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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의 섭정
카트린은 오로지 프랑스 왕권 지키기에만 골몰했다. 첫째아들 프랑수아 2세(1559, 재위기간 1년), 둘째아들 샤를 9세(재위 1560~74), 셋째아들 앙리 3세(재위 1574~89)의 시대를 거칠 그 당시 프랑스는 신·구교도 종교전쟁으로 나라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그녀에겐 사랑하는 아들들이 이끌어가는 프랑스 왕권을 지키는 일이 더 절박했던 것이다. 그 한 수단으로 자녀들을 용의주도하게 활용했다. 말하자면 이 나라 저 나라와 동맹을 맺는 정략결혼을 시켰다. 그녀자신이 삼촌의 욕심에 의해 정략결혼을 하게 되어 프랑스 궁정으로 와서 보낸 암울한 세월을 그새 잊은 걸까?
실제로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첫딸인 엘리자베트를 결혼시켰고 장남인 프랑수아 2세는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와 혼인 했으며 둘째아들 샤를 9세 또한, 당시 신교도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녀의 아들보다 두 배나 나이가 많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시키려고 추진했으나 실패하자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와 혼인시켰다.
그리고 ‘마고’로 유명한 바람기 많은 마르그리트와 훗날 ‘앙리 4세’가 되는 앙리 드 나바르와의 결혼식을 성사시켰다. 이들의 결혼식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있었는데 신랑인 칼뱅 개신교도인 ‘앙리 드 나바르’가 성당 안에 들어서길 꺼려 식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신부를 기다렸다. 이 광경을 본 구교도들이 합세하여 결국 그들의 첫날밤에 지방에서 온 개신교도들까지 대학살한 끔찍한 바르톨로뮤의 대학살 사건을 일으켜 그 배후에 카트린을 지목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영국과 평화협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앙리 2세는 물론, 이후 열여섯 살인 막내아들 알랑송을 40대로 접어드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을 넣기까지 했다.
카트린은 그렇게 은근히 메디치 가문을 무시하며 왕권에 도전하는 기즈 가문과 첨예한 대립을 하다 그녀의 마지막 아들 앙리 3세마저 암살당하지만 딸 마르그리트와 혼인시킨 사위를 앙리 4세로 즉위시키면서 나름대로 프랑스 왕권의 기반을 닦게 된다.
모정의 세월
그녀의 이 집요한 모성의 결과를 어찌 보아야 하는가. 애당초 자신이 처한 음모 따위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왕권을 지키지 않으면 당장 자식들이 죽음으로 내몰릴 판인데 그 뉘라서 이를 태연히 관망만 할 손가. 딸 마르그리트와 관련된 추문들, 아들인 앙리 3세의 광기, 막내아들인 알랑송의 반역을 마주치면서도 그들을 위해 수없이 연회를 베풀고 화해의 장을 마련해준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하리라.
그녀는 분명히 왕비였다. 그러나 정부(情夫)를 둔 앙리 2세는 그녀에게 한번도 살갑게 대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도 카트린은 그가 하는 대로 순종하며 그를 깊이 사랑했던 여인이다. 그 시커멓게 타드는 속정을 자식을 쏟으며 더러 달래고 기댔으리라.
그녀에겐 그런 숨죽인 시간도 사치였을까? 또 한번 그녀에게 급작스런 비보가 날아든다. 그녀의 남편 앙리 2세가 마상시합에서 눈이 찔리는 사고로 곧장 죽었다. 남편의 나이 갓 마흔에 어린 자식들을 남기고 떠난 충격으로 그녀는 검은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더 이상 비단 옷을 입지 않았다. ‘검은 왕비’는 그래서 붙여진 것이다. 그래도 세인들은 그녀더러 권력의 화신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추구한 그 권력 너머엔 늘 자식사랑이 있었을 뿐이다.
어쨌든 그녀의 상황은 자꾸만 자식사랑으로 집약이 되지만 모성애와 그녀의 외교정책에서 드러난 태도에서 보듯, 이 문제는 재론의 여지가 분명히 있다. 다만 섭정을 한 그녀가 ‘성 바르톨로뮤 축일 대학살’과 각종 내전의 책임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과거 왕조마다 흔히 벌어지던 일들을 그녀에게 유별나게 적용한 것은 아닌지 되짚어볼 필요는 있으리라. 사뭇, 옛날부터 이어져온 남존여비사상을 그녀에게 슬쩍 덮어씌운 듯하여 조금 찜찜하긴 하다.
30년 동안 오로지 섭정 황태후로서 아들들의 왕관을 지키고 프랑스 왕권 수호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은 여인으로 봐 줄 순 없었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