강이 굽이쳐 흐르고, 동쪽으로 푸른 들판을 건너 멀리 미륵산이 바라다 보인다. 이러한 산의 경관으로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용안읍지'에는 도거원(都擧元)과 박금(朴?, 조선 선조때의 문신)의 무학산을 주제로 하는 시구가 전하고 있다.
(都擧元의 詩) ( 朴?의 詩 )
遠水西流急 孤雲北去遲 一大丈夫天地中 來臨舞鶴最高峰
天風颯兩腋 隨興續題詩 西歸欲獻平戎策 却恨君門隔萬重
▒ 칠성산(七城山)
칠성산은 용안면의 서쪽 무학산의 뒤편에 있는 낮으막한 산으로 이 산 역시 금강 연안과 맞닿아 있어 그 경관이 아름답다. ?용안구지?에는 “칠성산에는 옛날부터 석불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고 하여 이 산에 잘 조성된 마애석불이 있었음을 전한다. 이러한 사실은 영조때의 문신 박동상(朴東翔)이 지은 석불에 대한 시에서도 잘나타나 있다. 지금 이 산에는 일신사(日新寺) 터라고 하는 곳만이 남아 있다.
흔히 이 칠성산 아래의 금강을 ‘칠산(七山)바다’라고도 부르고 있다.
▒ 은입산(銀入山)
은입산은 용안면에서 북쪽으로 5리정도의 거리에 있는 무학산의 동편에 자리하고 있는 낮으막한 산이다. 이 주변의 산들이 그렇듯이 이 산 또한 금강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경치가 수려한 것이 특징이다. 이 산은 산세가 마치 여자의 손길과 같이 부드럽게 퍼져있는 산이라고 하여 산 이름을 “은입산” 이라 하였다고 한다. 산의 경치가 매우 뛰어나 옛부터 시인 묵객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용안구지'에는 이재(李縡, 조선 숙종조의 문인), 김중남(金重南)의 은입산을 제목으로 하는 시가 전해오고 있다.
▒ 용두산(龍頭山)
? 소재지 : 익산시 용안면 용두리
용안면에서 북쪽으로 8리 정도의 거리에 있는 용두산은 굽이쳐 흐르는 금강 연안에 바로 맞닿아 있는 산이다. 산의 형상이 높고 길게 굽어 있기에 이 모양이 물 깊은 데로 빠져 들어가는 용의 머리와 같다 하여 용두산(龍頭山)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이 산은 금강의 연안에 임해 있기에 경관이 좋아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산이다. '용안구지(龍安舊誌)'에는 조선시대 중종때의 문인 소세양(蘇世讓)과 박금(朴?)이 지은 시가 전해오고 있다. 이 산에는 자명암(自明庵) 터와 목련암(目蓮庵) 터가 있다.
▒ 광두산(廣頭山)
? 소재지 : 익산시 용안면 화실리
용안면에서 동쪽으로 13리의 거리에 있는 광두산은 해발 150m정도의 산이다. 이 산의 정상에는 광두원산(廣頭院山) 봉수대(烽燧臺) 터가 남아 있다. 이 봉수대는 서쪽으로 함열의 소방봉수대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충청도 강경산(일명 黃山) 봉수대에 응하였다.
▒ 배산(杯山)
? 소재지 : 익산시 북일동
높이 120m 정도의 산인 배산은 옥구평야의 주봉이 되는 산으로 일명 옥성산(沃城山)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연주산(聯珠山)이라 칭하기도 한다. 이 산에는 연주정(聯珠亭)과 우락암(?樂巖), 그리고 우령대(禹靈臺) 등이 있으며, 산의 남쪽 기슭에는 연일정씨(延日鄭氏)의 세천(世阡)이 있고 연일정씨의 사당인 백산원(柏山院)이 있다. 이 산은 서쪽으로 펼쳐지는 넓은 임옥평야(臨沃平野)의 들판 위에 우뚝솟은 산으로 그 경승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익산시내에 위치하고 있는 유일한 산이기에 옛부터 시인 묵객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이 산은 봉우리가 두개가 있는데 그 경치가 뛰어나 7가지 별명이 붙어 있음을 ?익산구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배산은 북일면 모인리에 있는데, 산에는 상?하 두 봉우리가 있으며, 7가지 이름이 붙여 있다. 상봉(上峰)에는 첫째로 산봉오리가 마치 면류관 덮개(?)가 비틀거리는 모습 같아서 어떻게 보면 구슬끈이 갈라진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이어져 있어서 마치 구슬을 꿰 놓은 것 같다 하여 명주산(聯珠山)이라 하였으며, 둘째는 산의 푸른 비취색이 위로 하늘에 닿아서 사시사철 그 색이 변하지 않는 고로 백산(栢山)이라 하고, 셋째로는 산의 암석들이 층층히 쌓아 있어서 마치 쌀 가마니를 쌓아놓은 것 같다하여 척산(尺山)이라 하고, 네번째로는 옥야현때에 이 산이 주봉(主峰)이 되었다 하여 옥성산(沃城山)이라 하고, 다섯째는 산이 평야지의 한 가운데에 솟아 있어서 마치 옥잔(玉杯)이 금반(金盤) 위에 있는 것 같다 하여 배산(杯山)이라 한다. 그리고 하봉(下峰)에 대하여는 첫째로 옛날 중국의 하우씨(夏禹氏) 9年에 치수(治水)를 할 때에 이곳을 근거로 하였다하여 우령대(禹靈臺)라 말하고, 둘째로는 산의 반석이 평평하기가 가히 만명이 같이 앉아서 놀 수 있을만큼 넓다하여 우락암(?樂巖)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 춘포산(春浦山)
? 소재지 : 익산시 춘포면
춘포면의 넓은 평야지에 우뚝 솟은 높이 100m정도의 낮은 산으로 일명 봉개산이라고도 부른다.
산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나 주변이 모두 평야지이기에 정상에 오르면 주변이 훤이 바라다 보이며, 이 산 부근에는 옛부터 많은 취락이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돌도끼, 돌칼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 황각동(黃閣洞) 계곡
?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황각동
신용리 황각동의 용화산 서쪽 기슭에 있는 이 계곡은 익산구지에는 익산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고 있으나 지금은 계곡 주위의 환경이 많이 변하여져 그 경치가 차차 퇴색하여지고 있다.
익산구지에는 “황각동에는...높은 산들이 첩첩이 쌓이어 마치 병풍을 펴놓은 듯 둘러 있고 계곡은 굴곡과 기복이 심하고 기암괴석이 곳곳에 산재하여 있는데, 봄에는 꽃, 가을에는 단풍, 여름에는 구름, 겨울에는 눈의 아름다운 계곡의 모습은 글로는 다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하기에 옛부터 많은 시인들이 이 경치를 찬미하여 많은 시구를 남겼고, 그들은 “이 계곡에 ‘황각동(黃閣洞)’, ‘유상곡수(流觴曲水)’ ‘하서대(荷鋤臺) 등의 문구를 새겨 놓았다”고 황각동 계곡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이 계곡 암반에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이 이곳은 사계절 그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냈던 익산에서 가장 경치가 좋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용화산동굴(龍華山洞窟)
? 소재지 :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샘골
용화산 동굴은 원수리 샘골 용화산 동쪽 기슭의 중턱에 20m쯤 되는 바위벼랑이 있는데 그 바위벼랑의 중간지점에 있는 넓이 30평 정도의 자연석굴이다.
굴 내부의 높이는 2m 가까이 되고, 굴의 깊이는 10m쯤 된다. 굴내에는 물이 솟아나는 작은 샘이 있어서 이 동굴을 들르는 사람들에게 약수로 애용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갈라진 바위덩어리 사이에 이루어진 굴이기에 그 깊이가 현재의 위치와는 반대편이 용화산 서쪽 기슭에 있는 상원사(上院寺) 마을앞의 작은 동굴과 서로 통하는 굴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그 근거로는 이쪽 굴에서 불을 때면 그 연기가 저쪽 굴에서 나온다는 것 등을 들고 한다.
굴은 높이 10m쯤 되는 바위벼랑에 있으나 바위벼랑에 기생하고 있는 소나무 뿌리를 이용하여 굴 안으로 출입할 수 있게 통로를 만들었다.
▒ 투구바위(兜巖)
?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미륵산의 남쪽
투구바위(일명 兜巖)는 미륵산 산꼭대기 장군봉에 솟아있는 높이 3m쯤 되는 바위덩어리를 말하는데, 이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장군이 투구를 쓴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바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사방의 경관은 실로 매우 아름답다. 남쪽으로는 멀리 김제 만경평야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옥구평야를 건너 충남의 한산(韓山)이 희미하게 보이며, 북쪽으로는 계룡산이, 동쪽으로는 힘차게 뻗어있는 노령산맥의 줄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산의 꼭대기에는 근래에 들어와 초단파중계소(마이크로웨이브)와 T?V중계탑, 그리고 검찰청 단파 중계소(檢察廳短波中繼所)가 들어섰다.
▒ 거북바위(북바위, 뜬 바위 : 浮石)
?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신룡리
신룡리 뒷산 기슭에는 두 개의 자연석이 위 아래로 포개져 있는 뜬바위라는 돌이 있다. 육안으로는 윗돌이 떠 있는지를 식별하기 힘들지만 명주실을 두 바위 사이에 넣고 양쪽에서 잡아 바위를 통과하도록 잡아당기면 실이 통과한다고 한다. 이 바위에 얽힌 전설은 여러가지가 있으며, 그 전설에 따라 거북바위 혹은 북바위, 뜬바위 등으로 명칭도 다양하게 불리워지고 있다. 윗돌의 길이가 760cm, 높이가 258cm이며, 밑돌은 길이가 833cm, 폭이 680cm이다.
윗돌의 상층면 중앙에는 용의 모양이 새겨져 있고 옆에는 길이 70cm, 폭이 50cm, 깊이 7cm 정도의 방형 웅덩이가 파여져 있는데, 이는 아마도 종교적인 제사의 흔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 제석(蹄石)
? 소재지 :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제석은 왕궁리 왕궁평 성내에 있는 괴석으로 마치 말이 밟은 것 같이 전면이 움푹 파여져 있는 돌이다. 이 돌과 관련된 전설에 의하면 백제 무왕이 신마(神馬)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이 곳에 왕궁을 건설할 때에 무왕이 타고 온 신마가 밟은 자리의 흙이 굳어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이 돌은 성내의 상부대관(上部大官)의 건물 앞의 정원석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자리에는 원래 제석을 포함하여 약 50여점의 괴석들이 있었던 것을 금마초등학교로 옮겨놓았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졌다.
▒ 궁평(宮坪)
? 소재지 :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궁평은 속칭 ‘궁들’이라고도 불리워지는데 왕궁리 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는 왕궁성터 이외에도 백제 무왕때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는 제석사 터 등이 남아 있다. 지금도 제석사탑지라고 하는 곳에는 토루(土壘)가 남아 있고, 그 당시에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탑의 심초석이 토루 위에 2개로 절단된 채 놓여 있다. 지금은 심초석이 있는 주변이 모두 민가나 전답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발견되고 있는 옛 기와조각들은 이곳이 과거에는 성왕했던 궁사(宮寺)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궁평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왕궁과 밀접한 곳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여기저기에서 왕궁과 관련된 설화들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 솥밭(釜畓)
?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익산 미륵사지 뒷편에는 솥밭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여지도서? 익산 고적조에 보면 “솥밭은 미륵사 뒷쪽에 있는데, 그 곳에는 쇠솥이 묻혀있다. 지금 사람들이 그 위에 곡식을 심는데, 그 둘레가 가히 한말의 씨를 뿌릴만 하며 사람의 힘으로 그것을 들어내지 못한다”라는 것이다.
이 기록대로 이 규모의 솥이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으나 아마도 미륵사라고 하는 절이 백제시대 최대 규모의 가람이었던 만큼 많은 승려가 살았을 것이며, 이에 따라 큰 솥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렇게 규모가 크다는 것은 곧 그만큼 미륵사의 규모가 성대했음을 의미하는 전설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 금강(錦江)
금강은 우리나라 6대 하천 중의 하나로서 멀리 무주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충청북도, 충청남도의 여러 지류들을 모아 굽이굽이 흐르다가, 공주, 부여, 강경 등지를 거쳐서 익산시의 서쪽 경계를 돌아,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장장400여km에 달하는 큰 하천이다. 이 고장 익산지역에서는 서북쪽 경계인 망성면, 용안면, 성당면, 웅포면을 스쳐서 흘러들어가는 하천이다.
이 하천은 옛날 삼국시대에는 백강(白江)이라 불리워졌으며 그 하류인 웅포(熊浦) 부근에 와서는 웅포강(熊浦江)이라 칭하기도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공주, 부여 부근에서는 백마강이라 부르고 있다.
이 강 유역은 산과 들을 끼고 있어서 농산물의 생산이 풍성한 지역이다. 근년에는 이 강물을 끌어다가 인근 유역의 농사에 이용하고 있는데, 옛날부터 관개시설로써 뿐만이 아니라 교통수단으로도 크게 활용되었던 하천이다. 백제 멸망 당시 중국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은 대군을 이끌고 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 부여 사비성까지 침입하였으며, 근래에도 군산항에서 부여까지는 선박운수가 행해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이 강이 교통로로서도 이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익산지역에 있는 금강 포구인 곰개(熊浦)는 옛부터 서해 해산물의 집산지가 되었으나 일제시대에 들어와서 일본인들에 의하여 황산포구(黃山浦口, 江景)가 신축되면서 그 해산물의 상거래 등이 강경으로 옮겨갔다.
웅포의 강안(江岸)이 아름다운 산악과 곧 바로 맞닿아 있어서 이 웅포 유역의 경치 또한 일품이다.
▒ 만경강(萬頃江)
만경창파(萬頃蒼波) 넓디 넓은 전북평야의 젓줄 역할을 하는 대동맥인 만경강은 익산지역의 동남쪽 춘포면과 오산면의 경계를 흘러 서해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멀리 노령산맥의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류인 고산천, 소양천, 전주천, 삼천 등의 하천을 거쳐 삼례읍(參禮邑)의 동쪽에서 합류하여 완주군, 익산군, 김제군, 옥구군 등 많은 지역을 통과하는 전체 길이 98km에 달하는 제법 긴 하천이다.
이 강의 상류에 있는 4개의 거대한 저수지는 수량이 풍부하여 전북평야 북반부의 용수원이 되고 있다.
삼례동방에서 여러 지류가 함류하여 이룬 만경강은 심한 굴곡을 이루어 하류에서는 실로 강폭이 6km가 넘는 넓은 나팔모양의 하천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 만경강이 지금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일제시대 관개사업의 일환으로 제방을 쌓아서 생긴 것으며 그 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온 까닭으로 익산지역이 고대사회에 있어서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도천(道川)
도천(道川)은 용화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데, 금마면을 거쳐서 부상천(扶桑川)과 궁평천(宮坪川)을 합류하고 신방교(新芳橋)를 거쳐 춘포면 횡탄(橫灘)의 만경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금마들을 흘러가는 이 하천을 흔히 옥룡천(玉龍川)이라고도 부르며, 신방교(新芳橋)를 지나서는 익산강(益山江)이라 부르고 있다. 옥룡천이나 부상천이라는 이름은 금마가 왕도(王都)라고 하는 설과도 의미를 같이하는 명칭이다. 옛날에는 이 하천의 물이 풍부하여 왕궁평 근처에 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하나 지금은 거의 메말라 있는 상태이다.
▒ 우북천(紆北川)
우북천(紆北川)은 천호산에서 발원하여 왕궁면 장암마을 앞을 거쳐 입석다리를 지나 춘포면 횡탄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이다.
옛날에는 물의 양이 많아서 장암마을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이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다. 한편 이 하천의 하류인 춘포면 불당리 앞에는 사자문연(猪子門淵)이라고 쓴 큰 못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지명만이 전한다.
▒ 두천(豆川)
두천(豆川)은 미륵산의 서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금마면 용진리와 팔봉면 두천리를 거쳐 황등면의 연전평(蓮田坪)으로 흘러 들어간다. 옛날 황등제가 있었을 때에는 요교호로 흘러가던 하천이였다.
이 하천유역은 높은 산이 없는 준 평원지대로 하천의 밑바닥에 토탄층이 있어서 다소 파내다 중지하였다.
▒ 금천(錦川)
금천(錦川)은 미륵산의 서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삼기면 간촌리에서 구문천(九文川)과 장항천(獐項川)과 합류하여 황등면 연전평(蓮田坪)을 지나 신창진(新倉津)으로 흘러가는 하천이다. 이 하천 역시 황등제가 있었을 때는 요교호로 흘러 들어가던 하천이다. 이 하천의 유역에서 토탄(土炭)이 생산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하천의 지류인 구문천 유역에는 옛날에 속칭 ‘번지(藩池)’라고도 불리워지던 상실연(上失淵)이라는 큰 못이 상?하 둘이 있었다고 하는데, 언제 없어졌는지 지금은 그 터만 지명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여지승람'에도 못이 없어진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황등제가 없어진 후에 생긴 못으로 짐작이 되나 없어진 시기에 대하여서는 알 도리가 없다. 이 하천의 하류지역은 황등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 독자천(篤子川)
독자천은 천호산에서 발원하여 여산면을 거쳐 망성면의 오산천(烏山川)과 합류하여 강경의 황산강(黃山江)으로 흘러가는 하천이다.
이 하천은 흐름도 느리고 수량도 풍부하여 옛날에는 강경포 깊숙한 곳까지 많은 배가 드나들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강경에서 금강의 물을 간문(間門)으로 막고 있어 수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 오산천(烏山川)
오산천은 용화산에서 발원하여 여산면 원수리와 제남리를 거쳐 독자천(篤子川)에 이르러 합류하는 하천이다.
이 하천의 해안은 옛날 서울에서 전주로 통하는 대로(大路)가 있으며, 여산면 제남리에는 남원부사(南原府使) 윤모씨가 길을 가던 도중 꿈에서 탑을 보아 그에 연유해서 세웠다고 하는 남원사(南原寺)가 있다.
▒ 횡탄(橫灘)
? 소재지 : 익산시 춘포면 용연리
횡탄은 용연리의 사천촌(寺川村) 앞의 삼천(三川)의 하류지역을 부르는 명칭이다. 만경강의 해조(海潮)가 이곳까지 들어옴으로써 옛날에는 많은 상선(商船)들이 기름을 가득 싣고 들어왔다고 한다.
