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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의 몸
우리가 열사의 산에 오르는 것은
열사의 몸을 섬기기 위함이다
열사는 몸으로 살았다
가치가 자신의 날개를 달고 이탈하면
동냥 밥그릇이 되었다가
비싼 넥타이핀이 되었다가
당신의 몸은 조화처럼 늙어갈 뿐
누구는 엿가락처럼 늘려 이를 가치라 하고
누구는 돌덩이처럼 뭉쳐 이를 가치라 한다
이미 몸을 이탈한 가치는 유령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머리 위를 떠돌며
음식을 씹는 이빨과 혀로
나는 가치다 .나는 가치이므로 가치다
라고 외친다
가치란 원래 몸에 담겨 있었으며
그럴 때만 가치이다.
열사는 몸이다
고난을 당한 건 몸이다
태어난 만큼이나 강한 물음을 가진 몸
열사는 오직 몸으로 그 토대를 삼았다
다시 우리는 열사의 몸을 보기 위해 산에 오른다
혁명
1
마음은 깊은 곳에 있었다
커다란 몸부림과 소용돌이로
가끔씩 심연의 본원적 용트림으로
바닥의 하염없는 격정과 분노가
가끔씩 수면의 회오리로
어릴 적 마음은 파도치는 곳이라고 알았다
세파를 겪고서야 겨우 그건 표층일 뿐
원래 마음은 하나였는데 깊일 알 수 없었다
어릴 적 의아심을 가지고
혁명을 바라보던 그 때는
태양의 속삭임처럼 그늘이 없었다
무엇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
모두가 원래 자유인 그 자유였다가
허위이면서 고문이었다가
살아본 세상이 바꿔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간절함이었다
2
세상살이 물 흐르듯 지나지 못하고
다만 이런 세상에 혁명이라는 말에 현혹된
말도 안 되는 꿈을 단번에 버리고 싶은
부끄럼 같은 것이 오히려
불안하다
밥 잘 먹고
커필 마시며
문학과 혁명을 공부하면서
잊어버리고 잊지 않으려 하는 맘이
서로 충돌하여
나는 내가 사라지게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수많은 생각과 생각을 잇는 다리를
피난민처럼 건너고 있다
다리를 건너가면 무엇이 또 있을까
다리를 건너갈 수는 있을까
다르다 다 다르다
너무 달라서 사람의 눈을 쳐다볼 수가 없다
멀리서 다르고
가까이서 다르고
봄이 와도 내일을 알 수 없다
3
국가와 혁명의 원죄를 대속한,
아이들이 사라진 바다
평화롭기조차 하다
유혹
당신은 날 소년처럼 유혹했다
난 당신을 소녀처럼 유혹했다
우리의 공통점은 맹목성,
순수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어떤 시간과 공간 좌표에 있더라도
멀리서 겨우 눈짓만 하더라도
당신을 유혹하는 나를 기억하며
나를 유혹하는 당신을 기대한다
2015년 7월31일
바로 이 시점에도
환영
설날 전야에 종로를 걷는다
그 옛날,해방을 꿈꾸었던 거리
젊었던 골목길 그 날들,
칙칙한 포도에 꽃비가 나렸던,
내리고 날며 군무하며,일시 중력이 사라진 듯
비장과 분개,환희와 해방은 대립되지 않고
주검은 삶의 옆에서 더욱 빛났던
행인은 이웃으로 이웃은 친구로
어깨동무한 오른손에는 옆사람의 심장소리가 묻어
끝끝내 지워지지 않았던
슬픔과 기쁨,삶과 죽음,내 것과 네 것,빛과 그림자
도대체 구분이 없었던
그들의 한과 희망으로 행진했을 이 거리를!
