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시비, 문문으로 가려낸다.
요즘 논문 표절이 세간을 뒤흔들고 있다. 석사든 박사든 학위를 획득하면 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그것이 시간강사든 초빙강사든 특임강사든 일단 강단에 섰다는 빌미로 경력사항에 ‘교수’를 적시할 수 있다는 기대에 차 너도나도 학위획득에 열을 쏟고 있다. 사회문화적으로는 좋은 현상이다.
그런데 가방 줄이 짧아 학위논문을 작성할 실력도 없고 더구나 논문심사를 통과할 가망도 없으니 이제껏 살아온 편법대로 꼼수를 부릴 수밖에 없어서 표절시비에 휘말리는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그럴듯한 제목의 논문을 통째로 베껴 제출했더니‘도용’이라며 재깍 짚어낸다.
꾀를 내어 이 사람 저 사람의 논문을 짜깁기해 뒤섞었다. 그런데도 재깍 알아채고 표절이란다. 그럭저럭 논문심사를 통과해 의젓한 학위소지자 행세를 해왔는데 뒤늦게 표절검색 전문사이트에 걸려 들통나버리기도 한다. 한사코 아니라며 손사래를 쳐보지만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최근엔 각 대학마다 표절검색프로그램을 장치해 상당한 효과를 거둔다지만 사람의 지적인 행동을 전적으로 기계적 판단에 맡기는 것은 사실 불안하다. 또 논문제출자가 기술적 오류였다는 등 해괴한 말로 대들면 대처하기가 난감해진다.
그러나 문문을 알면 표절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그처럼 마법을 가진 문문이 있다니 도대체 그게 무엇이냐며 궁금해 할 것이다. 사람마다 각각 다른 지문(指紋)과 성문(聲紋)을 가지고 있듯이 글도 쓴 사람에 따라 문문(文紋)이 각각 다르다. 문문은 글 쓴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준다. 다만 어문에 둔한 사람은 명명백백한 사실에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한계성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쓴 글, 제목도 내용도 생각나지 않는 글이지만 다시 읽어볼 때 금방 자기의 글인 것을 알아챈다. 문문은 지문이나 성문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남의 글을 짜깁기해 꾸며 넣어도 본 바탕의 자기 글이 아닌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남의 글 따오기’의 표시 없이(인용여부를 표시하지 않는다는 뜻) 슬그머니 남의 글 일부를 베껴 넣으면 문문의 다름을 통해 드러난다. 흔히 문장은 낱말의 나열일 뿐인데 그것으로 어떻게 개개인의 글 쓰는 특성을 파악하느냐고 의구심을 자아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예를 들어 보자.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왔는데 관람소감을 물었더니 “아주 신기한 것들이 많아서 재미있었고요 선조들의 의식수준과 사고의 범위를 엿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라고 대답했다면 이것은 본인의 말이 아니고 누군가 훈수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의식수준’은 그렇다 치고, ‘사고’는 그렇다 치고 ‘사고의 범위’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초딩의 언어구사력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밖에 본인의 언어구사 능력이나 방법과는 전혀 또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갑자기 등장했다면 틀림없는 표절이다.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한다든지, 이름씨 끝마다 ‘들’이라는 복수형 표기를 한다든지, 유행에 민감한 체 하느라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하나’,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등의 외국어 식 표현을 쓰는데 앞뒤의 문장과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그것은 표절이다.
더 쉽게 들통 나는 경우도 있다. 접속사의 사용행태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많이 쓰는 접속사는 ‘그러나’와 ‘또한’이다. 사실 좋은 글에서는 접속사가 필요치 않다. 앞 문장에서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뒤 문장으로 넘어가려니까 소위 뒤가 꿇려 접속사를 쓰는 것이다. 접속사가 단절사 역할을 하는 줄 모르고 습관적으로 사용하다보니 표절이 들통 난다.
글 쓰는 사람마다 선호하는 형용사가 다른 점을 유의하는 것도 표절을 가려내는 무기다. ‘너무나’를 부정적인 의미든 긍정적인 의미든 너무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주제의 애매함’ 등 형용사의 명사화를 즐겨 쓰는 사람도 있다. 또 주어인 명사 앞에 반드시 형용사를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다.
그밖에 전체 문장의 운율을 살펴보는 것도 표절 가려내기의 한 방법이다. 문장의 운율은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지역 간 차이도 뚜렷하다. 어떤 사람은 문장에 운율이 적용된 것조차 모른다.
사람마다 다른 문문을 파악하는 것은 필체를 감정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모 대학의 영문학 교수 말처럼 “쓰여지면 글”이고 “글에 좋은 글, 잘 쓴 글이 따로 없다.”고 억지를 쓰면 할 말이 없다. 글에 무슨 운율이 있느냐, 글에 무슨 독특한 문양이 있느냐 라고 나오면 황당할 뿐이다.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대필이나 표절로 학위를 받아 교수라는 호칭을 즐기고 있음에 틀림없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