이 곳은 익산강의 물과 삼천의 물이 합류되는 곳으로 물살이 사납기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 장연(長淵)
? 소재지 : 익산시 춘포면 용연리
장연은 춘포면 용연리 횡탄(橫灘) 부근에 있었던 큰 연(淵)으로 과거에는 길이가 10리나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하천이 되고 말았다. 이 장연에는 부용(芙蓉)과 마름(菱?)이 가득하였고 겨울에는 기러기와 오리 거위등이 많이 날라와서 사계절 내내 특색있는 운치를 나타냈다 한다.
소영복(蘇永福)의 집안 소식지에 말하기를 “이 장연(長淵)은 광해군때 큰 가뭄이 거듭됨으로써 이 부근의 넓은 들이 황폐해져서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 요교호 유지(腰橋湖 遺址, 黃登堤)
익산 시내에서 황등쪽으로 이십리쯤가면 ‘허리다리(腰橋)’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옛 삼국시대에 황등산과 북일면의 도치산과를 막았던 황등제의 유지이다.
이 황등제 안에는 오늘의 삼기면(三箕面)과 팔봉동(八峰洞)?황등면(黃登面)의 넓은 들을 차지했던 요교호(腰橋湖, 일명 龜橋湖)가 있었다.
'문헌비고'에서는 이 호(湖)를 ‘구교호(龜橋湖)’라 하였으며 호의 둘레가 25리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 요교호는 김제 벽골제(碧骨堤)와 고부의 눌제(訥堤)와 더불어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제언으로써 3호(三湖)의 칭호를 받았을 뿐 아니라, 호남(전라도)과 호서(충청도)라는 명칭의 유래도 이 호(湖)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에서는 “김제의 벽골제와 고부의 눌제, 그리고 익산 전주의 사이에 있는 황등제는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제언으로써, 이들은 나라 한쪽에 큰 이익을 주는 제언(堤堰)이므로 국력을 크게 기울여 축조한 것이다. 이 세곳의 제언을 축조해 놓으면 노령산맥 이북의 땅은 영원히 흉년이 없게 되는 것이며 호남지방의 만물은 가히 고목이 소생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또 노령이북의 땅이 영원히 흉년이 없게 되면 바로 온 나라 만세에 큰 이익이 되는 것이니 이 나라 조세의 대부분이 호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 왕궁정(王宮井)
? 소재지 :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왕궁평성(王宮坪城)
기록에 의하면 왕궁정은 왕궁리 오층석탑 북방 2보 지점에 있었다고 하는 옛 우물터이지만 지금은 그 터 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여지승람에 “왕궁정이 군의 남쪽 5리 정도에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기를 옛 궁궐 내에 그 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금마지에서는 “왕궁정이 탑의 북쪽 2보정도의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965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실시한 왕궁리 오층석탑의 해체복원공사 과정에서 탑의 기초부분을 발굴했을 때에 석탑의 북방 4m지점에서 옛 우물자리로 보이는 유구가 발견되었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8년조에는 “8년 6월 대관사의 우물물이 피빛으로 변하여 금마군지로 흘렀는데 그 넓이가 5보나 되었다”라 한 백제멸망에 관한 이변을 기술하고 있는데, 뒤에 오는 <사찰 및 사지>의 대관사지 항목에서 기술하는 바와 같이 금마군의 대관사(大官寺)는 이곳 왕궁평성에 있었다고 믿어지니, '삼국사기'에 보이는 ‘대관사의 우물’이란 ?여지승람?에서 말하고 있는 ‘왕궁정’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왕궁정은 한 나라의 멸망을 예견하는 이변을 일으켜, 그 이변이 신라에 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이름있는 옛 우물인 것이다.
▒ 미륵약수(彌勒藥水)
?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약수는 미륵산의 남쪽 기슭 노상마을 물탕골에 있는 약수를 말한다. 10여m의 바위절벽사이에서 솟아나오는 이 약수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수량이 줄지 않고 솟아나고 있으며, 여름에는 매우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과 같이 따습다고 한다. 이 약수는 모든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소문이 나서 인근 주민들이 몰려오고 있으며, 특히 매년 음력 5월5일 단오날과, 칠월칠석, 칠월 15일, 그리고 8월 15일이 되면 이 약수를 찾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 용샘(龍泉)
? 소재지 : 익산시 석왕동 오금산 아래
용샘은 백제 30대 무왕인 서동이 어렸을 때 오금산 아래에서 살면서 마시고 살았다는 샘으로서, 원래 가공석으로 우물모양으로 축조된 것이었다고 하는데 1970년대에 이루어진 새마을 사업으로 그 원형을 잃기는 하였으나 지금도 샘 주변에는 가공한 흔적이 있는 돌들이 남아 있다. 이 용샘의 남쪽 150m거리에는 작은 용샘이 있는데, 두 곳 모두 거의 방치된 상태에 있다.
한편 이 용샘의 부근에는 또 한 곳의 서동과 관련한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용샘의 북쪽에 자리한 오금산(五金山)이다. 이 산은 일명 보덕산이라고도 하는데, 오금산이라고 하는 명칭이 붙은 것은 어린 시절 이 곳에 살던 서동이 이 이 산에서 금 다섯덩어리를 캤다고 하는데서 유래한다.
▒ 꿩샘(雉泉)
? 소재지 : 금마면 서고도리 오금산
꿩샘은 서고도리 오금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우물로서, 산골의 바위사이에서 솟아나는 이 우물물이 피부병에 약효가 있다 하여 찾는 사람이 많다. 금마지에는 이 샘과 관련하여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옛날에 꿩 한 마리가 다리에 상처를 입고 날라 와서 이 우물에 두어차례 목욕을 하고 가더니 마침내 다리가 다 나아 가지고 날라갔다”고 하여 꿩샘(雉泉)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
▒ 뚜껑샘
?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서계마을 오금산
뚜껑샘은 오금산 동쪽 기슭의 미륵사로 가는 길가에 있는 옹달샘이다. 우물물이 바위틈에서 솟아나기 때문에 우물터가 매우 좁아서 우물물을 마시려는 사람이 갓을 벗어 놓으면 우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뚜껑샘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 우물은 가뭄에도 줄지 않고 많은 물이 솟아나는 우물인데, 약효가 있어 이 물을 먹으면 오래 산다고 하여 이 지역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 냉정(冷井)
?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독정마을
금마지에 기록된 냉정(冷井)은 두 개가 있는데, 여기서 살펴볼 냉정은 미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독정마을 뒷산에 있는 우물이다. 바위사이에서 솟아나오는 우물로 이 우물물로 목욕하면 머리 부스럼(頭風)에 좋다고 ?금마지?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 우물에 대하여서는 부근에 있는 거북바위(북바위)와 황사(黃紗) 바위, 그리고 가마바위와 함께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즉 전설에 의하면 “음 12월 그믐날 밤에 선녀들이 가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이 북바위에서 황사(黃紗)를 짜고 난 뒤 이 우물에서 목욕을 한 다음 가마바위에 놓은 가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는 내용이다.
▒ 한정(寒井)
?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누동마을
한정은 동고도리 누동마을에 있는 냉천(冷泉)으로 ‘한샘’이라고도 부르는데, 우물의 깊이는 채 50cm도 못되며, 평지에서 물이 솟아나오는 우물로써 큰 가뭄이 들어도 우물물이 줄어들지 않고 계속 솟아나와 이 부근의 여러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물물이 여름에는 매우 차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한정(寒井, 한샘)이라 칭한다고 한다. 또한 이 우물물은 풍토병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약수로도 이용하고 있다.
▒ 약정(藥井)
? 소재지 : 익산시 성당면 장암리
약정은 성당면 장암리에 있는 우물로 옛부터 피부병에 영험한 효력이 있는 우물이라고 전하여 이름도 약정이다. 여지승람에도 이 약정(藥井)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 다가천(多佳泉)
? 소재지 : 익산시 모현동
익산시 모현동에 위치한 다가천은 현재는 활용되지 않고 있으나 옛날에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우물이다.
익산구지에는 “(다가천) 우물은 수원이 매우 길어 가히 천만 가정의 식수로도 활용할 수 있는데, 이 우물물은 여름철에는 물의 차기가 마치 얼음과 같고, 겨울에는 따뜻하기가 마치 온탕(溫湯)과 같다. 또 이 우물에는 기이하게 농사의 풍흉을 미리 알아맞추는 풍년초(豊年草)가 있는데, 이 풀이 10월부터 12월경 사이에 우물의 한 가운데에서 자라면 그 이듬해에는 빗물이 부족한 것을 알 수가 있고, 또 이 풀이 우물 변두리에 자라면 역시 그 이듬해에 빗물이 아주 많이 부족함을 알 수 있고, 또 한 가운데로부터 변두리까지 자라게 되면 그 이듬해에 빗물이 적당하여 가히 대풍이 들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니 이 풍년초가 우물 변두리에만 자라서 그 이듬해에 크게 흉년이 들 것으로 예상되면 100리 밖에서도 이 소문을 듣고 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지(寺址)
미륵사지(彌勒寺址)
? 소 재 지 :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23번지
? 지정번호 : 사적 제150호
익산지역의 문화유적 중에서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미륵사지는 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하여 동탑지 발굴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동탑지와 서탑지가 거의 같은 규모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품(品)자형 1탑 2금당식 가람배치설, 1석탑 2목탑설, 9층탑설 정도의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을 뿐, 허허벌판에 덩그마니 세워져 있는 오래된 탑 1기와 주변에 널려있는 석재들, 2기의 당간지주 등은 일반인들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1975년 원광대학교에서의 발굴조사 이후 그 규모의 방대함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1980년 문화재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하였고, 1994년까지 3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미륵사지의 규모와 의미 등이 거의 밝혀지게 되었다.
15여년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발굴조사 유구 면적은 70,810평으로 18,710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줄곧 주장되던 품(品)자형의 가람배치가 아닌 삼원병치식(三院竝置式) 3탑 3금당의 가람배치를 한 사찰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현재 미륵사지에는 원래의 서탑과 당간지주 이외에도 1992년에 복원된 9층의 동탑, 1997년에 문을 열어 340여점의 출토유물을 상설 전시하고 있는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대규모 관광객들을 유치할 수 있을 정도의 대규모 주차장 등의 부대시설 등이 이루어져서 몇년전에 비하면 괄목상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 제석사지(帝釋寺址)
? 소재지 :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궁평마을
현재 제석사지가 있는 위치가 제석사터일 것으로 확증되게 된 이유에는 몇가지가 있다. 우선 제석사지가 있는 왕궁면이 1913년 이전에는 제석면(帝石面)으로 불려졌으며, 1942년 국립공주박물관에 기탁된 ?제석사(帝石寺)?명의 명문와와 인동문와당(忍冬文瓦當)이 이곳에서 출토되었고, 그 후 석등 옥개석(屋蓋石) 등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근래에 밝혀진 중국 육조(六朝)시대에 육고(陸?) 등이 지은 ?관세음응험기?에서 “백제의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枳慕密地)에 천도하여 새로운 정사(精舍)를 지었다.”고 하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서 제석사의 창건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 대관사지(大官寺址)
? 소재지 :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480번지
대관사지와 관련한 기록으로는 백제가 망할 때 일어난 이변기를 적은 기사인 ?삼국사기? 무열왕 8년(661) 6월조에 “대관사의 우물 물이 피와 같이 붉게 되었는데, 금마군의 지류(地流)로 오보나 넓게 피가 흘렀다.(大官寺井水爲血 金馬郡地流血廣五步)”고 하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를 통하여 금마군에 ‘대관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과연 이 대관사가 어디에 세워졌는지에 대하여는 쉽게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도성안에서 있었던 이변기로서 대관사의 우물에서와 같은 이변을 싣고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왕궁정은 금마군의 남쪽 오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옛 궁궐의 자리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금마지에서는 “왕궁정은 탑에서 이십보의 거리에 발견된다.”라 하여 기록을 종합하면 왕궁정은 금마군의 남쪽 오리에 있는 옛 궁궐자리의 탑 부근에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오층석탑이 세워져 있는 옛 궁궐자리인 왕궁평성(王宮坪城)의 발굴조사에서 ‘관궁사(官宮寺)’, ‘대관관사(大官官寺)’ 등의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고 있어서 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옛 궁궐터에 있던 ‘왕궁정’이 곧 삼국사기에 보이는 ‘대관사의 우물’이며, 오층석탑이 있는 왕궁평성이 대관사지가 아닌지 연관지어 추정해 볼 수 있다.
*오금사지(五金寺址)
?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연동마을 부근
오금사지는 금마면 서고도리 연동마을 부근지역에 있었던 사찰로 전해지는데, 남아있는 기록으로 보아 확실히 존재하였던 사찰로 보이나 현재 그 절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 불우(佛宇)조에 의하면 “오금사는 보덕성 남쪽에 자리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이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마를 캐던 땅에서 갑자기 오금을 얻었다. 뒤에 서동은 왕이 되어 그 땅에 절을 짓고 오금사라 하였다.” 한다.(五金寺 在報德城南 世傳薯童事母至孝 堀薯蘂之地 忽得五金 後爲王創寺其地因名焉) 이와 같은 내용을 볼 때 오금사는 백제 무왕이 그의 어머니를 위해 지은 사찰임을 알 수가 있다.
▒ 사찰(寺刹) -석불사
* 석불사(石佛寺)
? 소재지 :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산220번지
석불사는 원래 대한불교화엄종에 속하던 사찰이었으나 1994년에 한국불교화엄종 본산으로 등록하였다. 석불사의 창건이나 연혁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나 보물로 지정된 백제시대의 석불좌상과 광배가 남아 있어서 백제시대부터 이곳에 절이 이루어졌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석불좌상과 광배에는 1963년도에 보호각을 세우고 주민들이 이 석불을 미륵불이라고 부름에 따라 미륵전(彌勒殿)이라는 당호를 붙여 법당으로 사용하였다.
* 사자암(獅子庵)
?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신룡리 산609-1번지
사자암은 백제시대의 사찰로서 미륵사지가 있는 미륵산(彌勒山) 장군봉의 동남쪽 계곡 해발 320미터의 8부능선상에 위치하며,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사자암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 무왕조의 “무왕은 선화비와 함께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라는 기록에 의하여 사자암이 지명법사가 거주하던 사자사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여 왔으며,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사자사(師子寺)?명 명문와가 발견되어져 삼국유사의 기록에 나오는 사자사(師子寺)임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볼 때 사자사는 미륵사보다 앞서는 시기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 태봉사(胎峰寺)
? 소재지 :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150번지 죽청마을
태봉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대한불교태고종에 속하는 태봉사가 언제 창건되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문헌이나 금석문자료에서는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서 백제시대 양식의 삼존석불이 발견되었으며, 백제 와당편이 수습되었다고 전하고 있어 백제시대, 무왕이 익산에 궁성을 짓고 미륵사를 창건하는 시기인 7세기 전반 경에 창건된 사찰로 판단될 따름이다. 지금 있는 사찰건물은 이곳에서 삼존석불이 발견되므로써 이 불상을 안치하기 위하여 근래에 세워진 것이다.
* 숭림사(崇林寺)
? 소재지 : 익산시 웅포면 송천리
? 보광전 : 보물 825호
함라산 골짜기 송림 사이에 남향을 하고 있는 숭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숭림사의 창건에 대하서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742-764) 당시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산사(金山寺)의 창건과 아울러 이 절을 창건했다는 설이 전하고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발견할 수 없다. 이후 숭림사에 대한 기록은 익산구지에 비로소 보이는데 ‘숭림암은 함열면 북쪽 7리 함라산 아래에 있으며 보광전(普光殿)은 고려 충목왕원년 을유년(1345)에 건축하였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보광전의 명문와에 지정5년(至正五年) 을유년(1345)에 행여선사(行如禪師)가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고 하니 숭림사는 고려시대에는 분명히 존재했던 사찰임에 틀림없다.
그 뒤 임진왜란 때는 보광전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고도 하며, 10년 뒤에 우화루만을 중건했다고만 전할 뿐 뚜렷한 사적없이 내려오다가 광서(光緖) 8년(1882)에 조희호(趙曦鎬)가 쓴 ?숭림사법당중수기?에 그의 조부가 가경(嘉慶) 24년(1819)에 중수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1923년에 주지 황성렬(黃成烈)이 이웃에 있던 자명사(自鳴寺)의 건물을 이곳에 옮겨 보광전(普光殿)을 중수하고 나한전(羅漢殿)과 영원전(靈源殿) 등을 새로 지어 면모를 일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심곡사(深谷寺)
? 소재지 :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176번지
미륵산 북쪽 기슭 장암마을 위쪽에 자리잡은 심곡사는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17교구 금산사(金山寺) 말사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심곡사는 통일신라시대 문성왕 때 스승을 구하지 못해 고심하던 무염대사(無染大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기록이나 유물은 현재 없다. 이후 조선시대 중기에 허주(虛舟)대사가 중건하였으며, 지금의 사찰은 100여년 전 현 위치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산등성이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 남원사(南原寺)
? 소재지 : 익산시 여산면 제남리 224번지
? 미륵전 : 지방문화재자료 제88호
제남리 독자천 옆의 평지에 위치한 남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남원사는 1968년에 세워진 사적비의 기록에 의하면 831(신라 흥덕왕 원년) 진감국사(眞鑑國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나 이 시기에 해당하는 현전 유물은 없다. 이후 한동안의 사적은 전해오지 않고, 1592년 남원부사 윤공이 부임차 남원으로 가던 중 이곳에서 자는데 꿈에 석불이 나타나 다음날 그곳을 파보니 석조연화좌대 위에 있는 미륵불상이 나왔고, 석조거북과 오층석탑이 출토되어 이에 3칸의 법당을 짓고 이름을 남원사라 하였다고 하는 내용이 전하고 있다.
* 백운사(白雲寺)
? 소재지 :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65번지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 말사인 백운사는 창건이나 연혁을 밝혀줄 수 있는 자료는 전혀 없다.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원래 신라 경순왕2년(928) 백양선사에 의해서 창건된 법당산(法幢山) 혜정사(慧定寺)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백운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백운사의 입구에 있는 아람드리의 은행나무를 통해서 이 절이 고찰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경내의 대부분의 건물들은 최근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대웅전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약사전을 두고 남쪽에는 관음전을 배치하였으며, 대웅전 뒤쪽에는 삼성각이 있다. 대웅전 앞의 석등 2기가 있다.
* 문수사(文殊寺)
? 소재지 :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69번지
? 대웅전 : 지방문화재 자료 제 89호
천호산 서사면에 자리한 문수사는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1961년 주지 김종대(金鍾大)가 세운 사적비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헌강왕7년(881) 혜감(慧鑑)대사가 창건했고, 조선 초에는 함허(涵虛)선사가 이곳을 중건했으며, 다시 고종 때에 허주(虛舟)대사가 중수한 거찰이었다고 하나 10여년전까지는 대웅전과 명부전?삼성각?요사만이 남아 있었다. 이 중 삼성각을 제외한 대웅전?명부전과 요사는 근래에 다시 건립하였다. 이 외에 경내에 부도 2기가 남아 있을 뿐 신라시대에 창건했음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문수사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북쪽에 명부전, 뒤쪽에는 삼성각과 부도 2기가 위치하고 있으며, 최근에 지은 요사가 있다.