환영들은,
거리를 걷는 젊은이들의 투명한 틈 사이로
마치 연기처럼 신속하게 물민다
아-그 뒤에도 겨우 몇 년의 간격으로 되풀이된
저항의 함성이 수명 긴 건물의 벽 틈에 고스란하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더욱 깊이 지르고,
동공을 흐리며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에서 미래를 그린다
확인하기 어려운 어렴풋함
새것이 다시 낡아간다
(새로움만 사람들의 감수성을 울리고
낡은 틀의 사람들 오히려 방해꾼이다)
‘모든 권력은 프롤레탈리아에게’ 라는 슬로건이 선명하다
다시 전율이 밀려오고
내일 뜨는 해가 지지 않으리라 믿는다
실패의 절망을 머금으면서도 해방에 겨워한다
환희의 뒤를 이을 처참이 어른거린다
어쩌면 우리 생에 다시 닥칠 낯선 장면에서
욕동이 춤을 출 새로움이
우리 자신의 습관을 깨트릴 수 있을까
혁명인들 그러할 수 있을까
1) 68혁명 당시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구호
2) 물에서 미역을 감으며 노는 아이
대가리 1
국가는 계산적이었다
냉정하게 분류하고 머리 숫자를 중요시했다
명단에 오른 자와 체포된 자
체포된 자와 도라꾸에 실린 자
골에 도착한 자와 구덩이에 엎드린 자
사살된 자와 사진에 찍혀 미군 보고서에 첨부된 자
<하나 예외, 함께 사살한 젖먹이 아이와 미취학 연령대 소녀>
이들은 오직 대가리 숫자였다
그가 3대 독자이든
그녀가 만삭이든
내일 혼례식을 앞둔 약혼녀이든
억울하게 명단에 오른 자이던
그가 독립운동을 한 자이든 애국자이든
그를 죽여 되레 전쟁에 패배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로지 명단에 있고 숫자만 맞으면
그 자는 사살되고
생명은 추상 되어 대가리 숫자가 되어
그 골짝 우렁찬 살생의 함성 울릴 때
나무와 숲의 푸른 눈물에
짝짓기에 겨운 여름 귀뚜리조차 감히 울지 못했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도
사람들은 대가리를 갖고 놀았다
대가리는 오직,
1960년
군경에 신병이 인계된 대구형무소 수감자 명단 1402명
구슬치기처럼 숫자로만 의미를 가졌다
여전히
몸이 가진 삼라만상의 가치 중
오로지,대가리 숫자만 취급하는
그 버르장머리를 숭상했다
대가리 2
국가는 계산적이었다
냉정하게 분류하고 머리 숫자를 중요시했다
봄밤을 설치며
여행을 떠난 부푼 아이들이었다
무지개와 같던 꿈의 턱이었던
아침의 문지방을 넘어
이 세상을 다음 세상으로 옮겨놓을 듯
순간 환상의 청룡열차를 타오르다가
급하고 거대한 대가리 바다로 뚝 떨어진,
필연적 악연의 시간이었다
태초의 시간을 빼앗겨
돈의 사슬에 묶인 채
쳇바퀴를 돌던 배 구석구석
화물과 함께 짐짝처럼 가득 채워진 아이들이었다
바다 속 근방에선 무법의 노무라입깃*
누구나 화낼 수 있다는 듯 몰려다니고
나팔수 같은 물새의 주둥이
루루루루 꽃처럼 피는데
멈춘 시간도 나뉜 공간도 없이
배는 기울기 시작했다
,
가만히 있으라 해서
가만히 있은 아이들이었다
어디로 도망칠 수 없어서
살려달라고 문을 두드리던 아이들이었다
별처럼 높은 목청 물을 밀며
손가락뼈가 부러지도록 물 속을 긁었다
하염없이 기다리며
두껍고 차가운 물의 이불을 덮고 잠들거나
눈 뜨고 가라앉은 아이들이었다
대가리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군
계산기를 두드리던 국가는 죽은 뱀처럼 버텼다
살이란 살이 다 녹아버리고 뼈들끼리 산산이 흩어져도
물 속에 갇힌 사람들은 절대 죽을 수 없을 거란 기막힌 사실이`
사람 사는 세상의 진리이고 국가가 절대 모르는 이치라면
유족의 나라 창궐해도
천 번이나 만 번이나 국가는
뒤돌아서서 자기 배를 채울 것이다
대가리 숫자도 얼마 되지 않으니
이제 그만 단식과 삭발을 멈추어라
한 대가리에 이만큼씩 지전을 세어보아라
아직 어린 나이에 비하면
그게 적은 돈이 아니다
*해파리떼
대가리 3
국가에 체포되지 않는 만 열 여덟
아들은 걸어서 철책으로 들어갔다
국가는,
아들들 대가리 위에 얹힌 우주의 덫
하나 들 셋 넷!
