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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에서 만난 노인
- 강남주 -
오늘이 12월 1일이다.
한 해가 한 장의 달력에 매달려
바닷가 가게 벽에서
안간힘을 하면서 펄럭이고 있다.
체감이 더욱 차겁다.
바람은
어쩌자고 서성이고만 있나.
출렁이는 바다 위를 힘살 좋게 날고,
갈매기만 춥지 않은가.
먼 경치와 대조를 이루면서
노인 한 분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12월의 시
_ 강은교 _
잔별 서넛 데리고
누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처마끝마다 매달린
천근의 어둠을 보라
어둠이 길을 무너뜨린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일년의 그림자도 지워버리고
그림자 슬피 우는 마을마저 덮어 버린다
거기엔
아직 어린 새벽이 있으리라
어둠의 딸인 새벽과
그것의 젊은 어머니인
아침이
거기엔
아직 눈매 날카로운
한때의 바람도 있으리라
얼음 서걱이는 가슴 깊이
감춰둔 깃폭을 수없이 펼치고 있는
바람의 형제들
떠날 때를 기다려
달빛 푸른 옷를 갈아 입으며
맨몸들 부딪고 있으리라
그대의 두 손을 펴라
싸움은 끝났으니, 이제 그대의 핏발선 눈
어둠에 누워 보이지 않으니
흐르는 강물소리로
어둠의 노래로
그대의 귀를 적시라
마지막 촛불을 켜듯
잔별 서넛 밝히며
누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그림자를 거두며 가고 있다
12월의 단상
- 구경애 -
저기 벌거벗은 가지 끝에
삶에 지쳐
넋 나간 한 사람
걸려 있고
숭숭 털 빠진
까치가 걸터앉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참새는 조잘거리고
지나던 바람은
쯧쯧,
혀차며 흘겨보는데
추위에 떨던 고양이 한 마리
낡은 발톱으로 기지개 편다.
12월의 시
- 구상나무 -
12월엔 산속 깊은 곳
장작불로 방 따뜻하게 지피는
하얀눈 소복히 쌓인 산골짜기 산막으로 가고싶다.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나무 장작 한토막 한토막을 불속에 집어 넣으며
정답게 이야기 나누었던 그리운 모습들을
훨훨 타오르다가
숯이 되어 이글거리는 불꽃 속에서
하나 둘씩 떠 올려 보고 싶다.
날아가는 새들에게도 말 없이 서 있는 나무들에게도
12월이, 1월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는 못 하겠지만
깊어 가기만 하는 어둔 밤길 따라
아궁이 속 사그러지는 숯불 속에 묻어 둔
하나, 둘 구워지는 구수한 밤톨처럼
살며 느꼈던 정들을 한겹 두겹 벗겨 내며
내 눈길 속에 다가오는 사람들의 따뜻했던 인정들을
다시 한번 생각 하면서
새해에는 나도 그들에게 따뜻한 장작 숯불처럼
참 인정 많고 서글서글한 좋은 사람이였었노라고
기억 되었으면 좋으련만
12월은 그렇게 조용히 저물어 가는구나.
12월의 시
- 김사랑 -
마지막 잎새같은 달력
다시 시작 했으면 좋겠네
일년동안 쌓인 고통은
하얀 눈속에 묻어두고
사랑해서 슬픈 그림자는
빛으로 지워버리고
모두 다 끝이라 할때
후회하고 포기 하기보다는
희망이란 단어로
다시 일어 났으면 좋겠네
그대 사랑 했으면 좋겠네
그대 행복했으면 좋겠네
12월
- 김선호 -
담벼락을 타고 오르던
담쟁이넝쿨이 거친 마디를
드러낸 채 말라 가는 추억처럼 붙어있다
하늘 한쪽 잡겠다고 닿는 것마다
기대고 부풀리던 맥박이 식어가고 있다
옆으로 뻗어 난 길 다 젖혀 두고
수직으로 올라서야 직성이 풀리던
기억도 떨어져 나갔다
살짝 건드리면
주저앉을 것 같은 마른 몸으로
그리움 한 귀퉁이를 붙잡고 있다
허공에서
잡히는 빈손을 거두기 민망해
앙상한 뼈를 드러낸 채
차디찬 담벼락에 매달려 있다
12월의 기도
- 목필균 -
마지막 달력을 벽에 겁니다
얼굴에 잔주름 늘어나고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섞이고
마음도 많이 낡아져 가며
무사히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세상살이
일 초의 건너뜀도 용서치 않고
또박또박 품고 온 발자국의 무게
여기다 풀어놓습니다