▒ 불상(佛像)
* 연동리석불좌상(蓮洞里石佛坐像)
? 소 재 지 :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220 석불사내
? 지정번호 : 보물 제 45호
연동리석불은 전면 폭 225cm, 높이 약 45cm의 별석으로 된 좌대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좌상이다. 이미 오래전에 유실되어 없어진 불상의 머리 부분을 최근에 만들어 붙였고, 몸체 부분에서도 곳곳이 떨어져 나가 원형이 약간 손상된 편이다. 그러나 어깨가 넓고 반듯하게 내려왔으며, 두 무릎을 넓게 펴고 앉아서 불상은 매우 강건하고 안정감이 있게 보이며, 현재 몇 점 남아 있지 않은 백제석불 중의 하나로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문화재이다.
고운 주름을 잡아 늘어뜨린 통견으로 된 법의(法衣)는 배꼽 부근에서 그 자락을 손목에 걸쳐 넘기면서 굵게 주름을 잡아 결가부좌한 무릎 위로 흘려 덮었다. 또 가슴 부분은 명치 근처에서 치마와 허리띠의 매듭코를 법의의 겉으로 슬쩍 드러나게 표현하였다. 수인(手印)의 형태는 오른손을 무릎 위에 가볍게 올려놓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다. 좌상의 등 뒤로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주형(舟形)의 광배(光背)는 2매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좌에 얹혀 있다. 광배대좌는 비교적 거칠게 다듬어진 2매의 석재를 맞대어 그 가운데에 광배를 꽂을 수 있는 구멍을 만들었는데, 대좌의 아래에는 잘 가공된 지대석을 돌리고 있음이 발굴조사 결과 확인되었다. 이로써 석불좌대의 아래에도 광배좌대의 아래에 있는 지대석과 같은 지대석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광배는 두광에 백제의 연화문와당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형태의 16엽의 연화문을 두고, 그 바깥부분에 넓고 좁은 형태를 반복하는 연화문상의 모양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그 주위에 6조의 원권문을 돌렸는데 가장 바깥부분 원권은 수직으로 아래로 뻗어 신광부를 형성하고 있다. 이 신광부에는 수직 돌선의 안쪽에 또 하나의 수직돌선을 두고 내부에는 연화문 대좌 위에 화염보주문을 놓은 문양이 좌우에 각각 3개씩 6개를 배열하고 있다. 그리고 이 주변에는 얕은 음각선으로 화염문을 표현하였다. 이 화염문의 안쪽에는 역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화불(化佛)이 표현되었는데, 상부 중앙에 1구와 좌우에 대칭으로 각각 3구씩 모두 7구이다. 이 화불들은 과거(過去) 7불을 의미하겠지만 이러한 광배의 표현수법은 삼국시대의 금동삼존불 광배와 직결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불상의 규격은 어깨까지의 높이 156cm, 광배높이 4.48cm, 불좌높이 2.01m, 어깨폭 1.13m이다. 이 불상의 양식은 중국의 용문석굴에서 그 원조를 찾을 수 있고, 일본 법륭사 금당의 연대가 기록된 금동석가삼존의 양식과 유사하기에 이 석불은 법륭사 금동석가삼존 조성연대인 621년보다는 앞선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태봉사(胎峰寺) 삼존석불(三尊石佛)
? 소 재 지 :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죽청마을 앞산
? 지정번호 : 지방유형문화재 제12호
태봉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관음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는 삼존불상으로서 태봉사를 새로이 창건한 심묘련씨가 지금부터 50여 년 전, 3대독자인 아들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산신 기도를 드리다가 산신의 현몽으로 발견하여 그 자리에 지금의 태봉사를 세우고 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절 이름을 태봉사(胎峰寺)라고 한 것은 절이 있는 산 이름이 태봉산이라고 한데서 유래한다고 하는데, 태봉산은 마한(馬韓)의 기준(箕準)이 아들 3명의 태(胎)를 이곳에 묻었기에 태봉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현재의 삼존불은 하얀 석회분을 발라 원래의 상태에서 많이 변한 모습을 하고 있다. 20년전 조사에 의하면 본존상은 가슴 윗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어 얼굴 형태를 잘 알 수가 없었으며, 목에는 삼도가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고 있으나 지금은 삼도의 목주름과 함께 존안의 형태가 또렷하다. 협시불상 또한 나한상과 보살상이었으며, 삼도의 목주름도 없었다고 하나 지금의 협시상은 모두 보살상으로서 목주름이 또렷하게 나타나 있는 등 많이 변화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삼존석불은 타원형 광배를 조각한 판석에 삼존상을 조각한 것으로 가운데의 여래상은 방형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여래상은 머리는 나발로서 육계가 있고, 몸체보다 비교적 두툼한 얼굴로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법의는 통견으로서 방형대좌에까지 늘어뜨린 상현좌의 형태를 보이고, 수인은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하복부에 대고 있는 형태이다. 머리에는 두광이 표현되었는데 이중의 원권 안에 연화문을 새겼다. 이 광배 윗부분에는 연화좌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1구의 화불이 조각되었다.
여래상의 왼쪽에는 연화가지를 양손으로 쥐고 있는 문수보살입상이, 오른쪽에는 감로수병(甘露水甁)을 들고 있는 관세음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U자형 통견의 법의를 입고 있으며, 각각 원형의 광배가 조각되어 있다. 이 석불의 크기는 본조불의 높이 68cm, 협시불의 높이 77cm, 광배의 높이 212cm로서 이가 한 덩어리의 돌에 조각된 백제시대의 불상이다.
* 고도리 석불입상(古都里 石佛立像)
? 소 재 지 :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400-2
? 지정번호 : 보물 제46호
금마면 남쪽 1km 지점의 논 가운데에는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약 20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2구의 석상이 마주보고 서 있다. 이 석상은 하나의 돌기둥에 머리에 쓴 관부터 석대좌까지를 조각하였는데, 뒤에서 보면 네모꼴의 모자를 쓴 사각석주(四角石柱)로만 보일 정도로 윤곽이 분명하지 않고 이마에 백호(白毫)가 없고 목에 삼도(三道)가 없으며, 두 손이 결인(結印)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 점으로 보아 불상이라고 하지 않고 다만 석인상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머리 위에는 높은 관을 쓰고 가늘게 뜬 눈, 작은 코, 가느다란 입술, 한 줄로 처리된 목, 복부 앞에서 손가락을 끼고 있으나, 법의(法衣)로 가리워 진 양팔, 목에서부터 평행선으로 흘러내려 양쪽 발등 위에 와서 좌우로 벌어진 옷 모양 등의 모습에서 신체의 표현이 절제된 거대한 불상이 만들어졌던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입상의 높이는 4.24m에 이른다.
이 석불 옆에 세워져 있는 ?석불중건비?에 의하면 “익산읍을 만들 때 수류(水流)의 유출구가 낮아 공허하기 때문에 이를 비보하기 위하여 두 개의 석불, 즉 음양의 쌍불(雙佛)을 돌에 새겨서 세운 것이라고 하여 수구막이를 위하여 이 석불이 세워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이 석불입상에는 옥룡천과 관련지어 전해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강물이 꽁꽁 얼어붙는 추운 겨울 섣달 그믐날이 되면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두 석상이 얼어붙은 옥룡천을 건너 서로 만나 일년동안 마주보고 말 한 마디 못 건넨 회포를 풀고 새벽닭이 우는 횃소리를 듣고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일년 내내 마주보면서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이야기이다.
이 석불입상이 자리한 곳에서 남쪽으로 약 2km 정도 가면 국보 제 289호 왕궁리 5층석탑이 위치하고 있다.
* 화산리 마애삼존불
? 소재지 :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화산천주교회내
화산리 마애삼존불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이 중국에서 신부가 된 후 조선을 포교하기 위하여 입국한 최초의 장소인 화산포(일명 나바우)에 세워진 화산 천주교회(일명 나바우 성당, 사적 318호) 북쪽의 깍아 지른 듯한 4m 높이의 암벽 위에 약 3m 크기로 새겨져 있다.
불상이 있는 이곳은 조선 인조 때 각지에서 올라온 세곡을 분담, 조운(漕運)케 하기 위하여 여산에 설치한 나암창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나암창은 정규적인 경창(京倉)으로의 조운보다는 비상시에 군량보급창으로서 이용되었던 조창으로 정묘호란이후 병자호란사이에 운영되다가 숙종때 해안에 쌓이는 토사로 말미암아 행선이 어려워지자 함열의 성당창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불상은 아마도 조창과 관련되어 조운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본존불의 얼굴은 둥글게 표현하고 커다란 육계를 갖추고 있으나 불상의 근엄함이 표현되지는 못하였다. 광배는 둘레를 타원형으로 파내어 나타내고 음각선으로 화염문을 장식하였다. 법의(法衣)는 희미한 음각선으로 처리하여 확실한 구분이 없으며, 특히 아랫쪽에서는 흐지부지 처리하여 그 완전한 형태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왼쪽의 협시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몸은 중앙의 본존을 향하여 있으나 아랫부분은 조각을 새기지 않았으며, 목은 길게, 얼굴은 직선적으로 표현하여 딱딱한 분위기를 주는 오른쪽의 협시보살 역시 어깨 아래부분은 조각되지 않았다.
* 동룡리사지 석불좌상
? 소재지 : 익산시 왕궁면 동봉리 동통마을
왕궁면 동봉리 동통마을에 위치한 동룡리사지에 있는 석불좌상으로 현재는 사찰의 주차장 화단에 놓여 있다. 석불좌상은 머리부분이 유실되었고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여 신체의 특징을 자세히 살피기가 어렵기는 하나, 대략 살펴보면 불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옷주름은 두껍게 처리하고 있다.
* 도신사지(道新寺址) 출토 금제소불상
? 출토지 :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삼양마을
? 보관처 : 국립전주박물관
여산면 원수리 삼양마을 북쪽 용화산 중턱에 있는 도신사터는 전국유적목록(全國遺蹟目錄)에서는 도신사지(道新寺址)라고 되어 있으나 한편으로는 도승사(道僧寺)터라고도 함)라고 전해지고 있는 절터에서 수년 전에 금제소불상 1기가 출토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높이 5㎝정도의 호신용(護身用) 원불(願佛)로 보이는 이 불상은 2층의 연화좌대에 앉혀있고 등 뒤로는 주형의 화염문과 당초문으로 꾸며진 광배가 붙어 있는데 불상은 크고 긴 눈, 짧은 코와 작은 입을 가졌고, 머리는 육계가 없는 나발을 하고 있으며, 이마 위에서 앞가르마를 탄 쪽진 머리 같은 모양이고 귓불은 양어깨를 덮었다. 어깨는 넓고 목은 가늘며, 오른쪽 어깨에 걸쳐있는 법의는 부드럽게 흘러내려 결가부좌한 무릎 위를 덮었다.
광배의 뒷막이판에는 “남선인 신축정월일 김세소(男善人 辛丑正月日 金世昭)”라는 명문이 남아 있는데, 불상이 만들어진 시기는 상호(相好)의 모습이라던가 연당초문 그리고 기타의 수법 등을 통해 볼 때 12세기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탑과 탑지(塔址)
* 미륵사지 석탑(彌勒寺址 石塔)과 탑지(塔址)
?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국보 제 1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미륵사지 석탑은 미륵사지 서원(西院)에 속해 있는 탑으로 탑의 뒷 부분은 파손이 매우 심한 편이며, 6층 일부까지만 남아 있는데, 높이는 약 14.4m이다. 현존하는 탑 가운데 국내에서는 가장 최초로 축조된 최대의 석탑이다.
이 탑은 1915년 일본인들에 의해 보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탑 내부에 탑부재와 주변의 석재를 쌓아 탑의 몸체를 지탱하였고, 완전히 파괴된 서?남쪽과 북쪽 일부는 시멘트로 덮어서 현상을 유지하였다. 최근에 들어와 이 시멘트를 떼어내고, 주변의 석재들을 보완하여 이 석탑을 복원한다는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탑에 대한 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 미륵사 조에서는 “…석탑이 있는데 대단히 커서 높이가 여러 길이나 되어 동방의 석탑 중에 가장 크다.…”라고 한 구절이 있으며, 18세기경 쓴 것으로 알려진 강후진(康侯晉)의 와유록(臥遊錄) ?유금마성기(遊金馬城記)?에 보다 자세히 남아 있다. 와유록에 의하면 “미륵산 서쪽 기슭에 옛적의 미륵사터가 있다.(중략) 밭둑 가운데 7층석탑이 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높고 크며 모두 병풍 같은 돌로 첩첩히 쌓았다. 석주(石柱)는 별개의 돌로 다듬어 만들었으며 그것은 네 귀퉁이를 받치고 있다. 세상사람들이 동방 석탑에서 제일이라고 하는데 거짓말이 아니다. 백년 전 벼락으로 인하여 그 반이 허물어졌으며, (탑의) 아래 부분에는 돌문이 있어 출입이 가능한데 한꺼번에 세 사람이 들어가 놀 수가 있다. 서쪽 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탑 위로 올라가보니 서너명의 농부가 밭일을 하는 연장을 끼고 그 위에 누워있다. (???彌勒山西麓 有古彌勒寺基 (중략) 田畦中有七層石塔 極其高大 皆用石屛累疊 粧成別以石柱支其四隅 世所謂東方石搭之最者非虛語也 百年前因霹靂毁其一半 而下有石門能通出入遂與三人同入遊琓 緣西壁陟塔上 有數三農人挾田器臥於其上???)”라고 되어 있어 18세기 영조 때까지만 하더라도 석탑이 7층까지는 남아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화강석을 써서 조성한 이 탑의 구조를 보면 방형의 이중 기단위에 사방 세칸의 탑을 쌓되 초층에는 엔타시스를 가진 방형석주를 써서 칸막이를 했고 가운데 칸에는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장방형의 출입구를 두었다. 초층 기둥 위에는 평방석과 창방석이 있고 그 위에 작은 벽이 있고 다시 그 위에 목조 건물의 공포(?包)에 해당되는 3단(三段)의 옥개받침을 두어 옥개석을 받치게 하였다. 2층부터는 초층과 비교하면 몸돌의 높이와 벽의 넓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평방 위의 작은 벽이 없어진다. 옥개석은 얇고 넓은데 네 모퉁이를 가볍게 치켜들고 있고, 귀부분에는 풍탁(風鐸)을 달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초층의 중앙에 시설된 출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폭 152㎝ ? 형 통로가 형성되어 있고, 이 통로의 중앙의 교차지점에는 한 변이 145㎝인 방형의 초반석(初盤石)이 놓여 있으며, 초반석의 중앙에는 위아래 폭이 99㎝인 정방형의 심주석(心柱石)이 세워져 있다. 출입구의 폭은 53㎝이며, 높이는 약 160㎝이다. 여기에는 문비(門扉)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은 없지만 초창기에는 문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탑은 위와 같은 옥개석과 옥개받침의 구조나 초층 내부의 공간구조 등의 양식에서 목조탑의 축조 양식을 그대로 석탑에 옮겨 놓은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적인 양식이다. 또한 이 석탑의 지붕돌이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가 가볍게 치켜올라가 있어서 신라 양식에서는 볼 수 없는 백제 건축 특유의 비상미(飛翔美)를 보여준다.
* 왕궁리 오층석탑(王宮里五層石塔)
? 소 재 지 :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480번지
? 지정번호 : 국보 제 289호
왕궁리 오층석탑은 백제 무왕에 운영되어진 궁궐터, 혹은 고구려가 망한 후 고구려 유민 안승에 의해서 세워진 보덕국의 치소가 있었던 지역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에 의해서도 ‘왕검이’ ‘왕금이’ ‘왕금성’이라고 불려지는 왕궁리 왕궁평의 뜰 가운데에 우뚝 세워져 있다.
원래 보물 제44호로 지정보호되다가 1997년 국보 제 289호로 새롭게 지정된 이 탑은 1965년 11월부터 1966년 5월에 걸쳐 해체 복원되어 기단부의 구조가 완전히 밝혀졌으며, 해체 당시 탑 내부에서 금제 사리합, 순금제 금강경판 등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탑의 구조는 기단부는 탱주가 두개 있으며 갑석(甲石) 또한 1면 3매의 돌로 짰는데 바깥쪽으로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네 귀는 약간 반전(反轉)을 보인다. 탑신부의 초층 옥신(初層屋身)은 4우주와 탱주가 각출된 중간석 등 모두 8개의 돌로 짜여져 있으며, 2층의 옥신은 4면 1석으로 4개, 3층 이상은 2개의 석재로 짜여져 있다. 옥개석은 1층부터 3층까지는 8매의 돌로, 4층과 5층은 4매의 돌로 짜여져 있다. 한편 3단으로 된 옥개받침은 옥개석과는 별도로 4매 별석(別石)으로 조성하여 그 위에 옥개석을 얹었는데 옥개받침 간의 거리보다 3단째의 옥개 받침에서 처마 끝까지의 거리가 훨씬 길고, 옥개상면에 낙수면의 경사가 약하여 옥개석은 평활한 모습을 보이고, 추녀의 선은 네 모서리에서 가볍게 들리어 비상미(飛翔美)가 있는 전형적인 백제계 양식의 탑이다. 탑의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 앙화 그리고 파괴된 보륜이 있으며, 탑의 전체 높이는 약 8.5m이다.
탑에 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호남읍지 익산군 고적(古蹟)조에 보면 “왕궁탑은 궁터(옛궁터) 앞에 있다. 높이가 10장인데 세속에 전하여 오기를 마한시대에 창건된 것이라 하며, 일설에는 도선이 완산(전주)의 지리가 앉아 있는 개 모양이어서 이 곳에 탑을 세워 개의 꼬리를 눌러서 고려 태조가 견훤을 눌러 이겼다. 탑이 완공된 날 완산(전주)은 낮에 3일간이나 안개가 끼어 어두웠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기록은 지금도 학계(學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이 탑의 건립연대와 관련되는 것으로 주목된다. 탑의 조성연대에 대하여는 통일신라설과 고려초기설이 있으나 현재는 고려초기설이 유력하다.