받들어 총!
우향앞으로이 가!
군기가 바짝 든 아들은
국가를 받든 총이 되었다
멀리 늦은 진달래
아롱지고 다롱진데
연병장에 이는 먼지를 털며
마른 울음을 울며
아들은 제복을 입은 대가리
명령을 받은 대가리에
군번을 새겼다
나갈 때도 총 돌아올 때도 총
밥 먹을 때도 대가리
자기 전에도 대가리
하나 둘 셋 세이며 일렬로 잠이 든다
자신의 목표를 말하지 못한 채
전쟁의 목표를 외우고 있었다
광장
잃어버린 시간을 찾은 듯 먼지 앉은 한권의 책을 펼친다
생각할게 노을처럼 붉어지고 꼴까닥 해 넘어가 나도 따라 넘어가면
나는야 다시 시작되는 긴긴 까닭을 너와 나의 아기처럼 안고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다
천지에 가득한 슬픔을 지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서의 존재가 있는 곳,
나와
너의 코뮌으로 간다
춘화언니
1.
아무 생각 없이 군림하려는 세계
영문을 알 수도 없는 명령에
복장 터지는 춘화 언니
흙의 질김과 하늘과의 사이에 어떤 목숨의 판화가
쿡 찍힌 듯이 버티며
어제의 숨결 갈아엎을 천지간 낫 한 자루 같은
삼평리 댁 춘화 언니
풍우검객들 모인 강호에 새벽이면
송전탑 정수리쯤을 향해
물구나무 선 人자 모양의 정문일침을 긋는 번개검 춘화 언니
2.
프랑스에서는 농부를 정원사라 불러요
농사를 지으면 보수를 준다지요
까짓것 몇 사람 사는 것에 불과한 마을은 결코 아니죠
사람을 젖 먹이고 키워 도시로 떠나보냈고
공기 오염의 정화가 가동되는
마당과 언덕의 숲속
철탑과 전봇대를 꽂으며 얕잡아 볼 게 아니라
밥술을 퍼 올리는 오래된 지평이
대출을 받지 않고 흉작에 시달리지 않고
도시에 사는 그분들의 아들딸들에게 소외되지 않고
무엇보다 점점 늘어만 가는 폐가와 이농을
우리 전부의 미래로 걱정하면 좋겠어요
국가 葛
기울 때까지 기운,세월 터지고 나서 한 말들은 예외가 없었다
이 빨갱이 같은 년!이라니
아 아 아이들이 사라진 건 국가의 잘못이 정녕 아니다 그 전에도 전에도 사라진 사람들을 국가가 어찌 다 기억할 수 있겠나 갈 수 없는 길과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용병 바리케이드를 칠 수밖에 없겠다 오늘 뜬 해가 지겠느냐 절대 믿음을 더욱 가져다오, 헌법보다 두꺼운 눈꺼풀을 믿어다오 우리는 분단국가이다 '통일'이란 말을 함부로 쓰지 마라
언제까지나 인민들이란 박명薄命인 것이다
남측에 대한 맹세의 거품을 물어다오
사는 건 쉽게 표가 나지 않지만 표가 쉽게 나기도 하는 촛물들이 흘러내리는 근대에서 떠나라
지금은 국가란 화병의 꽃을 꺾을 막바지 시간이 아니다
분노
1.
분노는 사랑의 다른 이름임을
날카로움의 끝에는 영혼이 서려 있음을
숭고함은 외마디 비명 끝에 따라옴을
그리하여,
비명처럼 날카로운 분노의 용광로를 거치지 않고는
결코 삶에 이를 수 없음을
만약 그대가 살아가면서
애초의 숭고함을 잃었다면
거리의 신부를 보라
백발이 성성하고, 눈발이 번뜩이는
그의 외침을 들어라
‘여기 와서 보시오’1)
만약 그대의 힘으로 분노를 키울 수 없다면
거리의 신부의 도록을 보라
‘이 독사의 자식들아’
그래도 그대의 심장이 멎지 않았다면
이제 그대의 열정은 종말을 고한 것이다.