제 얼굴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지천명으로 가는 마지막 한 달은
숨이 찹니다
겨울 바람 앞에도
붉은 입술 감추지 못하는 장미처럼
질기게도 허욕을 쫓는 어리석은 나를
묵묵히 지켜보아주는 굵은 나무들에게
올해 마지막 반성문을 써 봅니다
추종하는 신은 누구라고 이름짓지 않아도
어둠 타고 오는 아득한 별빛같이
날마다 몸을 바꾸는 달빛 같이
때가 되면 이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의 기도로 12월을 벽에 겁니다
송년회
- 목필균 -
후미진 골목 두 번 꺾어들면
허름한 돈암 곱창집
지글대며 볶아지던 곱창에
넌 소주잔 기울이고
난 웃어주고
가끔 그렇게 안부를 묻던 우리
올해 기억 속에
너와 만남이 있었는지
말로는 잊지 않았다 하면서도
우린 잊고 있었나 보다
나라님도 어렵다는 살림살이
너무 힘겨워 잊었나 보다
12월 허리에 서서
무심했던 내가
무심했던 너를
손짓하며 부른다
둘이서
지폐 한 장이면 족한
그 집에서 일 년 치 만남을
단번에 하자고
중앙고속도로에서
- 박 건 호 -
지금
해운대 밤바다에서
한 여자가 울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어둠 속 어디선가
익사한 추억들을
건져 올리는 지도 모른다
아니 아직은 경부선 열차에 앉아서
한 사나이의 아픔은
미처 기억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상처만을 안고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지도 모른다
2002년 12월 14일
파도소리 같은 바람이
윙윙윙 울어대는 깊은 산중
기적소리가 사알짝 오버랩되는
중앙고속도로에서
나는 화살촉 꽂힌 아기 사슴처럼
외로움을 피해
너의 가슴으로 숨어든다
발가벗겨진 채
숨어든다
12월에
_ 박상희, 1952 - _
가슴에 담아두어 답답함이었을까
비운 마음은 어떨까
숨이 막혀 답답했던 것들
다 비워도 시원치 않은 것은
아직 다 비워지지 않았음이랴
본래 그릇이 없었다면
답답함도 허전함도 없었을까
삶이 내게 무엇을 원하기에
풀지 못할 숙제가 이리도 많았을까
내가 세상에 무엇을 원했기에
아직 비워지지 않은 가슴이 남았을까
돌아보면 후회와 어리석음만이
그림자처럼 남아 있는 걸.
또 한해가 가고
나는
무엇을 보내고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12월
_ 박재삼 _
욕심을 털어 버리고
사는 친구가 내 주위엔
그래도 1할은 된다고 생각할 때,
옷벗고 눈에 젖는 나무여!
네 뜻을 알겠다
포근한 12월을
친구여! 어디서나 당하는 그
추위보다 더한 손해를
너는 저 설목雪木처럼 견디고
그리고 이불을 덮은 심사로
네 자리를 덥히며 살거라
12월의 노래
_ 박종학, 1963- _
마침내 달랑 한 장
그렇지만 마지막은 싫어요
처음 시작이라 불러 주세요
차가운 손길
하지만 마음만은 아니랍니다
누구보다 따뜻한 가슴입니다
나를 보면 행복해 합니다
나를 보면 추억으로 여깁니다
나를 보면 삶을 느낍니다
나는 행복입니다
나는 추억입니다
그래서 나는 12월입니다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소년 소녀 가장과 함께
외로운 무의탁 노인들과 함께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한해를 뒤돌아보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기쁨의 합창을 하고 싶습니다
나는 마지막이 아닙니다
나는 희망이고
기쁨이고
사랑이고 싶습니다
나는 12월입니다
12월
- 반기룡 -
한 해를 조용히 접을 준비를 하며
달력 한 장이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며칠 후면 세상 밖으로
사라질 운명이기에 더욱 게슴츠레하고
홀아비처럼 쓸쓸히 보인다
다사다난이란 단어를 꼬깃꼬깃
가슴속에 접어놓고
아수라장 같은
별종들의 모습을 목격도 하고
작고 굵은 사건 사고의 연속을
앵글에 잡아두기도 하며
허기처럼 길고 소가죽처럼 질긴
시간을 잘 견디어 왔다
애환이 많은 시간일수록
보내기가 서운한 것일까
아니면 익숙했던 환경을
쉬이 버리기가 아쉬운 것일까
파르르 떨고 있는 우수에 찬 달력 한 장
거미처럼 벽에 바짝 달라붙은 채
병술년에서 정해년으로
바통 넘겨 줄 준비하는 12월 초하루
12월의 시
- 방재승 -
12월엔 아랫목 따뜻하게 지피는
산골짜기 산막으로 가고싶다.