한편 이 탑 주변의 발굴조사에서 ‘관궁사(官宮寺)’ ‘대관관사(大官官寺)’ 등의 명문와(銘文瓦)가 출토되고 있으며, 삼국사기 무열왕 8년 6월조의 기록에서도 “대관사의 우물물이 피와 같이 붉게 되었는데 금마군의 지류(地流)로 오보나 넓게 피가 흘렀다.(大官寺井水爲血 金馬郡地流血廣五步)”고 하여 ‘대관사’라는 사명이 이 탑지와 관련하여 자주 보이고 있어서 이 곳이 사료에 보이는 661년에 존재하였던 ‘대관사’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하여 이 오층석탑을 ‘대관사지 오층석탑’이라고도 한다.
* 심곡사(深谷寺) 칠층석탑(七層石塔)
? 소재지 : 익산시 낭산면 호암리
미륵산의 후미 동쪽 계곡에 있는 심곡사(深谷寺)의 7층석탑은 단층의 기단 위에 7층의 석탑을 건립한 것으로서 탑의 구조를 보면, 지대석과 지복석 위에 대좌형식을 따른 기단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7층의 탑신과 옥개를 올렸으며, 옥개의 정상에는 보주형의 상륜을 안치하였다.
지대석은 그 윗면이 지표면과 일치하고 있어서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으며, 그 위의 지복석은 비교적 높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위에 대좌형식으로 된 하대석과 중대석 및 상대석이 별석으로 조성되었다. 하대석의 각 면에는 단엽 6판연화문이 조각되었으며, 연판의 끝은 귀꽃모양의 장식을 한 복련이다.
중대석도 1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는데 우주나 탱주가 없는 무각의 부재로 설치하였다.
상대석은 1매의 석재로 앙련대와 탑신을 받치는 신대를 각출하였다. 앙련의 연판은 단엽이며, 하대석과 마찬가지로 연판마다 주연을 돌려 구획하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는 역시 형식적인 간엽을 각출하였다. 이 기단 탑신은 낮아 비교적 안정감을 보이고 있으며, 기단 중대석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각출이 없다.
옥개석은 옥개받침을 낮게 삼단으로 각출한 형식적인 표현을 보이고 있다. 낙수면은 낮아 매우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으며, 내림마루형의 우동을 표현하였다. 낙수면의 끝은 수평으로 이어지다가 전각에 이르러 심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 사자암 삼층석탑
?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신룡리 516-1
사자암 삼층석탑은 발굴조사 전까지 사자암 법당의 앞마당에 놓여 있었는데, 원래는 현 위치에서 30여미터 떨어진, 사자암으로 들어서는 남쪽 길목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사자암의 발굴조사때 이 탑도 해체 조사한 후 대웅전 앞마당에 다시 복원되었다.
석탑은 현재 기단부와 탑신부만 남아 있으며, 기단부인 지대석과 기단면석?복련대좌?팔각주의 간석?앙련석 등 석등의 부재가 일부 섞여 들어간 것으로 보여 현재의 이 탑은 순수한 탑석재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며, 탑의 균형도 제대로 맞지 않은 편이다.
기단부에는 석등부재로 보이는 복련대좌가 기단갑석으로 쓰였으며, 그 위로 팔각주의 간석이 올라가고 다시 앙련대좌가 놓여 완연한 석등의 양식을 하고 있다. 그 위로 우주를 간략하게 각출시킨 탑신이 놓이고, 삼단의 옥개받침이 표현된 옥개석이 올라가고, 다시 모난 자연석, 그 위로 뒤집힌 상태의 삼단 옥개받침을 갖춘 옥개석이 놓여 있다. 석탑의 크기는 지대석부터 맨 상층까지 총 276cm에 이른다.
▒ 부도(浮屠)
* 혜봉원 부도
? 소 재 지 : 익산시 모현동 1가 719-1
? 지정번호 : 지방문화재자료 제 13호
모현동 혜봉원에는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연화당(蓮花堂) 부도’라고 불리는 부도 1기가 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군산시 서수면 무장리 보천사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부도의 구조를 보면 지대석은 8매로 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하대석은 복련이 각출되어 있다. 각면에 안상이 조각된 8각의 중대석 아래에는 중대석 받침돌이 있는데 이 것은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형태의 8각으로 중대석이나 하대석 보다 월등하게 크고 아래와 위의 연꽃무늬 사이에 조각의 일반형에서 조금 벗어난 특이한 양식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중대 받침석은 그 형태나 조각수법이 원래의 부도 부재는 아니고 후대에 만들어서 끼워 넣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대석은 둥근 형태로 8엽의 중판 연꽃잎을 앙련으로 새겼다. 상대석 위에는 원구형 탑신을 올려놓았으며, 그 위에는 경사가 급한 8각형 옥개석을 올려놓고 있다. 기단의 높이는 125cm이고, 부도의 몸체의 높이는 46cm, 상륜부는 옥개석과 복발, 보륜, 보주를 갖추고 있는,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상태로 높이는 100cm이다.
이 부도는 간략하고 소박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 심곡사 부도군
? 소재지 ;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심곡사의 부도군(浮屠群)은 원래 심곡사에서 약 300미터 떨어진 산꼭대기에 있었던 것이었는데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란과 도둑을 피해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 곳에는 모두 7기의 부도가 있는데, 석종형 부도, 옥개석이 있는 석종형 부도, 연화문 부도 등 크기와 형식을 달리하고 있으며, 언제 조성된 누구의 부도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가운데 1기만이 ‘경진당(敬眞堂)’이라는 명문이 있다. 우선 ‘경진당’명 부도의 크기는 145센치이며, 양식은 석종형 부도 위에 다른 작은 석종형의 보주를 얹고 있다. 이외의 다른 부도들은 평평한 지대석이나 복련의 연화좌를 조각한 위에 고복형의 탑신석을 올리고 그 위에 다시 팔각형의 옥개를 올리고 있음이 기본이라고 할 수 있으나 옥개의 세부형식이 다르거나 퇴화된 양식을 보이고 있는 것도 있다.
* 문수사 부도군
? 소재지 :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문수사 부도군(浮屠群)은 산신각 옆에 2기가 나란히 놓여져 있는데 1미터 내외로 규모가 작다. 이 중 막무당(莫武堂) 월영(月影)대사의 부도는 도식화된 앙련좌 위에 구형의 탑신을 가지고 있으며, 이 위에 사각형의 옥개와 보주를 1매석으로 조각하여 올렸다. 옆에 있는 일영당(日影堂) 충운(忠雲)대사의 부도 역시 도식화된 앙련좌 위에 다각의 구형의 탑신을 가지고 있으며, 이 위에 사각형의 옥개와 보주를 1매석으로 조각하여 올렸다. 이들 부도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충운의 부도는 ‘기해사월일(己亥四月日)’이라는 간지명이 보인다.
* 숭림사 부도군
? 소재지 : 익산시 웅포면 송림리
숭림사 입구 우측에 모두 4기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 제일 안쪽의 개석을 결하고 있는 부도는 ‘기축년 2월 유심당(有心堂) 일훈(一訓)대사’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높은 대좌 위에 고복형에 가까운 탑신석이 있다. 두 번째의 부도는 높은 대좌 위에 고복형의 탑신과 팔각당형의 옥개석이 올려져 있는 형태로서 ‘강희23년(康熙二十三年, 1684)’이라는 명문만 있다. 세 번째 부도는 높은 대좌 위에 공과 같은 형태의 탑신과 4각당형의 옥개석을 올렸는데 명문은 없다. 마지막의 부도는 역시 높은 대좌에 구형의 탑신과 형식화되고 경사가 심한 당형의 옥개가 올려져 있는데 이는 근래에 만들어진 무애당(無?堂)선사의 부도임을 알 수 있다.
▒ 기타유물
* 미륵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
? 소 재 지 : 익산시 금마면 삼기리 미륵사지 경내
? 지정번호 : 보물 제236호
당간지주란 절에서 문표(門標) 혹은 종풍(宗風)을 나타내는 종파의 기(旗)인 당(憧)을 달았던 깃대의 지주(支柱)를 말한다. 당간은 주로 중문과 금당을 잇는 선의 중문 밖 입구에 세워졌던 것이 보통이지만 미륵사지 당간의 경우는 서탑과 동탑 앞에 각각 하나씩 당간지주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동?서탑 앞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동?서 당간지주가 위치한 지점은 동?서탑이 위치한 것보다는 사지(寺址)의 중심축 쪽으로 더 가깝게 자리하고 있어 두 개의 당간지주는 각각 동?서탑 앞에 세워져 있으면서도 하나의 가람 배치 계획 속에서 조영(造營)된 것임을 보여준다.
당간지주의 구조를 살펴보면 4매의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기단을 마련하였는데 기단은 두 개의 장대석을 짜 맞추었으며, 기단석은 지복석 부분과 면석 부분 그리고 갑석 부분을 나누어 조각하였는데 특기할 만한 것은 면석부(面石部)의 전후면에 3구(軀)의 안상(眼象)을, 양측면에 2구의 안상을 배치 조각하였다는 점이다. 안상의 양식은 신라양식과는 달리 첨형(尖形)을 수직방향으로 하지 않고 지자형(之字形)의 사각으로 나타내어 날카로운 맛을 내고 있다.
한편 당간지주의 두 지주는 47.5m의 간격을 두고 세워졌는데, 각각 지주의 안쪽 면에는 간대를 세웠을 때 고정시키기 위하여 상?중?하 3곳에 고정공(固定孔)을 설치하였다. 지주의 바깥 부분인 측면과 배면에는 주연에 두툼한 단을 양각하되 상단부는 비안형(飛?形)의 2단호선으로 처리하였으며 배면 중앙에는 상하로 양각돌기대를 넣어서 단조로움을 덜었다.
기단 높이는 53cm, 지주높이 4m, 총 높이 4.53cm의 크기로 이루어진 이 당간지주는 작품성이 매우 뛰어나고, 금산사 당간지주와 비슷한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여러 가지 특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 미륵사지 석등대좌(石燈臺座)
?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 경내
현재 미륵사지의 동원과 중원의 석등은 그 지대석과 석등 하대석등이 남아있는 반면에, 서원의 석등은 그 자리의 흔적만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출토상태가 좋고 큰 것은 동원의 탑과 금당지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석등대좌이다. 경작지 지하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표면이 일부 결락되기도 하였으나 전반적인 잔존상태는 양호하다. 석등대좌는 1매의 돌로 된 방형 지대석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지대석은 1변이 136cm고, 두께는 10cm이상 된다. 하대석도 1매의 돌로 되어 있는데 1면 96cm의 방형석으로 안쪽에는 복련(伏蓮)이 부조되어 있다. 연화문은 8엽으로 네귀에는 길이가 긴 연판문이 새겨져 있다. 또 연판문의 안쪽에는 석등의 기둥받침이 한단계 높게 마련되어 있는데 기둥 받침의 안쪽에는 기둥하부에 있을 촉을 끼워 넣기 위하여 직경 27.5cm, 깊이 12cm 홈이 파여져 있다.
* 왕궁리 오층석탑내 출토유물
? 소 재 지 :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 지정번호 : 국보 제123호
? 시 대 : 통일신라~고려초기
이 유물은 1965년 왕궁리 오층석탑을 해체 수리했을 때 탑의 제1층 옥개 윗면 중앙에 장치된 방형석 위에 뚫린 2개의 사리공에서 사리장치 1식과 금제 금강경판이 발견되었으며,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과 청동령(靑銅鈴)은 탑의 심초석 사리공에서 발견되었다. 심초석 윗면에 뚫린 품자형 3개의 사리공 중에서 이미 1개소는 도굴되어 있었다. 이 탑내에서 나온 금제사리합과 금제금강경판 등은 익산왕궁리 오층석탑내 발견유물(一括)로 이름 붙여 국보 123호로 지정되었다.
이들 유물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금판으로 된 금강경첩으로 순금판 19장에 각각 17행의 금강경문을 자경(字經) 0.6cm×0.7cm 내외의 자모를 정밀하게 조각한 목판으로서 압찰한 것으로 보인다. 순금판 19장에 각각 17행의 금강경문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사리병은 총높이 7.7cm, 병높이6.1cm의 녹색 유리병으로서 곡선미를 매우 기품 있게 나타낸 작품이다. 연꽃 봉오리 모양의 금제뚜껑이 덮여져 있고, 정방형의 하대를 갖추고 있다. 사리장치를 안치했던 금제방합은 네모지붕의 뚜껑을 가진 방형의 합으로서 지붕 위에는 반쯤 핀 연꽃 봉오리를 장식하였다. 금제 판경합은 방형에 가까우며, 뚜껑은 4변의 직각 변두리 위에 폭 2.1cm의 모꺽기를 하였다. 사리합의 외함은 동제의 매우 간소한 형식으로서 금제 내함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금동여래입상은 여래형이며 통견의 법의에 전신 광배가 갖춰져 있다. 두광부는 당초문으로 구성되었고, 그 주변의 신광은 화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 숭림사 청동은입인동문 향로
? 소 재 지 : 익산시 웅포면 숭림리 숭림사
? 지정번호 : 지방문화재 제 67호
웅포면 숭림리 함라산 아래에 자리한 숭림사에는 지방문화재 제 67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청동은입인동문향로(靑銅銀入忍冬紋香爐)가 전해져 오고 있다. 이 향로의 뚜껑은 사자 모양의 손잡이를 달고, 몽통에는 모란문양을 은입사로 장식하고, 사자머리의 손잡이를 달았다. 향로의 높이 110cm이고, 제작시기는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 온수동 석등(溫水洞 石燈)
? 소재지 : 익산시 왕궁면 온수리 온수동
왕궁면 온수마을 박명구씨 개인 집의 석탑이 있는 정원에 있다.
석등의 구조를 보면 상?하대석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으며, 중대석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화사석과 화창은 방형으로 되어 있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경사가 심하며, 추녀는 약간 모퉁이가 올라가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이 석등은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석탑은 일제시대에 박명구씨의 선친이 군산에 살고있는 일본인으로 구입했다고 한다.
향교(鄕校)
* 익산향교(益山鄕校)
?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 대성전 : 지정번호 : 지방유형문화재 제 115호
금마면 동고도리 금마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익산향교는 경내에 있는 400~500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은행나무를 보면 대개 그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건립 당시에는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 서무(西?),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제기고(祭器庫), 숙직실(宿直室),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홍살문, 사마재(司馬齋), 흥학당(興學堂), 권학재(勸學齋), 관선당(觀善堂) 등의 건물이 들어차 있었으나 현재는 대성전과 명륜당, 그리고 3칸으로 된 동재와 서재, 5칸으로 된 교직사 그리고 외삼문과 내삼문 등만이 남아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익산향교는 1398년(조선 태조 7)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그 후 임진왜란으로 향교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본래 익산향교에는 상당수의 서적과 문서들이 전해오고 있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거의 유실되었고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 50여점 등이 있을 뿐이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겹처마이다. 양쪽 측면의 박공머리에는 방풍판을 달았으며 다포(多包)집으로 포(包)는 내외 일출목(一出目)으로 중앙의 칸은 간격이 넓어서 공간포를 두 개 넣었으며, 나머지 칸에는 하나씩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외부출목(外部出目)은 앙설형(仰舌形)의 쇠서가 3개씩 달려 있다.
* 여산향교(礪山鄕校)
? 소재지 :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101번지
? 대성전 : 지정번호 : 지방문화재 자료 83호
여산향교는 여산 인근의 유림들이 힘을 모아서 1403년(조선 태종 3)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창건 당시에는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사마재, 양사재, 전사청 등을 갖추고 있으며, 향교 소속의 유림만 해도 교장 1인, 장의 1인, 제임 2인, 교생 50인에다가 노비 5명이 딸린 매우 큰 향교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향교도 익산향교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퇴락하여 대부분의 건물이 없어지고 다만 대성전과 동무, 서무, 명륜당 그리고 내?외삼문만이 남아 겨우 명맥만 잇고 있는 상태이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건물 양측의 박공머리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가 제법 큰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성전과 동?서무에 향사하는 위패는 5성, 10철, 송조 6현, 우리나라 18현으로 익산향교와 같았다. 제사는 이전에는 해마다 봄에는 음력 2월 상정(上丁)일에, 가을에는 8월 상정일에 행하였었으나 지금은 음력 8월 27일에 석전제(釋奠祭)를 행한다.
* 용안향교(龍安鄕校)
? 소재지 : 익산시 용안면 교동리 163번지
? 대성전 : 지정번호 : 지방문화재 자료 제 86호
용안향교는 원래 고려말에 풍제문묘로 용성리 원당하마을에 세워졌던 것이 조선 태조 8년(1399)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용안향교로 개칭된 것으로 전한다. 창건 당시에는 대성전, 전사제 3칸, 명륜당 3칸, 동제 3칸, 서제 3칸, 양사제, 사마제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성전, 명륜당, 전사제, 삼문만 남아있다.
익산군지 ?용안향교?조에는 “…司馬齋今毁○典祀齋明倫堂東西齋養士齋今爲公立普通學校(…사마제는 지금은 헐어없어졌고, 전사재와 명륜당, 동재, 서재, 양사재는 지금 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공립보통학교는 지금의 용안초등학교로서 처음 학교를 세울 때 향교 건물들을 이용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성전은 향교의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로써 현재 이 건물은 지방문화재 자료 제 8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 함열향교(咸悅鄕校)
? 소재지 : 익산시 함열면 함열리 교동마을
? 대성전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85호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처음 함열향교가 세워졌던 해인 조선 세종 19년(1437)에는 대성전을 세웠고, 명륜당은 성종 22년(1491)에 와서야 세웠다고 하는데, 임진왜란을 당하여 완전 소실되었고 그 후 영조 때에 이르러 다시 세웠다고 한다.
함열향교는 원래 대성전, 영소전, 명륜당, 동재, 서재, 청금헌, 전사각, 양사재, 제직실로 되어 있었으며, 영소전은 공자의 영당으로 주자를 배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향교다운 건물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은 대성전과 영소전, 명륜당 정도이다. 다른 건물은 많이 퇴락되었을 뿐 아니라 개수 과정에서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도 있고 향교로 들어가는 길 또한 협소하고 내?외삼문 역시 훼손되었다.
대성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고, 명륜당은 전면 4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서원(書院)
* 화암서원(華巖書院)
?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화암서원은 미륵사지 뒷편 서북쪽 대밭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이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명종 7년(1552)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말미암아 헐리게 되어 서원에 소속되어 있던 토지와 노비는 한때 익산향교에 속하기도 하였다.
