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 때인 1999년 7월이었다.
7월의 첫날에 종로에 있는 영어 학원에 등록하기 위해서 갔다.
당시 YBM 시사영어학원에 TIME지 강의를 신청했다.
원래는 TIME를 들으려 간 것이 아니라
대학 동아리 동시통역연구회(SIRC)에서 독해를 위해 공부하던
미국의 시사 주간 잡지 " NEWSWEEK " 를 듣기 위해 학원을 찾았는데 그 과목을 강의하는 곳이 없었다.
TIME강의만 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 당시에는 좀 부담스렵게 느꼈던 TIME 강의를 듣을 수 밖에 없었다.
다니던 대학교에 TIME동아리가 있었다.
NEWSWEEK보다 TIME이 더 어렵다는 것을 선배를 통해 알고 있었다.
당시는 TIME를 공부해보지 않아 TIME이 어떻게 왜 어려운지도 모르고 있던 때였다.
첫 날 수업은 못 들었을 것이다
수업에 늦어서인지, 다음 수업부터 듣자 마음 먹어서인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첫 수업 내용이
우리나라 서해 교전이었던 기억은 난다. (우리나라 기사라 잊어버리지 않는 것 같다.)
송 재원 선생님과 첫 수업
수업을 듣고 난 후 내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SIRC에서 공부하면서도 풀지 못했던 문제들의 원리와 이유를 송 선생님은 알기 쉽게 알려주셨다.
송 선생님은 고려대 다니실 때
독재에 항거하여 손가락을 전달하여 혈서를 쓸 정도로 기백이 대단하셨다.
동아일보 기자 생활을 하실 때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만나
곤란한 질문을 하기도 하셨서 박정희 대통령이 노려보셨다고 할 정도로
70년대 동아일보 기자들이 독재 정권에
항거하다가 해직된 사건들이 있었다
그때 짤리셨다. (나중에 김 대중 정부때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 받으신 것으로 안다.)
이 때 해직 된 많은 분들인 나중에 만드신 언론사가 "한겨례 신문"으로 알고 있다.
그 이후 취직을 하여 해도 정보기관이 뒤에서 방해해서 취직이 쉽지 않았고
선생님의 아는 분이나 친구들도 선생님과 만난다는 이유로
정부기관에 의해 무언에 압력을 많이 받아서 선생님을 멀리 하셨나보다.
그래서 외로움을 잘 견디시는 것 같다.
선생님이 가끔 술 드시고 넋두리 식으로 짧게나마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그 때 번역일로 생계를 유지하신 것으로 안다.
번역상을 탈 정도로 잘 하셨다.
덕분에 아름답게 번역된 타임지 기사를 많이 들었다.
정말로 나에게는 행운 같은 시간들이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공부를 계속하셔 중앙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대단하신 분이다.
송 선생님의 강의는
초보자들도 쉽게 알아듣게 강의하셨다. 그렇다고 쉽게 생각하면 큰일납니다. 타임이 그리 쉬운 잡지가 아니라서
엄청 꼼꼼하게 따지고 정확하셔서 진도를 많이 나가지 못했다.
처음 몇 단락을 수업하신 후 중간 부분 중에서 중요한 단락 몇 개, 마지막 몇 단락을 간추려서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오늘 배울 내용을 한 시간 안에 다 하기에는 부족했다.
나는 밤을 새워가며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공부할 때 어렵던 것을 설명을 듣고 이유를 알게 되니 너무 재미있었다.
열심히 한 만큼 선생님에게 선물을 드렸는데
그 선물은 엄청난 질문이었다.
타임지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은 옥상 열쇠를 가지고 가셔서 담배를 한 대 피우려 가시곤 하셨다.
질문을 하면 선생님은 때론 옥상에 나를 데리고 가셔서 한 손에는 담배를 드시고 질문에 대답을 해주셨다.
그런데 내 질문에 답하다 보면 담배 필 시간이 없어 다음 수업 시간에 들어가기 전에 몇 모금을 급하게 빠신 후
다음 수업에 들어가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너무 선생님께 감사했다.
타임지를 듣기 시작한지 9개월 정도 되었을 때
그 때부터 글이 물 흐르듯이 해석을 하면 연결이 되면 무슨 뜻인지 감이 왔다.
정말로 신났다.
사전도 정말로 열심히 찾아보았다.
단어 하나를 사전에서 찾아 볼 때도 읽다가 원하는 뜻이 나왔다고 해서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다 읽었다.
다음에 찾아 볼 때는 더 효율적으로 보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
품사는 빨간색 형관펜으로
노란색 형광펜으로는 일반적인 뜻을
그 밖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파란색 형광색 펜으로
구분하여 칠하였다.
사전도 두 세개는 고장날 정도로 많이 찾아보았다.
이런 나를 선생님은 매우 이뻐하셨다.
선생님은 학생이 한 명만 있어도 수업을 하셨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말하면, 이런 경우 다른 선생들은 다 폐강을 했었다.
나도 승단자들이 한 명만 있어도
승단 심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많이 수련시켰지만 너무 힘들었다.
지금은 나이들어 아예 생각도 안한다.
너무 힘들어서
선생님은 도시락을 집에서 싸 올실 때에는 가끔 나를 먹이면서 가르쳤고
돈이 없는 나에게 나중에 돈을 내도 좋으니, 자신의 문법과 영문독해 강의인 "길라 잡이"강의를 듣게 해 주셨다.
(선생님은 학원에 책 잡히실 일은 안하셨다. 수업료를 내지 않고 자신의 수업를 듣게 한 것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가끔 오전과 낮 수업을 다 마치시고 저녁 강의가 있을 때까지 공강 시간에는
술집에 가서 술도 사 주시면 서로의 정을 나누었다.
여조카가 애기였을 때
내 타임 잡지를 보고 찍은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나를 조용히 불러 선비는 책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면 야단치셨다
때론 옷도 센스있게 입고 다니라도 야단 겸 충고도 해 주셨다.
꼼꼼히 따져서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던 나에게
선생님은 행운과 같은 존재셨다.
만 3년을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을 때
선생님께 드린 말은 "선생님 언어의 구조는 간단히 한 줄로 요약하면
꾸며주고 꿈임을 받고데요"
선생님은 그 날 그 말을 듣고 너무 기뼈하셨다.
"제대로 가르치고 제대로 배우고"
선생님과 나는 이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