아궁이 앞에 앉아
장작 한토막 한토막을 지나친 세월처럼
불길속에 집어 던지면
훨훨 타오르다가 숯이 되어
이글거리는 불꽃 속에서
그리운 모습들이
하나 둘씩 떠오른다
날아가는 새들도 말 없이 서 있는 나무들도
12월이, 1월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는 없겠지만
깊어 가기만 하는 어둔 밤길 따라
사그러지는 숯불 속에 묻어 두었던
밤톨처럼
살며 느꼈던 정들을 한겹 두겹 벗겨 내며
참 인정어린 사람들도
많았던 한 해였었다고
생각날 때 쯤이면
12월은 그렇게
잿불속에 묻어 버려진다
12월 어느오후
- 손석철 -
덜렁 달력 한 장
달랑 까치밥 하나
펄렁 상수리 낙엽 한 잎
썰렁 저녁 찬 바람
뭉클 저미는 그리움
12월 저녁의 편지
_ 안도현 _
12월 저녁에는
마른 콩대궁을 만지자
콩알이 머물다 떠난 자리 잊지 않으려고
콩깍지는 콩알의 크기만한 방을 서넛 청소해두었구나
여기다 무엇을 더 채우겠느냐
12월 저녁에는
콩깍지만 남아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늙은 어머니의 손목뼈 같은 콩대궁을 만지자
12월의 공허
_ 오경택 _
남은 달력 한 장
짐짓 무엇으로 살아왔냐고
되물어 보지만
돌아보는 시간엔
숙맥 같은 그림자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고
비워야 채워진다는 진실을
알고도 못함인지
모르고 못함인지
끝끝내 비워내지 못한 아둔함으로
채우려는 욕심만 열 보따리 움켜쥡니다
내 안에 웅크린 욕망의 응어리는
계란 노른자위처럼 선명하고
뭉개도 뭉그러지지 않을
묵은 상념의 찌꺼기 아롱지는
12월의 공허
작년 같은 올 한 해가
죽음보다 진한 공허로
벗겨진 이마 위를 지나갑니다.
12월
_ 오세영 _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대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송년에 즈음하면
- 유안진 -
송년에 즈음하면
도리 없이 인생이 느껴질 뿐입니다
지나온 일 년이 한 생애나 같아지고
울고 웃던 모두가
인생! 한마디로 느낌표일 뿐입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자꾸 작아질 뿐입니다
눈 감기고 귀 닫히고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어
모퉁이길 막돌맹이보다
초라한 본래의 내가 되고 맙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신이 느껴집니다
가장 초라해서 가장 고독한 가슴에는
마지막 낙조같이 출렁이는 감동으로
거룩하신 신의 이름이 절로 담겨집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갑자기 철이 들어 버립니다
일년치의 나이를 한꺼번에 다 먹어져
말소리는 나직나직 발걸음은 조심조심
저절로 철이 들어 늙을 수밖에 없습니다.
송년의 시
_ 윤보영 _
이제 그만 훌훌 털고 보내주어야 하지만
마지막 남은 하루를 매만지며
안타까운 기억 속에서 서성이고 있다.