이 서원에 모셔진 사람들은 고려시대 말 공민왕 때 활약한 남촌(南村) 이공수(李公遂, 1308~1366)을 비롯하여 곤암(困庵) 소세량(蘇世良 1476~1538)과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98~1546) 형제, 그리고 인종때 직제학에 올랐다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윤원형에게 죽임을 당한 수암(首巖) 이약해(李若海)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 인물 중 특히 양곡 소세양은 당시 호남의 10대 시인중의 한사람으로 알려졌을 만큼 명문장가였으며, 호남에서 최초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지냈다. 을사사화 이후 고향인 익산으로 낙향하여 퇴휴당(退休堂)을 짓고 은거하면서 20여년동안 지역민의 교화 및 사회기강의 확립에 노력하였다. 그는 소세량과 더불어 조선의 명도, 이천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 화산서원(華山書院)
?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신룡리 신서원마을
화산서원은 미륵산 아래 교원연수원 뒤쪽에 있으며, 효종8년(1657)에 세워졌다. 현종3년(1662) 김장생(金長生)을 봄에 제사지낸다 하여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그후 숙종 21년(1695)에는 송시열을 같이 모셔 제사지내 오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해방이후 지방 유림들이 주축이 되어 다시 세우고 김장생과 송시열, 그리고 죽유(竹?) 황자후(黃自厚, 1600년 ~ ?), 송시열의 문인이었던 소두산(蘇斗山, 1627년~1693년), 소휘면(蘇輝冕, 1814년~1899년)을 함께 모셨다.
▒ 사우(祠宇)
* 매곡사(梅谷詞)
? 소재지 : 익산시 모현동 1가 324
? 규 모 : 사당 : 전면 3칸, 동?서재 : 전면 3칸
매곡사는 모현동 원매곡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사당은 사당 옆에 살고 있던 김종호가 자신의 부친 김근배(金根培)의 학문과 인격, 그리고 충성심을 길이 추념하기 위하여 1931년에 부친의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세운 것이다. 이후 1974년 3월 항일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의사와 백정기(白正基)의사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으며, 매년 음력 3월 3일에 김근배의 자손들과 이 지방 유림들에 의해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김근배는 호는 매하(梅下),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그는 1847년(헌종13)에 익산에서 태어나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그의 문장력과 글씨는 이 지방 유림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고종 때 성균관박사를 지냈고, 한일합방이후 일본에게의 협조를 강요받자 수치스럽게 사는 것보다는 죽어 의로움을 취하는 것이 났다고 결심하고 자손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빠져 자살하였다.
윤봉길은 190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1926년 19세에 중국 청도로 망명하였고, 1931년에는 상해에서 세탁소 등에서 일하면서 김구(金九)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 활동하였다. 1932년 그는 홍구(虹口)공원에서 열린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장으로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사령관 시라까와(白川義則) 대장 등 여러 명을 살상한 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오오사카로 옮겨졌으며,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순국(殉國)하였다.
백정기는 1892년 정읍(井邑)에서 태어났다. 그는 19세 때 상경하여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가지고 정읍으로 내려와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뒤 전국각지를 숨어 다니면서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아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였다. 1924년에는 일본천황을 암살하려고 도오쿄오에 갔다가 실패하였으며, 1925년에는 상해로 내려가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을 하였고, 1928년에는 중국 남경에서 열린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1932년 그는 상해에서 자유혁명자연맹(뒤에 이 조직을 BTP(黑色恐怖團)이라 고침)라는 항일투쟁단체를 만들었다. 1933년 3월 17일 이강훈(李康勳)?이원훈(李元勳) 등과 함께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일본대사 아리요시(有吉)을 암살하려고 모의하다가 들켜 일본헌병에 붙들려 일본 나가사끼(長崎) 재판소로 옮겨졌으며, 여기서 무기형을 받아 감옥살이를 하던 중 순국하였다.
* 백산원(柏山院)
? 소재지 : 익산시 모현동 2가 산9
? 규 모 : 사당 : 전면 3칸, 강당 : 전면 3칸, 기념비 3기,
백산원은 현재 익산시 모현동 배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제사는 매년 음력 3월 10일 이 곳에 모셔진 사람들의 후손과 이 지방 유림들이 모여 행하고 있다. 이 사우는 1914년에 세워졌는데, 처음 세워졌을 때에는 이 사당에 모셔져 있는 정제호(鄭濟鎬)와 정동식(鄭東植)의 후손들이 조상의 충성심과 절의(節義)를 추념하기 위하여 세운 집안 묘당이었다. 그런데 후에 구한말 유학자이며, 우국지사인 송병선(宋秉璿)을 중심으로 위패를 다시 정리하여 이 지방의 유림들의 사우로 바뀌었다. 현재 백산원에는 송병선을 주벽으로 정제호와 정홍식 그리고 정동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한때 이곳에서는 송병선의 학풍을 잇고자 서당을 운영하기도 하였기에 백산서원(栢山書院)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서당이 제대로 경영되지 않았다.
* 덕천사(德川詞)
? 소재지 : 익산시 은기동 산72
? 규 모 : 사당 : 전면 3칸, 강당 : 전면 4칸.
덕천사는 은기동 하두마을 뒷산기슭에 위치하여 있다. 이 사우는 1931년 오응현(吳應賢)의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현재는 고경명(高敬命)을 중심으로 오응현과 그의 동생 오응필(吳應弼)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2월 중정에 이 지방 유림들과 자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 은천사(隱泉祠)
? 소재지 : 익산시 은기동 은천마을
? 규 모 : 사당 전면 4칸, 강당 : 전면 3칸
은천사는 은기동 은천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은천사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1879년 이 지방 유림들이 전라도 관찰사에 올리 소송의 내용을 보면 이 사우는 일찍이 이곳에 서원과 함께 세워져 있던 것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사당은 헐리어 없어지고 삼문(三門)과 정문(旌門) 1칸만이 남아 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문 뒤로 약 10여m 떨어진 곳에 단(壇)을 만들어 제사만 드리다가 1900년 1월 유림회의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지방 유림들이 낸 소송문에 의하면 은천사는 지방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던 제법 큰 사우였음을 알 수있다.
은천사에는 현재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절한 이보(李寶)를 중심으로, 당시 같은 의병 이귀(李貴), 소행진(蘇行震)을 모시었다. 제사는 음력 2월 중정에 한번 지낸다.
* 두천사(豆川祠)
? 소재지 : 익산시 은기동 567 상두마을 뒷산
? 규 모 : 사당 : 전면 1칸, 강당 : 전면 3칸
두천사는 1780년(정조 4)에 영당을 세워 최영장군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1871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이 후 1900년 영당을 다시 세우고 최영장군의 영정을 모셨으며, 해방 후 1962년에 영정 대신에 위패로 바꾸어 모시고 이름을 두천사라 하였다. 처음에는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최씨들의 집안 묘당으로 모셨으나 후에 이 지방 유림들에 의해 지방의 사당이 되었다.
* 팔봉사(八峰祠)
? 소재지 : 익산시 팔봉동 팔봉산 아래
? 규 모 : 사당 : 전면 3칸, 삼문(三門)
팔봉사는 팔봉동 팔봉산 아래 황씨 제각 뒤에 위치하여 있다. 팔봉사는 이 지방에 살고 있는 황씨들이 이 지역 유림들과 함께 1971년 봄에 세운 지방 사우이다. 이곳에는 황포(黃褒)를 중심으로 그의 아들 황명세(黃名世)와 손자 황자후(黃自厚)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20일 그들의 후손과 이 지방 유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 오강원(五岡院)
? 소재지 : 익산시 팔봉동
? 규 모 : 사당 : 전면 3칸, 강당 : 전면 4칸
오강원은 현재 팔봉동 반산에 있다. 이 오강원은 1852년(철종 3)에 오산면 오산리에 세웠던 것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리어 없어진 후 고종 21년 다시 세울 때 현재의 위치에 단만을 만들어 반산단(盤山壇)이라 하였다. 그 후 1961년 이 지방에 살고 있던 김문기의 후손인 김대규(金大奎)와 김형종이 여기에 사당과 강당을 세우고 오강서원(五岡書院)이라 이름 붙여 김시홍(金時興)을 중심으로 김향(金珦)과 김관(金觀), 김문기(金文起), 김준(金遵)의 위패를 모셨다. 제사는 음력 3월 5일에 이 지방 유림들과 여기에 모신 사람들의 후손들이 모여 지내고 있다.
* 현동사(玄洞祠)
? 소재지 :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 현동마을
? 연안이씨 종중 문적 : 지정번호 : 보물 제651호
현동사는 현재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 현동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현동사는 원래 이 지방에 살고 있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의 중시조 이숭원(李崇元)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연안이씨 집안의 가묘이다. 이 사묘가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처음 세울 때는 부조묘(不祚廟;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임금의 명으로 세운 묘당)와 어서각(御書閣; 임금이 직접 쓴 글을 보관하기 위하여 세운 집)과 영당(影堂)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며 영당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었으며, 부조묘는 전면 3칸의 사당과 정문(旌門) 1칸이 퇴락된 채 남아 있었다. 또한 현동마을으로 들어가는 큰 길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으며 이 홍살문과 가까운 곳 길가에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1979년 이 현동사 어서각에 보관되어 오던 공신회맹록 6권 가운데 성종 때에 만들어진 것과 그에게 준 공신록권 그리고 그의 선조들에게 준 교지 18건(성종 이전의 것)이 보물 651호로 문화공보부로부터 지정되면서 이 사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1983년에는 이 보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면 3칸, 측면 1칸의 현동사를 복원하였다.
이 현동사 또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말미암아 현동사에 소속되었던 토지들이 모두 익산 향교로 소속되어 버렸으며, 이후에는 이 곳 연안이씨 종중에서 부조묘인 사당에서만 제사를 지내오게 되었으며 현재는 연안이씨 종중에서 그의 제사와 현동사를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토지를 마련하였다.
* 삼세오충렬사(三世五忠烈祠)
? 소 재 지 : 익산시 용안면 중신리 131번지
? 지정번호 :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61호
1666년(현종7) 충렬사를 건립하여 향사(享祀)하도록 하여 1670년(현종 11) 착공하였으나 숙종 영조시대를 거치는 동안 재정형편과 국가 환란으로 완공치 못하고 중단을 거듭하는 동안 퇴락하여 자취가 없어졌다. 1978년 용안면의 유림들의 발의로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1981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모시고 있으며, 이 사당에는 오응정을 중심으로 오욱과 오직, 오동량, 오방언 등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공을 세운 해주 오씨 3대 다섯사람을 한자리에 모시고 있다.
* 단동사(丹洞祠)
? 소재지 : 익산시 웅포면 웅포리
? 규 모 : 사당 : 전면 3칸.
단동사는 웅포면 웅포리에 위치하고 있다. 단동사는 1949년 3월 이 지역에 살고 있는 경주 최씨들이 자신들의 시조 최치원(崔致遠)의 학문과 도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뒤에 이 지방 유림들의 협조를 얻어 이 지방에 살고 있는 경주 최씨에 의해 매년 3월에 제사를 행하고 있다.
* 담월사(潭月祠)
? 소재지 : 춘포면 천서리 담월마을
? 규 모 : 사당 : 전면 3칸, 강당 : 전면 3칸.
담월사는 춘포면 천서리 담월부락 뒷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이 사우는 1909년 신경진(辛慶晋)의 후손 신민집(辛旼集)이 선조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단만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던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1873년(고종 13) 사당건물이 세워졌다. 따라서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의 선조를 제사하는 집안의 묘당으로 시작된 것이라 하겠으나, 뒤에 율곡 이이 선생을 중심으로 신경진과 신경준 등을 모시게 되어 1947년부터는 이 지방의 유림들에 의한 지방 사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제사는 매년 음력 2월 중정에 행한다.
정려비(충효열)
* 소행진충신각(蘇行震忠臣閣) :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서계마을
소행진은 세득의 증손으로 본관은 진주이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같은 고향사람 이보(李寶)와 함께 부모의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상복을 벗고 출전하여 진산의 배재(梨峙)에서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장남 계(繼)와 차남 동(同)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진산 이치전투에 참여하여 순절하였다. 이리하여 한 집안의 2대 3부자가 모두 임진왜란으로 순절하였으며, 차남 동의 부인 민씨도 이 소식을 듣고 자진하였다. 이에 그 자손이 끊어져 그들의 공적이 잊혀져 오다가 1783년(정조 7)에 와서야 소행진에게는 호조좌랑을 증직하여 정려를 내렸다.
이 소행진의 정각 내에는 소행진의 정려 이외에도 열부 이씨와 열부 민씨의 정려 등 2기가 더 있다.
* 지평공이보정각( 持平公李寶旌閣) : 익산시 은기동 은천마을
이 정려의 주인공인 이보(李寶)는 본관(本貫)은 연안(延安)으로 미륵산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동생 이귀(李貴), 소행진 등과 함께 의병 400여명을 모집하여 고경명의병장이 왜적을 맞아 싸우고 있는 금산으로 가던 중 진산의 배재(梨峙)에서 적을 만나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나라에서 1754년(영조 30) 그의 충절을 기려 정려를 내렸다. 서원과 사우의 ‘은천사(隱泉祠)’조에 자세히 실려있다.
* 최빈충신각(崔賓忠臣閣) : 익산시 낭산면 호암리 내돈마을
최빈은 병조참판 최치운(崔致雲)의 아들로 본관은 해주이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왕을 호위하다가 병사하였다. 그가 죽은 후 병조판서에 증직되었고 해릉군(海陵君)에 봉해졌다. 비신의 높이는 124cm이다.
비의 앞면에는 ‘충신충근정량알성효절협책호성공신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판의금부사해릉군행어모장군도총부경력최공빈지려(忠臣忠勤貞亮謁聖孝節?策扈聖功臣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判義禁府事海陵君行禦侮將軍都總府經歷崔公賓之閭)’라 쓰여있다.
* 탁상충신각(卓祥忠臣閣) : 익산시 모현동 서영마을
이 정각은 서영마을 뒷편 구릉에 자리하고 있는데, 임진왜란을 당하여 싸우다가 전사한 호조좌랑 탁상의 충절을 기려 내린 정려이다. 내용은 ‘충신 조봉대부호조좌랑 탁상지려(忠臣 朝奉大夫戶曹佐郞 卓祥之閭)’라 하였고, 건립시기는 경신년 2월이라 하였다.
* 신종영효자비(申鐘永孝子碑) :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효자 평산 신씨 신종영의 비석은 금마면 동고도리 큰길식품 옆 국도변에 위치하여 있으며, 화강암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육안으로 판독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앞면의 ‘효자학생신종영지려(孝子學生申鐘永之閭)’라는 명문만 읽을 수 있다.
* 김종하효자각(金鐘河孝子閣) : 익산시 신룡동 석하마을
계문동 동사무소에서 남동쪽으로 약 200m쯤 가면 좁은 길 가에 조선시대에 세워진 이 정각이 북향하여 자리하고 있다. 내용은 ‘효자통정대부사헌부감김공종하지려 성상이십구년 명정(孝子通政大夫司憲府監金公鐘河之閭 聖上二十九年 命旌)’이다.
* 정제호효자비(鄭濟鎬孝子碑) : 익산시 모현동 2가
이 비는 위의 밀양박씨 정려비의 왼쪽 첫번째에 자리하고 있다. 내용은 ‘효자통정대부사헌부지평정재호지려 광무 팔년 갑진 십일월 일(孝子通政大夫司憲府持平鄭濟鎬之閭 光武八年甲辰十一月 日)이다.
* 정종식효자비(鄭宗植孝子碑) : 익산시 모현동 2가
이 비는 위의 밀양박씨 정려비의 왼쪽 두번째에 자리하고 있다. 비석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효자정삼품통정대부행중추원의관정종식지려(孝子正三品通政大夫行中樞院議官鄭宗植之閭)이다.
* 박종국효자비각(朴宗國孝子碑閣) : 익산시 석왕동 63번지
박종국(朴宗國)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부친이 병이 나서 잉어를 원하자 엄동설한에 정성을 다하여 구해서 완쾌시켰고, 모친도 병이 나서 꿩고기를 원하니 꿩고기를 구해 회생시켰다. 또 부친의 병에 앵두를 원하자 추운 겨울에 후원의 앵두나무 밑에서 천지신명께 수일을 주야로 비니 한겨울에 앵두 세 송이를 얻어 봉양하여 병을 회생시켰다.
* 최구한효자비(崔龜漢孝子碑) : 익산시 낭산면 호암리 내돈마을
최구한은 본관이 해주(海州)이며, 임진왜란에서 임금을 호종한 공을 세워 병조판서로 증직된 최빈(崔賓)의 후손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어머니가 병이 들자 8차례나 허벅지를 베었으며,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는 등의 정성을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비의 앞면에는 ‘효자가선대부행돈녕겸지중추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최구한명정비 기사 춘정월 하원(孝子嘉善大夫行敦寧兼知中樞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崔龜漢 命 旌碑 己巳 春正月 夏完)’이라고 쓰여 있다.
* 황세헌효열각(黃世憲孝烈閣) : 익산시 삼기면 오룡리 구정마을
이 효열각은 오룡리 구정마을 뒷산에 위치하는데 비각의 주위에는 화강암으로 담장이 둘러쳐져 있다. 비의 전면에는 정려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말미에는 규장각 직제학을 지낸 이병규가 글을 짓고, 한산 이긍복이 글씨를 썼음을 알려 주고 있다.
이 비각의 주인공인 황세헌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년을 하루같이 성묘하여 묘소까지 새 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효자라 일컬었으며, 1879년(고종 16)에는 익산 향교에서 포상하여 효자비를 세웠다.
* 진주소씨 집안의 정려(蘇東獻?蘇國民?海平尹氏의 旌閭) :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탄곡마을
이 정려는 소동헌(蘇東獻), 소국민(蘇國民)은 효자로, 해평 윤씨(海平 尹氏)는 열부로써 받은 정려이다. 1700년대 명정되어 1968년에 중건하였다.
소동헌(蘇東獻, 1581~1621)의 호는 오봉(五峯)으로 통정대부 마양진 첨절제사 소세공의 증손이다. 13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병이 들자 두차례나 허벅지를 베어 그 피를 먹이어 어머니를 회생시켰다.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3년씩 정성스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져 명정되었다.
소국민(蘇國民)은 소동헌의 조카로 가선대부 용양위부호군(嘉善大夫 龍讓衛副護軍)을 지냈다. 아버지 소동준이 병이 들자 허벅지를 베어 그 피를 먹이어 회생시켰다.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죽으로 연명하며 3년 시묘를 마쳤다. 같은 읍에 사는 사람이 효행을 추천하여 명정하였으나 극구 사양하여 그가 죽은 후에야 정려가 내려졌다.
해평 윤씨(海平 尹氏)는 신지(新之)의 현손으로 1692년에 출생하였으며 평안병마사 소두산(蘇斗山)의 아들 상삼(相參)의 처이다. 남편이 병이 들자 하늘에 남편이 낫기를 기도하며, 지성으로 간호하였으나 세상을 떠나자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하려다가 집안사람들의 만류로 실패하자 남편의 3년상을 마치고 29세의 나이로 자진하였다. 1742년(영조 19)에 명정되었다.