3.
학살의 근현대사를
객관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근현대사를 학살하는 것이다
점잖은 교수님 흉내
모나지 않는 자리매김
분노라는 소요가 빠진
결국 논리에 급급한 그 심포지엄
그대가 만약 근현대사를 알고 싶다면
먼저 그대의 마음에 분노를 키우라
만약 그대의 힘으로 분노를 키울 수 없다면
거리의 신부의 도록을 보라
‘이 독사의 자식들아’
‘이 독사의 자식들아’
승리는 일시적이지만
분노는 영원하다
아, 사랑은 슬프고
분노는 사랑보다 숭고하다
*문정현 신부님의 도록에서
우리를 알고 우리가 아는 사람들에게
1.
1950년 이영근 씨는
청주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1일 3식 완전보장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2.
일 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인은 품삯을 주지 않았다 일 한 사람들은 모두 일당을 받았다 주인은 일꾼들의 일 한 시간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이 너그럽게 대우했다
3.
우리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직접 소를 키워서 나오는 똥과 거름을 균 배양해서 퇴비로 쓰고 우렁이를 넣어서 풀을 잡고 참개구리와 투구새우와 늑대거미를 비롯한 수많은 우군들이 병충해를 제압합니다 우리가 알고,우리를 아는 분들께 파는 쌀이기 때문에 고집 있는 쌀 드시고 건강해지십시오…… 이상 공동체 연리지에서 안내드렸습니다
정치의 계절
보기엔 그렇게 달콤한 막대사탕 같은지
골목 골목을 빱니다
미세한 체취가 흐르고
종일 전대를 찬 흔적들,
그런 것들이 진동하는 시장통 골목
아는 사람만 알듯 모르는 사람인 듯
‘이미 정해진 승리가 있다면 저의 탓입니다’라뇨
어쩌면 장돌뱅이가 알지 못하도록 잠금장치를 해놓은 듯
땅을 기는 네 박자 트럭에
먹은 마음을 싣고서
말단의 인간을 복원하는 역사가 되겠답니다
네거리마다 허공을 향해 배치기하는 현수막들은
남의 집 담장 너머 개 짓는 소리 들리시는지
시간밖에 모르는 것은 식탁만이 아니더군요
심야 선거사무실의
유급선거운동원!
칼춤
갱물 한소끔 칼날에다 흩뿌리고 숫돌 위 아래로 칼끝을 문지르네
무뎌진 칼끝에서 땟물이 찐덕이고
칼 들어 잠시 잠시 그 끝을 비긋이 노려보기도 했을 때
반짝반짝 빛 같은 것이 낮은 허공에 잠시 떴다가 사라지네
새로운 골목 첫 번째 집 첫 번째 딸에겐 화목의 책임이 있었네
기름기와 살생의 식탁에서 상실을 달래는 작심의 작두날에 이르기까지
스스악 마음을 갈며 비장하게 그 끝을 가늠해 왔지만
버릴 수 없는 칼춤,선악과가 자라는 맨 밑은
불화의 그늘에 던져진 하나의 입장이 되었네
저 천변에서 자라 다시 천변으로 돌아왔네
동아줄 같은 손목에 칼 긋지 않고
불화에 서린 평화와 속도의 포즈를 너머
눈을 들어 태양을 응시하듯 정오의 시간에
광장을 지나 더 정교한 광장으로 돌아왔네
대부분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누가 이길 것인가?’라고 여겼지만
칼이 마음을 갈았을 땐,
하여 칼이 없는 것은 마음이 없는 것*이라 여긴
그런 그럴듯한 이유 같은 건 이제 버리겠네