징검 다리 아래 물처럼
세우러은 태연하게 지나가는데
시간을 부정한 채 지난날만 되돌아보는 아쉬움
내일을 위해 모여든 어둠이 걷히고
아픔과 기쁨으로 수놓인 창살에 햇빛이 들면
사람들은 덕담을 전하면서 또 한 해를 열겠지
새해에는 멀어졌던 사람들을 다시 찾고
낯설게 다가서는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올해보다 더 부드러운 삶을 살아야 겠다
산을 옮기고 강을 막지는 못하지만
하늘의 별을 보고 가슴 여는
아름다운 감정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송년산행
- 윤인구
주인 있는 개한테
물릴 뻔했다
겨울비 몇 줄기 몸속까지 파고들고
스산한 바람소리 성가시게 뒤따라왔다
낙엽 밟는 소리가 너는 좋으냐
낙엽은 온몸이 으스러지게
아파 울 것이다
산꼭대기에서 한 사내가 소리를 질러댔다
야호 야호 돌아와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 깊은 계곡으로 떨어져 죽었다
한 해 농사 다 털어주고
갈 데 없는 까치집 한 채 끌어안고 서 있는
절 집 은행나무 한 그루
산아래 마을에선
아무 일도 없는 것 같다
젖은 낙엽 타듯 한 해를 보냈다
송년가
- 이외수 -
떠도는 그대 영혼 더욱
쓸쓸하라고
눈이 내린다
닫혀 있는 거리
아직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고
종말처럼 날이 저문다
가난한 날에는
그리움도 죄가 되나니
그대 더욱 목메이라고
길이 막힌다
흑백 사진처럼 정지해 있는 시간
누군가 흐느끼고 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폭설 속에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
이 한 해의 마지막 언덕길
지워지고 있다
송년가
- 이외수 -
우리 사는 세상 날이 저물어
청산 그림자 섬돌까지 덮었네
오늘 서산으로 기울어진 천년 세월
내일 밝산머리 해 하나로 떠오르나니
그대 가는 먼 길 흩날리는 북풍한설
시 한 줄로 아직은 잠재울 수 없어도
내가 사는 세속마을
그대와 멀다고는 생각지 마오
연말결산(年末決算)
- 이외수 -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지나간 날들은 망실되고
사랑한 증거도 남지 않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자폐증에 빠져 있는 겨울풍경
속으로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면
시간이 깊어진다
인생은 겨울밤
얼음 밑으로 소리 죽여
흐르는
강물이다
겨울 저녁ㅡ歲暮送年詩
- 이정우 -
누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 들녘 끝으로
아주 조그맣게 사라져 갑니다.
이 겨울 저녁엔
먼 옛날처럼 진눈깨비가 내리고,
저희도 저 눈발 속에 저물어
한 세월을 보냅니다.
누군가 이 세상의 사랑도 다 잊고
저 들녘 끝으로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12월의 시
- 이해인 -
또 한해가 가 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 하기 보다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을
고마워 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 주십시오
한 해 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 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 카드 한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지요
해야 할 일들 곧 잘 미루고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나에게 마음 닫아 걸었던
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 합니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 밖에 없는 것처럼
시간을 아껴 쓰고
모든 이를 용서 하면
그것 자체가 행복일텐데
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섞음을 용서 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 할것
너무 많아 멀미 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 주십시오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 내고
새 달력을 준비 하며
조용히 말 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 날이여'
나를 키우는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 ~ !!
시간의 선물
- 이해인 -
내가 살아 있기에
새롭게 만나는 시간의 얼굴
오늘도 나와 함께 일어나
초록빛 새 옷을 입고 활짝 웃고 있네요.
하루를 시작하며
세수하는 나의 얼굴 위에도
아침 인사를 나누는 식구들의 목소리에도
길을 나서는 나의 신발 위에도
시간은 가만히 앉아
어서 사랑하라고
나를 재촉하네요.
살아서 나를 따라오는 시간들이
이렇게 가슴 뛰는 선물임을 몰랐네요.
12월
- 임영조 -
올 데까지 왔구나
막다른 골목
피곤한 사나이가 홀로 서 있다
훤칠한 키에 창백한 얼굴
이따금 무엇엔가 쫓기듯
시계를 자주 보는 사나이
외투깃을 세우며 서성거린다
꽁꽁 얼어붙은 천지엔
하얀 자막처럼 눈이 내리고
허둥지둥 막을 내린 드라마
올해도 나는 단역이었지
뼈빠지게 일하고 세금 잘 내는
뒤돌아보지 말자
더러는 잊고
더러는 여기까지 함께 온
사랑이며 증오는
이쯤에서 매듭을 짓자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입김을 불며 얼룩을 닦듯
온갖 애증을 지우고 가자
이 춥고 긴 여백 위에
이만 총총 마침표 찍고.
송년회
- 임영준 -
대화가 겹치는 순간
모두 입을 닫았다
누구도 나서지 않는데
눈치 없는 내가 한마디 했다
‘왜들 그렇게 말이 없냐?’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2003년은 그렇게 끝이 났다.
12월
_ 장석주 _
해진 뒤 너른 벌판,
하늘엔 기러기 몇 점.
처마밑
알록달록한 거미에게
먼 지방에 간 사람의 안부를 묻다.
12월
_ 정연복 _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
뒷맛이 개운해야
참으로 맛있는 음식이다
뒤끝이 깨끗한 만남은
오래오래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두툼했던 달력의
마지막 한 장이 걸려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보석같이 소중히 아끼자
이미 흘러간 시간에
아무런 미련 두지 말고
올해의 깔끔한 마무리에
최선을 다하자.
시작이 반이듯이
끝도 반이다!