* 좌랑공 소행진의 서자 동(同)의 처 민씨 정려(蘇佐郞庶子同之妻義烈閔氏之閭)
: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서계마을
이 정려의 주인공인 민씨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보와 함께 진산 이치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전사한 좌랑공 소행진의 며느리로써 남편은 소동(蘇同)이다. 민씨는 임진왜란 중 친정인 강화로 피난 가 있다가 남편 동이 아버지 소행진의 뒤를 이어 진산전투에서 싸우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진하였다. 후에야 이 사실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 완산이씨열녀각(完山李氏烈女閣) : 익산시 왕궁면 평장리 관동마을
이 정려를 받은 주인공 완산이씨(完山李氏)는 회안대군 방간(懷安大君 芳幹)의 후손으로 최덕관(崔德觀)의 처이다. 남편 최덕관이 난치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먹이고,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이는 정성을 보였다. 그러나 그 정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노쇠한 시부모를 위로하여 곡소리도 내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남편의 소상 때가 되어 남편과 함께 묻어 줄 것을 유언하고 자진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명정되었다. 누차 중수한 기록이 있다. 이 비각은 1737년(영조 13년) 명정을 받아 1737년(영조 13년) 건립되었다.
* 광산김씨열녀각(烈婦光山金氏烈女閣) :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사곡마을
이 정려의 주인공 광산 김씨(光山 金氏)는 광성군 겸광의 후손으로 이름은 정숙(貞淑)이며, 상암거사 통덕랑 송민식(上巖居士 通德郞 宋民植)의 처이다. 1857년(철종 8년)에 출생, 19세에 출가하여 시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그런데 남편이 병으로 눕게되자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며 정성을 다하여 간호했으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광산김씨는 초종의 예를 정성스럽게 손수 치르고 낮에는 곡하고 밤에는 울지 않으며 3일이 되던 날 자결하였다. 그 때 집에서 기르던 소, 닭, 개가 함께 죽었으며 마을의 샘물이 일시 고갈되었다 한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1904(광무 4)에 정려가 내려졌다.
이 정려각은 사곡마을 도로변에 위치하는데 ‘열녀공인광산김씨지려(烈女恭人光山金氏之閭’라고 되어 있으며, 1904년(광무 8년) 명정, 1904년(광무 8년) 건립되었다.
* 밀양박씨열녀비(密陽朴氏烈女碑) : 익산시 모현동 2가
이 비의 주인공 밀양 박씨는 통덕랑 정유증의 처로 남편이 병이 나자 남편의 똥을 받아서 맛을 보면서 간병을 한다든지,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는 등 정성을 다하였으나, 남편이 죽자 상례를 마친 후 어린 자식을 남겨 놓은 채 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오랜 시일이 지난 후인 1891년에 정려를 명하여 이듬해에 정려각을 세웠다. 내용은 ‘열녀고통덕랑정유증처공인밀양박씨지려 상지이십구년임진오월 일(烈女故通德郞鄭有曾妻恭人密陽朴氏之閭 上之二十九年 壬辰 五月 日)’이다.
* 김소사열녀비(金召史烈女碑) :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이 열녀비는 여산정류소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비각은 없어지고 대리석으로 된 대좌와 100cm의 비신만이 남아있다. 비의 앞면에는 ‘열녀고업무방한창처김소사지려(烈女故業務方漢昌妻金召史之閭)’라 새겨져 있으며, 옆면과 뒷면에도 글이 새겨져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가 힘들다.
김소사는 방한창의 처로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길쌈과 품팔이로 어머니를 봉양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방한창과 결혼 후에는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겼다. 결혼 3년 만에 남편이 병에 걸려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나 결국 죽자 상을 치른 후 9일만에 목을 메어 자결하였다.
* 여산송씨열녀각(礪山宋氏烈女閣) : 익산시 여산면 제남리 상옥마을
상옥마을에 위치한 이 열녀각에는 아래 바닥에 ‘고려열녀여산송씨지려(高麗烈女礪山宋氏之閭)’라고 쓰여 있고, 또 한쪽에는 ‘하동정씨보첩석함(河東鄭氏譜牒石函)’이라고 새겨진 돌로 된 함이 남아 있는데, 하동정씨 보첩함이라고 쓰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 이 정려각의 돌함에 집안의 족보를 보관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정려각의 주인공 송씨는 정희중(鄭希重)의 처로 고려시대 사람이다. 고려시대 말 남편이 일본정벌의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하자 그 친정 부모가 송씨를 개가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시어머니가 다른 자식도 없이 홀로 살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거절하고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면서 끝내 정절을 지켰다. 그의 정절을 높이 기리기 위하여 열녀각이 세워졌다.
* 김해김씨열녀비(金海金氏烈女碑) : 익산시 삼기면 간촌리 소간촌마을
이 비는 소간촌마을 진입로 입구에 위치하는데, 비석 주위의 네 귀퉁이에 주춧돌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비석만 남아 있다. 비에는 ‘효열김해김씨지려 갑술 4월 일립 자 심선원 손 주택’이라고 되어 있다.
김해 김씨는 김병황(金秉璜)의 딸로 심능달(沈能達)과 정혼한 사이인데, 혼인이 이루어지기 전에 심능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슬피 울며, 시부모를 위로하고, 칠석이 되자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빠져 자살하였다.
▒ 선정비(善政碑)
* 윤하병공적비(尹河炳功績碑) :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화암서원 내
윤하병 공적비는 화암서원 앞에 서향하여 서 있는데, 비의 대좌는 2단의 화강암을 써서 조성하였고 비신은 80cm의 높이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졌다. 이 공적비는 화암서원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이 서원을 다시 복원하는데 공을 세운 윤하병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 지역의 사림들이 세운 비이다. 기유년 팔월에 김형규(金炯規)가 글을 짓고, 곤암 소세양의 후손 소진기(蘇鎭己)가 글을 썼다.
* 익산향교 앞 비석군 :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익산향교
익산향교의 정문앞에는 1827년에 세워진 군수 권철(權徹)의 영세불망비, 경술년 11월에 세워진 군수 김영석(金永錫)의 영세불망비, 1838년에 세워진 군수 이상우(李相佑)의 청덕선정비 등 총 16기의 비석이 세워져있다.
* 김병이영세불망비(金炳怡永世不忘碑) :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석불사 앞
이 선정비는 석불사 정문 718번 지방도로변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화강암으로 장방형의 비좌 위에 높이 138cm의 비신을 세우고, 지붕형의 개석을 비신 위에 얹었다. 비의 앞면에 ‘군수김후병이영세불망비’라 쓰여 있다.
* 웅포리 경로당 앞 비석군 : 익산시 웅포면 웅포리
웅포면 웅포리 경로당 앞 706번 지방도로 변에는 김정규시혜불망비를 비롯하여 4기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비 문
비의 크기
비의 건립연대
1
우의정조두순영세불망비(右議政趙斗淳永世不忘碑)
높이 140cm, 폭 52cm
丁巳 10월
2
용안현감윤후태철청덕선정비(龍安縣監尹侯泰喆淸德善政碑)
현감송후관수영세불망비(縣監宋侯觀洙永世不忘碑)
높이 140cm, 폭 52cm
丁巳 10월
3
김정규시혜불망비(金楨奎施惠不忘碑)
높이 96cm, 폭 37cm
甲戌 12월
4
유양숙영세불망비(劉良淑永世不忘碑)
높이 104cm, 폭 34cm
1929년 이 비는 장방형의 대석위에 화강암으로 된 높이 146cm, 폭 60cm의
* 홍기섭영세불망비(洪耆燮永世不忘碑) : 익산시 함라면 신목리 양산마을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기와지붕형 개석을 얹었다. 비의 앞면에는 ‘감찰홍후기섭영세불망비(監察洪侯耆燮永世不忘碑)’라 새겨져 있으며, 양 옆면에 도광(道光) 11년 신묘 6월에 익산 석수 송달명(宋達明)이 새겼다고 되어 있어 1831년에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 신도비(神道碑)
* 유계신도비(兪棨神道碑) : 익산시 성당면 와초리 하와마을
? 지정번호 : 지방문화재자료 135호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유계(兪棨, 1607년~1664년)의 호는 시남(市南),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김장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며, 예학과 사학에 밝아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이유태 등과 함께 충청도의 5현으로 일컬어졌다. 1633년 문과에 급제하여 무안현감, 홍문과 부교리,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두루 지낸 노론의 거두이다. 그는 1636년에는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임천으로 귀양갔으며, 홍문관 부교리로 있을 때 인조가 승하하자 묘호(廟號)를 정할 때 반대상소를 올려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온성과 영월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또한 효종이 승하하였을 때는 윤휴, 윤선도 등의 3년설을 반대하여 이들을 유배 좌천시키는 등 조선 후기 정치적 격변기의 한 중심에 그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소세양신도비(蘇世讓神道碑) :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이 신도비는 용화리 탄곡마을 옆 용화산의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비신의 높이는 218cm이며, 폭은 103cm이다. 화강암으로 된 방형 대좌위에 세우고 기와지붕형 개석을 얹었다. 비의 앞면 상단에는 ‘좌찬성소공신도비(左贊成蘇公神道碑)’라 새겨져 있는데, 비문은 강화군 홍섬(洪暹)이 짓고, 경기도 관찰사 심전(沈銓)이 전서(篆書)하였다.
양곡 소세양(1498 ~ 1546)은 그의 생존 당시 호남의 10대 시인중의 알려졌을 만큼 명문장가였으며, 호남에서 최초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지냈다. 을사사화 이후 고향인 익산으로 낙향하여 퇴휴당(退休堂)을 짓고 은거하면서 20여년동안 지역민의 교화와 사회기강의 확립에 노력하였다.
▒ 묘비(墓碑)
* 소광진묘갈(蘇光震墓碣) :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숭정 기원후 경자 3월 초에 세워진 소광진 묘갈비는 금마에서 미륵산으로 가는 지방도로에서 약 300m쯤 떨어진 오금산 북쪽 기슭에 위치한다. 김창집이 글을 지었으며, 글씨는 이언륜이 썼고 남도진이 전을 썼다.
소광진(蘇光震, 1566~1611)은 금마 출신의 문신으로 호는 후천(后泉)이고 본관은 진주이다. 현감 세득의 증손으로 32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문관 검열, 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다. 지제교를 역임하다가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46세에 요절하여 주위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 전우묘비(田愚墓碑) : 익산시 삼기면 현동리
구한말의 유학자인 전우(田愚)의 묘비는 화강암으로 된 장방형의 비좌 위에 높이 125cm의 오석으로 된 비신이 세워져 있다. 비의 앞면에는 ‘간재전선생지묘’라고 씌여 있다.
전우(1841년~1922년)의 호는 간재(艮齋), 본관은 담양이다. 전주에서 태어났으며, 21세에 아산에 머물고 있는 헌회 임선생을 찾아가 스승이 타계할 때까지 충청도에 머물면서 성리학을 배웠다. 이와 같이 학문이 깊어지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조정에서도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물리치고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가 68세 되던 해인 1900년 초반 나라가 더욱 어려워지자 부안과 군산 등의 섬을 오가며 학문을 가르쳤다. 72세 되던 해에 부안의 계화도에 정착하여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는 평생 6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 유계묘갈(兪棨墓碣) : 익산시 성당면 와초리 하와마을
유계의 묘비는 화강암으로 장방형의 좌대에 높이 155cm, 폭 71cm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묘갈비의 주인공이 유계에 대하여는 ‘신도비’조에 자세히 적었다.
* 양시우묘갈(楊時遇墓碣) :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상양마을
이 비는 상양마을 뒤의 용화산 북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장방형의 비좌위에 높이 152cm의 비신을 세웠으며, 그 위에 개석을 얹었다. 비의 앞면에는 ‘통정대부행병조정랑양공묘갈명(通政大夫行兵曹正郞楊公墓碣銘)’이라 쓰여 있으며, 조성시기는 ‘숭정삼신묘이월 일립(崇禎三辛卯二月 日立)’이라고 한 것을 보아 1831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비의 주인공인 양시우(1563년~1638년)의 호는 성천(聖泉)이며, 본관은 남양으로 금마출생이다. 1613년 문과에 급제하여 1615년(광해군 7) 능창군 추대사건에 무고로 연루되어 갑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이후 풀려나 병조정랑, 예안현감을 지냈다. 그는 이후 용화산 아래로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 송유익묘갈(宋有翊墓碣) :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여산송씨 제각 입구인 도로 우측에 위치하며, 비의 형태는 대리석으로 된 방형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옥개형의 개석을 덮었다. 비신의 높이는 223cm, 폭이 77cm이다. 비에는 ‘고려진사추봉은청광록대부추밀원부사송공휘유익묘비(高麗進士追封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宋公諱有翊墓碑)’라고 쓰여 있으며, 신해년 3월에 의금부도사 송병순이 짓고, 25대 후손 송영철이 글씨를 썼다고 되어 있다.
* 소세량묘갈(蘇世良墓碣) :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소세량 묘비는 용화리 탄곡마을 용화산 동쪽 기슭의 소세양과 소세온 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비신의 높이는 176cm, 폭이 63cm이다.
비의 앞면에는 ‘숙부인남원양씨지묘 통정대부사간원지제교소공지묘(淑夫人南原楊氏之墓 通政大夫司諫院知製敎蘇公之墓)’라 쓰여 있으며, 뒷면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렵다. 이 비문은 그의 동생 소세양이 지었다.
곤암공 소세량(蘇世良 1476~1538)은 양곡공 소세양의 세째형님이며. 찬성공(소자파공)의 2남으로써 조선 중기 대표적인 형제 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은 조선의 명도?이천으로 비유되기도 할 정도이다.
? 소세온묘갈(蘇世溫墓碣) :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이 비는 용화산의 소세량묘의 바로 아래쪽에 위치하는데 화강암으로 된 방형대좌 위에, 높이 123cm, 폭 53cm의 대리석으로 된 돌로 세웠다.
비의 앞면에는 ‘숙부인익산익산임씨지묘부좌 어모장군행임치진수군첨절제사 소공세온지묘(淑夫人益山林氏之墓附左 禦侮將軍行臨淄鎭水軍僉節制使 蘇公世溫之墓)’라 쓰여 있으며, 뒷면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렵다.
* 소자파묘갈(蘇自坡墓碣) :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소세량의 아버지 소자파의 비로서 탄곡마을 용화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는데, 방형대석 위에 세워진 비신은 대리석으로 높이 165cm, 폭 93cm이며 이수(?首)를 갖추고 있다. 비의 전액(篆額)은 ‘참판소공묘비명(參判蘇公墓碑銘)이라 쓰여있는데, 남곤(南袞)이 지었으며, 김희수(金希壽)가 썼다. 이 비의 건립시기는 비의 앞면에 ‘가정(嘉靖) 5년 5월에 세웠다’고 한 것으로 보아 1526년(중종 21)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 기타 비(碑)
* 모현기념비(碑石群) : 익산시 모현동 백산원 경내
백산원(柏山院) 경내에는 서향하여 좌에서 우로 4기의 대리석 비석이 배치되어 있다.
비석 1 : 전참봉노병권 중추원참의 윤돈영 모현기공비
(前參奉盧秉權 中樞院參議 尹敦永 慕賢起功碑)
비석 2 : 전주사 홍종주 전참봉 임병철 모현기공비 병자 삼월 일립
(前主事 洪鍾柱 前參奉 林秉澈 慕賢起功碑 丙子 三月 日立)
비석 3 : 전참봉 강기형 전주사 윤자필 모현기공비 병자 삼월 일립
(前參奉 姜基馨 前主事 尹滋弼 慕賢起功碑 丙子 三月 日立)
비석 4 : 전의관 임원호모현비(前議官 林元鎬慕賢碑)
* 군남석불중건비(郡南石佛重建碑) :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금마에서 삼례쪽으로 가는 국도변으로 부터 약 100m쯤 들어간 들판에 옥룡천이라는 좁은 냇가를 사이에 두고 2기의 석불이 마주보고 서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고도리 쌍석불입상’이다. 이 불상의 옆에 세워져 있는 것이 ?군남석불중건비?, 일명 쌍석불중건비(雙石佛重建碑)이다. 이 비석은 익산지역에 부임한 군수 황종석이 석상이 넘어져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석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그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비신은 대리석이며, 높이가 158cm쯤으로 화강암으로 된 방형대석위에 세워져 있다. 비의 뒷면에 ‘함풍팔년오월 일(咸豊八年五月 日)’이라는 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어 비의 건립시기가 1858년(철종 9)임을 알게 한다.
* 여산동헌 앞 비석군 :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여산면 여산리 여산동헌 경내의 객사 옆에는 1872년(고종 9)에 세워진 척화비(斥和碑), 1876년에 세워진 도순찰사 조성교의 선정비 등을 비롯하여 9기의 비석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 함열마포교중수비(咸悅馬浦橋重修碑) : 익산시 함라면 신목리 양산마을
이 비는 양산마을 마포교 서쪽 20m쯤 거리에 세워져 있다. 비신은 높이 120cm, 폭 59cm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화강암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세워져 있다. 비의 앞면의 글은 관찰사 박영원이 썼으며, 뒷면에 도광11년 신묘 4월이라고 새겨있는 것으로 보아 1831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누정(樓亭)
* 망모당(望慕堂) : 왕궁면 광암리 장암마을
? 지정번호 : 지방유형문화재 제90호
망모당은 이 지역 출신으로 조선 선조때의 학자인 표옹(瓢翁) 송영구(宋英?)가 1607년(선조 40) 부친상을 당한 이후에 그가 거처하던 집의 뒷뜰의 구릉부에 누당을 짓고 동쪽 멀리 우산(紆山)에 모셔져 있는 선영(先塋)을 늘 바라보고 기리기 위하여 지었다고 하며, 그리하여 누정의 이름도 망모당이라 하였다 한다. 누당은 정사방의 9칸 집으로 오른쪽 1칸에 방을 만들었는데, 1979년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누당의 부근에 100여명 정도가 앉아서 놀 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있어 마을의 이름을 장암(長岩)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바위 밑으로는 왕궁천(王宮川)의 냇물이 흐르고 있어서 이 누당 주변의 경치가 매우 좋다.