지혜의 골목
도시의 때가 몰린 곳
솟은 빌딩숲에 은폐되어 나름의 긍지를 키운 곳
녹슨 세균류가 담벼락에 이글거리고
아이들이 버린 담배꽁초 이리저리 밟힌다
사람이 골목을 지나면 유난히 살피며
벽을 타고 어두운 담을 훌쩍 넘어버리는,
그는 어느 날 천 원짜리 짜장면집 불빛에 정면으로 노출되었다
까만 몸에 희고 큰 동공,그 두 개로만 구성된 존재
내 몸을 삼켜 자세히 뜯어보고
한 번 더 살피는 그 기묘한 눈초리
고층빌딩들 사이 겨우 걸린 달을 식별해낼 수 있는 이 도시의 유일한 존재
그래서 그 눈은 달을 닮았다
다음 날 폐허의 대문 위에 웅크린 채 정면으로 마주쳤다
같은 고민에 빠진 상대일까 적대감을 뿜어낸다
이 시궁창에서
몸과 뇌의 연장인 눈만을 발달시킨
그 목적이 명확하고 단순한 존재
그런 류의 인간이 지나고 있다고 여긴 것일까
언젠가부터 이 도시 뒷골목
같은 목표를 지닌 존재
이 도시의 어딘가에 비밀의 문이 있고
주문을 읊조리면
진짜 달이 뜨고 세상이 바뀐다는 전설
그 전설에 꽂힌 생명체의 조우
그 적대가 섬뜩하다
지하철에서
한때 난 희망을
인간의 지배를 벗은
깨끗한 죽음 그 후로 읽었다
길을 나설 때마다 어딘가에서 툭 튀어나올
희망이란
새로운 희망이란
세상 가득한 절창처럼
최후의 노예처럼 끝없이 기다리며
정월에도 오뉴월 개처럼 아니 지하철에서조차 침을 흘린다
옆자리 여사는 눈을 내리 깔고 있다
팔짱을 끼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성냥개비 같은 얼굴의 맞은편 사내
상의를 추스르며 不歸의 말을 내뱉는 남편을 외등처럼 올려다보는 저 젊은 만삭
그러나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
창밖을 내다보지 않는 사람들
커튼을 치고 이불 속에 제왕처럼 누워
입 속 제 사탕 한 알 빨아먹듯
액정을 쩌억쩍 긋는 사람들
달면 삼키듯 쓰면 뱉듯
지하인의 목 조르는 듯한 공명을 내며 열리고 닫힐 때마다
막차를 탄 기분이다
이런 사람들,
희망의 정신병자라 생각한
지하를 벗어나지 못한 난장이들은 불가능하게
매일 살아나
새로운 희망 운운을 붙인 채 개꼬리처럼 흔들거리며
출발을 거듭하는 지하철
꽁무니를 보내고
국가가 보낸,
다음 차가 오기를 기다린다
명함 유감
프레스에 눌려 납작하게 엎드린,숫자와 문자들로 구워진 한 개인사는
당신의 그 물갈퀴 같은 손바닥을 타고 내게로 건너오기 전
당신의 가죽비린내 지갑 속에서
얼마나 흔들리고 터지고 싶었나요
당신이 허공으로 내다 걸 깃발
당신이라는 종이폭죽 말이에요
햇살 아래 반짝,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나와 당신의 교류는 순식간에 이번 한번이거나
조롱이거나,서로에게 미쳐버리거나 할 수도 있을텐데
껌 씹는 문장들까지 나서서
어떻게 그렇게 삽시간에 건너왔을라구요
이런 생각,당신의 그 찝찝한 착각 같은 종이인간 말이에요
동성로
은빛 달밤이 아니더라도
탄식의 숨소리 모여드는 곳
동성로에 가면 널 만날 수 있지
누구나 어디서든
우리가 함께 한 실패
동성로에 온다네
저 높은 하늘이라도 보이지 않고
사랑의 예감과 심증의 뽐냄이
구름도 없이 여왕처럼 떠도는 곳
혓바닥 내밀고 웃는 행인
내 것도 아닌 것들의 지천과 외침들
만질 수 없는 그런 것들의 활짝 핌
그러나 기어이 찾아드는 곳
그대여 우리는 여기에 왔었나
은빛 달밤이 아니더라도
하늘로부터 뻥 뚫린
