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복음의 기쁨’을 독자들께서 ‘긴장을 풀고’ 직접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번역’의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직접 읽어보시면 ‘긴장을 풀고’라는 사족을 붙인 이유를 바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최고 목자의 공적 문헌이라고 하더라도, 교종(敎從)은 말 그대로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벗’으로서 말입니다.
(여기서 ‘Apostolic Exhortation’을 우리는 ‘교황권고’로 번역하지만, ‘사도로서 하는 권고’ 곧 ‘사도 권고’라 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신약성경의 ‘서간’들은 ‘사도’들(바오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그리스도 공동체에게 한 ‘권고’의 형식이었습니다.
또한 교황(敎皇)이라는 우리말 호칭을 교종(敎宗)을 넘어서 ‘가르침을 좆는 사람’이란 뜻으로 저는 교종(敎從)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교종은 자신의 뜻과 희망을 모든 교우들과 나누고 싶어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당신의 벗으로 ‘대화’와 ‘협력’에 초대하고 싶어 합니다. 개인적으로 서투르게 번역하는 과정에서 필자가 받은 가장 강한 인상은 바로 그 ‘진정성’이었습니다.
이 글은 ‘학술적’이거나 ‘신학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독자들께서는 한국 천주교회의 한 그리스도인 사제가 ‘교회의 사람’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를 듣고 마음에 새기게 된 것들을 정리한 것쯤으로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문헌은 서론과 전체 5장 288항으로 구성되었으며, 전체적으로도, 또 각론에 있어서도 대체로 교종 자신의 믿음, 관찰(문제), 성찰(분석), 적용(행동), 권고하는 구조를 갖습니다.
아마도 ‘대화’와 ‘협력’(사목헌장, 제1부, 제4장(현대 세계 안의 교회의 임무)이라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따르고자 함이라 생각합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들(4개 헌장, 9개 교령, 3개 선언)은 ‘교회 안으로’와 ‘교회 밖으로’의 양방향 성격을 갖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헌장>을 ‘교회 안으로’, <사목헌장>을 ‘교회 밖으로’ 성격의 문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 문헌에서도 적용되는데, 예를 들어 <교회헌장>에서 교회의 본성을 ‘교회 안으로’ 방향으로, 교회의 사명을 ‘교회 밖으로’ 방향의 성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양방향 성격은 <복음의 기쁨>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1장, 2장, 3장이 ‘교회 안으로’ 방향의 성찰이라면, 2장의 일부와 4장(경제와 평화)은 ‘교회 밖으로’ 방향의 성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서 전체로는 서문(1항-18항)이 “여러 해 동안 교회가 걸어갈 길” 곧 ‘복음화’의 길을 제시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제5장에서 그 길을 걷는 교회를 인도하시는 성령과 ‘별’인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며 마무리하는 구조를 갖는다. 그 틀 안에 ‘교회 안’과 ‘교회 밖(세상)을 향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한편 공의회의 정신을 대개 ‘resourcement’(원천으로 돌아가기)와 ‘aggiornamento’(쇄신하고 적응하기)로 봅니다. <복음의 기쁨>도 이를 따릅니다.
곧 ‘복음’이라는 ‘원천’에서 ‘복음화의 사명’이라는 샘을 길어 ‘쇄신과 적응’을 권고합니다.
다음은 미흡하지만 필자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1. <복음의 기쁨>이 지닌 의의는 무엇일까? ‘권고’는 “앞으로 여러 해 동안 교회의 여정에 마련된 새로운 길들을”(1항)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 ‘새로운 길들’은 지금까지의 ‘자기보전’의 길이 아니라, 오늘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길입니다.(27항)
이 복음화는 교회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맡긴 임무 곧 사명입니다. 이 임무 수행에는 시련과 고통이 따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종은 “자기 안위에 매달렸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건전하지 못한(unhealthy) 교회가 되는 것보다는, 거리로 나섰기 때문에 다치고, 상처입고, 더러워진 그런 교회를 더 좋아합니다.”(49항)고 밝힘으로써, 교회의 사명 수행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자기보전’의 길이라는 위험을 경고합니다. 자기보전의 길은 “역사의 진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대신 교회가 썩어가고(stagnate) 있는 데도 바라만 보고 있는 사람이 되는”(129항) 길입니다.
게다가 이 ‘자기보전’의 길은 다음과 같이 ‘비난’ 받을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때때로 정설의 수호자들(정통교리의 수호자들)이 견딜 수 없는 불의한 상황과 그 상황을 지속시키는 정권에 대해 수동적이라거나, 무저항적이라거나, 관대하다거나, 혹은 공범이라는 지탄을 받습니다.”(194항)
<복음의 기쁨>은 ‘복음화’의 참된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복음화’를 우리나라 인구전체 대비 천주교 신자의 비율인 ‘복음화율’ 정도로만 이해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몇 명인가 혹은 몇 명이 증감했는가에 모든 관심과 열정을 기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복음화’라는 질적 개념을 ‘복음화율’이라는 양적 개념으로 환원시킨 셈입니다. 그러는 사이 ‘복음의 가치’를 생활 속에서 실현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졌습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숫자는 폭증했는데, 우리 자신의 삶과 사회는 그만큼 밝아지지 못했습니다. 체격은 커졌는데 체력은 오히려 떨어진 것과 같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성장했지만, 공정한 분배는 이루어지지 않고, 삶은 더 고달프고, 사회의 불균형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기쁨과 희망’ 대신에 ‘슬픔과 고뇌’가 짓누르고 있습니다.
교종은 <복음의 기쁨>을 통해 “생명력과 열정을 갖는 복음화”를, 곧 참된 복음화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로의 전환을 위해 교회의 교회다움을 호소합니다.
특히 우리 교회에는 여전히 생소한 공의회의 <교회헌장>(인류의 빛)을 기초로 삼음으로써, ‘공의회의 정신’(교회의 쇄신과 세상에의 적응-복음화)을 되살리고자 합니다.(17항 참조)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