‘망모당(望慕堂)’이란 당액 세 글자는 표옹 송영구를 늘 스승으로 모시며 사모하던 중국 명나라의 대명필이자 재상을 지낸 주지번(朱之蕃)이 쓴 것이라 한다. 표옹선생과 주지번의 관계를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표옹선생이 명에 사신으로 들어갔을 때에 명경(明京)의 객관에 머무는데 숙소의 한 통인이 부엌에서 불을 때며 글을 외우는데, 그 글 읽는 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그를 불러 자세히 물어보니, 그는 멀리 서촉(西蜀) 땅에서 과거를 보러 명경에 와서 1차 과거에 응하였으나 낙방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 과거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실토함으로 표옹은 그의 지금까지 지어 둔 글을 가져오게 하여 보고 몇군데 잘못된 점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는 많이 깨달은 바가 있어 후에 과거에 합격하게 되었고 재상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주지번이다. 그리하여 주지번은 표옹을 늘 스승으로 섬겨 사신으로 조선에 가기를 원하여 여러번 나온 바 있다. 그런데 한 번은 사신으로 나와 보니 표옹이 이미 작고하였는지라 이 곳 장암까지 와서 그의 묘소에 참배하였다고 한다.
* 아석정(我石亭) : 금마면 서고도리 서계마을
서고도리 서계마을 귀대숲 산의 서쪽 중턱에 위치한 아석정은 전면 4칸, 측면 2칸의 주춧돌이 비교적 높고 천정이 낮아 견고하게 보인다. 이 누정은 1934년(甲戌)에 인근 행정마을에 살던 소진홍(蘇鎭洪)이 종친회의 도움을 약간 얻고 자신의 토지를 파는 등 개인 재산으로 지어 후진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루정의 북쪽 마당에는 임진왜란 때 이치전투에 출전하여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의병장 소행진(蘇行震)의 정려가 있다.
* 수덕정(修德亭) : 익산시 여산면 대성리
수덕정은 전면 2칸, 측면 2탄의 평기와를 한 팔작지붕의 누정으로서 무인(戊寅)년에 세워졌다. 통정대부 농은(農隱) 송기인(宋基仁)의 뜻을 받들고자 정각을 세우고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 함벽정( 涵碧亭) : 왕궁면 동용리 금광부락
? 지정번호 : 지방문화재자료 제127호
함벽정은 1920년 왕궁저수지를 만들기 위하여 쌓은 제방이 완성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왕궁면의 갑부 송병우(宋炳雨)가 개인 재산을 들여 창건한 정각(亭閣)이다.
정각의 주변에는 푸른 저수지물과 벚꽃나무 숲이 우거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여산송씨(鎭川宋氏) 제각 건물이 들어서 있는 아름다운 우산(紆山)이 있고, 서쪽으로는 시대산(始大山)이 솟아 있어 이 정각을 감싸주고 있어 봄, 가을의 이곳 경치는 극치를 이룬다. 실로 익산시에서 손꼽히는 경승지라 할 만하다. 사방 16칸의 큰 건물에 단청까지 되어있으나 근래에 들어와 관리가 쉽지 않자 익산시에서 이를 맡았다.
* 퇴휴당(退休堂) : 금마면 서고도리 행정마을 귀대숲
퇴휴당은 서고도리 태허정(太虛亭) 아래의 대나무 숲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이 을사사화 이후 관직에서 물러 나와 고향인 익산으로 낙향하여 은거하기 위해서 세운 집이다. 이곳에는 거처할 수 있는 집과 누정이 따로 세워졌다.
▒ 성곽(城郭)
* 오금산성(五金山城) : 익산시 금마면 용순리 산50번지
? 지정번호 : 사적 제92호
오금산성은 일명 보덕성(報德城)으로 불려지며, 공식 명칭은 익산토성(益山土城)이다. 보덕성이라 함은 고구려의 멸망 후 신라에 투항한 안승(安勝)을 금마저에 두어 고구려 왕이라 하였다가 후에 보덕왕이라고 한데서 비롯된다. 이 보덕왕이 거처하였던 보덕성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익산군 고적조에 ?보덕성은 군의 서쪽 1리에 유지가 남아 있다?고 한데서 이 오금산성을 지목해 왔고, 이러한 연유에 의해서 보덕성이라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2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오금산성은 그 입지나 구조 및 내부시설에 있어 산성의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어 보덕국의 치소로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오금산성이 언제 축조되었는가는 문헌의 기록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여기에서 출토되는 유물들로 보아 백제 말기에 축성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성곽의 주위는 690m이다. 동북과 서북?서남 우각(隅角)을 형성하고 있는 세 봉우리에 의해 형성된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의 평면구조로써 성곽이 위치한 최고봉과 성곽이 지나는 남쪽 골짜기와의 높이차이는 약 40m정도이다.
오금산성은 백제시대 토성으로 축성되었으나 후에 석성으로 개축하였는데, 남쪽 성벽 일부는 개축시 약간 앞으로 내어서 쌓고 있으나, 나머지 삼면은 성곽의 평면구조상 거의 변동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토성의 흔적은 우선 남쪽 성곽 서편에서는 석성으로 개축한 후의 남문지가 있는데, 이 남문지 서쪽에서는 폭 6m, 지반에서의 높이 2.6m의 판축토루(板築土壘)가 확인된다. 이 판축토루는 북쪽은 산 사면에 기대어 산탁(山托)을 하였고, 토루의 남쪽면 기단석렬과 함께 판축을 하기 위한 주공렬(柱孔列)이 보인다. 이 주공과 함께 판축토루가 끝나는 동쪽은 할석을 이용하여 남쪽과 북쪽에 면을 맞춰 협축(夾築)을 하였는데, 이 협축한 성곽의 내부는 흙과 잡석으로 다져 채웠다. 토성과 연결되어 할석의 협축을 한 곳도 확인되는데, 이곳이 수구면(水口面)에 위치하기 때문에 수구 시설과 문지(門址)의 설치를 위한 것으로 판단되나 당시의 발굴조사는 부분적인 조사였기 때문에 문지나 수구의 구조는 확인되지 않았다. 남쪽 성곽을 제외한 삼면의 성곽은 1~ 2단의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토루를 쌓았다. 대부분 산탁법에 의해서 축조하였는데 일부 지역에서는 내벽에서도 호석렬이 확인되기도 한다. 외벽의 기단석 전방에는 3~6m의 회랑도(廻廊道)를 두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나타나는 성곽의 높이는 기단석렬 바닥에서 약 4m 내외의 높이로 남아있다. 성곽의 동남우와 서남우에는 우루대지(隅樓臺址)가 있을 법하나 발굴결과 주변에 와편이나 토기편 등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을 뿐, 그 유지(遺址)는 확인되지 않았다.
* 저토성(猪土城) :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고적조사자료(古蹟調査資料)에 금마면 동고도리 읍치에서 북방 3정(町) 거리의 성황산(城隍山) 위에 주위가 4정 정도 되는 토성이 있는데, 중앙에 성황단이 있다고 하여 이 성을 ?성황산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 산은 성황산 외에도 ?굿대섭???향정산???여단재? 등으로도 불려지며, 주변에 ?돗토성?이라는 지명이 전해져 오고 있어서 이를 한문으로 옮기면서 저토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성곽의 연혁을 밝힐 수 있는 자료는 전혀 없기 때문에 어떠한 연유에 의하여 언제 만들어졌고, 언제 폐기되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단지 주변에서 발견되어지는 유물들에 의해서, 백제때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유물들이 산견되어지고 있어서 이 성곽은 고려시대까지는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될 뿐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에 여단(?壇)을 설치하였다. 성곽의 평면 형태는 민묘가 있어서 확실하지 않으나 동남쪽 모서리만이 우각을 형성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둥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표고 87m의 봉우리를 정점으로 하여 이 주위를 둘러싼 테뫼식의 산성이다.
* 낭산성(郎山城) :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산48
? 지정번호 : 지방기념물 제13호
미륵산에서 북방 약 4㎞의 낭산리 상랑마을 뒷산인 낭산(朗山)에 위치한다. 이 낭산성은 ?마한성(馬韓城)???구성(舊城)???북성(北城)?으로도 불려지고 있다. 마한성이라고 하는 이름은 ?익산군지?에 보이는데, 이 마한성은 부(府)의 서쪽 십오리 낭산 위에 위치하며 둘레는 일천삼백육척이고, 높이는 구척여라고 기록하고 있을 뿐 이 성곽을 언제 만들었고 어느 때 폐기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단지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마한때에 이 성곽을 쌓았기 때문에 마한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는 미륵산성이 기준성으로도 불려지고 있는 예와 같다고 할 수 있다.
* 어래산성(御來山城) : 익산시 웅포면 신목리
어래산성은 ?함열구지(咸悅舊誌)?에 보면 “御來山在邑西十里唐蘇定方征百濟時築堡”라고 하여, 당나라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할 때 쌓은 보루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금강변에는 백제시대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함라산성이나 도청산성?관원산성 등과 더불어 어래산성도 백제시대에 금강을 통해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설치했던 성으로 보인다.이 성곽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 단지 수습되는 유물을 통해 볼 때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또한 언제 폐기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고 유물 수습도 어려운 상태여서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학술적 조사가 필요하다. 성곽은 동쪽 능선과 남쪽과 북쪽의 산 사면을 돌아 내부의 골짜기를 감싸는 포곡식 산성으로써 둘레는 수평거리 485m로 실측된다.
* 미륵산성(彌勒山城) :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산북리
? 지정번호 : 지방기념물 제12호
다른 성곽에 비해 미륵산성의 연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세종실록지리지 및 익산군지등에 보이고 있다. 기록들은 대체적으로 비슷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중동국여지승람 익산군 성곽조를 보면, 이 미륵산성을 기준성(基準城)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용화산(현 미륵산) 산상에 있는데, 속전에 기준왕이 쌓았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함을 밝히고 있다.
이 성곽의 규모에 대한 문헌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둘레가 3,900척이고, 높이가 8척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의 길이는 수평거리가 1,776m로 확인되어 익산 일원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성곽이다.
성곽의 평면은 대부분 붕괴되어서 확실하지 않지만 동북과 서북 및 서남 모서리는 뚜렷한 우각의 흔적이 보이나, 동남 모서리는 지형에 따라 둥글게 처리한 것으로 판단된다. 서남우각에서 서북우각까지의 서쪽성벽은 비교적 반듯하며, 지형에 따라 약간씩 돌출된 지역에 2개소의 치(雉)를 두었다. 남쪽 성벽은 서남우각에서 동으로 272m 지점에 남문지(南門址)가 위치하고 있다. 서남우각에서 남문지까지의 성벽은 지형에 따라 굴곡이 있는데, 굴곡이 심한 돌출부가 치의 역할을 대신하기 때문인지 여기에서는 치가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남문이 있는 지역은 성벽이 비교적 반듯한 관계로 남문지 서쪽과 동쪽에 각각 1개소씩의 치를 배치하였다. 이 2개소의 치는 성문 좌우에 위치하고 있어서 적대(敵臺)로 볼 수도 있다. 남문지에서부터 비교적 반듯하게 이어지는 성곽이 내만하다가 동남 모서리에서는 다시 둥글게 돌출하고 있다. 이 비교적 반듯한 지점인 남문지에서 동으로 100m 지점에 치 1개소를 두고 있다. 그리고 동남 모서리는 둥근 형태로 축조되었기 때문에 동남 모서리에서 양방향 각각 20m 지점에 치 1개소씩을 배치하고 있다. 동쪽 성곽은 비교적 반듯하게 축조되었다. 동북우각에서 115m 지점에 동문지(東門趾)가 위치하고 있다. 이 동문지는 남문지와는 달리 옹성(甕城)을 두고 있다. 이 동문지에서는 남쪽과 북쪽에 각각 1개소의 치를 두었는데 문과 가까이 있어서 적대로도 볼 수 있다. 북쪽 성곽의 서반부는 비교적 굴곡이 심한데, 특히 서북우각부에서 직선거리 165m 지점은 심하게 돌출되어 있다. 그러나 동반부는 비교적 반듯하게 축조되었기 때문인지 동북우각에서 서쪽 120m 지점의 약간 돌출된 지역에 치 1개소를 두고 있다.
* 천호산성(天壺山城) :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산9번지
이 천호산성은 대성(臺城) 혹은 농성(農城)으로도 불려진다. 천호산성이 위치한 천호산에 대해서는?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여산군 산천조에 호산(壺山)이 군 동쪽 5리에 있고 진산(鎭山)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고 성곽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 천호산성에 대한 기록은 단지 ?여산구지(礪山舊誌)?에 보이는데 ?천호성은 부(府)의 동쪽 십리에 있는데, 성(城)아래에는 용추가 있다?라고만 되어 있어서 문헌을 통해 이 성곽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단지 지표상에서 백제시대의 수막새 기와와 더불어 몇몇의 유물을 통해 볼 때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 산성은 후백제와 고려군의 격전지로도 전해져 오고 있다.
천호산성은 익산석회광산 서쪽 표고 500.2m 최고봉에 위치하고 있는데, 익산시 여산면과 완주군 비봉면의 경계에 있다. 주변에서 최고봉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익산지방에 산재해 있는 대부분의 성곽이 여기에서 조망되어지는 천혜의 요새이다.
* 학현산성(鶴峴山城) : 익산시 왕궁면 동용리 산79번지
학현산성이 만들어지는 연유나 연혁을 밝힐 수 있는 문헌자료는 없다. 단지 전해오는 바에 의해 삼국시대에 축성했던 성곽이라고만 하고 있다.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승석문이 시문된 토기편들이 간혹 보이고 있어서 이 성곽은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성곽이 언제 폐기되었는지도 문헌에는 전해오는 바가 없다. 그러나 성곽 내부에서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유물들이 보이고 있어서 이 시기까지는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곽은 천호산에서부터 서남주하는 지맥이 문드러미재에서 갈리어, 한줄기는 서쪽 용화산 방향으로 이어지고, 한줄기는 남쪽 봉동읍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이 봉동 방향의 학현산 표고 214m에 위치한다. 이 학현산성은 남쪽에 금마에서 봉동으로 이어지는 길과, 동쪽에는 봉동에서 비봉?화산으로 이어지는 길과 접하고 있다.
학현산성은 주봉과 그 서남쪽 능선을 기점으로 해서 양쪽 산사면을 따라 이어지면서 그 내부의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700m에 이르는 석성이다.
우선 남쪽 성곽을 보면, 표고 214m의 주봉에서 서남방 직선거리 106m에 위치한 표고 205m의 봉우리 사이의 능선 사면을 감싸며, 여기에서 약간 서절하여 산 사면을 따라 내려가 170m 지점에 서남 모서리가 형성되어 있다.
* 함라산성(咸羅山城) : 익산시 웅포면 송천리 39번지
함라산성의 축성 연유나 연혁을 밝혀주는 자료는 전혀 없다. 함라산이 위치한 금강을 연하고 있는 산줄기에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하는 어래산성(御來山城)과 도청산성(都廳山城) 및 관원산성(官元山城) 등이 인접해 있어서 이 함라산성도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자표상에서는 확실한 백제시대의 유물을 찾아지지 않았다. 통일신라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은 보이지 않고 있다. 테뫼식의 성곽 형태는 백제적인 형식을 하고 있다하여도, 함라산성의 축성시기는 앞으로 좀더 조사하여 밝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분묘(墳墓)
* 쌍릉(雙陵) : 익산시 석왕동 55
? 지정번호 : 사적 제87호
익산시 석왕동 왕뫼라고 불리는 곳의 구릉상에 2기의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 있는데 이것이 익산쌍릉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 ?고적?조에는 “쌍릉은 오금사(五金寺) 봉우리 서쪽 수백보되는 곳에 있다. 고려사에서는 후조선 무강왕(武康王)과 그 왕비의 능이라 하였는데 속칭 말통대왕(末通大王) 능이라 한다. 일설에는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인데 말통은 즉 서동(마(薯)동)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쌍릉에 대한 위치와 이 능의 주인공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일제시대에 발간된 조선고적조사보고에 의하면 분묘의 양식은 부여 능산리 백제왕릉이라 전하는 5호분과 수법이 같은 석실분으로 백제말기의 것으로 보고 되었다. 원형 봉토에 주위에 괴석(塊石)을 두른 석열의 흔적이 있고 석곽(石槨)은 화강석으로 된 대판석(大板石)으로 짰으며 현실(玄室) 앞에는 단면 사각형의 연도(羨道)가 있고 장방형 큰 판석으로 현실 입구를 막았다. 현실(玄室)은 단면 6각평의 간단한 말각천정(抹角天井)을 갖는 평면장방형의 석실로서 석실중앙에 화강석으로 만든 관대(棺臺)가 있고 그 위에 윗쪽이 넓고 아랫쪽이 좁으며 둥근 뚜껑을 덮은 목관을 올려 놓고 있는데, 목관에는 10여개의 옥정(玉釘)이 사용되어 백제 말기의 왕능일 가능성이 짙은 왕릉의 구조를 갖추었다.
소왕묘와 대왕묘의 양식은 동시대의 것으로 두 능이 모두 도굴 당하였지만 대왕묘에서는 부패된 목관파편과 토기완(土器碗) 1점을 수습하였는데, 이 유물이 이 능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대왕묘에서 발굴된 목관은 남은 조각에 의거하여 그 모양을 복원,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현재 이 능은 고조선 준왕의 남천설(南遷說)과 결부되어 청주 한씨(韓氏)들이 그들의 조상의 능으로 받들고 석물을 갖추고 묘역을 꾸미고 매년 시제를 지내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두 개의 능 가운데 북쪽 것을 대묘(大墓) 대왕묘(大王墓)라고 부르고 남쪽의 것을 소묘(小墓) 소왕묘(小王墓)라고 칭하는데 소왕묘에서는 부장품이 도굴되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 단군성묘(檀君聖廟) : 익산시 동산동 353-3
? 규모, 구조 - 천진전 : 전면 3칸 측면 3칸반 맞배지붕, 동재, 서재 : 각 5칸
봉성원 : 3칸, 묘직사 : 3칸, 외삼문 : 3칸
? 향사일 : 춘계 3월 15일(어천대제), 추계 10월 3일(개천대제)
이 단군성전에 모셔진 단군영정은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이 만주 망명 중에 소장하였던 단군의 영정을 광복 후 서울로 옮겨왔다가 1946년(단기4279년) 중광절에 이 곳에 봉안했다. 같은 해에는 10월 3일 개천절을 기하여 단조봉성회를 결성를 갖고 1947년(단기4280년) 3월 15일에는 사당 재건 기공식을 갖고 1949년(단기4282년) 5월 5일 상량식을 가졌으며 1951년(단기4284년) 10월 3일에 묘우 낙성식과 동시에 남향으로 전면 3칸의 본당 천진전에 단군영정을 봉안하였다.
* 웅포리 고분군(熊浦里 古墳群) : 익산시 웅포면 웅포리
웅포리 고분군은 1986년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실시된 익산군 관내 지표조사에서 확인될 당시 도굴과 자연유실, 민묘축조 등으로 인하여 많이 파괴되어 있었고, 1987년, 1992년과 1993년에 발굴조사를 실시환 결과 수혈식, 횡구식, 횡혈식 고분과 소형 석곽분들이 확인되었다.