여기에 그대여 왔었나
비가 오고 새가 울고 그리하여 매일매일
더디거나 너무나 빨리 그리하여 한 땀 한 땀
피에 댄 자국으로 명랑한 이별을 짓던
여기서 그대여
우리는
한 삽 한 삽 울음을 떴었나
밥줄
문 밖의 계단이 동동동
깨지 않은 이들의 잠꼬대 앞에
한겨울 새벽 네 시의 밥줄을 잇고 간다
버젓한 가문이었으나 혼인한 지 십년 만에
제 사는 아파트 구멍구멍 우유 배달하는 무명씨의
삶의 자식들과 세상의 불화를 어째요
작은새처럼 파닥거리며
밥줄이 창피한 듯 새벽을 탄다
버릴 수도 없는 부끄럼이 내게도 쌓여 가고
삶은 기다림의 계속이겠지만
쳇바퀴처럼 동동 다녀가는
무명씨의 새벽 네 시는 어김없으니
쌀 안치고 세수하는,
빨간 눈 마음 귀에 새벽달 뜨면
금방 배달된 우유의 뿌옇고 찬 빛깔이
내 몸 구석구석으로 퍼진다
구석구석으로 퍼뜨리는 한 방법으로
잘못을 저지른 연인처럼 나는 시를 쓴다
나의 시는 아직 무명씨의 쳇바퀴를
이름처럼 삶도 그러하리라는
적당히 구체적일뿐인 ‘밥줄’이라 쓴다
세속도시의 즐거움
상복 허리춤에 전대를 차고 곡哭하던 여인은 늦은 밤 손익을 계산해 본다 시체냉동실은 고요하기만 하고 누워있는 알거지의 시체는 세속도시에게 전한다; 끌어 모은 모든 것들과 큰 도적들에게 큰 즐거움 있어라!
시월
감나무의 선량한 잎맥을 따라 초록길 끝에서 ‘노올자’는 신호음
문이 아닌 담 너머로 社會가 불렀다
담쟁이 넝쿨손으로 쉿!구불구불한 사정을 가리고
붉은 시월의 노을을 따라 삼랑진의 강가로 불려 가는데 歷史가 말했다
‘끝나지 않은 시월이 있어’
노을이 구름장으로 쏙 들어간 자리에 나는 앉고 시월은 회색분자 같다고 말한다
경전선 기차가 이따금 새로 포장한 철로 속으로 들어가 후줄근해져 社會로 나간다
준설용 크레인이 강 둔토에 이빨을 꽂는다라고 말한다
산비둘기 구우국 구욱국 끝금을 긋고
장닭과 떼찔레가 복숭아밭까지 크게 한울타리를 치는 놀면서 땅따먹기
회 한 접시를 놓고 수몰 위기의 땅을 구하려 강의 역설은 지치지도 않는다
마루 한 켠에 널린 무말랭이 그물그물하니 친 대발을 뚫고 집으로 호명하는 소리
노을 속 까만 새떼처럼 손톱에 박힐 즈음
사람이 먹기 시작했던 땅에 박은 말뚝은 똥무더기처럼 쓸모없어지고
저녁 내내 얼굴에서 젖가슴까지 나는 빨개졌다
봄날 오후
마트에 가니 정육들은 얼어 있다 봄날 오후였다 필리리
봄내 봄꽃 지고 있는데 정육을 고른다 필리리
존재를 아는데 필요한 것을 주세요,살아온 흉터를 주세요
어떻게 어떤 살육이었을지 알 수 없는 것은 싫어요
얼음 강보의 살코기들은 표정이 없네요 봄날 오후였다
필리리 나는 한 봉지 살코기를 들고 꽃화살 오만상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푸른 도장 멍 때린 얼음짐승을 흔들며 벌써 떨어진 봄꽃을 밟으며
필리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비밀 부인
엄마는 늘 외할아버지의 축첩 얘기를 하셨다
이모와 외삼촌은
외할아버지의 몇 번째인지도 모를 첩의 집으로 가서
밥과 고기를 얻었다
기자 할아버지 인텔리겐차는 사랑과 성역을 얻었겠지
어린 엄마는 엄마의 엄마곁에서 배를 곯으며
세상의 남자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해방전 식민지 시대였다
눈 부시게 미남인 만석군집 아홉 번째 아들
아버지 높은 군인을 만나 엄마는 눈이 멀었다
