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과 강북을 잇는 반포대교가 보인다.
서빙고 나루터는 한양과 삼남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던 나루터이다.
또한 강변에서 잠실리로 건너가려면 서빙고 나루터를 이용해야 했다.
조선시대와 6.25 전쟁 때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다. 이 나루터 때문에 ‘나루터길’ 이라는 도로명이 생겼다.
서빙고 나루터가 있던 자리에는 현재 반포대교가 놓여져 있다.
서빙고 나루터는 사람들과 물품들을 한강을 통해 옮기는 교통로의 역할을 했다.
그로 인해 나루터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과 물품들이 많았다.
서빙고 나루터가 있던 곳은 용산구 서빙고동의 도선장이다.
주변에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이곳에 남한강의 세곡선이 정박하기도 했으며
조선 후기에 한강 나루에서 사고가 많이 일어나자 서빙고 나루로 옮기자는 얘기도 있었다.
반포대교 북단 작은 가로공원에 서빙고나루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서빙고나루터
이곳 한강가는 서울과 삼남지방을 잇던 나루터"
서빙고에서 반포로 건너던 반포대교 밑에 서빙고 나루터가 있었다.
이곳 나루터는 6,25전쟁 때만 하더라도 서울 시민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반포를 통해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에 전알(展謁)하려고 어가(御駕)가 서빙고 나룻가에 이르렀는데,
경기 관찰사 홍수보(洪秀輔)가 아뢰기를,
“지난밤 2경(更)에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 선창(船艙)의 홍살문 안팎이 거의 정강이에 찰 정도로 물이 찼으므로
지금 지방관들을 독려해 선창을 축조(築造)하고 있습니다.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태영(李泰永)과
양주 목사(楊州牧使) 박천행(朴天行) 등을 아울러 파직하소서.”
하니, 내각 제조 김종수(金鍾秀)와 선공감 제조 서유린(徐有隣) 등에게 명하여 가서 물의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이들이 돌아와서, 물이 불어나서 건너기 어렵다고 아뢰니, 좌의정 이성원(李性源) 등이 아뢰기를,
“강물은 가없이 아득하고 해는 벌써 석양으로 향하고 있는데 선창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으니,
강을 건널 가망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어떤 이는 회가(回駕)하기를 청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잠시 효창묘(孝昌墓)의 재전(齋殿)으로
거둥하여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리자고 청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해는 석양이 되려 하는데 야차(野次)에 어가(御駕)를 모셔 놓고서 시끄럽게 떠들어대기만 하고
팔장을 낀 채 앉아서 구경만 하니,
이것이 어찌 나라의 체통이며 신하의 직분이겠습니까.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로서 한 줄기 물에 막혀서
회가(回駕)하자느니 주가(駐駕)하자느니 하는 의논이 있기까지 하니, 어찌 신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효묘(孝廟)께서 거둥하실 때 다리가 불어난 물로 파괴되자, 그 당시 경기 감사가 특별히 사형(死刑)은 면했으나,
그래도 귀양을 갔습니다. 이번에도 한 사람의 목을 베어 기율(紀律)을 엄하게 한 뒤에야
조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고, 제공에게 명하여 양국(兩局)의 순뇌(巡牢)와 경기 감사·호조 판서 및 양국의 장신(將臣)를 거느리고서
선창 축조를 감독하게 하였다.
또 경기 관찰사 홍수보를 파직하고서 조정진(趙鼎鎭)으로 대신하게 하고, 이기(李夔)를 광주 부윤으로,
임시철(林蓍喆)을 양주 목사로 제수하여 함께 공사를 감독하게 하고, 전 경기 감사·광주 부윤·양주 목사는
백의(白衣)로 공사를 감독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과천(果川)·광주의 주민들과 좌우에서 구경하던 사람들과 어가를 수행하던 군병(軍兵)들이
조정의 명령이 없었는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앞다투어 공사로 달려가서, 남은 배들을 선창의 물이 솟는 곳으로
끌어다가 차곡차곡 붙여 놓고 배안의 물건들을 배 위에 빽빽히 펴니,
신시(申時)가 되기 전에 공사가 끝났다. 이에 어가가 선창에 이르러 말을 타고 편안히 건너,
정릉으로 가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이어 선릉으로 가서 전배(展拜)하였다.
두 능의 능관(陵官)을 승서(陞敍)하라고 명하였다.
재실로 돌아와 묵었다.
빛바랜 사진이 그 옛날 한강을 건너 다녔던 모습을 전하고 있다.
당시 유일한 교통수단은 나룻배이었다. 이 나룻배로 강남과 강북을 건너 다닌 것이다.
서빙고나루터 근처 공사장 가림막에 옛날 한강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 있어 옮겼다.
서빙고의 서쪽에는 ‘서빙고들’, 한강변에는 ‘서빙고 백사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서빙고와 동빙고 사이에 있었던 골짜기를 ‘서울 골짜기’라고 불렀으며
이 골짜기 길 옆에는 열녀문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찾아 볼 수 없다. ‘개막다리’라는 다리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옛날 나라에 바치던 기와막이 있었던 근처라는 데서 연유된 명칭이다.
또한 동빙고동에는 ‘밀안물’, '복수물'이라는 대단히 맛있는 우물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서빙고역은 경원선이 부설되면서 생겼다. 이제는 전철역이 되었다.
그 옆에는 국내 최초의 이중다리인 반포대교와 잠수교
동작대교가 생겨 강남과의 교통로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