고분군에서 나온 유물로는 삼족토기(三足土器), 이식, 연남형 토기 등이 있는데, 이들 분묘의 양식과 유물의 형식을 통하여 이 고분군의 축조연대를 대략 5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고분에 묻힌 피장자는 금강유역을 기반으로 하는 유력한 세력집단일 것으로 보인다.
* 입점리 고분군(笠店里 古墳群) : 익산시 웅포면 입점리
? 지정번호 : 사적 제 347호
입점리 새터마을에 위치한 고분군이 문화재관리국에 의해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986년 1호분의 발견과 신고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총 6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는데 특히 1호분은 발견 당시 석실 안에서 금동제 식리(飾履), 금동제 관모(冠帽), 철제 등자(?子), 마구(馬具), 은제 행엽(杏葉), 백제 토기, 중국 청자사이호(靑瓷四耳壺) 등이 수습되었고, 이 후의 본격 발굴작업 과정 중에 금동제 관식편(冠飾片), 금제 이식(耳飾), 유리옥 등이 출토되었다.
1호분 이외의 나머지 고분들은 크게 훼손되어 출토유물이 거의 없고, 다만 분묘의 형태가 석실분이었음만을 알 수 있었다. 이들 유물을 통하여 이 무덤의 피장자는 금동제 관식을 쓸 수 있고, 중국의 청자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을 가진 사람으로 금강유역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서방동 고분군(西方洞 古墳群) : 익산시 웅포면 입점리
서방동 고분군은 입점리 고분이 위치한 서방동 뒷산에 위치한다. 개석으로 보이는 할석(割石)들이 노출되어 있고 약간의 봉분의 형태를 드러내고 있는 고분들이 산재해 있다.
* 용두리 고분군(龍頭里 古墳群) : 익산시 용안면 용두리
용두리 고분군은 벌목으로 인한 산사태로 고분의 윤곽이 드러나자 도굴이 매우 성행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수습 유물로는 고분 두 곳에서 파손된 광구호(廣口壺), 소호(小壺), 삼족토기, 고배(高杯)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 성남리 고분군(城南里 古墳群) : 익산시 낭산면 성남리
성남리 고분군(城南里 古墳群)은 익산 미륵사지에서 함열로 향하는 포장도로 중간지점인 연동리에서 718번 지방도를 따라 낭산쪽으로 1km 지점 성남리에서 다시 낭북리로 통하는 작은 길 옆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분이 위치한 야산의 북쪽으로는 하나의 구릉을 건너 낭산성이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함열까지 평야가 펼쳐져 있다. 1994년부터 1995년까지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이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모두 28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대부분의 고분들이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으며, 도굴이 심하여 유물은 수습되지 않았다. 고분을 축조한 연대를 밝힐 수 있는 유물이 전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고분군의 조성시기는 고분의 구조적인 특징을 통하여서만이 추정되었다.
고분의 구조적인 특징을 통하여 밝혀진 이 고분군의 조성시기는 주로 백제시대 후기인 7세기 중엽 경에 해당하며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곽분에서는 백제시대의 고분전통이 보이고 있어서 오랜 동안 백제고분의 전통이 축약과 변형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고분군의 중심연대인 7세기 중엽경의 고분의 피장자는 금마지역 일원의 백제 말기의 유적과 관련이 있는 집단일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 율동리 고분군(栗洞里 古墳群) : 익산시 황등면 율촌리
율동리 고분군(栗洞里 古墳群)은 황등에서 삼기방면으로 718번 도로에서 율동마을로 진입하는 작은 길을 따라 율동 들판을 따라가면 남으로 돌출한 산자락에 위치한다. 정상부 해발 19.2m 지점에서의 석관묘 1기와 남동 사면에서의 파괴된 고분 1기 등 2기의 삼국시대 고분이 발견되었는데, 석관묘가 노출된 곳에서는 철부(鐵斧) 1점이 수습되었으며, 파괴분에서는 방추차와 직구호(直口壺) 1개분의 토기편들이 수습되었다.
* 원수리 고분(原水里 古墳) :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원수리 고분은 1번 국도 연명마을 지점에서 동측으로 해발 166m의 야산 남쪽에 위치한다. 이곳에서는 삼국시대의 고분 1기가 발견되었는데, 수습조사한 결과 고분은 궁륭식 천정 구조를 하고 있었으며, 연도(羨道)는 파괴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 다송리 고분(多松里 古墳) : 익산시 함열읍 다송리
다송리 고분은 황등에서 함열의 중간지점에 있는 휴게소 건너편 야산 정상부근에 파괴분으로 남아 있다. 현재 노출된 석재는 개석(蓋石) 1매와 5°정도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 북쪽 벽석(壁石) 1매가 남아 있다. 이들 석재는 화강암 판석으로 판석의 안쪽 부분은 잘 다듬어져 있고, 그 크기는 65cm×65cm로 거의 정방형이다.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는데, 고분의 서벽 토층에서 도굴된 흔적이 나타난다.
* 신리 옹관묘군(新里 甕棺墓群) : 익산시 망성면 신리
신리 옹관묘군은 강경에서 망성면 소재지를 지나 여산 쪽으로 6km 정도 가다보면 나오는 새말마을에서 약 500여m 정도의 야산과 밭에 위치한다. 이 야산은 현재 밭으로 개간되어 경작되는데, 밭으로의 개간과 후대 사람들의 무덤 안장의 과정에서 옹관묘 유적이 많이 파괴되었으나 익산지역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옹관묘군이기에 그 중요성이 매우 높다. 특히 이 곳에서 대형 옹관편이 발견되어져 이 무덤의 주인공이 지배계층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이 고분군의 맞은편 야산에서는 1966년 대호(大壺)가 발견되어 현재 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요 지
* 신용리토기요지(新龍里土器窯址) :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 지정번호 : 지방 기념물 14호
신용리토기요지는 금마에서 산북리로 통하는 작은 길을 따라 2km정도 가다보면 미륵산과 용화산을 연결하는 숫고개 평지가 나오는데, 바로 여기에 위치하고 있다. 요지에 해당하는 부분은 볼록하게 언덕처럼 구릉을 이루고 남아 있으며, 부근에서는 삼족토기(三足土器)나 토기호(土器壺) 파편 등 백제시대의 토기편들이 많이 수습되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익산종합고등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서 수습되고 있는 삼족토기편과 같은 토기편이 익산토성의 발굴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곳에는 백제시대에 이 인근에 토기를 공급하던 대규모의 가마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며 금마지역의 백제시대 문화를 고찰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곳이다. 현재 이 요지가 위치한 곳은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어서 일반인의 통행은 통제되고 있다.
* 연동리요지(蓮洞里窯址) :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연동리요지는 금마 - 낭산 방면 718번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 석불사에서 성남교회방향으로 들어와 연동마을을 지나 채산마을로 들어가는 길 동쪽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가마터로 추정되는 바로 아래는 논으로 경작 중이며, 소나무 숲이 들어차 있다. 채산마을 남측으로는 태봉산이 위치하고 있다. 이 요지에서는 백자편이 다량으로 수습되었으며, 화살촉도 1점 수습되었다.
* 동촌리와요지(東村里瓦窯址) : 익산시 왕궁면 동촌리
동촌리와요지는 도리산 서측사면으로 포전마을에서 동측으로 100여m의 거리에 위치하며, 현재 산사면의 하단에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개간되지 않은 지역은 잡목과 소나무 등이 우거져 있다. 도리산과 포전마을 사이에는 시대산(해발 277m)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좁은 하천과 논이 있으며, 북동측 200m 지점에는 동촌제가 있다. 유물이 수습된 곳은 산의 서쪽 사면으로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 지점과 동측 바로 옆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 숲에는 무덤이 5기 정도가 있으며, 밭과 무덤 주변에서는 원호문의 조선시대 암?수기와 및 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 동촌리토기요지(東村里土器窯址) : 익산시 왕궁면 동촌리
동촌리토기요지는 왕궁목장 소유의 사과밭으로 목장 축사에서 약 5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서북쪽으로는 50여m 지점에 동촌제가 있으며, 북쪽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 지역은 1986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이미 조사한 바가 있는데, 조사 당시는 인삼밭으로 경작되고 있었으나 지금은 4~5년생의 사과나무가 심어져 있다. 토기편이 수습되는 지점은 북측사면으로, 사과밭의 경작과정에서 다량의 토기편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목장 주인의 말에 의한다면 가마터임을 알 수 있게 한다.
* 다송리와요지(多松里瓦窯址) : 익산시 함열읍 다송리
다송리와요지는 상마마을 북동측 200m 지점에 남북으로 발달된 구릉에 위치하는데, 구릉의 정상에는 포도과수원과 화훼하우스 2동이 있으며 구릉 남측에는 민묘 6기와 개간된 밭이 있다. 구릉의 남동측으로 샛터들, 상만이골 등의 곡간평야가 있으며 삼기면 서두리 원형동이 샛터들을 사이에 두고 있다. 다량의 기와편, 전편 및 토기편이 수습되었으며 가마벽체로 보이는 유구가 단면에서 확인되어 와요지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 고가(古家)
* 가람 이병기선생 생가(嘉藍 李秉岐先生 生家) :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 지정번호 : 지방기념물 제6호
건물은 조선 말기의 형식으로 고패형식의 안채와 일(一)자형의 사랑채, 고방채, 모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입구 쪽에 세워져 있던 3칸의 행랑채는 근년에 철거되었으며, 모정 앞에는 두 곳에 자그마한 못을 파 놓았으며 모정 뒷면에는 일꾼을 위한 각각 1칸씩의 방과 부엌으로 구성된 외딴 채가 있다.
잡석의 축대(높이 60cm) 위에 세워진 안채는 안방, 마루, 건너방,,부엌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방의 일부와 정지가 이어 달려서 ㄱ자형의 고패집이 되었다. 지붕은 원래 초가였으나 근년에 양기와를 얹었다. 규모가 비교적 큰 안방 석축에는 칸을 막아서 찻방을 차리었으며 건너방의 측면과 전면에는 퇴를 놓았다.
‘수우재(守愚齋)’ ‘진수당(鎭守堂)’ 등의 현판이 걸려 있는 4칸의 사랑채는 (서쪽으로부터) 2칸의 사랑방과 한 칸의 부엌, 그리고 한 칸의 서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이 건물도 원래는 초가이던 것을 근년에 양기와로 바꾸었다. 모정은 근년에 재건되었다. 3칸의 고방채는 광, 헛간 안이라고 하는데, 변소로 이루어졌다. 건물 자체에는 이렇다할 특징은 없으나 안채나 사랑채의 건물이 고풍스럽고 소박하며, 집 안에 모정을 짓고, 그 앞에 못(池)을 마련하는 등 선비의 가옥으로서 조촐한 맛을 보여주는 집이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 건물 지붕이 초가에서 서양 기와로 개량되어 원래의 모습이나 분위기가 많이 사라졌음이 아쉽다.
* 김안균 가옥(金安均 家屋) :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 지정번호 : 지방민속자료 제23호
김안균 가옥은 대지 2,318평에 건평 188평의 건물로 건축년대는 그리 오래지 않으나 전북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가옥이다. 이 고가의 특징은 서양식 건물처럼 침실과 거실이 분리되어 사랑채 가장 깊숙한 곳에 침실을 별도로 두었고, 사랑채와 안채를 외부에서는 벽돌담으로 차단하였으나, 내부에서는 복도와 통하도록 문을 달아 두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사랑채는 팔작지붕의 건물로 6칸 대청은 누마루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집은 현재 민속자료 제 23호로 지정되어 고가(古家) 문화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 조해영 가옥(趙海永 家屋) :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 지정번호 : 지방문화재자료 제121호
조해영 가옥은 김안균 가옥에서 동편으로 한 집 건너에 있는 가옥이다. 원래는 본채를 비롯하여 여러 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안채 1동과 별채 1동, 그리고 문간채가 변형되어 남아있다. 이 집은 안채의 상량문에 대정(大正) 7년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18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이 건물을 사용하지 않아 거의 퇴락 직전에 있어서 보수 중에 있다. 안채 동편쪽 입구에는 조선시대 학자인 김육(金堉, 1580~1658)의 선정비가 있다.
▒ 관아지
* 여산동헌(礪山東軒) :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 지정번호 : 지방유형문화재 제93호
여산면 여산리 당산의 서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여산동헌은 옛 여산부(礪山府)의 동헌의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보존되고 있는 건물로 전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목조건물이다. 이 건물은 한동안 여산 우체국의 청사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경로당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동헌의 옆에는 여산에 부임했던 관리들의 선정비(善政碑)와 여산초등학교 주변에서 최근에 옮겨 온 척화비(斥和碑)가 세워져 있다. 한편 동헌 앞 담장 바로 바깥에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당시 천주교 신도들의 순교장소였던 ‘백지사(白紙死)터’가 있어서 조선 후기 역사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함열현 관아지 : 익산시 함열면 함라리
함열면 함라리에 있던 함열현의 관아는 원래 함라(咸羅)의 객사와 동헌, 현사(縣司), 향사청, 공수청(公須廳), 군기청, 책실, 초실(草室), 향청, 작청(作廳), 형리청, 장청(將廳), 서청(書廳), 통인청, 관노청, 사령청 등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전부 헐어져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 조창지(漕倉址)
* 진성창(鎭城倉) : 용안면 용두리와 창리에는 고려 말과 조선전기에 운영되었던 조창 터가 있다. 원래 임피에 있던 조창인 진성창(鎭城倉)은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공민왕때에 이르러 용안면 용두리로 옮겨 덕성창(德城倉)을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수로의 불편함으로 인하여 함열의 피포(皮浦로) 옮겼다가 1482년(성종 13)에 다시 용안면 창리로 옮겨, 1512년(중종 7)에 조창이 다시 군산의 군산창(群山倉)으로 옮겨질 때까지 약 30여년간 득성창(得城倉)이 운영되었다.
* 성당창(聖堂倉) :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 성포
성당창은 조선 후기 인근 8개고을의 세미(稅米)와 2개 고을의 대동미(大同米)를 받아 보관하던 성당면 성당리 성포에 있던 조창이다. 이곳에는 한척에 쌀 800석에서 1000석 정도를 운반할 수 있는 조운선(漕運船)을 14척이나 보유하고 있었던 꽤 큰 조창이다. 세금의 수남과 운송을 처음에는 군산첨사(群山僉使)가 담당하다가, 고종때에 이르러서 함열현감(咸悅縣監)이 담당하였다.
▒ 천연기념물
* 신작리(新鵲里) 곰솔 : 익산시 망성면 신작리 518
?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 188호
천연기념물 제188호 신작리 곰솔은 신작리 수월마을에 살고 있는 조씨의 8대조 묘옆에 있는데, 이 소나무의 크기는 밑 둘레가 3.55m, 높이 10.2m, 가지의 길이 동쪽 8.5m, 서쪽4.1m, 남쪽 9.4m, 북쪽 6.2m의 거목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 위는 밋밋하고 가지는 밑으로 처진 모양이다. 수령은 약 350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임진왜란때 이 곳을 지나던 풍수지리에 밝은 나그네가 이곳의 지세를 보고 그대로 지나칠 수 없어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 곰솔이 위치한 신작리 수월마을 주민들과 인접마을인 충남 논산군 강경읍 채운동 주민들은 매년 음력 섣달 그믐이 되면 공동으로 재물을 마련하여 이 나무에 치성을 드리는 풍습이 오래 전부터 내려왔다고 하는데, 이 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익산구지(益山舊誌)에 보면 “천년송이 북일면 연주산사곡에 있어 수백년 이전부터 천년송이라고 불러왔으므로 몇천년된 소나무인지 모른다. 붉은 갑옷 푸른 구렛나루수염 용이 서린 듯 호랑이가 웅크린 듯 우뚝 선 기상은 군자의 늠름함 같다. 나뭇가지는 서린 것 같고 덮은 것 같아 그 그늘이 한 골짜기를 꽉 채웠다. 소치는 더벅머리 아이들과 나뭇꾼들이 더위를 피하여 쉬고 유랑과 풍류객들이 모여 시를 읊고 술 마시며 노니 볼만한 곳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이 신작리 곰솔 이외에도 거목의 소나무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천호동굴(天壺洞窟) :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 188호
여산면 호산리 해발 약 500m의 천호산 서북방에는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길이가 총 677m에 이르는 동굴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천호동굴이다. 입구에서 50여m지점까지는 폭 2~4m, 높이 3~6m의 그다지 크지 않으나, 입구에서 100m지점에서는 왼편으로 다시 지혈이 약150m 뻗고 있으며, 입구에서 250m 지점에서는 높이가 12m, 폭이 10m의 40㎡ 정도의 40여명이 앉을 만한 4층의 작은 광장이 형성되어 있는데, 속칭 수정궁(水晶宮)이라 불리우고 있다.
수정궁은 이 천호동굴의 절경으로 천정에는 높이 12m의 석주(石柱)가 군립하고, 바닥에는 직경 5m에 달하는 석순(石筍)들이 떠오르는 구름처럼 깔려있으며, 석주 뒤쪽에는 직경 약 2m의 작은 못이 있는데 방해석이 다시 결정을 이루고 있는 등 신비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동굴은 1965년 이 지역에 살고 있던 황성호(黃聖浩) 목사가 지금까지 신비에 싸여 있던 동굴 내부를 답사하여 많은 종유석(鐘乳石)과 석주, 석순 등이 있는 황홀한 경관의 동굴임을 알고 천호동굴(天壺洞窟)이라 이름붙이면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기록에 의하면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동굴의 존재는 알려져 왔었다.
동국여지승람 여산군 산천조에서는 “누항은 군 동쪽 7리에 시내가 있는데 고산현에서 출발해서 서쪽으로 흐르다 스며 호산(壺山) 산록으로 들어가 땅속으로 흘러 호산 서쪽에 이르러 시내가 되었다. 물이 나오는 구멍의 지름이 1장 가랑인데 속칭 용추(龍湫)라 전해지고 있다. 날이 가물면 여기서 비를 빈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처럼 어떤 형태로든 이미 수백년전부터 구멍 둘레가 1장이 넘는 동굴이 있었음이 알려져 왔던 것 같다.
또한 구여산군지(舊礪山郡誌)에서도 천호동굴을 풍혈이라 불리어 “풍혈은 여산면 천호산 북쪽 골짜기에 있는데, 언제나 은은한 뇌성이 들리고 춘분(春分) 후에는 바람이 구멍으로부터 나오고 추분(秋分) 후에는 바람이 굴로 들어간다. 시험삼아 물건을 던져보면 바람 따라 들어가고 바람 따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고도 소개하고 있어 큰 동굴이 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그러나 그 후 중도에 토사로 바람구멍(風穴)이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