몇 살이나 나이를 낯추고 춤을 배우며
댄스홀을 다니며 그를 따라다니고
나를 가졌다
나는 우리 엄마가 가장 빛날 때
가장 사랑할 때
아버지와 맘보를 추면서 가진 아이
풍성한 엄마의 첫 젖을 콸콸콸 마시며
여동생 남동생의 젖까지 다 빨아마신 아이
희림 이란 미문의 이름을 얻어
늘 눈빛이 흔들리지 않은 수줍은 아이
어른들 앞에 꿇어앉고 고개를 조아리던
뜨거운 여성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들 앞에서
춤 출 때를 제외하곤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비밀 부인들을 미행했지
아버지를 가두고 아버지를 미워하며
아버지를 끊없이 사랑한 어머니는
아버지를 버렸지 집 밖으로 내 좇았지
나도 아버지를 내 쫒았지
노동하지 않는 아버지
게으른 아버지 너무 잘생긴 아버지
눈물 많은 아버지 어린 왕자 아버지
착한 죄인 아버지
어쩌면 비밀부인이 있는 아버지
나는 노동이 뭔지 모르고
노동하지 않는 아버지 노동하지 않는 어머니
를 알게 되었지
여자 어머니의 지독한 여자를 알게 되었지
여자 어머니의 지독한 모성을 알게 되었지
어머니 아버지와 나는
각각 인간이라는 짐승이 되어갔지
아버지는 귀족으로 사시다가
귀족으로 돌아가셨지
세상의 때를 묻히지 않고
지상에 발 한 발 걸치시고
쓸쓸히 내 인생의 폭풍이 되셨지
지울 수 없는 남자가 되셨지
노동하지 않는 남자가 되셨지
그는 비밀부인은 있었을까
아직도 엄마는 그의 비밀부인을 증오하며
나에게도 그런 여자의 피가 흐른다고 말하셨지
난 엄마 여자로부터
남자를 듣고 남자를 알고
남자를 전혀 모른 채
남자의 노동을 그리워하며
사랑을 하고 결혼하고 아들과 딸을 낳았지
살면서 나는 비밀이 좋았지
비밀은 내게 수줍음이고
비밀은 지켜주는 것이고
비밀은 위선이며 위악이며
욕망을 버린 것
비밀을 말하지 않는 동안
비밀은 강처럼 흘러
긴 길이 되어 긴 진실이 되어 긴 말도 없이
속 마음이 되었지
내가 비밀의 세계를 움켜쥐고 있는 동안
나는 비밀이 더 많아지고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은 비밀이 되고
이해 할 수 없는 시가 되었지
나는 또 비밀 없는 자유노동자를 찾아 다녔지
노예노동을 하지 않는 남자
아버지처럼 귀족이 아닌 남자
일이 좋은 남자
일 하면서 즐거워하는 남자
일 하면서 술 마시는 남자
일 하면서 일 자랑하는 남자
일 하면서 사랑하는 남자
일 하면서
비밀 여자를 만들지 않는 남자
일 하면서 끊임없이 일을 찾아다니는 남자
나는 그런 남자가 많은 세상을 꿈 꾸지
나는 그런 여자가 많은 세상을 꿈 꾸지
나는 그런 여자가 되어야 해
나는 그런 남자를 사랑해야 해
나는 비밀여자가 되지 말아야지
그러니 당신,
천리에 있는 당신,
노예노동을 하지 않았을 당신
그런 가난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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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불화의 그늘에 던져진 하나의 입장~
축첩의 묵인이 훈장 같았을 시절의 윗대! 혁명이 간절했던.... 잘 보고 갑니다! 축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