행복한 12월
_ 정용철 _
나는 12월입니다.
열한달 뒤에서 머무르다가 앞으로 나오니
친구들은 다 떠나고
나만 홀로 남았네요.
돌아설 수도,
더 갈 곳도 없는 끝자락에서
나는 지금 많이 외롭고 쓸쓸합니다.
하지만 나를 위해 울지 마세요.
나는 지금
나의 외로움으로 희망을 만들고
나의 슬픔으로 기쁨을 만들며
나의 아픔으로
사랑과 평화를 만들고 있으니까요.
이제부터 나를
"행복한 12월"이라 불러 주세요
12월의 詩
_ 정호승 _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다.
코끝 살짝 시릴 만큼 부는 바람과
맑디맑은 파아란 하늘이 아름다워
팔장만 끼고 걸어도 따뜻할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다.
언젠가 읽었던 삼류 소설책 속
주인공들처럼 유치한 사랑을 해도
아름다워 보일 계절이다.
12월이란 참말로 잔인한 달이다
_ 천상병 _
엘리어트란 시인은
4월이 잔인한 달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12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다
생각해보라
12월이 없으면
새해가 없지 않는가
1년을 마감하고
새해가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새 기분으로
맞이하는 것은
새해뿐이기 때문이다
12월은
_ 하영순 _
사랑의 종
시린 가슴 녹여 줄
따뜻한 정이었음 좋겠다.
그늘진 곳에 어둠을 밝혀 주는
등불이었음 좋겠다
딸랑딸랑 소리에
가슴을 열고
시린 손 꼭 잡아주는
따뜻한 손이었음 좋겠다
바람 불어 낙엽은 뒹구는데
당신의 사랑을
기다리는 허전한 가슴.
12월은
_ 하영순 _
해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한 장 남은 달력 속에 만감이 교차한다.
정월 초하룻날 어떤 생각을 했으며 무엇을 설계했을까
지나고 보면 해 놓은 일은
아무것도 없고 누에 뽕잎 갉아먹듯
시간만 축내고 앙상한 줄기만 남았다
죄인이다 시간을 허비한 죄인
얼마나 귀중한 시간이냐
보석에 비하랴
금 쪽에 비하랴
손에든 귀물을 놓쳐 버린 듯
허전한 마음
되돌이로 돌아올 수 없는
강물처럼
흘러버린 시간들이 가시 되어 늑골 밑을 찌른다.
천년 바위처럼 세월에 이끼 옷이나 입히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문틈으로 찾아드는 바람이 차다
서럽다!
서럽다 못해 쓰리다
어제란 명제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가?
12월
_ 황지우 _
12월의 저녁 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가산 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생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12월의 거리는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고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간다
12월의 숲
_ 황지우 _
눈맞은 겨울 나무 숲에 가보았다
더 들어오지 말라는 듯
벗은 몸들이 즐비해 있었다
한 목숨들로 連帶해 있었다
눈 맞는 겨울나무 숲은
木炭畵 가루 희뿌연 겨울나무 숲은
聖者의 길을 잠시 보여주며
이 길은 없는 길이라고
사랑은 이렇게 대책 없는 것이라고
다만 서로 버티는 것이라고 말하듯
형식적 경계가 안 보이게 눈 내리고
겨울 나무 숲은 내가 돌아갈 길을
온통 감추어 버리고
인근 산의 積雪量을 엿보는 겨울나무 숲
나는 내내, 어떤 전달이 오기를 기다렸다
12월의 아침 시간
_ 헤세 _
비는 엷게 베일 드리우고, 굼뜬 눈송이들이
잿빛 베일에 섞여 짜여
위쪽 가지와 철조망에 드리워져 있다
아래쪽 창유리에 오그리고 앉아 있다
서늘한 물기 속에서 녹아 유영하며
축축한 땅 냄새에
뭔가 엷은 것, 아무 것도 아닌 것 어렴풋한 것을 준다
또 물방울들의 졸졸거림에 머뭇거림의
몸짓을 주고, 대낮의 빛에게는
마음 상하게 하는 언짢은 창백함을 준다
아침에 눈먼 창유리들의 열 가운데서
장밋빛으로 따뜻한 흐린 광채가 어렴풋이 밝아 온다
외롭게 아직 창문 하나 어둠의 조명을 받아
간호원 하나 온다 그녀는 눈雪으로
눈眼을 축인다, 한동안
서서 응시한다 방으로 되돌아간다
촛불이 꺼진다 잿빛의
빛바랜 날 속에서 장벽이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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